"누구나 나를 말하지만 정작 내 말에 귀기울인 이는 없었다." - 황진이 -
황진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절세미를 자랑하던 조선 시대의 기녀. 별칭은 연살이 느껴지는 "명월(明月)"이다. 서녀(庶女)로 태어났고, 15세 무렵 동네 총각이 깊은 연정을 누르지 못해 죽자, 영구가 황진이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말이 슬피 울며 나가지 않았다. 황진이가 속적삼으로 관을 덮어주자 말이 움직여 나갔다. 이 일이 있은 후 기생이 되었다는 야담이 전한다.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 활달한 성격, 청아한 소리,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명기로 이름을 날렸다. 화장을 안 하고 머리만 빗을 따름이었으나 광채가 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 송공대부인(宋公大夫人) 회갑연에 참석해 노래를 불러 모든 이의 칭송을 들었고 다른 기생들과 송공 소실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으며, 외국 사신들로부터 천하절색이라는 감탄을 받았다.
성격이 활달해 남자와 같았으며, 협객의 풍을 지녀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을 굴복시켰다. 30년간 벽만 바라보고 수도에 정진하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찾아가 미색으로 시험해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종실(宗室)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보기를 원했으나 황진이는 명사가 아니면 만나주지 않아 친구 이달에게 의논했다. 이달은 "진이의 집을 지나 누(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한 곡을 타면 진이가 곁에 와 앉을 것이다. 그때 본 체 만 체하고 일어나 말을 타고 가면 진이가 따라올 것이나 다리를 지나도록 돌아보지 말라"하고 일렀다. 벽계수는 그의 말대로 한 곡을 타고 다리로 향했다. 황진이가 이때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웨라/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라는 시조를 읊었다. 이것을 들은 벽계수는 다리목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다 말에서 떨어졌다. 황진이는 웃으며 "명사가 아니라 풍류랑(風流郞)이다"라고 하며 돌아가버렸다고 한다.
소세양이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 "나는 30일만 같이 살면 능히 헤어질 수 있으며 추호도 미련을 갖지 않겠다"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황진이와 만나 30일을 살고 이별하는 날 황진이가 작별의 한시 <송별소양곡 送別蘇陽谷>을 지어주자 감동하여 애초의 장담을 꺾고 다시 머물렀다고 한다.
시정의 돈만 아는 사람들이 천금을 가지고 유혹해도 돌아보지 않았으나, 서경덕이 처사(處士)로 학문이 높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시험했으나 그의 높은 인격에 탄복하여 평생 서경덕을 사모했다. 거문고와 술·안주를 가지고 자주 화담정사를 방문해 담론하며 스승으로 섬겼다. 황진이는 평생 화담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매양 말하기를 "지족선사(知足禪師)의 30년 면벽수양을 꺾은 바 있으나, 오직 화담 선생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지만 끝내 관계하지 않았다. 선생이야말로 성인이셨다."라고 했다.
'송도삼절'이란 황진이가 어느 날 화담에게 한 말이다. '선생님, 송도에는 절미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박연폭포와 선생님 그리고 소인입니다'의 대답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도 황진이의 '고매불기'한 풍류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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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설화 - 지족선사, 서경덕, 벽계수
◎ 지족선사
지족 선사는 송도 근교 깊은 산 속 암자에서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수도해온 스님이었다. 송도 사람들은 그를 생불이라고 존경하였다. 그래서 진이는 지족 선사를 택했다.
하얗게 소복한 채 지족선사를 찾아갔다. "뜻하는 바가 있어 불제자가 될까 하여 찾아왔습니다." 자기는 청상과부인데 지족선사 스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슬픈 표정으로 애원하였다.
깊은 산 속 속세와 절연하고 살아온 스님은 난데없는 미녀의 출연에 당황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자신의 수양부족을 탓하며 '나무아미 타불 관세음 보살'을 되뇌이며 열심히 불도만을 닦았다.
풍경소리도 그치고 밤은 깊어갔다.
이젠 할 말이 없었다.
진이의 몸가짐만이 등불 아래서 고요히 흔들릴 뿐이였다.
지족 선사는 자신과 결사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착 달라붙은 비에 젖은 홍시같은 살결을 훔쳐보며 선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요염한 교태 앞에 그만 그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30년 면벽도 하루 아침에 공염불이 된 것이였다.
열반의 세계에 귀의하려던 지족선사는 오욕이 끓는 육체의 야차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목적을 달성한 진이는 암자를 빠져나왔다.
지족선사는 법복도 염주도 버리고 황진이를 찾아 헤매었다.
송도 거리의 반광인, 반걸인이 되고 만 것이였다.
그의 생사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식소록, 조야휘언(識小錄,朝野彙言)에서 황진이가 "30년 면벽의 지족선사를 망치게 한 것도 나 때문이었다"라고 후회하고 있다.
인간의 약점을 찌른 애닯은 일화가 아닐 수 없다.
◎ 서경덕
서경덕은 당시 도학군자로서 학덕과 인격이 널리 알려진 위인이었는데 황진이의 농락에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느날 화담정사에 놀러갔다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황진이가 별안간 복통을 일으켜 신음하기 시작했다.
서경덕은 한 채밖에 없는 이불을 펴주었다.
자기는 늦도록 책을 읽었다.
꾀병을 앓으면서도 연방 서경덕의 통태를 살폈으나 일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눈을 떠보니 서경덕은 웃목에 조그마한 포대기를 얌전히 개켜놓고 단정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어제의 자세 그대로 책을 읽고 있었다.
황진이는 자기의 부질없는 연극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선생님 송도에는 삼절이 있다는데 그것을 아십니까?"
서경덕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첫째는 박연폭포요, 둘째는 선생님이시고 셋째는 소인입니다."
"이 비록 아름다운 선학(善謔)이나 또한 진지이니라."
서경덕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서화담은 성종 20년(1489)에 나서 명종 1년(1546)까지 산 당대의 석학이였다.
그는 벼슬에 나아가지않고 학문과 후학에만 전념하였다.
황진이도 서화담에게 글을 배우러 오는 문하생이었다.
황진이가 오는 날이 뜸해졌다.
밤은 깊고 주위는 적막한데 우수수 낙엽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는가 싶어 영창을 열고 기울여보았으나 주위는 더욱 적막하기만하였다.
다시금 영창을 닫았다. 불을 껐다.
잠은 십리 밖으로 달아나고 정신은 자꾸만 맑아졌다.
기다려도 황진이는 오지 않았다.
서화담은 초연히 앉아 어둠 속에서 이렇게 노래를 읊었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귄가 하노라)
황진이인들 스승의 인자한 모습, 부드러운 음성을 보고 듣고 싶지 않았겠는가?
진이는 문 밖에 와 있었다.
자신의 사무치는 마음을 화담 스승도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이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마음 속 깊이 깔려있던 그 동안의 오열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한참을 추스렸다.
황진이는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내 언제 무신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님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님을 속여 월침삼경에도 올 뜻이 전혀없는가)
하고 탄식하고 있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이렇게도 절절할 수 있을까?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찌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였다.
님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만 님은 올 생각 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님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서경덕의 황진이에 대한 연정과 황진이의 서경덕에 대한 연정은 마음 속에다 깊이 간직해 두었던 것이였다.
잎지는 소리는 서경덕에게는 환청으로 들려왔고, 진이에게는 낸들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였다.
자연의 이치를 서로가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화담의 죽음을 진이는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임의 정이요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 손가 녹수도 청산 못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명월은 자기 자신을 청산에 비기고 서경덕을 녹수에 비겼다.
녹수는 없고 청산만 남은 것이였다.
물 없는 청산이다.
이 무슨 허무한 인생이란 말인가. 이렇게 인생은 허망하기 그지 없다.
꼭이 서화담의 죽음을 한탄하여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청춘 시절에 흠모했던 인물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어 안타까운 심정으로 인생 무상을 노래한 것이리라.
◎ 벽계수
종친 벽계수라는 사람을 유혹하기 위하여 부른 황진이의 시조 한 수가 전해져내려오고 있다.
종친 벽계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한번 황진이를 보면 빠져버리나 나는 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땅히 쫓아버리겠다."
이렇게 호언 장담하고 벽계수는 송도로 내려왔다.
왕가의 귀족답게 벽계수는 의젓하고 냉정했다.
찬바람이 휙 돌고 매정스러우리만큼 까다로왔다.
그는 가을밤 송도를 구경하기 위하여 나귀를 만월대로 몰았다.
황진이의 낭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노래 소리에 뒤를 돌아보다 그만 나귀 등에서 떨어졌다.
황진이는 웃으며 이는 명사가 아니고 한낮 풍류랑이라 하고는 즉시 돌아가버렸다.
벽계수의 양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도라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이 못난 벽계수야, 인생은 한번 가면 그만인데 천하의 명기 명월이가 무르녹아 있으니 어찌하여 나와 즐길 줄 모르고 가려고 하느냐. 함께 쉬어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양반 계급에 대한 지독한 풍자와 야유가 담겨있다.
양반 계급을 우습게 본 것이다.
여기서 남자를 흐르는 물에 비유하고 공산에 뜬 명월을 자기로 비유한 것이 재미있다.
남존 여비의 시대에 더구나 양반 계급이 극심한 때에 기생인 자기를 명월로 비기고 종친의 한 사람을 산골물로 비유했다는 것은 황진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예인으로서의 자존심, 미인으로서의 자존심일 것이다.
사회적 신분으로 자존심이 상했을 때 느끼는 여자의 분노가 이 시에서 저절로 배어나온 것이다.
- 출전 : 금계필담(錦溪筆談), 식소록(識小錄)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