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271) - 폭염을 이긴 정다운 교제
35도를 넘나드는 불볕더위가 매일 최고기록을 세우며 전국을 가마솥처럼 달아오르게 한다. 폭염이 맹위를 떨치는 주간, 우리 교회는 토요일에 어린이들과 함께 여수의 워터파크로 물놀이를 다녀왔다. 또 주일의 오전예배를 이른 시간으로 앞당기고 오후 예배 대신 입원, 요양 중인 어른들을 방문 하는 등 더위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심신을 추슬렀다. 여름 내내 연구실에서 지내는 친지는 다음과 같은 메일로 더위 속의 안부를 전해왔다.
'이 더위에도 잘 지내고 계시군요.^^
글을 읽으니 가장 탁월한 피서를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정말 덥네요. 항상 하던 대로, 제 여름방학 피서는 연구실에서-지요, 뭐, 올해도 내 더위는 그러려니 했더니 와, 이거 아니네요. 절전 조치로 30분마다 에어컨을 켰다 껐다 하는 전 건물 통제 바람에, 특히 제 서쪽 연구실은 사우나실이에요.
00아, 이제 그만 집에 있으라 하는 눈치를 주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그저 30년의 관성으로 아침이면 차를 몰아 그냥 나옵니다. 다행히(저는 불행이라고 우기는데...^^) 남편 점심 차려 줄 일이 없는^^ 여교수들이 학교 식당에서 점심먹자 부르고 왜 안 나오느냐고 출석 점검을 하는 바람에, 점심 혼자 먹을 일은 없고 저녁 늦게 운동장 몇 바퀴 걷고 수다하고 갑니다.
운동장을 걷고 9시경 교문을 나서면, 옛날 야간 강의를 끝내고 그 많은 차들이 다 빠져 나가기를 기다려 11시가 넘어서야 진이 빠진 채 집으로 돌아가던 일이 생각나요. 그래도 그때는 젊을 때이어서, 뭔가 모를 희망이라는 게 있어서 견딜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뭐, 지금이 절망적이라는 건 아니지만요. 이제 차들이 좀 덜한 시간에 순환도로를 쉽게 달리며 뿌듯한 기분을 가집니다. 어쨌든 나는 이런 밤 시간을 좋아하나 보다 하면서요.^^
메일을 썼는데, 컴퓨터도 더위 먹었는지 흔들흔들 하더니, 싹 지우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삼복더위에 찾아오는 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하는 속설과는 반대로 주중에 50년 넘게 믿음의 동역자로 친분이 깊은 모(母)교회의 목사 가족과 사흘을 함께 보내며 아름다운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지난 수요일(8월 7일), 고등학교 때부터 출석한 서울 효창동의 교회에서 최근에 은퇴한 김명복 목사부부와 캐나다에서 사는 딸이 10여일 일정으로 호남지방을 순방하는 길에 우리 교회에 들렀다. 거동이 불편한 어른들을 위하여 천혜경로원의 3층 로비에서 가진 수요예배는 멀리 찾아온 김 목사의 간증설교에 이은 한순옥 사모의 부채춤 시연 등(사모는 무용단원으로 런던올림픽 공연경력을 가진 베테랑이다.)이 한여름의 무더위를 잠시 잊게 해주었다. 때에 맞춰 경로원에서는 우럭매운탕으로 저녁을 준비하여 손님덕분에 교우들도 귀한 보양식을 들며 즐거운 식탁이었다.
김 목사 내외는 광주에 오면 우리 집에서 유하던 터, 에어컨이 없어 손님맞이에 불편하지만 우리 가족이 지내는 대로 함께 견디자며 집으로 안내하였다. 앞으로의 스케줄을 살피니 토요일에 논산훈련소에서 2천여 명의 장병들을 대상으로 한 진중예배에 참석하기까지는 자유롭다는 이야기, 이 더위에 다른 곳에 폐 끼칠 것 없이 우리 집에서 지내다가 가기를 권유하였다. 꽤 오래 전에 하루 밤 묵으려고 방문한 아내 친구부부가 이곳이 좋다며 사흘간이나 머물고 간 사례를 들먹이며.
다음날 아침, 다섯 시면 운동하러 나가는 내 스케줄에 동행하기를 원하기에 인근의 금당산 산책길에 나섰다. 열대야로 아침부터 무더운 날, 두 시간여의 등반산책으로 땀깨나 흘렸지만 기분은 상쾌하다. 오전은 빛고을노인건강타운 탐방시간, 사회복지사 자격을 따는 등 노인복지에 관심이 많은 김 목사내외는 물론 캐나다에 사는 딸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복지타운의 이곳저곳을 살피느라 오전 시간이 빠르게 지난다. 하루 천오백명이 이용하는 건강타운의 식당에서 점심도 함께 들고.
오후에는 도심에 있는 시립 영상복합관 청춘극장에서 '삼손과 데릴라'라는 옛날 영화를 보기로 하였다. 청춘극장에서는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오후 두 시에 오래 전의 명화를 상영하는데 관람료는 2천 원, 입장객에게는 팝콘을 한 봉지씩 안겨주는 서비스를 곁들인다. 냉방이 잘 가동되는 영화관의 피서도 운치가 있다. 성경의 짤막한 한 장면을 이처럼 웅장한 스팩터클로 제작한 거장 세실 데밀감독의 연출이 돋보이기도.
이어서 찾은 곳은 무등산자락 드라이브, 울창한 숲길 터널을 지나 광주호 주변에 있는 담양의 가사문학관에 이르는 코스다. 숲길을 지나며 맑은 공기를 숨 쉬고 도심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1187미터 높은 뫼, 무등산의 정기를 맛보는 것도 좋거니와 가사문학관에 들러 선인들이 즐기던 풍류의 흔적을 생생하게 살필 수 있어 흐뭇하다. 김 목사는 한자와 서예에 조예가 깊어 더 흥미로운 탐방이 된 듯. 돌아오는 길에 무등산 입구의 사찰음식전문식당에서 채식뷔페를 들고 동적골산책로를 들러서 집에 오니 저녁 9시가 가깝다.
둘째 날은 승용차로 인근지방 탐사에 나섰다. 처음 찾은 곳은 영광군 법성포, 법성포로 가는 4차선 국도에 백일홍이 아름답게 피었다. 여러 차례 이 길을 달렸지만 이처럼 화려한 백일홍꽃밭을 지나기는 처음인가, 늘 다니던 길도 처음인양 아름답게 느껴진다. 법성포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굴비의 산지이자 백제불교 최초의 도래지이기도 하다. 법성포 입구에는 커다란 조기형상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고 곳곳에 굴비를 파는 상점들이 즐비하다. 법성포(法聖浦)는 '불법을 들여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뜻이 담겨 있다.
포구에 연한 산자락에 자리 잡은 불교 도래지의 주요시설은 간다라 양식의 사면불상, 간다라 사원을 본 따서 조성한 탑원, 대승불교의 본고장인 간다라 유물 전시관 등이 있다.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에 인도 간다라지방의 승려 마라난타가 불경 등을 가지고 중국 동진에서 건너와 백제 땅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라고 한다. 찾는 이가 드물어 한산한 간다라유물관에서 안내직원과 여러 대화를 나눈 후 가볼만한 음식점을 물으니 만원 내외의 굴비정식이 괜찮다며 친절하게 위치를 알려준다. 음식점에 들어서니 2층의 넓은 발에 손님이 가득하다. 돌솥굴비정식을 주문하니 굴비는 물론 게장과 계란찜, 비빔용 야채 등 풍성한 반찬이 먹음직스럽다.
법성포 바로 이웃면이 고창군 공음면이고 그곳을 지나면 고향마을이 있는 상하면이다. 가는 길목의 공음면 구수리 입구에 동학운동기포지(1894년 음력 3월 20일에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을 비롯하여 4천여 명의 농민이 이곳에서 포고문을 선포하여 전국적인 농민혁명의 기폭제가 된 곳)가 있고 우리 집안의 선영도 그곳이다. 차를 돌려 선영에 들르니 몇 년 전에 심은 백일홍이 활짝 편 채 주인을 반긴다. 막 자란 잡풀을 몇 뿌리 뽑아내고 선영에서 가까운 동학기포지의 정자에 앉아 집에서 가져온 수박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김 목사는 주변에 새긴 동학관련 비문과 자료를 살피느라 바쁘다.
동학기포지에서 5km 쯤 되는 곳이 고향마을, 내친 김에 그곳으로 향하였다. 김 목사는 3년 전 '회상의 피란길 걷기' 때 용산의 후암동 출발행사에 참석하여 기도해주었는데 3년 지나 도착지점에 서게 된 셈이다. 고향집 앞의 마을회관에 도착하니 넓은 공터에 고창특산인 태양고추가 널려 있다. 김 목사가 풀이 발목 넘치게 자란 고택을 살피며 터 안에 세운 할아버지의 효행비(孝行碑)에 눈길이 가는 동안 살림꾼인 사모는 고추감정에 바쁘다. 근당 7,500원이라고 말하는 생산농민과 흥정을 하여 20근을 사기로 결정, 택배로 부쳐주기로 한다.
고향마을에서 나와 5일장이 서는 인근 면소재지를 거쳐 고창읍 가까운 곳에 있는 고인돌박물관으로 향하였다. 강화,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창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인돌군락지, 박물관을 둘러보며 선사시대의 아득한 역사와 마주한다. 날씨가 너무 뜨거워 700m 상거에 있는 고인돌군락지 탐사를 생략하고 고창읍성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고창읍성(牟陽城이라고도 한다)은 단종 원년(1453년)에 축성한 자연석의 성곽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30분이면 한 바퀴를 돌 수 있다. 그러나 이 더위에 돌아보기는 무리, 멀리 성채의 모습을 살피고 농산물판매장에 들러 고창수박, 복분자, 태양고추, 황토땅콩 등 지역특산품이 전시된 매장을 돌아보고 땅콩과 녹두, 보리를 맛보기로 조금 샀다.
김 목사가 광주로 가는 길에 장성에 있는 후배목사를 찾아보자고 말한다. 주소를 살피니 편백나무 숲으로 유명한 축령산휴양림 쪽이다. 고창읍에서 노령산맥의 솔재를 넘어 장성군 서삼면 모암마을의 산 밑에 새로 터를 잡은 실로암 농장이 후배목사의 자택이자 교회다. 편백나무 숲의 맑은 공기와 투박한 땅 기운을 바탕으로 힐링 목회를 지향하는 특이한 집, 잠시 머물다가 인근의 편백나무 숲길을 돌아보고 장성의 음식점에서 저녁을 함께하며 유익한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산업현장에 몸담고 있다가 뒤늦게 심신의 힐링을 회복하는 목회자로 변신한 중년부부의 소명에 서광이 비치기를 비는 마음이다.
토요일(8월 10일)오전 8시, 김 목사 가족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관하는 훈련소 장병들을 위한 진중예배 참석차 논산으로 향하고 우리는 교회가 주관하는 워터파크물놀이 행사에 참여하였다. 어른들 틈에 낀 어린이들을 위해 우리 교회는 기회가 닿는 대로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원래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배를 타고 일본을 다녀오는 방안을 논의하였으나 여러 가지 여건상 내년으로 미루고 어린이들이 원하는 1일 프로그램을 물으니 다수가 워터파크에 가고 싶다는 의견이다. 그리하여 정한 것이 여수의 디오션리조트에 있는 워터파크 물놀이, 어린이들과 부모 등 25명이 물놀이에 참여하였다.
가는 길에 광양의 이순신 대교를 경유하는 코스, 작년의 여수엑스포를 겨냥하여 개통된 이순신대교는 건설공법도 최첨단이거니와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이름이 붙은 유명다리를 지나며 주탑 사이의 거리가 1545m로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해를 상징하는 것, 그가 수십 차례의 해전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고 전승을 거둔 것은 지략이 뛰어나고 장졸과 민간에 두터운 신망을 얻었기 때문인 것을 상기하며 '너는 지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혜가 많음에 있느니라'는 성경교훈을 익혔다. 이순신 대교 옆으로 광양제철이 우뚝하고 다리건너에는 여수화학공업단지가 위용을 떨치는 산업현장을 지나는 것도 볼거리다. 여수의 돌산 대교 앞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으며 바라보는 해상경관이 아름답고 워터파크에 이르는 해안 길의 선소(船所)를 지나며 판옥선과 거북선이 건조된 역사를 되새김도 뜻 깊다. 일곱 살 하음이가 판옥선을 아는 것도 기특하고.
워터파크의 입장료가 꽤 비싼데도 폭염과 주말이 겹쳐 많은 인파로 붐빈다. 나이 들어 이런 곳을 찾음도 어린이 덕, 노소가 동락하는 즐거움을 맛보며 잠시 동심으로 돌아간다. 물놀이를 마치고 고속도로변의 맛집에서 저녁을 든 후 광주로 돌아오는 석양에 산 너머로 지는 해가 황홀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라보는 눈썹달이 선명하다. 마치 사명을 다하고 사리지는 노병의 늠름함과 초승달처럼 완숙을 향해 뻗어가는 유소년들의 성장을 상징하듯.
찌는듯한 폭염에도 농작물은 성숙하고 가을바람 소소하면 풍성한 열매 가득한 자연의 섭리처럼 무더운 우리들의 여름은 익어가고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 닥치리니.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다는 입추가 지나고 삼복의 마지막인 말복이 내일모래, 유례없는 더위를 슬기롭게 견디며 건승하기를 기원합니다.
* 논산의 진중예배를 마치고 서울에 도착한 김명복 목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체류 중 환대에 감사하며 고창의 여러 모습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는 말을 덧붙이며. 캐나다에 사는 둘째딸은 아버지의 은퇴에 즈음하여 모국에 들어와서 6개월간 부모와 함께 지내다가 이달 말에 캐나다로 돌아간다. 고국을 떠나 20여년 머문 캐나다 삶이 몸에 젖어 고국생활이 불편할 텐데도 나이든 부모의 은퇴 후 순방에 동행한 모습이 보기에 좋다. 우리 교회 박세화 목사님의 둘째딸과는 대학 때 기숙사 생활을 함께 한 인연인데 청춘극장의 영화관람 때 둘이 따로 만나 회포를 풀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