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당호(堂號)
전미야
사람 마음은 주위환경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고 했다. 옛말에 하루 열두 번도 변하는 게 사람마음이라 하지 않던가. 그게 마음의 속성이지만 사람인지라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 평상심(平常心)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나는 옛것을 좋아한다. 소박한 아름다움과 추억을 고스란히 건져내는 것 같은 재미에 빠지다 보니 골동품과 자잘한 물건들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물건뿐만 아니라 집에 대한 취향도 바뀌었다. 소녀 시절에는 언덕 위에 하얀 집이 꿈의 한 장면이었고, 그보다 나이 들어서는 잔디 깔린 넓은 정원의 집에 살고 싶었었다. 그러다가 삶의 여정 어느 길목에 다다르니 모델하우스처럼 깔끔한 집이 좋게 보였고, 또 좀 세월을 걷다 보니 아무것도 없는 사각형 안에 살고 싶어졌다. 하여 잡다한 물건들을 골동품 가게에 넘기곤 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토록 아무것도 없이 살겠다고 다짐했건만 예술인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그 비웠던 자리에 지인들의 작품을 다시 채우고 있었다. 아마도 그건 환경의 변화 때문이었을 게다.
지인들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그들의 정서에 젖어들면서 곧 적응되었기 때문이다. 어쩜 삶도 마음처럼 비움과 채움의 반복일 것이다.
내가 이렇게 채우는 이야기를 하는 건 당호(堂號)를 말하려 함이다.
아주 오래전 어느 책을 읽다가 당호의 매력에 흠뻑 빠졌었다. 책의 저자는 차를 좋아해서 한적한 숲에 차 마시는 공간을 만들어 당호를 지어 붙였다고 했다. 만약 책을 읽으면서 당호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다면 지금 두 달이 넘게 이토록 고민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 당시 ‘아! 멋지다. 나도 이 다음 그런 것 하나 갖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그 생각은 책갈피 속에 묻힌 채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다. 헌데 서걱거리며 추억 부서지는 소리 들려오는 이 가을 불현듯 그 당호란 것을 떠올리게 되었다. 계절이 주는 헛헛함 때문일까? 마음에 구멍 송송 뚫린 이즈음에서야 시려 재킷을 걸치려 하듯 뭔가 덧씌우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사람이 태어나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부모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이름을 지어준다. 나 역시도 부모님이 지어준 고운 이름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부모님이 주신 이름 외에 두 개의 이름을 더 가지고 있다. 하나는 가톨릭 세례명이고 다른 하나는 글을 쓰면서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아호(雅號)이다. 그러니까 나를 부르는 이름이 세 개인 셈이다. 그런데도 난 또 하나의 이름을 가지려 했다. 그건 사람에게 붙이는 이름이 아닌 거처하는 집이나 방에 특정한 뜻을 담아 붙인 집 이름인 당호(堂號)이다.
흔히들 당호라 하면 사임당 같은 선인들의 당호를 떠올리며 고택이나 별장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난 그런 멋진 주택도 아니고 낡고 보잘것없는 누옥이지 않는가. 허나 무덤 같은 어둡고 칙칙한 집에 밝은 이름 하나 붙여주면 집안에 햇살이 비칠 것 같았다. 나무 생긴 대로 켜서 거기에 예쁜 글귀를 양각으로 새긴다면 그 자체가 멋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다행히 나는 우리 집 통로계단 끝에 살고 있고 위쪽에는 문이 하나 더 붙어 있어 현관에 걸어둔다 해서 남의 눈에 띌 일은 없다. 어쩌다 보게 되는 사람이 노욕(老慾)이라 해도 좋고 노추(老醜)라 한들 어쩌랴. 까짓 거 그거 한번 해 보자. 글 몇 자에 즐거워할 줄 아는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에 취해보자. 마음이 기쁘면 그 또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싶어 용기를 내어 서각 작가인 지인한테 의논했다.
그런데 정작 고민은 당호를 거느냐 안 거느냐가 아닌 당호를 짓는 일이었다. 한자어보다는 예쁘고 순수한 우리말로 지어보려고 사전을 들추며 한 달을 끙끙대었지만, 생각은 늘 그 자리에서 맴돌았다. 내가 책을 세 권 낸 사람 맞아? 할 정도로 소설 속 주인공 이름들은 후딱 지어 붙이면서 짧은 글 몇 자 짓는 건 너무도 어려웠다. 당호를 짓는데 그토록 공을 들이는 건 고운 뜻이 담긴 예쁜 이름을 지으려는 욕심이었던 것이다. 기껏 머리 터지게 생각해 넉 자를 만들었더니 여자는 음이라 양인 홀수여야 한단다. 또 당호이기에 재(齋) 당(堂) 방(房) 실(室) 등을 붙어야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니 글을 지칭하는 게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참 황당했다. 어느 분이 현판을 붙이려 고민 고민하다가 글을 못 지어 빈 현판만 걸었다는 그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동화 속의 주인공은 저 산 너머 어딘가에 있을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집을 떠났지만, 그 어디에서도 파랑새를 찾지 못하였다. 결국은 찾는 걸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자신의 집안에 파랑새가 살고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내 가까이 또 내 안에 있을 거란 생각에 머물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 좌우명처럼 좋아하던 ‘감사 지심’이란 글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건 흉심(胸心)에 넣고 살아야 하는 말이지 않는가.
예쁘고 여운이 담긴 글을 찾는다는 게 너무도 어려워 포기하려 했었다. 그런데 욕심이라는 게 또 머리를 치켜들었다. 무당이 제 굿 못한다고 이번엔 지인들에게 당호를 지어보라고 했더니 남의 집 당호를 쉽게 짓지 못해 고심 끝에 지어주는 당호들은 내 의도와는 너무도 먼 이름들이었다. 뭔 대단한 글을 쓴다고 그런 것을 현관에 붙여놓으면 우스갯거리가 될 게 뻔한 일 아니던가. 하여 머리 큰 지인한테 밝고 예쁜 우리 글로 지어 달라 부탁했다. 그분 역시도 쉽지가 않았는지 시간만 죽이다가 ‘해그린섬돌’이라 지어 주었고 또 다른 머리 큰 지인은 ‘햇귀가스리’를 지어 주어서 난 두 개 중에 ‘햇귀가스리’를 선택했다.
햇귀: 아침에 뜨는 해의 첫 햇살.(순수 우리말)
가스리: 푸른 숲. (고어)
‘햇살 비추는 숲’이라는 너무도 예쁜 말이다. 요즘은 아호도 그렇거니와 거리를 나서면 현판들도 같은 글들이 많다. 난 그게 싫어 그토록 머리를 뜯었었다. 헌데 내가 바랐던 대로 예쁘고 고운 뜻이 담긴 순수우리말이어서 더 좋았다. 결 고운 느티나무에 예쁘게 새겨준 ‘햇귀가스리’를 걸었다. 그동안의 생각들을 되짚어 보며 내 인생에서 참 잘한 선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지인의 도움으로 ‘햇살비치는 숲’에서 어둡고 칙칙한 삶이 아닌 밝고 아름다운 날들만 있을 것 같아 당호에 더 애착이 간다. 남은 생은 내 마음의 양지에서 마음의 노래를 지어 부르고 사색하며 그렇게 살아보련다. 그러다 보면 어느 햇살 좋은 날 연보랏빛 웃음 수북이 피어나게 될 것이다. <끝>
첫댓글 좋은 글 마음에 담아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날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고운 흔적 고맙습니다.
기쁜 하루 되십시오.
좋은 글 마음에 담아 갑니다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시길 빕니다
늘 챙겨주시는 마음 고맙습니다.
환절기 건강 유의하십시오.
그대의 아름답고 고운 붓꽃 향기에 머물다가 갑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시지요?
고운 흔적 고맙습니다.
즐거운 날 되십시오.
다인님의 수필을 읽으면서 어쩌면 나와같은 고민을 하셨을까! 저의 추억을 되돌아보며
다인님의 마음을 이해 합니다.
그러니까 30십년 전 이군요, 서울에서 살기에는 너무나 적은 돈 이기에, 변두리 어느정도 돈과 맞물릴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하여 문패보다 먼져 붙인 이름이 당호!
'아름다운집' 송판을 적당히 잘라 연탄집게를 불에다 빨갛게 달궈 나름대로 미력을 다해 당호를 걸었습니다.
우리집을 방문하는 친구들의 한결같은말! 너는 이 환경이 아름답다고 너의집 당호를 정했니?
일일이 답변도 번거로워 웃고 말았지요!
내가 내집에 걸어놓은 당호는 환경이 좋지않다 해도 그 환경의 개선 내지는 선도적 역할을 ....
고운 흔적 고맙습니다.
'아름다운집' 참 예쁜 당호이네요.
전미야 선생님 고운 수필글 감사합니다
마음에 담아봅니다
늘 밝고 창대하십시요
좋은 작품 즐감하고 감니다
날마다 행복하시게
따뜻한 마음으로 행운을 기원드립니다~~~~~~~
시인님 고운 흔적 고맙습니다.
지금 진주는 비가 오네요. 비 그치면 더 쌀쌀할 것 같으네요.
감기 조심하시어요.
고맙습니다.
햇살 비치는 숲속에서 맑고 고운 향기가 흐르는 좋은 글 귀들이 수북이 쌓여가시는
창대함이 있으시길 빕니다.언가 작가님 욕심난다요.ㅎㅎㅎ
우스운 이야기 해 드릴까요?
완성된 작품을 들고 축성해 달라고 신부님을 찾아갔었네요.
나무를 축성해 달라니 신부님은 그게 뭐냐고...ㅎ
설명 듣고는 신부님, 수사님이 좋다 해주셔서
기분 좋았답니다.^^
시인님 늘 고운 마음 남겨주시어 고맙습니다.
넘 좋았겠습니다. 늘 웃음이 가득 하시는 걸음 되시길용...
감사감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