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이 달걀이라면 땅바닥에 누워 버리면, 프라이가 될 것 같이 후끈 달아 오른 대지의 열기로 뜨거워 진 혈류를 따라 나의 땀들이 넓혀 진 땀구멍을 비집고 쉴새 없이 분출하여 머리로 얼굴로 목덜미로 정복할 영토를 넓혀 가는 6월의 한 가운데에 선 여름의 어느 토요일 오후.
출근하여 오전시간을 지나 뱃속의 아우성을 달래려고 점심을 먹고, 경비실에 앉아 휴대폰에 저장된 떵리쥔(등려군)의 노래들을 들으며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니, 내게는 그런대로 탤런트들이 있었고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꽤 괜찮은 날들도 있었다.
내가 내 탤런트들을 발견하게 된 것은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로 도망을 가서 삼촌의 가게에서 일을 할 때 옆집인 페인트가게나 참기름집 종업원으로 있던, 촌놈에서 서울 깍쟁이로 탈바꿈한 더꺼머리 녀석들과 교류하며 유모어와 화술의 바다를 항해하면서 부터가 아닐까 한다.
물론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서울에서 살다가 내려온 친구의 꾐에 빠져 입학금을 가지고 서울로 도망을 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삼촌을 찾아 가서 시골로 내려간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고작 며칠만 서울 수돗물읋 먹었기 때문에 도시 아이로 업그레이드 되지는 않았었다. 꽤 서울내기 다마내기(양파의 일본말)가 되어 가던 이듬 해 가을에 내려와서 고등학교에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가까운 편지를 받고 내려가서 상주농잠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는데, 당시에는 체격들이 그렇게 크지 않던 때라 168cm의 키에도 거의 제일 뒷줄에 앉을 정도로 덩치가 컸었고, 무슨일이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같이 열차통학을 하던 거인인 한규와 학교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싸움이 붙으면, 덩치나 힘으로는 안 되니까 깡으로 밀어부쳐서 결국은 한규를 울먹이게 하여 항복을 받기도 하니, 상주읍에서 좀 논다는 녀석들이나 싸움 좀 한다는 아이들도 내게 시비를 걸거나 싸우려 들지 않았었다.
내가 입학을 했던 68년도에는 나훈아형님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노래가 대히트를 치고 난 뒤였는데, 나도 자주 그 노래를 불렀었고, 많은 박수와 앵콜을 받기도 해서 한 때는 가수가 되려는 생각을 가진 적도 있었지만, 청년시절에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었다. 잠과 1반인 우리 반에서 부회장에 출마할 친구를 뽑는 인기투표에서 CB라는 친구 보다 한 표를 더 얻었었지만, 권력에 대한 야심이 없던 내가 양보를 하였는데, 내가 가정불화로 두,어달 학교에 나가지 않았을 때 실시된 선거에서 토목과의 WC라는 친구에게 졌다는 소식을 나중에 듣게 되었다.
화령중학교 때는 더 시골이던 곳의 고등공민학교에서 편입을 해 왔던 YS라는 친구가 나 보다 1년 먼저 농고에 입학을 하여 학생회장에 출마를 해서 당선이 되었는데, 농촌에서 귀한 일꾼이고 재산인 소를 팔아서 선거운동을 했다는 후문이 있었는데, 자식의 그릇을 알아 본 것인지 아니면 맹목적인 사랑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부모님들이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부모님들의 지원에 힘입었는지 우리 학교가 상주산업대학교로 변신하였을 때 교수로 재직하는 걸 봤는데, 나 보다 더 시골에서 내가 다니던 중학교로 편입을 해 온 촌놈이 교수가 되다니? 그야말로 개천용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고, 내 인생과 너무 대비가 되는 그야말로 멕시코의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의 마치 조각난 마네킹을 이어 붙여 놓은 듯 하던 자화상과 콜럼비아의 화가인 페르난도 보테로가 그린 풍염하고 관능적인 여인들의 모습과 같은 대조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도 같은 학년에서는 꽤 알아주는 유명인사였었다.
2학년 초에 중퇴를 했지만, 훗날 동창생들을 만나면, 나는 상대방을 기억 못해도 상대방들은 대부분 나를 알아 보는 편이었다.
내가 학교를 그만두기 달포 쯤 전에 갔던 봄 소풍 때는 열화와 같은 요청에 의해 장기자랑에 사회를 본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 장가를 일찍 가서 아이도 있었고, 부인이나 장모의 명의인지 매미집(나는 술을 잘 못 먹어서 술집을 가지 않아 잘 모르지만) 비슷한 술집을 운영하기도 했던 JH라는 친구가 노래를 부른 뒤에 내가 우스개 소리를 했더니 그 친구가 그것을 비웃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었다.
그날 가족이 대구로 이사를 가고 나서 같이 자취를 하던 시골 출신으로는 주먹깨나 쓴다는 SC라는 친구가 소풍을 가지 않고 함창면의 집에 갔다가 저녁에 열차를 타고 온다고 해서 상주역에 마중을 나갔었는데, 낮의 일로 심기가 불편했던지 그 JH라는 녀석이 같이 어울리는 상주읍에서 좀 논다는 아이들 7명을 데리고 와서 나를 에워 싸는 게 아닌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가정불화에 가슴 졸이고, 숨죽이며 살다보니 용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조금만 섭섭한 소리나 야단을 치면 울고, 같은 또래의 여학생에게도 맞아서 울고, 혼자서는 책도 잘 읽고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지만 선생님이 지적하여 책을 읽거나 발표를 시키면, 가슴이 두근 거리고 얼굴이 붉어지고 불안하여 음성이 떨리고 할 만큼 소심했었던 내가 그래도 1년 여의 서울생활에서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친숙한 소 집단이 아니면, 불안하기는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는데, 여러명과 마주 서니 오금이 저릴 만큼 떨리기는 해도 태연한 척 그들과 말로 대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집단을 상대로 싸워 본 적도 별로 없고 함창의 둘 째 고모집에 놀러 갔을 때 고종사촌과 사촌인 아이들 서,너명과 밤에 면소재지로 놀러를 나가다가 이웃 마을 아이들 십 수명이 그들을 해치려고 할 때 내가 참지 못하고 앞에 나서서 몇 놈 때려 눕혔는데, 어두운 밤이라 뒤에서 짱돌로 내 머리를 내리치는 것을 피하지 못하여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는데, 그들도 내가 큰 부상을 당한 것이라 생각하고 겁을 먹었는지 도망을 갔고, 시골에 유일하게 있던 의원에 가서 몇 바늘 꿰매고,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던 고종사촌들의 신고로 경찰이 나와 조사를 하고, 급기야 고모부님도 알게 되어 혼이 났고, 고모부님의 중재로 합의를 보아 준 적도 있었고, 이웃마을의 좀 불량한 형들과 싸울 때는 그 시절 유행하던 자전거 체인을 휘둘러 보기도 했고,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하여 겁을 주려고 유리를 씹기도 했었는데 그 때 치아를 상하여 두고두고 후회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가 그렇게 싸움을 많이 하거나 남을 때린 일은 별로 없었다.
너무나 태연한 척하는 나의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을 만큼 탁월한 연기에 속았는지? 아니면 떠 도는 내 소문에 비추어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슬그머니 포위를 풀고 돌아 가서 어쩌면 전설이 될 수도 있었을 8대 1의 싸움은 불발로 싱겁게 끝났는데, 50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하고 오금이 저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싸움도 탤런트라면, 나는 별로 싸움의 탤런트는 갖지 못 했던 것 같다. 냐의 아버지는 공무원이셨지만 상주군에서는 알아주는 주먹이셨다고 했다. 일제 때 학식이 있고 글씨가 명필이셨던 큰아버지가 구장으로 뽑혀 그들에게 협조하여 공출에 대한 서류를 작성하거나 보국대에 보낼 명단을 작성하고 하다보니 해방이 되자 앙심을 품고 있던 이웃 마을의 청년 삼십 여명이 큰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몰려 왔을 때 내 아버지가 큰 소리로 고함 한 번 지르시자 다 도망 갔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우리 고향 마을에 전해 져 오고 있는데, 내가 봐도 내 아버지는 나 처럼 눈이 약간 작은 것 말고는 호랑이 상에다가 체격도 나 보다 훨씬 크신 무인풍이셨던 분이시다.
그런가 하면, 내가 아는 주먹 중에 제일일 한 사람, 고종사촌 형님은 외삼촌인 내 아버지의 체격과 모습을 고스란히 물려 받았는데, 대구 미8군 후문의 깡패들도 꼼짝을 못 했었고 전국체전에서 태권도로 은메달을 따기도 했었지만, 같이 운동하던 K라는 친구는 한 때 여러편의 무술영화에서 주연을 맡으며 이름을 날리기도 했었는데, 내가 그사람에 대해 물었을 때 "글마 그거는 아무것도 아니데이"라고 한마디로 잘라 말했었고,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친가 쪽의 친척들이 십 수명과 혼자서 싸우는 것을 보고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시라소니가 그정도가 아니었을까? 한다."라고 얘기를 하는 걸로 봐서는 대련이나 품세와는 달리 동물적인 감각과 스피드나 파워가 요구되는 실전에서는 날고 긴다는 얘기였었다. 고종사촌 형님은 아버지를 100% 아니 그 이상 닮았었고 무인의 포스가 엿 보이는 모습이 아버지의 그림자와 많이 겹쳐 보였었다.
내가 그런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 받았다면, 싸움꾼이 되었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아버지의 싸움의 기술에 대한 탤런트를 30% 정도만 물려 받고 70%는 나약하고 소심해 보이는 외가 쪽을 닮았던 것 같고. 술을 잘 못 하는 것도 외탁을 한 덕분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어디 가서 일방적으로 누군가에게 맞은 적은 없었다.
싸움의 기술에 대한 탤런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싸움꾼이 되거나 액션스타가 되는 것은 아닌 것이 외아들인 형님을 키우시느라 고생하신 고모님께 물심양면으로 괴로움을 드린 그 화려했던 기록들을 세월 속에 묻어 두고 너무나 평범한 인생을 살고 있다. 그리고 오래 전 부산에 살 때 H라는 친구가 전해 준 중학교 동창생 P라는 친구의 얘기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는 추론을 가능케하는 얘기일 것이다.
중학교 때 코를 찔끔거리는 순 촌놈이었던 P는 장터에서 살던 내가 부르면 혹시 때릴까 봐 도망을 가고 하던 코찔찔이였었는데, 중학교를 졸업하고 누나와 같이 대구에서 공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집으로 돌아 가던 그의 누나가 그 동네 깡패들에게 성희롱을 당하여, 그때 부터 운동을 하여 깡패들에게 복수를 하고 북비산 로타리 오스카극장 주변을 장악하여 JJ라는 그럴 듯한 별명을 가진 꽤 유명한 주먹이 되었다고 한다.
열차 차장으로 승무를 할 때 대구역에서 승차한 깍두기 같은 녀석이 시비조로 나오길래 그 친구의 얘기를 했더니 대번에 꼬리를 내리며 "JJ형님과는 어떻게 되는 사이시냐?"고 묻기에 뻥을 좀 붙여서 "글마는 중학교 때 내가 업어 키우다시피 한 놈이다."라고 대답해 준 적도 있었다.
또 한 사람 상주경찰서 유치장에 근무할 때 화령초등학교 친구의 형과 노름을 하다가 친구의 형이 속이니까 주먹으로 눈 주위를 때려 눈알이 빠지는 바람에 애꾸눈이 되게 하여 도박과 중상해죄로 들어 왔던 JK라는 형님은 대구에서 자갈마당 꼬마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사람인데. 한강 이남에서는 그 주먹 한 방이면 고꾸라지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주먹이 센데, 키는 작지만 빵빵한 체격에 마치 바위 같은 느낌의 찔러도 피 한방울 나지 않을 것 처럼 강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2000년도에 오랜 공백 끝에 찾아 갔을 때 7년 전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운명이라는 것을 절감했었다.
상주농고에는 먹이통을 그리거나 창고나 집의 평면도를 그리는 "농업공작"이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2년 선배로 같이 학교를 다니던 8촌 형이 전해 주는 말에 의하면 담당 선생님의 말씀이 "상주농고에 농업공작 과목이 생긴 16년 동안에 이철훈이가 그린 그림이 제일 우수했다."라고 했다. 만약 그 때 내가 공부할 여건이 되었다면, 공대 건축과에 가서 설계를 전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덧 없는 생각도 해 본다. 그 때의 내 탤런트가 후일 상주경찰서 유치장에 근무할 때 수사계장의 지시로 반원의 팔각형 2층 건물인 유치장의 평면도를 그릴 때 문구점에서 산 각도기(분도기)와 30cm 짜리 자만으로 축적을 감안하여 거의 정확하게 그렸는데, 어쩌면 아직도 상주경찰서 유치장에 내가 그린 평면도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서울에서 지내던 시절인 66년 여름에는 남영동 삼거리 부근에 있는 번듯한 금성극장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을 맡고, 넬라환타지아(원곡 가브리엘 오보에)로 유명한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과 셀지오 레오네 감독이 연출한 "황야의 무법자"를 보았는데, 영화에 대한 나의 관심과 참여는 그 훨씬 이전에 싹트고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에 시골에서 천막을 담 처럼 둘러 영화를 상영하던 가설극장이 있었는데, 영화가 보고 싶어도 어른들이 보여 주지 않으니 천막 밑으로 들어 가다가 붙잡혀 쫒겨 나기도 했는데, 3분의 2쯤 지나면 천막을 걷어서 아무나 볼 수 있게 하는데 그 때 잠시 보았던 "아카시아 꽃잎 필때"라는 영화의 장면이 반세기도 더 지난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신영군씨가 독립군이고 김혜정씨가 연인으로 나오는데,군자금을 모아서 돌아 오는 임무를 맡은 신영균씨가 기한 내에 도착하지 못 하여 군법회의의 판결로 총살을 당하는 내용으로 기억하는데,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고 온 사람을 늦게 왔다고 총살시키는 장면을 보고, 어린 마음에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 하고 몰입되어 분개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의 "문화와 예술을 아낌없이 사랑하시는 향토면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서울 화성영화사 선전반입니다. 오늘 저녁 당 가설극장에서 면민 여러분을 모시고 상영할 영화는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거장 OOO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연인원 0000명과 총제작비 0000만환을 투입하여 제작한 대작으로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순정로맨스이오니 면민 여러분께서는 미리미리 손수건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저녁진지 일찍 잡수시고 설거지를 깨끗이 마치신 후에 당 가설극장에서 보내드리는 음악에 맞추어 발결음도 가볍게 많이많이 왕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하는 선전반의 멘트가 50년도 더 지난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듯 하다.
선산읍에 살 때는 비봉산이라는 산이름을 딴 비봉관이라는 읍민회관 비슷한 곳에서 국악창극이나 영화를 상영하곤 했는데, "임춘앵과 그 악단"이라는 여성악극단의 이름이 생각나고 "촌놈 오복이"라는 영화의 포스터가 며칠 후에 "촌 오복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나붙은 웃지 못할 일도 있었는데, 그 시절의 검열관들의 머릿 속에는 뭣이 들어 있었는지? 놈 자(者)자는 왕의 뒤에도 붙여 왕자(王者)라고도 쓰는데, 아마도 그 시절의 각하가 시골 촌 사람이라서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 봐 알아서 과잉충성을 한 것이 아닐까? 지금 네이버 한자 사전에는 놈 자자가 사람 자라고 나오기는 한다.
좀 냄새가 나는 얘기지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중년의 부부나 형님 누나에게 부탁하여 그들의 아들이나 동생 행세를 하여 들어 가기도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푸세식 변소의 똥을 푸는 구멍에다가 큰 돌을 던져 넣어 발 디딜 거점을 확보하여 그 구멍으로 들어가서 그 시절 기마자세로 볼일을 보던 구멍으로 올라가서 극장 안으로 들어 가서 몸이나 옷에 변이 묻어 냄새가 나서 기도에게 붙잡혀 몇 대 얻어 맞고 쫓겨 나기도 했었고 집에 가서는 어머니에게 뒈지도록 맞기도 했었는데 가끔씩 그 때의 구린내 나는 추억이 향기롭게 다가 오기도 한다.
나 말고도 그런 식으로 극장을 들어 갔던 사람이 있었을까? 그렇게 영화에 집착했던 나였지만 이제는 마음 놓고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어도 별로 영화를 보지 않으니 아이러니하고 세월은 열망까지도 사그러 들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야말로 헐리우드키드의 생애가 아니라, 코리우드키드의 생애가 아니었을까?
그 때 부터 나에게는 영화배우의 꿈이 자라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진들은 한국영상자료원 내에 있는 영화박물관에 소장된 자료들임
대구에서 공장을 다닐 때인 20대 초에는 어머니와의 불화로 서울로 부산으로 떠 돌던 시절이 있었는데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어느 날엔 동대구에서 부산진으로 가는 완행열차에서 객실 한 칸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었는데, 슬랩스틱을 가미한 우스개로 한 참이나 초토화를 시킬 정도로 나에게는 코미디의 탤런트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면서 그 재능도 줄어 들고 순발력이나 두뇌회전의 속도도 떨어졌지만 부산역에 근무할 때는 꽤 웃기는 짬뽕이라는 소리도 듣고, 이박사 이도사로 불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환갑 진갑을 지난 지금은 "조금 웃기는 인간이다."라는 소리를 듣는 정도이다.
72년도에 군에 입대하러 갔다가 사소한 신체상의 결함으로 되돌아 와서 20여 년 전에 돌아가신 막내 고모님이 격려와 함께 마련 해 주신 용돈을 들고 군위 의흥에 있는 DH의 시골 집에 내려가서 모심기나 밭매기 등의 농사일을 거들면서 자료도 없고 공부할 기회도 없었지만 내딴에는 심혈을 기울여 쓰답시고 쓴 시나리오를 들고 서울로 올라가서 영화사를 찾아 가기도 했었고, 정인엽 감독님을 만나기도 했었는데 누가 그런 어설픈 시나리오를 채택해 주었겠는가?
그러다가 대한극장 건너에 있던 국제배우학원에서 일제시대 때 "임자없는 나룻배"라는 영화를 연출하셨던 이규환 감독님의 은퇴작품인 "남사당"에 출연할 배우들을 선발한다는 광고를 보고 응시를 하여 필름이 들어 있었는지 안 들어 있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는 카메라테스트에서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는 연기였는데, "뭐라고! 여기는 중국집이 아니고 화장터야!"하는 리얼한 연기로 합격증을 받긴 했는데 학원에 등록하고 생활을 할 돈이 없어서 부산 광안리에서 공장에 다니고 있던 둘 째 여동생을 찾아 갔다가 동생이 외출을 하고 없어 만나지 못하고 동생을 아끼던 상사가 내 사정을 듣고 마련해 준 돈으로 학원에 등록하고 여인숙에 방을 얻어서 한 보름쯤 다녔는데, 금방이라도 배우가 될 것 같던 것이 점점 희망이 멀어져 보이고 생활비는 떨어지고 하여 배추를 헤아리는 단위를 하고 대구로 내려 갔었는데, 지금처럼 아르바이트를 할 곳이 많았다면 계속 학원을 다녀 그 영화에 캐스팅이 되었거나 다른 영화에라도 캐스팅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어차피 배우는 내 운명의 틀을 벗어난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 때의 그 돈 을 갚기위해 동생이 애를 먹었다며 원망을 했었는데 핏줄이 뭔지 오래지 않아 원망도 사라지고 오빠로 깎듯이 대접을 해 주었지만, 아직도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다.
그렇게 영화배우의 꿈은 일단 접어 두게 되었다.
내가 작가로서의 나의 탤런트를 발견한 것은 청년시절이었었다.
정작 나 자신은 연애편지로 누군가의 사랑은 얻지 못했지만, 기회가 닿는대로 읽은 책에서 미사여구들을 차용하여 그럴 듯한 표현들을 흉내 내곤 했는데 친구들의 부탁으로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기도 했다. 어쩌면 좀 쓴다는 얘기를 듣던 내 글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깔끔하고 반듯하게 쓰는 다른 사람의 글씨에 비해 내 글씨가 잘 쓴 글씨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예술이나 서예로서의 글씨는 다른지 예비군 중대에서 행정을 볼 때 순시차 오신 대대장님이 내가 쓰는 글씨를 보고는 "야, 달필이구나."하기도 했었다.
복사기가 없어 먹지를 사용하여 얇은 종이에다 한문으로 작성된 주민등록표를 일일이 손으로 써서 주민등록 등본이나 초본을 발급하던 때에 동사무소의 담당직원이 자리를 비우거나 바쁘면 내가 가서 써 주곤 했는데, 아마 수 백장은 될 것이다.
식당개 3년이면 라면을 끓일 줄 알고, 카센터 개 5년이면 펑크난 타이어를 교체하고, 엔진오일도 교환할 줄 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초등학교 6년에 중학교 2년 반(3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로 도망을 갔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1년 몇개월 도합 십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에 학문을 가까이 하였으니 내 비록 학문에 뜻이 없었으나 내 생각이나 신념을 글로 표현할 줄 아는 탤런트는 가지게 되었었다. 내가 작가로서의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부산역에 근무할 때 부터였다.
신춘문예에 투고할 단편소설을 쓰다가 말기도 했고, 철도청에서 주관하는 "사고예방사례발표회"에 부산지방철도청의 대표로 뽑혀 픽션을 약간 가미한 원고로 본청 강당에서 실시한 발표회에서 2위에 입상(발표회에 참석한 본청 직원들이 "부산이 1등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지만) 했었다. 그 때의 원고가 "한국철도"지에 실리기도 했었는데 그 뒤로 오랫동안 글은 별로 쓰지 않았었다.
배우로서의 탤런트는 부산역 매표반에 근무할 때 "친절사례 연극 발표회"에 짧은 영어로 외국인 역할을 하여 부산대표인 우리팀이 우수상을 받았고 촌놈이 난생 처음으로 63빌딩의 고급 뷔페에서 축하의 만찬을 들기도 했었다.
2000년의 새해 벽두에 반목과 질시 속에서 힘겹게 영위해 오던 마누라와의 결혼생활이라는 울타리를 탈출하여 혼자 서울로 떠나 갔는데, 내가 떠나고 나서 부산 근교의 신설 4년제 대학의 언론홍보학부에 1년을 다닌 아들녀석이 내가 두려워 감추고 있던 꿈을 펼치려고 서울예술대학에 진학하였다는 소식이 들려 와서 녀석이 휴학을 하고 군대에 가 있을 때 서울에서 택시운전을 하면서 속초에 몇 번 면회를 가서 외박을 시켜 주기도 하고 외출을 하여 같이 영화를 보기도 했는데, 그 때 제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 아버지의 입장에 대해 설명을 했었는데 녀석이 그 잘 생긴 얼굴로 연기는 하지 않고 영화감독이 하고 싶다고 해서 의외라 납득이 가지 않았고 마뜩치 않았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실패를 하더라도 후회가 적을 것이고 성취의 기쁨도 더 크리라는 생각에 열심히 해 보라고 격려를 해 주었고 장래에 주연 같은 조연으로 출연시켜 주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놓았었다.
마틴 스코시즈(대부분 스콜세이지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스코시즈로 발음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거지들이나 꼬마들도 영어를 잘 한다는 미국 땅에 가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감독의 "비열한 거리"라는 영화가 필요하다고 해서 인터넷을 뒤져 찾아 내어 다운을 받아 CD로 구워서 내가 감명 깊게 보았던 알란 파커 감독의 "탈옥( Midnight express)"이라는 영화를 포함하여 200여편의 영화를 구워다 주며 미래의 캐스팅에 대한 로비를 했는데, 대학로에서 선배들과 연극판에서 일을 하며,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하더니 2005년도 어버이날에 만난 뒤로 오래 연락이 없지만 연극포스터의 조명디자이너에 이름이 올라 있는 걸 보면 조명일을 계속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를 외면하더라도 자신의 꿈을 이루고 성장해 나가는 걸 보고 싶은데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다.
2003년 1월에는 엑스트라(우리의 좋은 말로 보조출연자)로 한달에 걸쳐 열흘 정도 일을 했었는데 제국의 아침이나 무인시대에 출연했었다. 겨울이라 군졸 역할을 하게 되면 그래도 투구에 갑옷을 입으니 덜 추웠지만, 백성이나 노비 같은 역할을 하게 되면 얇은 목면으로 만든 저고리를 입게 되어 표가 나기 때문에 두꺼운 털이나 합섬으로 된 셔츠를 껴 입을 수가 없어 추위에 떨어야 했는데 한 번은 새벽에 촬영현장인 문경에 도착하여 석탄박물관 뒤의 산 위에서 진행된 전투장면을 찍느라고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하며 허기와 추위에 떨었는데 고작 10만원이 안되는 출연료를 받았었다. 정말 돈의 가치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야 했고, 몇 천, 멏 백하는 주연배우들의 출연료와 엑스트라의 출연료를 비교하면 천양지차가 느껴지는데, 그렇게 주연 조연 엑스트라로 각각의 운명을 부여하는 신의 비열함과 잔인함을 많이도 원망했었다.
막대한 출연료를 쪼개어 엑스트라들의 허탈한 마음을 채워 주는 인간미 있는 배우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고 영화제에도 엑스트라를 위한 상도 하나 만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아무리 훌륭한 주연배우가 있어도 엑스트라가 없으면, 영화나 드라마가 완성 될 수가 없는데도 엑스트라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하는 이가 별로 없다. 내 인생의 주인인 내가 살아 가는데 중요한 것이 공기지만, 너무 흔하고 쉽게 취할 수 있으니 그 중요성을 별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렇게나마 일을 계속하려 했지만, 겨울방학을 맞은 학생들 때문에 나이 많은 사람들이 출연할 기회가 줄어 들어 다른 일을 찾아 동서울대학의 주차관리원으로 일을 하다가 다음해에 더 나은 일을 찾아 나섰지만, 여의치 못하여 대리운전으로 생계를 꾸리다가 독신자카페에서 만난 S라는 여인이 접근해 와 내게 물심양면으로 피해를 주고 떠나서 힘들게 살고 있을 때 동서울대학의 주차관리소장이 다시 와서 일 좀 해주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해 와서 그 곳에서 1년 6개월 정도 일을하고 2006년에는 사촌 형를 따라 중국을 오가는 배를 타는 보따리상을 했는데, 그럭저럭 중국여인과 사귀어 보기도 하고 중국을 여행하기도 하며 재미있는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자꾸 상황이 안 좋아져서 결국은 배를 내리게 되어 2007년에는 부동산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상주농고 동창생이 발산지구 입구에 새로 지은 건물에서 내 명의였지만, 종업원 같은 중개사로 일을 하다가,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은 그 친구와 3개월 만에 결별을 하고 방황을 하다가 2008년 초에는 다시 엑스트라로 K본부의 "대왕세종"이나 M본부의 "이산" 등에 출연했는데, 이산을 찍던 이천 셋트에서 처음 뵌 이순재선생님은 엑스트라라고 무시하거나 깔보지 않고 손자 같은 청년들과 난로 가에서 농담을 하기도 하며 격의 없이 얘기를 주고 받는 인자하고 따뜻한 인품을 보여 주셨었다.
대왕세종과 이산에 출연했을 때의 모습들
그렇게 엑스트라로 생활을 하다가 안정된 생활을 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은 것이 민음사가 입주해 있는 강남출판문화센터의 주차관리 겸 야간 경비였다.
그렇게 해서 민음사에 드나 들던 문인들을 만나게 되었고 우리문단의 대표적인 작가이신 이문열 선생님도 만나게 되어 그동안 잠재우고 있던 중학교 때 부터 쓰기로 마음 먹은 소설이라는 꿈을 다시 일깨우게 되어 자전적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글을 쓴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정말 경험을 해 보니 단 한줄을 쓰기 위해 몇 달을 그냥 지내기도 했고 격일근무를 하느라고 쉬는 날은 한숨 자다 보면 오후가 되고 이것저것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밤이 되고 다음 날 출근할 걱정에 늦지 않은 시각에 잠자리에 들어야 하기 때문에 별로 쓰지를 못하고 부질없는 세월만 보내어 서울을 떠나 고창에 내려 갈 때 까지 전체 이야기의 1할 정도는 썼을까? 3,4년 동안에 겨우 몇 십 페이지만 쓴 셈이다.
그러다가 건물에 빈 사무실이 생기고 경영이 어렵게 되자 경비원의 숫자를 줄이게 되어 첫 해에 한 명을 줄이더니 다음 해에 또 한 명을 줄여서 혼자 꼬박 24시간을 근무하게 되어 힘겨워 졌는데, 혈압도 높은데다 운동부족에 비만이 되어 2009년 12월 초에 왼 쪽 발에 중풍이 약간 왔었다. 한방으로 치료를 하여 거의 치료가 되었지만, 더이상 근무하기가 힘겹고, 두렵기도 하여 4월 말로 그만 두고 방송스텝차량을 지입형식으로 구입하여 운전을 하게 되어, 탤런트 이철훈의 화려한(?) 연기생활이 시작 되었다.
방송 쪽에 일을 하면서 꽤 많은 연예인들이나 작가 등 유명인사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고. 엑스트라들을 태우고 다니면서 T기획의 이전무(명목상의 직함이긴 하겠지만)나 엑스트라 반장들의 부탁으로 잠깐씩 얼굴이 제법 노출이 되는 엑스트라로 출연을 하게 되었다.
제일 먼저 출연한 것이 S본부의 "나는 전설이다.'였는데 시장상인회 사무실에서 재건축조합의 변호사인 장영남씨와 대각선으로 재연전문 배우의 옆에 앉아 협상을 벌이는 연기였는데 내가 잘 아는 촬영감독님이 찍었는데, 한 인물 하던 내 얼굴이 왜 그렇게 까맣고 이상하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때 같이 출연했던 아줌마들이 자기들이 무슨 PD라도 되는 양 내가 연기를 잘 하더라고 해서 내가 40년 전에 국제배우학원에 다녔던 얘기를 하였더니, 그러면 그렇지 하는 반응을 보여 주었다.
"나는 전설이다."에 출연했던 모습
다음으로 출연했던 것이 "광고천재 이태백"이었는데, 바쁜 진구를 태우고 가는 개인택시 기사였는데, 감독이 처음에는 "아저씨. 빨리 좀 가 주세요.'하면 "예, 알겠습니다."하는 대사를 하라고 하더니 세계적인 배우가 되려다 바빠서 되지 못했던 나의 연기력이 못 미더웠던지 그만 두라고 해서 무성영화의 배우처럼 표정연기만 하고 말았다.
"광고천재 이태백"에 출연했던 모습
서울을 떠나 고창으로 내려가기 한 3개월 쯤 전에 엑스트라로서 마지막 출연이 될 세번째의 드라마인 S본부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 출연했는데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정웅인을 마중 가는 교회의 전도단을 태우고 가는 승합차의 기사 역할이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 출연했던 모습
그래도 꽤 오래(?) 얼굴이 노출되었으나 아무도 알아 주는 사람이 없기는 해도, 나는 무늬만 탤런트이긴 하지만 나만의 배우이다.
아들 녀석이 입봉을 하게 되어 나와의 약속을 잊지 않는다면, 언제가는 주연에 못지 않는 조연으로 출연할 날이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명배우 이철훈의 앞날을 위해 건배!(시인이신 건배형님이 아님.)
2013년 2월 말 부터 일이 없는 날은 민들레국수집에 가서 설거지봉사를 하였는데, 그 때 허형철 목사님을 만났고 목사님의 권유로 "예수 석가를 만나다." 외에 흰두교 경전에 대한 것 등 여러 책을 쓰신 비교종교학자이신 이명권 박사님이 카페지기로 있는 "코리안 아쉬람"이라는 카페에 가입하여 처음 올린 글이 "인생의 종착역을 생각하며"라는 것이었는데 초고 조회수 최다를 기록하였고 그 뒤로 올린 글들도 대부분 최대의 조회수를 기록하였는데, 작년 7월 말에 올린 "사람의 그릇이란"라는 글이 한달 여 만에 2000회를 넘게 조회가 되었는데 현재 2300여회를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는 소설을 일단 접어 두고 내가 쓴 생활에세이를 묶어 "어느 경비원의 라이세이(Liessay) - 일상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1인 출판으로 책을 냈는데, 몇 부 안되는 부수를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아직 작가로 알아 보아 주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나는 나의 순수한 일상의 이야기를 쓴 작가이다.
요즈음 신문이나 방송에서 신경숙씨의 표절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러운데, 나는 사고들이 비슷한 동아시아 지역의 인구가 수 십 억이니 어쩌면 불가사의하게 같은 생각을 표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글의 구도나 묘사 인물의 설정이 너무 흡사하니 무엇이 진실인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다.
나는 일본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일본작가들의 글을 그리 많이 읽은 편이 아니다. 청년시절 유명하던 누구의 작품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도꾸가와 이에야쓰의 일생을 그린 "대망"을 읽었었고,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도 스치듯 읽었던 기억이 나고,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도 대충 읽었던 기억이 있지만 내용들은 별로 기억에 남은 것이 없고 40대 초에 읽었던 사까모도 료마에 대한 책과 하도 요란하게 선전을 하기에 무라까미 하루끼의 1Q84를 최근에 읽었지만 그리 대단한 글은 아니었었고, 시라도리 하루히꼬의 "초역 니체의 말"이란 책을 읽었지만, 하성란 작가의 "여름의 맛"이라는 단편소설에도 나오는 금각사(대부분의 절 사(寺)자는 데라라고 읽는다고 하는데 금각사와 은각사는 지로 읽어 낀가꾸지, 긴가꾸지로 발음한다고 한다.)라는 소설을 쓴 미시마 유끼오(본명은 히라오까 기미다께라고 한다.)의 글은 읽은 적이 없으며 또한 논란이 되고 있는 "우국"이나 "금색" "가면" 등 그의 글을 읽은 적이 없었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를 했다고 하는 그의 글은 탐미적이라고 하는 평가가 있지만, 우익단체를 결성하여 자위대의 궐기를 부르짖으며 할복을 할 만큼 퍄격적이고 위악적인 행보를 보였는데 가끔 우리 주위에도 글과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행보를 보이는 문인들이 많이 있다.
어쨌든 2007년 11월에 갔던 도꾜의 금각사는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웠었고, 버스정류소에서 만났던 요시떼루(일본어로 이름을 뜻하는 나마에라는 단어를 몰라 일본식 영어인 네이무로 물어 알게 된 이름이다.)라는 초등학생의 슬픈 듯 갈구하는 듯한 눈동자가 나의 가슴 한 구석에 아직도 세 들어 살고 있다.
금각사의 모습
금각사 버스정류소에서 만났던 요시떼루군
내가 쓴 책의 표지
데미안이란 소설에 대한 표절도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하는데, 나는 비록 무명의 작가지만 남의 글을 흉내 내거나 베끼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고 내가 겪은 진실이나 순수하게 내 생각대로 창작한 글만 쓸 것이다.
예전에 부산에서 요산 김정한 선생님이 지도하는 글쓰기 모임의 광고를 보고 찾아가서 아줌마들 속에서 청일점으로 강의를 들었을때 젖꽃판이란 단어를 알게 되었는데 한문으로는 유륜(乳輪)이라고 하는 그 단어를 내가 써 놓았던 자전적인 소설에서 YS라는 여인과의 방사 장면을 묘사했던 것을 수정할 때 써 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런 것은 표절이 아닐 것이다.
학계나 신학계의 설들도 진위의 논란이 있는 경우도 있다. 어느 이웃 블로거의 글에 에수님의 얼굴을 덮었던 수건에 묻은 피의 염색체를 분석하였더니 부친으로 부터 물려 받는 23개의 염색체는 없고 모친으로 부터 물려 받는 22개의 염색체와 1개의 남성 염색체만 발견 되어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의 DNA를 분석하여 모든 동서양, 흑인백인 황인종등 모든 여성들이 한 조상(하와(이브))의 자손이라는 결론을 얻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모든 남자들은 아담의 자손이라는 연구결과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에 대한 언급도 없고, 또 며칠 전 신문에는 8500년 전의 유골의 DNA를 분석하여 북미대륙의 조상이 유럽인이 아니라 인디언이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하는데, 아담과 이브가 탄생한 시기가 대략 기원전 4000여 년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6000여 년 전인데 그 이전인 8500년 전의 유골이 있었다면 그것은 누구의 유골일까?
알 수 없는 것이 성경이고 과학이다.
그래도 과학은 발전일로에 있다. 십여 년 전에 클라우드 컴퓨팅이라는 새로운 인터넷 기술이 선을 보였다가 사라지더니 이제는
손에 들고 다니다가 TV나 다른 어떤 모니터에도 연결만 하면 Windows 8,1의 운영체제가 탑재된 컴퓨터가 되는 긴 USB처럼 보이는 막대기 형의 스틱PC라는 것도 나왔고 웨어러블 스마트 기기들도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공장의 경비원으로 일하며 어질러 놓은 지난 날의 밥그릇들을 설거지 하느라고 요즈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들어 준다던 시대를 지나 혈압이 있어도 당뇨가 있어도 거짓말을 좀 보태면, 내일 모레 죽을 사람도 가입시켜 준다는 보험하나도 준비하지 못하고 목숨을 담보로 게임을 하고 있는 나지만 그래도 알아 보는 사람이 없어도 여잔히 배우이고 앞으로 배우로 활동할 것이고, 알아 주는 사람은 없어도 책을 냈었고, 앞으로도 글을 쓸 작가이다.
추신: 며칠에 걸쳐 썼던 이 글을 어제 거의 90% 써서 머무리 할 단계에서 의도적이지 않지만 도깨비에 홀린 듯한 실수로 다 날려 버려, 절은 시절이었다면 99% 내용을 기억해 냈겠지만 지금은 기억력이 많이 줄어 들어 한 70% 정도만 되살려 다시 작성한 글입니다. 틀린 부분이나 잘못 된 부분이 있더라도 양해를 바랍니다.
첫댓글 파란만장하셨던 연안인님의 인생사를
감명 깊게 감사히 감상했습니다.
긴 인생사를 짧은 댓글로 표현하기에
죄송함마져 느껴 집니다.
아드님도 같은 길을 걷고 계시다니
모두에게 사랑받는 영화 관계자로
이름을 올리시길 간절히 바래 봅니다.
건강이 안 좋으신것 같은데 무엇보다
건강관리를 잘하시길 바라며 좋은 작품들을
기대해 봅니다. 늘 건필하세요.
출근 준비하고 일 하다보니 이제야 답글을 쓰게 되는군요 항상 좋게 평을 하시고 격려해 주시니 이 또한 보시고 복 짓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좋은 글 많이 쓰시고 건강 챙기시기 바랍니다.
어제 오늘 이틀 동안 잘 읽었습니다.
감히 댓글 달기가 엄두가 서질않네요.
건강하시고,하시고자 하는일 꼭 대통하시길 기원합니다.
관심 가져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주목님도 푸르고 맑게 청정한 일상으로 부처에 이르는 길이시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