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여행4 - 영광과 한탄의 고도 예루살렘성 통곡의벽과 성분묘교회에 가다!
1월 20일 (일) : 구시가지: 다윗무덤 - 통곡의벽 - 성분묘교회 - 홀로코스트
다시 야파문을 지나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는 데, 겨울철이 우기인 이곳에서 처음
으로 가는 비가 내린다.
모세에 의해 탈애굽한 사람들이 시나이반도를 떠돌면서 소 형상을 섬긴건 이집트의
영향이라고 보는데....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과 유다 양 왕국으로 분열된 후대 선지자 엘리야시기에 이르기
까지 야훼신을 잊어버리고.....
현지 가나안 인들의 신인 폭풍의신 "바알" 을 줄기차게 받든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애굽인들이 나일강이 홍수가 나서 범람해야 상류에서 떠내려온 비옥한 흙으로 인해
풍년이 드는고로 나일강을 신성시 했듯이.....
가나안에서는 여름은 살인적인 더위에 건기에 해당돼 비가오지 않으므로 생산활동
없이 창도 없이 바위로된 어두컴컴한 집안에 더위를 피해 갇혀 있어야한다.
그러다가 겨울이 되어 폭풍의 신 바알이 비를 내려 주어야 비로소 밀 농사가 시작
되는 고로.....
이들에게 비와 물은 생명 그 자체이니 이 비의신 ‘바알’이야 말로 사람들이 애타게
목말라 기다리는 아주 자연스러운 믿음인 것이다.
삼엄한 검문 을 거쳐 ‘통곡의 벽’에 들어가니 듣던대로 남녀가 기도하는 장소가
구분되어 있네.....
세속파에 대비되는 유대교 정통파의 옷차림은 모자부터 신까지가 새까만 색인데 남자
들이 여고생처럼 옆머리를 두갈래로 땋아 늘어뜨리고.....
상의에 실들이 엉덩이까지 내려오며 나이든 사람들은 긴 수염을 자랑한다.
들어가는데 손으로 저지하는 모습에, 머리에 동그란 화병 받침처럼 생긴 모자인 카파
를 쓰라는 것으로 눈치로 알아듣고 입구에서 하나 머리에 얹었는데...
집사람은 이게 흘러내리지 않고 머리에 붙어 있는게 내내 신기한 모양이다.
성경을 펼쳐들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끊임없이 주억거리는 유대인들을 보니 성벽 틈에
소원을 적은 종이가 가득하다.
이곳은 솔로몬왕이 세운 신전인 성전으로 왕의 사후 나라는 2개로 분리되어 이스라엘
은 앗시리아에, 그리고 유다는 신바빌로니아에 멸망되면서 성전은 파괴되었다.
그후 바빌론 유수에서 돌아온 유대인에 의해 성전이 재건되니 이것이 제2성전이다.
그러나 희랍인들의 통치를 받던중 하스몬가의 지도로 독립한 이후 헤롯왕 시대에 개축이 있었
다고 하네.....
서기 73년의 제1차 유대인의 궐기로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해 훼손 된 성전과 성벽은 131년
하드리안 황제의 순행으로 더욱 위기를 맞는다.
예루살렘 성전 터에 쥬피터 신전 을 세우고, 유대인들의 할례를 금지 시키라는 지시를 한 것
이다.
분노한 유대인들은 랍비 아키바 (Aqiba) 를 메시아의 도래로 보고 예루살렘을 기습 점령하여
성전에서 다시 제사를 드리고 동전을 주조하였다
그러나 로마군의 공격에 유대인들은 무너지고, 성전에는 다시 쥬피터 신전이 세워졌으며 유대
인들의 출입마저 금지 되었으니...
그 당시 로마군에 의해 죽어가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본 성벽이 밤이면 눈물을 흘렸다나!!!
그러고는 로마군에 의해 전세계로 추방되니 유대인의 유랑이 시작되는데 이를 디아스포라 라고
한다.
그후 4세기에 이르러서 성전이 파괴된 날인 아브월(7-8월) 9일에 성전 가운데 남아 있는 한 쪽
벽에서 통곡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으니...
그들은 여기서 통곡하면서 성전이 파괴 되고 유대 민족이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을 슬퍼 하는
것이다.
이후 예루살렘은 마호멧의 후손들인 이슬람교도들에게 점령되면서 약 1,300년간 팔레스타인
인 의 거처가 되었으며 성전산에는 이슬람의 사원 이 들어섰다.
이후 오스만 터키를 몰아낸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유대인들이 모여들고 마침내 1948년 유엔
에서 분할을 하니 동(구)예루살렘은 요르단의 땅 이 되었다.
그러나 1967년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 함으로써 이곳 예루살렘은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인의 대립의 최전선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후 헤롯왕의 제2성전 성벽위에 로마인이 4단을 증축하고 이후 터키가 잔돌로 더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옆 문을 밀고 들어가니 숨이 막힐 것 같아 멈추었다.
수천년은 됨직한 두루말이 토라들이 즐비한데 정통파 노인들이 그 앞에서 묵도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엄숙해서 말이다.
시나고그라기 보다는 도서관이라 할만한데 엄숙한 분위기에 절로 옷을 여민다.
옛 성전인 황금돔사원을 들어가려해도 도대체 입구를 찾을수가 없다. 그럴 수밖에 없
는 것이 이곳이 무슬림을 제외하고는 폐쇄되어버린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천년전부터 이슬람 사원으로 변해버렸음을 비로소 깨닫고는 쓴웃
음을 짓는다.
입구도 라이온문 근처에 있는게 생각난다.
*** 비아돌로로사 ***
비아돌로로사의 골고다 언덕을 채찍질교회를 시작으로 천천히 더듬어 가는데...
원색 옷 차림의 아프리카단체 순례객을 만나니 생경스런 느낌이 든다. 아프리카라고
기독교도가 없을리가 없는데... 편견 일러나?
궂이 이디오피아 기독교도들을 생각하지 않더래도... 서양인 선교사들이 근세에 얼마
나 파견되었었는 데...
비아돌로로사 4처의 아르메니아 교회에서 잠시 참배하고 아랍인지구의 좁은 골목길
계단을 올라 헤메다가 어떤 할아버지가.....
눈치로 내가 찾는곳을 짐작하고는 뒤돌아 오른쪽으로 가야한다고 일러준다. 골목에서
하늘이 보이지 않는데다 온통 시장골목에서 들어가야 하니....
간신히 찾은 성분묘교회 는 베들레헴의 성탄교회 만큼이나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335년에 예수이 무덤인 동굴위에 최초로 건림했다.
614년 페르시아 군대가 파괴한 것을 십자군시대에 재건했는데 이후 아랍인들은 다행
히 파괴하지는 않고 문만 하나 막는걸로 그쳤다고 한다.
6개의 기독교 종파가 각기 자기 구역을 나누어 관리하고 있는데 예수의 나무관이 엄청
크다. 물론 개신교 구역은 없다.
성안의 아랍가게들이 좁고 낡은데 비해 유대인 상점들의 현대적 시설과 고급상품들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더욱 옛 로마 대로인 카르도에 이어져 있기에... 그리고 카르도에 여군이 지휘하는
이스라엘 병사 서른명이 정열하는 모습이라니....
고고학박물관에서 옛집터를 둘러보고 시온문을 나와 성모 마리아교회를 둘러보고는
홀로코스트 에 들른다!
나찌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야 들어서 익히 아는바이지만 여기에 있는 두루말이 성경
을보고 놀랐는데.....
양피지인듯한데 처음에는 글씨들이 인쇄된줄 알았다. 몇번이나 확인하고서야 수만자
의 글씨가 한글씨인양 보이는 것은 그 지극정성을 말해주는게 아닐른지...
이곳은 시온산이라 다윗왕의 무덤 이라고 불리는 곳을 거쳐 2층으로 올라가는데 하프
를 켜는 다윗 동상 안쪽에는 그의 지하 무덤이 있다!
이른바 ‘최후의만찬 다락방’을 찾으니 생각하던 것하고는 너무나 딴판이라 잘못
찾아온게 아닌가하고 몇번이나 뒤돌아 본다...
그래 2천년전의 건물이 지금껏 남아있을리 없으니, 이 건물은 화려한 고딕양식이니
중세에 재건축 되었을 터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데, 실제로는 예수님의 위치를 잘못
그렸다고 한다.
로마시대에는 영화에서도 보듯이 식사를 비스듬히 누워서 했고 상위자의 위치는 긴
상의 한복판이 아니라 작게되어 있는 옆부분이었고 보면,
당시의 성경구절을 읽어봐도 이런 위치가 되어야 당시의 정황이 자연스럽다고 한다.
다빈치도 르네상스시대 사람이니 그 시대의 관습에 따라 예수님의 위치를 그렸던 것이다.
‘웟쥬네임’을 외치며 졸졸 따라 다니는 호기심 많은 팔레스타인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
는 비를 왕창 맞으며 돌아와 텔레비젼도 없는 호텔방에 누웠으니....
춥기도하여 처량하기까지 하여 집생각이 난다. 집사람이라도 옆에 없었더라면 영판
홈씨크에 걸릴뻔 하다.
야파거리를 지나 노천 야채시장을 찾아가는데 이곳 사람들은 그 억센 비를 서둘지도
않고 맞으면서 태연히 걸어가는 모습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아마도 사막지대라 비가 반가운 때문일까? 이곳 물가는 우리보다 2-3배 비싼 편인데
빵이나 과일등 생필품만 은 우리보다도 싸다.
비도 맞았고하여 일본인 식당에 들렀더니 메뉴에 우동이 없는게 아닌가?
주인은 현지인이나 다행히 주방장은 일본인이라 일본어로 의사소통이 되어 우동을 시
켰더니 기존메뉴에 우동이 첨가되어 값이 더 비싸져버려 바가지 쓴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외국에 나가보면 중국집에 짜장면이나 짬뽕이 없고 일본 음식점에 우동이 없기 마련
인 데..
중국집은 값이라도 싸지만 일본음식점은 레스토랑보다 비싼편인데 반찬으로는 단무지
하나도 주지 않는구나.... 달래면 그만큼 또 돈을 더 주어야 할테지...
1월 21일(월) : 예루살렘 신시가지 - 제2성전- 박물관 - 시나고그
여기는 시내버스라도 앞문에서 기사가 4.9셰켈 (1500원) 현금을 받고 거스름돈 외에
반드시 영수증을 발급해 준다.
관광안내소에서 3세켤짜리 엽서 한 장을 사더라도 어김이 없으니 영수증 주고받기가
생활해 되어 있는 것을 안다.
그리고 과일등은 반드시 저울에 무게를 달아 1킬로그램에 얼마하는 식으로 파니 어림
짐작이나 대충대충은 통하지 않으며 아무리 바빠도 서둘지 않는다.
물론 길에서 뛰는 사람도 없다. 이제 벼스를 타고 신시가지 홀리랜드 호텔로 간다!
홀리랜드 호텔 뒷마당에는 헤롯왕이 건설한 ‘제2신전시대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
데 30셰켈(1만원) 이나 받아 비싸지만 그만한 값어치는 있다.
야파문안에 다비드의탑 지하에서 시대에 따라 확장된 예루살렘성 지도를 보았거니와,
다윗시대의 예루살렘은 그러고 보니 언덕 한켠에 아주 작은데 시대에 따라 확대되었다.
처음 여행안내 책자에 기혼샘과 실로암 연못이 성밖에 있어서 당황했는데 후세에 예루
살렘 성을 들여 쌓은 때문이며,
예수를 성밖 동굴에다 장사지냈는 데, 오늘날 성분묘교회가 다마스커스문 한참 안에
있는 것도 오스만시대에 성을 늘려 쌓은때문이리라.
예수 처형장소 가 신전옆 라이온문 근처인 이유를 몰랐더니 오늘 이 모형을 보니....
신전 옆에 로마가 대형 요새를 쌓았는데 로마군대가 주둔한 곳으로 총독 빌라도 가
평소 주둔지인 카이사리아 에서 이곳 예루살렘에 오면 머무는 요새라....
여기서 예수를 재판하였고 그래서 비아돌로로사의 시작이 이곳임을 알겠다.
헤롯왕의 궁전 또한 웅장하지만 제사장 가야바의 대저택도 그에 못지 않다. 그중에도
신전은 기형적으로 커 보이는 것이 종교가 생활의 중심임을 알겠다.
성바깥과는 물론 내부도 경사가 심한데 실로암 연못의 비중이 컸음을 짐작케 한다.
자스민 향기 가득한 거리를 걸어서 국회의사당 크네세트를 지나 이스라엘 박물관 에
들렀다.
배낭검사야 이골이 났는데 한국어로 된 안내장을 받으니 반갑구나.
이스라엘 역사와 2천년전 당시의 옷을 입은 사람들의 모형이 많은데 당시에 직조기술
이 발달했음을 본다. 각종 장신구며 도자기, 무기류까지 잘 갖추어져 있어 봉만하다.
입구에는 원뿔 모양으로 생긴 지붕이 책의 전당인데 쿰란동굴에서 발굴된 항아리며
머리카락, 동전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뮈니뮈니 해도 압권은 이른바 ‘사해문서’라 불리우는 두루말이 성경 일 터이다.
2천년 전의 이 두루말이는 참으로 값진 유산인 것이니... 당시 엣세네파의 신앙생활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준다.
*** 아랍 소년이 잃어버린 양을 찾다가 발견했다는 쿰란 동굴 ***
버스에 내려 킹조지거리에 있는 그레이트 시나고그에 들러니 길게 휘장을 둘러쳐
엄숙히 정렬된 비품들이며.....
진열된 전시물들이 마치 제사집기들을 연상시키는데 오늘밤 파티라도 있는걸까? 나이
프, 포크며 잔이랑 그릇들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나온다.
돌아오는 길에 벤야후다 거리 에 이르러니 조그만 맥주집에 가라오케 기계 1대를
놓고 여러 사람들이 돌아가며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유럽처럼 남녀구분 없이 어디서나 담배를 즐겨 피우는데 길거리
에 앉아 물담배를 피우는 여자를 보니 아라비안나이트 를 보는 것도 같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
첫댓글 엄청난 역사의 현장인 통곡의벽이 지금도 종교 이데오로기로인해 통곡하고있으니 ---
사랑하고 배려함이 실천되기를 빌면서 통곡의벽에 금년 소원을 마음속으로 적어 봅니다.
유대 종교의 중심인 성전이 사라지고 고향에서 쫃겨난후..... 그나마 남아있는 무너진 성벽의 일부가 그렇게 가슴에 와닿는 모양이지요!
저도 통곡의 벽에 두손을 높여 닿게하고 기도를 드렸지요. 골고다로 가는 비아돌로로샤 길을 걸으며 가슴에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