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역사 노안성당에서 호남 3대 명촌인 금안리로 이어진 역사탐방길로 신숙주 생가터와 쌍계정이 있다.
나주 옥산(玉山 336.2m)은 금성산에서 북쪽으로 8km가량 직선으로 뻗어 있다.
우리는 얼마전 ☞ 한수제~금성산 환종주를 한 바가 있다.
용머리처럼 기다란 능선은 멀리서 보면 거대한 성벽처럼 보여 병풍산으로도 불린다.
계량재(큰재)에서 능선을 따라 남진하는 산길은 문평면과 노안면의 경계로 고개(재)만 해도 10개가 넘는다.
옥산은 일제가 1등 삼각점을 산의 정수리에 설치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1894년 계량동 대동계에서 발행한 책자에는 ‘옥산’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인근 주민들은 ‘병풍산’이라 부른다.
병풍산은 옥산과 같은 능선에 있지만 계량재를 경계로 도계가 갈라진다.
봉우리 헌터들로 구성된 별동대팀이 들린 태청지맥의 병풍산(265.4m)과 망산(288m)은 광주광역시다.
들머리인 이슬촌의 노안성당은 붉은색 건물로 2022년 등록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었다.
그래서그런지 마을주민들도 대부분 가톨릭 신자로서 종교적 신념에 따라 대부분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한다.
전망대에선 동쪽으로 무등산과 모후산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태청지맥 국사봉과 정도전의 유배지가 있는 백룡산 줄기가 지나간다.
하산길은 울음재에서 ‘금안제’ 이정표 따라 임도를 내려가면 금안1제와 금안2제를 지난다.
광곡마을에는 나주 출신으로 조선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1523-1589)을 제향한 월정서원이 있다.
광곡경로당 앞엔 대형버스가 댈 수 있고, 커다란 사각정자가 있어 산행후 마무리할 수 있는 장소로 적당하다.
차량으로 1분 거리의 쌍계정은 400년 동안 대동계를 지켜온 화합의 상징으로 ‘쌍계정’ 편액은 한석봉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쌍계정은 원래 고려 충열왕(1274~1308년) 때 나주 출신 문정공 정가신이 건립했다고 한다.
당시 문정공 정가신과 문숙공 김주정, 문현공 윤보 등이 학문을 닦던 곳이라 하여 삼현당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산행코스: 노안성당-계량재-작은재-이별재-옥산-배재-소연재-매봉-대오리골재-삼면봉?-울음재-금안1·2제-월정서원-광곡경로당 *쌍계정
궤적.
통계.
고도표.
미리 준비한 표지기.
네비엔 '노안성당'을 입력하여...
성당 입구에서 가득 채운 산꾼들을 토해 놓는다.
산길은 생소한 '풍류락도 영산가람길'
커다란 주차장이 있으나 입구가 여의치 않아 미리 내렸다.
붉은 벽돌 건물의 노안성당.
한국전쟁 당시 불을 지르려던 인민군들이 붉은 벽돌을 보고 이미 불질러졌다는 착각을 일으켜 돌아갔다는 기적적인 일을 겪기도 했다.
1894년 천주교 신자 정락 요한이 박해를 피해 서울을 떠나 함평군 나산면에 정착하였다.
그는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약봉지에 천주경과 성모경을 써주며 신자들을 모아나갔다.
1908년 계량 본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신부로 투르뇌 빅톨 신부가 부임하였다.
1910년 초가 성당을 건립하였고, 1차 세계 대전으로 미루어지다가 1927년 서구식 성당으로 확장하여 준공하였다.
1935년 계량 본당에서 노안 본당으로 명칭 변경, 1984년 3월 까리따스수녀회의 분원이 개설되었다.
산길진입은 성당을 둘러본 뒤 우측 화살표 방향으로 성당을 우로 두른다.
아직 녹지 않은 눈이 깔려 있다.
오늘 산행내내 길안내를 해준 시그널. '병풍산 트레킹'으로 '노안성당 이슬촌'이라 적혀있다.
임도급 산길이 깊숙히 파고들어...
아까 안내판에서 보았던 '풍류락도 영산가람길' 안내판이 방향을 가리킨다.
능선 조금 못미친 지점에서...
오래된 계량재 안내판이 있으나 무시하고...
금세 고갯마루에서 이정표를 만나는 지점이 정확한 계량재다.
평이한 산길에 오롯한 발자국이 나 걷기 좋은 길. 굳이 아니젠을 찰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계단을 올라서자...
전망.
희뿌연 가스로 성에 차지 않지만...
뒤를 돌아 보았더니 별동대팀들이 찾아간 망산과 병풍산인 듯.
함께 걸은 장수 부회장이 도드라진 바위 위에 올랐다.
나아갈 방향으로 솟은 봉이 옥산.
작은재라 명명된 지점. 계량재에서 700m, 이별재는 500m 이정표가 있다.
길안내를 하고 있는 표지기에 '작은재'라 명명되어 있고, 노안성당으로 등로가 나 있었다.
눈이불을 덮어쓰고 있는 무덤을 지나면...
임도가 지나는 '이별재'엔 정자와 그 옆에 작은 연못이 복원되어 있다.
이별재 안내판과...
이정표.
금성산 등산 안내도와...
노안천주교회에서 금안동 광곡까지.
금성산의 풍광에다 경현마을 닭백숙까지 대강의 산행 '시놉시스(synopsis)’'를 적어 놓았다.
이별재(離別峙)는 노안면과 문평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이다.
가마타고 신행(新行)가던 신부가 이 고개를 넘지 못해 신랑과 이별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작은 연못을 복원하였다.
이별재를 떠나 산길을 오르자 바위 전망대.
말등처럼 미끈한 능선이 뻗어있다.
'풍류락도'가 아름다운 건 이래서일 것.
나주평야에 촌락을 이루고 있는 마을들이 점점이 자리를 잡고 있고...
옥산은 아직 건너서 보인다.
추위에 움추려있는 춘란. 이제 얼마 안있어 낙엽속 숨은 속살에서 뽕긋한 꽃봉우리들을 뿜어 올리겠지.
산 밑 터널에서 빠져나온 고속도로가 지나고...
우리는 망잔등 같은 능선에서 산하를 굽어본다.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삼각점 번호 11번이 선명한...
옥산이다.
삼각점 안내판에 '나주11'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일제는 우리나라의 주요 산과 농지를 측량해서 1등, 2등, 3등, 4등으로 분류했다. 등급이 위의 것일수록 정밀한 측량으로 측정한 것이다.
대삼각본점이라고도 불리는 1등 삼각점은 남한에 189개 설치되었고, 2등은 1,102개, 3등은 3,045개, 4등은 11,753개 설치되었다.
1등 삼각점은 일본 대마도와 거제도를 삼각망으로 연결하고 두 삼각점을 본점으로 해서 관측하고 계산한다.
각 삼각점에는 숫자가 부여되었는데 11부터 19까지는 1등 삼각점(평균 45km 거리마다 설치), 21부터 29까지는 2등 삼각점(평균 25km 거리마다 설치), 301부터 399까지는 3등 삼각점(평균 8km 거리마다 설치), 401부터 499까지는 4등 삼각점(평균 2km 거리마다 설치)이다.
준비해간 표지기를 건 뒤...
산길을 이어간다. 지난번 다녀간 금성산과 뚜껑봉, 월정봉이 있는 곳이다.
농한기를 맞아 평화로운 나주평야.
작은 봉우리를 올라서는 길은...
올라갈 적엔...
눈(雪)산, 내려갈 적엔 낙엽산.
이는 우리가 남진(南進)을 하고 있기 때문으로 오를 땐 북(北)쪽 내려갈 때는 남(南)향이기 때문.
무명봉에 올라 쉼을 하다...
옆뽈떼기의 전망암에 올랐다.
내려선 뒤 다시 오름길.
무덤을 지나면...
정자가 있는 소연재.
안내판엔 북쪽 60m지점에 '아기장사바위', '연소바위'가 있다고 하였지만 안내판 속에만 존재(?)한다.
매봉에 올라...
준비해간 표지기를 걸었다. 높이는 '월간산'의 지도를 따랐다.
길안내를 하고 있는 '병풍산 트레킹' 표지기.
시누대 숲이 있는 안부. 지형도를 확인하니 '대오리골재'다.
대나무가 있는 골짜기여서 '대오리골재'가 된 듯.
조금 더 진행하자 303.7m봉우리. 3면(노안면·문평면·다시면)이 만나는 봉우리여서 '삼면봉(三面峰)'으로 작명을 하였다.
널따란 임도에 내려서서 남향으로 조금 비켜보니 금성산 안내도와 이정표가 있는 울음재.
울음재의 안내도.
좌측 노안면 방향 눈쌓인 임도를 따라 30여분 내려서니...
금안1제와 2제를 지나며...
산을 내려오게 된다.
동암·송암·우당 공적비가 나란히 서 있고...
그 밑에 한옥 와가가 있어 담넘어 기웃거리다...
사잇문으로 들어가 4칸 팔작지붕의 월정서원 강당을 들여다 보았다.
월정서원(月井書院)은 1659년(효종 10) 사암 박순(朴淳 1523~1589)의 학덕을 흠모하는 사림들이 상소를 올려 창건하였고, 1669년(현종 10) 사액이 내려졌다.
1787년(정조 11) 중수하였고, 1789년 김계휘(金繼輝 1526~1582), 심의겸(沈義謙 1535~1587), 정철(鄭澈 1536~1593), 홍천경(洪千璟 1553~?)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월정서원 현판.
'월정서원복설기적비'. 처음 금성산 월정봉 아래에 있던 서원을 이곳으로 옮겨 빗돌을 세운 듯하다.
월정서원유허비와 월정서원묘정비.
현재 서원은 사당과 강당,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외삼문은 각각 정면 3칸·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지만 내삼문은 관리가 되지 않는 듯 폐가가 되고 있다.
내삼문 안의 사당은 정면 3칸·측면 1.5칸의 맞배지붕 건물이지만 지금은 천막이 덮혀있어 폐가 직전으로 보인다.
바깥으로 나와 외삼문과...
월정서원 안내판을 들여다 본다. <나주시 향토문화유산 제16호>
우리가 내려온 울음재를 돌아본다.
기프스를 한 노거수에...
버스가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여러사람이 앉을 수 있는 사각정자가 있다.
광곡경로당이다. '금정산 생태숲 가는 길' 안내판이 있어 B팀들을 안내할 수 있었다.
뒷풀이를 마친 뒤 귀가하는 길 1분 거리에 '쌍계정(雙溪亭)'이 있다.
쌍계정은 조선 세조로부터 국내 현사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던 조선시대의 대표적 정자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이 정자는 금안동계를 시행하던 곳으로 지금까지도 그 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집으로 1단의 낮은 기단 위에 덤벙 주춧돌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으며 포작이나 주두 없이 보와 장혀, 도리로 결구하였다.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고 사방이 터져 주위의 산수와 나무가 풍치있게 잘 어울리고 있다.
쌍계정이란 명칭은 정자 좌우로 계곡이 흐르기 때문.
<알 수 없는 이유로 사진이 나오지 않아 자료사진을 빌려왔다> 쌍계정(雙溪亭) 현판 글씨는 한석봉이 쓴 것.
두 그루의 나무는 각각 팽나무와 느티나무라고 하는데...
연리지는 고사를 한 듯 생기가 없다.
'사성강당(四姓講堂)' 현판. 현재 나주정씨, 하동정씨, 풍산홍씨, 서흥김씨가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우측 '제홍천경쌍계정(題洪千璟雙溪亭)'이라는 시판에 '사암(思菴)'이라 적혀있다.
사암 박순(1523-1589)은 당대에 영의정을 하였고, 사암 사후(死後)인 1609년에 홍천경(1553-1632)이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명성을 날렸지만, 사암 생전에는 홍천경을 시의 제목으로 시를 쓸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잡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암 선생 문집에 '제홍천경쌍계정'이란 7언율시가 수록된 것을 보면 사암이 지은 시가 분명하다.
다만 홍천경과 당시 영의정 박순이 어떻게 교류하였는지는 알기 어렵다.
- 칠언율시는 다음과 같다. -
臨溪亭敞對山門 / 탁 트인 정자가 시내를 내려다보며 산문(山門)을 마주하니
好會尋常自一村 / 좋은 만남이 한 마을에서는 예사로운 일이네
纔足稻粱供野酌 / 겨우 벼나 조이지만 들판에 술 마시기에는 만족하고
丹砂有井人多壽 / 단사(丹砂)에 우물 있어 사람들이 장수를 하는데
黃甲標名俗尙文 / 과거 급제자 이름을 걸었으니 습속이 글을 숭상하네
我欲從君同結社 / 내가 그대를 좇아 함께 결사(結社)를 하니
幸分花竹與連園 / 꽃과 대나무를 나누어도 더불어 정원이 이어지기를 바라네
海東南有錦城山 해동남유금성산 / 해동- 고려 남쪽에 금성산이 있고
山下吾廬草數間 산하오려초수간 / 그 산 아래 내가 살던 초가삼간 있네
巷柳園桃親手種 항유원도친수종 / 골목과 뒤안의 버들과 복숭아는 내가 친히 심었으니
春來應待主人還 춘래응대주인환 / 봄이 오면 응당 주인 오기를 기다리겠지
雪齋 설재 / 문정공(文靖公) 정가신(鄭可臣, 1224~1298)
울퉁불퉁 근육질의 느티나무.
수 백 년을 산 노거수.
'명심보감'을 보다 술에 관한 글귀를 접한다.
'酒不醉人人自醉 色不迷人人自迷(주불취인인자취 색불미인인자미)'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취하는 것이요, 여색이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미혹하는 것이다.
- 장진주(將進酒) -
유리잔 가득히
호박빛 액체를 따르라.
진주같이 붉은 것 술통에서 철철철 넘쳐 흐르고
용을 삶고 봉황을 구우면 기름이 우는데
병풍치고 장막 드리우니 우리들 마실 자리
용(龍)울음처럼 피리를 불고
악어 가죽 북을 치자. 둥둥 두둥둥
계집은 흰 이빨 드러내어 노래하고
계집은 가는 허리 하늘하늘 춤을 추라.
봄도 어느덧 기울려 하느니
보라. 붉은 비처럼 붉은 빗방울처럼 지는 복사꽃.
종일토록 마시고 마시고 취하자.
유령(劉伶)에겐들 죽은 다음에야 누가 술을 권하리.
<이하(李賀 중국시인)>
*유령(劉伶)은 진나라의 문인으로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