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맛집(36)] "보양, 첫째가 민어… 마지막이 개고기"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2012.06.07
조선시대 진상한 공물 큰것 1m 넘는 '조기 사촌'
회보다 맛있는 민어탕 고급스러운 민어전도 인기
목포 '영란횟집' 독보적
조기와 민어가 비슷한 혹은 같은 생선이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실이다. 우선 둘 다 '농어목 민어과'의 바닷물고기다. 민어와 조기는 사촌 쯤 되는 물고기들로 '민어과 민어'와 '민어과 조기'라고 부르면 정확하다. 생긴 것도 비슷하지만 크기는 다르다. 조기는 다 자란 후에도 40cm정도지만 민어의 경우 조금만 큰 녀석이면 1m를 넘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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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 수치(위)와 암치
조선시대에는 민어와 조기가 모두 조정에 진상한 공물이다. 이때 민어는 '마리'로 표기하지만 조기는 '속(束)으로 표기한다. 1속은 20마리다. 크기가 작은 조기로서는 자존심 상할 일이다.
<정자통(正字通)>은 명나라 말기에 나온 중국어 사전이다. 여기에서는 "석수어(石首魚)는 '면(鮸)'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원래는 조기 류 전체를 '면어'라고 부른 것이다. 조선에서는 덧붙여 "(면은)크고 작은 두 종류가 있는데 그 가운데 큰 것을 민어(民魚)라고 한다"고 적었다. 즉, 석수어, 조기 류 전체를 면어라고 하는데 조선에서는 특별히 큰 것을 면어라고 하지 않고 민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면어가 민어가 된 것일까?
조선시대 기록들에는 참 당황스러운 설명이 나온다. 그저 "면(鮸)과 민(民)은 음이 서로 비슷하다"고 했다. '면(鮸)'과 '민(民)'의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어느 날 시중에서 면어가 아니라 민어라고 불렀다는 뜻이다. 획수가 많고 복잡한 '면'보다는 '민'이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기 이름에 '백성 민民'자를 쓰면서 혼란이 생겼다. 음식에 대해서 식견이 있다는 사람들도 흔히 "백성들이 널리 먹어서 민어라고 했다"고 말한다. 틀린 주장이다. 백성들도 널리 먹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민어의 '민(民)'은 백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저 표기상의 혼란일 뿐이다.
민어와 조기 사이에 '황새기'까지 나타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젓갈재료로 자주 사용하는 '황새기'는 '황석어'의 사투리 표기다. 황석어는 '황석수어(黃石首魚)'의 준말이다. 조기의 머릿속에는 돌 같은 것이 들었다. 그래서 조기의 다른 표현은 석수어다. 황석수어는 노란 색깔의 조기, 참조기를 말한다. '황새기'는 참조기다. 결국 조기와 '황새기'는 같은 물고기고 민어와 조기는 사촌 쯤 되는 셈이다.
보양식을 찾는 여름철이 되면 여기저기 "보양의 첫째는 민어탕이고 제일 마지막이 개고기"라는 이야기가 들린다. 심지어는 "개고기를 먹는 풍습은 일제강점기에 성행하기 시작했다" 혹은 "양반은 민어탕을 먹고 상놈은 개고기를 먹었다"는 말도 들린다. 모두 근거 없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개고기를 아주 즐겨 먹었다. 오죽했으면 다산 정약용이 형에게 보낸 편지에도 "5일에 한 마리씩 개를 잡아먹으면 1년에 52마리를 먹을 수 있고 그 정도면 충분히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 <산림경제>에서는 개고기 중에도 황구(黃狗)를 으뜸으로 쳤다. 개고기 식육의 역사는 아주 길다. 물론 식용인 구(狗)와 애완용인 견(犬)은 다르다. 중국의 사자성어 양두구육(羊頭狗肉)이란 말이 생긴 것도 얼추 2천년을 넘긴다. 오히려 애완견의 역사가 개고기 식육의 역사보다 짧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조선시대 내내 개고기는 주요한 단백질 섭취원이었다. 조선후기의 생활백과사전인 <규합총서>나 요리서 <음식디미방>에서도 개고기 다루는 법은 상세히 나와 있다. 양반은 민어를 보신탕의 으뜸으로 친다는 표현은 틀렸다.
허균은 <성소부부고-도문대작>에서 민어를 "서해안에서 널리 잡히기 때문에 특별하게 기록할 것이 없는 물고기"로 치부한다. 즉, 별다른 특징도 없고 특산지도 없으니 기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민어는 흔한 물고기였고 누구나 먹었던 생선이었다. 특별히 양반들이 보양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더불어 냉장유통이 없었던 조선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반가, 궁궐이라 하더라도 당연히 민어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민어 마니아'들은 민어전이 가장 고급스럽고 민어탕이 맛있다고 이야기한다. 가격은 민어회와 민어전이 높은 편이다. 민어부레는 화학제품이 나오기 전에는 목가구 등의 접착제로 사용했던 것이다. 어느 날부터 민어부레가 대단한 미식의 재료로 등장했는데 그 원인은 알 수 없다. 부레의 쫄깃한 식감은 좋지만, 대단한 맛이라고 표현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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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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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 껍질
민어의 주산지는 전남 신안군 임자도다. 민어가 산란을 위하여 북상하는 길목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초여름의 '민어 파시'도 대단히 컸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임자도에서는 7월 중순 경에 민어 축제가 열린다. 흔히 파시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하여 "개도 지폐를 물고 다닌다"고 하는데 전남의 민어 파시에는 "조선의 술집 여자뿐만 아니라 일본여자들도 원정을 왔다"고 한다.
역시 '민어 맛집'은 전남 신안, 목포 언저리에 많고 서울 등 대도시의 민어횟집들도 대부분 목포, 신안 출신인들이 운영한다. 목포 '영란횟집'은 전통적인 민어 횟집으로 손꼽힌다. 민어를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거론되는, 민어에 관한한 독보적인 맛집이다. 국산 민어를 사용하고 사시사철 민어를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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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란횟집 민어탕
서울에서는 목포 출신인들이 운영하는 두 식당이 민어로 유명하다. 논현동 '목포자매집'과 영동시장 언저리의 '노들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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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강 민어회
민어회의 맛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어리석다. 민어 값이 워낙 비싸니 아무리 단골이라 하더라도 좋은 민어만 고집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웬만한 마니아들은 이미 세집을 널리 알고 있으니 단골 행세를 하기도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