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한기호
“정보화시대 살 길은 ‘10차선 도로’ 아닌 ‘나만의 오솔길’
김도연(문화부 차장) kdychi@ munhwa.com /문화일보 2012.12.18.
올핸 정부가 정한 ‘독서의 해’다. 하지만 책 읽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포스터에 적힌 ‘책 읽는 소리, 대한민국을 흔들다’라는 구호는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지하철을 타면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진 승객들 일색이고, 서점가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줄어들어 대형 서점마저 매출액이 떨어진 실정이다. 정부는 출판문화산업 진흥 5개년 계획도 발표했지만 책 읽는 비율은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우리 국민의 연간 독서량은 고작 0.8권. 미국 6.6권, 일본 6.1권과는 비교하기조차 민망하다. 신간 서적 발행부수도 재작년의 1억200만 부가 지난해엔 1억 부로 떨어졌다. 출판 산업의 위기를 말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출판·독서 문화 살리기 운동의 중심엔 한기호 (54)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이 있다. 한국 현대 출판의 산증인인 한기호 소장. 그는 출판·독서에 대한 전문가적 식견으로 출판 정책에 대한 날선 비판은 물론이고, 출판계 내부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꼬집는 ‘출판계의 운동권’이다. 올해 ‘출판 인생 30년’을 맞은 한 소장을 지난 14일 문화일보에서 만났다.
“정보기술은 근본적으로 ‘고용 없는 성장’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이제 어느 분야나 1등만 살아남는 구조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누구나 걷고자 하는 ‘10차선 도로’를 버리고 ‘나만의 오솔길’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평생 잘할 수 있는 분야부터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야에 대한 책을 입문서부터 전문서까지 100권만 골라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자신감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
출판 현안에 대한 그의 답변은 거침없었고, 책에 대한 애정은 30년 동안 출판 외길을 걸어온 출판 연륜만큼이나 깊었다.
―올해 학원서적, 수송사 등이 폐업하거나 부도를 맞는 등 도매업이 몰락했습니다. 출판 시장에 미칠 파장이 만만치 않았는데요.
“도매상이나 총판은 최대 위기입니다. 온라인서점의 점유율이 높아지고 오프라인서점의 폐점이 늘어나면서 존재가치가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업체들 말고도 만화 총판, 학습서 총판들도 많이 도산했습니다. 그 피해가 출판사와 제작업체에 전가되고 있습니다. 그것보다 무서운 것은 남아있는 도매업체에 대한 불신입니다.”
―전자출판은 그나마 확장세입니다. 전자출판 시장을 전망하신다면.
“지난 몇 년간 전자책이 성장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토대가 어느 정도 마련돼, 전자출판 시장은 더욱 가능성을 키워갈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종이책과 전자책을 동시에 출간한 책들 중에서 전자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1%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시리즈가 확실한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종이책이 30만 부 팔릴 때 전자책이 10만 부나 팔렸으니까요. 아마도 당분간은 매우 선정적인 내용을 다룬 책들이 전자책 베스트셀러를 휩쓸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출판의 위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출판의 미래를 어떻게 보시나요.
“책이 사라진다는 것은 문명이 붕괴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시류에 영합해 팔리는 책만 추구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본 최고의 독서가로 ‘독서의 신’으로 불리는 마쓰오카 세이고는 ‘IT(정보기술)혁명은 정보의 전후, 순서 배치법이 달라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인간이 원하는 순서대로 정보를 컴퓨터나 휴대전화로 읽어낼 수 있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로 인해 검색이라는 읽기 혁명, 엄지손가락으로 누르는 쓰기 혁명,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스마트폰과 스마트패드라는 재생장치가 불러온 텍스트(물질성)의 혁명 등 3대 혁명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출판기획자들이 과연 이런 혁명에 값할 만한 책을 만들어왔는가는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새로운 책의 시대는 이제 겨우 시작됐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책’이란 무엇입니까.
“디지털 문화는 인간의 기억을 무한대로 컴퓨터 속에 외재화함으로써 순간적인 정보 처리를 가능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습니다. 중요한 검색어 하나만 클릭해도 우리가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정보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방대한 정보를 읽어낼 절대적인 시간과 화내지 않고 핵심을 파고들 심리적인 여유와 핵심을 골라내기 위한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감수해야 합니다. ‘새로운 책’은 바로 이 ‘시간’과 ‘여유’와 ‘시행착오’를 대신하는 책입니다.
―지난 9월 정부는 ‘출판문화산업 진흥 5개년 계획(2012~2016)’을 내놓았습니다. 5년간 투입될 예산은 총 2038억 원. 내년 예산으로 36억 원이 증액됐습니다. 이번 안은 특별히 가구별 도서구입비에 대한 세제 혜택을 추진하고 청소년에게 책을 구입하게 하는 북토큰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출판 진흥 계획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예산이란 것도 확보되지 않은 선언적 의미의 예산에 불과합니다. 북토큰 제도 같은 것은 시행했다가 실효성이 없어 폐기된 것입니다. 출판 진흥책은 출판업자를 위한 정책이 아니라 독자를 위한 정책이 돼야 합니다. 누구나 걸어서 갈만한 곳에 다양한 책이 구비된 도서관이 존재하고, 언제 어디서나 값싼 가격으로 양질의 책을 구입할 수 있는 서점이 존재하면 됩니다. 그런 정책을 세우지 않고 알량한 예산으로 사안마다 찔끔찔끔 도와주면서 생색이나 내는 정책이 출판 진흥이라고 볼 수는 없지요.”
―출판 산업 성장을 위한 방편으로 콘텐츠·저작권 수출이 탄력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에 거는 기대치가 높은데요.
“세계 출판시장은 단일 시장으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서구의 대형 출판사들은 출판 10대국 안에 들어가는 한국, 중국, 일본을 하나로 묶어 공략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인도만 묶으면 엄청난 시장이 됩니다. 중국은 가능성이 높은 시장입니다. 중국 진출에 성공하면 중화권 시장은 모두 확보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아동출판이나 영상과 연결된 대중소설은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저작권이 투명하게 관리되지 않는다는 것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완전한 도서정가제 보장’은 출판계의 최대 현안 중 하나입니다. 완전한 도서정가제 보장은 왜 필요한지요. 최근 대형 온라인 서점에서 뒷돈을 받고 ‘기대 신간’‘급상승 베스트’ 등이라고 광고를 하다,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시정명령을 받았는데 대책을 말씀해 주신다면.
“출판시장은 이른바 ‘빅4’라는 네 온라인서점이 과점하는 시장이 됐습니다. 이제 온라인서점의 초기 화면에 노출되지 않는 책은 바로 시장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온라인서점은 이런 현실을 악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다가 공정위로부터 시정명령을 받은 것이지요. 이로 인해 출판시장은 팔리는 책과 팔리지 않는 책의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1위를 달리는 책이 밀리언셀러에 오르는 기간은 해마다 짧아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책은 초판부수도 소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문사회과학서적은 500∼700부도 팔리지 않습니다. 이런 구조를 타파하는 최선의 방책이 완전 도서정가제입니다.”
―에세이 등 특정 책들만 집중적으로 팔리는 등 출판계에 쏠림 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는 출판계 전체 차원으로 보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심화시켜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인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요.
“인간은 스마트기기로 무언가를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이런 걸 독서에 포함시킨다면 독서의 ‘소외’가 아니라 독서의 ‘범람’이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그들은 스마트 기기로 텍스트만 읽는 것은 아니라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영화, 뮤직비디오 등 무엇이든 즐기고 있습니다. 지난해부터 출판시장을 강타하고 있는 에세이는 공감과 위로의 한 줄 어록입니다. 이 어록들이야말로 소셜 미디어에 가장 적합한 장르인 것이지요. 올해 소설 시장은 참혹했습니다. 그건 스마트기기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소비하는 호모스마트쿠스를 유혹할 정도의 소설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캐릭터가 확실하지 않은 소설이나 드라마는 팔리지 않습니다. 재미, 유희, 캐릭터, 이야기성이 없는 책은 독자로부터 소외되고 있습니다. 출판시장에 스마트기기가 큰 물결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하루 빨리 그에 대비해야 합니다.
―독서·출판문화 진흥을 위해 새 대통령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상에서 정보의 저장이나 보관은 장점이 되지 않습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정보의 가치나 의미를 즉각 판단하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런 능력은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아이들이 함께 책을 읽으며 토론하면서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학교는 아직 암기능력 위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제 학교에 다양한 신간을 갖춰놓고 학생이 함께 놀 수 있는 놀이터부터 만들어야 합니다. 학교도서관 말입니다. 이것부터 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이나 개인의 미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 시스템부터 하루 빨리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내년 출판시장에서는 어떤 키워드가 통할까요.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유일하게 통한 키워드가 ‘자기치유(self―healing)’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까지나 치유만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이제 인간은 희망을 추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거대한 ‘희망’이 아닌 ‘사소한 사치’ 말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분노’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누구나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가치가 전복되는 모습을 자주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역발상의 소수자 담론, 자유로운 연애와 섹스, 궁극의 만족을 꿈꾸는 라이프스타일 등에 값하는 책들이 서서히 존재감을 키워갈 것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독서 운동의 일환으로 단행본을 꾸준히 낼 생각입니다. 100여 명의 초·중·고 교사들이 참여해 만드는 ‘학교도서관저널’이 내년 3월이면 발간된 지 3년이 됩니다. ‘미래를 여는 도란도란 책모임’(가제)을 우선 내년 2월에 발간할 계획입니다. 전국에 10만 개 정도의 책 모임이 생기는 것을 목표로, 독서 모임의 당위성과 독서 방법론 등을 담은 독서 매뉴얼입니다. 부족하지만 학교 도서관이 활성화 될 수 있는 멍석은 제가 깔았습니다. 이젠 그 멍석에서 선생님과 학생들이 신나게 독서 한마당을 벌여야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