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6주일설교 고린도전서12:1-11
제목: 은사에 대하여
본문: 고린도전서12:1-11
오늘은 고린도전서12:1-11의 말씀을 가지고
“은사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은사에 대해서”
저는 여러 음악을 좋아합니다.
그 중에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되면 공연장에 가서 음악을 보고 듣습니다.
독주나 합주도 좋지만 교향악 연주가 참 좋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6번 교향곡 비창이라든지
베토벤의 9번 합창이라든지
말러의 여러 교향곡이라든지 참 좋아서 자주 듣습니다.
공연장에서 직접 볼 때 여러 소리를 들으며
그 악기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 중에 놀라운 것은 팀파니입니다.
아주 웅장하며 중요한 때 화려하게 날아가는 듯 합니다.
또한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울리는 심벌즈나 트라이 앵글 캐스터 네츠 같은
악기들의 모습입니다.
때를 만난 듯 울려대는
금관악기 혼, 트럼펫, 트럼본 놀라운 모습입니다.
그것에 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하는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도 있습니다.
이 모든 악기들은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서
필요한 때 그렇게 연주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훌륭한 연주가 됩니다.
혼자 잘해서도 안되고 혼자 소리만 내서도 안됩니다.
각자 소리를 각자 필요한 때에 내야만 훌륭한 연주가 되어
청중들에게 감동의 순간을 만들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그러한 곳입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은사가 조화롭게 사용되어야만 교회가 세워지고
머리 되신 예수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는 고린도전서12장은
영적 은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영적 은사들이 어떻게 해야 조화롭게 어우러져서 교회를 교회답게 세워가는가 그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연주자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조화롭지 못하고 자기 잘난 체만 한다면
그 연주회는 소음 잔치가 되고 말아
청중들은 떠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우리가 맡은 은사로 잘 행해야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문제가 발생했던
고린도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 우리 교회가 해야 할 바른 일을
찾고 행하기를 원합니다.
신령한 것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신령한 것에 대해서
알기를 원했습니다.
왜 알기를 원합니까?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오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니 어떻게 예수를 믿는다면 신령한 것을
오해할 수 있고 모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신령한 것은 무엇입니까?
신령하다는 것은 영적 은사란 뜻입니다.
은사란 선물로서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가만히 있는데 누가 뭔가 주는 것을 선물이라고 합니다.
영적 은사는 성령에 근거한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두 종류의 성도가 있었습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각 속에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신령한 사람이고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영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은사는 내가 뭘 해서 받은 것이 아니고 선물인데
그것으로 차별화해서 오해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자격이 있어서 은사를 받았다고 하니
그것 때문에 받지 않은 사람은
영적이지 못하다고 무시하고
자신은 우월하다고 으스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교회 안에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2절에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신령하다고 하는데
그들의 과거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말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다녔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은사를 받았습니까?
열심히 무엇을 했습니까?
아니면 어떤 자격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고 오직 은혜로 선물로 은사를 받은 것이니
자랑하거나 차별화하거나 으스대는 일은
어리석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다가 3절에서 은사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신령하다는 자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하는 자는
예수를 저주할자라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행하는 자는 예수를 주라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신앙 생활하다 보면 불편한 사람도 있고
보고 싫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서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자기가 믿는 신의 이름으로 저주를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이 더 강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가 마음에 안드는 사람에게
자기 신의 이름으로 저주를 했습니다.
이런 똑같은 형태가 고린도 교회 안에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저주를 행하였습니다.
자기 마음 속에 불편부당한 사람이 있으면
예수의 이름으로 저주를 하는 일이 교회에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뱅글뱅글 돌려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직 그들의 신앙의 상태는 고린도 됴시의
우상 숭배자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들이 과거에 믿었던
우상 정도로 여기었던 영적 상태의 모습이었다.
성숙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두 차원으로 고백할 수 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처음에 만납니다.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구세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예수를 처음 만납니다.
그렇게 만난 예수를 믿음으로 만나게 되면
구제주를 넘어서 만물의 모든 주권이
그분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는 주권을 의미한다.
신앙을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을 때는 구세주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고백은 내 삶의 영역이
모두 주님께 있다는 고백까지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을 만나서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고 느끼면서
그분이 전부이고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고백하게 됩니다.
바울은 두 단계로 설명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아직도
고린도 도시 사람들이 섬기는
신중의 한 분 정도 오해나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안들면 예수의 이름으로 저주하는 일이 생기고
그래서 파당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구세주이고 그것을 넘어서
전 삶의 영역의 주권을 가진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실 때는 선물로 주신 것인데
받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자격이 있거나
여건이 되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못한 사람은 하대하고 열등하다고 대했습니다.
예수를 구세주를 모시고 넘어서 주권자로 믿는다면
영적 은사를 가지지 못한 자를
무시하거나 저주할 수 없습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세우고 섬길 자입니다.
그렇기에 은사를 받지 못했다고
하대하거나 무시하거나 우쭐하지 않습니다.
은사는 다양하고 은사는 통일적이다.
4-6의 말씀에서 은사는 여러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직분도 여러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사역도 여러 가지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한가지 은사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은사가 있습니다.
한가지 직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 직분이 있습니다.
한가지 사역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사역도 있습니다.
은사는 다양합니다. 직분도 사역도 다양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한분 하나님이십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역사하는 성령은 한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나 그 직분의 주권자는 예수님이시며
사역은 여러 가지나 그것은 우리 가운데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은사는 특별한 어떤 것만이 은사는 아닙니다.
남에게 보이는 어떤 것만 은사는 아닙니다.
내게 있는 것도 은사입니다.
그것은 잘 찾아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있어도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누구에게는 병고치는 은사가 있지만
내게는 긍휼의 은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보이는 것이 은사일 수 있습니다.
꽃밭에 눈이 가시는 분은 그것이 은사입니다.
더러운 것이 눈에 가시는 분은 그것이 은사입니다.
외로운 사람이 눈에 보이면 그것이 은사입니다.
고장난 것이 보이면 그것이 은사입니다.
그 은사를 이미 하나님께서 주셨기에
그것을 사용할 수 있고 사용해야 합니다.
종종 주신 은사를 잘 못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것도 잘못 사용하면 잘못된 것이 됩니다.
어떤 은사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다른 사람과 부딪힌다면 그것은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은사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하고 덕을 세우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주었는데 잘못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었는데 잘못 써먹어서 다른 사람과
부딪히는 사람이 있다.
가장 많은 은사가 방언은 은사입니다.
방언은사를 통해서 주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공중 기도회 시간에
방언으로 말하거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행해서
다른 사람들이 혼란을 느끼게 합니다.
그것은 방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쓰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칼은 유용한 것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사람을 해하는데 사용되게 됩니다.
예언이나 말씀을 전하는 일이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실족시키는 일이라면 그것은 잘못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다른 사람을 좋게 하고
자유하게 하고 평안하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은사를 통해서
오직 주님께 붙어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은사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을
나에게 묶이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불안을 주고 어둠에 빠뜨리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많은 은사를 많은 자들중에 그렇게 해서 이단이 되어
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어둠의 끌고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만 속해 있어야지
어떤 사람에게 속해 있으면 안됩니다.
어느 목회자가 은사가 있다고 카리스마가 있다고,
저 사람에게 기도 받으면 낫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인데 그 사람에게 속해 버리면
그것은 큰 문제입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매여 버립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떠나면 문제가 되고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영적 묶임 상태로 만들어 버립니다.
종종 부부 사이에 묶여 있고 자식에게 묶여 있고
부모에게 묶여 있는 신자가 있습니다.
배우자나 자식은 사랑하는 대상이지
묶어 두는 존재는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 모두를 자유하게 합니다.
묶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건강한 신앙입니다.
어떤 교회를 못 떠납니다.
떠나면 큰일 나는 것처럼 합니다.
그 교회만 구원이 있고
그 교회만 진리가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것은 집착입니다. 진리는 예수님께 있습니다.
물론 우리보다 교회가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교회보다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분명한 것은 말씀보다 우리 주님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지만
예를 들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은사는 문제는 없는데
그것을 쓰는 내가 잘 써야 합니다.
상수원에서 물을 깨끗하게 보냈는데
수도 꼭지에서 녹물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물이 오염된 것이 아니라
수도관이 오염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보편적 은혜가 있습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기도하면 낫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편적 권세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특별하게 나타나는 은사가 있습니다.
주님이 쓰실려고 그런 은사를 주십니다.
그런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은사가 없어도 예수는 믿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은사가 없으면 복음이 확장에
강력하게 쓰임을 받지는 못합니다.
삽으로 땅을 파는 것과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는 것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말이 안 통하고
어떤 일을 하기 어려울 때 은사가 있으면
병든 사람을 낫게 하고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 돌아오게 하는 놀라운 일을 하게 합니다.
은사는 유익하게 하려 하심입니다(7절).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 것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7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방언과 예언과 말씀과 신유 은사 등은
유익하게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누구에게 유익하게 함입니까?
모두를 유익하기 위함입니다.
1.하나님께 유익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한다.
어떤 은사가 나타날 때 하나님은 안보이고
그 사람만 보이면 절대로 안됩니다.
아무리 탁월한 은사라도 그것은 도구일 뿐이지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늘에게 불을 내리게 한다해도
주님이 주시는 것일 뿐입니다.
본인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없어져야 합니다.
우리 이름 석자는 사라져야 하고
오직 주님만 유익해야 합니다.
2.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이 유익해야 합니다.
은사를 사용하고 자신이 멸망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박태선이 그랬습니다.
저의 윗세대 때 많은 사람이
박태선장로에게 가서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대단했다고 합니다.
모일 곳이 없어서 한강 백사장에서 했다고 합니다.
집회를 하면 금가락지가 두 가마니가 나왔다고 합니다.
병든자가 낫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다 교만해져서 이단이 되고 멸망길로 갔습니다.
그럴 바에는 안 하는 것이 났습니다.
성령이 나타나심은 모든 사람에게 유익해야 합니다.
특별히 자신에게 유익해야 합니다.
쓰임받고 버림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늘의 상급이 있어야 합니다.
은사를 행하는 자는 주님만 높이고
우리가 받을 것은 하늘의 상급이 되어야지
이땅의 것을 받으려면 멸망하게 됩니다.
3.은사를 받는 대상자가 유익이 되어야 한다.
예언을 받는 사람 기도를 받는 사람
말씀을 받는 사람이 유익해야 합니다.
은사를 받는 수혜자가 유익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눈이 떠지고 힘을 얻고 병이 낫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확신을 갖는
유익들이 있어야 한합니다.
기도를 받았는데 평안하지 못하고 잠을 못자고 혼란이 온다면 그것은 사탄의 역사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는 합리적이고
보편적이고 따뜻하고 진실하고 자유합니다.
이걸로 열매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맞는 소리를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해가 대단하고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불편하다면 따듯하지 않으면 변질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까이 하면 안됩니다.
유익하지 않은 것이고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은사를 받기를 사모하고 더 큰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 쪽으로 사모함이 있어야 한다.
말씀을 잘 전하고 싶은 욕심
더 많은 기도를 하고 싶고
더 많은 영혼을 살리고 싶고
이런 거룩한 욕심들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일을 행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하고
나에게 유익해야 하고
은사를 받는 자가 유익해야 합니다.
은사는 성령의 뜻대로 주신다.
11절은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은사는 그의 뜻대로
한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이다.
여러 가지를 받았거나 안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다 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도 안 주신 것은 없습니다.
뭔가 있습니다. 반드시 있습니다.
다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도 안 주시지는 않습니다.
받은 복을 세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가난하다. 주고 싶은데 가진 것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주신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맞춤식으로 주십니다.
바울도 불평하며 자신의 병을 고쳐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바울은 병 낫기를 더 이상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잘 사용해야 합니다.
없다고 열등감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남들 다 받는 것 같은 방언을 안 받았다고
실망 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은사를 주셨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사를 받았다고 신령하고 은사가 받지 않았다고
신령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은사는 단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선물로 필요한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다 하나님이 주시고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은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하고
나에게 유익해야 하고 그 선물을 받아 드리는
사람에게도 유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놀라운 것이라도
그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사를 사모하고 그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확장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발견하고
그 은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러분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은혜를 끼치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