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문학 36호 원고 / 影園 김인희
- 시 5편 -
1. 사랑의 무게
影園 김인희
천칭 저울에
사랑을 올려놓는다.
그대 쪽으로 내려가는 저울
작은 들꽃을 어루만져 주고
받은 향기를 올리고
밤하늘 떨고 있는 별에게
불러준 노래를 올린다.
애타게 봄을 기다리는
나목의 그리움을 올리고
온종일 옴짝달싹 못하고
흘린 땀방울을 올린다.
아직도 그대 쪽으로 기우는 저울
언제쯤
우리 사랑 수평이 될까.
2. 작은 꽃의 노래
影園 김인희
작은 꽃 한 떨기
가시나무 아래
움츠리고 피었다
따뜻한 햇살
키 큰 나무들 차지
가시가 무서워
땅바닥에 웅크린다
유영을 끝낸 태양
서산에서 자진하고
초저녁 작은 별 하나
가시를 헤집고
작은 꽃을 찾는다
무서워하지 마!
너의 노래가
봄을 데려오는 거야
작은 꽃
활짝 노래 부른다
3. 어머니의 봄날
- 八旬 獻詩 -
影園 김인희
연분홍 치마가 흩날리던 열일곱 소녀의 봄날
앞산에서 벚꽃이 불꽃 되어 폭발하고
뒷산에서 뻐꾸기가 노래하는 무지개 동산이었습니다
한 남자를 따라 이씨 가문 맏며느리가 되던 날
착한 아내가 되고 지혜로운 어머니가 되는 꿈을 품고
솜씨 좋은 깐깐한 시어머니 섬기고 가문을 받들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맑은 하늘에 벼락치고 폭풍우 몰아치던 날
당신의 푸르름이 대지를 뒤덮고 있던 청춘이었습니다.
서리꽃 한(恨)으로 피고 지는 계절의 윤회 속에서
발자국 걸음걸음 만든 웅덩이에
별의 눈물이 고이고 달이 유영하고
영롱하게 빛나는 자식들이 태양이었습니다
인생사 일장춘몽!
뿌리 깊이 내리고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봄 여름 가을 겨울 도돌이표 연주하며 만든
굵직한 팔십 개의 나이테는 훈장이 되었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자식들 위하여 하늘에 바치는 어머니의 기도는
오늘 자식들이 걸어가는 길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어머니의 봄날은
영원히 지지 않는 꽃동산에 펼쳐진 꽃길입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리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우리 옆에 오래오래 있어주세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4. 아버지의 소환
影園 김인희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는
독수리 오 남매
아버지의 소환이다
이산가족이 애타게 가족 찾는 것을 보아라
너희들은 가진 것 없어도 사이좋게 지내거라
부모 기일에 산소에 모여
위로하고 추억을 꺼내 보아라
울지 말고
큰소리로 웃다 가거라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사람과 사람 사이
아프게 하지 말고 덕을 베풀어라
청개구리 오 남매
부모님 산소에 앉아
한바탕 쏟아내는 웃음 소동
산비탈 진달래를 흔들어 깨우고
돌아오는 길
제비꽃이 눈물 속에 웃는다
5. 최초의 별
影園 김인희
열다섯 살 소녀
최초의 별을 만난 후
어둠 속에서 빛을 수놓듯
착하고 따뜻하게 살아온 여정
언제 어디서나
책을 끼고 살라는 마지막 말
그 약속 별이 되어
책 속에 유배된 소녀
당신을 향한 그리움
두 눈에 그렁그렁 별을 달고
낮이나 밤이나 하늘을 헤맨다
그 사랑 찾아
집시가 되어 떠돌던 영혼
詩와 별과 사랑과 삶
성을 짓고
별 하나씩 초대한다
한 줄 詩에 혼절하는 사람
별을 향하여 각혈로 노래하는 사람
사랑을 위하여 몸부림 치는 사람아
사람과 사람 사이 꽃으로 피어라
최초의 별, 그대여
나, 그대의 마지막 별이 되고 싶다.
- 수필 2편 -
1. 나의 사랑, 나의 가족! (隨筆)
影園 김인희
시간은 눈치채지 못하게 아주 조금씩 소리 없이 흘렀다. 연초 위풍당당 발걸음 걷기 시작한 지 엊그제인데 그새 세모(歲暮)에 이르렀다. 시간은 위대했다. 내가 아무리 붙들어 두고 싶다고 고백을 하여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야속하리만치 빠르게 떠났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가장 착한 마음으로 귀의하게 된다. 위대한 시간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한 해를 돌아보고 잘못한 점을 반성한다. 한 해 동안 받은 축복을 헤아린다.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게 각자의 위치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감사할 수밖에 없다.
나의 사랑, 나의 가족!
나에게 가족은 모든 것이다. 가족을 생각하면 가을 들녘에 피어있는 들꽃처럼 나를 부르르 떨게 한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고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이다. 내가 철옹성(鐵甕城)으로 지켜야 하는 거룩한 성지(聖地)이다.
나는 결혼 후 팔을 걷어 올리고 현모양처(賢母良妻)를 자처했다. 우리 가정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공간이 되게 하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가족이 내가 가꾼 가정에서 행복을 만끽할 수 있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그린 가정에 대한 빅픽쳐를 완성하기 위해 나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했다.
나는 자녀를 잉태했을 때부터 태교에 집중했다. 우리나라 궁궐에서 행했던 태교, 양반가에서 지켰던 태교, 유대인이 중요시했던 태교에 관한 책을 선정하여 읽었다. 누가 내게 태교에 대해 강의하라면 자신 있게 강단에 설 수 있겠다. 그렇게 자녀를 소중하게 품었다가 세상에 내놓았다.
두 자녀를 양육할 때는 육아지침서를 총망라해서 읽었다. 자녀들이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위중한 것인지 몸소 가르쳤다. 그 자녀들과 날마다 책을 읽고 토론을 했다. 내가 교육원에서 유대인의 하브루타 교육에 대해서 공부할 때 내가 자녀를 양육했던 방식이 바로 유대인의 교육 방식이었다는 것을 알고 전율했었다. 자녀들의 백일과 첫 생일에 들어온 축하금과 금반지를 모두 팔아서 책을 들여놨다. 자녀 방을 책으로 가득 채우고 거기서 자녀들과 아웅다웅했다. 날마다 티격태격, 좌충우돌 정신없이 지냈다.
자녀들이 걷기 시작했을 때 부여 박물관 주차장에서 세발자전거를 배웠다.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궁남지를 산책했다. 나는 자녀들과 도로를 걸으면서 눈에 들어오는 글씨는 죄다 읽었다. 상점의 간판, 지나가는 탑차의 광고 하물며 쓰레기통에 씌어 있는 글씨조차 우리에게는 학습의 장이었다. 그때 나는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내 직장 내 꿈을 모두 미루어두고 전업주부로서 가정에 상주했다. 성인이 된 두 자녀를 국가와 사회에 들여보내고 내 선택에 대해 여한이 없다.
남편의 위치는 언제나 내 머리 위에 두었다. 언제나 남편의 뜻에 따르고 그를 존중하면서 지냈다. 딱! 한 번 남편의 뜻을 거스른 적이 있다. 첫째 자녀가 태어났을 때 우리나라는 IMF를 맞았다. 국가의 흔들리는 경제는 곧 우리 가정에도 두려운 진동이 되었다. 남편의 월급이 삭감되었다. 그때 철없는 아내는 남편과 상의 없이 자녀들을 위해 방안에 가득 책을 들여놓았다. 녹초가 된 모습으로 퇴근한 남편의 작은 눈이 휘둥그레 했다. 남편과 상의 없이 책을 들인 것이 남편에게는 미안했지만, 자녀들을 위해서 철회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남편에게 무릎을 꿇고 “여보, 당신과 상의 없이 책을 사서 정말 미안해요. 이번 한 번만 이해해 줘요. 우리 아이들에게 책을 읽히는 것이 절실해요. 오늘 책값이 아깝지 않도록 열심히 읽히고 잘 양육할 거예요. 다른 방면으로 낭비하지 않을게요.”하고 이해를 구했다. 남편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나를 꼭 안아 주었다.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남편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다. 자녀들에게는 지혜로운 엄마가 되었고 남편에게는 착한 아내로서 도리를 다했다.
그 후로 나와 자녀들은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다. 우리는 아침 식사하고 책을 읽었다. 점심 식사하고 책을 읽었다. 저녁 식사하고 또 책을 읽었다. 작은 방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까르르, 하하하, 호호호, 낄낄낄 날마다 자지러지게 웃었다.
지인들이 자녀에게 한글을 가르친다고 기백만 원하는 학습지를 사고 한글 교사에게 자녀를 맡길 때 나는 자녀들과 책을 가지고 놀았다. 자녀들이 말문이 열리면서 기적처럼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자녀들은 정확한 발음으로 또랑또랑하게 책을 줄줄 읽었다. 우리 주변 지인들이 깜짝 놀라고 유치원 교사를 하는 시댁 형님께서는 아이들이 영재라고 칭찬했다.
첫째 딸아이가 여섯 살 때 유치원에 갔다. 처음으로 엄마 품을 벗어났다. 둘째 아들을 안고 지내면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공부를 시작했다. 자녀들보다 한발 앞서 준비하고 자녀들과 발걸음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은 인터넷 강의로 언제든지 들을 수 있는 교육시스템이 되었지만, 내가 공부할 당시는 정해진 시간에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되는 학습을 챙겨서 들어야 했다. 자녀들과 분주하게 지내는 동안 방송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비디오테이프에 모든 학습을 녹화했다. 더러는 카세트테이프로 수업을 듣기도 했다. 그때처럼 지독하게 공부한 적이 또 있었던가.
나는 대학교 공부를 치열하게 하면서 내 시간을 우선 가족을 위해 분배하고 가족이 모두 잠든 늦은 시간에 공부 삼매경에 들었다. 남편이 퇴근 후 우리 가정은 가장 안락하고 따뜻한 안식처로 만드는 것이 내 최선이었다. 두 자녀가 아빠 배에 앉아서 노래 부르고 아빠 등을 타고 오르면서 탄성을 질렀다. 아빠의 웃음소리와 자녀들의 웃음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면서 거실이 들썩거렸다.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고 설거지를 하면서 덩달아 콧노래를 하모니에 더했다.
자녀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는 학부모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학교 과제로 글쓰기가 많았다. 독후감은 물론 학교 행사 때마다 글짓기 과제가 있었고 대외 백일장 대회도 자주 있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책을 읽었던 내 자녀들에게는 유리했다. 두 자녀는 글짓기 대회 상을 휩쓸었다. 첫째 딸이 초등학교 6학년 때 도지사상을 받았을 때 부여군 교육청 홈페이지 메인을 장식했다. 둘째 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백일장 대회에서 장원하고 신문에 실렸다. 초등학교 때뿐 아니라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 성인이 된 지금도 책을 끼고 지내고 글을 쓰는 취미를 나르시시즘으로 간직하고 있다. 참으로 다행이다.
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 때 진해에 있는 H학교에 지원했을 때 잠시 떨었다. 아들이 입시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받지 않고 혼자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H학교 입학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자기소개서를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써서 제출했다고 했을 때 어찌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H학교에서 최종 합격했다는 통보를 문자를 받았을 때 아들은 야간자습을 땡땡이하고 귀가해서 거실에서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 아빠, 엄마~~ 정말 기뻐요.’하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아들이 H학교 합격 세리머니 전부였다. 그 아들이 H학교 졸업하고 국가의 소속이 되었으니 우리 가문의 영광이다.
남편은 한결같이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아내가 공부를 시작했을 때 적극 지원하기 시작한 그의 임무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아내가 방송통신대학교 졸업하고 공부방을 시작했을 때 이층집을 사고 옥상에 공사하여 공부방을 만들었다. 아내가 공부방 교사로 일하면서 건양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한 남편이다. 시낭송 대회를 위해 시를 외우는 아내의 모니터링을 자처하고 밤마다 아내의 시를 들으면서 틀린 곳을 찾아냈다. 그 아내가 박사과정 공부를 하겠다고 원서를 내고 최종 합격통지서를 받았을 때 활짝 웃으면서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편은 아마도 전생에 아내는 남편의 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취업을 준비하던 첫째가 꿈틀하고 태동을 시작했다. 딸은 아름답고 착하고 장점이 많으니 제자리 잘 차지할 것이다. 아들은 언제나처럼 위풍당당 전진할 것이다. 남편은 한결같이 근면하고 성실하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우리 가족을 지킬 것이다. 나는 다시 공부를 시작할 것이다. 나는 거룩한 가정의 안주인으로서 지고지순하게 위치를 지키면서 문학을 향하여 발돋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가장 순결한 모국어, 한국어로 글을 쓰고 시낭송을 하여 우리말과 우리글의 우수성을 널리 퍼뜨리는 수고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말과 글은 그 사람의 품격(品格)이다!
내 삶의 좌표로 삼은 격언이다. 나는 언행심사(言行心事)가 곧 나의 품격이라고 역설한다. 글을 쓰는 문인(文人)으로서 살얼음판을 걷는 이유이다. 언젠가 멀리 두고 지냈던 지인으로부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참담한 문자를 받고 아연실색했다. 그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비록 그의 겉모습은 우아해 보이지만 그의 내면을 훤히 들여다본 후 회칠한 무덤이 곧 그와 같다고 생각했다.
내 혀를 깨물어 피가 날지언정 남을 헐뜯지 않을 것이다. 내 손으로 쓰는 모든 글이 사람들에게 따뜻한 메시지가 될 수 있게 노력할 것이다. 나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말하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면서 글을 쓸 것이다. 말과 글이 곧 품격이라는 말을 지켜낼 것이다.
임인년 새해를 맞이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거룩한 마음으로 새해맞이 준비를 한다. 우리 가족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무릎 접어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지금까지 지내온 것처럼 언제나 지켜주시고 어디서나 보호해 주시리라 믿는다. 우리 가족 모두 건강을 축복으로 주시기를 구한다. 우리 가족 모두 제 위치에서 제 역할을 신실하게 하여 우리나라와 우리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들이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끝-
2. 최초의 별을 찾아서
影園 김인희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토요일 오전이다.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늦장을 부리다가 갑자기 서두르기 시작했다. 새벽녘에 잠든 소녀를 차마 깨울 수 없어서 가만가만히 서재에 들어와서 학과 공부를 했다. 그토록 고대했던 공부를 시작했건만 코로나-19의 얄궂은 방해로 학교에 가지 않고 비대면 수업 중이다. 고작 노트북을 열고 PC 화면으로 스승님을 만나는 수업이 못내 불만이다. 폭발 일보직전이다.
동영상 강의 삼매경에 들었다가 소녀에게 특별한 이벤트를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우선 소음으로 간접적이나마 잠을 깨우려고 거실 창문을 활짝 열어 새로운 공기를 맞이했다. 머리를 감고 드라이어로 시끄럽게 머리를 말리고 음악을 크게 틀었다. 한참 ‘옷소매 붉은 끝동’ 드라마에 빠졌던 터라 드라마 배경음악으로 잠자는 공주를 깨울 참이었다.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눈을 비비면서 소녀가 내 품으로 안겨온다. 새벽녘에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고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가슴에 안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면서 비가 내리고 있는 날에 시외로 드라이브 가면 어떨까 달콤하게 유혹했더니 금세 환한 미소를 짓는다.
예쁜 소녀가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 1차시 동영상 강의를 마쳤다. 내산면 미암사 근처에 있는 소담 돈가스에 전화해서 점심식사를 예약했다. 점심식사 시간 후에 외산을 경유하여 청양군 남양을 돌아서 부여로 돌아올 참이었다. 어림잡아 세 시간 이상의 데이트 코스다.
모녀는 예약시간 30분 전에 집에서 출발했다. 소녀는 아직 잠이 덜 깨었을 텐데 활짝 웃는 얼굴이다. 자동차가 출발하면서 소녀는 블루투스를 연결하여 클래식 음악을 잔잔하게 흐르게 한다. 소녀는 차창을 내려서 환호성을 지르고 물개 박수를 치면서 좋다고 난리다. 내가 계획한 일정을 브리핑하니 행복하다고 하면서 콧노래를 부른다.
차창으로 스쳐가는 먼 산이 가깝게 다가온다. 가로수 나목이 가지마다 방울방울 물방울이 맺혀있다. 궁남지를 스쳐갈 때 버드나무 실가지마다 연초록의 작은 잎을 꽃처럼 피워낸 모습을 발견했다. 낮은 산자락 양지쪽에 한 무리의 노란색 개나리를 보았다. 논두렁마다 초록색 실루엣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산비탈 밭에는 부지런한 농부 부부가 흙을 일구고 있었다. 모녀는 잠시 침묵하고 봄의 소묘를 감상했다.
소담 돈가스는 작은 시골집을 리모델링한 음식점이다. 공간이 협소하다.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할 때가 종종 있었다. 우리는 예약된 자리에 앉아서 치즈 돈가스와 피자를 맛있게 먹었다. 작은 공간을 예쁘게 꾸며놓은 사장님의 솜씨를 감상하면서 속닥속닥 대화를 나누면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미리 예약하지 않은 손님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녀는 음료와 커피를 차 안에서 마시자고 눈짓으로 대화한 후 일찍 자리를 비웠다. 자동차 안에서 커피와 음료를 마신 후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자동차 안에는 클래식 음악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모녀 수다가 한창이다.
“엄마, 고마워요. 요즘 책상에 앉아 옴짝달싹 않고 공부하는 것이 따분했어요. 한 번쯤 드라이브를 부탁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엄마가 너무 바쁘잖아요. 그래서 이래저래 눈치를 보고 있었어요. 엄마가 아침에 소담 돈가스에 가자고 했을 때 내 마음을 들킨 줄 알고 깜짝 놀랐어요. 사실은 어제 공부하다가 소담 돈가스 먹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랬구나. 우리는 텔레파시가 통하는 모녀구나. 엄마가 바빠서 미안해. 평생교육사 공부와 대학원 박사과정을 병행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구나. 여기저기 문학회 일과 행사를 챙기는 것도 긴장해야 해. 그러나 늘 너와 우리 가족이 우선이야. 오늘도 다른 일정 모두 미루고 너를 챙기는 거야.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주면 고맙겠는데.”
“알지요. 엄마가 늘 나를 우선으로 여기는 것에 감사하고 있어요. 엄마, 나는 나중에 정말 엄마에게 잘할 거예요. 엄마가 나에게 해준 것처럼 엄마에게 그대로 돌려줄 거예요. 엄마가 늘 그랬잖아요. 사람과 사람 사이 Give and Take라고. 사랑을 주면 사랑을 받고 은혜를 받으면 은혜를 돌려주는 거라고 했어요. 엄마는 내가 가장 힘든 터널을 지나는 동안 가장 밝은 미소를 주었고 마르지 않는 옹달샘 같은 사랑을 주었어요. 내가 그 은혜를 어떻게 잊어요. 잘할게요.”
“엄마가 새벽에 TV를 켰다가 이어령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어. 선생님은 학생 같은 젊은이들에게 말씀하셨어. 사람이 태어날 때 혼자 울고 주변 모든 사람들이 웃고 죽을 때 본인은 웃고 주변 사람들이 울어주는 삶을 살라고 하시더라.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촬영한 작품이라는 자막이 있는 영상 안에서 선생님께서는 하얀 순백의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손을 흔들면서 잘 있으라고 인사하시더라. 엄마는 TV를 보면서 울었단다.”
“아! 알겠어요. 엄마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지. 엄마는 이어령 선생님처럼 훌륭한 어른이 되고 싶은 거예요. 그 선생님처럼 젊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후배들이 우리나라의 일꾼이 되도록 이끌어 주고 싶은 꿈을 간직했을 거예요. 엄마는 이미 그런 경지에 다다르고 있어요.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하면서 자신을 가을 서리처럼 채찍질하고 있잖아요. 저는 엄마가 자랑스러워요. 저도 훌륭한 엄마에게 어울리는 훌륭한 딸이 될 거예요. 엄마 힘내세요.”
자동차가 남양면을 지나갈 때 불현듯이 모교 동영 중학교에 가고 싶었다. 엄마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소녀는 카메라 우먼을 자처했다. 나를 교문 앞에 세우고 하나, 둘, 셋 찰칵. 다시 나를 운동장에 세우고 학교 건물과 나를 카메라에 담았다.
나는 잠시 중학생 소녀가 되었다. 중학교 정문을 향하여 실개천 위에 놓여있는 다리를 건너는 찰나의 시간이 37년 전 중학생이었던 소녀의 시절로 가는 타임머신에 탑승하는 시간이 될 줄이야. 다리를 건너 교문에 이르렀을 때 열다섯 살 소녀가 되어 나의 문학의 하늘에 뜬 최초의 별을 찾고 있었다.
국어 선생님!
나는 선도부로서 교문 앞의 다리 끝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맞이하여 복장과 소지품을 점검하곤 했다. 그때마다 출근하는 선생님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행운은 내 차지였다. 얼음조각처럼 날카로운 카리스마의 소유자 국어 선생님. 그러나 내 앞에서는 언제나 환하게 웃는 해바라기였다.
교무실 복도에는 ‘동영의 꽃들’이라는 보드가 걸려 있었다. 1학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성적과 2학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성적이 전교 1등부터 10등까지 등수와 사진과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때 상위권에서 내려오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부했다. 내가 교무실 복도를 지나칠 때 국어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시고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다. 그때 선생님께서 주신 칭찬은 마법과 같은 효력이 있었다. 나를 맨 상위권으로 올려놓았다.
운동장에 서서 한참 동안 중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 황홀했다. 나는 교무실 쪽을 바라보고 서서 국어 선생님을 생각하고 공부했던 교실 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중학생이었던 37년 전의 단층 교실은 없어지고 새로운 2층 건물이 낯설게 서있었다.
나는 비로소 지천명에 이른 현실의 나를 발견했다. 국어 선생님께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한 번쯤 나를 생각하셨을까. 나는 이토록 선생님을 향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내 문학의 하늘에 뜬 최초의 별이다. 나를 문학으로 가는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길안내를 하셨다. 선생님께서 소나기의 두 주인공의 순수한 마음을 열어 보여주었고, 황진이의 詩에 담긴 절절한 그리움을 해석해 주셨다. 선생님께서 주신 마지막 당부 수불석권(手不釋卷)의 메시지는 지금의 나를 만든 일등공신이다.
비가 내리는 운동장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소녀가 바람이 차갑다고 상화다. 부여로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소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잠시나마 중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 행복한 시간이었다. 자동차 안에는 클래식 음악의 선율을 타고 열다섯 살 소녀의 사랑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