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황성 총관이 혈마에게 보고했다. "성주님, 적두문에 대해서 관청이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적두문? 거기는 또 어디야?" "하남에 있는 조그마한 문파입니다. 문도 수가 서른이 되 지 않습니다." 혈마가 인상을 썼다. "총관, 내가 그런 자잘한 문파의 일까지 보고받아야겠어? 본좌는 무림맹과 마교를 사움 붙이기 위해서 밤잠까지 설치 는 거 잘 알면서 왜 그래?" "적두문의 위에 팔독문이 있습니다." 혈마가 멈칫했다. "팔독문? 팔독문이면 지난번에 그 일을 한 곳이잖아?" "그렇습니다. 게다가 그것도 있는 곳입니다. 만에 하나라 도 일이 잘못되어 팔독문까지 걸려드는 경우를 미리 대비해 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혈마가 보기에도 팔독문에 관청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좋지 않다. 그는 언제나와 같은 방법을 결정했다. "뇌물을 써. 관리들은 원래 돈을 좋아하지. 큰일이 머지않 았으니 시끄러워지지 않도록 뇌물을 넉넉히 주고 무마시켜. 아, 그곳에 힘을 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고위 관리들을 찾아 봐. 그중에 우리 돈 받아먹어 온 자가 몇 있을 거야." "물론 몇 명 있기는 합니다만..." "그럼 추가로 몇 푼 주고 처리해 달라고 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지는 않겠군." 총관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게 쉽지 않습니다. 이미 은근히 청탁을 시도했지만 해 당 관리들이 이 일에 대해서는 도움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돈도 받지 않습니다." "뭐? 그놈들이 미쳤나? 잘만 받아먹던 돈을 왜 안 받아?" "이번 일을 진고불이 직접 조사하고 있답니다. 찔리는 것 이 있는 관리들은 진고불의 조사 대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 느라 철전 하나도 추가로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진고불? 그 포쾌 진고불?" "그렇습니다. 황제 직속 포쾌 진고불입니다." 혈마가 인상을 팍 썼다. "알아. 몇 번이나 귀찮게 한 놈이잖아. 그놈이 수사깨나 한 다지?" "명포라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천하제일포쾌라고까지 불리 고 있습니다." 천하체질포쾌가 사황성의 약점을 잡고 늘어진다면 혈마도 찜찜하지 않을 수 없다. "쳇. 그놈이 팔독문의 일을 눈치 채고 조사하면 이 기회에 없애 버릴까? 팔독문은 독을 잘 쓰니까 암살에는 적격이잖아." 총관히 급히 말렸다. "어림도 없습니다. 그의 무공은 무림에 적수가 많지 않은 경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적어도 구파일방의 장문인과 겨 뤄도 꿀리지 않는 자입니다." "그럼 독은 안 먹히겠군." "그렇습니다. 내공이 고강하고 독에 대한 기본 지식까지 있어 독살은 극히 힘듭니다. 어지간한 독으로는 효과가 없으 니 진귀한 극독을 사용해야 조금이라도 독살 가능성이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독을 써서 독살을 하면 증거가 남습니 다. 거의 틀림없이 역추적당할 겁니다." http://cafe.daum.net/seamandmean "황제가 화내겠지?" "당연합니다. 그자를 죽이면 황제가 가만있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 사황성이 그 일로 인해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하지 만 그자 하나 죽여서 얻는 것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을 겁니다." "난처하군. 그렇다고 팔독문을 버릴 수도 없고. 에이, 할 수 없지. 적두문만 버리자. 그 일은 팔독문보고 알아서 하라 고 해." "적두문을 말입니까?" "대업이 코앞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 할 수 없잖아? 어 차피 우리가 키운 문파도 아니니까. 내 직속 부하만 아니면 괜찮아. 그러니 증거나 남기지 마." * * * 주유성은 진고불과 같이 움직였다. 그는 진고불과 있는 동 안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을 결심이었다. 그래서 말을 타고 움 직이는 데도 군소리가 없었다. 진고불로서는 주유성이 정말 게으름뱅이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소문은 과장이 심하다더니 정말이군. 확실히 게으름 면모 가 상당히 보이지만 그래도 소문만큼은 아니야.' 진고불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지금 주유성의 게으름은 자 신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주유 성을 데리고 남소에 도착한 다음에는 더 이상 좋은 기분을 유 지할 수 없었다. 몇 명의 포쾌가 적두문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구경꾼들도 멀찍이 서서 보고 있었다. 진고불이 말에서 내려 굳은 얼굴로 적두문의 정문으로 다 가갔다. 정문에 서 있던 포쾌 중 하나가 손을 저었다. "여기는 살인 사건이 벌어진 곳이오. 물러서시오." 진고불은 품에서 패를 꺼내 포쾌에게 내밀었다. 포쾌의 신 분을 증명하는 신분패였다. 모양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패 는 일반적인 것과는 재질에서 차이가 있었다. 진고불이 내민 패는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천하에 황금패를 가진 포쾌는 한 명뿐이다. 포쾌가 그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허억! 진고불 대협!" 진고불은 이미 이 동네를 몇 번이나 조사했다. 그러나 그것 은 범인이 경계하지 않도록 은밀히 한 일이다. 따라서 이 포 쾌가 그의 얼굴을 모르는 건 당연하다. 이 포쾌는 진고불을 처음 보지만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진 고불의 얼굴은 그가 전해 들은 인상과 일치한다. 더구나 황금 으로 된 포쾌 신분패를 가지고 있다. 무턱대고 가짜라고 의심 하기에는 진고불의 유명세가 너무 강하다. 진고불이 패를 집어넣으며 질문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진고불의 직위는 포쾌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포쾌보다 엄 청난 고참이다. 더구나 그에게는 언제든지 각 지방의 포쾌들 을 동원할 수 있는 비공식적인 권한이 있다. 진고불은 포쾌 중의 포쾌, 모든 포쾌의 우상인 천하제일포쾌다. 포쾌가 장군을 만난 병사라도 된 듯 차려 자세를 취하며 즉 시 대답했다. "간밤에 적두문이 적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 일로 적두 문의 문도 스물다섯 명이 모두 살해당했습니다. 현재 그 사건 을 조사 중입니다." "안 좋군. 흉수는?" "흉수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뻔합니다. 적두문은 사파입니다. 따라서 저희는 정파에서 손을 쓴 것이라고 추측 하고 있습니다." 진고불이 인상을 쓰며 적두문으로 들어갔다. 포쾌가 재빨 리 따라 들어와 동료들에게 진고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적 두문에 들어와 있던 관청 사람들이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모 조리 진고불에게 달려와서 인사를 했다. 그걸 구경하는 주유성은 진고불의 위세가 대단함을 느꼈다. '천하제일포쾌라더니 장난 아니네.' 주유성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시체들이 만든 피 웅 덩이가 굳어 있었다. 현장을 둘러본 진고불이 인상을 펴지 않은 채로 주유성에 게 질문했다. "주 소협이 보기에는 어떠시오? 범인이 정말로 정파라고 생각하시오?" 안색 나쁜 주유성이 즉시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정파의 누군가가 사를 멸하기 위해 서 했다면 당당히 자기들 짓이라고 밝혔겠죠." '뭐, 내가 했다면 입 닥치고 있었겠지만.'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주유성이 정색을 하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누구나 사정 따위가 있어서 이런 일을 몰래 했을 수 도 있어요." '나도 그러거든요.' "하지만 그런 경우라고 하면, 이건 공식적으로 한 일이 아 니라는 뜻이잖아요. 이런 자잘한 사파를 조용히 지워야 하는 건 정파에서 잘 안 한다고요. 오히려 그런 일은 사파가 훨씬 많이 하죠." 진고불은 주유성의 말에 만족했다.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오. 주 소협은 여기서 조사한 다고 어슬렁거리고 있는 사람들보다 낫군. 이 사람들은 관청 의 녹을 먹고 있으면서도 사건이 일어나면 가장 처리하기 편 한 쪽으로 판단해 버리는 잘못을 하고 있으니까." 그는 이 지역 관청에서 이 일을 자세히 조사하지 않고 정파 의 사파 청소로 결론 내리려 하는 것을 꾸짖었다. 진고불의 말에 포쾌들은 뜨끔했다. 그들은 무림문파 간의 분쟁에 깊게 개입하는 것을 싫어한다. 더구나 그 무림문파가 죽어 마땅한 사파라면 말할 것도 없다. 진고불은 긴장한 포쾌들에게서 신경을 끄고 주유성을 돌아 보았다. "주 소협은 그럼 범인이 누구라고 생각하시오?" 주유성이 진고불을 삐딱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쳇.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나를 시험해요?" 그는 마음에 찜찜한 것이 있어 나름대로 부지런히 움직이 고 있다. 남이 보기에는 여전히 게으른 편이지만 주유성 입장 에서는 상당히 노력하는 중이다. 하지만 불만이 없는 것은 아 니다. 그의 태도에 포쾌들이 발끈했다. "무례하다. 이분이 누구신지 모르는가!" 주유성은 포쾌들의 항의를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렸다. 진고불이 대답했다. "당연히 시험해야지. 내가 아는 걸 주 소협도 아는지 모르 니까." 주유성은 이런 일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정말 많다. 사실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사건의 현장을 날카롭게 보는 눈은 가 지고 있지만 그걸 분석하는 것은 공부한 적이 없다. 그래도 이 일에 대한 대답은 가지고 있다. "제가 상인이라서 아는 건데, 장사할 때 손해 보고 파는 사 람은 없어요. 이 일은 이들을 죽여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자 가 저지른 거죠. 이익이 없다면 왜 이런 귀찮은 짓을 해요?" "그렇지. 그런 자가 범인이지. 그게 누굴까?" "기가 막힌 우연으로 무슨 사건이 벌어졌다고 보기보다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뭔가가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 죠. 지금 이 문파에 가장 큰일은 진 대협의 방문. 따라서 범 인은 진 대협이 오는 것을 알고 손을 쓴 거예요. 진 대협이 이들에게서 뭔가를 캐내면 큰 손해 보는 자이지요. 꼬리를 자르면 그 손해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이기도 하고요. 이건 틀림없이 살인멸구예요." 진고불이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좋은 의견이야. 그럼 우리는 같은 자를 범인으로 보는 건 가?" 주유성이 주변을 다시 확인했다. "뭐, 독을 쓴 흔적은 없지만 맞겠죠. 어차피 증거가 있어야 만 조사를 계속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진고불은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맞아. 삼절서생의 그 생각은 정말 마음에 쏙 드는 군. 쳐들어가는 건 몰라도 조사는 증거없이 얼마든지 할 수 있지. 당연히 나는 다음 조사 대상을 결정해 두고 있다네. 여 기는 단지 확인을 위해서 거치려고 한 곳. 이제 가려는 곳까 지 살인멸구를 할 수는 없으니 이걸 핑계 삼아 덮칠까?" 주유성이 조금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거기는 꽤 큰 무림문파잖아요. 건드리지 마땅치 않을 텐 데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내가 왜 혼자라는 건가? 주 소협이 있잖은가?" 팔독문은 제법 큰 문파다. 문도 수가 수백 명에 이르고, 고 수도 많다. 그리고 독을 잘 다룬다. 독은 여러 가지로 껄끄럽 기 때문에 다른 문파들은 팔독문을 쉽게 건드리지 않는다. 그런 팔독문의 담벼락에 복면을 한 두 명의 사람이 바짝 달 라붙었다. 주유성이 소곤거렸다. "진고불 대협, 조사도 조사 나름이지 이거 포쾌가 할 일은 아니지 않아요?" "주 소협, 내가 지킬 것 다 지켜가면서 수사했다면 어떻게 천하제일포쾌가 될 수 있겠는가? 이 정도는 기본이지." "그래도 복면에 담을 넘으면 도둑놈과 다를 바가 없잖아요." "도둑놈을 잡으려면 도둑질도 알아야 하는 법이야. 사실 나는 열쇠를 따는 데도 일가견이 있지." "어련하시겠어요? 그런데 진고불 대협은 무공이 높으시잖 아요. 저 같은 하수가 따라가면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흐흐흐. 천하제일포쾌를 우습게보지 말게나. 내가 주 소 협의 집이 있는 곳 윗동네의 금불상 도난 사건을 조사했던 사 실을 잊었는가? 주 소협이 그때 제압한 사람이 이번 무림비무 대회 준 우승자라면서? 내가 왜 서현까지 찾아갔는데?" "윽!" "그래서 나는 주 소협의 안전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있다네. 더구나 주 소협은 독에 대한 이해가 높지. 이제부터 주 소협 은 내 대신 팔독문의 독을 처리해 줘야지. 그러니 군소리 말 고 어서 들어가세나." 주유성은 진고불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쳇! 할 수 없지요. 저 먼저 넘어갈게요." 주유성이 포기하고 담을 조용히 타고 넘었다. 진고불도 복 면 속에서 웃으며 같이 넘어갔다. 팔독문은 독을 잘 쓴다. 독에 의지한 문파의 공통점은 일반 무사들의 무공이 명성에 비해서 좀 떨어진다는 것이다. 매복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주유성과 진고불은 곳곳에 매복해 있는 사람들의 기척을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들 정도 되는 고수의 귀에는 매복 자들의 숨소리가 고함 소리처럼 확실하게 들렸다. 그들은 미꾸라지처럼 빈틈을 타고 넘으며 움직였다. 마침 내 인기척이 없는 정원까지 이동한 진고불이 작게 속삭였다. "특별한 위험은 없어 보이는군. 나는 저 창고들을 수색해 보겠네. 진작부터 눈독을 들이던 곳이거든. 철전은 부피가 크 니 어느 창고엔가 쌓아두었겠지." "저는요?" 진고불이 손을 뻗어 전각 하나를 가리켰다. "저 전각은 각종 기관 장치로 보호되어 있더군. 그만큼 중 요한 것이 들어 있다는 소리겠지. 그런데 기관이 제법 대단 해. 부수고 들어가는 것은 쉽지만 들키지 않고 들어가는 것은 어려워." 주유성의 얼굴이 복면 속에서 일그러졌다. "이미 여기 한 번 털어본 적이 있군요?" "털다니. 나는 포쾌라네. 그런 짓을 하지도 않으며 설사 했 다고 해도 인정하지 않아. 가볍게 정찰 한 번 한 적이 있지. 주 소협을 찾아간 또 다른 이유는, 저 전각을 조사하는 일에 는 무공이 강하고 기관을 잘 다루는 삼절서생이 딱이기 때문 이었어. 오늘은 아주 날을 잡고 뒤져 볼 생각이네." 주유성은 진저리를 쳤다. "알았어요. 알았어. 철저하시네요. 여하튼 저 전각은 제가 조사를 해볼게요. 일이 끝나면 괜히 여기 남아 있지 말고 바 깥에서 봐요." 그들은 조용히 헤어졌다. 주유성은 전각으로 조용히 숨어들었다. 사람이 침입할 만 한 곳에는 여러 함정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하나 도 주유성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사황성에서 작정하고 설 치한 기관도 자기 물건처럼 가볍게 부수며 지나다닌 주유성 이다. 이런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주유성은 기관 장치들을 해체한 후 전각의 지붕 아래쪽으 로 숨어들어 갔다. 그는 지붕을 받치고 있는 굵은 나무들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전진했다. 나무가 삐걱대는 소리가 나지 않게 하느라 상당한 신경을 썼다. '뭘 찾아야 할지도 모르고 뒤지라니. 이거 참 난감하네.' 주유성은 일단 불이 켜진 곳으로 움직였다. 여기서 무슨 일 이 벌어지고 있는지부터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팔독문의 문주는 팔독마 현재수였다. 그는 한 명의 중년인 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유성은 그들이 있는 곳 근처 로 조심해서 이동한 후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드러누웠다. 귀 는 열고 있었지만 몸은 편안했다. 침투해서 염탐하는 자의 자 세는 아니었다. '이러다가 시간 되면 나가지 뭐. 어차피 여기에 실마리가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니까.' 한참을 술을 마시던 팔독마가 시중들던 여자들을 내보냈다. 그리고는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중년인에게 살짝 밀었다. "우리 팔독문에서 담당 순찰사자님께 드리는 제 작은 성의 입니다." 순찰사자라는 말에 주유성의 귀가 쫑긋했다. '순찰사자? 팔독문의 위에는 사황성밖에 없잖아?' 그의 관심이 조금 깊어졌다. 여전히 편하게 드러누운 상태 였지만 그의 귀는 활짝 열렸다. 순찰사자가 웃으며 상자를 열었다. "뭐 이런 걸 다. 어이쿠, 이거 황금이군요. 이만하면 한 근 은 되겠습니다." "그저 격무에 시달리시는 순찰사자님께 드리는 작은 성의 표시입니다." "허허. 이런 것을 받고도 가만있으면 내가 너무 매정한 사 람이지요. 혹시 뭐 어려운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순찰사자의 말에 팔독마가 즉시 반색을 했다. "그건 그저 성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독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재료를 구하고 다루는 데 돈이 많이 들어가는 물건이지요. 몇 가지 약재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애먹고 있습니다." 순찰사자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었다. '황금 한 근을 받았으니 사황성의 약재를 그 이상 내놓으 라는 뜻이군. 어차피 내 약재도 아니니 무슨 상관이랴. 담당 자를 적당히 구슬리면 되겠군. 수입 잡았군.' 이건 손해는 사황성이 보고 순찰사자와 팔독문은 이익을 보는 뇌물 거래였다. 기분이 좋아진 순찰사자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시지요. 팔독문은 정파의 놈들을 잡아 죽일 때도 큰 공을 세웠지요. 거기에 이번 일까지 생각하면 그 공이 작 지 않은데 겨우 약재가 모자라서야 되겠습니까? 필요한 것을 적어서 주시면 성에 돌아가서 제가 힘써보겠습니다." 일이 잘 풀리자 팔독마는 기분이 좋아졌다. "하하, 감사합니다. 사실 조금만 일이 잘됐으면 그때 정파 놈들을 오백이 아니라 만 명 모두 잡아 죽일 수 있었지요. 그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쉽습니다. 하여간 주유성 그 개새끼 때문에..." 순찰사자가 안색을 굳히며 손가락을 세워 입을 가렸다. "쉿! 그것은 기밀입니다. 그걸 자꾸 언급하시면 저도 이 대 화 내용을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순찰사자의 일입 니다." 팔독마가 급히 손을 저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괜찮으려 니 생각했는데.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저라고 그걸 모르겠습니까? 다만 워낙 중 요한 일이니 기밀을 확실히 하자는 거지요. 그걸 누설한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주유성의 얼굴이 굳었다. '이것들이 감히 내 욕을 해? 그나저나 만 명이나 위기에 빠 지고 그중 오백 명이 죽은 건 아수라환상대진 사건뿐이지. 사 황성이 범인이구나.' 주유성은 그 사건이 못내 미안하다. 자신이 서둘렀으면 인 명 피해를 더 줄일 수 있었다고 믿기에 마음 한구석에 찜찜함 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 범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냈다. 진고불은 창고를 하나씩 뒤져 나갔다. 어떤 창고에는 짐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럼 그걸 파고들어 가서라도 내용물을 확인했다. 진고불이 막 들쑤셔 놓은 짐을 보며 말했다. "아이고. 삭신이 쑤시는구나." 창고에 쌓인 짐은 철전이 아니었다. 평범한 짐일 뿐이었 다. 하지만 그 평범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창고는 다른 곳 에 비해서 훨씬 더 평범한 짐이 있었다. 진고불은 다년간 축적된 경험으로 문제점을 찾아냈다. "이 창고는 재미있군. 독을 쓰는 사파의 곳간에 목재를 쌓 아놓고 뭘 어쩌겠다는 걸까? 목재 장사를 하려는 건 아니렷 다?" 진고불은 밀수품 조사를 한 경험도 여러 번 있다. 밀수꾼들 이 죽음의 사자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진고불이다. 그는 손가락에 공력을 모아서 바닥을 조심스럽게 두드렸 다. 창고 여기저기를 기어다니며 바닥을 두드리던 그가 동작 을 멈추었다. "잡았다!" 진고불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는 목표 지점을 막고 있던 목재들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그리고 바닥에 덮인 천을 걷어냈다. 그곳에서 작은 문고리가 하나 나왔다. 바닥에 만들어진 나무 문이었다. 진고불이 그 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혈마는 못 잡아도 팔독문은 확실히 잡아주지. 혈마의 표 정을 봐야 하는 건데." 진고불이 고리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딸깍. 작은 소리가 들렸다. 진고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본능적인 감각으로 몸을 뒤로 날렸다. 그가 엎드려 있던 곳 주변의 바닥에서 뾰족한 화살이 수없이 발사되었다. 마치 비 처럼 하늘로 솟아올랐던 화살들의 일부는 천장에 박혔다. 바 닥에서 요란한 종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조금 느리게 한 무더기의 화살들이 새로이 발사됐 다. 그 화살들의 속도는 상당히 느려 창고 천장까지 가지 못 하고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낙하 범위 가 청고 전체였다. 진고불의 날카로운 눈은 떨어지는 화살의 끝이 모두 시퍼 렇게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독!" 독은 귀하다. 무림인에게 효과 좋은 것은 더 귀하고 그런 것은 무기에 묻힌 채로 오래 유통할 수 없다. 암기의 독은 이 미 변질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저 화살들을 만 만하게 보고 맞아줄 수는 없다. 여기는 독을 전문적으로 다루 는 팔독문이다. 그는 즉시 몸을 뒤로 날렸다. 창고 안에 피할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일일이 쳐내기도 위험했다. 일단 독이라면 맞아서 몸에 좋을 건 없다. 그렇다고 해서 화살을 하나하나 쳐내고 있다가는 다른 암기가 숨어 있으면 낭패였다. 그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즉시 창고의 문짝에 일장을 날 렸다. 요란한 폭음과 함게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넘어가는 문짝을 밟으며 바깥으로 몸을 날렸 다. 소리가 그렇게 요란하게 났으니 정체를 들키지 않을 수가 없다. 창고 바깥으로 나간 진고불이 주변을 둘러보고 난처한 표 정으로 말했다. "이거 주 소협까지 데려와 놓고 체면을 구겼군."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와 폭음이 연이어 들렸다. 그리고 호 각 소리도 이어졌다. 순찰사자와 팔독마는 깜짝 놀라며 일어 섰다. 팔독마가 급히 말했다. "침입자가 있나 봅니다." 순찰사자도 맞장구를 쳤다. "어서 나가봅시다. 감히 어떤 자인지 얼굴을 봐야겠으니." 그들이 뛰쳐나가고 나자 방안이 조용해졌다. 주유성은 조 심스럽게 그런 방 안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혀를 찼다. "쯧쯧. 그 할아버지 천하제일포쾌라더니 다 뻥 아냐? 요런 문파 하나 처리 못하고 그걸 들키시나." 팔독문의 무사들은 처음에 진고불을 만만하게 보고 몰아 쳤다. 그러나 상대를 알아보지 못한 그들은 진고불의 주먹에 맞아 볼썽사납게 쓰러졌다. 뒤를 이어 팔독문의 고수 하나가 검을 매섭게 휘두르며 진 고불에게 덤벼들었다. "네 이놈! 죽고 싶어 우리 팔독문에 들어왔구나!" 팔독문이 검으로 명가를 이뤘으면 그 이름에 '독'이 들어 갈 필요가 없다. 평범한 검술을 가진 고수는 진고불의 상대가 아니다. 진고불은 품에서 기다란 방망이를 하나 꺼내더니 고수의 검을 매섭게 쳐냈다. "큭!" 팔독문의 고수는 팔이 저리는 충격을 받으며 검을 놓쳐 버 렸다. 그러나 어차피 그 고수의 검 공격은 허초였다. 그는 물러서 며 다른 손을 슬쩍 뿌렸다. 그의 손에서 독기운을 가득 품은 음습한 장력이 조용히 날아갔다. 목표는 진고불이었다. 진고불이 이 정도에 중독돼서 죽을 사람이었으면 이미 예 전에 죽었다. 그는 즉시 내공으로 한쪽 팔의 옷깃을 빳빳하게 만들었다. 곧바로 그 팔을 크게 떨쳤다. 강력한 바람이 내기 를 품고 몰아쳤다. 고수의 독장은 그 서슬에 밀려 즉시 반대 방향으로 쓸려갔다. "흐억!" 고수가 기겁을 하며 뒤로 몸을 날렸다. 독공을 쓰는 고수라 고 해서 자기 독에 당해도 괜찮은 건 아니다. 고수뿐만이 아니고 다른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중독을 피하기 위해서 우르르 물러섰다. 일단 무사들과의 거리를 벌려놓은 진고불은 난처했다. 어 쨌든 지금은 풀을 잘못 건드려 뱀이 모조리 놀란 상태다. 그 의 주변으로 팔독문 삼백여 명의 무인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그중 고수들이 기세등등하게 포위망 안쪽 자리를 하나씩 차 지하는 중이었다. "이걸 어쩐다." 그가 주유성이 들어간 전각을 힐끗 보았다. 전각에서 사람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그림자는 경공을 발휘하며 진고불에게 나는 듯이 달려왔다. "호오, 경공 하나는 대단하군." 진고불은 그 상황에서도 진심으로 감탄할 여유가 있었다. 주유성은 진고불을 향해 달렸다. 팔독문의 고수들이 뒤늦 게 그의 접근을 알아채고 반응했다. 그러나 주유성이 더 빨랐 다. 그는 아직 자신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무사를 골라 어깨 를 밟으며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팔독문의 고수 하나가 그를 향해 뛰어오르며 검을 뻗었다. 칼날이 허공을 베었다. 주유성의 몸이 공중에서 휙 뒤집어지 며 그 검의 공격을 피했다. 다른 팔독문의 고수 몇 명이 독이 묻은 암기를 집어 던졌 다. 그러나 암기 하면 사천당문의 것을 최고로 친다. 그 당문 출신 당소소에게 단련된 주유성이다. 주유성은 날아오는 암 기들도 가볍게 튕겨냈다. 그의 몸은 빠르게 전진했다. 그리고 무사 하나의 머리를 밟으며 마지막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몸 은 어느새 진고불의 옆에 내려섰다. "대협씩이나 되시면서 명성이 자자하신 분이 이게 무슨 꼴 이세요?" 진고불은 주유성의 경공을 보고 그의 무공 실력이 자기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높음을 깨달았다. '제법인데? 무림비무대회라고 해도 그건 아직 젊은 놈들끼 리의 경쟁. 거기 준우승자를 꺾었다고 해서 무공이 꼬 쓸 만 하리란 예상은 했지만 저런 경공은 그런 수준을 넘어서는군. 경공만 대단한 것이 아니라면 무공도 예상보다 더 높겠지?' 주유성의 무공에 마음의 여유가 좀 더 생긴 진고불이 조용 히 말했다. "주 소협, 잠시만 저들을 막아줄 수 있겠는가? 내가 확인하 고 싶은 것이 있다네." 주유성이 인상을 썼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놈들의 숫자가 수백 명이거든요? 저 보고 저걸 다 막으라고요?" "자네는 무공이 능하고 독에도 해박하니 잠시 정도 막지 못하겠는가? 다 때려잡으라는 것도 아니네. 그저 입구를 잠 시만 막고 있게나. 내가 들어가서 확인하는 동안 저들이 수작 을 부리지 못하게." 주유성이 신음 소리와 함께 대답했다. "끄응. 알았어요. 서두르세요." 그들의 대화를 듣는 팔독문의 문주는 어이가 없었다. "이것들이 오만방자하기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겨우 두 놈 이 와서 우리 팔독문 삼백 명의 용사들을 막겠다고? 아니지. 그냥 둘도 아니고 늙은이 하나랑 새파란 애새끼 하나가 막겠 다고? 원한다면 죽여주마. 어, 엇?" 팔독문주가 놀란 소리를 냈다. 진고불이 문주의 말은 듣지 도 않고 창고로 뛰어들어 가는 것을 본 때문이다. 팔독문주는 그 창고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는 다급히 외쳤다. "창고도 많은데 하필 왜 저기로 들어가! 뭐 하느냐! 창고에 독을 뿌려라! 저기 들어간 놈이 한 줌 혈수로 녹아버리게 만 들어라!" 그 명령을 받은 무사들이 검을 내밀며 우르르 몰려들었다. 주유성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미치겠구나!" 주유성이 달려드는 무사들을 맞아 두 손을 휘두르기 시작 했다. 무사들은 주유성을 향해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들의 검은 주유성의 손에 덥석덥석 잡혔다. 일단 검이 잡힌 후에는 중심이 무너지며 끌려갔다. 일단 자세가 무너지고 거리가 가까워진 무사에게는 곧바 로 주유성의 주먹이나 발길질이 날아왔다. 손짓 몇 번 오가는 사이에 처음 공격을 시도한 십여 명의 무사가 순식간에 무력 화되었다. 팔독문주가 소리를 질렀다. "팔독십사들이 나서서 독장을 날려!" 그 명령을 들은 열 명의 고수들이 전면으로 나섰다. 팔독문의 독장은 꽤나 유명하다. 독의 고수 열 명이라면 상 당한 전력이다. 그들이 즉시 주유성을 반달 형태로 포위하며 장력을 날렸다. 날아오는 독장이 많고 방향이 제각각이니 피 하기 쉽지 않아 보였다. 주유성이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적의 공격을 하나하 나 직접 쳐내기 시작했다. 보통 독문 고수들의 독장은 물리적 위력이 형편없다. 오로 지 독의 힘이다. 장력은 독을 운반하는 수단일 뿐이다. 쳐내 는 것 자체는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팔독문주가 기쁨에 차서 소리쳤다. "걸렸구나! 중독됐어!" 그는 이 공격이 성공했음을 의심치 않았다. 독장을 맨손으 로 받아내면 독이 침입해 온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공 이 대단히 높아야 한다. 내공이 낮으면 무기를 사용해서 막아 야 한다. 그러나 주유성은 분명히 빈손이다. '이 새파랗게 젊은 놈의 내공이 높으면 얼마나 높겠어? 그 렇다면 독의 침입을 막을 수는 없다. 더구나 열 번이나 부딪 쳤으니 죽은 목숨!' 주유성은 이 공격이 독장에 의한 것임을 너무 잘 안다. 독 기들이 팔딱팔딱 뛰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주유성은 남만독곡도 해결하지 못한 혈천지독을 극 복한 사람이다. 한 지역을 통째로 오염시킨 극독도 처리한 그 에게 이런 정도 수준의 독장은 손에 먼지가 묻는 것 이상의 손해를 끼치지 못한다. 한차례의 장력 교환이 끝나고 열 명의 고수와 주유성이 대 치하고 서 있었다. 사태를 알아보지 못한 팔독문주가 주유성을 공격했던 열 명의 고수들에게 소리쳤다. "그놈은 이제 중독됐다! 즉시 쳐 죽여라!" 고수들은 팔독문주의 명령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일제히 피를 토하며 자빠졌다. "크아악!" 부들부들 떠는 그들의 모습에 팔독문주는 기겁을 했다. "무슨 일이냐!" 주변에 서 있던 다른 무사들이 즉시 다가가 그 고수들의 상 태를 확인했다. "중독 증상입니다. 증세로 보아 자기 독에 도로 중독된 것 같습니다. 상세가 심합니다. 시급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팔독문주는 어이가 없었다. "공격은 제놈들이 하고 왜 중독이... 설마 반탄독기? 아니 지, 그럴 리가 없지. 저런 놈이독의 초고수일 리가 없어. 그 래, 저놈이 독을 쳐낼 때 수작을 부렸구나. 독장을 쳐내면서 독을 숨겨 보냈구나. 네놈은 독공을 쓰는구나! 독을 쓰다니. 이 비겁한 놈아!" 팔독문주의 적반하장 격인 고함 소리에 주유성이 인상을 팍 썼다. "사파 따위가 죽을라고.' 주유성은 목표를 바꿨다. 자잘한 졸개들을 상대하다 보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실수로 한 칼 맞으면 아프다. 그리고 다쳐서 집에 들어가면 당소소에게 혼난다. 그래서 그는 머리를 직접 잡아다가 팰 궁리를 했다. 적의 수가 많다지만 빠르게 움직이면 못할 것도 없어 보였다. 더구 나 펄독문주라면 최고의 인질이다. 협박을 하면 힘들이지 않 고 다른 자들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 '그게 가장 편하지.' 주유성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세에 놀란 팔독문주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헛! 이놈 분위기가 갑자기 변했다?" 주유성의 눈이 가늘어지고 그의 몸이 날카로워졌다. 거리 를 제법 두고 마주 섰음에도 팔독문주가 침을 꿀꺽 삼켰다. 겁먹은 팔독문주가 손짓으로 부하들을 불러 모아 자기 앞에 인간 방패를 만들었다. 주유성이 비웃음을 지었다. 그의 몸이 살짝 굽혀졌다. 그때 창고에서 진고불이 튀어나왔다. "으하하하! 증거를 잡았다! 아주 쌓아놓고 있구나!" 진고불이 철전 꾸러미 몇 개를 손에 쥔 채로 소리쳤다. 주유성은 기운이 탁 풀렸다. 그는 재빨리 진고불의 곁으로 달려갔다. "대협, 그럼 이제 귀찮게 저런 놈들 상대하지 말고 튀죠?" 귀찮게 직접 이 인원을 다 상대하느니 관청의 힘을 빌리는 것이 낫다. 어쨌든 위조 철전의 증거를 잡았으면 팔독문은 이 제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다른 포쾌가 범죄의 증거를 잡으면 아무리 큰 죄라도 쓰는 돈에 따라 변명이나 무마가 가능하다. 하지만 천하제일포쾌 진고불의 경우 그가 고개를 저으면 금송아지를 가져와도 무 마가 불가능하다. 더구나 돈을 위조하는 것은 초중범죄다. 진고불은 품에서 작은 원반 하나를 꺼내 하늘로 던졌다. 그 가 내공의 힘으로 강하게 던진 원반은 활로 쏜 것처럼 높이 올라갔다. 원반은 날아가면서 무척 날카로운 소리를 요란하 게 울려댔다. 삐이이익! "주 소협, 저게 뭔지 아는가?" "어디 군대라도 짱박아뒀어요?" "당연하지. 이곳 관할 관청에서 당장 병사들이 달려올 걸 세." "관청의 병사들 정도로 이자들을 잡을 수 있어요?" "걱정 말게. '우연히'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도 몰려 올 걸세. 그 군대의 병사 수가 대략 이천여 명이니 이 정도 문파 하나 정리하는 건 일도 아니지." 세간에는 무공을 익힌 자가 병사보다 월등히 강하다고 알 려져 있다. 그러나 그건 어느 정도 과장된 이야기다. 병사가 무인에게 아예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병사 수가 이천이나 되면 그중에 무공고수인 장수도 여럿 있고 일 류나 이류무사도 득시글거린다. 전문 전투 집단인 병사 자체의 전투력도 무시할 만한 것은 아니다. 상당수 병사의 실력이 오랜 세월 무공을 닦은 실력 좋은 무사들보다는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삼류무 사 정도라면 제대로 훈련받은 고참 병사 두셋만 모여도 찜 쪄 먹을 수 있다. 물론 훈련이 부족한 신병은 해당 사항 없다. 더구나 여기는 대단한 고수인 주유성과 진고불이 있다. 그 들의 힘이 더해진다면 팔독문은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다. 진고불의 말을 듣고 그 사실을 깨달은 팔독문주가 덜덜 떨 면서 말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자들이 모여 있으면 내가 모를 리가 없어. 거짓말하지 마라!" 진고불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네가 누구에게 뇌물을 뿌렸는지는 모르겠군. 하지만 관리들은 감히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나를 속이고 너에게 정 보를 넘기지는 않지. 그런 짓을 했다가 나의 수사망에 걸려들 면 죽은 목숨이니까. 어차피 이 일은 이곳 관청의 수장과 주 둔 군대의 대장에게만 이야기한 것이니까 내가 정보를 누설 시킨 범인을 잡기는 주머니 속에서 철전을 꺼내듯이 쉽거든. 그걸 관리들도 잘 알지." 진고불은 자신의 능력에 자신만만했다. 그의 말은 틀린 것 이 아니다. 관리들은 천하제일포쾌의 의심을 사면서까지 누 군가를 비호할 생각이 꿈에도 없다. 얼마를 얻어먹었든 마찬 가지다. 관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기 목숨이다. 팔독문주가 진고불을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늙은이! 네가 누구이길래, 도대체 누구이길래 그런 소리 를 하는 거냐!" 진고불이 품에서 황금패를 하나 꺼내 높이 들며 소리쳤다. "포쾌다!" 황금빛 포쾌가 어두운 밤에 횃불빛에 빛났다. 그걸 본 누군 가가 소리쳤다. "황금패다! 저자는 천하제일포쾌 진고불이다!" 팔독문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다른 사람들도 마 찬가지다. 그들은 이제 진고불이 지금까지 한 말이 모두 사실 임을 깨달았다. 제일 먼저 사황성의 순찰사자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그러더니 쏘아진 화살처럼 빠르게 몸을 날리며 외쳤다. "문주, 좀 막아주시오! 나는 잡히면 안 되는 몸!" 주유성에게 그 말이 제발 잡아달라는 것으로 들렸다. 그는 도망가는 순찰사자가 아수라환상대진 사건과 관련이 있음을 들었다. 그는 그 사건에 후회가 많다. 그래서 즉시 순찰사자 의 뒤를 쫓아 몸을 날렸다. 몇 명의 무사들이 몸을 날려 주유성을 가로막았다. 주유성의 몸이 흔들거렸다. 그는 바람 부는 날 버드나마 가 지처럼 좌우로 움직이며 전진했다. 그 즉시 그의 앞을 막은 무사들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주유성이 호기롭게 외쳤다. "서라!" 진고불이 달리는 주유성을 보고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게으른 기색이 좀 있기는 하지만 저렇게 자진해서 범인을 쫓는 것으로 보아 소문은 확실히 과장된 거야. 그럼 그렇지. 삼절서생의 명성은 게으름뱅이가 얻기에는 너무 과분하니까.' 갑자기 정색을 한 그는 팔독문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호통 을 쳤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항복하는 놈은 혹시 죄가 작으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만약 달아나는 놈이 있으면 그런 놈은 죄가 큰 것으로 보고 사형에 처하겠다." 그의 호통 소리에 팔독문주가 제일 먼저 움직였다. '부하 놈들은 몰라도 난 잡히면 틀림없이 사형이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팔독문주는 발이 보이 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뛰어서 달아났다. 문주가 달아나자 다른 자들도 우르르 도망가기 시작했다. 잠간의 시간이 지나자 진고불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느 새 팔독문 전체가 사라졌다. 진고불이 만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삼백 명이나 되는 독을 쓰는 무림인이라면 체포 과정에서 인명 피해가 너무 크지. 하지만 이놈들이 흩어져 있으면 하나 씩 체포하면 그만. 이번 일도 이렇게 해결이군." 아무리 이천여 명의 군대와 여러 치안 유지 병사를 동원한 다고 해도 상대는 삼백여 명의 무사로 이루어진 무림문파다. 그중에는 무공과 관계없는 사람도 조금 있지만 대부분은 무 공을 익힌 무사임에 틀림없다. 그 속에 고수도 여럿 섞여 있 다. 그런 자들과 정면으로 부딪치면 모두 제압하는 데 병사 몇 백 명은 죽어나가고도 남는다. 심한 경우 천 명 이상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각개격파한다면 별 피해가 없이 처리할 수 있다. 진고불이 유쾌한 듯 말했다. "당분간 이놈들이나 하나씩 체포하면서 소일해 볼까나." 순찰사자는 등 뒤에 누군가 쫓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달리면서 힐끗 보니 나이가 젊어 보였다. '어린 놈이 감히. 다른 장소였다면 쳐 죽였겠지만 지금은 내 처지가 유리하지 못하니 용서해 주마.' 그는 내공을 끌어올려 경공의 속도를 높였다. 바람이 옷깃 을 스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는 뒤를 다시 힐끗거렸 다. 그리고 추적자와의 거리가 급속히 가까워진다는 것을 깨 달았다. 그의 얼굴이 굳었다. '이럴 리가 없다. 포쾌를 따라다니면 저놈도 포쾌일 터. 포 쾌가 저 나이에 이런 고수일 리가 없지. 그래, 저놈은 도둑을 잡기 위해 경공만을 전문적으로 수련한 놈이구나. 에잇. 차라 리 재빨리 쳐 죽이고 도망가자. 그게 낫겠다.' 순찰사자는 달아나면서 주유성이 가까이 접근하기를 기다 렸다. 등 뒤를 향해 가까워지는 속도가 워낙 빨라 가슴이 다 서늘했다. 주유성이 바짝 다가왔다고 느끼는 순간 순찰사자는 몸을 뒤로 휙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달리는 도중에 몸을 뒤로 돌 리고, 그 상태로 빠르게 뒷걸음질치면서 발검술까지 제대로 펼치는 놀라운 절기가 발휘되었다. 칼날은 주유성의 몸통을 정확히 노리고 날아갔다. '걸렸다!' 그는 이 한 칼에 추격자를 두 토막 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주유성이 한 발로 바닥을 콱 찍었다. 바닥이 움푹 파이며 흙을 요란하게 뿌렸다. 주유성의 속도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순찰사자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주유성이 내공을 빠르게 돌리며 다리에 힘을 주어 끌어당 겼다. "읏차!" 그의 몸이 앞으로 화살처럼 쏘아졌다. 잠깐 벌어졌던 거리 가 더 급격히 가까워졌다. 순찰사자는 이런 사태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급히 내공 을 끌어올렸다. 한 번 뻗은 검을 재빨리 반대로 꺾었다. 근육 이 비명을 지르고 몸이 뒤틀렸지만 이를 악물고 견뎠다. '보통 실력이 아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내가 당할 수 있 다. 무리한 수를 써야 하므로 쾌검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초식으로 승부다.' 그는 조금 전의 한 수에서 주유성이 보통 고수가 아님을 깨 닫고 있었다. 절초를 아끼지 않고 공격했다. 그의 검이 요란 하게 흔들리며 주유성의 몸통을 노렸다. 주유성이 몸을 슬쩍 옆으로 기울였다. 칼날의 속도는 변화가 많으며 대단히 빨랐다. 그러나 작은 움직임만 떨리듯이 빠르게 변화했다. 정작 검의 중심은 느릿 하게 움직였다. 주유성은 느릿한 검의 중심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 락이 칼날의 움직임이 적은 부분을 잡으려고 했다. 순찰사자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가 손을 떨자 칼날이 맹 렬하게 떨리며 추가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칼날이 손가락을 잘라 버릴 듯이 거세게 흔들렸다. 주유성의 손가락이 떨리는 칼날을 잡기 직전 앞으로 스윽 움직였다. 칼날이 허공에서 떨고 있는 사이에 그이 손은 변화 를 일으키는 순찰사자의 손목을 자연스럽게 움켜잡았다. 이 모든 과정이 경공을 펼쳐 달리는 사이에 일어났다. 다만 순찰사자는 뒤로 달리고 있고 주유성은 앞으로 달리고 있었 다. 자세의 유리함으로 인해 주유성은 순찰사자와의 거리를 마음대로 조절하고 있었다. 순찰사자의 목까지의 거리도 마 찬가지였다. 순찰사자가 깜짝 놀랐다. 그는 즉시 멀쩡한 다른 손을 뻗어 주유성에게 일장을 날렸다. 주유성도 마주 일장을 뻗었다. 두 장력이 충돌하며 폭음이 터졌다. 주유성이 가진 강력한 내기가 순찰사자의 몸을 진동시켰 다. 순찰사자가 버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크악!" 사황성 순찰사자는 그 충격으로 아주 잠깐 무력화되었다. 주유성은 진무경과 충분히 비무한 경험이 있어 그 기회를 놓 치지 않았다. 그는 마주 댄 순찰사자의 손을 즉시 움켜잡았 다. 그 팔을 확 잡아당기며 순찰사자의 다리를 툭 찼다. 순찰 사자의 몸이 잠깐 공중에 뜨자 그대로 땅바닥에 거세게 패대 기를 쳤다. 먼지가 날리며 육중한 몸뚱이가 바닥에 꽂혔다. 나는 새도 콧방귀로 떨어뜨린다는 사황성의 순찰사자가 개구리처럼 바 닥에 큰대 자로 자빠졌다. 주유성이 쓰러진 순찰사자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내공이 깃든 발길질이다. 순찰사자는 쇠몽둥이에 머리를 맞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기절했다. 주유성이 순찰사자의 가슴을 발로 밟으며 말했다. "드디어 잡았다. 날 고생시킨 아수라환상대진 사건의 실마 리.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알았냐?" |
첫댓글 즐감 하고 갑니다
즐독합니다
ㅎ늘 감사 히 잘읽고 갑니다
즐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