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2:46~47
결국 변화가 살립니다.
중학교 2학년 부흥회 때 은혜를 받았는데요. 은혜가 어떻게 저에게 왔느냐면 먼저는 재밌더라고요. 설교가 재밌게 속속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느낍니다.
나아가 사모함이 생기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 좋아했던 코미디언들이 서 영춘 배 삼룡 같은 분들이고 후에는 이주일 같은 분들이었는데 부흥강사 설교가 그것 이상으로 저를 사로잡더라고요. 그래서 금방 다녀왔는데 또 교회 가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참 신기하다.’ 이야기 하니까 선배님들이 하는 말이 “네가 은혜 받은 거야!”라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은혜가 임하니까 죄가 생각나서 저절로 회개가 쏟아져 나옵니다. “남영이 형님네 가게에서 오징어 눈, 눈깔사탕이라고 알려진 사탕을 돈 안 내고 먹은 것”들 철저히 회개가 되더라고요.
회개하고 나니 마음에 기쁨이 찾아오는데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때 복음 전하는 일 하겠다고 목회자로 서원하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서서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전하게 된 줄 믿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저와 같은 일이 이미 초대교회에 나타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바람 같은 소리가 집에 앉은 모든 사람에게 가득하게 임했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 눈으로 직접 보게 된 것입니다. 또한 주변 사람들이 인정할 만큼 각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심지어 이러한 일로 인해 사람들이 소동하기 시작했고, 어떤 이들은 조롱까지 하였다고 13절에 말씀합니다.
(내적변화)
이러한 외적 변화와 충격만 아니라, 내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4절에 숨어 지내던 제자중 하나인 베드로 일어서서 크게 소리를 높여 복음을 증거 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하면 「담대해 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을까봐 숨어 지내던 사람들이 성령이 임재 하니 강하고 담대해져서 복음을 증거 하는 자가 된 줄 믿습니다.
오늘 날 “왜 전도가 두렵고 머뭇거리게 될까요?” 아직도 나라는 자아를 믿기 때문입니다. 나보다는 주님을 의지하고 성령 충만을 받을 때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담대함이 생기는 줄 믿습니다.
(사모함)
성령이 임재하자. 또 다른 내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바로 말씀에 대한 사모합니다. 제대로 말씀을 듣고, 배워서,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회귀 본능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블레셋에게 날이면 날마다 깨지고 빼앗기던 이스라엘이 사무엘 중심으로 말씀으로 회귀하고 회개운동을 일으킬 때 하나님은 역전의 은혜를 주셔서 블레셋이 오히려 도망가는 신세가 되게 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에벤에셀의 하나님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입니다.(삼사7:11~12)
그렇습니다. 42절에 보니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 「디다케」가 능동형 3인칭 복수로 쓰였습니다. 즉 그들이 스스로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 강력하게 요청해서 이뤄진 것입니다.
그래요. 가르치려고 해도 요즘은 바쁘다. 부담된다. 시간 없다 하시는데 성령이 임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게 되는 거죠.
이게 “영안이 열린다, 눈을 뜬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을 깨달은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라고 했고(요6:68) “내 눈을 열어 주의 귀한 법을 보게 하소서”라고 시편기자는 시119:18절에서 외친 것입니다.
시편119편을 다윗이 기록했다, 아니다 다니엘이 기록했다. 등등 말합니다만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인생을 성공으로 나가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이러한 고백을 하는 줄 믿습니다.
아모스는 8:11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그렇습니다. 말씀을 사모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아이들로 하여금 수요일, 철야 등 와서 가급적 한 번이라도 더 말씀 듣게 해줌으로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않는 자녀로 만들기를 소망합니다.
사무엘을 보십시오. 아예 아기 때부터 실로에 있는 성소에서 제사장의 말씀을 듣고 자라게 했습니다. 그러자 천하에 없었던 세 종류의 권세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제사장권, 선지자 권, 왕(사사)권을 다 쥐고 한 시대를 이끌게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을 보세요. 사울이 죽이려고 쫓아다니는데도 탁월하게 위험을 피하고 살아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의 절반을 쓰는 시인이 됩니다. 그가 학교를 다녔나요? 선생님을 옆에 두었나요, 그런데도 주옥같은 시를 씁니다. 전쟁에 탁월한 장수가 됩니다. 결정적인 것은 사울 임금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을 때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데 이게 신의 한수라고 하는 절묘한 전쟁지략입니다. 왜냐하면 이것 때문에 사울을 쫒았던 장수와 무리들이 칼 한 번 안 휘두르고 투항해 오게 한 한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가 막힌 지략이 어디서 왔는가 할 때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그대로 믿고 신뢰하는데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 기름 부은 자를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 된다(대상16:22; 시105:15)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엄하신 말씀이거든요. 이것을 안 배웠다면 당장에 죽였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왕권을 잡았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압살롬이나 다른 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않음으로 그 역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말씀을 배웠고 익혔기에 죽이고 싶은 분노까지 절제하게 만들고 칼 한 번 쓰지 않고 천하통일을 이뤄 시133편의 말씀을 이룬 줄 믿습니다.
(말씀의 영향)
말씀이 미칠 수 있는 영향이 어디까지라고 생각하십니까?
42절에 이렇게 기록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가르침을 받다보니 그 다음의 일들이 저절로 결실로 맺어지게 된 것입니다.
바로 “교제와 떡을 떼는 식사, 오직 기도에 힘쓰는 일”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제했다는 말은 「코이노니아」인데요. 이게 또 능동태입니다. 자기들 스스로가 이렇게 교제한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닙니다.
오늘 날 부흥하고 건강한 교회들 안을 들여다보면 점조직처럼 소그룹들이 똘똘 뭉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건강하게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소그룹끼리의 교제를 자주하라고 외칩니다. “셀 모임 가지세요.” “공동체 모임세요.” “안 믿는 분들을 꼭 끼게 해서 식사도 하고 티타임도 가지세요.” 라고 부탁합니다. 저희 교회도 그래서 오후 예배 두 번을 소그룹 중 그룹으로 서로 연계를 갖고 하나 되게 하기 위해 셀 축제, 공동체 모임을 갖게 해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성령체험하고 사도들께 배운 대로 자발적으로 이러한 소그룹 모임을 가지며 건강한 모임을 세워 나가게 된 것입니다.
(나눔)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열매가 뭐냐? 바로 나눔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 역시 남보다 하나라도 더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하나씩 내어 놓음으로 진정한 교제와 나눔이 이뤄지게 된 것입니다.
이게 왜 놀랍냐 하면? 그 때에는 외세 침략과 무거운 세금 등 상당히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거든요. 남의 것 하나라도 더 가지면 가지려고 했지, 내 것을 나눠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가 없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감동하는 겁니다. 성령이 감동하면 정말 풍요한 마음, 감정이 나를 컨트롤 합니다.
내 것을 주고 나면 없어지잖아요? 그 빈공간을 남이 내어 놓으므로 채워지게 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빈곳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내 것을 채우기 위해 애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는 하나 됨, 서로가 서로를 채워줌으로서 발생하는 신뢰 등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에게 나누고 베풀므로 지체들끼리의 신뢰와 하나 됨이 더 끈끈해지게 된 것입니다.
(찬미)
얼마나 충족하게 채워졌으면 찬송이 저절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47절에 “찬미하며” 라는 단어는 “현재 능동 주격 남성 복수”입니다.
즉 자발적으로 서로가 신이나서 나누다보니 모두가 충족해졌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만 충족한 게 아니라, 그들 마음 전체가 은혜로 가득하고 기쁨으로 가득하니 ‘이건 하나님의 은혜야!’ 하고 찬송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뺏어서 억지로 나눠주는 공산주의가 아니라는 겁니다. 권력을 쥔 자들이 자기들끼리 나눠 갖고 선량한 백성들에겐 일부만 나눠주면서 “우리는 하나다.” 라고 외치는 값싼 사상주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지, 복지 하는데 성령님이 진정한 복지를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예화)
녹명(鹿鳴) 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사슴은 먹이를 발견하면 먼저 목 놓아 운다고 합니다.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다른 배고픈 동료 사슴들을 불러 먹이를 나눠 먹기 위해 내는 울음소리입니다.
수많은 동물 중에서 사슴만이 먹이를 발견하면 함께 먹자고 동료를 부르기 위해 우는 행위입니다. 아마도 연약하기에 같이 살고 같이 행복을 나누기 위한 하나님의 창조섭리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녹명’ 은 중국의 최고 시경(詩經) 에도 등장합니다.
사슴 무리가 평화롭게 울며 풀을 뜯는 풍경을 어진 신하들과 임금이 함께 어울리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녹명’ 에는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권력과 돈 앞에서 형제와 가족이 아귀다툼을 벌리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자신의 권좌를 위해 동생 둘을 잔혹하게 죽였습니다. 한국의 대표기업인 삼성 가는 형과 동생간의 (이맹희 이건희) 재산분쟁으로 세간의 미간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너를 잡아먹어야 하고, 내가 성공하기 위해 너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현실은 아무리 봐도 하나님의 뜻은 아닌 것만 같습니다.
'이기적 유전자' 라는 책을 쓴 세계적인 스터디 셀러 작가인 리처드 도킨스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을 먼저 배려하고 보호하면 그 남이 결국 내가 될 수 있다. 서로를 지켜주고 함께 협력하는 것은 내 몸속의 이기적 유전자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는 것입니다.
약육강식으로 이긴 유전자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상부상조를 한 부류가 더 우수한 형태로 살아남는다는 게 도킨스의 주장입니다. 결국 이기심보다 이타심, 내가 잘살기 위해 남을 도와야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죠.
세상에는 이루 셀 수도 없는 소리들로 넘치고 있습니다. 개도 울고, 닭도 울고, 심지어 하늘과 바람도 운다고 합니다. 좋아도 울고, 슬퍼도 울고, 이별에 울고, 감격에 겨워도 웁니다.
시인 조지훈은 울음이란 지극한 마음이 터지는 궁극의 언어라고도 했습니다.
나눠 먹지 못하고 혼자 먹으면 개나 돼지와 다를 게 없습니다.
함께 먹어야지요. 그걸 우리는 자리이타(自利利他) 라고 합니다.
'자리이타' 는 남도 이롭게 하면서 자기 자신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로움을 나의 이로움으로 삼는 것입니다.
따뜻한 말 한 마디에서부터 우리 모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주위를 부자로 만들어 보는 건 어떠신지요?
성경은 이미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정리해서 알려줬습니다.
성령충만 받아봐라. 이 불가능이 한 번에 가능해 진다. 아멘
기도하는 교회, 성도되어 성령으로 가득한 저와 여러분 돼서 불가능이 강케 되고 우리 모두가 행복해 지는 은혜로 나가길 축복합니다.
다 같이 기도합니다.
성령체험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나도 기도처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소서
첫댓글 행전강해 넘좋습니다
늘오후설교 해결되어 짱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