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월요일 아침, 습관적으로 출근 준비하다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다 할머니 생신 파티때 희철 얼굴이 거울에 나타난다.
이렇게 태평하게 있으면 안되는데
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거울 속에는, 짧은 머리를 한 남자아이가 나를 빤히 보고 있다.
그 남자 아이는 나를 비웃으며 말한다.
너는 언제까지 준호의 기억에 의지 할 거냐
이젠 현이 되어야지
분명한 것은 거울 속, 남자아이는 나를 보고 웃고 있는데, 나는 그 아이를 향해 웃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대화도 잘되지 않는다. 우울감이 밀려온다.
어제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요즘 유행하는 게임 속의 캐릭터에 빠져 있다.
반 아이들과 놀려면 게임도 알아야 한다.
’난, 이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고 이 집의 둘째 아들이지.‘
깨어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지금 현의 육체에 적응이 되지 않는다.
하려면 제대로 해 보자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 보았지만,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가방을 챙기고 방을 나섰다.
엄마가 거실에서 나와 잘 다녀오라 손을 흔든다.
그런데 오늘도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현관을 나서니 자동차가 기다리고 있다
죽었다 다시 깨어나서 가장 좋은 것은, 운전을 스스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교문을 통과해서 교실로 올라가는데 모든 게 낯설다
어쩌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서, 이 불편한 교복을 입어야 하는지…
첫 시간은 영어 시간이었다
교과서를 펴고 집중하려 했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단어만 나열되어 있다
전생의 기억을 되살려 보았지만,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다.
현은 또 개임 속에서 자신이 천재가 된 상상을 한다.
그러면 자신이 루저라는 사실이 멀어지니까
아이들은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교과서 아래에 다른 과목
문제지가 보인다. 아마도 과외 과제를 하는 모양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옆자리에 앉은 제법 귀공자티를 내면서 점잔을 빼고 앉아 있는
짝을 보니 그 애는 영어 시간인데도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어떻게 영어 시간에 수학 문제를 푸는지, 주의 한 번 주지 않는다
아이들이 소곤거려도 모르는 척, 선생님은 칠판에 잔뜩 적어 놓고 설명한다.
선생님의 발음은 버터를 바른 것처럼, 부드럽다
눈으로는 영어 교과서 단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지만
아는 단어는, 거의 없다.
눈을 똑바로 뜨고 책을 보아도,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막을 수 없는지
그만 고개를 꺾고 말았다.
***
"준호야 뭐 하고 서 있어?"
낡은 대문 앞에 서 있는 것은 분명 나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내가 아닌 것도 같았다.
어두워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목소리는 분명 엄마가 놀고 있는 나를
부르는 소리가 맞는데, 낯선 곳에서 서서 홀로 헤매고 있다.
엄마가 나를 향해 말했다. “우리 아들 배고프겠다. 얼른 와서 밥 먹어야지."
"엄마??? 진짜 우리 엄마네. 엄마를 보자, 나는 기분이 좋다.
꿈이어도 좋았다.
늘 만들어 주시던 구수한 된장찌개도, 생각났다.
코끝에 구수한 엄마표 된장찌개 냄새가 풍겨,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
갑자기 나를 흔들며 웃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건장한 아이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런,,,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화들짝 놀라 멍하니 앉아 있자
”야 …학교 수업 다 끝났어.“
”뭐야…“
“집에 안 가냐?”
부끄러운 마음에 교실을 빠져나와, 운동장으로 뛰어나왔다.
마음에서는 계속 갈등이 일었다.
편안하고 좋은 집에 사는데 뭐가 걱정이냐!!!!”
머리에서는 계속 메시지가 오는데, 행동은 더디기만 하다.
하지만, 오늘 꼬마들 실제로는 동갑내기들 앞에서 망신살이 뻗쳤다,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교문 앞에는 아침에 학교에 올 때 태우고 왔던
기사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다
다른 아이들도 나와, 상황이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아이들은 엄마가 직접 운전하는데, 나의 경우에는
전용 기사가 있다는 것이다.
자동차 문을 열고 앉자 엄마의 전화가 울렸다.
‘현아? 오늘 수학 수업 있는 날인 거 알지.“
”수학?“
수학이라는 말에 다시 한번 진저리가 쳐진다.
끔찍이도 싫었던 수학을 또 해야 한다.
현의 의식에서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해 벌을 섰던 기억이 생생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벌렁 누웠다.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자,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이번 생애는 공부 때문에 힘들 것 같다고 혼자 한숨을 쉬었다.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집사 아주머니가 쟁반에 샌드위치와 주스를 가져다준다.
샌드위치는 부드럽고 맛있었다.
******
아주 오래전 아빠가 만들어 주신 샌드위치 보다 훨씬 감칠맛이 났다.
아빠가 만든 샌드위치는, 계란을 삶아서 감자 으깬 것과 섞고, 치즈 한 장과 햄 한 장을 섞었다. 그런데 집사 아주머니의 샌드위치는, 빵을 버터로 굽고, 아보카도와, 파프리카를 채썰어 섞고, 유기농 치즈를 한 장 넣고, 수제 햄을 넣은 달콤하면서 겉은 바삭한 샌드위치였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식감을 음미하니 입안에서 맴도는 빵의 식감이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며 예민한 후각을 살린다.
점심 급식은, 포크 커틀렛과 미역국, 그리고 어묵과 김치가 나왔다.
급식 판에 커틀렛을 담고, 어묵을 담았다.
어묵을 한입 깨물어 먹었다. 달기만 하고 맛이 별로다.
식판에 담긴 음식에서는 비릿한 냄새가 풍겨 비위가 상한다.
참고 먹으려 했지만 기름에 튀겨서 느끼하기만 한 음식은 이미
전혀 당기지 않고 식욕이 돌지 않는다.
오후 수업이 끝나려면 한참이 남았는데, 점심을 굶을까
궁리하다, 매점으로 달려갔다.
매점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컵라면을 들고 서 있다.
아침 도시락을 챙겨 올까 고민했던 생각이 퍼뜩 떠오른다.
친구들과 점심을 함께 먹으며, 떠들며 장난을 치려던 생각에
샌드위치를 챙기지 않은 자신을 책망했다.
과외 선생님을 기다리는 동안 책상에 놓아둔 시원한 주스는 갈증을 해소하고
답답한 속을 시원하게 해 준다.
앞으로 차 현으로 살아야 하는데, 지금처럼 나약한 마음을 먹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엄마는 지금 집에 없다.
5시 30분 정각이 되자, 과외 선생이라는 남자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언뜻 보아도 차갑고 냉정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차 현으로 돌아가 인사를 했다, 그리고
침실이 아닌 책상이 커다란 방에서 단둘이 앉았다.
선생은 30대 후반의 다소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엄마 설명으로는, 워낙 유명한 일타강사라, 웬만한 집의 개인 과외는
하지 않는데, 우리 집 재력 때문에, 나와 형
두 사람의 공부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집사가 놓고 간 유기농 주스에는 입도 대지 않고 바로 수업에 들어가는 것을 보니 인간미가 없다.
“우리 지난번에 수업했던 페이지 기억나지,
약 한 달 후면 기말이니 미리 학교 진도에 따라 수업하자.”
기억이 가물가물한 가운데, 어물어물 넘어가려 한마디 툭 던졌다.
사실대로 까발리려니 여간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어지는 샘의 말은 아득히 먼 세상에서 들려오는 듯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다.
사실 수학 못해도 세상 살아가는데, 아무 불편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불쑥 샘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샘은 수학이 재밌어요?”
“질문이 좀 그렇다.”
샘은 문제를 한참 설명하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지금은 수학을 왜 해야 하는지 설명하기보다는, 이번 중간고사 시험을
어떻게 치를 것인지가 중요해
그러니까 잔말 말고 문제지 펴.”
샘의 냉정한 말에 입을 삐죽이 내밀고 있다 문제지를 넘겼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설명 하자면, 차고에는 번쩍거리는 자동차가 2대가 주차 되어 있는데
2대는 아빠 엄마 출근 전용이고, 2대는 스포츠카다.
정원에는 유명한 골프장에서나 볼 법한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한 편에는 분재가 자라고 있다. 아빠는 매일 아침 분재를 만지면서, 사업 구상하신다.
지하실에는 영화를 볼 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어 우리 가족들은
극장에 가지 않는다.
처음 차 현으로 이 집에 왔을 때 집의 규모에 깜짝 놀랐다.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고급 가구들과 미술품들은
고매한 취미를 말해 주듯이 하나같이
값비싼 것들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수학을 쉽게 생각했는데, 사실은 고등학교 3학년 과정을 선행 학습하는 것이었다. 수업 시간 내내, 지난번 낙마 사고로 인해, 뇌를 다치는 바람에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핑계로 선생을 설득해서, 쉬운 문제부터 차근차근 공부하기로 했다.
약 1시간의 수업이 끝났을 때,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어야만 했다.
차 현이라는 이름으로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
좌충우돌 하면서, 보낸 시간이 6개월이 지났다.
이젠 가족들과 매일 마주하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 아저씨들
과도 어색함 없이 지내게 되었다. 무엇보다 성과는 학교 공부였다.
아빠가 영국에서 혈통 좋은 말을 2마리 수입했다,
경주용 말이라 말값이 외제 차 한 대 값이라는 아빠의 말에 깜놀 했지만
형 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시시하게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가까운 파주로 갔다.
집을 떠나 파주로 가는 내내 창밖 풍경을 보며, 세삼 지금 내가 미래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전에 알던 자유로 와 지금의 자유로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특히 예전 쓰레기 매립장으로 불리던 곳이 지금은 예쁜 퍼블릭 골프장으로 운영된다는 소식에
놀라웠다.
자유로를 따라 한참을 달리니, 논이 보이고
좁고 푸른 산길을 따라 달리다 보니, 농장이 가까워지는지 동물들의 분뇨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농장에는 잘생긴 말들이 한가롭게 건초를 먹고 있었다.
말을 처음 본 나는 너무 신기했다.
내가 신기한 듯 말을 바라보고 있자, 아빠가
“네 말이 어떤 놈인지 궁금하지.”
말을 한 마리씩 쓰다듬더니, 그중에서
흰색과 검정이 섞인 말 앞에서
멈추었다.
마구간에는 온통 흑색인 말이 건장하게 서 있는데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말보다 잘 생겼다.
말의 엉덩이를 쓰다듬자 녀석은 기분이 좋은지 히힝 하고 웃는다.
“이놈을 너에게 줄까 하는데…”
차 회장이 아들 현에게 말한다.
“마음에 들어요. 아빠.”
말의 털을 만지면서
“이 말 갖고 싶어 아주 잘 생겼어요.”
내가 신이 나서 말하자 아빠는 기분이 좋은지
당신이 직접 고른 말이 흡족한지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이놈, 그동안 기수가 길을 들였으니까 이제는
이놈도 너를 무시 못 할 것이다.”
기수가 끌고 온 말에 안장을 얹고 올라탔다.
녀석은 처음에는 쑥스러운지 천천히 걸었다.
내 옆에서 형 준이 소리쳤다.
“야 달려봐.”
“안 돼…”
내가 우물쭈물 말했다.
그러자 준은 나를 비웃으며 다시 재촉한다.
“너 또 말에서 낙마할까 봐 겁나는 거냐?”
“이 녀석 나를 처음 태웠는데, 오늘은 서로 친해지기만 할 거야.”
“사내자식이, 이깟 말을 무서워하냐?”
“그래도 우리 저 끝까지 한번 달려 보자.”
준의 성화에 나도 모르게 채찍을 휘두르며, 말의 엉덩이를 힘껏 발로 찼다.
말의 이름도 지어 주지 못하고 아직 친하지 않은 상태에서 준에게 지기 싫어서
계속해서 말을 발로 찼다.
말은 기분이 나쁜지 고개를 쳐들고 한바탕 제자리에서 폴쩍 뛰었다. 그리고
잠시 준과의 거리를 살피는 사이 눈앞이 어지럽더니 바닥으로 사정없이 뒹굴었다.
그제서야 준이 나를 바라보더니 “아직도 너는 말이 그렇게 무섭냐?”
혼자 말을 달려 멀리 가버린다.
바닥에 던져진 나는 일어설 수조차 없다.
한참을 끙끙거리고 있을 때, 키가 작은 기수가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형이 일부러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가장 사나운 말을 골라서
나를 다치게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