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봄날의 아픈 기억들
전호준
하루가 다르게 천지 만물이 갓 지난겨울을 그제 잊은 듯 봄맞이 새 단장에 여념이 없다. 그리 길지만은 않았던 지난겨울이 유독 길게만 느껴졌던 것은 하릴없이 봄다운 봄이 어서 오길 애써 기다린 간절한 마음 탓이리라.
요원 할 것만 같았던 금수강산의 봄도, 북핵 아닌 탄핵의 덫에 걸려 봄 같지 않은 봄이 오긴 왔다. 삼라만상이 상춘의 환희에 봄 노래를 하는데, 북악 기슭 청기와 집 앞뜰에, 주인 잃은 봄은 시름에 잠긴 체 심한 고뿔을 앓고 있다. 나에게도 그해 봄날의 아픈 기억들이 봄 아지랑이처럼 아른아른 피어난다.
온 누리에 성탄의 캐럴이 울려 퍼지던 1971년 12월 25일 성탄의 기쁨보다 더 벅찬 전역 특명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입대한 지 2년 11개월 10일 만이다. 새장을 벗어난 간만에 자유, 벅찬 환희와 새 희망도 순간의 꿈이었다.
가난을 숙명처럼 대물림받은 피폐한 현실 앞에 속절없이 방향을 잃었다. 두 아들을 함께 군에 보내놓고 수년간 폐 질환으로 일손을 놓으셨던 아버지, 건강은 다소 회복하셨지만, 실의에 빠지신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형님의 애 끓는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술로 세월을 보내고 계셨다.
나보다 2년 미리 제대하신 형님도 변변한 농사 거리도, 마땅한 직업도 없어 서울로 올라가 자전거 행상을 하시다가 가정 형편상 집에 내려오셨다 한다. 변변찮은 농사와 온갖 허드레 노동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 아버지의 주벽에 한바탕 난리가 난 다음 날 형님마저 집을 나가신 후 소식이 없다. 나의 멘토(mentor)로 힘이 되어 주시던 형님마저 행방이 묘연하니. 아픈 마음보다 걱정이 앞선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인편으로 형님이 서울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살아갈까? 앞이 보이질 않는다. 아무리 내다봐도 깜깜한 그믐밤이다. 농사 지를 토지도 나를 이어줄 실 날 같은 끈도 없다. 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 하며 별걱정 없던 군 생활이 오히려 그리워진다. 작금의 좁은 취업문보다 더 큰 중압감에 일 년 같은 한 달이 흘렸다.
나의 사정을 잘 아는 금성 농촌지도소에 근무하는 친구 B 군이 찾아왔다.
별다른 계획이 없으면 정부에서 추진하는 통일벼 증산지도 요원 선발 시험에 응시해보라는 귀 띔이다. 얼어붙은 마음에 봄이 온 듯했다. 비록 일년도 체 되지 않는 년 말이면 끝나는 시한부 공무원이지만 자력갱생이 아니면 탈출구를 찾을 수 없던 나로선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며칠 남지 않는 시험 일자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운 좋게 합격하여 경상북도 농촌진흥원에서 5일간의 교육을 받았다. 이제까지 쌀밥 한 그릇 제대로 배불리 먹어보지 못하고 자란 나로선 식량 증산과 쌀 자급 달성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야겠다는 사명감에 마음이 설레었다.
1972년 3월 7일 자 임명장을 받음과 동시 경북 3대 평야가 펼쳐진 안계 농촌지도소로 발령이 났다. 낯설고 물선 타향 객지에 농사를 지어본 일도, 사회 경험도 없는 나로선 두렵기만 했다. 더구나 새로운 품종 통일벼에 대한 지식이라곤 며칠 전 받은 5일간의 교육이 전부다.
안계 농촌지도소는 의성 서부 4개 면(안계,단북,다인.단밀)의 넓은 면적을 관할했다. 20여 명의 지도 요원들은 들별로 담당구역이 주어졌다. 나에게 맡겨진 곳은 안계면 양곡 1.2.3동 50여ha의 꽤 넓은 면적이다.
지인의 배려로 양곡 3동 동장님 댁에 월 5,000원에 숙식 허락까지 받았다. 집으로 돌아와 난생처음 자가용 중고 자전거를 6,000원에 한 대 샀다. 작은 이불 보퉁이 하나 옷가지를 챙겨 비포장 백릿길을 단숨에 달려왔다.
들판 도면을 그리고 볍씨를 담그고, 보온 못자리 설치를 지도하며 밤 낯없이 뛰어다녔다. 못자리의 위치와 모내기를 한 논은 일일이 도면에 표시하고 집계를 해 상부에 일일 보고를 한다.
모내기가 한창때는 종일 맨발로 들판을 누비고 다녔다. 못줄을 잡아주고 일손이 부족한 집에는 모심기를 거들며 정신없이 들판에서 살았다. 농사도 모르는 새파란 젊은 놈이 무얼 안다고 농사에 잔뼈가 굵은 마을 사람들의 외면과 무시에도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모르는 척 참아야 했다.
밤에는 오늘의 실적을 집계하고 문제점을 찾아 관련 서적을 뒤적였다. 모르는 내용은 지도소에 문의하거나 문제가 있는 벼 포기를 통째로 뽑아 지도소를 오가며 열심히 공부했다. 다행히 나의 진심과 열정, 예상외의 지식에 농민들의 호응도 갈수록 좋아졌다.
덕분에 닉네임이 하나 붙었다. 통일벼!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지나다 보면 아이들은 하나같이 통일벼 아저씨, 마을 아낙네들은 통일벼 총각, 나이든 사람들은 어이 통일벼! 하며 나를 불렀다. 내 생애 가장 자랑스럽고 보람된 닉네임이었다.
처음으로 확대보급 시험재배로 그해 가을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단위당 수확량은 기존 품종에 비하면 2.30% 증수로 주곡 자급달성의 가능성을 열어준 계기가 되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획기적 성과였다.
이제 나에게 주어진 임무의 마감도 한 달여 남았다. 서울에 형님도 결혼식 관계로 집으로 내려오셨고 도로변 찌그러진 초가 두 간을 팔고 좀 넓은 기와집으로 이사했다는 소식이다. 얼마 후 형님도 결혼식을 올리고 어머니의 애원에 못 이겨 고향집에 눌러앉았다.
이제 연말이면 모든 일정이 끝이 난다. 벌써 앞일이 걱정된다. 때마침 단북면에 근무하는 이웃집 S형으로부터 오는 12월에 의성군 5급 을류(현 9급) 지방공무원 시험이 있다는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앞으로 한 달, 나름의 준비에 밤을 새우며 책과 씨름을 했다.
다행히 1차 시험에 이어 사흘 후 시행한 면접시험에서 최종 합격과 함께 준비해간 공무원채용 신체검사서를 제출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좋은 소식을 부모님과 형님께 전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12월 30일 전 직원이 한자리에 모여 송별연을 했다. 1972년 마지막 날 그간 추억을 뒤로하고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기다리는 것은 발령 소식뿐이다. 지루하게 지나가는 한 달 두 달 소식이 없다. 형수님을 데려왔으니 식구도 늘었고 얼마 후 귀여운 조카도 태어났다. 비교적 마음은 안정되었지만, 돈이 문제다. 별다른 일감을 찾지 못한 우리 형제는 시간이 나는 대로 바지게를 지고 산 약초 고삼(苦蔘)을 캐러 온 산천을 헤매고 다녔다. 남들이다가는 봄나들이 한번 못 가고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열심히 일했다.
하루는 무거운 짐에 땀을 뻘뻘 흘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눈앞에 오토바이 한 대가 길을 막아선다. 산림을 훼손했다며 면사무소 마당에 짐을 갖다 놓으라는 호령이다. 면사무소 산업 계장이란다.
벌목으로 산림법을 위반한 것도 아니고 풀뿌리인 약초를 남들도 다하니 우리도 아무 생각 없이 채취했을 뿐 사실 무슨 잘못인지도 몰랐다.
당시 면사무소에 중학교 동기 S 군도 근무하고 있었다. 친구가 볼까 창피한 마음에 얼른 지게를 면사무소 마당 한구석에 세워두고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가난도 죄 인양 집으로 돌아오는 마음은 너무 아팠다.
이튿날 지게를 찾아가라는 면사무소 사환의 연락을 받고 찾아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이유를 지금도 알 수 없다. 애타게 기다리는 발령 소식은 5개월이 흘려도 무소식이다. 갑갑증에 군청에 문의했다. 결원이 생기는 만큼 성적순으로 발령한다는 답변이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에 친구에게 좀 알아보라는 부탁을 했다. 합격자 30명중, 열 손가락 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흰떡에도 고물이 든다더니, 씁쓸하고 착잡한 마음을 달래며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 친구의 조카인 H 면장께 부탁하셨던 모양이다.
어머니께서 고이 싸주신 참깨 두 되를 들고 하루 전날 의성읍으로 나왔다. 삼촌 댁에서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평소 바쁜 사람들이라 이른 아침이 아니면 만나기 힘들다고 한다. 면장님이 일러 주신대로 집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잠옷 바람의 젊은 남자가 얼굴을 내민다. 자초지종 말씀을 드리고 잘 부탁한다는 인사말을 했다. 갖고 간 참깨를 방안으로 얼른 밀어 넣고 돌아서는 마음은 너무나 따분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발령이 났다. 궁여지책 선택한 길이 평생 한길이 되었지만, 후회도 미련도 없다.
기다리던 발령이 난 기쁨보다 너무나 길고 따분했던 그때 봄날의 아픈 기억들이 오늘날까지 잊히질 않는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 저쪽, 그해 봄날의 아프기만 했던 내 모습이 아른거려 오는 봄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2017. 3. 20
첫댓글 공지사회도 반추해 보면 많이 발전한것 같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공직에 입문하셨고 평생의 천직으로 봉사한 덕분에 식량을 자급자족 하였고 보리고개도 허물어 졌습니다. 아푼 지난날을 다 잊고, 글도쓰고 서예도 하면서 과거를 보상받는 마음으로 함께 노후를 즐겨 봅시다. 잘읽었습니다.
지난 날 어려운 가정 환경을 잘 극복하시느라 정말 노고가 많았습니다. 통일벼의 신화에서 풍성한 결실을 얻은 것 처럼, 이제 인생 2막도 보람있고 알찬 결실 맺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지난 날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지난일들이 떠오릅니다. 통일벼, 기존벼보다 키가 작으면서 볏알이 많아 식량수급에 지대한 공을 한 벼, 눈밭님처럼 헌신한 공무원분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맘으로 열심히 일하신 덕택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이 부자나라가 되었습니다. 평생공헌하신 보람 충분히 그 댓가를 받으실 행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맘의 닿는 글 잘 읽었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은 모르지요. 그때 우리들이 겪은 힘든 삶을,..
그것이 거름이 되어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것을...
살아온 길은 다르지만 손바닥을 보듯 절실히 느끼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내가 보아도 아픈 기억. 되돌아 보고 싶지 않을 지난 일들입니다. 그러 아픔을 딛고 오늘까지 살아온 삶의 여정이 인간승리의 한 표본인 듯 합니다. 우선 강물이 흐르 듯 써내려간 글 실력이 대단 합니다. 거울속을 들여다 보듯 세밀하게 묘사한 정경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힘들었던 그 시절의 봄이 주마등처럼 그려집니다. 고진감래라고 그 아픔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는듯 합니다. 공감하면서 잘 읽었습니다.
역사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보릿고개. 그 때의 삶의 현장들이 떠 오릅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