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ook.interpark.com/product/BookDisplay.do?_method=detail&sc.saNo=001&sc.prdNo=301451843
출판사 서평
프랑스가 낳은 인류의 위대한 책 《팡세(Pens?es)》!
“인간 탐구의 관점에서 읽어야 할 인간과 신에 관한 단상!”
기독교 옹호론자가 아닌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는 프랑스 사상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실존주의 철학자 파스칼의 인간과 신에 대한 기독교를 위한 변론!
“종교와 기타의 주제에 대한 파스칼의 생각!”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팡세(Pens?es)》는 파스칼이 인간과 신에 관한 단상(斷想)들을 노트 형식으로 기록해 남긴 것을,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주변 사람들이 엮어서 낸 책이다.
이 작품은 인간학적인 부분과 신학적인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당초 그는 “기독교를 위한 변론”을 쓸 생각이었으나, 그것을 체계화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가 단편적(斷片的)으로 기록했던 단장(斷章)들을 후세 사람들이 편의상 나름대로 체제를 갖춰 편집 · 간행한 것이다.
오늘날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팡세》는 브랑슈비크판으로, 이 책에는 《팡세》의 초고(初稿) 원본과 사본에 있는 단장들이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다.
독자들은 철학자이고, 수학자인 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천재 파스칼의 이 책을 단지 기독교에 바탕을 둔 신앙을 통해 종교적인 관점에서 읽을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인간 탐구의 관점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파스칼은 중세적 신앙과 근세적 이성의 대치 속에서 탄생한 사상가이다. 그의 시대를 지배한 사상은 스토아철학과 자유사상이다. 이 사상가들 중 그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에픽테토스와 몽테뉴이다.
위대함과 비참함의 종합
에픽테토스는 인간의 위대성은 잘 알고 있었으나 인간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여 쾌락주의를 낳게 하였으며, 몽테뉴는 인간의 비참함을 잘 알고 있었으나 인간의 위대성을 알지 못하여 염세주의에 빠지게 했다.
파스칼은 이 두 사상의 대치 속에서 고뇌하며 살았고, 결국 이 두 사상의 입장을 종합하였다. 파스칼은 과학적 정확성을 도입한 새로운 방법으로 철학을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즉 그는 인간을 연구하되 그 본질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황을 연구했다. 파스칼의 사상은 인간 및 인간의 조건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공허한 이론을 전개하는 것을 싫어하고 구체적인 것을 존중한다. 철학적 사고라는 것도 파스칼에게서는 현실의 관찰 및 분석으로 나타난다. 파스칼은 자신의 개인적 생활과 경험을 통해서 진리를 자각하고, 실감하고, 직관한 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사상가이다.
인간론’이 가장 풍부하게 다뤄지고 있는데, 파스칼의 인간론은 생철학 및 실존주의 윤리사상과 내면적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 . ‘구원론’과 관련하여 파스칼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주어진 은총이 인간 구원의 핵심이라 보았다. ‘교회론’과 관련하여 파스칼은 이상적 윤리 공동체로서 ‘기독교 공화국’을 제안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법을 강조하되, 정치적 현실주의의 태도를 지닌다. ‘종말론’과 관련하여 파스칼은 신의 심판과 영혼불멸에 대한 사유실험을 통해 삶의 태도를 결단하는 데 유의미한 계기를 마련한다.
https://richshare.tistory.com/35
https://richshare.tistory.com/36
파스칼이 죽은 후 많은 유고가 발견되었습니다. 몇 편의 과학 녹문, <은총론>을 위한 수기, 소품들 등.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오래전부터 준비해 오던 <기독교 호교론>을 위한 수기들입니다. 1669년의 포르루아얄 판 아래 <팡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그의 작품은 이 단장들을 모아 편집한 것입니다.
호교론의 구상
파스칼은 언제부터 호교론을 구상하고 작업에 들어갔을까요? 이 물음에 정확하게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누이 질베르트는 전기에서 파스칼의 호교론의 탄생을 1656년 3월의 <성가시관의 기적>과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이 기적은 장세니스트들에 대한 박해가 극에 달했던 때 일어난 것으로, 포르루아얄은 이에 커다란 위안과 힘을 얻었고, 특히 파스칼은 이 기적이 자신의 집안에서 일어난 것에 대해 감격하였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그는 기적에 대해, 나아가서는 신이 자신을 나타내는 방식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고, 마침내 교회 내부의 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불신자들에 대해서도 종교적 진리를 옹호할 결심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호교론을 이 돌발적인 사건에만 결부시키는 것은 편협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매우 탁월한 전도자의 역할을 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최초로 회심한 후 누이들과 아버지를 신앙으로 이끌었고 제2의 회심 후에는 로안네 공과 그의 누이 샤를로트를 회심시켰습니다. 또한 그의 종교적 열기와 진리에 대한 사랑은 교리에서 빗나간 설교승들을 끝까지 추궁하여 침묵하게 하였는가 하면 예수회를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도맡아 벌이게 하였습니다. 파스칼은 불의와 오류 앞에서 참지 못하는, 그리고 자신의 확신에 대해 침묵하지 못하는 행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교회 안의 적들에 대해 발휘했던 비판과 설득의 힘이 교회 밖의 더 많은 불신의 무리를 향해 발휘되는 것은 하나의 필연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가 무종교의 세계에 대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이미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서 되풀이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가 아는 세속의 삶은 약간의 매력과 더 많은 비참으로 채어져 있었습니다. 이 작은 매력에 현혹된 나머지 자신들의 비참을 망각하거나 외면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최대의 비참이 될 겁니다. 그는 사람들이 이 비참 앞에 정직하게 서기를, 그리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이 있는지를 탐구하고 마침내는 그 길로 들어서기를 원했습니다. 이 일에 그는 자기가 적임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을 잘 알았고, 그들의 희구와 꿈과 그리고 좌절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을 설득하는 방법으로 이어집니다. 그가 <설득술>이란 소품 안에서 다루고 있는 설득의 출발점은 한마디로 <눈높이>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설득하고자 하는 상대의 자리에까지 내려가 그들의 눈으로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전략의 기본 원리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생각과 판단에 동조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허점과 오류의 틈새를 파고들며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부정하게 하고 끝내 변신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파스칼이 호교론을 인간학적 성찰에서 시작한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는 인간이 누구인지를, 그들의 삶이 어떠한지를 그들의 <눈높이에서> 함께 보고 생각합니다. 그가 초월성을 개입시키는 것은 그 후의 일이며 그것은 이 인간학의 필연적인 연장으로서 제기됩니다.
이렇게 볼 때 그의 호교론을 특정한 사건이나 시기와 결부시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발생적인 것이며, 파스칼의 삶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의 기질과 사고의 방법론, 그의 삶의 복합적인 경험들, 그의 신앙적 열정이 자연스레 호교론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는 마치 한 편의 호교론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살았고, 죽어간 것만 같습니다.
<팡세>의 편찬
그러나 파스칼은 호교론을 완성하지 못한 채 죽었고 남겨진 것은 900여 개에 달하는 단장들뿐입니다. 그중에는 내용이나 형태가 비교적 다듬어진, 마치 한 편의 논설과도 같은 단장들도 있찌만 대부분은 짤막한 메모 형태의 단편들입니다. 생트뵈브가 말한 것처럼, 파스칼이 완성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작업 중의 생생한 형태로 남겨놓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파스칼은 작업장을 기습받은 격이 되었는데, 그럼으로써 우리는 완성된 일에 있어서보다 한결 내밀하고 소박한 그의 손길을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낭만적인 생각과는 달리 이 미완성의 원고 상태는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원본의 판독이라는 기술적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각 단장들을 한 권의 책으로 편집하려 할 때 그것들의 배열과 분류, 나아가서는 각 단장들의 해석 등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20세기 중반에 투르뇌르, 라퓌마, 등의 문헌학적 연구는 전체 작품의 구성과 관련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해결의 길을 열었습니다. 2세기에 걸친 기나긴 망각 그리고 1세기 남짓한 동안의 각종의 연구 끝에 오늘날 우리는 파스칼이 죽었을 때 남겨놓은 상태 그대로의 것을 복원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본>에 보존된 구성방식인데, 라퓌마는 이것이 파스칼 자신에 의해 실현된 단장들의 분류 방식이라는 것을 성공적으로 입증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밝혀진 이상 편찬에 있어 파스칼 자신의 구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투르뇌르가 먼저 사본에 입각한 <팡세>를 내놓았고, 그 후 라퓌마가 뒤따랐으며 이 시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스물일곱 편으로 분류된 전체 구도 속에 그의 모든 단장들을 분류하지는 않았습니다. 약 절반가량이 분류되었을 뿐이고, 나머지는 작업에서 제외된 채 남겨졌습니다. 투르뇌르는 <분류된 단장들>과 <분류되지 않은 단장들>을 원형 그대로 출판하였고(1938년), 라퓌마는 미분류의 단장들을 자기 나름대로 분류하여 각각 해당되는 장 속에 편입시키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취하였습니다. (1947년)
(라퓌마도 그 후 사본의 원형 그대로 <불류된 단장들>과 <분류되지 않은 단장들>로 나누어 출판하였지만(1951년) 우리가 대본으로 선택한 것은 전자라는 것을 밝혀둡니다. 분류되지 않은 단장들을 편찬자가 분류할 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자의적인 작업일 수밖에 없지만, 독서의 일관성을 위해서는 이 방식이 더 유익할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팡세>를 대할 때 우리는 놀라움과 찬탄을 금치 못합니다. 종래의 갖가지 배열에 비해 이것은 극히 개성적이고 독창적입니다. 물론 대체적으로는 필로 드 라 셰즈가 그의 <회고록>에서 약술한 호교론의 구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27편의 새 구도에 비추어 볼 때, 그는 파스칼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가장 독창적인 것은 이 전체 구도보다 각각의 장에 단장들을 배치한 분류 방식일 겁니다. 가령, <두 무한>(390)은 <생각하는 갈대>(391)와 나란히 제15편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내용으로 볼 때 전자는 <인간의 비참> 안에 그리고 후자는 <인간의 위대>안에 편입되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둘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보다 고차원적인 논의에 이것들을 동원합니다. 그는 인간학적 성찰 속에서 인간의 비참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인간의 위대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담론들은 파스칼의 인간학 속에서 각기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됨으로써 결국 인간을 비참과 위대의 혼합, 모순의 덩어리로 인식하는 것으로 귀착됩니다. 파스칼은 두 단장을 병치시킵으로써 그의 인간학의 한 본질적 주체를 상징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공허, 비참, 숨은 신과 같은 중심적 주제들 가운데 한데 묶일 수 있는 단장들은 <팡세>안에 폭넓게 분산됨으로써 다른 차원의 논의와 연계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체계적이고 경직된 구성 대신 주제들의 미료한 교차, 섬세하고 율동적인 사고의 흐름, 준엄하면서도 유연성을 잃지 않은 논리를 우리는 그 안에서 발견합니다. 파스칼이 <심정의 질서>라고 일컬은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닌지 모릅니다. <이 질서는 주로 목적과 관련된 개개의 문제에 대한 탈선적 논의로 성립된 것인데 이것은 이 목적을 항상 나타내기 위해서이다>(단장 757)라고 그는 설명합니다. 그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목표를 향해 직선적으로 달려가지 않습니다. 그는 이 길에서 기꺼이 탈선하며 수많은 우회 도로를 거쳐갑니다. 왜냐하면 목표에서 이탈한 무수한 무리들과 함께 가야하므로.
호교론
호교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제1부는 <신 없는 인간의 비참>이고, 제2부는 <신 있는 인간의 복됨>인데, 전반부는 <인간성이 타락하였음>을 보여주고, 후반부는 인간을 구원할 <구속자가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그리고 인간성의 타락을 주제로 하는 제1부는 인간성 그 자체에 대한 인간학적 고찰을, 인간 구속을 주제로 하는 제2부는 인류 역사 가운데 나타난 구원의 진실에 대한 성서학적 고찰을 그 방법론으로 삼을 겁니다.(단장 29)
파스칼은 단장 35에서 이 방법론의 청사진을 한층 명료하게 그려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종교를 멸시한다. 그들은 종교를 혐오하고 그것이 진실된 것일까 두려워한다. 이것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가 결코 이성에 어긋나지 않음을 밝히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존경할 만한 것이므로 마땅히 존경심을 갖게 한다. 다음으로 종교가 사랑할 만한 것임을 보여주고 선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진실된 것이기를 소망하게 한다. 그런 후에 종교가 사실상 진실된 것임을 보여준다. 종교는 존중할 만하다.
인간을 올바르게 알았으므로.
종교는 사랑할 만하다. 참된 행복을 약속하므로.
파스칼의 호교론은 종교가 결코 <이성에 어긋나지 않음>을 밝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종교가 반이성적인 것이라는 이유로 이를 멸시하는데, 실은 종교야말로 인간을 가장 합리적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존경스러운 것입니다. 이 멸시의 마음을 존경심으로 되돌려놓는 것, 이것이 호교론자의 첫 번째 과제입니다. 사람들은 또 종교가 자신들의 행복의 추구를 가로막기 때문에 이를 혐오하지만 실은 종교야말로 진정한 행복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사랑할 만합니다. 종교에 대한 존경의 마음에 뒤이어 사랑의 마음을 불어넣는 것, 이것이 호교론자의 두 번째 과제입니다. 이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게 된 사람들은 종교가 단순한 희구의 대상만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 즉 <진실된> 것이기를 간정히 바랄 것입니다. 종교를 배척할 때 사람들은 혹시나 그것이 진실된 것일까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반대로 그것이 진실된 것이 아닐까 더 두려워지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호교론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실된 것이기를 바라는 이 종교가 과연 진실된 것임을 밝힐 겁니다.
다시 부연 설명하면 파스칼은 기독교가 인간성을 가장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한다는 점에서 존경할 만하고, 뒤이어 인간이 희구하는 최고선을 약속한다는 점에서 사랑할 만하다는 것을 밝힙니다. 기독교가 인간성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납득할 만한 설명을 제공하고 실천적으로 최고선을 보장한다는 것, 이것이 전반부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인간학적 고찰에 입각한 이와 같은 이론적 합리화로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논리상 하나의 가설일 뿐이며 이 모든 것을 입증할 사실의 검증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후반부의 성서에 입각한 역사적 증명입니다. 건체 구성을 보면 2편에서 11편까지가 제1부에 해당하고, 12편에서 17편까지 예비적 고찰을 거쳐 후반부가 전개됩니다. 한마디로 <팡세>는 전반의 인간학과 후반부의 신학(더 정확하게는 성서학), 이 두 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간에 이 이질적인 양자를 접합하기 위한 연결 부분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현상 세계에서 초월적 세계엑까지 이르는 거대한 지적, 영적 모험의 기록이며, 파스칼 자신이 15편에 붙인 제목 <인간의 인식에서 신으로의 이해>은 그대로 <팡세>의 부제가 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제1부
이리하여 먼저 폭넓고 다양한 인간학이 전개됩니다. 인간의 삶의 모든 현상들이 문제된 이 고찰에 대해 <인간 현상학>이라 이름 붙인 것은 지극히 타당합니다. 제1편 <순서>는 작품의 전체적 구성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파스칼이 호교론을 구상하면서 설득의 방법론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졌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 후 2편에서 7편까지는 인간의 인식의 문제를 중심으로 진리의 개념, 법과 정의의 개념 등을 다루고 있고, 그 후 10편까지는 최고선, 즉 행복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11편에서는 이 모든 고찰에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을 제시하며 다른 차원으로의 이행을 암시합니다.
파스칼은 제1부에 <신 없는 인간의 비참>이란 제목을 붙였는데 여기서 <신 없는 인간>이란 표현은 특별히 주목할 만합니다. 이것은 그가 고찰의 대상으로 삼은 인간이 누구인가를 명시합니다. 신이 없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자신의 삶 속에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종교, 무신앙의 상태를 의미하며 결과적으로는 오직 인간 스스로의 자연적 조건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단순히 인간일 뿐인 인간, 자신의 자연적 운명을 살아가는 실존적 인간이 대상입니다. 파스칼은 자신의 주변에서 더 이상 신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주체성과 자유를 누리려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을 겁니다. 중세의 영적 억압에서 풀려난 16~17세기의 서구인들은 바야흐로 인간의 시대를 구가하며 자신들의 의지와 욕망과 능력만을 믿는 인간적 모험을 펼치려 했다. 신 없는 인간은 무슨 가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들은 바로 17세기 프랑스 사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파스칼의 눈앞에 실존하고 있었습니다. 내일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라고 아직은 크게 외치지 못하지만, 이미 그렇게 믿고 있는 이들, 과거의 사람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이른바 <근대인들> - 신 없는 인간은 바로 이들이고 파스칼은 이들에게 도전하는 겁니다.
제1부에 펼쳐지는 그의 인간 묘사는 극도로 부정적이고 암울합니다. <공허>, <비참>, <권태> 등 신 없는 인간의 삶의 양태들은 어둡고 절망적입니다. 진리에 대한 열의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낳는 것은 허위와 오류뿐입니다. 이성을 자신의 시녀로 삼을 만큼 강력한 상상력은 이성의 판단을 교란하는가 하면, 맹목적이고 집요한 자애심은 자신의 이익만을 구함으로써 진리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또한 인간은 사회적 삶 속에서 정의에 입각한 질서를 추구하지만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그들은 우연과 습관을 따를 뿐이며 이 가공의 질서를 정의를 착각합니다. 이렇듯 인간은 진리의 추구에 있어서 개인적 차원에서나 사회적 차원에서나 실패와 좌절만을 맛봅니다.
그토록 열렬한 행복의 추구에 있어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음 바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진정 행복을 누리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행복에 도달 할 수 없는 인간은 한 묘수를 고안하였는데 그것은 불행과 비참을 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위락>이 바로 이일에 동원됩니다. 위락은 인간에게 불행을 일시나마 잊게 함으로써 행복하다는 환상을 안겨줍니다. 위락은 이를테면 의식의 마취제와 같은 것인데 실은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비참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마비되어 살아가는 동안 그는 영영 구원의 가능성에서 멀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비참을 삶의 모든 층위에서 예리하게 추적한 파스칼은 여기서 새로운 주제를 개입시킵니다. 인간의 자신의 상태를 비참으로 느끼는 이 의식이 바로 인간의 위대를 반증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놀라운 역설적 반전입니다. 위대의 관념은 사실 이것 외에도 다른 근거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파스칼에게 있어 인간은 비참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역설이 그것의 핵심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이 비참하다는 것보다 이 비참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가령, 짐승들은 비참하지만 자신들의 비참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것을 자연적인 상태로 알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짐승들이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상태를 참을 수 없는 비참함으로 느끼며 괴로워합니다. 인간의 위대는 바로 이 비참의 의식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것은 <폐위된 왕>의 경우와 같습니다. 평민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가 평민이라는 것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왕위에서 쫓겨나 평민으로 강등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신분을 참지 못할 겁니다. 그가 당연히 누렸어야 할 지위는 왕이었으므로, 왕위에서 추락한 왕, 이 일그러진 영웅 - 이것이 인간이 그의 비참이고 그의 위대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비참과 위대의 풀 수 없는 혼합, 경멸과 동시에 존경의 대상, 모순과 역설의 존재입니다. 그 누가 이 혼돈에 빛을 비출 수 있을까요. 인간을 모순적 존재로 인식한 파스칼은 이렇게 물음을 던집니다. 그리고 먼저 이 세상의 지혜에서 답을 구합니다. 인간의 사고가 구축한 가장 완벽한 체계들 즉 철학과의 만남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집니다. 파스칼은 먼저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여러 철학적 담론들이 인식에 있어서는 회의론과 독단론으로, 그리고 윤리에 있어서는 쾌락주의와 금욕주의로 양분되는 것으로 보며 각각의 담론들을 그 자체로써 분석하고 비판합니다. 그의 비판의 핵심은 그것들이 각기 인간 모순의 한 축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회의주의와 쾌락주의는 인간의 비참에, 그와 반대로 독단론과 금욕주의는 인간의 위대에 일방적으로 의지함으로써 그것들은 모순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극단화시킵니다. 사실 이상반된 두 철학은 상호 의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에서 위대를 밝히기 위해 진술한 모든 것은, 다른 편에서는 비참을 결론짓기 위한 논리로서 이용될>(단장237)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은 서로 원을 그리며 상호 관련을 맺고 있다>(237) 이렇게 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 존재가 본래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겁니다. <인간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더 비참하고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이 되는>(237) 데 문제가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철학적 담론이 모순의 해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것들이 <서로 원을 그리며 상호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은 모순의 고리로 연결된 악순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요? 파스칼은 철학의 차원을 넘어서라고 권유합니다. 철학의 원초적 오류는 <인간이 인간을 무한히 넘어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인간을 단지 인간적 범주 안에서 설명하려고 한 모든 철학적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지금 파스칼은 겸허히 머리 숙여 초월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가르칩니다 - 인간은 창조되었을 때 위대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는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신의 위엄과 영광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광을 끝내 감당하지 못한 인간은 신에 거역함으로써 이 자리에서 추락하였습니다. 만약 그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완전한 진리와 행복을 누렸을 것이고, 애당초 타락한 존재였다면 진리와 행복에 대해 아무런 관념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불행한 우리, 우리의 신분 안에 위대가 전혀 없느니보다 더 불행한 우리는 행복의 관념을 가지고 행복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되 이에 도달할 수 없고, 진리의 영상을 느끼되 오직 허위만을 가지고 있다.>(단장 246)
기독교의 인간 인식은 이렇듯 <원죄>의 교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파스칼은 원죄설이 <이성에 충격적인 것>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이 신비, 즉 죄의 계승이라는 이 신비가, 이것 없이는 우리 자신에 대해 아무런 인식도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236)
인간학에서 신학으로
전반주의 논증은 여기서 일단락지어집니다. 그의 인간 탐구는 인간의 이중성을 확인한 다음 이것에 대한 가장 납득할만한 설명의 원리를 기독교에서 구하고 또 만인이 열망하는 최고선을 기독교 안에서 발견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것으로 인간은 기독교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을 동시에 갖게 될 것이고, 나아가 이 모든 것들이 과연 <진실된 것>이기를 바라게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제1부이고, 이로써 파스칼은 단장35에서 제시했던 목표를 달성한 셈입니다.
그러나 파스칼은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궁극적으로 기독교에 의지하였지만 이것은 하나의 설명의 원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이론으로 제시된 가설과 같은 것이며 따라서 객관적 사실들로써 검증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참으로 훌륭하고 납득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과연 사실일까요? - 이 물음에 답해야 하는 겁니다. 이 논리적 요청에 심정적 요청도 가세합니다. 아, 진정 아름답고 희한합니다, 꼭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 간절한 소망에도 답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파스칼의 호교론은 제2부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가 검증해야 할 사실들은 지금까지 논의되었던 것과는 그 성질이 다릅니다. 제1부의 인간학적 성찰에서 그는 눈에 보이고 확인되는 자연학적 또는 사회학적 대상들을 다루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학문을 연구할 때 대했던 대상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실험실 안에서 반응하고 변화하는 사물들의 양태를 관찰하듯이 인간이 처한 상황 안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행동하는 모습들을 관찰하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들은 모두가 객관적 접근과 논리적 추론이 가능한 대상들입니다. 그런데 여기 종교적 차원에서 검증하려는 사실들은 눈으로 보고 이성으로 분석할 수 있는 자연적 사실과는 다릅니다. 이것들은 눈과 이성을 뛰어넘은 초월성과 관련되어 있으며, 파스칼의 말대로 아마도 심정의 눈으로 볼 때만 그 뜻이 명료해질 것입니다.
파스칼은 먼저 초월성을 앞에 두고 결단을 망설이는 경우를 상정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경험과 이성적 사고로써 확인할 수 있는 한도까지는 기꺼이 동행합니다. 그러나 그 너머로 나아가려 할 때 그들은 불안해하며 머뭇거립니다.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결단으로 한 걸음 내딛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비상한 수단이 강구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내기>의 이론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적 사고에서 초월성으로의 이행에 있어 근원적으로 제기되는 것은 신의 존재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있다>와 <신이 없다>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 파스칼은 상당히 파격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그는 불신자와 더불어 종교는 완전히 명료한 것이 아니며 인간의 이성은 신의 본질은 물론 존재 여부도 알지 못한다고 단언합니다. 다시 말해 이성의 원리에 입각할 때 우리는 신이 있다고도 또 신이 없다고도 확언할 수 없으며 이 점에서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는 피장파장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이성으로 판가름할 수 없는 선택이 문제될 때 차라리 선택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어느 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한 것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문제를 지워버립니다. 그러나 파스칼은 이 선택을 모면할 길은 없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그의 설명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우리는 배에 올라타 있다>고 말하는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이것은 이미 삶의 바다를 향해하는 배에 올라타 있는 우리는 시시각각 필연적인 선택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선택은 운명적인 것이고 삶이 지속되는 한 필연적입니다. <신이 있다>와 <신이 없다>의 갈림길에서도 이 법칙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인간은 삶의 여정에서 언젠가 이 갈림길에 서게 되고 그 어느 것을 택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선택 자체를 회피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신이 없다를 선택한 것과 같아집니다.) 그리고 이 선택의 결과는 그의 삶을 결정지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이성의 원리가 이 선택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에 파스칼은 하나의 현실적인 원리, 즉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와 관련된 이해와 득실의 기준에 따라 선택하자고 제안합니다. 신이 있다와 신이 없다 둘 중에 어느 편이 우리에게 더 <수지맞는>가를 따져보자는 겁니다. 이것은 지극히 타산적인 계산 방법이며 파스칼은 내기의 확률론을 동원하여 <신이 있다>가 압도적으로 이롭다는 결론을 도출합니다.
결국 내기 이론은 인간의 타산적 원리에 근거한 것으로 이것은 주저하는 불신자들의 마음을 뒤흔들기 위한 호교론자의 필사적인, 아마도 최후의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들이 가장 집착하는 자애심의 원리에 동조함으로써 최대의 양보를 한 셈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해타산의 기준에서도 <신이 있다>고 믿는 것이 그들에게 무한히 더 이롭다는 것을 납득시키기에 힘씁니다. 그러나 그것뿐입니다. 파스칼 자신도 확률론에 의한 수학적 결론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수학이 숫자의 추상적 놀음인 데 반해 우리를 얽매는 정념의 속박은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강력합니다. 우리의 머리가 수긍한다고 해서 우리의 몸도 같이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더 많은 이유로써 설득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의 몸(파스칼은 이것을 <자동 기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을 훈련시킴으로써 마음을 기울게 하는 데 있습니다. 말하자면 마치 신이 있다고 믿는 것처럼 행동하고 이러한 행동을 습관적으로 몸에 익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신앙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신앙은 궁극적으로 신의 선물이며, 우리는 겸허하게 은총의 개입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파스칼이 내기 이론 끝에 습관의 효용과 은총의 절대성을 언급한 것은 크게 주목할 만합니다. 우리도 내기의 성격과 한계에 대해 더 이상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미화한 나머지 신앙을 낭만적인 내기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 아니면 도>식의 내기가 신앙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은 이제 명백해졌습니다. 이것은 신 없는 인간의 눈높이까지 자신을 낮춤으로써 그들의 최후의 저항을 무찌려는 하나의 전략적 논의이며 일종의 <탈선적 논의>일 뿐입니다.
그런데 내기에 의한 것이든 다른 어떤 것에 의한 것이든 초월성으로의 진입은 비약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비약은 그 어떤 종류의 것이든 이성에 대한 배반을 의미합니다. 파스칼은 내기 이론을 전개이면서 이성을 애당초 배제했지만 이성은 이렇게 배제되는 것을 수락하지 않으며 이 소외 자체를 자신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신앙으로의 이행에 있어 다시 한번 이성과 진지하게 마주섭니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답은 간단명료합니다. 신앙적 결단은 분명히 이성을 초월하지만 결코 이성에 어긋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이성은 그 자신의 논리에 의해 자신을 넘어서는 무한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성의 부인보다 이성에 더 합치되는 것은 없다>(단367) 이성이 참으로 이성다울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자신을 넘어서는 것에 스스로를 복종시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종교는 이성을 초월하되 반이성적인 것은 아니며 이성을 복종시켜 사용하되 맹목적으로 굴종시키지 않습니다. 이성에만 의존하는 종교는 이신론이고 이성을 버린 종교는 미신입니다.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할 때 신을 향한 길을 가로막기는커녕 오히려 열어준다면, 인간과 신의 관계는 어떤 것이 될까요? 여기서 파스칼은 신을 증거하고 신과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주목하며 기독교가 신앙의 근본 원리를 중보자에 둔 사실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문제에 깊이 들어가기 전에 자연 안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다시 한번 고찰함으로써 인간과 신의 관계를 재조명합니다. 15편 <인간의 인식에서 신으로의 이행> 안에 수록된 몇몇 단장들의 주제는 바로 이런 겁니다. 그는 제1부의 인간학적 성찰을 통해 부각시켰던 인간 존재의 근원적 모순을 여기서 종교와의 관련하에서 다시 한번 환기시킵니다. 그가 <인간의 인식>이라 한 것은 비참과 위대의 이중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하며 결국 인간은 이 모순을 안고 신에게로 나아가는 겁니다.
이 인간성의 확인은 진정한 종교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진정한 종교는 무엇보다 먼저 이렇게 밝혀진 인간의 모순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제공해야 합니다.(그래서 종교를 존경하는 마음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인간의 사욕과 무력함을 알고 이것에 대한 구제책을 제시하며 진정한 행복의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종교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끝으로 종교는 자신의 진정성을 입증해야 합니다. 이 원리들에게 비추어 파스칼은 다른 종교와 신도들을 비교하고 비판합니다.
신학 또는 인류 구속의 역사
이상과 같이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해 예비적으로 고찰한 다음에야 파스칼은 제2부의 본론에 들어갑니다. 그는 먼저 앞으로 그가 기독교를 입증하기 위해 제시할 사실들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밝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사실들은 자연학적 사실과는 다르며 객관적 명료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이 명료성의 결여야말로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성서학의 핵심이 될 <숨은 신>의 원리입니다. 즉, 신은 숨어 있는 신이므로 많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에게는 신이 나타나 보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만약 진리가 절대적으로 명료하게 나타난다면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이것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오만에 떨어질 것이고, <떨리는 마음>으로 신을 추구하는 것은 무의미해질 겁니다. 그러기에 신은 사욕에 눈먼 자들을 그들이 택한 암흑 속에 버려두기 위해 스스로를 숨겼습니다. 반대로, 진리가 절대적 암흑 속에 버려두기 위해 스스로를 숨겼습니다. 반대로, 진리가 절대적 암흑 속에 묻혀 있다면 진리를 향한 어떤 움직임도 있을 수 없을 것이고, 불신자들의 주장은 옳은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측량할 수 없는 섭리로써 <택함을 받은 자들을 눈뜨게 하기에 충분한 빛>을 주었는가 하면, <버림받은 자들을 눈멀게 하기에 충분한 어둠>을 두었습니다.(단장 443). <만약 하느님이 어떤 사람들은 눈멀게 하고 어떤 사람들은 눈뜨게 하고자 원하였다는 것을 원리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의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데 됩니다.>(단장 439)
이 관점에서 볼 때 성서는 거의 전체가 <표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신에게 바친 제물은 그리스도에 의한 영적 제물의 표징이고, 그들에게 베푼 물질적 은혜는 영적 은혜의 표징이며, 그들이 기다리던 현세적 정복자로서의 메시아는 영적 왕국의 왕입니다. 그러나 육적인 유대인들은 표징으로 나타난 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금도 방황하고 있습니다. 표징은 <숨은 신>과 마찬가지로 눈뜬 자에게만 보이고 눈먼 자에게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림으로 봉인은 뜯어졌고 부호의 참뜻은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에 의해 표징의 비밀이 드러날 때까지 모든 것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던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약 성서의 성스러운 기록은 아브라함, 야곱, 모세, 예언자들로 이어지는 영적 유대인들을 통해 신의 섭리의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마침내 신약 성서로 이어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이 완성됨으로써 신,구약을 일관하는 기독교의 <영속성>은 웅변으로 입증됩니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종교들의 도전과 뭇 권력들의 위협을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태초부터 면면이 전승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초자연적 기적이며 <연속적 기적>임에 틀림없습니다. 영속성, 이것은 기독교의 성스러움과 진정성의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이 모든 성찰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로 귀착됩니다. 23편은 파스칼의 다분히 개인적이고 신비적인 체험의 고백으로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감동적으로 증언합니다. 그리스도는 창세 이래 4,000년에 걸쳐 예언되었으나 육적인 유대인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예언의 마지막 성취였으며 이로써 그리스도는 구세주임을 스스로 나타내었고 구원을 완성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예언이나 기적과 같은 외적 증거로 그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것이 없이 내적 위대성만으로도 그의 성스러움은 놀랍도록 드러납니다. 단장 585는 그리스도의 영적 위대에 대한 파스칼의 깊은 명상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팡세>안에서 펼친 정신적, 영적 모험의 축소판과 같은 것이며 우리는 그 안에서 인간과 신에 대한 그의 가장 내밀한 비전을 읽습니다.
이로써 신에게 돌아온 자의 삶의 태도와 의무는 분명해집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 안에서 신에게 복종하는 것, 다시 말해 신만을 사랑하고 자신만을 증오하는 것, 바로 여기에 인간의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기독교도는 교회의 머리인 예수에게 순종하고 그를 통해 구현되는 신의 의지에 복종합니다. 이것이 사랑이고 사랑 없는 곳에 믿음은 없습니다.
파스칼은 겸허한 마음으로 호교론의 결론을 맺습니다. 이 모든 증거들은 아무리 명료한 것이라 해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신 앞에 스스로를 낮추고 그의 은총을 빌어야 합니다. 이제 이성은 할 바를 다하였습니다. 그것은 신을 향한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것이 고작이며 그 자체가 신앙을 불어넣지는 못합니다. 이 길을 걸어가는 데에는 신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이성이 아니라 마음을 감동시키는 은총, <영원하신 존재자에게 기도하기 위해 그 전과 그 후에 무릎 꿇은> 사람에 의해 구상된 호교론은 이렇듯 은총을 비는 기도로 끝을 맺습니다.
맺음말
우리는 파스칼 자신의 구도와 분류 방식에 따라 <팡세>의 흐름을 개관하였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팡세>는 인간 실존에 대한 놀라운 증언입니다. 그가 대상으로 한 인간은 <신 없는 인간>, 다시 말해 모든 선험적 규정에서 벗어난 있는 그대로의 인간, 자연적 상태의 인간입니다. 파스칼의 실증주의적 사고, 과학적 실험 정신은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그의 인간학은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실험의 한 보고서입니다.
우리는 이 환상 없는 인간 실험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신 없는 인간의 비참>이라는 제목으로써 그의 결론을 사전에 명시하였지만 그의 성찰의 전개는 비참이 <대립>, <모순>의 개념으로 보완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표면적으로 부각된 비참의 양상에 위대의 개념이 덧입혀짐으로써 인간은 비참과 위대의 풀 수 없는 혼합, 모순적 존재로 그려지는 겁니다.
그러나 파스칼의 인간학은 이 숙명적인 모순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논리적 필연성과 심정적 요청은 초월성을 개입시키기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은 무한히 인간을 넘어선다>는 선언과 더불어 새로운 차원으로 이행합니다. 인간을 오직 인간의 범주 안에서 탐구하는 것에서 시작한 그의 인간학은 인간과 자연을 넘어서는 것과 만나며 이 만남으로 인해 모든 것은 새롭게 구성되고 재해석 됩니다. 즉, 인간의 지상의 운명은 신적 운명과 교차됨으로써 여기 자연과 초자연, 속과 성, 인간과 신의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이중적 구조가 형성됩니다. <팡세>안에서 <인간극>과 <신곡>은 하나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서적 인간학과 일치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그는 인간을 비참과 위대의 양면으로 관찰하고 이 이중성을 인간 존재의 원형으로 설정함으로써 마치 고전적 이원론을 대변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파스칼의 인간학은 한 주체 속에 상반된 두 실체, 영혼과 육체, 정신과 감각, 선과 악의 의지를 수평적으로 대립시킨 고전적 이원론을 거부한 데 그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대로 인간이라는 자연과, 이것을 넘어서는 초자연 또는 은총의 대립, 다시 말해 명백히 갈라선 두 주체 사이의 수직적 대립으로 성립되는 이원론입니다. 인간과 신, 자연과 은총, 대립되는 두 질서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파스칼은 성서적 인간학과 합류합니다.
그러나 이 초월성의 개입은 인간을 올바르게 인식하게 하는 설명적 원리로 그치지 않습니다. 신과 분리됨으로써 타락과 비참 속에 떨어진 이난은 지난날의 위대와 영광에 복귀하기를 열망하며 이를 위해 신과의 재결합을 꿈꿉니다. 그러나 단지 위대의 허상만을 안고 있는 인간은 이것을 성취할 능력이 없습니다. 신의 개입은 보다 근원적으로 인간 구원의 형식으로 임합니다. 초월성은 절박한 심정적 요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파스칼은 이것을 가리켜 <인간의 인식에서 신으로의 이행>이라 불렀습니다. 물론 이 이행은 위로부터의 개입에 의해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인간의 위치에서 볼 때 그것은 인간의 자연 상태에서 신의 질서 속으로의 이행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이행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지며 이때 인간에게 야기되는 문제는 어떤 것들일까요. 인간과 신, 이 이중적 질서로써 인간의 운명을 재구성한 파스칼이 피할 수 없이 스스로에게 제기한 물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신의 개입으로 인해 완성되는, 즉 위에서 아래로 임하는 구속을 자연으로서의 인간에서 은총으로서의 신에게로, 즉 아래에서 위로의 이행의 문제로 전환시키고 이에 답하고자 시도한 것, 이것이야말로 <팡세>의 가장 주목할 만한 독창성입니다.
결국 파스칼은 인간의 편에 설 것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눈높이>라는 표현을 어디선가 사용했지만 그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는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존재이고, 이 구원은 위에서부터 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구원받는다면 그 역사는 바로 그가 서 있는 자리에서 또 타락한 인간으로서 시작될 것입니다. 파스칼은 이 자리에 같이 서기를 원하며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하기를 원합니다. 구원의 신비에 입문시키기 위해 고답적으로 신학적 교리에 의지하거나 율법적 도덕을 설교하는 것은 그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악전고투하는 나날의 삶의 현장에까지 내려가 그들의 슬픔과 절망, 꿈과 환상을 공유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진실과 열망을 말하게 하지만 그것은 이 모든 것이 공허와 허위 위에 서 있음을 그들 스스로 고백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고백은 참된 영원한 진리에 대한 갈망을 낳게 하고 이 갈망은 조만간 놀라운 응답을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파스칼은 신적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호교론을 구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목적을 위해 그는 어떤 선험적 원리나 신학적 개념도 원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인간의 유일한 현실인 삶과 그를 에워싼 세계를 탐색할 뿐입니다. 그가 신과 만나는 것은 이 인간적 성찰의 연장선상에서이며 우리는 이 사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그가 신적 언어를 인간적 언어로 풀이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인간의 자연적 위치에서 신에게까지 이르는 기나긴 여정을 갑니다. 그의 궁극의 목적지는 신이고 신의 은총에 의한 구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여정에서 인간의 편에 서서 끝까지 인간과 동행하기를 택하였습니다. 이 여정의 하나하나의 단계에서 그는 인간의 언어로써 말하고 생각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답을 찾기에 힘씁니다. 구원하는 주체가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주체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파스칼을 <교회 밖의> 호교론자라고 부릅니다. 그가 지금도 우리의 심령을 두드리는 것은 그가 교회 밖에, 다시 말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팡세>는 궁극적으로 신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언어, 인간의 언어로 번역된 메시지이며 우정에 넘치는 메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