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인 조르바 줄거리
![]() ![]() 2016.04.17. 14:51
핵심적인 내용 그럼 내가 특별히 체크하면서 읽었던 부분을 인용해서 설명하는 방식으로 전체 글을 통해서 어떻게 조르바의 비합리적이고 무질서적이면서도 역동적인 모습을 그려냈는지 설명하도록 하겠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XML:NAMESPACE PREFIX = O />
22page "그렇다. 나는 그제야 알아들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 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 이 내용은 전반부에 주인공이 조르바를 처음 만나고 잠깐 이야기를 나눈 후에 선언한 내용이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는 어린아이 시절에는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한다. 쉽게 말하면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회에서 윤리를 배우고, 하면 안 되는 것들에 대해서 학습을 받으면서 차츰 그러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주체성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조르바는 그렇지가 않다고 한다. 아직도 태어났을 때의 그 탯줄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24page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 자유라는 거지!“
-> 조르바가 이해하는 인간의 모습은 한 마디로 자유다. 이 자유에 대한 내용이 책 전반에 걸쳐서 주인공과 조르바와의 다양한 대화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74page "그랬다. 내 행실이 부끄러웠다. 조르바의 말이 옳았다. 청동 손은 멋진 구실이었다. 만나는 데 성공했고, 다정한 말이 오고 갔다. 우리는 서서히 하느님의 손안에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포옹하고 결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갑자기 이야기를 땅 위에서 하늘로 비약하게 했고 여자는 놀라 달아나 버린 것이었다.“
-> 과부와의 대화를 피해 도망친 주인공을 향해 조르바가 화를 내고난 후에 주인공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이야기를 “땅 위에서 하늘로” 비약시켰다고 말한다. 조르바를 통해서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자유의 배경은 철저하게 땅이다! 이전에 종교에 의해서 자꾸만 신을 들이대고 또는 합리적인 사유를 들이 대면서 뜬구름 잡는 하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내용이었다면, 조르바는 땅에서, 구체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 뜨겁게 살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78page "조르바는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듯이 대하는 것이다.“
-> 이것이 또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특징이다. 합리적인 사고는 축적된다. A라는 사물에 대해서 자꾸만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파헤치다보면 그것은 더 이상 경이로운 것이 아니게 된다. 예를 들어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본다고 해보자. 처음 폭포를 보는 사람은 그 엄청난 크기와 장엄한 분위기에 심취하여 감탄하게 된다. 이 감탄은 이성의 언어가 아니라 감정의 언어이다. 그런데 그 폭포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은 점차 폭포는 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물이 움직이는 이유는 위치 에너지 때문이며 등등 이런 식으로 폭포를 분석하게 된다. 이렇게 분석된 대상은 더 이상 인간에게 감동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저자가 조르바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것들을 자꾸만 머리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뜨겁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을 자꾸만 분석하고, 이익이 되는지 아닌지 따지는 방식이 아니라 뜨겁게 만나라는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101page "말씀드리지요. 원래 까마귀는 까마귀답게 점잖고 당당하게 걸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까마귀에게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려 보겠다는 생각이 난 거지요. 그날로 이 가엾은 까마귀는 제 보법을 몽땅 까먹어 버렸다지 뭡니까. 뒤죽박죽이 된 거에요. 기껏해야 어기적거릴 수밖에는 없었으니까 말이오."
-> 이 말은 조르바가 주인공에게 한 말인데, 여기서 또 다른 이 글의 핵심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까마귀는 원래 자기만의 방식으로 걷는 보법이 있었다. 그런데 다른 방식을 부러워하고 그렇게 살아보려고 하다가 보니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비슷하다고 저자는 선언하고 있다. 자기 자신으로 있는 그대로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엉망진창이 되어버릴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151page "죽으면 말썽이 없지. 산다는 것은...... 두목, 당신, 산다는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플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요!"
-> 이 말이 조르바가 정의하는 삶이다. 이성적인, 합리적인, 즉 아폴론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삶을 평안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삶을 기대한다. 그러나 실제로 삶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말썽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삶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대로 맞춰서 살아가면 얼마나 평안한가? 남들 다 입는 옷을 입고, 남들 좋아하는 행동을 하고, 남들에게 칭찬받으려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평화롭겠는가?그러나 삶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 스스로 계속해서 말썽거리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조르바가 말하는 삶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175page "두목. 확대경을 부숴버려요. 그럼 벌레도 사라지고, 물도 마실 수 있고, 정신이 번쩍 들고!"
-> 조르바가 확대경을 통해서 보면 얼굴에 작은 벌레가 살고 있고, 마시는 물속에도 벌레가 들어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하는 말이다. 여기서 확대경은 우리가 흔히 살아가면서 판단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이성적인 틀을 의미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따져보고, 고민해보고, 남의 조언을 들어보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난 후에야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르바는 그 확대경을 부숴버리라고 말한다. 그 기준이 없으면 벌레도 사라지고, 물도 마실 수 있고 정신이 번쩍 든다는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201page "사면에서 돌맹이는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 이 말은 조르바가 돌맹이를 산 밑으로 차버리고 난 후에 한 말이다. 짧지만 상당히 의미가 깊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주로 돌맹이를 가만히 둔다. 가만히 모셔놓고, 판단하고 그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조르바는 다르다. 이런 조르바에 대해서 바로 밑에 부분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매일 아침 그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아니, 보는게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217page "속의 조르바가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세계가 깜짝 놀랄 일을 할 수도 있을 거에요."
-> 조르바가 주인공과의 대화 속에서 하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힘의 근원이다. 이성적인 사람은 그 이성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내가 내 삶과 관련한 결정을 하는데, 나 자신이 아닌 다른 기준을 바탕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르바는 속의 조르바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한다. 감정, 욕망. 마음속에서 차오르는 뜨거움을 직접 내 삶에 적용시키라는 것이다. 남의 눈치 보지 말고!
<!--[if !supportEmptyParas]--> <!--[endif]-->
329page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서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 조르바의 생각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가정해보자. 이에 대하여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어떻게 근거를 댈 것인가? 아폴론적인 것은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남을 도와줄 경우에 얻을 내용들 등을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위의 조르바의 선언처럼 상대방과 내가 다르지 않음을 몸으로 느끼는 방식으로 근거를 댈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361page "나는 닥쳤다. 부끄러웠다. <진짜 사내란 이런거야......> 나는 조르바의 슬픔을 부러워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그는 피가 덥고 뼈가 단단한 사나이...... 슬플 때는 진짜 눈물이 뺨을 흐르게 했다. 기쁠 때면 형이상학의 채로 거르느라고 그 기쁨을 잡치는 법이 없었다."
-> 과부를 마놀라카스가 죽인 후에 눈물을 흘리는 조르바를 보고 주인공이 한 말이다. 아폴론적인 사람들은 기쁠 때에 그 기쁨을 있는 그대로 누리지 못하고 형이상학의 채로 거른다. 즉, 내가 지금 이렇게 기뻐해도 괜찮은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어떻지? 등의 쓸모없는 고민들로 내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419page "전능하신 하느님. 당신이 날 어쩔 수 있다는 것이오? 죽이기밖에 더하겠오? 그래요, 죽여요, 상관 않을 테니까. 나는 분풀이도 실컷 했고 하고 싶은 말도 실컷 했고 춤출 시간도 있었으니...... 더 이상 당신은 필요 없어요!"
-> 조르바가 춤을 추며 선언하던 내용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이 날 죽이시면 어떻게 하나? 내 죄 때문에 신에게 미움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고민을 한다. 그러나 조르바는 그렇지 않다. 죽여요. 라고 말한다. 심지어 죽이기밖에 더하겠습니까? 라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 그의 인생은 완전히 그의 것이었기에 죽여도 상관없는 것이다. 지금 누리고 있는 분풀이와 말과 춤이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기에 그 다음 일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디오니소스적인 삶의 핵심이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
호친 부분은 그리스어 원판에서 사용되는 이름들이다.
3. 줄거리[편집]화자인 '나'는 아테네의 피레아스에서 친구와 헤어져 크레타로 가는 배에 오른다. 이때 조르바는 '나'에게 무조건 자기를 데려가달라고 말한다. 그렇게해서 크레타에서 조르바와 '나'는 갈탄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헌데, 조르바는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늙수그레하지만 야성미 넘치는 외모 그대로 그야말로 미친놈(...)이다. "검지 하나가 왜 없느냐고요? 질그릇을 만들자면 물레를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왼손 검지가 자꾸 걸리적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도끼로 내리쳐 잘라 버렸어요." "결혼말인가요? 공식적으로는 한번 했지요. 비공식적으로는 천번 아니 3천번쯤 될거요. 정확하게 몇 번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수탉이 장부 가지고 다니는 거 봤어요?"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랴.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br style="box-sizing: inherit;"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br style="box-sizing: inherit;"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보게.'<br style="box-sizing: inherit;"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br style="box-sizing: inherit;" />'조르바, 잘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쓰여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같은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 모든 것 졸업했습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두목, 산다는 게 뭔지 알아요? 허리띠를 풀고 말썽을 만드는 게 바로 삶이지요. 산다는 게 곧 말썽이에요.
4. 논란[편집]이 소설이 출판될 당시 동방정교회는 대놓고 카잔자키스를 비난했다. 소설속에 등장하는 제정신 아닌 수도승인 자하리야가 수도원에 대고 불을 지르는 장면이나 조르바의 난잡한 행동들등을 놓고 신성모독으로 여겼던 것이다. 또한 카잔자키스는 평생 노벨문학상 후보에 1951년과 1956년 두번 올랐지만 그의 무신론적 성향이 문제가 되어 결국 수상받지는 못했다. 그의 친구기도 했던 한 영국 작가는 "카잔자키스가 그리스인이 아니라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러시아인이었다면 수상받을 수 있었을탠데." 라며 아쉬워하기도 했다고. 카잔자키스는 결국 이후에 발표한 소설 <미할리스 대장> 등도 문제가 되어 결국 동방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하고 죽어서도 그의 시신은 성당내의 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크레타 이라클리오 성문 바깥에 묻히게 되었다. 5. 조르바의 기행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편집]카잔자키스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인물들로 호메로스, 니체, 그리고 베르그송을 들었다. 그가 출생했을 당시 크레타는 터키의 지배하에 놓여있었고, 어린시절에 그는 아버지인 미할리스와 함께 이라클리오 시내 한복판에서 터키에 저항하다가 공개처형된 그리스인들의 시체를 목격한다. 그 이후로 그의 인생에서 최초의 투쟁은 그의 조국인 크레타를 터키의 지배로부터 독립시키는 투쟁이 되었다. 또한 두번째 투쟁은 내부의 무지, 악의, 공포 같은 모든 형이상학적 추상으로부터의 해방을 쟁취하는 것이었으며, 끝으로 세 번째 투쟁은 사람들이 섬기는 모든 우상들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만끽하고자했다. 그리고 이 세 가지의 투쟁은 결국 자유와 해방으로 귀결된다. 육체적 해방, 감정적 해방 그리고 정신적 해방이 그것이다. 젊은 시절에 카잔자키스는 수도사들이 은둔하는 아토스산에 올라갔다가 거기서 고행하는 수도사들을 보고 믿음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경험도 했으며 발칸전쟁 당시 참전해서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종군한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조르바의 인생경험은 어느 정도 카잔자키스의 그것과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6. 기타/-----------------------------------------
줄거리[편집]이 책은 1930년대, 바람이 거센 동 트기 직전의 항구도시 피레에프스의 한 카페에서 시작한다. 화자는 몇 개월간 만이라도 책들은 치워 버리자고 결심한 젊은 그리스 지식인이다. 그의 친구인 스타브리다키스가 박해받는 그리스인 동지들을 돕기 위해 카프카스를 떠나면서 그에게 남긴 따끔한 충고 덕이다. 그는 크레타를 향해 출발한다. 잠시 중단되었던 갈탄광 채굴을 다시 시작하고 농민과 노동자 계급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자 하는 생각이다. 그가 단테의 신곡에 막 몰두하려는 때 누군가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을 느낀다. 고개를 돌려보니 거의 60대의 남자가 유리문 너머로 그를 보고 있다. 남자는 다짜고짜 들어와서는 그에게 다가와 자신을 함께 데려가라고 요구한다. 자신이 생각지도 못할 수프를 만들 줄 아는 요리사이자, 꽤 괜찮은 광부이며, ‘산투르’에 일가견이 있다고 소개하는 그 남자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알렉시스 조르바이다. 화자는 그의 도발적인 말투와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 그를 갈탄광의 채굴 감독으로 고용한다. 그렇게 그들의 인연은 시작된다. 인용문[편집]
/-----------------------------------------
버질(앨런 베이츠)의 영국에서 건너온 그리스, 영국인 혼열의 작가이다. 그는 그리스 아테네 항구에서 크레타 섬에 가기 위한 섬에서 출항을 기다리다 열정적인 일꾼이자 음악가인 조르바(앤소니 퀸)을 만나게 된다. 버질은 자신의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던 크레타 섬을 갈탄 광산 재개발을 위해 여행한다고 조르바에게 설명한다. 이에 조르바는 바질에게 자신의 광산 경험을 설명하며 자신을 데려갈 것을 설득한다. 이 둘이 자동차를 타고 크레타 섬에 있는 작은 마을에 들어서자 많은 농민들이 나와 환영을 한다. 그들은 늙은 프랑스 출신의 미망인(릴라 케도바)이 운영하는 "호텔 리츠"에서 머문다. 조르바가 버질에게 마담과 함께 춤을 출 것을 권하지만 버질은 마다하고 조르바는 그 기회에 마담과 춤을 추며 유대감을 형성한다. 그 후 계속해서, 버질과 조르바는 기존의 갈탄 광산에서 일을 해보지만 자꾸 무너지는 광산 탓에 진전이 되지 않는다. 계속 낡은 광산에 대해 고민하던 조르바는 우연히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는 수도원을 발견하고 그 땅의 나무들을 이용하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다. 그는 집에 돌아와 버질과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다. 한편, 비 오는 어느날 버질과 조르바는 한 가게에서 미망인을 발견하게 된다. 수많는 남성들이 재혼하지 않은 마을 미망인을 희롱한다. 그러한 미망인에게 버질은 자신의 우산을 건네주고, 조르바는 버질에게 그녀와 함께 갈 것을 제안했으나 수줍은 버질은 끝내 거절한다. 버질은 조르바의 수도원 계획에 동의하여 그에게 케이블과 기타 부속품을 사기위한 돈을 주고 니아의 큰 도시로 보냈다. 조르바는 버질과 그에게 빠진 호텔 마담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난다. 하지만 조르바는 니아에서 버질의 돈으로 카바레에 가 젊은 댄서와 눈맞힌다. 버질은 조르바의 편지를 보고 조르바가 마담을 버렸음을 알았으며, 자신의 돈을 낭비함에 분노해 호텔 마담에게 조르바가 청혼하고 곧 결혼하려 한다고 거짓말을 친다. 한편 젊은 미망인은 우산과 크리스마스 쿠키를 동네 바보를 통해 버질에게 돌려준다. 조르바가 돌아와 버질이 저지른 일에 대해 놀라 화낸다. 또한 조르바가 버질에게 지난밤의 행적을 묻는다. 그날 밤, 버질은 젊은 미망인의 집을 찾아갔고, 사랑의 밤을 지낸다. 마을사람들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소문이 돌았다. 이에 젊은 미망인을 짝사랑하던 동네 청년이 자살을 해버린다. 동네 청년의 장례식에 젊은 미망인이 눈에 띄지 않게 참석하려하다가 마을사람들에 의해 차단된다. 결국 안뜰에 갇혀 청년의 자살에 대한 책임으로 마을사람들에게 돌팔매질 당한다. 버질은 자신이 개입하기엔 두려워 조르바에게 알린다. 조르바는 자살한 청년의 친구인 미미토스가 칼을 들고 미망인을 죽이려하자 그를 저지한다. 그 때, 자살한 청년의 아버지가 칼을 가져와 미망인을 죽인다. 버질이 자신의 무능력에 대해 한탄하자 조르바는 죽음의 공허함에 대해 설명한다. 비 오는 날, 마담 오스텐스가 버질과 조르바의 집에 찾아와 그들을 기다린다. 결혼식에 진전이 없자 조르바에게 불평을 하자. 조르바는 당장 결혼식을 하자고 제안한다. 그러자 마담도 그에 동의하여 간단한 결혼식을 올린다. 얼마 후, 마담은 폐렴에 걸려 임종 직전까지에 이르렀다. 버질과 조르바는 그녀의 곁에서 간호한다. 한편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타지인'이 죽어감에 확신하자 집으로 몰려온다. 위로가 아닌 그녀의 물건을 탐하기 위해 몰려들어왔다. 그녀가 죽기를 기다리며 전전긍긍 집 주변을 서성인다. 그녀가 죽자 마을사람들은 소리지르면 물건들을 훔치기 시작한다. 심지어 그녀의 방에까지 들어와 물건들을 모두 가져간다. 가져갈수 있는것은 다 가져간 후 떠나간 사람들을 보며 조르바는 홀로 한숨을 쉰다. 조르바는 그녀 옆에 있던 새장의 앵무새를 들고 떠난다. 조르바가 계획했던 나무운반은 완료되어, 양고기를 구으며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수도사들의 축복에 이어 조르바는 공기총을 쏘아 시작을 알렸다. 그러자 통나무가 빠른 속도로 케이블을 타고 내려오다가 박살나 아주 조금의 일부만이 남아 내려왔다. 이에 조르바는 당황하지 않고 두번째로 공기총을 쏘아올리자 다음 통나무가 내려온다. 그러자 이번에도 엄청난 속도로 내려와 바다에 빠지고 만다. 조르바는 다시 공기총을 쏘고 통나무는 또다시 무서운 속도로 내려와 무대를 박살낸다. 수도사들과 마을 주민들은 이미 버질과 조르바를 떠나 도망갔다. 버질과 조르바는 구운 양고기를 먹으로 해안 옆에 앉았다. 조르바는 자신이 큰 도시를 여행할 것이라며 이야기한다. 조르바가 곧 떠날때 버질도 함께 떠날 것을 요청하였다. 조르바는 버질의 영국행 출항에 슬퍼하며, 그에게 광기가 사라졌음을 아쉬워한다. 버질은 조르바에게 춤을 알려줄 것을 요청했고, 조르바는 그에게 춤을 알려준다. 버질은 자신의 바보같은 춤사위에 크게 웃는다. 이야기는 두 남자가 열정적으로 해변에서 춤을 추는 것으로 끝난다. /-------------------------------- 춤의 의미[편집]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중요한 의미로 등장하는 '춤'은 인간이 스스로의 삶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인생을 하나의 유희판으로 여기려는 태도, 가치관과 관계된 것이다. 이는 희극과 비극이 교차되어 일어나는 인생이라는 무대에 스스로가 충실한 희극배우임을 깨우치며 중력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하는 하나의 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가가 영향을 받은 니체의 철학을 빌려 설명하자면, 니체는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에서 춤을 출 줄 아는 신만을 믿겠다고 말한다. 니체에게 가장 상위의 인간 유형은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스스로 사랑하고 극복할 수 있는 존재인데, 웃음과 춤은 이러한 유형의 인간이 수반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2] 자유의 의미[3][편집]원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나'는 자유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반복해서 되묻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고대로부터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으로 점철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불행한 시시포스와 같이 똑같은 일상의 쳇바퀴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살기 위해 일상을 영위한다. 일을 하는지 일상과 일을 위해 삶을 영위하는지, 무엇이 우선인지도 모른 채 삶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일생을 마감한다. 이러한 보편적인 삶에 회의를 느끼고 이렇게 일생을 어떠한 틀에 가둔채 사육되는 삶을 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 인생의 의미[4][편집]우리는 어린 시절에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한다. 쉽게 말하면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회에서 윤리를 배우고, 하면 안 되는 것들에 대해서 학습을 받으면서 차츰 그러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주체성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조르바는 그렇지가 않다고 한다. 아직도 태어났을 때의 그 탯줄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조르바가 이해하는 인간의 모습은 한 마디로 자유다. 주인공은 조르바와 함께한 몇 개월 동안 조르바를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조르바는 본능에 충실하고 말보다는 몸짓에 익숙한 사람이다. 주인공은 조르바에게서 열정과 자유를 발견하였다. 조르바가 내뱉는 말은 조르바의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