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1178∼1234)
▲ 혜심(慧諶) (1178~1234) 고려 중기의 고승.
조계산 수선사의 제2세 법주,
성은 최씨. 자는 영을. 자호는 무의자.
나주 화순현출신. 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배씨이다.
어머니가 하늘의 문이 열리는 꿈을 꾸고 또 세 번이나 벼락 맞는 꿈을 꾼 다음
그를 낳았다 고 하고, 또 일설에는 어머니가 어느 해 겨울, 샘의 오이를 건져 먹고
그로 인해 잉태하여 낳았다.
그 뒤 사람들은 그 샘을 ‘자취 어린 샘’ 이란 뜻의 적천(跡泉)이라 부르고
스님의 호를 무의자(無衣子)라 했다.
어려서 아버지가 죽자 출가하기를 청하였으나 어머니는 허락하지 않고
유학에 힘 쓰라 하였다.
그러나 항상 불경을 생각하고 주문을 외워 힘을 얻었다.
무당 집과 사당을 허물기를 좋아하고, 가끔 사람들의 병을 다스리면 효험이 있었다.
1201년(신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병보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인척형인 배광한의 집에서 시병할 때
관불삼매에 들었는데 어머니는 그 꿈에 여러 부처와 보살들이
사방에 두루 나타나는 것을 보고 꿈을 깨자 병이 나았다.
일찍 출가할 뜻을 가졌으나 이루지 못하고 유학에 힘써 사마시에 합격하고
태학관에 들어갔으나 출가를 반대하던 모친이 이듬해 돌아가시자
보조지눌을 찾아가 출가했다.
당시 조계산에서 수선사를 만들어 사람들을 크게 교화시키고 있던 지눌에게 나아가
재를 올려 죽은 어머니의 명복을 빈 다음, 곧 머리를 깎고 지눌의 제자가 되었다.
전날밤 지눌은 설두현선사가 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상히 여겼는데
혜심이 찾아왔으므로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이때부터 혜심은 힘써 정진하였다.
오산에 있을 때에는 어떤 바위 위에 앉아 밤낮으로 선경을 익혔고,
오경만 되면 게송을 읊었는데 소리가 매우 우렁차 10리 밖까지 들렸으며,
조금도 때를 어기지 않아 듣는 사람들이 그로써 아침이 된 줄을 알았다.
또 지리산 금대암에 있을 때 연좌대 위에서 좌선하고 있었는데,
눈이 내려 머리까지 쌓여도 꼼짝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죽었나 의심하여 흔들어보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25세에 득도한 후 오산 지리산 금당암 등지에서 각고의 수련을 하고
지눌의 법을 이어받았다.
지눌이 조게산 수선사의 법석을 그에게 전하려 했으나
사양하고 지리산에 깊이 숨어 수년 동안 더욱 정진하며 도를 닦았다.
1205년(희종 1)가을, 지눌이 억보산에 있을 때
선객 몇 사람과 함께 찾아가다가 그 산밑에서 쉬었다.
1,000여 걸음 밖에 있는 암자에서 지눌이 그 시자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아이 부르는 소리는 송라의 안개에 떨어지는데,
차 달이는 향기는 돌길의 바람에 풍겨오네.” 라는 게송을 지었다.
지눌을 만나 이 게송을 보였더니 지눌은 머리를 끄덕이며 수중의 부채를 주었다.
혜심은 또 게송을 지었다.
“전에는 스승의 손에 있더니 지금의 제자의 손안에 있네,
만일 더위에 허덕이며 다닐 때면 맑은 바람 일으킨들 그 어떠하리.”
지눌은 그 재능을 더욱 중히 여겼다.
또, 어느 날 지눌을 따라 길을 가는데, 지눌이 헌신짝을 가리키며
“신은 여기에 있는데 사람은 어디 있는가?” 하자
혜심은 “왜 그때에 보지 않았습니까?” 하였다.
또 지눌이 조조의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와 대혜의 ‘열가지 병’을 들어 물었다.
대중이 모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혜심은 “세가지 병을 앓는 이라야 그 뜻을 알 것입니다.” 하였다.
지눌이 다시 “세 가지 병을 앓는 사람은 어떤 곳으로 숨을 쉬는가?” 하고 묻자
혜심은 손으로 창을 한번 내려쳤다.
지눌은 크게 웃으며 혜심을 남몰래 불러 다시 여러 가지를 점검한 다음.
“나는 이제 그대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그대는 불법을 임무로 삼아 본래의 서원을 바꾸지 말라.” 하였다.
1208년 지눌이 그에게 수선사의 사주 자리를 물려주고 규봉산으로 돌아가 쉬려하였다.
그러나 사양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여러 해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1210년 33세에 지눌이 입적하자 문도들이 왕에게 알려
칙교를 받들고 법석 잇기를 권하니 마지못해 수락하여 수선사의 제2세 법주가 되었다.
고종이 즉위하여 선사 대선사를내리니 선석에 뽑히지 않고
승질에 오른 몇몇 가운데 하나이다.
왕명으로 단속사 주지를 겸임하기도 했으나 수선사에 주로 머물며
수선사를 더욱 확장하고 교화활동에 전념했다.
수선사를 중심으로 지눌의 간화선법을 계승하여 이를 더욱 진작했다.
1212년 강종이 이 말을 듣고 유사에 명하여 증축하게 하고,
여러 번 중사를 보내어 공사를 감독하게 하여 수선사를 넓힌 뒤,
다시 사신을 보내어 만수가사와 마납(법복의 하나) 각 한번과 향․차․보병 등을 내렸으며,
또 법요를 구하였으므로 혜심은 《심요》를 지어 올렸다.
그 뒤 그의 도를 사모하여 문하로 모이는 수많은 사람을 교화하였다.
당시 문하시중 최우도 그의 명성을 듣고 여러 번 서울로 맞이하려 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두 아들을 보내어 그를 모시도록 하였다.
고종은 왕위에 올라 혜심에게 선사를 제수하고 다시 대선사로 올렸는데,
시험을 치르지 않고 바로 승려의 벼슬에 오른 이는 그가 처음이었다.
1219년(고종 6) 왕이 단속사 주지로 명하였을 때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이듬해 부임하였다.
1222년 금나라 정우 9년 임오 한겨울 경남 양산군 취서산 통도사 금강계단과
비각을 예배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주제로 절구(絶句) 2수(首)를 지었다.
사리를 두고 지은 것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 사리, 높은 계단을 누르고
엎어 놓은 솥 1) 허리가에 불탄 흔적 보이네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
잇따라 한 면(面) 타서 절친함을 보였네
또 다음 것은 가사를 두고 지은 것.
간절히 머리 조아려 삼가 귀의하옵네
우리 부처님 입으시던 이 옷에
인하여 생각하네,
영취산 사자좌 위의 온갖 복덕으로 장엄하신 거룩한 그 모습을
정산(충남 청양군) 유구역(維鳩驛)에서 단청을 고칠 때
관복을 벗고 홀로 낙향하는 사람을 그려 놓았는데
아무도 그 그림 속의 인물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스님은 그 그림을 보고 절구(絶句)한 수를 짓는다.
벽위에 어떤 사람이 이 그림을 그렸을까
간쟁하던 신하가 떠나자 나랏일 그르칠 뻔 했네
산승이 한 번 보매 이리도 슬픈데
하물며 당시 관가의 사대부들이랴....
간쟁하던 신하는 고려 의종 임금 때의 남평 문극겸 3)을 말한다.
그는 임금께 상소했다가 응해주지 않자 좌정언(左正言) 및 승선(承宣) 벼슬을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갔었다.
만연사에 비석과 영각을 세웠다.
뒷날 조선시대의 고승 연담이 여기에 시 한 수를 지어 바쳤다.
빼어난 산 맑은 물의 아름다운 이 땅에
5백 년 전, 국사가 탄강하셨네
이제는 땅 기운이 노쇠했는가
나같은 무식군(擔板漢)이 태어나게...
1233년 겨울에 수선사에 있으면서 병이 나자 왕은 어의를 보내어 진찰하게 하였다.
이듬해 봄에 월등사로 옮겼는데,
하루는 제자들에게 “나는 오늘 고통이 매우 심하다.” 고 하였다.
그 까닭을 묻자 “어떠한 고통도 이르지 못하는 곳에 따로이 한 건곤이 있다.
묻노니 그곳은 어떠한 곳인가? 크게 고요한 열반의 문이니리.” 하며
얼마 뒤 열반할 것임을 시사하였다.
1234년 6월 26일에 문인들을 불러 여러 가지 일을 부탁한 뒤 마곡에게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오늘은 너무 바쁘다.” 하였다.
마곡이 그 까닭을 묻자, 다시 “이 늙은이가 오늘 너무 바쁘다.” 하였다.
마곡이 멍하니 있을 때 빙그레 웃으며 가부좌한 채 앉아서 입적하였다.
나이 56세, 법랍 32세였다.
이튿날 월등사 북쪽 봉우리에서 화장하고 사리를 모아 수선사로 가져갔다.
왕이 진각국사라 국호를 내리고 이듬해 수선사 북쪽 광원암에 부도를 세워
탑명을 원조지탑이라 사액하였다.
문하에 청진국사 몽여․각운․진훈, 마곡 등이 뛰어났으며
몽여는 수선사 제3세 법주가 되었다.
이규보가 찬한 진각국사비는 강진군 월남산 월남사에 각각 세워졌다.
현재 비문은 잔비만이 전해오고 있으며,
《동국이상국비》․《동문선》․《조선금석총람》등에 그 글이 수록되어 있다.
문인에는 몽여․진훈 ․각운․마곡 등이 있다.
그는 지눌의 충실한 조술자였으며 한 걸음 더 가 고려선가의 위치를 철저히 맴돌며
세속적 명예에 눈이 어두워 서로 헐뜯고 다투는 수라장 속에 뛰어든 많은 승려들의
잘못에 경종을 울렸으며, 한편으로는 주숙적 타력의존의 폐습에
잠겨 불도의 타락을 스스로 불러오던 고려왕실 주변의 그릇된 신앙풍조를 타파하는
중대한 교화의 구실을 하였다.
한번도 서울의 땅을 밟은 일이 없는 그가 한 나라의 존중을 받았던 사실은
그의 이러한 일면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혜심의 고원한 선문이 많은 일반 불교도들에게 알기 쉽도록 이해되었는지는 의문이나,
무인집권 당시와 몽고족의 고려지배 이전 시기에 있어
혜심과 그 제자들이 건재하였다는 것은 확실히 민족정신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긍정적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저서로는 중국 원나라 세조, 금나라 선종 때의 병술․정해년 사이(1266~7)
문인 진훈(眞訓) 등과 함께 여러 선사들의 선문의 이야기들을 모으고
불․법․승 삼보의 기록들을 엮어 <선문염송집> 30권을 완성했다.
또 <선문강요> 1권을 지었다. 《심요》1권, 《조계진각국사어록》1권,
《구자무불성화간병론》1편, 《무의자시집》2권, 《금강경찬》1권,
《선문강요》1권이 있다.
《참고문헌》 조계진각국사어록, 동문선, 조선금석총람,
조선불교통사(이능화, 신문관, 1918)
1) 엎어놓은 솥이라 함은 금강계단 윗 부분에 안치한 솥과
비슷한 뚜껑 돌의 모양을 형용한 말
2) 원문은 연소일면시무간(連燒一面示無間) 당초 자장 법사께서 서기 643년
석가여래의 두골과 치아, 불사리 백립(佛舍利 百粒), 가사 1벌을 당나라로 부터 가져와
사리를 세 등분하여 경주 황룡사와 울산 태화사, 양산 통도사에 각각 봉안했었다.
그래서 황룡사 탑이 불탈 때 통도사 사리탑도 절친함을 나타내기 위해
한 면이 탔다고 한것.
3) 문극겸(1122~1189)은 고려 문신으로 자는 덕병, 본관은 남평이다.
고려 의종 때 좌정언으로서 직언을 서슴치 않아 좌천됐었다.
정중부의 난 때 직언 했던 과거 때문에 화를 면했다. 최세보와 함께<의종실록>을 편찬
4) 연담(1720~1799)의 법명은 유일(有一), 속성은 천(千),
본관은 화순으로 동문 설파(雪坡)와 함께 선교의 대장(大匠)으로 유명
5) 담판한(擔板漢)은 널쪽을 짊어진 사람.
한쪽은 보고 다른 한쪽은 보지 못하는 편견자를 뜻함.
첫댓글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고승에
혜안과 불심, 큰스님의 일대기 감사히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