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장(尋牛莊 : 사적 550호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29길 24)
1. 연혁 및 개요
심우장은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이 11년간 거처하시다가 입적한 곳이다. 1933년, 김벽산(金碧山)이 초당을 지으려고 사둔 땅을 기증받아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사장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지었다. 심우장은 1984년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됐다가 2019년 4월 8일 사적으로 승격됐다. 현재 지어진 때가 문화재청과 기타 글에서는 모두 1933년으로 하고 있으나 김광식은 1935년에 지은 것이라 주장한다.
심우장尋牛莊에서 심우尋牛는 사람 마음을 소로 비유하여 잃어버린 소(마음)를 찾아 간다는 뜻이다. ‘심우’의 과정은 10단계로 나누는데 이런 과정을 그린 것이 심우도尋牛圖이고 주로 사찰 벽화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만해가 당호를 심우장이라고 한 것은 이곳을 자기의 본성을 찾아가는 정진의 장소로 생각했던 것이다.
심우장은 한때 남의 손에 넘어간 적도 있었다. 만해 사후 생활이 어렵다보니 집을 52년 12월에 팔았던 것이다. 이후 만해 제자였던 김법린의 도움으로 1962년 유족에게 돌려졌고, 1970년 초반까지 유족들이 살다가 이후 타인이 관리했다.(김광식/34,5쪽) 이후 1979년 출범한 만해사상연구회가 1981년 10월 유족으로부터 인수했다. 1
984년 문화재로 지정된 후 1990년 딸과 사위가 성역화사업을 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1991년 심우장 내 1층 양옥을 짓고 거주했다. 이 집은 성북구관리로 넘어가면서 철거되고 관리사를 새로 지었다. 성북구는 1997년 인근토지를 수용하고 1999년부터는 직접 관리하고 있다.(김광식/34~7쪽)
2. 심우장 건축연도
<심우장실측조사보고서>에서 묵서명墨書銘이나 상량문에 대한 언급이 없다. 큰 집이 아닌 경우 일반적으로 종도리에 ‘모년모월모일상량某年某月某日上樑’이란 글을 써놓아 건축연도를 알 수 있는데 실측에서도 묵서명이 발견되지 않은 것 같다. 심우장 건축연도는 문화재청을 비롯한 다른 곳에서는 모두 1933년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김광식은 1935년이 심우장 건축연도라고 주장한다.
김광식은 만해가 결혼하고 잠시 성북동에 있는 김철중의 동생인 김정국의 집에서 살다가 심우장을 짓고 이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김광식/12쪽) 나는 김광식의 주장에 동의한다. 심우장은 결혼 후 지은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1931년 8월 혜성이란 잡지에서 만해 관련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近來에는 獨身修道를 너무도 孤寂하게 생각하여 마땅한 인물만 있으면 다년간 끊었던 古匣의 琴絃을 다시 이어 鳳兮 兮老而德不衰한 一曲을 타기 사양치 않겠다.” 그리고 1933년 2월 15일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에서 적당한 곳이 있으면 결혼할 생각이 있다고 했다.(김광식/10쪽) 이런 것을 보면 오랜 투쟁에 심신이 지쳐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마음을 알게 된 사람들이 진성당 병원의 간호사였던 유숙원兪淑元(당시 36세)을 설득해 결혼하게 했다. 이 결혼은 재혼으로 재혼하기 전까지 만해는 사글세방이나 선원에서 유숙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했던 것 같지 않다. 심우장을 지을 때 벽산스님이 땅을 제공하고 건축에 필요한 돈은 1000원 이었는데 만해가 200원 부인이 200원, 조선일보 사장 200원, 제자 모금이 100원 이었다 그리고도 모자라 300원은 저당으로 마련했다.(김광식/13쪽 주 35)
위의 내용으로 볼 때 심우장 건축비용은 결혼 후 마련됐다는 것이다. 즉 결혼 후 사는 집이 마땅치 않자 벽산이 땅을 제공하는 것으로부터 심우장 건축이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집의 건축시기는 1933년 이후가 맞을 것이다. 그리고 1973년 <문학사상> 4호에 나온 내용에는 만해가 결혼 후 집이 없어 성북동 집에 세 들었다는 것과 이것을 본 동지들이 집을 장만해줄 계획을 세웠고, 만해 부인인 공사 중 밥을 지어 날랐다는 내용이 있다.(김광식/12,3쪽)
무엇보다 김광식이 등기부 등본을 확인해본 결과 1935년 3월에 등기가 된 것이라 했다.(김광식/3쪽 주1) 집의 이력은 건축물대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건축물대장에도 “1935년 4월 30일 신규작성(신축)”으로 기재돼 있다. 그리고 2018년 사적 신청서 상에 있는 222번지 토지 소유주 변경 내용을 보면 1931년 12월 26일 222번지가 필지 분할된다. 분할내용은 현재와 같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2년 1월 19일에 222-1과 3이 김동명의 소유가 되고 222-2번지가 정규찬 소유가 된다. 정규찬 소유가 52평인 것으로 보아 이것이 김벽산이 만해에게 준 땅으로 추정된다. 소유주가 김벽산이 아닌 것으로 보면 김벽산의 친인척 명의로 구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하 1934년 9월 14일 222-1과 2가 만해 부인인 유숙원의 소유가 된다.
이것을 보면 1933년 결혼 후 지인들의 도움으로 222-2에서 건축을 시작하려 땅과 건축비를 마련하였으나 과정에서 땅이 부족하여 추가로 222-1을 매입하여 1934년 9월 이후 건축을 시작한 것이다. 김광식에 의하면 건축물등기부 등본 상 날짜는 1935년 3월이라고 했다.(김광식/3쪽 주1.) 토지소유주가 1935년 3월 23일에 한용운이 되는 것으로 보아 심우장 공사가 끝난 다음 1935년 3월 23일 토지와 집에 대한 등기도 같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건축물대장에는 1935년 4월 30일에 신축으로 기재된 것이다.
이런 일련의 상황으로 보아 심우장이 지어진 때는 1935년 3월으로 수정돼야 한다.
추신 : 만해는 14세에 전정숙全貞淑과 결혼에서 26세인 1904년 아들인 보국을 얻었다. 보국은 월북해서 5녀를 두었다고 한다. 만해는 아들을 낳은 다음해 출가하였다.
3. 심우장 건축
심우장은 건축적으로는 크게 의미있는 건물은 아니다. 건물규모도 그렇고 비슷한 시기에 성북동에 지어진 집들에 비해서도 규모나 격이 떨어진다. 그러나 만해 선생에겐 고대광실高臺廣室과 다름없는 집이었을 것이다. 일단 주거나 안정됐고 부인의 도움으로 몸이나 마음모두 안정 됐을 것이다. 집은 크지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오히려 크거나 화려했다면 ‘만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았을 것이다.
집은 ‘ㄴ’자 형으로 전면은 4칸 측면 한 칸 반이고 몸체는 1고주 5량이고 부엌은 3량 집이다. 부엌은 뒤쪽으로 한 칸 찬방이 돌출돼있다. 찬방에서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데 이곳부터 후면 전체와 만해가 거주했던 건넌방 전면까지 좁은 툇마루가 깔려있다. 이 집에서 특징은 대청이 없다는 것이다. 4칸의 경우 한 칸 정도 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심우장에서는 두 칸 모두 온돌을 설치해 방으로 사용했다.
단출한 식구에 방을 넓게 쓰려는 의도와 북향집에서 겨울에 대청을 쓸 일이 별로 없는 것을 고려해 계획한 것이 아닐까 한다. 안방 앞에는 반칸 퇴가 있고 이 퇴는 부엌에서 건넌방까지 연결돼 통로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게 했다. 퇴칸 천정은 얇은 판재로 문양천정을 만들어 놓았다. 이것이 당시 것인지 후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천정을 어렸을 때 본 기억이 있어 50년 대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 집에서는 전통의 답습보다는 실용성을 우선했고, 근대 한옥에서 유행했던 유형들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앞서 말한 안방은 실용성을 우선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근대한옥에서는 유리창이 도입되면서 퇴칸이 실내로 된다. 이런 변화가 이곳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퇴칸이 실내화 되면 방한에 큰 도움이 되고 공간을 넓게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근대 한옥에서는 처마에 함석 차양을 설치하는 것이 유행하는데 이곳도 역시 그런 함석차양을 설치했다. 이렇게 함석으로 차양을 만들면 처마가 짧아도 된다. 처마가 짧다는 것은 지붕 면적이 줄어든다는 것으로 목재나 기와 등이 덜 들어가 공사비도 줄어든다.
개인적으로 심우장의 매력은 풍광에 있다. 지금이야 그저그런 풍광이 됐지만 처음 이곳에 자리 잡았을 때 심우장에서 바라본 풍광은 대단했을 것이다. 성북동이 산꼭대기까지 건물도 글어찬 것은 70년대 이후다. 삼청터널이 뚫리고 모 그룹이 이곳을 고급주택 단지로 개발하면 집들이 들어찼지만 심우장이 들어설 때만해도 교외의 풍광 좋은 동네였을 것이다.
심우장 아래 덕수교회 안쪽에는 이종석李鍾奭별장이라고 불리는 대단한 한옥이 있다. 이종석(1875-1952)은 한용운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거부였다. 그가 이곳에 별장을 지었다는 것은 그만큼 풍광이 아름다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종석이 누렸던 풍광을 만해도 같이 누렸을 것이다. 이런 풍광 때문에 만해 이전 김벽산이 초당을 지으려 했던 것이고 만해 역시 풍광에 매료돼 이곳에 자리잡은 것이 아닐까 한다.
4. 나가는 이야기
전체적으로 심우장이 한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기법이나 치목 수준으로 볼 때 아주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없다. 어쩌면 당시 다량으로 지어졌던 평범한 집장사 집과 같은 한옥이다. 따라서 근대를 대표할 만한 한옥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만해가 말년에 거주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것 하나 만으로도 매우 중요한 한옥이다. 즉 ‘만해萬海’라는 이름이 이 집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