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와 考證學 沈慶昊(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1. 머리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석노시(石砮詩)」는 청해(靑海)의 토성에서 발굴되는 석부(石斧)․석족(石鏃)에 대한 고증(考證)을 행하면서 그 학적 관심을 운문으로 읊었다. 시에 金正喜의 自註가 있어, “석부(石斧)ㆍ석족(石鏃)이 매양 청해(靑海)의 토성에서 나오는데 토인(土人)들이 토성을 숙신(肅愼)의 고적으로 여기기에 이 시를 짓는다.”라고 하였다. 민족문화추진회의 국역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형ㆍ양의 옛 직공(職貢)엔 다 노(砮)를 바쳤으니 荊梁舊貢皆貢砮 우의 때에 돌로 무기 만든 일이 있었던가 禹時以石爲兵無 숙신이라 석노는 대개 우와 연관인데 肅愼石砮蓋仍禹 우의 노는 마침내 중국땅에 전함 없네 禹砮遂無傳中土 거말이나 좌과는 예서 제서 얻었으되 距末左戈處處得 악작이랑 양고석은 보지를 못했거던 未睹愕作羊告石 공자의 세상에도 역시 이건 없었으니 孔子之世亦無之 수리 노를 띠고 와도 사람들이 몰랐다네 有隼帶砮人不知 이 일은 황당하여 가장 믿기 어렵고야 此事荒渺最難證 노를 띠고 어떻게 먼 데를 날아오리 帶砮何以飛遠爲 개마산 남쪽이라 일천 리의 지역에는 蓋馬山南一千里 낙랑 진번 서로 아니라거니 기라거니 樂浪眞番互非是 산천의 도기에도 이 증빙이 다 없는데 山川圖記摠無徵 전설을 또 받아들여 숙신씨라 일컫누나 又沿稱之肅愼氏 대개는 돌도끼나 아울러 돌촉들을 大抵石斧並石鏃 청해의 언덕에서 오다가다 얻는다네 尋常得於靑海曲 부는 바로 이와 같고 보형과는 다르지만 斧乃似是異黼形 촉은 분명 어복[활집]에서 나온 것 같군그래 鏃若分明出魚服 돌 성질 금강과 맞설 만큼 예리하고 石性銛利當金剛 돌무늬 일고 일어 고록이 무리졌네 石紋作作暈古綠 삼백 매가 있어 혹은 직공에 채웠는데 有三百枚或充貢 직공에 채웠을 뿐 용 만든 건 아니었네 充貢而已非作用 발해 임금 대씨나 윤 시중[윤관(尹瓘]을 보더라도 渤海大氏尹侍中 이 도끼 이 촉으로 전공 거둔 일 없었네 未聞此斧此鏃收戰功 가소롭다 그 당시 오아속이라던가 可笑當時烏雅束 치우 호로 따위는 애들 장난 마찬가지 雉羽葫蘆兒戲同 [치우로 어설프게 아이 장난처럼 했다니.- 필자 신역 ] 이 도끼 이 촉이 꼭 숙신의 물이라면 此斧此鏃斷爲肅愼物 동이들은 대궁에 능하단 게 상상되네 更想東夷能大弓 토성이라 옛 자취 정해지지 못했거늘 土城舊蹟殊未定 이를 얻어 다짐하면 오히려 강통일레 得此孤訂猶强通 돌 스스로 말을 않고 또 관마저 안했으니 石不自言又不款 야뢰의 산 빛깔은 속절없이 아득아득 耶賴山色空濛濛 긴 손톱의 질서도 역시 어긋나지 않고 長爪疾書亦不錯 장평의 화살머리 옛 피가 붉었다네 長平箭頭古血紅 기린이라 조천석 그보다는 썩 나으니 勝似朝天麒麟石 베 폭 같은 강빛에 와전된 주몽일레 江光如練訛朱蒙
이 시는 사론시(史論詩)의 성격을 지닌다. 조선후기에 국사에 대한 연찬이 본격화되면서 다산 정약용도 이와 같은 사론시(史論詩)를 남겼다. 김정희는 우선 고전과 박고도(博古圖) 등에서 砮에 관한 기록을 조사하여, 그 사용의 사례를 조사한 뒤, 숙신의 砮에 관한 사실을 조사하였다. 김정희의 이 시는 유득공의 「肅愼弩歌」와 같은 소재를 다루되, 유득공이 北虜 來服의 과거사실화를 안타깝게 여기는 민족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과는 달리, 박물고증학적인 관심을 더 짙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러한 관심은 결코 상지(喪志)로 빠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민족사에 대한 실증적 인식을 촉구하였다. 그런데 제27구 이하에서는 孤證을 증거로 强通하는데 조심하는 考證之學의 방법론(하나만의 증거는 증거가 아니라는 것이 고증지학의 기본 태도이다)과, 사적 증거를 토대로 상고사를 재서술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드러나 있다.
此斧此鏃斷爲肅愼物 이 돌도끼와 돌촉이 단연코 숙신 것이라면 更想東夷能大弓 동이가 대궁에 능하단 게 더욱 상상되네 土城舊蹟殊未定 토성의 유적은 비록 정하기 어렵지만 得此孤訂猶强通 이 孤證[돌도끼, 돌촉] 있으니 强通할 수는 있네 石不自言又不款 돌은 아무 말없고 또 아무 표시 없는데 耶賴山色空 야뢰산 빛만 속절없이 안개만 자욱하다 長爪疾書亦不錯 도끼 끝에 무어라 쓴 글씨도 보기 괜챦고 長平箭頭古血紅 긴 화살촉 끝에는 홍혈색을 띄고 있네 勝似朝天麒麟石 그래도 나으니, 조천했다는 기린석이 江光如練訛朱蒙 강물빛이 비단같아 주몽과 연관짓는 것보다는.
기린굴과 조천석은 평양의 부벽루(浮碧樓) 아래에 있다고 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동명왕(東明王)이 기린마를 타고 이 굴로 들어가 땅속으로부터 조천석으로 나와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기린석을 두고 그 주위에 햇볓이 비치면 강빛이 비단같다고 하여 朱蒙의 고사와 연결시킴은 訛謬라고 보면서, 석부․석촉의 실물은 그것밖에 남아 있지 않은 孤證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실물로 숙신의 토성을 考證하는 데 强通할 수 있어, 토성을 숙신 토성이라 지목하는 것은 한결 근거 있다고 하였다.
2. 김정희의 實事求是說 김정희는 詩‧書‧畵 三絶로 일세를 풍미했을 뿐 아니라 實事求是의 학문방법을 주창한 학자이기도 하였다. 1809년(순조9) 생원이 되고, 1819년(순조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설서, 충청우도 암행어사,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09년(순조 9) 24세 때 동지사 겸 사은사의 부사였던 부친 김노경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큰 학자들인 완원(阮元, 1764-1849)·옹방강(翁方綱, 1733~1818)·조강(曹江)‧서송(徐松) 등과 교유하였다. 완원은 기초 언어학을 토대로 하는 한학(漢學)을 중시하여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주장하였던 인물이고, 옹방강은 한학과 철학적 이념을 중시하는 송학(宋學)을 절충하여야 한다고 보았던 인물이다. 김정희도 뒷날 「실사구시설」에서 "사실이 아닌 것을 일삼아 근거가 없는 공소(空疎)한 술수로 방편을 삼고, 옳은 것을 구하지 않으며 선입견을 위주로 학문을 하면 성현의 도에 배치된다."라고 주장하게 된다. 청에 다녀온 뒤 김정희는 대진(戴震)의 이욕설(理欲說)을 따른 「사폐변(私蔽辨)」을 저술한다든가 능정감(凌廷堪)의「예경석례(禮經釋例)」를 참고하여 예학을 연구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청나라의 학문을 수용하여 스스로의 학문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김정희는 청나라의 실증적 문헌학에서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 청나라 학풍을 대개 考据는 또한 考證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관련 자료의 수집을 근거로 순서대로 배열하여 그 이동을 연구하고 시말을 검토하여 고적의 진면목을 똑똑히 밝히고 사실의 진상을 조사하는 것이다. 건가 고증학의 특징은 실사구시와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고 주장을 펴는 데에는 반드시 의거함이 있어야 했다. 그들은 자료를 광범하게 수집하고, 小學(음운문자훈고학)․지리․금석․판본 등 여러 방면의 학문을 이용하여 고증하였다. 특히 이른바 乾嘉學者들은 이러한 방법을 적용하여 경전과 역사서를 정리하였고, 각 분과 학문을 성립시켰다. 김정희의 학문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할 만한 글은 「實事求是說」이다. 그는 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서,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實事求是]"라고 한 말을 인증하여, 이 말이야말로 학문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도리라고 하였다. 만일 사실에 의거하지 않고 다만 허술한 방도를 편리하게 여기거나, 그 진리를 찾지 않고 다만 선입견(先入見)을 위주로 한다면 성현(聖賢)의 도에 있어 배치(背馳)되기 마련이라고 경고하였다.
한유(漢儒)들은 경전(經傳)의 훈고(訓詁)에 대해서 모두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 있어 정실(精實)함을 극도로 갖추었고, 성도인의(性道仁義) 등의 일에 이르러서는 그때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있어서 깊이 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많이 추명(推明))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주석(注釋)이란 것이 있으니 이것은 진정 사실에 의거하여 그 진리를 찾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진(晉)나라 때 사람들이 노자(老子)·장자(莊子)의 허무(虛無)한 학설을 강론하여 학문을 게을리하는 허술한 사람들을 편리하게 함으로부터 학술(學術)이 일변(一變)하였고, 불도(佛道)가 크게 행해짐으로써 선기(禪機)의 깨닫는 바가 심지어 지리해서 추구하여 따질 수도 없는 지경이 됨에 이르러서 학술이 또 일변하였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다만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한마디 말과 모두가 상반(相反)되었기 때문이다. 그후 양송(兩宋 북송(北宋) 시대와 남송(南宋) 시대를 합칭한 말)의 유자(儒者)들은 도학(道學)을 천명하여 성리(性理) 등의 일에 대해서 정밀하게 말해 놓았으니, 이는 실로 고인(古人)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한 것이다. 그런데 오직 육왕(陸王) 등의 학파(學派)가 또 실없는 공허(空虛)를 밟고서 유(儒)를 이끌어 석(釋)으로 들어갔는데, 이는 석을 이끌어 유로 들어간 것보다 더 심한 것이었다.
實事求是의 治經方法은 실은 청나라 乾嘉學者는 “훈고로써 의리를 구하는”(以訓詁求義理) 治學 원칙과 상관이 있다. 곧, 乾嘉學者의 阮元은 解經의 방법으로서의 實事求是에 대해, “내가 경전을 설명하는 것은 古訓을 미루어 밝히는 실사구시일 따름이다.”라고 자칭하였다.또한 阮元은 “성현의 도는 경전에 보존되어 있는데, 경전의 의미는 훈고가 아니면 밝힐 수 없다.”이라 하였다. 그는 考據訓詁를 통해야만 聖賢之道로 나아갈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성인의 도는 비유컨대 궁실의 담장과 같고, 문자와 훈고는 그 문이나 통로와 같다. 문이나 통로를 잘못 들어가면 걷는 걸음마다 모두 잘못될 것이니, 어떻게 堂에 오르고 방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金正喜는 바로 이 「實事求是說」에서, ‘實事求是’ 한 마디가 “학문의 가장 요긴한 도”(乃學問最要之道)라고 하면서, “만약 실제적인 일에 바탕을 두지 않고 다만 공소한 방법만을 편하게 여기면서 옳은 것을 구하지 않고 단지 선입견의 언설을 위주로 삼는다면, 그것은 성현의 도에 배치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若不實以事而但以空疏之術爲便, 不求其是而但以先入之言爲主, 其於聖賢之道未有不背而馳者矣)라 하였다. 김정희의 實事求是說이 阮元 등 乾嘉學者에게서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김정희의 설이 阮元의 설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라고는 보기 金正喜는 “경전을 설명하는 데에는 믿을 만한 증거를 위주로 삼아아 하니, 가장 경계해야 할 폐단은 자신의 의견으로 추측하여 그것만을 전적으로 정설이라 여기는 것이다.”,“사실적인 증거가 아니면 차라리 없는게 나으니, 단정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김정희는 앞서의 「실사구시설」에서 訓詁學이 만사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학문하는 도는 이미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孔)을 귀의처(歸依處)로 삼았으니, 의당 사실에 의거해서 옳은 진리를 찾아야지, 헛된 말을 제기하여 그른 데에 숨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학자들은 훈고를 정밀히 탐구한 한유(漢儒)들을 높이 여기는데, 이는 참으로 옳은 일이다. 다만 성현의 도는 비유하자면 마치 갑제 대택(甲第大宅)과 같으니, 주인은 항상 당실(堂室)에 거처하는데 그 당실은 문경(門逕)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런데 훈고는 바로 문경이 된다. 그러나 일생 동안을 문경 사이에서만 분주하면서 당(堂)에 올라 실(室)에 들어가기를 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끝내 하인(下人)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학문을 하는 데 있어 반드시 훈고를 정밀히 탐구하는 것은 당실을 들어가는 데에 그릇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훈고만 하면 일이 다 끝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특히 한 나라 때 사람들이 당실에 대하여 그리 논하지 않았던 것은 그때의 문경이 그릇되지 않았고 당실도 본디 그릇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晉)·송(宋) 이후로는 학자들이 고원(高遠)한 일만을 힘쓰면서 공자(孔子)를 높이어 '성현의 도'가 이렇게 천근(淺近)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이에 올바른 문경을 싫어하여 이를 버리고 특별히 초묘 고원(超妙高遠)한 곳에서 그것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이에 허공을 딛고 올라가 용마루[堂脊] 위를 왕래하면서 창문의 빛과 다락의 그림자를 가지고 사의(思議)의 사이에서 이를 요량하여 깊은 문호와 방구석을 연구하지만 끝내 이를 직접 보지 못하고 만다. 그리고 혹은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좋아하여 갑제(甲第)에 들어가는 일을 가지고 '갑제가 이렇게 얕고 또 들어가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어 별도로 문경을 열어서 서로 다투어 들어간다. 그리하여 이쪽에서는 실중(室中)에 기둥이 몇 개라는 것을 말하고, 저쪽에서는 당상(堂上)에 용마루가 몇 개라는 것을 변론하여 쉴 새 없이 서로 비교 논란하다가 자신의 설(說)이 이미 서린(西隣)의 을제(乙第)로 들어간 것도 모르게 된다. 그러면 갑제의 주인은 빙그레 웃으며 이르기를, "나의 집은 그렇지 않다."라고 한다. 대체로 성현의 도는 몸소 실천하면서 공론(空論)을 숭상하지 않는 데에 있으니, 진실한 것은 의당 강구하고 헛된 것은 의거하지 말아야지, 만일 그윽하고 어두운 속에서 이를 찾거나 텅 비고 광활한 곳에 이를 방치한다면 시비를 분변하지 못하여 본의(本意)를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은 경학 연구에서 공리공담을 하지 말고 訓詁學의 토대 위에서 經文의 본지를 파악하여야 하며, 그 방법론을 한나라 훈고학의 가치를 인정하되, 문호를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김정희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학문하는 방도는 굳이 한(漢)·송(宋)의 한계를 나눌 필요가 없고, 굳이 정현(鄭玄)·왕숙(王肅)과 정자(程子)·주자(朱子)의 장단점을 비교할 필요가 없으며, 굳이 주희(朱熹)·육구연(陸九淵)과 설선(薛瑄)·왕수인(王守仁)의 문호를 다툴 필요가 없이 다만 심기(心氣)를 침착하게 갖고 널리 배우고 독실히 실천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한마디 말만을 오로지 주장하여 해나가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러한 김정희의 「실사구시설」에 대해 기원(杞園) 민노행(閔魯行)은 후서를 붙여서, 한나라 훈고학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이 글은 병자년 즉 1816년(순조 16) 季冬에 지은 것이다. 따라서 김정희의 「실사구시설」도 그 해 가을이나 겨울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한유(漢儒) 제자(諸子)들은 서책을 품에 끼고서 같고 다른 이론을 서로 탐색하였는데, 유학도(游學徒)가 3만여 명에 이르도록 성황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우뚝이 우리 도의 종주가 되었던 이로 말하자면 전한(前漢) 시대에는 동 강도(董江都)[동중서(董仲舒)]가 있었고, 후한(後漢) 시대에는 정강성(鄭康成 강성은 정현(鄭玄)의 자) 이 있었는데, 그들의 학문은 훈고(訓詁)를 깊이 연구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오로지 근엄(謹嚴)을 독실히 하는 것을 법칙으로 삼아, 실없는 허공을 밟지 않고 고원(高遠)한 데로 치달리지 않아서 삼대(三代)의 전형(典型)이 거의 민멸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유향(劉向)은 동자(董子 동중서를 이름)를 칭도하여 이르기를, "이윤(伊尹)·여상(呂尙)이 이보다 더할 수 없고, 관중(管仲)·안영(晏嬰)은 여기에 못 미친다." 하였고, 범사(范史 범엽(范曄)이 지은 후한서를 이름)에서는 정씨(鄭氏 정현을 이름)를 높여 이르기를, "중니(仲尼)의 문도(門徒)로서도 여기에 더할 수 없다." 하였으니, 덕을 숭상하는 이들은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곧, 민노행은 유학의 근본을 ‘실용시비(實用是非)’에 두고, 한학이나 송학이나 일정한 성과를 수립하였다고 본 것이다. “삼대(三代)의 학문은 모두 실로써 하였는데, 실이란 곧 도의이며 덕행이니, 실이 바름으로써 명도 반드시 바르게 되었던 것이다.”라는 것이 그의 전제이며, “그 후 맹자(孟子)의 세대에 와서만 해도 오히려 명이 밝지 못한 것을 걱정하였기 때문에 맹자가 이미 그 근본을 추구하였으니, '성은 본디 선하다.[性善]' 또는 '마음을 보존하고 성을 기른다.[存心養性]'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하여, 훈고 자체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평가절하하였다. 송학과 한학을 절충하려는 그의 뜻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양한(兩漢 전한과 후한) 시대의 문자(文字)·학술(學術)·명리(名理)는 매우 정독(精篤)하고 친절(親切)하여 허공에 치닫는 후세의 학문 경향과는 같지 않았다. 이는 의당 엮어 모아 고증 보충해서 그윽이 스스로 근본을 도타이하고 실제를 힘쓰는 뜻에 붙이려고 하나, 돌아보건대 곤궁하여 이를 겨를하지 못하고 그지없이 태만한 것을 두려워할 뿐이다. 후일에 스스로 힘써서 의당 다시 원춘(元春)과 함께 의논하기로 하고 우선 이렇게 붙여 기록하여 실사구시설의 후서(後敍)로 삼는 바이다. 병자년 계동(季冬)에 쓰다.
송학과 한학을 절충하려는 민노행의 뜻은 김정희와 공통되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김정희 등이 실사구시의 학을 도입한 것은 청나라의 실사구시학과는 역사적 맥락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청나라의 경우 건륭황제는 ‘右文稽古’를 표방하고 儒臣으로 하여금 十三經과 二十一史를 교감하게 하고 사관을 설치하여 綱目三編 通鑒輯覽을 찬수하게 했으며 이어서 ‘三通’을 편수하여 ‘九通’을 완성하였다. 永樂大典 중에서 옛 逸書를 집록하고 四庫全書를 편찬케 하였다. 또 武英殿에서 聚珍版을 사용하여 대량으로 고적을 조판‧인쇄하였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분량의 옛 서적에 몰두하도록 인도하였다. 이러한 사업은 민족사상과 경세치용의 참여정신을 저해한 면이 있다. 이와 병행하여 명말청초의 학자들이 宋明理學을 비판하고 ‘博學于文’ ‘實事求是’의 학풍을 제창하여 고증의 방법을 구사한 것은 억압하지 않았다. 그들은 漢學을 표방하고, 고적을 정리하고 사물의 이름과 형상에 대한 훈고와 남아있는 책을 찾아 고증하는 이른바 ‘朴學’에 안주한 감이 없지 않다. 그렇기에 심지어 경세치용의 학자로서 고증을 겸하였던 顧炎武에 대해서조차 四庫全書總目提要는 “고염무의 학은 本源이 있어 두루 널리 통하고 한 사건에는 반드시 그 始末이 상세하고, 살펴 검증한 후에 글을 썼으니 고로 넓고 번잡하나 서로 모순됨이 없다.”고만 평가하였던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송명이학의 도학자로 자처한 윤가전(尹嘉銓)을 名敎의 위배라라는 죄목을 씌워 교살(絞殺)하였다. 김정희 등의 한송절충 입장은 淸初 浙東學派의 毛奇齡(1623~1713)에 대한 비판에서도 드러난다. 凌延堪의 校禮堂文集에는 固陵 毛氏라 되어 있다. 金正喜는 그를 ‘固陵’이라 불렀다. 김정희는 모기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평하였다.
고릉이 나와서는 濂․洛․關․閩의 틀을 크게 배반하여 굽은 것을 바로잡는 것이 중정의 도에 지나치고 강압적으로 독단한 것이 가장 많아 古訓에 다 합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만 宋儒들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만을 능사로 삼아서, 이른바 천하에 학술의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폐단은 장차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게 되었다.
모기령의 경학은 일본에서 고증학파가 성립할 때 상당히 참고로 되었고, 학문의 분화가 일어나 用不用의 문제와 분리된 ‘眞僞論’이 대두되는데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에 비하여 조선 지식인들은 義理之學의 기본 전제를 결코 폐기하지 않았으므로, 의리학의 토대 위에 고증적 방법을 원용할 때 모기령의 경학론이 일부 참고가 되는데 그쳤다. 김정희 등 조선후기의 진보적 지식인이 고증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형해화하고 공소화한 주자학 말류를 광정하려는 깊은 뜻을 지닌 것이었다. 물론 청대 학자들이 번쇄한 실증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다. 阮元이 “훈고에 밝으면 의리에도 밝다.”라고하여 漢宋兼學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김정희 등 한송절충론을 주장한 경학자들은 중국의 학자들보다도 더욱 도덕수양과 경세치용을 일체화하는 방향에서 그러한 절충론을 주장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김정희에 앞서 洪大容은 “손으로는 灑掃應待하는 소학의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성명의 蘊蓄에 대해 떠드는”(手不知灑掃之節而口談性命之蘊)의 양반 귀족의 空疏한 學風을 매우 싫어하여, “六藝의 교법은 灑掃應待의 절도와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成海應(1760-1839)은 「送趙羲卿遊燕序」에서. “대체로 한학은 名物度數에 깊으면서 理가 두루 포괄되었고, 송학은 天人性命에 밝으면서 數도 또한 錯綜되어 있다. 그러나 문호가 이미 나뉘어 서로 공격을 그치지 않는다. 한학과 송학을 합하여 그 요점을 함께 잡아 博文約禮의 교훈에 도달할 수 있다면 학문은 여기에서 더욱 뛰어나게 되리라.”라고 하였다. 金正喜는 청나라 고증학을 참조로 하되 經世學에 유념하였다. 그가 魏源의 海國圖誌를 매우 높이 평가하여, 海國圖誌는 “訓詁․空言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實事求昰를 위주로 하므로”(不守訓詁空言, 專以實事求昰爲主) 經世의 ‘必需之書’라고 주장한 것은 그 때문이다. 서양 침략자들이 조선 해역을 도발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그는 “우리나라를 넘보며 형세를 살피는 저들에게도 배워 따를 만한 것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3. 김정희의 고증학적 연찬 김정희가 사실의 판단에서 고증을 중시한 사실은 논변류의 글이 아닌 제발(題跋)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는 「가장사의 치안책 권두에 제하다[題賈長沙治安策卷頭]」이다.
가의(賈誼)가 진술한 「치안책(治安策)」은 본래 그 「보부편(保傅篇)」과 더불어 각기 한 서(書)로 되었는데 반씨(班氏)가 이를 합치면서 자못 산삭(刪削)한 바 있다. 그러므로 대략만 들어 일으켜서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두 가지인데 흉노에 대한 한 가지 일만 싣고서 그쳤으며, 길이 탄식한다는 것이 여섯 가지인데 그 세 가지만 싣고서 그쳤다. 그 축적(蓄積)을 논한 것이 눈물을 흘리는 것의 하나가 되고 주전(鑄錢)이 길이 탄식하는 한 가지가 되는데 이 두 가지 일은 이미 식화지(食貨志)에 실려 있기 때문에 본전(本傳)에는 거듭 나오지 않은 것이다.
이 글을 보면 김정희는 문헌고증의 방법을 탁월하게 활용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김정희는 고증적 논증을 통해서 주자의 경전 주석을 맹목적으로 추수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심지어 경전에서는 理자가 이기철학의 理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된 예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이와 관련한 논문이 「이문변(理文辨)」으로, 이 글은 조선의 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성인의 마음은 흔연히 한 이치라[聖人之心 渾然一理]고 하였는데, 이 뜻이 가장 이회(理會)하기 어려우니 학문이 얕은 사람으로서는 가벼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의당 먼저 이(理) 자의 뜻이 무엇인가를 결정한 다음에야 확실해질 수 있을 것이다. 공맹(孔孟) 이래 이(理) 자를 말해온 것은 오직 문리(文理)·조리(條理)·의리(義理) 등 두어 가지 말뿐이었다. 그런데 주자(朱子)도 이르기를, "이(理)란 정의(情意)로 헤아리거나 조작하는 것이 없고 다만 정결하고 공활한 세계로서 아무런 형적도 없으며 그것은 도리어 조작을 알지 못한다." 하였으니, 만일 이 훈(訓)으로 본다면 성인의 마음을 이(理)로 궁구하여 증명하는 데 있어 어찌 말하기 어렵고 알기도 어렵지 않겠는가. 또 혹은 이(理) 자에 다른 훈이 있어 혹은 천(天)이라 하고 혹은 성(性)이라 하기도 하는데, 천과 성의 뜻은 또 서로 장애가 되어 알기 어려우니, 이 때문에 이 말이 지극히 이회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전주(傳注) 가운데 있는 것을 가지고 망녕되이 끌어다가 함부로 말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삼가촌(三家村)[작은 마을] 안에서 고두강장(高頭講章)[경서(經書) 정문(正文) 상단(上端)의 공백처(空白處)에 기재되어 있는 강해(講解)의 문자]을 강(講)하는 동홍선생(冬烘先生)[흐리터분한 촌학구(村學究) 즉 몽학 선생]이 초동목수(樵童牧豎)들을 위하여 도도평장(都都平丈)[몽학 선생이 아동에게 논어를 가르치면서 '욱욱호문(郁郁乎文)'을 '도도평장'으로 잘못 가르쳤던 데서 온 말. 로, 전하여 문자를 변변히 모르는 사람을 조롱하는 말]을 말하는 데에 있어 모두 전주(傳注)에 나오는 주자의 말 아닌 것이 없지만, 그가 어떻게 심성이기(心性理氣)가 무슨 말인 줄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동홍선생을 일러 주자(朱子)를 팔아먹는다고 하는 것이니, 지금 망녕되이 끌어대는 것 또한 하나의 주자를 팔아먹는 행위이다. 이것은 또 주자의 이른바, "이는 바로 석씨(釋氏)의 논어요 공씨(孔氏)의 논어가 아니다." 는 것과 불행히도 근사한 것이다.
주자(朱子)는 학우 오집(吳楫)이 편지를 보내 “현명한 사대부들이 불학(佛學)을 인해서 견성(見性)한 다음에야, 공자(孔子)에게 과연 부전(不傳)의 묘가 있음을 알게 되니, 논어(論語)의 글은 구이(口耳)로 전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자, “논어가 본디 구이로 전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그 사이에 절로 공부할 곳이 있어 불(佛)을 배우지 않고도 알 수가 있다. 만 꼭 불을 배운 다음에야 알게 된다면 이른바 논어라는 것이 불씨(佛氏)의 논어이지, 공씨(孔氏)의 논어가 아닌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김정희는 주자의 말을 끌어다가, 속류 주자학자가 심성이기(心性理氣)를 운운하는 것은 주자를 팔아먹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김정희는 속류 주자학서의 텍스트도 고증에 의해 비판하였다. 주자학적 교학서로서 가장 중시된 소학과 통감강목에 대해 논한 것이 그 대표적인 글이다. 김정희는 소학이란 본시 유청지(劉淸之)[자 子澄]의 편집이고 주자의 수록(手錄)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 증거로, 첫째 주자의 서신을 들었고, 둘째 구편(舊篇)에 문장의 한 부문(部門)이 있었는데 고쳐 정하여 내편 외편으로 만들고 특별히 주자가 서(序)하여 제사(題辭)했을 따름임을 들었다. 나아가 김정희는 강목같은 것도 조사연(趙師淵)[자 幾道]에게서 나온 것이요 역시 주자의 수록(手錄)이 아닌데 후학(後學)이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그냥 주자로써 모칭(冒稱)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탁중(託重)[명망이 중한 사람에게 의탁하여 자신을 중하게 만듬]의 혐의가 있으며, 소학의 경우는 특히 입교(立敎)의 본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더구나 소학이란 본시 ‘자의(字義)를 고훈(詁訓)하는 서’였으며 유청지가 편집한 소학은 유학가에 속하는 별개의 서적이라고 논하였다.
4. 김정희의 훈고학과 성운학 김정희는 고문상서의 위작설을 변증하는 등 경학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 경우 훈고학적 방법을 상당히 정밀하게 구사하였다. 다만 어떤 경우에는 중국학자의 설을 차용하는 것으로 그친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기자에 대하여 상고하다[其子攷]」를 들 수 있다. 이 글은 명이괘(明夷卦, 坤上離下) 육오효사(六五爻辭)에 나오는 ‘기자지명이(箕子之明夷)’의 기자를 세속에서 모두 은(殷) 나라 태사(太師)인 기자로 보는 데에 대하여 기자는 곧 해자(荄玆 : 초목의 뿌리가 한창 자라나는 것을 뜻함)의 잘못이라고 고증 논박한 것이다. 논박은 훈고에서 通假의 원리를 활용하고 관련 문헌을 인증하여 상당히 정밀한 듯도 하다.
명이(明夷)의 오(五)는 본디 곤(坤)인데, 곤은 해(亥)에서 마치고 건(乾)은 자(子)에서 나오므로, 어두움을 인하여 밝아져서 그 밝음을 지식시킬 수 없기 때문에 기자(其子)의 명이(明夷)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속유(俗儒)들이 주역을 전(傳) 낸 대의(大義)를 알지 못하고서 단전(彖傳)에 기자(箕子)라는 글이 있는 것을 근거로 마침내 기자를 오(五)에 해당시켰다. 그러나 오는 천위(天位)인데 신하인 기자를 임금의 자리에 해당시켰으니, 주역의 관례에 어긋나서 막대한 오역(忤逆)이라 하겠다. 촉재(蜀才)는 고문(古文)에 따라 기자(其子)가 썼다. 기(其)의 옛 음(音)이 해(亥)이기 때문에 '해'로 읽기도 하고 기(箕)로도 쓴다. 유향(劉向)은 말하기를 "지금 주역의 기자(箕子)를 해자(荄茲)로 보아야 한다." 하였다. 회남자(淮南子)에는 "萁를 때서 밥을 짓는다.[爨萁燧火]" 하였는데, 고유(高誘)의 주석에 "萁의 음은 해비(該備)의 해(該)와 같다." 하였다. 해(該)와 해(荄)가 같은 물건이기 때문에 삼통력(三統曆)에 이르기를 "해에서 풀뿌리가 갈무리되고 자에서 초목의 싹이 난다.[該閡於亥 孶萌于子]"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이 글은 김정희의 창견이 아니다. 청나라 초 朴學易(考證易)의 학자 惠棟(1691-1758)이 논한 내용을 발췌하였을 뿐이다. 혜동은 청대 오파吳派 경학의 기초를 확립한 사람이다. 그의 주역술(周易述)은 한나라 虞翻의 易解를 위주로 하고 鄭玄․荀爽․干寶 등의 易說을 참고하여 그 지취를 요약하여 주(注)를 하고 그 설을 부연하여 소(疏)로 하였다. 또 그밖에 구경고의九經古義 중에 주역 상하 2권이 있어, 한나라 때의 고의(古義)를 가지고 경전의 자음과 자의를 훈석하였다. 혜동의 역학은 금문학파와 고문학파를 나누지 아니하고, 한대를 고(古)라 하고 한 이후를 금(今)이라고 하였다. 혜동은 이처럼 금문계의 경방 역과 고문가의 순상 역을 다 고문古文이라 하고, 王弼․韓康伯 이후로는 속자(俗字)를 가지고 고자(古字)를 바꾼 것이 많아서, 고훈(古訓)이 없어지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속자를 고자로 고치는 태도를 견지하여, 역경의 70여자를 개정하였다. 이를테면 주역술 「주역하경」 ‘明夷’에서는 육5효의 ‘箕子’를 ‘기자其子’라고 풀이하고는, 다음처럼 논하였다.
기其는 해亥라고 읽는다. 곤坤은 해亥에서 마친다. 건乾은 자子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기자其子의 명이明夷는, 삼三이 오五로 올라가 바름을 얻었으므로, “올곧으면 이롭다[利貞]. 마융(馬融)은 속된 유가라, 그것을 기자箕子라 읽어서, 「단전」과 연관시켰으니, 잘못이다.……촉재(蜀才)는 고문古文을 따라 기자其子라고 하였으니, 이제 그것을 따른다. 기其의 고음은 해亥이니, 그러므로 해亥라고 읽고, 또한 기箕라고도 쓴다. 유향(劉向)은 “금본 역에 기자其子는 해자亥子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순상은 이것을 근거로 변설하여, 기자其子를 해자亥玆라 읽었다. 고문에는 기자箕子로 되어 있는데, 기其와 해亥, 자子와 자玆는 글자가 달라도 음과 뜻은 같다. …….서한의 박사 시수(施讐)는 기其를 기箕라고 읽었다. 이때에 맹희(孟喜)의 고제高弟인 촉인蜀人 조빈(趙賓)이 맹씨학을 조술하여 그 잘못을 지척하여 말하길 “기자명이(箕子明夷)의 경우, 음양에는 기자箕子라는 기氣가 없다. 기자箕子란 만물이 바야흐로 해자荄玆함이다”라고 하였다. 조빈이 옛뜻에 의거하여 다른 유학자들을 힐난하자, 유학자들이 모두 굴복하였다. 이에 시수와 양구하가 모두 그를 미워하였다.
혜동은 순상의 설을 따라서, 기자箕子는 마땅히 해자亥子로 읽어야 하며, 이 해자亥子는 해자(荄玆)의 가차假借라고 하고, 한서 「유림전」의 조빈(趙賓)의 말을 증거로 인용하였다. 하지만 진례陳澧의 동숙독서기東塾讀書記 권4의 「역易」에 자세한 논증에 따르면, 혜동의 설은 잘못이다. 조빈이 기자箕子의 두 글자는 해자荄玆의 잘못이라고 한 점으로 볼 때, 조빈이 본 역경에는 본래 기자箕子 두 글자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번은 “기자箕子는 주紂의 아저씨로서, 오건五乾의 천위天位가 이제 곤坤으로 화하니, 기자의 상이라고 한 것이다(箕子紂諸父, 五乾天位, 今化爲坤, 箕子之象)”라고 하였다. 우번은 대대로 맹씨역을 전하였는데, 그도 荄玆 설을 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맹씨역도 荄玆로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혜동은 箕子를 荄玆로 고치고는, 후유의 속된 독법을 고문을 가지고 고쳤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조빈의 뒤에 일어난 설로 고본의 원본을 고친 것이요, 순씨역을 가지고 우씨역을 공격한 것이다. 이러한 개변은 家法을 혼란시킬 뿐만 아니라, 주역 경전 자체와도 전혀 통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김정희와 교유한 완원(阮元)조차도, 혜동의 글자 개정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일이 있다.
국조國朝(즉 청조)의 역학가로는 징사徵士 혜동보다 나은 자가 없다. 그러나 혜동이 교정하여 간행한 아우당본雅雨堂本 이정조(李鼎祚) 주역집해와 자신의 저서 주역술은 그 개자(改字)에 사이비가 많다. 대개 경전은 이미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텍스트이니 갑자기 멋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하물며 師說이 같지 않거늘, 다른 책의 인용을 근거로 해서 이미 오래 전해온 텍스트를 개정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자신의 설을 고증에다 기록하여 두는 것이 마땅하다.
김정희가 완원의 설을 참고하지 않고서 혜동의 改字에 선뜻 동의한 것은 의외라고 하겠다. 그런데 청대 고증학의 핵심은 상고 음운의 재구(再構)에 있다. 이와 관련하여 김정희는 전문적인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상고 음운의 재구 성과를 참조하였음에는 틀림없다. 곧, 김정희가 지은 「 공양춘추전은 심호의 물건이 되어 오래도록 돌려주지 않아 지금 마침내 속임을 당했으므로 이를 부쳐서 조롱하고 겸하여 한번 웃자는 것이다. 모씨의 통전법(通轉法)을 사용함[公羊春秋爲心湖物 久不還之 今乃見欺 寄此以嘲 兼博一粲用毛氏通轉法]」이라는 시를 보면, 시를 지을 때 상고음의 음운론에서 비롯된 通轉法에 따라 압운을 시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차서 환서 둘이 다 바보라는 말 있는데 借書還書俱一癡 그대 이미 빌렸으니 선뜻 돌려주겠는가 君旣借之肯還之 선생의 문참은 철묵[책벌레]에다 비유할까 先生文饞譬啜墨 간마[한간(韓榦)의 말 그림] 구석[구지석(仇池石)] 오래도록 서로 갖길 다투었네 幹馬仇石久爭持 성인도 남의 도장(韜藏) 넘보는 수 있다더니 聖人妄意室中藏 풍운이 전이에 있을 줄을 뉘 알리오 豈知風雲在轉移 되려 보니 힘 있는 자 야학에 옮겨 놓아 翻看有力夜壑徙 상여가 사잇길로 돌아갈 줄 뜻 못했네 不意相如間道歸 산호의 붓걸이도 진작 이미 잃었다면 珊瑚筆格已失去 원씨 집의 옥척은 어디로 간지 몰라 袁家玉尺知何處 지붕 머리 밤 무지개 한 길 남짓 줄어드니 屋頭夜光減一丈 귀신 여우 야유하며 서로 와 업신여겨 鬼狐捓揄來相侮 좌중의 정생 자네 두려움 없겠는가 坐中鄭生能無怕 나는 자네를 위해 다문 입을 열련다 我欲爲君發墨守 아름답기 관옥인들 어찌 족히 믿으리오 美如冠玉何足恃 책 도둑은 아짐씨 도둑보다 낫다느니 盜書猶勝盜其嫂
상대방의 문참(文饞)과 도서(盜書)를 넌지시 비판한 시이다. 당(唐)나라 이광예(李匡乂)의 말에 “책을 빌려주는 것이 한 가지 어리석음이요, 책을 아끼는 것이 두 가지 어리석음이요, 책을 구하는 것이 세 가지 어리석음이요, 책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네 가지 어리석음이다.〔借書一癡 惜書一癡 索書一癡 還書一癡〕”라고 하였다. 그러니 빌려간 책을 돌려달라는 것도 어리석은 일인지 모르지만, 김정희는 춘추공양전을 간마(榦馬)나 구석(仇石)처럼 아꼈는데 그것을 도둑맞아 안타깝다고 했다. 시의 마지막에서 김정희는, 사기(史記) 「진평세가(陳平世家)」에서 관영(灌嬰) 등이 진평을 참소해서, 비록 진평이 관옥(冠玉)처럼 아름다운 장부였지만 평소 자신의 형수를 훔쳐서 살았다고 한 말을 끌어다가, 형수 도둑보다는 책 도둑이 낫다고 하여, 희학(戱謔)하였다. 그런데 이 시의 압운(押韻)을 보면 일반적인 평수운(平水韻)의 106운에 따라 통압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짝수 번 째 마지막 글자들의 운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之 평성 支韻 持 평성 支韻 移 평성 支韻 歸 평성 微韻 處 거성 御韻 / 상성 語운 侮 상성 麌韻 守 상성 有韻 嫂 상성 有韻
상고의 음운을 반영한다는 시경에 대하여 그 통전(通轉)의 원리를 제창한 것은 명나라 진제(陳第)의 毛詩古音考 四卷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 뒤 청나라에서는 단옥재(段玉裁)가 상고음 17부설을 제창한 뒤였다. 그런데 김정희가 위의 시에서 이용한 通轉法은 모씨 즉 毛奇齡의 古今通韻 설을 이용한 것이다. 이렇게 김정희는 청초의 학자 모기령의 설에 근거해서 자신의 시에 압운을 하였으나, 상고음 자체나 通轉의 원리 자체를 연구하지는 않았다. 다만 김정희는 顧炎武, 江永, 段玉裁로 이어지는 상고음 연구사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것은 그가 聲韻에 관한 논문으로 「성운변(聲均辨)」을 저술한 사실에서 추측할 수 있다다. 이 글은 육서(六書)의 형성(形聲)에 대해 주로 논하였다. 육서란 한자(漢字)의 구성 및 활용에 관한 여섯 가지 종류로서 즉 상형(象形)·회의(會意)·지사(指事)·형성(形聲)·전주(轉注)·가차(假借)를 말한다. 그중 형성은 두 문자가 결합되어 한 글자가 이루어진 경우, 반(半)은 형의(形義)를 나타내고 반은 음성(音聲)을 나타내는 것을 말하며, 해성(諧聲)이라고도 한다.
6. 김정희의 금석학 김정희는 청나라에 다녀온 뒤 금석 자료의 연구에 몰두했다. 함흥 황초령(黃草嶺)의 신라 진흥왕순수비에 관하여 고증을 하였고, 1817년에는 북한산 진흥왕정계비를 검토하여 '진흥'이라는 칭호가 생시의 시호였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비의 건립연대를 진흥왕 29년 남천주(南川州) 설치 이후로 단정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과 「진흥이비고(眞興二碑考)」를 저술하였다. 중국에서는 宋代에 이르러서 金石學이 크게 일어났다. 그리고 송나라 이후로는 古器物이 더욱 많이 출현되어 秘閣이나 太常에는 많은 古器가 收藏되어 있었다. 劉原父․歐陽永叔 등은 古器를 수집하고 墨本을 거둬들였고, 楊南仲 등은 이것을 연구․해석하여 古文學이 크게 진전되었다. 宋 이래 古器物文을 연구한 硏究書로서는 歐陽修의 集古錄, 呂大防의 考古圖와 宜和博古圖, 그리고 趙明誠의 金石錄, 黃伯思의 東觀餘論, 王求嘯의 堂集古錄, 薛尙功의 種鼎款識, 王原之의 復齊鐘鼎嘯識등을 들 수 있다. 明代에는 오히려 금석학이 송대만 못하였다. 그러다가 청나라 高宗[乾隆] 때부터는 高宗이 西淸古鑑40卷과 寧壽古鑑16卷, 西淸續鑑甲乙編 各 20卷을 출간하였다. 이와 동시에 翁方綱․錢大昕․院元 등이 금석문 연구에서 많은 성과를 내었다. 翁方綱은 兩漢金石記22卷, 錢大昕은 潛硏堂金石跋尾25卷, 院元은 稽古齊鐘鼎款識10卷을 저술하였다. 그 뒤로 仁宗[嘉慶] 때의 吳榮光, 宣宗[道光] 때의 吳武芬, 文宗[咸豊] 때의 瀋祖蔭, 穆宗[同治] 때의 吳大徵 등이 모두 金石學者로서 저서를 남겼다. 吳榮光은 筠淸館金文5卷과 筠淸館金文稿本36冊, 吳武芬은 羣古錄20卷. 瀋祖蔭은 攀古樓彛器款識(不分卷) 등이다. 이 가운데 翁方綱은 우리나라의 금석문에 대해서도 관심을 지녀, 친필본 간찰첩인 해동금석영기(海東金石零記)를 남겼다. 그 연구에서 그는 김정희의 도움을 받았다. 옹방강 친필본 海東金石零記가 최근 일본에서 한국 과천시로 기증되었다. 金正喜는 燕京 사신행렬에 부친을 따라가 옹방강과 완원을 한 달여를 사귀면서, 완원의 영향을 받아 완원의 「南北書派論」을 따와 「書派辨」을 적었다. 김정희는 스스로 우리나라의 금석문을 연구하면서 현지 답사와 탑본 이본의 대조를 결합하여 높은 수준의 연구를 진행하였다. 권돈인(權敦仁)이 함경도 함흥(咸興) 황초령(黃草嶺)에서 진흥왕(眞興王)의 비(碑)를 발굴하자, 김정희는 탁본(拓本)을 이용하여 연월(年月)·지리·인명(人名)·직관(職官) 등을 증정(證定)하여 써서 비의 고(考)를 만들어 해동금석록(海東金石錄)과 문헌비고(文獻備考)의 그릇됨을 시정하였다. 그 논문이 「진흥왕의 두 비석에 대하여 상고하다[眞興二碑攷]」라는 글이다. 그리고 뒤에 다시 「북수비문 뒤에 제하다[題北狩碑文後]」라는 글에서 논문 작성의 경위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였다. 김정희는 해동금석록(海東金石錄)과 문헌비고(文獻備考)의 기록이 지금의 잔석(殘石)과 비교해보면 오히려 55글자나 더 많고 그 부스러져 손상된 것이 또 16글자나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또한 진흥왕 29년이 중국에 있어서는 진(陳) 광대(光大) 2년·북제(北齊) 천통(天統) 4년·후주(後周) 천화(天和) 3년·후량(後梁) 천보(天保) 7년이 된다는 사실과 비의 글자체는 제·양 때 잔비나 조상기(造像記)와 흡사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덧붙여, 우리나라 비판(碑版)은 구양순(歐陽詢)의 흑수비(黑水碑)의 전래 이후 대개 구양순의 체를 모방했으니 그보다 앞서 진흥왕 시대부터 이미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논하였다. 김정희는 문헌비고(文獻備考)와 금석록(金石錄)의 기록을 대조하여, 이 비의 소재지에 대해 고증하였다. 한편, 김정희가 진흥왕비에서 훼부(喙部)에 대해 분석한 방식은 고증적 방법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는 글자의 訛誤, 음운의 通轉을 상정하고 문헌을 들어 입증하는 방식을 단계적으로 활용하였다.
수가(隨駕)의 조목에 훼부(喙部)라 칭한 것이 여섯이고 사훼부(沙喙部)라 칭한 것이 셋이니, 서로 뒤섞어 칭한 까닭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나는 생각하건대, 신라의 가운데 양부(梁部 가운데 양부(梁部)·사량부(沙梁部)가 있으니, 아마 이것이 훼부·사훼부의 변칭(變稱)인 듯하다. 최치원(崔致遠)이 말하기를 "진한(辰韓)은 본디 연인(燕人)이 피난간 곳이기 때문에 '㴍水'의 이름을 취하여 거주하는 읍리(邑里)를 '沙㴍' '漸㴍'라 칭한다." 하였고,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이르기를 "신라 사람의 방언에 '㴍'의 음을 '道'로 읽기 때문에 지금 혹 '沙梁'의 '梁' 또한 '道'로 칭한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㴍'자는 자서(字書)에도 보이지 않고, 연(燕) 지방에 탁수(涿水)가 있었으니 '㴍'은 아마 '涿'의 와전인 듯하다. 또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에 이르기를 "그곳 풍속은 성(城)을 건모라(健牟羅)라 호칭하고, 그 안에 있는 읍(邑)을 탁평(啄評)이라 하고 밖에 있는 읍을 읍륵(邑勒)이라 하여 마치 중국에서 군현(群縣)을 말하듯이 한다. 그 나라에는 여섯 탁평이 있고 52개의 읍록이 있다." 하였으니, 곧 여섯 탁평이 아마 육부일 듯한데 그것은 평(評) 자와 부(部) 자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당서(唐書) 신라전에는 탁평(啄評)을 훼평(喙評)으로 기록하였으니, 대체로 '喙'자와 '啄'자가 서로 비슷하고, '啄'자와 '涿'자가 서로 비슷하고 '涿'자와 '㴍'자가 서로 비슷하며, '㴍'은 또 '梁'으로 변하여 방언이 서로 전습하는 가운데 점차로 와오(訛誤)된 것이니, 훼부(喙部)가 바로 양부(梁部)라는 것이 근거가 있는 듯하다. 만일 훼부와 사훼부가 계품(階品)이었다면 응당 저렇게 뒤섞어 써서 존비(尊卑)가 구별이 없게 하지 않았을 것이니, 각각 거주하는 곳을 기록한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1852년(철종 3)에 관찰사 윤현정(尹鉉定)이 황초령 아래의 진흥리(眞興里)로 이 비를 옮기고 비각을 세웠을 때 김정희는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境)’이라는 액을 걸어 보존하였다고 한다. 그의 금석문 연구가 상고, 중세사를 연찬하려는 민족의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7. 맺는 말 조선후기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淸初 顧炎武로부터 시작되어 乾嘉學派에 이르러 極盛한 考據學(考證學)으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 곧, 洪大容‧朴齊家‧丁若鏞 등과 金正喜는 書籍, 文字, 音韻, 訓詁, 版本, 目錄, 校勘, 輿地, 金石, 天文, 曆算에 대한 학문을 도입하여 實事求是의 학문방법을 발전시켰다. 특히 김정희는 乾嘉考據學의 학자들과 직접 교류하면서 고증학의 본질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주요 저작을 직접 소개하였다. 따라서 김정희의 학문과 사유체계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청조 학술과의 비교 연구가 절실하다. 특히 완당전집에 전하는 글 가운데는 김정희의 저술이 아니거나 창견이 아니라 청대 학자의 설을 전재한 것도 산견된다. 이미 밝혀진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완당전집 제1권 변(辨) 「학술변(學術辨)」 : 청나라 능연감(凌延堪)의 저서 교례당문집(校禮堂文集)제23권 「여호경중서(與胡敬仲書)」에서 앞뒤로 수항(數行)씩만을 덜어내고 전문(全文)을 그대로 기재한 것인데, 다만 중간에 가끔 약간의 글자 변동만을 볼 수 있다. 완당전집 제1권 변(辨) 「서파변(書派辨)」 : 전문(全文)이 청나라 완원(阮元)의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에서 나온 것이다. 완당전집 제1권 변(辨) 「격물변(格物辨)」 : 변(格物辨) : 완원(阮元)의 저서인 연경실집(揅經室集)의 「대학격물설(大學格物說)」을 옮겨온 것으로, 중간과 끝부분에 약간 글자만 다르다.
그리고 본고에서 처음 청대 학자의 저술로 밝힌 것으로 다음 글이 있다.
완당전집 제1권 고(攷) 「기자고[其子攷]」 : 청나라 혜동(惠棟)의 주역술 가운데 ‘明夷’조의 소(疏) 내용 가운데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앞으로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완당전집의 새로운 역주와 서화의 정밀한 검토, 관련 자료의 수집․정리번역, 완당 저술의 정본화가 필요하다.
(1) 완당전집의 새로운 역주 필요 이를테면 김정희가 제주도에 있으면서 초의에게 보낸 편지(완당전집 권4 <초의에게> 제27신)를 보면 기존 연구서에 잘못된 번역이 있었기에 바로잡지 않을 수 없었다.
[종래의 번역] 지난번에 한 장의 편지와 아울러 주부자(朱夫子)[주희(朱熹)]의 글씨 목숨 수 자(字) 및 시헌력(時憲曆)을 동봉하여 보냈는데 생각지 않게 배가 바람에 멀리 표류되었다니 편지랑 물건이 전달되지 못한 것은 비록 가석(可惜)한 일이지만 미처 이를 헤아리기도 전에 너무나 놀라서 상기도 정신이 안정되지 않는구려. 배 안의 사람들은 마침내 관음경(觀音經)한 구절도 읽을 줄 아는 자가 없었더란 말인가. 봄 일이 날로 화창한데 선안이 길하고 상서로우며 무슨 좋은 일이 서로 들려줄 만한 게 있는지요? 하면(河面)도 능히 주름지지 않는지요? 이 몸은 더욱더 퇴방(頹放)만 하니 산중의 법려(法侶)를 향하여 이야기하기가 자못 부끄러워 낯이 붉을 지경이라오. 날마다 허치에게 시달림을 받아 이 병든 눈과 이 병든 팔을 애써 견디어 가며 만들어 놓은 병(屛)과 첩(帖)이 상자에 차고 바구니에 넘치는데 이는 다 그 그림 빚을 나로 하여금 이와 같이 대신 갚게 하니 도리어 한번 웃을 뿐이외다. 나머지는 뒤로 미루고 불구(不具).
[필자의 신역] 최근에 서신 한 통과 주부자(주자, 주희)의 글씨 목숨 수(壽)자와 함께 헌명(憲蓂, 달력)을 동봉하여 보냈습니다만, 뜻밖에도 배가 바람에 밀려 멀리 표류하였다는군요. 서신과 물건이 제대로 이르지 않은 것은 비록 애석해 할 만하지만, 저로서는 이 점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던 참이라서 너무 놀라 아직도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배 안에 탔던 사람들은 종당에 관음경의 한 구절도 욀 줄 몰랐단 말입니까? 봄날이 갈수록 화창해 지는데, 스님께서는 평안하고 복되시리라 믿습니다. 무슨 들려줄 만한 좋은 이야기라도 없으신지요. 항하수 표면이 쭈글쭈글해 지지 않게 할 수 있겠지요? 이쪽의 형상은 퇴방(頹放, 쇠미)해 가는 것이 아주 심하므로, 산중에 계신 법려(法侶)에게 말하자니, 아주 부끄러워 낯이 붉어질 따름입니다. 날마다 허치(許癡)에게 시달림을 받아서, 병든 눈과 병든 팔을 무릅쓰고 억지로 붓을 잡으니, 거둬들인 병풍과 서화첩이 상자에 가득하고 대고리에 넘쳐납니다. 모두 다 자기의 그림 빚이거늘, 나로 하여금 대신 변상하게 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되려 한 바탕 웃음이 터져 나옴을 깨닫게 됩니다. 자세한 말씀은 잠시 미뤄두고, 다 갖추어 적지 않겠습니다.
(2) 관련 자료의 수집․정리와 연구 2006년 2월, 일제강점기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이 지니고 있던 김정희의 친필 편지 20여점이 그 아들 후지쓰카 아키나오(94)와 과천시의 기증 협정에 따라 국내로 돌아왔다. 당시 18~19세기 조선-청나라 문인들의 문화 교류 자취가 담긴 시서화, 고문헌 자료 2700여 점도 함께 돌아왔다고 한다. 김정희가 1852년 함경도 북청 유배를 끝내고 과천에 터를 잡은 뒤 제자인 우선 이상적에게 보낸 편지인 ‘기우선(寄藕船)’, 40대 초반인 1827~1828년 두 동생에게 보낸 간찰첩 ‘기양제첩(寄兩弟帖)’(13통)이 대표적인 유물이며, 청나라 학자 왕희손이 김정희에게 보낸 간찰인 ‘왕희손 서첩’은 조선-청의 문화교류 사실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일간신문에 소개되었다. 이러한 자료들을 정리할 뿐만 아니라,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3) 김정희 문집의 정본화 완당선생전집은 김정희가 별세한 후로 사우(士友)들이 그의 초고(草藁)를 누차 간행하여 완당집(阮堂集)· 담연재시집(覃揅齋詩集)· 완당척독(阮堂尺牘)이란 것이 이미 각기 행해졌는데 차서가 없고 또 빠뜨린 것도 많았다. 그러다가 김정희의 종현손(從玄孫) 익환(翊煥)이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전체를 한데 모으고 다시 이를 간행하려면서 정인보(鄭寅普)에게 서문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당시 간행된 완당선생전집도 불완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김정희의 연구를 위해서는 그 문집의 정본을 편찬하는 일이 시급한 듯하다.
김정희는 청나라 학자들에게 '해동 제일의 통유(通儒)'라 불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학문체계를 수립하지는 못했다. 일생의 행로가 순탄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관련된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났다. 1840년(헌종 6)에 이르러 윤상도는 다시 유배지로부터 의금부에 압송되어 국문을 받고 능지처참되었다. 김정희는 이 때 다시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풀려나왔다. 1851년(철종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정계 복귀가 여의치 않자, 말년에는 과천 봉은사(奉恩寺)에 머물며 선지식과 어울렸다. 젊은 시절 김정희는 실증적인 탐구에 몰두하였고, 그러한 때에 청대의 고증학을 일정하게 참고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는 훈고학 자체의 공소함도 배격하여 인간의 완성을 지향하는 송학적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김정희는 만년에 불교의 사상을 깊이 받아들여 스스로의 사상체계를 재수립하고자 하였고, 예술에서 높은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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