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팽이 / 김정화
영화 <스윙키즈>가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거제 포로수용소에 다인종으로 꾸려진 탭댄스단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탭댄스에 몰두한 포로 댄스단은 강당뿐만 아니라 길 위에서도 연습에 몰입한다. 암살 지령을 받은 인민국 로기수의 함축된 대사 "아이 완트 쟈스트 댄스."가 그들의 춤추고 싶은 욕망을 대변한다. 여주인공 양판래가 쇠징이 박힌 탭슈즈를 마법 슈즈라 칭했다. 탭슈즈를 신고 춤을 추는 동안 가난도 전쟁도 상처도 잊게 만든 까닭이다
양판래 역을 맡은 배우 박혜수가 턴을 하는 장면이 보고 싶었다. 20초 분량의 턴을 위해 하루 네댓 시간씩 몇 달간 연습했다는 인터뷰 내용에 감격했다. 천 번 넘게 회전했다는 그녀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영화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배우들의 발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탭댄스 동호인으로서 무대 뒷줄에서나마 몇 차례 공연을 마친 나로서는 기대감이 고조된다. 전쟁이라는 배역 위에 춤이라는 소재로 갈등을 극복하려는 설정이 이미 판타지적이지만 영화는 즐겨야 하는 법. 러닝 타임 내내 이념 서사보다는 춤의 서사를 따르기로 한 것도 나만의 관람 방식이었다.
두어 달 후 내가 속한 탭댄스 팀의 세 번째 정기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영화에서 춤은 비현실적이지만 내게 있어 춤은 꿈만 같은 현실이다. 공연장에서 전문 춤꾼들의 현란한 몸짓은 모두의 시선을 끌지만 아마추어 탭퍼들의 어설프지만 진지한 동작도 흥미로운 볼거리가 된다.
내 안무 중에 딱 한 바퀴 도는 턴 동작이 그날 무대의 포인트다. 발레나 피겨에서 한쪽 다리로 몸의 중심을 잡고 제자리에서 도는 피루엣(Pirouette)만큼 고난도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가장 어려운 동작이다. 힐(Heel)과 토(Toe)를 징검다리처럼 찍으며 완성하는 느린 회전이라 해도 몸이 굳은 중년 아줌마에게는 무리가 아닐 수 없다.
틈틈이 연습을 하고 있지만 나의 턴은 아직도 매끄럽지 않다. 스텝이 되면 몸이 기울고 자세를 고치면 발이 꼬였다. 속도를 조금만 가해도 한 바퀴를 훌쩍 지나고 힘이 약하면 반밖에 돌지 못했다. 제대로 하려면 고개를 정면으로 향하다가 절도 있게 꺾어 재빨리 되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나는 늘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댔고, 음악마저 초보 댄서의 안무를 비웃듯이 가로지르며 내달렸다.
한 바퀴 턴도 깔끔하게 돌지 못해 마음까지 기우뚱해 있을 때였다. 연습실에서 휙휙 바람 소리를 내며 회전에 몰두하는 한 젊은 청년을 보았다. 그는 최신 록 음악에 맞춰 탭댄스와 락킹댄스를 썩어가며 아무렇지도 않게 몇 바퀴씩 폼 나게 돌고 있었다. 마치 무게 중심을 잘 잡은 인간 팽이를 보는 것 같았다.
어릴 때 시골 아이들은 겨울철 내내 팽이를 돌렸다. 호기심 많은 계집아이들도 가끔씩 끼어들곤 했다. 눈짐작으로 팽이 지름과 높이를 가늠하여 허드레 나무를 깎고 다듬어 밑동에 심을 박아 갈면 근사한 팽이가 만들어졌다. 매운 팽이채 세례를 받은 나무 팽이는 굳은 땅 위에서 핑그르르 중심을 잡고 일어서더니 싱싱 잘도 돌아갔다. 팽이가 회전력을 얻어 안정감 있게 돌아가면 가만히 그 자리에서 멈춘 듯 고요해진다. 언젠가 유명 판화가의 글에서 그 순간을 '팽이가 존다.'고 표현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무릎을 쳤다. 원심력과 구심력의 균형이 팽이의 직립을 이루어냈다. 내 턴도 고요한 직립을 지키려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야 할는지.
인간 팽이가 나무 팽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채찍을 맞지 않고도 돌 수 있다는 것이다. 팽이는 맞아야 서지만 사람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다. 혹한의 빙판뿐만 아니라 열사의 사막 위에서도 맹렬히 돌 수 있다. 중심이 서야 흔들림이 없다. 자신의 힘으로 돌지 못한다면 어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으랴. 인간은 누구나 넘어지지 않으려 각자 도는 팽이들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매사에 허둥대며 주변 바람에 쉬이 흔들리는 성정을 지닌 내 몸의 균형인들 오죽할까.
관객들의 탄성이 쏟아진다. 스윙키즈단이 무대에 올랐다. 마침내 양판래가 턴을 한다. 전쟁도 이념도 잊은 채 빙그르르 인간 팽이가 돈다. 덩달아 나도 발을 모으고 중심을 잡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