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17
11월22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34주간 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whN407yJKfQ (김덕재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나 확실한 것 하나! 그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간 은밀히 접근하던 신천지 이단이 최근 본격적인 가두 선교에 나섰습니다. 어제만 해도 저는 열차역에서 신천지 홍보 전단지를 두 장이나 받았습니다. 본당 안까지 들어와서, 대놓고 자신들을 신천지라고 소개하며 신자들을 현혹합니다.
교주 이만희의 가르침은 너무나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입니다. “하느님께서 초림 예수님에게 장가들어 하나가 되셨던 것처럼 예수님도 마지막 때에 한 목자를 아내로 삼아 장가드신다.”
그는 요한복음 10장 30절의 말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구절을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혼인하신 거로 곡해한 것입니다.
교리나 성경 해석에 있어서 심각한 오류와 거짓 가르침으로, 명백한 이단이 분명한 신천지가 다양한 전략을 짜고, 그럴싸한 미끼를 던지며, 젊은이들 속으로 파고 듭니다. 이단 속으로 점점 깊이 빠져들어 가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의 미래가 정말이지 걱정됩니다.
정체를 의심케 하는 자칭 한 목회자의 망언 앞에 할 말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집회에 안 나오는 분들은 생명책에서 이름 지우겠다.” 이게 정녕 목회자로서 신도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인가 싶습니다.
참으로 위험한 말인 동시에 어불성설의 말입니다. 메시아께서 하실 말씀을 직접 하고 계시니, 이로써 스스로를 과대망상증 환자요, 이단임을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예수님 경고 말씀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어 소름이 끼칠 지경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 복음 21장 8절)
예수님 시대 당시 여러 사람이 메시아임을 자처하며 등장했습니다. 로마 총독 시대(AD 44~45년) 테우다스가 나타나서 자기 스스로를 지칭하며 ‘위대한 인물이라고 소개했습니다.(사도행전 5장 36절)
그후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타나 백성들을 선동하였습니다.(사도행전 5장 37절) 뿐만 아니라 여러 거짓 목자들은 날짜를 꼭 찍어 종말이 다가왔다고 선언하며,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라며 사람들을 기만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당신의 재림과 이 세상 종말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삼가야 마땅합니다. 종말을 꼭 찍어 예언하며, 자신이 오기로 되어 있는 재림 예수라고 외치는 자들을 모두 사기꾼들이니, 그들에게 속는 일도, 그들을 따라가는 일도 없도록 당부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종말에 대해 무척이나 궁금해합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 복음 21장 7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거짓 목자나 예언자, 자칭 메시아들을 조심하라고 당부하십니다.
혹시라도 어떤 목자가 어느 특정한 날짜를 꼭 찍어 종말의 때를 이야기한다면, 즉시 그 자리에서 뛰쳐나오셔야 합니다. 예수님 가르침의 요지는 명백합니다.
“끝날이 곧 오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그렇게 빨리 오는 것도 아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나 확실한 것 하나! 그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종말은 믿되 거짓 메시아들의 예상 날짜는 믿지 않아야겠습니다. 그저 오늘이 그날이라고 여기며 늘 준비하고 깨어있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
<(2)불멸의 성전 건립을 위해서는 속화되고 타락한 성전의 파괴는 필수입니다!>
웅장하고 화려하기로 유명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관련된 예수님 예언의 말씀은 참으로 섬뜩합니다. 그 휘황찬란하고 으리으리한 대성전이 어느 날 돌 하나 남아있지 않고 허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듣고 있던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오래 가지 않아 이방인들의 침략 앞에 무참히 파괴되고 훼손되었습니다. 자신들 최후의 보루요 목숨 같던 성전,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던 성전이 파괴되고 유린됨으로 인해 유다인들이 받았던 충격과 트라우마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파괴된 그 자리에 새로운 성전, 아버지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아름다운 성전을 재건축하시려는 큰 의도를 지니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지고 보니 비참하고 굴욕적이지만 종종 파괴도 필요합니다. 그 위에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 불멸의 성전 건립을 위해서는 속화되고 타락한 성전의 파괴는 필수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를 통해, 당신 존재 자체를 통해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참 성전을 건설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이 세상 육화강생, 그리고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통해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전을 건설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가장 아름다운 성전이십니다. 그분께서 제정하신 성찬례가 거행되는 모든 곳을 가장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뿐만아니라 매일 그분의 몸과 피를 지극정성으로 영하는 우리 개별 그리스도인 각자가 또한 주님 마음에 꼭 드는 성전입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극진히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그 옛날 속화되고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셨듯이, 가끔씩 배은망덕하고 불충실한 우리를 향해서도 파괴의 망치를 손에 드십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주님께서는 철저히 파괴된 그 자리에 당신 마음에 드는 새 성전을 반드시 재건하십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4XQ5c9tq0Z8
++++++++++++++++++
<멸망의 표징과 부활의 표징의 차이>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과 그 멸망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 여러 표징이 나타날 것이라 하십니다.
첫 번째는 거짓 그리스도에게 속는 이들이 많아질 것이고, 두 번째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날 것이며, 세 번째는 큰 지진과 기근, 그리고 전염병이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표징의 방식은 바로 우리 자신에서 시작하여 세상과 자연, 그리고 하늘로 시선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전방위적인 표징이 있을 것이란 뜻입니다.
한 사람의 힘든 죽음을 생각해봅시다. 불교 신자였던 이지은 씨는 말기 암으로 투병하는 남편을 보살피며 병원에서 함께 입원하였던 다른 암 환자들의 임종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무언가를 목격하게 되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 남편과 함께 입원하고 있던 그 환자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내의 이름은 정자였다고 합니다. 그분은 눈의 실핏줄이 더 터져서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고 있었고 몸은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있어서 천만 하나 덮어놓은 상태였으며 온몸의 땀구멍에서 소변이 빠져나와 주위에서 소변 냄새가 진동하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분의 아내와 밖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말도 못 하던 그 사람이 큰 소리로 이렇게 불렀다는 것입니다. “정자야, 정자야! 무서워, 정자야!”
그리고 그 아내의 목을 팔로 두르더니 “나 무서워서 혼자 못 가, 함께 가자!”라고 하며 놓아주지 않더랍니다. 숨을 쉬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이지은 씨는 갖은 방법을 써서 아내를 그 남편으로부터 떼어놓았습니다.
계속 그런 두려움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자기 남편의 귀를 막아주어야 했습니다. 보통 심박이 30 이하로 떨어지면 사망하는데 그분은 억지로 숨을 몰아쉬며 사흘이나 버텼다고 합니다. 이것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이지은 씨의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은 그 사람처럼만 죽지 않으려는 마음만 있었습니다. 남편은 도박과 외도 등으로 빚을 잔뜩 지고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날 그 환자처럼 남편도 아내를 발로 차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위에 무서운 사람들이 둘러섰다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남편의 눈은 처음 보는 공포에 질린 눈이었습니다.
이지은 씨는 불교 신자였음에도 ‘이 사람 지옥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병원이기에 무조건 사람들을 불러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언니가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돌아가시기 2주 전에 그분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반을 굶어 뼈만 남았고 온몸이 돌처럼 굳어 있었는데도 맥박 30이 되었을 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돌아가셨습니다. [출처: ‘말기암 임종 환자들의 죽음을 보며 겪은 충격적인 사실’, 유튜브 채널, ‘아빠 품 안에’]
이지은 씨의 남편은 죽음 앞에서 이전에 죽은 분의 죽음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할 뻔하였습니다. 죽음이 다 그런 모습처럼 여겼고 자신도 그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거짓 그리스도에게 속는 일입니다. 꼭 그런 죽음을 따를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멸망하는 이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 곧 잘못된 믿음, 부정, 반란,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그리고 하늘의 징조까지 따릅니다. 이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나 결국 멸망하게 될 이 세상에 관한 예언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라 이 과정을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죽음도 있습니다. 절대 흔들리지 않고 전쟁과 반란도 없으며 큰 지진이나 전염병도, 그리고 하늘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징조도 없습니다. 말기 암 환자를 18년 동안 보아오며 김범석 교수가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 이야기입니다.
일흔 살의 암 환자였습니다. 이 환자는 병원에 왔을 당시 이미 폐암 4기로 더는 손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환자의 가족은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사자인 할머니도 삶에 대한 의지가 강했습니다. 비록 완치 목적이 아닌 생명 연장 수단의 항암치료일지라도 씩씩하게 잘 따라와 주셨습니다. 진료 때마다 힘들지 않으냐고 물으면 할머니는 옅게 미소 지으며 괜찮다고만 하셨습니다.
“나는 괜찮아요. 우리 애들이 걱정이지. 어린 손주들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만 살면 더 바랄 게 없겠어요.”
할머니는 그렇게 항암치료 받으면서 의연하게 일상을 이어 나갔습니다. 가끔 안부를 물을 때면 딸과 같은 동네로 이사 가서 손주들 볼 일이 더 많아졌다면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평범해 보이는 날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머리가 좀 아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좋은 신호가 아니었습니다. 그 말에 정밀검사를 해보니 할머니의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한 상태였습니다. 종양은 이미 너무 커졌고 이제는 더 이상 치료가 어렵다는 말을 전해야 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야 할 때 환자들과 가족의 반응은 대부분 비슷하다고 합니다. “분명 좋아진다 했잖아요.” “왜 나만 약효가 없는 거예요?” “치료 열심히 받았는데 왜 나빠져요?” 가장 처음 반응은 부정, 그리고 분노, 마지막은 원망이라고 합니다. 의사의 말을 믿지 못하고 마음 안에서 전쟁과 반란이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과 병이 창궐하고 헛것까지 보다가 결국엔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란 뜻일 것입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달랐습니다.
“나는 괜찮아요. 선생님이 잘 치료해주려고 애썼는데 내가 미안해요. 오늘도 치료 잘 해줘서 고마워요.”
할머니는 죽음 선고를 한 의사를 오히려 위로해주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이 할머니는 오늘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그 어떤 표징도 없으셨습니다. 착잡한 의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머니는 그날도 씩씩하게 웃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마지막은 일찍 찾아왔습니다. 할머니도, 가족들도, 헤어짐이 가까워졌다는 걸 받아들이고 호스피스 상담받으러 오게 되었습니다. 그날 할머니의 딸은 김 교수에게 생각지도 못한 편지를 건넸습니다.
“선생님, 이제 엄마와의 작별 시간이 다가오나 봅니다. 아프기 전과 똑같이 우리를 돌보던 대단한 엄마가 자꾸 약해져 갑니다. 이제는 엄마를 놓아드려야 하는 때가 온 것이 아닌가 해요.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 갈까요, 하고 선생님께 물었을 때 선생님이 엄마랑 꼭 붙어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가 저랑 가까운 곳으로 이사 와서 아이들 등원도 함께 시키고, 사우나도 가고, 산에도 갔던 지난 1년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게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야속하게도 이 편지를 받은 후 얼마 못 가 할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평소 모습처럼 할머니의 마지막도 의연하고 씩씩했고, 가족들의 보살핌 속에서 편하게 눈을 감으셨습니다.
김 교수는 말합니다. “나는 그동안 할머니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짐작하건대 가방끈이 길거나 넘치게 부유한 삶도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가 그 누구보다 위대한 일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권력자도, 엄청난 부자도 예정된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걸 자주 봤다.
느닷없이 찾아온 운명을 받아들이고 본인 몫의 남은 삶을 평소처럼 살아내는 일. 이 평범하지만 어렵고 특별한 일을 해 낸 할머니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내게 커다란 울림으로 남아 있다.” [출처: 김범석 교수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중 ‘18년 의사 생활하는 동안 기억에 남는 암 환자’, 유튜브 채널, ‘책썰미’]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위 할머니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떤 멸망의 표징도 겪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을 그냥 평소처럼 살고 잠처럼 받아들이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는 삶의 모습입니다. 김범석 교수는 이 평범하지만 비범한 죽음이 의사 생활하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합니다.
저희 아버지도 이 할머니처럼 의연하게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죽음 선고를 받은 지 며칠 안 되어 제가 예수님을 믿느냐고 했을 때 “그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표징을 말씀하신 것은 말 그대로 이 세상에서 멸망하는 사람과 이 세상의 미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표징을 겪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잠처럼 평화롭게 만들 믿음을 청합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묘지를 산소라고도 불렀습니다. 산소는 말 그대로 산에 모신 무덤입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서 죽은 분들을 산에 묻기도 했지만,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죽은 이들을 묻어왔습니다. 어릴 때입니다. 선산엘 간 적이 있습니다. 산 위 양지바른 곳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고 험하기 때문에 연로하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밑에서만 인사를 드린 적도 있습니다. 선산이 따로 없는 사람들이나,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공동묘지에 묻히기도 합니다. 묘지는 목적에 따라서 이름이 정해지기도 합니다.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위해서 조성된 묘지는 국립묘지입니다. 민주화를 위해서 희생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조성된 묘지도 있습니다. ‘5.18 민주묘지가 있습니다. 성당에서 묘지를 조성하기도 합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모시는 성당묘지가 있습니다. 저도 언젠가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용인에 있는 성직자 묘지에 묻힐 것입니다. 요즘은 매장보다는 화장을 하는 경우가 많고, 주로 추모관에 모시기도 합니다.
위령성월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와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죽음의 이유도 다양합니다. 죽은 나이도 다릅니다. 그래서 세상에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세상을 떠나는 때는 순서가 없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새로운 거처가 마련된다는 희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고통과 수난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굴욕과 모욕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억울한 죽음, 때 이른 죽음, 박해로 인한 순교자들을 위로하시고 천상에서 영원한 안식을 마련하신다는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그런 안타까운 죽음마저도 주님께 기꺼이 봉헌합니다.
인류의 역사에도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있었습니다. 강력한 힘과 조직을 가졌던 나라, 어둠을 밝히는 철학과 사상을 가졌던 나라, 고도의 문화와 문명을 자랑했던 나라가 있었습니다. 어떤 나라는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나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흥망성쇠로 인한 단절이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어달리기입니다. 눈에 보이는 나라는 사라졌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와 사상은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보편적인 깨달음은 하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걸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바라는 걸 남에게 해 주라는 겁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건, 남에게도 권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 삶을 살고 있다면, 그런 삶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우리도 역사의 이어달리기에 함께하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이 임금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고 그 왕권이 다른 민족에게 넘어가지도 않을 것이다.
행복은 희망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행운은 용기를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선배신부님께서 ‘인생은 흑자’라는 강론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순간을 살아도 우리 인생은 흑자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합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은 모두 날려버리고, 희망의 날개를 달아서 주님께로 가야 하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1,5-11: 예루살렘의 멸망 예고
오늘 복음에서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감탄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그 성전이 돌 위에 돌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로마가 성전을 무너뜨리고 예루살렘을 불태울 것이며 이스라엘은 주님을 살해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뒤 이 모든 일을 겪어야 했다.
성전이 언제 무너질 것이며 당신께서 오시기 전에 어떤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냐는 질문에, 주님께서는 그 표징들에 대해 일러 주시며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려주시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많은 사람이 오류에 빠져 참된 믿음을 버리고 떠나갈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주님의 날이 올 것이다. 주님께서 첫 번째 오심은 속죄를 위해서였고 두 번째 오심은 더 많은 이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시며 그들에게 경계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8절) 하신다.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비밀리에 오시지 않고 무시무시하고 화려하게 오실 것이다.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기 위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내려오실 것이다.
하느님은 참으로 진실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다. 또 우리는 모든 말씀을 읽고 들었다. 우리는 언제 종말이 오는지 우리 모두 들었다. 그때에는 전쟁과 지진과 환난과 기근이 일어날 것이다.(마르 13,7-8) 그러므로 우리는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다. 이런 일에 관한 말씀을 읽을 때는 그 말을 믿다가 막상 그 일이 일어나면 불평을 늘어놓곤 한다.
마지막 날에 민족과 민족이 맞서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다. 너희가 전쟁과 지진과 기근을 보게 되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종말이 가까웠을 때, 일어날 표징들을 알려주신다.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신다.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마태 24,19)
‘예루살렘’ 하면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셨고 당신 백성들과 만나신 얼마나 유서 깊은 곳인가? 그런데 그토록 파멸했다는 사실은 당신의 어느 한 마디도 헛되지 않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며, 또한 예루살렘처럼 회개하지 아니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하느님을 따른다고 할 때, 이러한 파멸을 우리 자신도 당하게 될 것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벌주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뜻을 역행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그 길을 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언제나 주님의 뜻에 귀 기울이고 그분 안에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 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재난에 관한 예고입니다. 이 내용이 우리의 신앙 여정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의 성전’(1코린 3,16-17; 2코린 6,16 참조)이라는 관점에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는 때때로 귀가 얇아져 하느님의 뜻에 머물기보다 다른 가치들을 더 중요시할 때가 있습니다. 성공, 권력, 명예, 돈, 자녀 교육은 일상생활에서 결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리하여 이것들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고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자신을 스스로 파괴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닥쳐올 재난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경기 침체, 전 세계를 둘러싼 절망적인 상황과 정세 때문에 세상이 당장 멸망할 것 같은 두려움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댈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하느님 나라가 오고, 그분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실현되기 위한 과정입니다. 우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을 것(루카 21,19 참조)이기 때문입니다.
=====================
[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아름다운 성전을 보고 감탄하는 이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십니다. 성전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표징이고, 우리 구원의 상징이지만, 외관만을 갖추고 내면이 비어 있다면, 그 성전은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그 운명은 결국 파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며, 전쟁과 기근과 자연재해가 이어지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붕괴되고 전통과 관습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종말은 늘 우리에게 먼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다가옵니다.
역사적 혼란의 시기에 늘 새로운 세상의 방향을 알려 주는 예언자들과 시대의 징표들이 있었지만,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예수님의 오심으로 새롭게 알게 된 종말은 새로운 출발이며, 동시에 멸망이 아닌 완성입니다. 그래서 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희망이 되며, 그리스도인을 움츠러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직접 살아가게 만듭니다.
세상 안에 있는 많은 존재들이 자신의 진짜 모습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껍질로만 살아가는 경우를 봅니다. 우리가 고대하고 기다리는 하느님의 나라는 모두가 참나를 찾고, 진정한 자아를 충만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완성인 종말도, 그리스도인의 목표인 하느님의 나라도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첫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종말에 대한 성경 말씀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거짓 예언자들에 대한 언급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는 내용을 전하는 이들인데, 그들이 종말 때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거짓 예언자들의 그릇된 예언을 경고합니다.
참된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는 선포하는 말씀이 실현되는지 여부에 따라 구분됩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종말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종말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오는지에만 관심을 둡니다. 어쩌면 두려움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인지도 모릅니다. 말 그대로 이 세상의 끝을 뜻하는 종말을 성경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소개합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지진과 전염병이 생겨나며, 하늘에는 표징들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표현으로 종말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고 구원의 완성을 나타내기도 하기에, 두려움의 시간만이 아니라 희망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올 종말을 준비하기보다는 ‘지금’ 종말처럼 살아야겠습니다. 신앙인들은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미래에 있을 종말에 대비하여 삶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마치 종말의 때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에게 ‘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종말에 관한 말씀은 우리가 현재의 삶에 좀 더 충실하도록 초대합니다.
=====================
[수원교구 최황진 라파엘 신부님]
믿음이 있는 사람은 무조건 참아야 한다구요? 왜요? 그러다 병 생깁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동영상)
https://youtu.be/esQgzwaVmp8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날이 스스로>
루카 21,5-11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 재난의 시작)
그때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나날이 스스로>
허물어지기 전에
나날이 스스로
허무는 것입니다
끝없는 탐욕과
치솟는 오만과
불타는 적의가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다가
마침내
송두리째 집어삼켜
나마저 없애기 전에
나날이 비우고
나날이 낮추며
나날이 보듬어
새로 나게 하시는 분과
새로 나는 내가
오롯이 하나 되어
나날이
새날 새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속임수에 휘둘리지 않는 삶>
예루살렘 성전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세워지고, 세 번 무너졌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가장 화려한 왕권을 누린 솔로몬 왕 때 건축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게 되었으며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전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후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제압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에 의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이후 제일 먼저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이 제2의 성전 또한 기원전 170년 경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점령되고 맙니다.
시리아왕은 유다인을 말살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유다교를 핍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 한가운데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고기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후 시리아가 멸망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로마의 헤로데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화려하게 증축합니다.
이 성전이 다시 폐허로 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언을 하셨는데 오늘 복음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5년경 전후이고, 기원후 70년경 성전은 또다시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전체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로 정착하기까지 유다인들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써 의미 깊은 땅이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함께하셨는데도 불구하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충만하였지만 하느님을 외면하고 은총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언제 그런 재앙을 맞게 될지 모릅니다. 깨어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예루살렘이 스스로 돌아보고 회개의 길을 걸었더라면 멸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춥고 남도 추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정을 지키고 있으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혼란이 올 때 조심, 또 조심할 것은 혼란을 틈타서 극성을 피우는 속임수입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저런 소문으로 휘둘리지 않습니다.
소문의 사실과 진실을 살핍니다. 이렇게, 저렇게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지으며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오느냐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내 삶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종말은 오늘 여기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왕국도 역시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오늘을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의 시대를 이미 살고 있고, 아직 그 완성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면서 오늘을 최선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기회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군대에 간 지 얼마 안 지났을 때였습니다. 선임이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임은 친절하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아직 처음이라 몰라서 실수한 거잖아. 괜찮아.” 그리고 몇 달 뒤에 똑같은 실수를 또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절했던 선임은 인상을 쓰면서 말했습니다. “그때는 몰라서 그랬다고 쳐도, 지금 얼마나 지났는데 이렇게 실수하면 안 되지.” 정신을 못 차려서 그렇다면서 언제까지 멍청하게 생활할 것이냐는 말도 들었습니다. 알면서도 실수했다면서 선임으로부터 심하게 혼났습니다.
아마 저와 같은 체험을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알면서도 계속 실수합니다. 건강을 위해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다이어트에 실패하지 않습니까? 다이어트 방법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또 좋은 성적을 받는 방법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원하는 성적을 얻지 못합니다.
알면서도 못하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에서 오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기계는 알면 실수 없이 곧바로 행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에, 알면서 못하기도 하고 또 모르면서도 할 수 있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단죄할 때, 이 모습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인간이기에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에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로 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해주십니다.
첫째,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카 21,8) 악에 속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 21,8) 죄를 따라가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지요.
셋째, “무서워하지 마라.”(루카 21,9) 지금의 상황, 특히 어렵고 힘든 상황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9) 주님이라는 희망에 집중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끝이 아님을 깨닫고 기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구원의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주님 말씀을 기억하면서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새로운 나로 거듭나기 위해, 더 나은 삶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지금까지의 나, 지금까지의 삶과 이별하기 가장 좋은 날입니다.
=====================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지푸라기에 속아 지푸라기를 잡지 않는>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지요. 잡아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다급하면 다 이렇게 지푸라기에 속아 붙잡게 되는 것인데 그 다급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위급한 상황이 코앞에 닥쳤는데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진다든지 죽음이 코앞에 와있는데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든지 할 때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물에 빠졌을 때 지푸라기를 잡지 않으려면 수영을 미리 배워둔다든지 붙잡을 것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평소 위급한 상황에 대한 대비가 늘 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대비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의 준비일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위급한 상황이 갑작스럽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 닥쳐도 당황하여 허둥지둥 대지 않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대처할 것이며, 그래서 지푸라기를 붙잡지 않고 나를 구해줄 것을 붙잡을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에 허둥지둥하다가 지푸라기에 속아 넘어갈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삶에 참으로 지푸라기들이 많고,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도 하느님 대신 지푸라기를 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점쟁이가 지푸라기이고, 어떤 때는 사이비 종교인이 지푸라기이며, 병들었을 때는 의사조차도 지푸라기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아니라면 사실 그 무엇도 지푸라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신앙인이라면 지푸라기를 하느님인 양 잡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
<(2)파멸의 때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대 파멸의 때를 말씀하시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하십니다. 파멸의 때 우리는 첫째로 각오를 해야 합니다. 파멸이 아닌 다른 것을 기대하지 말고 파멸을 각오해야 합니다. 파멸은 오지 말아야 한다고 파멸을 연장시키려 들지 말고 오히려 파멸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파멸이 와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요즘 세계 경제가 대파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경제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들 누구나 ‘Panic 상황이다’, ‘대공황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Panic, 공황 상태는 파멸을 각오하지 않기에 오는 것입니다. 각오하지 않고 오지 말아야 한다고 버티다 파멸을 맞이할 때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멸은 꼭 옵니다. 각오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그 화려한 성전이 다 무너질 것이라고 파멸을 예언하십니다. 그 뜻은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잘 나가던 경제도 언젠가는 무너지고 건강하던 우리 몸도 언젠가는 무너지니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그때가 아니 올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하거나 와서는 아니 된다고 억지 기대를 해서는 안 되고 각오해야 합니다.
파멸의 때 우리는 둘째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파멸을 각오할 뿐 아니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파멸을 두려워하지 말고 올 것이 온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파멸은 와야 할 것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파멸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파멸이 와야 새로운 건설이 이루어진다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세계 경제의 파멸이 이렇게 오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신 자유주의적이고 금융 중심적인 세계 경제 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저는 주장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만 이 세계 경제의 파멸은 새로운 경제 체제를 위해 온 것이라고 오히려 긍정하고 싶습니다.
내가 이룩한 모든 것도 파멸되고 나의 몸도 언젠가 파멸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파멸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파멸의 때 우리는 셋째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 사람을 따라가면 살 수 있을까, 저 사람을 따라가면 살 수 있을까 우왕좌왕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우리도 분주히 따라다녔는데 이때 우리는 모든 것을 중지하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벌어진 사태와 그일 해결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 대한 어지러운 바라봄을 중지하고, 생각을 중지하고, 판단을 중지하고, 행동을 중지하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께서 일러주시는 새길 따라야 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정주의 영성>
-하루하루, 한결같이-
"태양이 솟아 오를 무렵, 성녀 체칠리아는 '그리스도의 전사여, 어두움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하고 부르짖었도다."(아침성무일도 즈카르야의 노래 후렴)
“보라, 이제 순결한 예물, 정결한 희생 제물인 용감한 동정녀 체칠리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양을 따른다.”(입당송)
더불어 생각나는, 오늘 하루 종일 부르고 싶은 모든 성인의 날, 저녁성무일도 때 마리아의 노래 후렴입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오늘은 3세기 중엽 순교한 체칠리아 동정 성녀 기념일입니다. ‘천상의 백합’이란 이름 뜻대로, 배교의 강요를 물리치고 동정으로 순교한 성녀의 삶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성녀 체칠리아는 음악과 음악인들의 수호성인입니다.
성녀가 원치 않았던 결혼식 때 결혼 음악과 환호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고, 내심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행적에 근거합니다. 성녀의 문장은 오르간입니다.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참혹한 순교를 맞이했던, 참으로 하느님 사랑에 깊이 뿌리 내린 정주의 성녀였습니다.
지난 11월 20일 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삼종기도 후 교황님의 강론 끝부분 중 공감이 갔던, “우리는 평화의 기근 시대를 살고 있다” 말마디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베네딕도 수도회의 평화의 정주, 정주의 영성, ‘하루하루, 한결같이’의 삶이 참으로 절실한 시절입니다. 제 좌우명일뿐 아니라 성인들의 특징이 하루하루, 한결같이, 정주의 삶이었습니다. 제 사랑하는 좌우명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중 “산과 강”에 연관된 두 연을 소개합니다.
1.“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언제나 그 자리에 불암산佛巖山이 되어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며 살았습니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행복한 산이 되어 살았습니다.
이제 오랜 연륜과 더불어
내적으로는 장대한 ‘하느님의 살아 있는 산맥山脈’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2.“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제 사랑하는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영성이 바로 한결같이, 하루하루,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가는 정주의 영성, 산과 강의 영성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영원한 현재를 사는 영성입니다. 역시 다음 좌우명시 '산과 강'이라는 짧은 시가 이를 요약합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정주의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맑게 흐르는 강”
바로 산과 강의 정주의 영성이 오늘 말씀에 대한 답을 줍니다. 정주의 영성은 그대로 평화의 영성입니다. 하느님 중심에 깊이 믿음의 뿌리 내리기에 흔들림 없는 요지부동의 평화입니다. 심판을 염두에 둘수록 더욱 정주 영성에 박차를 가하며 하루하루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삽니다. 제1독서 묵시록의 최후심판의 장면이 실감나게 전달됩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의인의 구원이 이에 해당됩니다.
“그 날카로운 낫을 대어 땅의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들을 거두어들이십시오. 포도가 다 익었습니다.” 악인의 심판이 이에 해당됩니다.
이런 마지막 심판을 염두에 둘수록 하루하루의 삶에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는 진인사대천명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경우 역시 정주 영성의 결핍을 보여줍니다. 갈팡질팡, 우왕좌왕, 일희일비, 경거망동, 부화뇌동, 모두가 정주의 뿌리가 없어 혼란으로 방황하고 표류하는 모습들입니다. 성전의 호화로운 외관에 마음을 뺏기는 것도 정주 영성의 빈약함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말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정주의 영성에, 정주의 삶에 한결같이 충실할 수 있음은 늘 함께하시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저절로 정주의 삶에서 솟아나는 믿음의 고백,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의 미사은총이 날마다 우리 모두 한결같이, 하루하루 정주의 삶에 충실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며칠 전 읽은 참 좋은 말마디를 나눕니다. 주님 안에서 정주의 삶에 항구할 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정수유심(靜水流深), 심수무성(深水無聲)”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오늘은 '음악인의 수호성인'이시고 '천상의 백합'이라는 뜻을 지닌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체칠리아(세실리아) 자매님들의 영명축일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복음(루카 21,5-11)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예고와 재난의 시작에 관한 말씀'입니다. 멸망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말씀이지만, 복음이 전하는 근본 메시지는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생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나의 죽음을 묵상하는 위령성월도 어느덧 끝나가고 있고, 교회의 달력인 전례력으로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말씀도 이 세상 끝인 죽음 저 너머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요한묵시록의 말씀(독서)과 세상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말씀(복음)을 듣습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오늘 복음은 종말의 때의 모습인 그 전조들을 - 성전파괴, 적그리스도의 등장, 전쟁과 반란, 분열, 큰 지진, 기근과 전염병,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 - 우리에게 전하면서도, 그것이 바로 끝이 아니라는 '종말의 지연'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일어나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9b)
'종말의 지연'은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겠다."(요한묵시록 2,10)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동정 순교자 성녀 체칠리아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얻기 위해 죽을 때까지 충실하신 분입니다. 배교의 강요를 물리치고 동정을 간직한 채 순교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고통과 죽음을 이겨내고, 기쁨과 생명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 생명의 화관을 얻기 위해 오늘도 충실합시다! 예수님이 됩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rQyg5OPPk1Q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카 21, 8)
끝까지 함께
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뿐입니다.
이 사랑의 빛으로
우리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허물어지는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이며
새로운 시작입니다.
새로운 탄생은
언제나 역사의
진통(陳痛)을
건너 뛰지
않습니다.
동요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또한
참된 사랑으로
서로를
속이는 법이
없어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성전의 화려함보다
하느님을 향한
내면의 성전(聖殿)이
더더욱 중요함을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표징들은
모두 하느님을 향한
회개의 초대입니다.
회개로 다시
세워지고
다시 시작되는
참된 희망입니다.
참된 희망은
허물어지고
자주 속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의
참된 희망은
우리를 저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시는
희망입니다.
오늘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에
참된 희망을
노래합니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놀랄 것이 아니라
새로워질
순간입니다.
삶이란 다시
하느님 안에서
모순의 옷을 벗고
더 기쁜 새로움을
향하는 변화입니다.
벌거벗은
나무들의 기도처럼
진실함의 기도는
모두를 기도가
되게 합니다.
기도는 속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품고
사는 삶은
기도입니다.
기도의 성전은
인격의 성전이며
공동체의 성전입니다.
인격을 인격답게
변화시키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방식은
기도입니다.
끝까지 기도하는
삶에서 희망은
탄생됩니다.
희망을 탄생시키는
기도의 새날이
허물어지는 어둠을
뚫고 솟아오릅니다.
사람의 희망이 아닌
하느님의 희망을
아침기도로
찬미합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