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목사들은 그리 가르쳐왔고 또한 우리들은 그리 배웠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거나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매우 적거나 그 생각이 순전치 못한 사람으로도 치부되기도 하지요.
그런데요, 제가 받아오는 상담 내용들 중에는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는다라고 솔직히 고백하시는 분들이 더러 계십니다. 그 분들 중에는 신앙의 경륜이 그만큼 오래 되시고 직분자라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사랑이라고 가르치기에는 너무 오버된 개념이 많은것 같기도 하고, 어느 주일학교교사도 배운 그대로 가르치잖니 자기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토로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담임목사나 주변분들에게 속내를 털어놓자니 자신을 이상하게 보거나 직분을 내려놓아야 할까봐 이야기를 못하고 내심 속앓이 하시다가 토로하시는 분들도 계신 거구여.
저 역시 그랬습니다. 불신자일때나 한참 믿음생활 하는 와중에도 목사님들께서 자꾸 하나님 사랑이야, 뜻이야 그러시는데요 정말로 이해가 안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가령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가정에 장애아가 태어났습니다. 자폐증 증세같은.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가정을 너무나도 사랑하시어서 하나님이 그런 아이를 보내주셨으니 감사하라는 것이지요. 이에, 그 부모님들은 감사가 선뜻 안되면서도 결국은 감사로 이어가시는 분들도 있구여.
그런데요, 이것이 왜 하나님의 뜻입니까?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너무나도 남달리 사랑하시어서 장애아를 그 가정에 보내주셨다라는 것인지요.
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을 자녀삼으시고 우리들에게 언제나 가장 좋은 시기에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하나님께서, 왜 장애아를 보내주신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또한 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이 땅에서도 말입니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이 장애아로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말입니까. 여러분들중에, 우리 가정의 행복과 사랑을 위해서 장애아를 달라고 기도간구하시는 분들 계십니까??? 응당 부모라면 자기 자녀가 건강하게 태어나서 강건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것 아닙니까. 또한 선한 부모라면 아이를 응당 그러하게 키우려고 노력하는 것일거구여.
그런데, 목사님들중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뜻이라고 가르치는 분들이 계시고 그렇게 주입된 분들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때는 "예향(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이라는 카페에 이런 주제로 글이 하나 올라왔었는데요. 대개들 그렇게들 말하고 있더라구여. 자신들의 입장이 아니다보니 쉽게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니면 정말로 믿음들이 좋아서 진심 장애아가 태어난 것이 그 가정에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요 복이라고 생각하시는 건지...
그래서 저는 아니다! 외쳤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요 복도 아님을 설파하였습니다. 우리 사람 편에서 해석이 안되고 이해가 안되는 일들을 그런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것은 영계의 공의가운데 주어진 산출물이지, 결코 하나님 사랑의 뜻이 있어서 그런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여기서 영계의 공의가운데 주어졌다라는 것은, 그 부모의 유전자내에 장애아로 태어날만한 유전적 조건이나 어머니가 임신하였을 때 태아보호를 제대로 감당치 못해 주어진 선천적인 조건이나 내지 가계적으로 악한 영이 역사할 만한 공의가 있는 등 무언가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공의가 성립되었기에 그리 된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의 뜻으로 그 가정에 장애아를 주신 것이 아니라구여.
그랬더니 많은 분들이 저를 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병원에서도 이상이 없다 하였는데 무슨 소리냐, 예수 잘 믿는 부모인데 무슨 악한 영의 공의가 있다는 둥 헛소리를 하는것이냐 라는 둥, 예수 믿을때 죄의 저주에서 우리는 해방되었는데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둥, 가정을 두번 죽이는 거다 하여서 비난들 하였지요.
하나님은 선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시다 하면서도 왜 예수 잘 믿는 가정에 장애아가 태어나는 것에, 거기엔 하나님의 뜻이 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다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편안하고 위로가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것은 목사님들이 너무나도 하나님의 섭리를 오해하여 잘못 가르친 것이요, 많은 성도들이 또한 잘못 가르침받아 주입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제가 불신자일때나 초신자일때나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공의의 산출물의 개념을 혼돈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두번째로는, 한 가정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과연 하나님이 친히 모든 것을 간섭하시느냐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많은 목사님들이나 성도들이 그렇다라고 그리 가르치고 또한 그리 가르침받아왔습니다.
예를 들어, 야곱과 에서의 출생에서도 하나님이 간섭하시어 그 복의 순서를 미리 바꾸어 버리셨고, 시편에서의 복중에서 하나님이 나를 아셨다라는 구절을 인용해서 그리들 가르치지요.
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사막에 개미 한마리가 오줌 싸는 것까지, 독수리 한마리가 눈을 깜박이는 것까지 다 아시는 분인지라 한 영혼이 이 땅에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의 출생마냥, 다윗의 출생마냥 각 개인의 삶을 매 순간마다 친히 간섭하시어 모든 것을 예정해 놓으시거나 만들어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섭리에 필요한 경우에는 그 영혼의 태어나는 모든 조건과 환경을 친히 간섭하시어 이루어가시지만, 모든 영혼들에게까지 이러시지는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가령, 저 아무개는 머리색은 이거, 부모는 어떤 사람들, 눈색깔은 이렇게, 코모양은 이렇게, 얼굴은 이렇게, 마음중심은 이렇게, 등등 간섭하시어 태어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육의 공의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혼들에게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주어지는 때는 주님을 영접하였을때가 근 대부분입니다.
세상에 있을때에라도 하나님이 부르실만하시다면 여러 경로를 통해 불러내시지만, 그렇다해도 그 영혼이 그러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이나 그 영혼이 가지고 있는 육적인, 환경적인 여건과 조건들을 하나님이 친히 간섭하시어서 그러하게 다 작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원망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가 이렇게 태어나고 이러하게 살아가는 것은 나의 뜻이니, 넌 그런 외모에 이런저런 육체의 조건가운데 살아라 라고 책정하신 것이 아니기에 말입니다. 다만! 이 땅에 펼쳐놓으신 육의 공의가 있기에 그 공의의 기반하에 주어진 조건으로 태어나고 그 조건에 따른 산출물이 있는데 그것을 접합하여 살아가는 것이 기본적 원칙이요 일반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그분의 뜻은 별개로 역사되는 개념이라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셋째로는, 어떤 사고, 중병입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들 중에도 보시면, 사고로 장애를 겪기도 하고 중병에 걸리기도 하고 즉사하기도 합니다. 이럴때도 목사님들 중에는 다 하나님의 뜻이 있고 사랑이 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선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엇이 아쉬워서 어떤 뜻을 위해서 인생들에게 중한 사고나 질병을 걸리게 하면서까지 그 뜻을 이루시려고 하는 것일까요?
성경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된 길을 갔을때는 그에 따른 징계를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그 또한 하나님께서 그만큼 그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주시는 연단이 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내지 사랑이다라고 보기보다는, 그것은 그 백성의 죄로 인한 영계의 공의가운데 주어지는 연단일 뿐이요, 거기서 회개하고 돌이킨다면 그때부터는 다시 하나님의 사랑의 간섭이 있는 것일 것입니다.
이리 본다면, 우리가 사고나 중병에 걸리는 것 역시 하나님을 찾도록 하시는 과정인것 같지만서도여, 그것은 차후 문제이고 일차적으로는 어떠한 영적인 원인가운데 중병과 사고가 있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을 찾고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중한 사고나 중병에 걸리는 것이 뜻으로 예지예정되어 있다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시면 욥처럼 사단의 송사거리가 있어 하나님의 허락하에 집이 무너지고 모든 소유를 잃고 가족이 죽는 연단도 겪는 것을 보게 되지만, 욥의 경우는 특별한 케이스라고 보아야 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인정할만한 선한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난 체험에서 그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선조로부터 들은 믿음의 지식들을 받아들인 사람이었습니다. 체험을 통한 참 믿음을 가진다면 그는 능히 3층천에 들어갈만한 중심이었기에 그리 허락된 것이었고, 하나님은 막판에 가서는 욥을 만나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간증을 들어보면, 욥은 실제 인물이고 3층천의 처소를 상급으로 받아놓은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욥의 믿음을 인내의 믿음이라고 하기도 하는데요,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욥기편을 다시 정독해 보세요. 욥은 가족과 소유물을 잃어버리는 연단까지는 감사하고 기뻐하였습니다만, 몸에 악창이 나는 연단에서는 자신의 출생이나 부모 그리고 하나님을 수없이 원망하였습니다.
그런 욥에게 세 친구들은 자꾸 욥을 가르치려 듭니다. 세 친구들 자신들도 믿음이 있는지라 믿음의 지식으로 옳고 그름을 대결하고 있습니다. 세 친구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지요. 이로 보건대, 우리는 아픈 사람이나 연단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는, 몇마디 해보아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것 같으면 이내 입을 닫고 그저 기도해주는 것이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아무쪼로 욥은 몸의 고통가운데 계속하여 친구들과 변론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지만서도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자녀들은 어떠했습니까. 자녀들은 욥만큼이나 믿음이 좋지 않았고 도리어 믿음이 없던 사람들도 보입니다. 욥은 늘상 자녀들이 하나님앞에 득죄하지는 않았나 걱정해야 할만큼 그래서 번제를 대신 드려줘야 할 만큼, 그 자녀들은 그다지 믿음과 행실이 바른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고, 아내 역시 매우 믿음이 없던 사람이었지요.
이 모든 것들을 잘 따져본다면 무작정 욥에게 사단의 시험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실상은 공의의 계수도 아울러 맞물려져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공의의 계수를 생각치 아니하고, 예수님 잘 믿는 가정들안에서도 욥처럼 그런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며 이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뜻이다라고 한다면 세상사람들이나 믿는 사람들에게나 도대체 무엇이 진리고 성경인지, 선도 악이 되고, 악도 선이 되는 기준이 중구난방이 되어버리는 매우 혼란스러운 가정들과 교회들이 될 것입니다.
이로 볼찐대, 불신자 가정이야 그렇다쳐도 예수님을 잘 믿는 가정이나 영혼에게 불의의 어떤 사고로 객사하거나 중병에 걸리는 것은 그저 하나님의 뜻이다, 사랑이다라고 치부하기보다는 그 안에는 분명 영적인 무언가의 이유가 있다라는 것을 우리는 깨우쳐 보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일전에 기도원에 갔더니 어느 안수집사님께서 오른쪽 편마비가 와서 기도원에 오셨더라구여.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생각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아니라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하시는데, 옆에 어느 목사님께서 무언가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요. 집사님을 더 크게 쓰시려고 하시는 것일겁니다.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믿음과 감사로 받아들인다면 더할나위없이 좋은 것이지만서도여, 저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집사님께서 하나님 사랑하고 신앙생활 잘 하시는데 그런 편마비가 올리 만무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신앙생활 못해서 그런 편마비가 왔을까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지만서도여, 그 집사님이 생각하시는 신앙생활 잘하는 것과 제가 생각하는 신앙생활 잘하는 개념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라 제가 선뜻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습니다.
더욱이 저는 평신도로서 안수집사와 목사님이 대화하시는데 감히 끼어들 재간도 아니구여.
한가지 짚어볼 것은 내 편에서는 예수님을 잘 믿고 신앙생활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요, 내 자신은 잘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들 하는 것이지 그런 사고와 중병이 유발되는 데에는 영적인 원인이 분명 있는데요, 그중에 한가지가 바로 죄입니다.
그 죄란 자신의 외적인 내면적인 죄도 있지만, 여러 얽히고 설킨 죄의 사슬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한편, 옆침대에 계신 어느 목사님은 가정이 많이 어려워졌습니다. 그 목사님조차도 교통사고로 가정적으로 크게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구여.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서 기도원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딱히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옆에 장로님이나 집사님들은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예요. 더 크게 쓰시려고 그러시는 거죠 위안들 하시지만 그렇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경우에는 서원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앞에 자신 스스로가 크게 서원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져버렸고 세상정욕을 이기지 못해 여자문제가 얽혀있었습니다. 이런것들이 공의가운데 계수가 되어 어느 정점에 이르면 저마다에 맞는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고난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느 성도님은 딱히 죄라고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교회사랑하고 하나님 사랑하여 주어진 직분도 감사와 잘 감당하고 있던 중, 폐병이 왔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폐병은 저주의 질병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 성도님은 불평하거나 원망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죄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자존심이라는 자기 죄성을 발견하고 회개하기도 하구여.
반면, 그런 모습을 보는 주위 성도들 중에는 이내 판단정죄가 난무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 뒷단의 죄를 지었을거야 하면서 말입니다. 결국은, 그 분의 폐병은 기도를 통해 낫았고 하나님께서는 더 크게 쓰시는 위한 연단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면, 판단정죄했던 나름 믿음있다라는 성도들은 도리어 회개를 해야 했구여.
넷째로는 습관성 질병에 시달리는 경우입니다.
지인중에는 코질병을 앓는 분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괜찮다가도 날이 차거나 건조하거나 뜨거운 거 드실때에는 코때문에 무지 불편해 하시는 분입니다. 그분 말로는 원래 안그랬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코가 예민해져서 그렇다고 하시더라구여.
병원에 가면 쉽게 치료받을 수도 있겠지만, 매번 그런것이 아니다보니 병원에 굳이 가야할 필요를 못느끼면서도 환절기나 날씨에 따라서 그런 증상이 있다보니 굳이 병원에 가려고 하지도 않으시구여.
그런데요 육적으로 보면 그러하겠지만, 이 또한 영적으로 보면 쉽게 해결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분에게 그런 질병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렇겠는지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자기 신앙생활을 회개하면 되는 것입니다. 회개거리가 하두 많아서 무엇인지 모르겠다싶으면 그저 믿음을 내보여서 통성으로 기도만 조금 내보여도 치료받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경증 질병이라해도여 오래 방치하면 중증으로 이어집니다. 병원에 가더라도 같은 질병이라해도 경증일때와 중증일때가 치료와 차도가 달라지듯이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증일때 믿음을 내보이는 것과 중증일때 믿음을 내보이는 것이 다르다라는 것입니다.
또한, 어느 분은 위가 자주 탈이 납니다. 식사를 잘 하시지만서도 위가 남들마냥 건강치 못하다보니 아무거나 잘 먹고 그러는 것을 부러워하시지요. 이 또한 하나님께서 이 영혼을 사랑하시어 이런 연단을 주셨을까요? 아닙니다.
이분은 혈기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옳다, 내가 안다, 난 진리를 행한다라는 자기 의에서 나오는 혈기를 버리는 마음의 할례를 하시면 그 위병 그냥 날라가 버립니다. 겉으로는 혈기 안내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마음안에서는 부글부글 끓는 것을 남 이목상 참고 있는 걸 어쩝니까. 그러다 못참으면 집에가서 자녀들에게 풀어버리구여.
그분 말로는 자신의 위병은 육적으로야 부모의 유전이라고 하지만서도여, 영은 육을 다스리고 지배하며 육의 모든 일들은 사실상 영에서 비롯되는 것이 원칙이기에 우리가 영계의 공의를 잘만 알아도 이런 것들은 영계의 공의를 믿음으로 잘만 적용하면 치료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을 못해줍니다. 저보다 연배이시고 직급도 목사님이시거든여. 제가 혈기 버리셔야 한다고 이야기한다면 아마도 그 목사님과 저는 결별해야 할 것을 결심하고 이야기를 해야 하거나 한소리 크게 혼을 먹어야 할 지도여.
정리합니다. 저에게도 많은 결점과 허물들이 있습니다. 이런 결점과 허물들로 인하여 영계의 공의가운데 저에게도 주어지는 각종 연단과 어려움들이 있기도 합니다. 그럴때마다 감사와 기쁨으로 할례해 가면서 버려간다면 더할나위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때도 많습니다.
어느때는 영계의 공의가운데 내게 이런 일이 왔구나 뻔히 눈에 보이면서도 해결하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합심기도나 중보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한겹줄은 끊어지기 쉬운데 두겹줄, 세겹줄은 끊기 어렵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런데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 또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중에는 하나님의 뜻으로 일어나는 일들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하고는 무관하게 영계의 공의가운데 일어나는 일들도 많다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어려움이나 연단이 왔을때 무작정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야 하면서 껴안아 버리고 오래 지속적으로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는 일들도 있는 것이구여. 바로 알아서 물리칠 것은 물리치는 것으로, 버려야 할 것은 버리는 것으로, 피해야 할 것은 피해야 하는 것으로, 인내해야 할 것은 인내해야 하는 것으로. 맞설 것은 맞서야 하는 것으로.
그러나, 일반네 입장에서는 이런 것들이 잘 분별이 되지 않다보니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치부해 버릴때도 있다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분별을 위해 목사를 찾아가는 것이지만, 목사님들 중에도 이런 것들을 분별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이다, 사랑이다 말해버리고 그 연단과 어려움을 무작정 껴안고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전 안타깝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어떤 연단이나 어려움이 왔을때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신앙적 믿음의 자세입니다. 꼭 어떤 영적인 원인을 알아내야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도리어 그 원인을 찾아내려고 하다가 골치가 아파질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어떤 연단, 어려움은 원인을 알았든 모르든 단순간에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오랜 인내를 요하는 것들도 있기도 합니다. 믿음의 싸움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 와중에 넘어지고 일어서는 반복도 있구여.
아무쪼록,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이다, 복이다, 사랑이다 하기보다는 영적으로 원인을 알아서 그에 맞게 또한 영적으로 치리받는 것도 중요하다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믿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도 다시 한번 느껴봅니다.
제 자신 그리고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믿음을 한시라도 잊어버리지 않도록 기도해줄것을 부탁드리며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