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사도행전을 끝내고 이사야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과거 이야기인데 지나간 이야기를 우리가 새삼스럽게 언급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적용하시는 그 원리를 오늘날에도 취소하지 않으시고 일관되게 적용하시면서 일하시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6:10에 보면,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이사야 53:5-6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하면서 이 이사야 구절의 내용이 함유된 십자가 인지를 검토해 봐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엉터리 십자가를 믿고 있는 바가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제시하신 그 원리를 중도 포기없이 지속적으로 되풀이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사야에게 특별한 계시를 내려주시는가요?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우발적인 사건이 없으면 항상 환상 속에 무한히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즉 인간은 사실 아무 것도 아는게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는 바가 없는채로 그냥 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뭔가 자꾸 환상을 생산해 내게 됩니다. 깊은 착각 속을 늘 헤매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올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늘 자기 편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물 없는 곳으로 몰아넣었을 때, 그들은 쉽게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홍해 바다를 갈라지게 하신 그 놀라운 기적과 물없는 곳으로 의도적으로 인도하시는 그 놀라운 기적을 같이 연결시켜 줄 안목이 없었던 것입니다. 홍해를 갈라지게 한 일이나 물없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일이나 모두 한 하나님에 의해서 동일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둘 사건을 상호 연결하기가 난처했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도 또 있습니다. 룻기에 보면, 보아스는 남편과 든든한 아들 둘을 데리고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기둥같은 남편이 죽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마음이 없었던 것은 든든한 아들 둘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마저 죽자 나오미는 결국 이스라엘을 도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고향을 떠난 일과 다시 돌아오는 일 모두를 '전능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사랑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모든 일을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기적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처음 교회 나와서 예수님을 믿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줄 알다가 갑자기 자기 사업이 부도가 나면 그것은 하나님이 일으킨 사랑의 일이 아닌 줄로 압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떤 우발적인 사건을 터뜨리면, 사람들은 그 사건에다 자신의 밑바닥부터 올라오는 욕심과 온갖 욕구를 그 사건에다 다 적용시켜 새로운 자아상을 창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해서 멋지게 만든 현실을 우상처럼 신봉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가만 두지를 않고 그 환상을 깨는 쪽으로 새로운 우발적인 계시적 사건을 일어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유다 왕'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사실 유다 왕이라는 말이 상식적으로 성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다란 이스라엘의 13지파 가운데 한 지파에 불과한 것입니다. 즉 유다 나라가 전체 이스라엘을 대신한 하나님의 나라가 될 줄은 이스라엘이 처음 애굽에서 나와 형성될 때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때가 되어서는 유다 나라로 쪼그라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동안 이스라엘 내부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그 범죄의 실상은 딴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새로운 사건에 대해서 그들이 기존 갖고 있는 선입견으로 대들었기에 발생된 범죄입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핵심되는 한 가지 일은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한 다윗에 대해서 이스라엘 여타 지파들이 대들었던 일입니다. 다른 10지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유대 지파를 선택해야만 하는 취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한 것은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남은 자를 건진다는 취지에게 다윗에게 특별히 선택하셔서 그를 통해 하나님의 처음 이스라엘을 생각하신 뜻을 이루어나가시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인간도 다윗을 선택한 그 선택의 은혜에 합류되지 않고서는 구원될 수 없는 실정임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신약에서 소경이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불렀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다윗을 선택한 그 은혜가 신약에서도 구원하는 원리 원칙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즉 누구든지 다윗의 자손되시는 분의 선택적 은혜를 입지 않고서는 구원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 9:6-7에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라고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라는 왕들은 모두 장차 오실 다윗의 자손과는 결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할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사야를 통해, 이사야가 지적하는 그 죄인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직 다윗의 자손에게만 기대거는 백성이라고 드러날 수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늘 우발적인 하나님의 사건이 터져서 우리가 왜 죄인인가를 깨우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늘이여 들으라
2005년 9월 14일 본문 말씀: 이사야 1:2-6
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1: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1: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1: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성도가 평생을 살면서 가장 쇼킹한 일은, 하나님이 말씀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집에 키우는 개가 어느 날 입을 열어 사람 말을 하면 아마 집 주인이 충격으로 병원에 실려가야 할 것입니다. "개가 다 말을 하다니!"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을 하신다는 겁니다.
아마 하나님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충격 정도가 아니라 두려움으로 몸 둘 바를 모를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정말로 살아계셔서 이 인간 세계에 말씀하신다는 것이 믿어진다면 그 사람은 천하에 더 이상 겁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마음의 모든 혼란도 다 평정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에 혼란이 생기는 이유는, 이렇다, 저렇다 확실하게 말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모든 것이 이러이러하다"라고 통고해 주니, 이 말씀을 대하는 순간 성도는 더 이상 자기 중심으로 살 하등의 이유가 다 없어져 버린 겁니다. 홀가분하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과 자신에 대해서 본인이 나서서 신경쓸 필요조차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책망을 하시든 칭찬을 하시던 그 내용은 둘 째 치고 하나님께서 엄연히 살아계셔서 인간을 향하여 외치고 있고 조용스레 말씀하신다는 그 사실만해도 인간들은 경악스럽습니다. 너무 경악스러워서 세상의 모든 것에서 자신이 손을 떼도 상관없을 정도로 날아갈 것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생을 손을 뗄 수 없기에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자진해서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이 엄연히 살아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도 자신의 뜻을 말씀으로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인정하지 않기에 마음 고생을 자처하고 있는 바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어김없이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베드로후서 1:17-21에 보면,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기 위해 꼭 옛날 변화산 현상이 재현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오늘날에는 이 거룩한 성경을 볼 때는 마치 깜깜한 긴 밤을 지나고 온 암흑 천지에 유난히도 빛나는 샛별 하나 빛나는 것처럼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과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하심이라는 사실이 떠오르듯이 깨달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무슨 취지로 이 내용을 말씀하셨을까요? 소가 임자를 아느냐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당연시합니다. 그리고 나귀가 주인의 구유의 안다면 그것도 너무나도 당연히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자신의 하나님을 잊는 것도 과연 당연한가 하는 겁니다. 물론 소가 임자를 아는 그런 맥락이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실제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잘못된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이라고 여기서 그동안 신봉해 왔던 것입니다. 왜 그들이 잘못된 하나님으로 교체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그 이유는 신명기 31장-32장에서 그 근본적 원인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자기 백성들의 행세를 미리 예언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예언이 단순히 "앞으로 잘해라"라는 차원에서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신을 섬기면 너희들 매맞아. 그러니 주의하라"하는 식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놀라운 예언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해도 다른 신을 섬기는 패역한 백성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이사야 본문에 나오는 그 내용도 실은 하나님께서 확실한 예언한대로 진행된 결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신명기 31장과 32장의 어두운 예언이 남의 이야기로 들어서는 아니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집이 세서 아무리 하나님께서 당부해도 그들은 다른 신을 섬겼지만 우리들은 저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되지 말라 하는 식으로 교훈받는다면 이는 지금 우리가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바입니다.
실제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능히 자기 힘으로 지킬 수 있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범위 안에서 자연스럽게 관계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을 참 하나님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주의를 당부하고 그 주의사항을 유념해서 어그러진 길로 가지 않을 가능성을 있다는 바탕 위에서 나올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은 가짜입니다.
신명기 31장, 32장의 말씀은 그 어느 누구도 패역한 백성에서 배제되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언한 것을 오류로 만들어버릴 괜찮은 자는 이 세상에 없음을 인정하는 자가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오늘날의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살기 바빠서 24시간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의 예언대로 어느 말씀하나 제대로 순종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우리는 오직 어린 양의 피로서만 구원받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을 믿을 때 참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즉 오늘 이사야 본문에 나오는 자들이 결코 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보고 하는 이야기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후로도 우리는 성경의 그 어느 구절하는 제대로 지킬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갈 수 있는 것은 강도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이 곧 우리 자신이 들으라고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 중심으로 세상을 보지 말고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세상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소돔의 사람들
2005년 9월 21일 본문 말씀: 이사야 1:10-11
1: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방법은 의외로 싑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안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직접 보내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을 안믿고 사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것이 달리 없습니다. 자 그렇게 되니까, 평소에 우리가 그저 편하대로 살면 살수록 그것이 곧 하나님을 쉽게 모독하는 삶이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자신만 믿고 살게 되어있습니다. 늘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싶어합니다. 소위 자율, 혹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살고 싶어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이미 하나님을 모독하는데 충분합니다. 성도가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믿고 살고 싶은 욕망과 늘 갈등을 일으키는 삶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소위 편하게 살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그 사람은 그 자체로서 충분하게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면 됩니다.
오늘날의 시대에서는 예수님을 안믿고 사는 것보다 더 크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구약 시대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모독하는 모습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내 말을 들을지어다"라고 해도 "아니!"하고 외면하면 그것으로 곧 하나님을 모독하는 언행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하나님 말씀을 기피하는 처사는 충분하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했더라도, 우리 쪽에서 "아니?"라고 외면하면 그것으로 이미 하나님에 대해서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예배당을 부순다든지, 복음 전도자에게 해꽂이를 하지 않더라도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관심없이 산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하나님을 모독하는 언행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쉬지않고 우리 인간들로부터 집단으로 모독을 받고 사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고 내름대로 하나님 앞에 고분고분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쓰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소돔의 관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라고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호칭을 사용하시면서 말씀을 주셔도 들을까 말까 하는데 아예 '소돔의 관원들아'라고 해서 욕설 비슷한 호칭으로 앞장 세우시면서 말씀을 주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전에 소돔과 고모라 성에 직접 심판을 감행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그 때 그 심정으로 너희들에게 말씀을 전한다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라는 동네는 집단적으로 심판을 받은 곳입니다. '집단적 심판'이란 참으로 조심하지 아니하면 억울한 의인이 죄인과 더불어 심판을 받는 하자가 일어날 공산이 큰 것입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 오폭하는 경우와 같은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신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심판 감행은 얼마나 정밀하고 정확하게 심판을 하셨는지, 절대로 구원될 수 없는 사람까지 구원되는 일이 없도록 조치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롯의 처입니다. 처음에 천사들이 소돔과 고모라도 내려갈 때에 아브라함은 대규모 심판을 예상해서 단 한 명의 의인이라도 죄인으로 오인되어 함께 심판받는 경우가 없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참으로 정확했습니다. 의인은 단 10명도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롯과 두 딸 뿐이었습니다. 즉 구원될 자가 정확히 구원시키도록 조치하고 그리고 난 뒤 집단적으로 심판을 감행해도 잘못 심판일 경우가 아닌 것입니다. 끝까지 따라붙는 롯의 처를 기어이 뒤돌아보게 해서 소금기둥으로 심판받게 했습니다. 이 정도로 정확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정확한 하나님께서 이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유다나라에 말씀을 전하시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있었던 정확한 심판 처리를 보고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참으로 하나님이 든든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심판받을 자라 심판에서 면제되는 일이 없게 하시고, 반드시 심판을 받지 않을 자가 심판받는 경우가 없도록 빈틈없이 일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황홀하고 숨막히는 은총인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정확하지도 않고 세상 만사를 꿰뚫어보지도 못하는 우리를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만 의지하게 하신 은총을 한 마디로 말해서 충격적인 사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집단적 심판에서만 실수가 없는 분일까요? 아닙니다. 집단적으로 구원하시는 일에서 빈틈이 없으신 분입니다. 요나 3:3-6에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필히 망하도록 되어 있어, 그래서 요나 선지자가 파견된 이 니느웨성이 요나가 전하는 심판 소식을 접하고 온 나라가 집단적으로, 심지어 가축들까지 금식하면서 회개했더니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철회해서 심판이 임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보고 몹시 화가 난 사람이 따로 있으니 곧 요나 선지자입니다. "고국에 있을 때는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았느냐"고 하나님에 따지고 듭니다.
과연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래부터 인간과 흥정이나 타협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들 인간들이 원하는대로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원칙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늘 회개하는 자를 통해서만 늘 용서와 사랑이 튀어나오게 하시는 방향으로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즉 얼마 전에 심하게 회개해서 지금은 의로운 생활을 한다고해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늘 죄인임을 자각하고 니느웨 사람들처럼 늘 회개하는 자세로 살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거기서 주님의 사랑과 용서가 배겨나올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소돔의 관원들아"라고 하실 때, 바로 우리 자신들을 보고 그렇게 하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로 새사람되었다고 해서 우리에게서 의로운 행위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인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자비와 용서의 대상이 될 때 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주제에, 이 버림받은 땅 위에서 우리가 뭘 해도 의인이 아님을 명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자꾸만 이제 독자적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주님 보시기에 죄만 나오는 우리의 행위들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구원 거부
2005년 9월 28일 본문 말씀: 이사야 1:12-15
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우리는 달을 보고 묻기를 "애, 너는 지금 뭐하니?"라고 물으면 바보처럼 가만있기만 합니다. 해나 별을 보고 물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이 세상에서 제일 분주하게 활동하는 존재는 우리 인간밖에 없다고 여겨질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해와 달이나 별들은 아무 일도 안하고 무심히 이 지상을 내려다 보기만 한다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들만이 부지런떤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하나님도 별 볼일 없이 해와 달처럼 이 지상을 지켜보기만 한다고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그냥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들 보다 더욱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활동이 바로 인간들이 하는 모든 행위를 거절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인간들이 표현해 내는 하나님상이 크게 엉터리라는 겁니다. 인간의, 부지런함에는 단순히 이 지상의 생존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자기 처지를 챙기는데에 대해서도 부지런을 떱니다. 인간들이 하는 모든 일을 한마디로 말해서 '유한에서 무한으로 치닫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학식이나 재력이나 신분이나 구분이 없는 모든 인간은 무한의 신의 세계에 대해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도 자신을 죽음 이후에 영원한 세계로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바로 이런데 동원되는 하나님상이 오늘 본문에 의하면 완전히 가짜라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예수를 전하는 것에 대해서 양보는 전쟁을 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분이지만 '다른 예수'를 섬기고 전파하고 만들어내는 자들에까지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는 분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옥은 나름대로 심판이 정당성을 확보해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만드신 주님의 '지옥만들기'를 인정치 않는 자는 지옥의 무서움을 부여하는 것으로 지옥을 통한 주님의 정당함은 살아나게 됩니다.
이러다보니 인간들의 모든 부지런함은 결국 나름대로 종교적 형태로 마감처리 됩니다. 비록 공식적인 메이져급 종교를 갖지 않더라도 인간이라는 누구나 나름대로 신을 표현하는 방식을 따로 지니고 있고, 그 신에 부합되는 법을 따로 생각해 두고 있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인간이 만들어내는 신이란 전부 엉터리라는 점입니다.
아무리 거룩한 성경말씀을 절대적 법으로 동원해도 그것을 끌어당기는 신은 여전히 엉터리 신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숱한 법을 인간들이 동원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3절에도 법이 동원됩니다.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이처럼 인간들이 만든 가짜 신은 중간에 법이라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과연 구원된 자인가 아니면 탈락된 자인가를 점검하게 됩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이 가짜 하나님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한채 그 추상적으로 설정해 놓은 그 신을 향하여 집요함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참된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들의 집요한 구원성향을 밀어내십니다. 거부하십니다. 거절하십니다. 배척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차단하고 막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초청하시는 분이 아니라 거절하시는 분입니다. 이사야 6:9-10에 보면, "여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당부하는 말씀은 곧 그 어느 누구도 인간의 구원의지를 하나님께서 수용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쉬지 않고 적극적으로 활동에 나서십니다. 자기 종을 보내서 진짜 하나님이 속마음을 분명히 전달하시고 합니다. 인간들이 야금야금 하늘나라를 밀고 올라오는 것은 하나님은 인정치 않고 밀어내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사야를 모든 백성들이 다 반대하고 나섭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이사야를 원수처럼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친구처럼 간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전파하는데 이사야는 사람들의 원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조차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벌리시는 활동입니다. 욥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욥에서는 절친한 친구 세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욥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이상한 일이 주어지니 금방 천하의 원수로서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인간들이 잘못 생각한 하나님상에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가장 저주스러운 몰골을 그대로 욥에게 다 뒤집어씌었습니다. 결코 욥은 저주받은 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사람들이 흔히 상식선에서 생각하고 있는 그 저주의 형극을 그대로 욥에게 퍼붓도록 허락하자 친구들은 원수가 돌변했습니다. 특히 욥의 부인이 하는 말에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라고 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내장되어 있는 심정이기도 합니다. 하던 일이 잘 될 때는 자신이 광적인 하나님 팬인줄 알았더라도 조금도 자신의 일이 막히면 대번에 "하나님을 저주하고 차라리 죽어버리자"라는 마음이 쏟아오르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마치 욥처럼 인간이 차마 보기조차 민망한 최고의 저주의 모습이 박혀있는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속 뜻을 유일하게 나타내십니다. 거기서는 어떤 분이 저주받고 있습니다. 실은 구원받고자 열심내는 우리 자신이 저런 저주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백하기를, "부활에 이르기 위해 십자가에 참예한다"고 했습니다.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야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유한의 최후의 저주의 현장이 곧 천국이 기다리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시선은 거기에다 두어야 합니다. "누가 내 대신 저주당하셨는가"에 최종 관심사를 두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밑바닥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공로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십자가 공로 뿐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과의 변론
2005년 10월 5일 본문 말씀: 이사야 1:18-20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1: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1: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인간들은 대단히 당황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알고 있는 천국관하고는 너무 달랐고 생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인간들의 현재 상황은 실제 천국에 적합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로 가만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 시비걸고 나왔습니다. 자연적으로 변론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을 향하여 '변론하자'고 나서십니다. 변론하자고 하신 저의에는 인간들이 이미 갖고 있는 모든 선입견에 문제가 크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변론의 일생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먼저 공격적으로 인간과 변론에 나서신 것은 아닙니다.
이상스럽게도 인간들 쪽에서 먼저 예수님에게 시비걸고 나온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예수님이 먼저 보낸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 누구의 지시나 허가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일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세례요한이 하시는 일에 시비걸고 나온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에게 묻기를, "너는 어떤 자격으로 이런 하나님의 일을 행사하느냐?"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일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세례요한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경위하여 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마 자신들을 비켜 지나가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일하실 줄이야 상상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활동하실 때, 변론하게 되는 대상자들이 주로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나 서기관들입니다. 일반 서민들에게는 논쟁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문동병자는 소경들이나 창기들을 상대로 변론해서 자기에게 지게되면 병고쳐주는 식으로 그들을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아무런 대가없이 자비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나 서기관들 하고는 치열한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당시 하나님의 뜻을 나름대로 독점해 있었던 자들입니다. 남들에게는 하늘의 권위로서 하늘나라를 대행하는 자들처럼 군림했습니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일반 대중들은 그들이 가르치는 천국이 참된 천국이라고 수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은 그들이 익히 아는 천국과는 전혀 맞지 않는 다른 천국관을 몰고 이 땅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러한 변론과 논쟁은 오늘날도 계속됩니다. 참된 천국과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마치 구멍가게처럼 쪼그라들고, 엉터리 천국관을 풀어놓는 교회는 대형할인마트처럼 번창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을 결코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데가 없어서 모두 지옥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귀에 참된 복음을 전해봤자 그들은 기존의 구원관과 천국관과는 틀리다는 이유 때문에 단호하고 외면해버리고 맙니다.
따라서 오늘날 참된 복음전도자들은 각오를 단단히 해야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듯이,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가운데 보냄과 같도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양이 무슨 능력이나 실력으로 그들 이리떼를 이기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연이어 말씀하시기를, "그 때 말하게 하신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 계시는 성령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을 마치 트로이 목마처럼 성도의 몸 안에 계시다가 양같이 순결한 그 양을 통해 성령님 자신의 할 소리를 하시는 겁니다. 토로이 목마란, 트로이와 아테네와의 전쟁에서 그리스군이 불시에 습격할 무리를 안에 숨긴 커다란 목마를 남겨놓고 철수를 위장하는 방법을 써서 전쟁을 끝내었스니다. 트로이 사람들이 그 목마를 도시 안으로 들여놓자 그 안에 숨어 있던 그리스인들은 자기 편 군대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그리스 군대는 트로이를 약탈하고 남자들을 학살하고 여자들을 데려간 전략을 취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성도들이 불신 사회에 나가서 전도할 때에 먼저 논쟁을 즐기는 방식으로 나아갈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괜히 시비걸고 나오는 기회를 외면해서는 아니됩니다. 성도가 완전해서 변론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의 예언대로 변론하시는 성령님께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변론하자'라는 예언의 성취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데 과연 그 무슨 주제를 놓고 변론하자는 겁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게 변론거리가 됩니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요. 예를 들면 어떤 판사가 죄인에게 판결을 내리면서, "당신, 나하고 변론합시다. 당신은 무죄입니다"라고 한다면 피고되는 사람은, "판사님, 변론하나마나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이미 죄의 창고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주홍같은 죄가 바깥에서만 빨갛게 자기 색채를 띠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인간 속에 들어있을 때부터 빨갛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력으로 자기 색깔을 붉은 색에서 흰색으로 탈색시킬 수가 없습니다. 보통 인간 세계에서는 죄를 무게로 따지는데 하나님께서 죄를 색깔로 표시한 것은 죄라는 것이 우연한 실수처럼 인간 속에 스며들어가는 식이 아니라 처음부터 본형태로 자리잡고 있음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이러한 주제가 변론거리가 되는 시대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이 전적 죄인이며, 자신의 그 어떤 행위라도 선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저 용서받는 것을 본인들이 원치 않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나름대로의 자긍심이 날아가 버리고 마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을 그저 곱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저 감사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참 천국에 적합한 인생이 됩니다. 요한계시록 4:10-11에 보면,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1:2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 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
1:22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1:23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
1:24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수하겠으며
이사야가 과감한 질책을 그 당시 유다나라에 해댄다는 바를 우리는 눈 여겨봐야 합니다. 이사야가 이런 소리를 한다고해서 누가 알아준다든지 누가 동조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사야는 꼭 이런 소리를 해야만 할까요? 그것은 이사야 본인이 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는 것을 이사야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주위 사람들의 호응도에 따라 자신의 일의 가치를 측정하려고 합니다. 호응이 잘되면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 되고, 호응이 없으면 뭔가 자신이 일을 잘못처리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서 좌절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사야에 있어서 이런 일은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 중요한 일을 일부러 만들어서 실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사야가 이런 소리를 외친다고해서 사람들이 이 말에 감동받고 회개할 자들이 아닙니다. 인간이란 누가 옆에서 무슨 소리해도 강압적인 힘이 아니면 대부분은 그냥 자신이 쭉 해왔던 일을 그냥 하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에 비로소 자신의 자율성을 마음껏 맛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사야가 뭐라든 상황이 개선될 일은 만무합니다. 그렇다면 이사야를 보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들에게 뭘 기대해서가 아니라 직접 자신이 나서서 모든 일을 다 처러하십니다.
예를 들면, 어느 학급에 지독하게도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고 단 한 번도 숙제를 안 하는 학생들만 가득차 있다고 합니다. 그럴 대 그 학급을 해체하고 말까요? 아닙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느 학생은 외부에서 전학오게 합니다. 그렇게해서 그 학급에다 박아놓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숙제 안하는 것이 정상인 줄 알았던 학생들이 그 때부터는 자신들이 비정상인 것을 발견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사야의 말씀은 우리 인간들이 평생토록 완벽하게 다 지키면 구원해 주겠노라는 취지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들으므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고 늘 책망하시고 인도하심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아는 계기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느냐 아니하느냐는 그 사람이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한다할지라도 그 모습이 '자기 부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느냐의 여부에 달렸습니다.
즉 자신이 진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본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노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참으로 중요한 일을 우리 주님께서 자신에게 시키고 있기에 설사 자신이 참기 힘든 상황이 온다할지라도 자기 것 챙기기에 나설 수 없는 입장인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가 이런 질책을 그 당시 유다 사람들에게 말할 때, 만약 이사야의 친척이 이것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말릴려고 달려들 것입니다. 즉 "이 사람아, 너 하나 그렇게 장렬하게 나선다고 누가 변화될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왜 너는 그토록 고생을 사서하느냐?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너만 힘들고 인생 손해본다"라고 안타까워 했을 것입니다.
이사야의 이러한 과감한 복음 전달은 장차 오실 메사야께서 하실 모습을 앞당겨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11:36-39에 보면,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믿음이란 자신의 처지에 신경쓰는 모습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이 받은 것이 중차대함이 자신의 목숨 이상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학생을 오늘날에도 이 세상에 박아넣으셨습니다. 그렇게해서 비록 이 세상은 인간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이 죽을 쓰지만 그런다고해서 하나님이 일이 실패로 끝나는 법은 없게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단순한 사회적인 윤리와 개인적인 도덕에 관한 훈계 정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 유다나라 사람들이 두 발을 딛고 있는 땅은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특수한 땅입니다. 이 '약속의 땅'에서는 참으로 특이하게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축복도 받고 저주도 받는 땅입니다. 그렇다면 이 약속의 땅 위에 사는 자들은 어떠한 원칙에 따라야 합니까?
약속의 땅이란 그냥 생긴 땅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고아와 나그네 신세로서 있었다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거기서 나올 때부터 형성된 땅입니다. 그래서 그 출애굽 때의 원칙을 위배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원칙이 출애굽기 22:21-24에 나옵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찌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결코 자기 편이지 자기가 구원한 그 인간들 편이 아닙니다. 비록 자신의 능력으로 애굽에서 나왔더라도 자신의 원칙을 위배하면 하나님은 그들 조차 적으로 간주하시고 공격하시는 겁니다. 왜 이사야가 과부와 가난한 자들에게 대해서 외치는가 하면, 이 약속의 땅에서 사는 모든 이들은 자기 것이라고 여길 만한 힘을 소지 하지 않고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약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힘 주실 때는 그 힘으로 다른 약자에게 봉사하라고 준 힘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4:8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교회 그 누구도 자력으로 구원된 사람없고 만약 구원되었다면 오로지 예수님의 그저 주시는 보혈의 공로로 구원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약자가 되어 있어야 되고 만약 어느 강자라고 여기는 자가 그 약자를 함부로 대하면 그 사람은 약한 자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자신의 불신앙의 정체가 탄로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분이 이 세상을 이겼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사명과 소명을 얕잡아 보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의의 성읍
2005년 10월 19일 본문 말씀: 이사야 1:25-31
1:25 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1:26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셨나니
1:27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
1:28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1:29 너희가 너희의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것이요 너희가 너희의 택한 동산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며
1:30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1:31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
하나님은 인간의 더러움을 드러내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악들을 감추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노출시키려고 하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9:12-13에 보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얀 의사 가운을 입으시고 손에 청진기를 가지고 우리의 더러움을 탐색하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그 앞에서는 자신의 훌륭한 점과 업적과 실적들을 꼬깃꼬깃 챙겨놓았다고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적인 의식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은 구원이 인간에 의해서 주도되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람이 임의로 철수해 나가는 관계가 아닙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처럼 그렇게 끊어질 수 있는 사이가 아닙니다. 인간이 가인처럼 제사드린다고해서 그 때 비로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수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욕설을 퍼붓는 그 순간에서도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계십니다.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껏 하나님을 원망하시는 그런 40년 상황에서도 아침마다 만나는 내려졌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는 별도로 하나님은 인간 세계에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우리 인간에게 보여준 언약성입니다. 앞으로 인간들이 그 어떤 짓들을 해도 물로서 세상을 심판하지는 않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편의 일방적인 선언입니다.
우리 성도 주변에 많은 이단들과 불신자들과 하나님에 대해서 저주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도 지금 하나님의 은혜의 혜택을 톡톡히 입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이방민족과의 차이점은 바로 그들에게 지금 선지자 이사야가 파견근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들이 얼마나 완벽하냐를 가지고 구원을 논할 것이 아니라 지금 과연 자기 시대에 하나님의 특별한 임무를 띤 분이 등장했느냐를 가지고 결정할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3:16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비록 자신이 부족해도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가 등장했거든 안심하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무능한 자기 백성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일방적으로 구원을 해주시는 겁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의의 성읍'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의(義)로 가득찬 마을이라는 말입니다. 그 마을은 오직 하나님의 의로움만으로 운영이 되는 도시입니다. 그런 도시를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모든 주민들은 입가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봉사하려고 달려드는 그런 마음이 이 세상에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곳은 고급 백화점입니다. 서비스 정신이 충만하지만 단 돈을 가진 자에 한해서는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만드시는 '의(義)의 마을'은 돈으로 포장된 도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넘치는 그런 성읍이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옵니다. 21:1-2에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은 몽땅 찬란한 보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극한 영광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아름답고 영광스러워도 어린 양의 생명책이 기록되지 못한 자는 거기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25-27에 보면,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 요한계시록 17장에는 돈과 자본으로 가득찬 성이 나오는데, 그곳은 큰 성 바벨론입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악마가 땅이 음녀와 결탁해서 꾸민 도시입니다. 세상에 각양 좋은 것을 다 집결시켜 놓은 곳입니다. 그 곳에 있는 인간들은, 남들이 가지지 못하고 즐기기 못한 것 때문에 탄식하는 욕망이 춤추는 곳입니다.
하늘의 생명책에 명단이 빠진 사람들은 세상 권력자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밖에 없고, 그리고 세상적인 영광의 유무에 따라서 웃고 우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움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새예루살렘성이 이토록 극치의 영광스러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21장을 통해서 보면, 순전히 신랑 때문입니다. 신랑으로 인해 죄사함이 있어서 성립된 성읍이기에 그 성의 영광은 모두 신랑 되시는 예수님의 의로움에 근거해서 하늘로서 주어진 영광입니다. 따라서 신부가 되는 성도는 신랑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가치에 철저하게 종속되어야 합니다.
신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야 합니다. 십자가 지신 신랑 앞에서 세상적인 것을 가지고 흥정하려 들어서는 아니됩니다. 참으로 예수님에게는 그 어떤 대가를 기대하는 식으로 신앙생활해서는 아니됩니다. 설사 주님께서 모든 것을 빼앗는다 할지라도 성도에게 주어진 하늘의 영광은 빼앗지 않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어떻게 죽었고 지금 어디가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미리 챙겨두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대장이 된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랑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또한 누구의 신부도 되기도 원치 않습니다.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병든 자나 죄인으로 간주하지 않으려 합니다. 남들이 누리는 세상의 사치를 자신이 누릴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세속적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동정심이라는 것도 그 근거가 순전히 세속적입니다. 이곳은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는 것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심지어 교회마저도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어린 양이 어디고 가든지 주님이시다는 그 자체만으로 운명을 같이하는 신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절대 산
2005년 10월 26일 본문 말씀: 이사야 2:1-4
2: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2: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2: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2: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모든 산 위에 산'이라는 이 이사야 예언을 사물적으로 보게 되면 메시야는 이 지구상에서 지일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 산에 임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산에 올라가서 메시야로부터 '여호와의 진리의 도'를 배울 사람은 전문 산악인 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도무지 다른 산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정도로 특출한 산에 여호와의 성전이 세워진다는 이 예언의 실제 내용은 무엇일까요?
이사야 당시의 유다나라는 산마다 숱은 우상들로 가득했습니다. 열왕기하 16:4에 보면,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수하게 깔려 있는 산당들이 왜 그렇게 흔한 것일까요? 사람들은 뭐든지 상식적인 선에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종교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신이란 이성적인 신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감정에서 나온 신입니다. 인간은 이성이 우선이 아니라 감정에 우선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늘 감정의 예민함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감정이 요구하는대로 그 욕구와 욕망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편하게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몸을 가져가면 그것은 항상 '상식적인 종교'가 되어버립니다.
상식적인 종교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신의 뜻'으로 간주하는 종교입니다. 느끼는 감정을 두고 '옳다, 그르다'고 평가하기가 곤란합니다. 감정은 목적이 달성되지 전까지 안정을 찾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전지전능한 신의 힘에 의해서 이 세상을 편하게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의 기운과 접촉하고 싶어합니다. 어디로 가야만 할까요?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높고 깊은 산입니다. 거기에는 영험한 신기(神氣)가 서려있다고 믿는 겁니다. 특히나 구약 성경에 나오는 사례들은 그들로 하여금 신령한 기운을 획득할 수 있는 모범사례처럼 간주될 수도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0:5-6에 보면,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산에는 거룩한 신령함이 항상 고객을 기다리고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요란한 특이한 이벤트를 통해서 인간들은 자신의 이성과 판단력을 산 밑에 잠시 맡겨두고 오로지 순수한 감정만 가지고 산 위에 산당을 짓고 신과 접촉되기를 시도하게 됩니다.
즉 높다는 산봉오리마다 이방종교적 문화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높은 산은 상대적으로 지상과 수직적으로 멀리 탈피되어 있습니다. 다른 세계를 꾸밀 수 있습니다. 수상하면 수상할수록 더욱 신비롭게 받아들여지는 곳입니다. 지상의 세속적인 힘말고 또다른 영적 힘의 세기가 모아지는 곳입니다. 이런 종교 문화를 배경으로 이사야는 '절대적으로 우뚝 쏫아오른 산'을 예언으로 제시합니다.
인간들이 공간적으로 신과 접촉을 시도하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마지막 때로 접어든 오늘날 신약 시대에서 이 '절대 산' 예언은 어떻게 성취되나요? 베드로후서 3:8-9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공간 이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이 대상으로 일괄해서 해체될 입장에 놓여 있는 마당에 하나님의 약속은 특정 공간이 아니라 특정 공간을 건너뛰면서 특정 시간을 갖고 기존의 인간들의 시간 의식을 깨버리시고 나타나십니다. 천년이 하루 같다는 것은 그만큼 세월이 빠리간다는 것과 하나님에게 있어 시간이란 인간들이 보는 시간보다 넓게 본다고 대충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하실렵니까? 천년에 일어날 일을 하루만이 다 터뜨린다는 말씀입니다. 하루의 일과가 천년의 일과도 동일한 내용물로 채워진다는 말입니다. 이 '천년이 하루이고, 하루가 천년'이 되는 시간관은 여호와의 도(道),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만들어진 도(道)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안에는, 아직 끝나지 않는 인류 역사 전부가 그 내용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영이 우리 성도에게 들이닥치면 성도는 비록 몇 십 년 되지도 않는 인생을 보냈더라도 아담 안에서 인류가 겪는 범죄를 다 겪게 됩니다. 하루가 24시간이고, 거기서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이 불과 몇 초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짧은 2∼3초가 나머지 23시간 대부분을 통해서 경험했던 것보다 더 강렬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짧은 순간에도 십자가의 도는 성도로 하여금 이 악한 세계 안에서도 이 세상 자체를 극복하는 우뚝 쏫은 신성을 경험케 하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2:8-9에 보면,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십자가를 통과하신 그 부활의 몸에 지난 날 산당에서 인간들이 갈구했던 그 모든 신성이 충만하게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데도 인간들은 상식적인 기독교를 추구하면서 서투른 신비주의에 자신의 감정을 맡깁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인간은 스스로 자시 종교로 자신을 방비하고 그리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기로 삼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여호와의 도'를 아는 자들은 더 이상 전쟁이 없다고 합니다. '상황 종결'을 그들은 맛보고 있는 겁니다.
전쟁을 종식되는 때는, 더 이상 인간대 인간의 대결이 무의미해 질 때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통치되기에 자기 존재를 위한 싸움은 더 이상 무가치합니다. 즉 '내가 나를 살려내는 방식'의 종교는 십자가 앞에서 다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상식적인 종교는 자아를 크게 하고 메시야를 작게 만듭니다. 우상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말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우상 종교만 찾는 이 때에 십자가의 영은 여전히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사야 시대나 지금 이 시대나 상식적인 종교에만 몰리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십자기 안에서 참된 하나님을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용서하지 마옵소서
2005년 11월 2일 본문 말씀: 이사야 2:5-10
2:5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2:6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 같이 술객이 되며 이방인으로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2:7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2:8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여
2:9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2:10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
이사야가 그 당시 시대상에 대해서 어떻게 외쳤는지 간에 그 당시 사람들은 얼마든지 이사야의 말에 대해서 무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점이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결심과 각오를 총동원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파한다고 나서봤자. 주위 사람들이 "그것은 너의 견해일 뿐이지 또다른 견해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라고 되받아칠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그 어떤 요상스러운 기적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세상관과 하늘의 뜻을 유감없이 전달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당시처럼 오늘날도 세상은 종말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전에 선지자를 보내시는 것이 당연하십니다.
문제는 이사야처럼 사람들이 얼마든지 일개 한 사람의 세상관으로 쉽게 무시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리고 누구도 선듯 이사야처럼 대범하게 나서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비록 세상의 악함에 대해서 동의를 표해도 본인부터 뭔가 두려움과 세상이 주는 공포에 짓눌러 있다면 바로 그 사람조차 선지자한테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사야는 단순히 세상 현실이 악하다는 것만 외치는 분이 아니라 본인 자신이 두려움과 겁이 없이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사야가 이런 자세가 가능한 것은 물론 그는 우상과 참 하나님과의 차이를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참 하나님 앞에서 '헛 것'입니다. 부질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우상을 요청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 속에 담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심을 자신이 손수 만든 신을 통해 해소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우상과 참 하나님과의 차이는, 우상은, 우상을 만든 본인들이 우상을 향해 기도를 해야 효과를 보는 것이고, 참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을 위해 친히 기도하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412장 후렴에 보면, "주 널 위해 비네 주 널 위해 비네 주 널 위해 비네 널 빌으시네"라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33-34에 보면,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7:25에 봐도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고, 또 누가복음 22:31-32에 봐도,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에 나오는 참 여호와 하나님은 오로지 자기 백성을 친히 관리하시고 책임시키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나옵니다. 바로 이런 점이 인간이 만든 우상과의 차이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우상을 여전히 섬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에게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들기 때문입니다.
구약 사사기 17장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의 우상을 만드는 대목이 나옵니다. 미가라는 사람에게 모친이 계셨는데, 하루는 미가 어머니 소유의 은 1100개가 도난당했습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화가나서 마구 신의 이름으로 저주를 퍼붓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랑하는 자기 아들이 그 돈을 가져간 것입니다.
띠라서 미가의 어머니는 신에게 하소연한 저주를 철회해주십사 하는 차원에서 은 200개를 가지고 드라빔이라는 우상을 제조하고, 그리고 전문 성직자를 고용해서 자기 가정의 축복과 저주를 해소되기를 빈다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은연중에 마음 속에 차이는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신에게 비는 식으로 살아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예수를 언급하고 하나님을 언급하지만 사람들은 참 하나님과 참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 신상과 가정의 행운을 얻기 위해서 교회 나가서 정성을 다시 빌고 바치는 식으로 종교생활을 영위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사야가 저주한 그 당시 사회상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신앙은 그저 본인 속에서 지속적으로 뿜어져나오는 불안감의 발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믿을 것은 자신의 종교열성 외에는 믿을 게 없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선지자로 부름받은 이유를 압니다. 그것은 세상이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곧장 심판을 받을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참으로 대범하고 자신만만한 요청입니다. 그만큼 이사야는 세상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시대에서 이사야처럼 두려움 선지자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세상은 하나님의 불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누가 제 2이사야, 제 3의 이사야 일까요? 그것은 이사야처럼 하나님과 동일한 적개심과 분노심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즉 사적인 염려나 두려움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입니다. 염려나 두려움에 벗어나게 된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주님의 양 떼를 책임지기 위해서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아무리도 풍부하고 유혹스럽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인간적인 두려움의 소산으로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즉 우상과 연결되는 있는 한, 그리고 아무리 풍부한 재물로 자신을 방비하려고 해봤자 결국 이 땅 위에서 흘리가는 강물처럼 헛되고 헛된 것 뿐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세상 재물이 이끄는 그 두려움에 빠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분노를 지닌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선지자를 이 땅에 출현케 했다면 저희들의 출현도 이사야와 같은 취지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람과 우상
2005년 11월 9일 본문 말씀: 이사야 2:17-22
2:17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2:18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2:19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2:20 사람이 숭배하려고 만들었던 그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쥐와 박쥐에게 던지고
2:21 암혈과 험악한 바위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신을 논한다는 것은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현재 일어나는 이 지구상에 일어나는 일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적응하지도 못하면서 감히 신에 대해서 언급하고 신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은 참으로 벼락맞을 각오를 하고 말해야 합니다. 신에 대해서 논하려면 자신이 언급한 그 신에 대해서 목숨까지 몽땅 바칠 마음으로 신에 대해서 언급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에게 목숨을 바칠 의사도 없이 신에 대해서 논하게 되면 이것은 신을 섬길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 본인이 신을 잘 섬기는 위대한 존재가 되는데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본문 22절의 말씀까지 진심으로 우러러 심길 수가 없습니다. 22절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즉 참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은, 결코 자신을 의지할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엄과 광대하심 앞에서 자신의 생명이란 코의 호흡으로만 겨우 드러날 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평소에 자신의 전 신체를 통해서 생명의 기운이 펄펄난다고 믿고 있습니다. 팔, 다리, 두뇌, 눈동자 등 신체의 각 부분들은 자신의 의사대로, 요구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 이로서 인간은 자신을 의지할 만 하다고 믿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점으로 인하여 인간은 참된 자신의 모습에서 벗어나 교만과 우월함으로 무장하게 됩니다. 17절에 보면,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고하고 높아져 있는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은 한없이 위엄과 광대하심을 대처하십니다.
바로 이 점이 우상과 참 하나님과의 차이점입니다. 우상은 인간의 자고함과 위대해짐을 격려하고 독려하고 후원하기 위한 용도로 사람들은 찾게 됩니다. 즉 인간의 탐욕과 욕심을 부추기는 신은 무조건으로 우상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참 하나님은 인간의 스스로 높아짐과 교만을 용납해주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도리어 위대한 위엄과 광대하심으로 인해 인간으로 하여금 코에만 의존해서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지탱하는 그런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면서 이런 차원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행색은 비록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온 우주의 지축조차 흔들어대는 위엄과 광대하심으로 가득차 있는 겁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심성은 여전히 우상적 의식으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길에 논쟁을 하는 제자들을 하시고 그들 앞에 어린아이를 하나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 누가보다도 믿음이 좋다고 믿음 대결에 나선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서 얼마나 마음이 심란했겠습니까! 또 변화산에 변화되신 후, 산에서 내려와서 제자들 보고 하시는 말씀이 "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란 누구나 약간의 가능성만 엿보이면 그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믿습니다!"라고 나서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인간의 그런 교만한 마음을 아시고, 인간들이 도저히 생각하고 싶지를 않는 내용을 담아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고 제시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주님 앞에서 기가 죽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뭔가 자신 쪽에서 시행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우상이 만들어진다는 점을 우리 예수님께서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이런 '우상찾기'란 하나님의 위엄과 광대하심을 알지 못하고 동시에 자신이 암 말기 환자에 불과함을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모습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어떤 부자가 근심하여 물러간 뒤에 제자들보고 하시는 말씀이, "부자가 천국 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나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쉬운 일일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일제히 근심이 쌓여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단호합니다. "사람은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일은 반드시 그 전제가 "인간은 하지 못한다"가 깔려 있습니다. '사람은 하지 못하는 그 일은 하나님은 해내시는 식'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흔히들, 예수믿고 난 뒤에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성도의 결을 떠나지 않고 일하십니다. 어떤 원칙을 가지고 일하실까요?
그 좋은 예가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 기드온에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기드온 사사는 본인이 사사 하고 싶어서 구원자로 나선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구원의 일은 시작되었습니다. 기드온도 자신에게 찾아온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지 의심스러워서 양털을 가지고 시험까지 했습니다. 과연 양털과 주변 땅과 차별되게 새벽 이슬이 내일 수 있는가를 놓고 하나님의 알하심을 의심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 요구조건을 다 들어주시면서 계속 기드온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구원작전에 나서게 하십니다. 32,000명이나 몰려온 군사들은 대부분 다 돌려보내고 달랑 300명만 남기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사사기 7:2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참 하나님의 일에 있어 결코 '인간들이 자기 힘으로 구원되는 것'을 용납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일평생을 교만치 않게 하시는 방식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방식은 하나님의 위엄하심과 광대하심으로 다가오셔서 성도로 하여금 자신이 자신을 지탱할 능력이 없음을 늘 명심시킵니다.
인간들은 틈만나면 교만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겸손까지 자신의 교만의 밑천으로 삼을 정도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을 이용할 생각말고 하나님을 단순하게 높이 섬기고 모실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우리의 심령이 가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재앙
2005년 11월 16일 본문 말씀: 이사야 3:1-7
3:1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과 그 의뢰하는 모든 물과
3:2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3:3 오십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공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하실 것이며
3:4 그가 또 아이들로 그들의 방백을 삼으시며 적자들로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리니
3:5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
3:6 혹시 사람이 그 아비의 집에서 그 형제를 붙잡고 말하기를 너는 의복이 오히려 있으니 우리 관장이 되어 이 멸망을 네 수하에 두라 할 것이면
3:7 그 날에 그가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나는 고치는 자가 되지 않겠노라 내 집에는 양식도 없고 의복도 없으니 너희는 나로 백성의 관장을 삼지말라 하리라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서 무척 많은 변화를 겪게 됩니다. 세상 자체가 불안정하니 우리 인간은 안절부절 어찌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세상 바깥에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 자체를 흔들고 계신 것입니다. 이 흔드심도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과 원칙에 준해서 흔드십니다.
마치 사람이 네모난 어항을 들고 흔들면 그 안에 있는 물고기들이 물결 속에서 심하게 요동칩니다. 그러면 물고기들은 그 원인도 모르는채 우왕좌왕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성도도 세상 변화 속에서 같이 흔들립니다만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오른손의 능력에 붙잡혀 있기에 그 흔들림 속에서 도리어 진정한 진리와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분명하게 파악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원칙과 법칙이 무얼까요? 골로새서 3:1-3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 성도는 이미 이 땅에서 죽은 목숨이라는 겁니다. 그러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 나라 은행에 잘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 그 어떤 변화가 발생된다할지라도 하늘나라에 안전하게 있는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땅의 일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원칙에 준해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마구 흔들어버립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는 사람이 누군인가가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 찬바람 맞고 서 있을 때에 이 성경 말씀을 들이대면 그 사람은 화를 낼 것입니다. 즉 이 세상에 있는 이 목숨 외에 다른 목숨은 없다고 우길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 어항 속 같은 세상에서 또 무슨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칠까봐 안절부절하며 삽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경우가 이런 상황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멸망의 정경에 대해서 이사야가 예언한 대목입니다. 멸망이라면 물론 노아 홍수 심판도 있고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내용들은 멸망의 상황이 자세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다. 즉 멸망할 때의 사람들의 심성이나 사회적인 소요나 갈등이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아 홍수로부터 점차 역사가 진행되면서 성경 말씀도 보다 자세하게 그 멸망의 내막을 소개하게 됩니다. 나중에 신약 시대에 오게 되면 이 세상이 결국 누구 때문에 멸망할 수 밖에 없는가 하는 점도 보여주게 됩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남기신 말씀에 대한 무시와 모독이 이유가 되어 세상은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고 확실하게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이사야 시대는 아직 그것까지는 상세하게 나타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이스라엘 내부에서 소위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아서 유대 나라도 망하고 다른 이방나라는 자동적으로 망한다는 소식 정도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손에 이사야 성경만 있고 그 이후의 성경말씀을 분실했다고 한다면, 자칫 잘못 생각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노라고 여기고, 이웃을 나름대로 사랑한다고 한다면 마치 자신은 구원이라도 받을 사람처럼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의 관점을 가지고 이 이사야를 다시 보게 되면, 완전하게 하나님 말씀을 지킬 위인이 없다는 점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멸망의 시점에서 자력으로 구원받을 자가 전혀 없음을 알기까지에는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세상관이 등장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봐서 이사야 시대 인간들의 문제점은 그들이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너무 의지한다는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흔들기에 인간들은 더 이상 자신의 본색을 감출 길이 없이 마구 발휘합니다.
눈에 보이는 인간들 상호간에 서로 이용하고 서로 기대면서 살고 싶어하는 것이 노골적인 그들의 본심들이었습니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더 이상 믿을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신은 자신들의 처지가 태평일 때나 상대할 만하다는 겁니다. 급할 때는 보이지 않는 신은 더 이상 믿음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들과 인간들 끼리 상호 믿는다면 어떤 혼란이 야기되는 겁니다. 바로 그 상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조금이라도 그 도시에는 유력한 인사로 보이면 안면 몰수하고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지도자 자리에 앉아달라는 겁니다. 그것은 그 사람을 존경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자기 목숨만 살려준다면 뭐든지 다 바칠 태세입니다.
그러자 그 지도자로 지목된 사람도 더 이상 자신은 사람들의 이용물이 되기 싫다고 합니다. 자기도 지도자 노릇 안하겠다고 나섭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희생 정신과 사랑이라는 것이 일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누가 죽든지 나만 살고보자는 겁니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 그대로 나옵니다.
즉 성경에 보면 보이는 소망은 소망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경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것도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소리도 들려나오지 않습니다.
교회라는 것도 눈에 보이는 힘의 단체로 보이니까 사람들은 그 힘을 빼먹기 위해 몰려옵니다. 즉 교회 근처에 가게를 열면 단골을 포섭하기 위해 교회에 감사헌금을 냅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스스로 소외되고 천대받아 왔다고 여기면 교회 와서 사랑받고 위로 받으려는 목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바로 이런 모습들이 오늘 본문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교회가 종말을 맞이하게 되면 가짜 교회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냅니다. 즉 자기 목숨하나 살고 싶어 합니다. 이런 사람은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과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우리의 생명이 이미 하늘에 있음을 잊지 않게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재앙의 이유
2005년 11월 23일 본문 말씀: 이사야 3:8-12
3:8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스려서 그 영광의 눈을 촉범하였음이라
3:9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하며 그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찐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
3:10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3:11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3:12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 나의 백성이여 너의 인도자가 너를 유혹하여 너의 다닐 길을 훼파하느니라
사람에게는 끝이 있습니다. 이 끝에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볼 때만 비로소 자신의 전부를 제대로 압니다. 왜 끝이 꼭 있어야 하는 걸까요? 만약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께서 인간을 친히 만드셨다면 왜 인간에게 끝이 있도록 하셨을까요? 방금 이 질문에 대해서 해답을 갖지 못한다면 자기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끝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실 때는 반드시 “다 이루었다”라는 외침과 더불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외친 장소는 오로지 십자가 위에서 뿐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앞으로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도 “다 이루셨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온전한 뜻을 나타낼 때는 오직 십자가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우리 인간의 측면에서 바라보게 되면, 그저 ‘죽음 사건’일 뿐입니다.
예수라는 한 인간의 죽음은 인간들로 하여금 오히려 동정심을 자아내게 됩니다. “좋은 사람인데 참 안됐다”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 십자가 위에서는 “다 이루었다”라고 외침이 터져 나옵니다. 무엇이 예수님과 우리 인간의 견해 사이에 차이를 낳게 할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진정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뜻 관철에서 신경을 곤두 세워가며 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진리에 관심이 있다는 사람이라면, 첫째, 과연 하나님은 계신가? 하는 점과 둘째,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에만 관심 두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분의 뜻을 안다면 그 나머지 자신의 존재 상황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았다면 천하의 모든 것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모호하거나 혼잡스럽거나 난해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간단합니다. “다 이루었다”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인간들이 죄로 망했다 라는 것을 알리는데 성공했다는 말씀입니다. 인간들은 어떻게해도 결국 죽음으로 끝납니다.
사람들이 당장 억만금을 얻기를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싶지만 실제로 억만금이 주어졌다하더라도 1 시간 뒤에 죽을 가능성에 대해서 변동이 없습니다. 금과 보석으로 온 몸을 치장하는 그 순간에도 10분 뒤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아무리 변신의 변신을 시도해도 죽음으로 끝장난다는 사실만큼은 변동이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확실성을 보여주는데 있어 십자가 상에서 달성했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한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완벽하게 저주받고 버림받는 사건입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뜻은 없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함 앞에서 우리 인간은 자신의 정체를 비로소 파악해야만 합니다. 다른 뜻은 찾지 마세요.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도 죽음을 향하여 내닫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인간들은 자신의 끝점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는 출발점만 있고 도착지점은 없는 양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는 것’이 자신의 뜻이 되고 말았고, ‘죽는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닌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은, 실은 하나님의 뜻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살고자 하는 야망을 재확인하고, 재다짐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되니 “다 이루었다”라고 외친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외침은 원천적으로 무시해 버립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의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이것입니다. ‘이 유다 나라는 망한다’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망해야 하는 존재로 이 지상에 태어납니다. 아담의 저주를 품고 태어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냥 유다 나라를 망하게 하시면 그만이지 왜 선지자를 보내어 꼭 망한다는 사실을 통보해 주시는 겁니까? 그 이유는, 유다 나라가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마치 홍해를 건너온 광야 백성들이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에는 아무도 약속에 땅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을 다 지옥 갔다고 말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지옥 갔겠습니까? 모세는 이미 천국에 와 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그들이 멸망한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죄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심판을 말해주시는 겁니다. 그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성을 나타내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새겨넣은 자기 백성을 스스로 창조해 내시고 그리고 친히 인도하고 계십니다.
예레미야 17:1-4에 보면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그들의 자녀가 높은 메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지경의 죄로 인하여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 준 네 기업에서 네 손을 뗄 것이며 또 내가 너로 너의 알지 못하는 땅에서 네 대적을 섬기게 하리니 이는 너희가 내 노로 맹렬케 하여 영영히 타는 불을 일으켰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다 나라, 즉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는 다른 점은 본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거부하고 싶어 환장을해도 하나님과 말씀은 결코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고 관여한다는 점입니다. 마치 도장 파는 사람이 철필로 매끈한 도장 위에 이름을 새기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마음에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넣습니다.
물론 그렇게 말씀이 새겨진 성도들만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압니다. “내가 결국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은 내 안에 새겨진 말씀에 비춰 볼 때 내가 죽을 죄인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그저 한 민족의 멸망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들을 멸망으로 몰아넣으신 하나님의 작용이 어떤 차원에서 진행되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들의 멸망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철필로 쓴 거룩과 공의로움이 그들 마음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 나라는 당해도 쌉니다. 심지어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이 대장질 할 정도로 사회 질서가 문란해도 쌉니다. 우리는 우리의 살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켜 주겠다는 거짓 지도자들을 물러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십자가 안에서 죽음을 말하는 “다 이루었다”의 뜻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잘못된 하나님의 뜻에 현혹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치
2005년 11월 30일 본문 말씀: 이사야 3:16-26
3:16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3:17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리라
3:18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장식과
3:19 귀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3:20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3:21 지환과 코 고리와
3:22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와
3:23 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3:24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
3:25 너희 장정은 칼에, 너희 용사는 전란에 망할 것이며
3:26 그 성문은 슬퍼하며 곡할 것이요 시온은 황무하여 땅에 앉으리라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추구하는 것과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대조적인가 하는 점을 보여줍니다. 인간들이 좋은 것을 선호하는 본능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이런 인간의 본색을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낱낱이 들추어내면서 진행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을 못 본척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발각시키면서 일을 하십니다. 그렇게해서 우리 인간들이, ‘신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면뿐만아니라 ‘내가 누군가’도 아는 계기를 갖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이 임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정체도 덩달아 알게 됩니다.
쉬운 예로,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면서 우리 인간을 그냥 구경꾼으로 남겨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작업을 통해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달아 죄를 쏟아내는 죄인인가 하는 점도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인 유다 나라의 전쟁이 임하는 일을 예언하면서 그 당시 여성들이 얼뚱한 곳에 신경 쓰고 있다는 점도 아울러 나타냅니다. 사회에서 발생되는 부가 어디에 소비되는 가를 즉각적으로 잘 나타나는 경우가 바로 여성들의 사치입니다. 사치를 하는 여성들의 행태를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벌리시는 일과 확실한 대조를 이루시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이처럼 사치를 하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은 내부적으로 무한히 결핍을 만드는 존재입니다. 뭔가 가지게 되면 그것은 또한 ‘허망’이라는 긴 그림자도 같이 끌어들이게 됩니다. 즉 뭔가 있다는 그것이 새로운 부족함을 낳습니다. 차라리 갖지 않았더라면 그것으로 인해 부족한 것도 미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뭔가를 가지고 나니, 그것으로 인해 새로운 불만족이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사태를 이사야 선지자는 넓고, 그리고 길게, 그리고 멀리 보는 안목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즉 당장 코 앞에 있는 결핍에만 매달리는 안목이 아니라 왜 인간에게 그런 결핍이 발생되느냐 하는 것까지 이사야는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주님들이 과연 이사야의 이러한 지적에 대해서 수긍했을까요?
아마 이사야에게 대단히 분노했을 것입니다. 즉 “당신도 이런 좋은 물건을 가져봐라. 그러면 이런 물건들로 치장하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과 만족을 안겨다 주는지 실감할 것이다. 선지자 당신은 아직 이런 귀한 물품들을 소유하지 않았기에 괜히 시기 나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고 따져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선지자가 인생사를 길게 보고, 넓게 보고, 깊이보고, 높이 보는 것이 나쁜 일입니까? 가져서는 아니되는 안목입니까? 죄짓는 일입니까? 제가 보기에 도리어 자기 코 앞에 있는 순간에만 만족하려고 애쓰는 그런 태도가 죄악된 것으로 보입니다. 선지자가 고급스러운 물품을 갖지 못하고 안달이 나고 화가 나서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이 차이점을 계속 말씀하고자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껍질을 벗겨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고, 인간은 여전히 자신을 덮어씌우고, 꾸미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충돌이 어디서부터 일어난 것일까요? 창세기 3:7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놀랍게도 ‘눈이 밝아’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즉 인간은 죄를 짓고 난 뒤에 비로소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 전까지는 눈이 밝지를 못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은 처음에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지금은 극히 당연해 보이는 인생관인, ‘네 인생은 너 하기 나름이다’라는 인생관은 죄를 짓고 난 뒤에나 합리화된 인위적인 인생관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처음 만들었을 때는, 인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책임 하에 존재해야만 하는 인간이었습니다. 즉 그 때는 구태여 눈을 밝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자기 인생을 개척할 필요조차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범하고 난 뒤 부터는 그때부터 자신의 인생을 자기 관리 하에 두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뭔가 부족한 낌새를 채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그렇게해서 발생된 인생은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인간형이라는 어디까지 인위적이요 인공적인 인생일 뿐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해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이런 혜택을 베푸시는데 그것이 바로 ‘멸망’과 ‘전쟁’을 통해서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모든 허울을 벗겨버리는 전략으로 나서십니다. 즉 아무리 예쁘게 머리를 했어도 대머리되게 해버린다는 겁니다. 아무리 고운 얼굴을 하고 거리에 나서도 상처투성이의 얼굴로 되게 한다는 겁니다. 화려한 옷을 입어도 그 옷은 장례식 옷으로 바뀌게 하신답니다.
물론 이것도 자기 백성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아마 이방민족 같으면 그냥 내러버려 두십니다. 멸망하든지 말든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관리하시겠다고 나선 민족이기에 전쟁을 통해서 인위적은 자기 치장을 벗겨놓는 것입니다.
신명기 8:12-14에 보면,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살면 되지 않겠냐 하지만 하나님의 이 말씀 취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잘 살든지 못살든지 간에 정작 하나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님의 언약에 있음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실 때는, ‘붙여주는’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관라하심을 알려주십니다.
광야에서의 만나도 이와 같은 취지에서 제공하신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입히시고 키우시는 그 언약과 약속을 잊지 않는 자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보다 넓게 보고, 길게 보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시온에 남은 자
2005년 12월 7일 본문 말씀: 이사야 4:1-4
4:1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오직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하여 우리로 수치를 면케 하라 하리라
4:2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4:3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4:4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성경은 전부 예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예언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성경으로서 해줄 말이 없습니다. 왜 인간들은 예언을 싫어할까요? 그것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거부하는 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아예 하나님 자체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싫어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간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뜻만 생각할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점을 노리고 예언으로 다가서시는 겁니다. 예언으로 다가서시기 때문에 인간들이 벌려놓는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을 싫어함에서 도출된 일임을 폭로시키십니다. 그리고 인간은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하나님의 예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실케 합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는 말은 그만큼 우리가 더럽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예언을 더러운 인간의 손에 맡기지를 않았습니다. 예언은 하나님에 의해서 친히 이루어나가십니다. 아무리 인간들이 노력해도 이 예언 성취에 차질이 생기지 않습니다.
예언자란 본인들이 예언자 되고 싶어서 된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하나님의 예언 성취에 동원된 자들입니다. 그들만은 하나님의 예언이 인간에 의해서 성취되지 않음을 잘 압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자신의 행함에 의해서 자기 운명이 확정되지 않음을 아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하나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면, 자신은 예언 성취에 대해서 완전히 무능하고 방해놓는 죄인임을 자인하는 바가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이란, 더 이상 ‘자기 것’이 없어졌음을 발견하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예언자란 자유자입니다. 느긋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일생이 자기 힘으로 진행으로 되지 않음을 알기에 더 이상 세상 말을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마치 집집마다 소집통지서를 배달하는 공익근무요원과 같고, 환자에게 병명을 냉철하게 전달하는 의사와 같습니다. 예수님과는 달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바짝 붙어있으면서 세상을 지나면서 벌벌 떨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은총만 바라는 세리나 창기나 소경이나 문둥병자들이나 가난한 자들은 예수님처럼 자유로운 인생을 살아 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긴 자유입니다. 이들에게 더 이상 내세울 ‘자기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만의 세계가 건재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심판과 소멸의 영이 찾아들면, 바로 하나님의 영이 남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똑바로 겨냥해서 심판해버리고 소멸시켜 버린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그동안 유다나라가 범죄한 것은 서로가 서로의 것을 가지고 상호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오직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하여 우리로 수치를 면케 하라 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전에는 자신들에게 남편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당했고, 떳떳했다는 겁니다. 마치 야곱이 에서와 한 판 붙겠다고 나서는 행세와 같습니다. 참으로 얍복 강가에서 천사가 야곱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야곱은 여전히 자기 것을 포기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얍복강 가에 하나님은 야곱의 힘의 원천인 환도뼈를 부셔뜨립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파괴’입니다.
이 파괴가 일어나고 난 뒤에 야곱은 더욱더 예언이 정해놓은 운명을 감사함으로 수용하게 됩니다. 인간의 불상사는 이처럼 ‘자기 것’이 따로 있다고 여기는데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이런 ‘자기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인 유다나라에 심판을 하고 말았습니다.
갑자가 남자가 귀해졌습니다. 여인들은 남자를 차지해서 혼자 살게 된 서글픈 팔자라는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어서 옛날처럼 자기 남편이 있는 당당한 여자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유다나라가 이러한 상황이 된 것조차 하나님의 예언대로 진행된 상황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관된 예언임을 사람들은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출생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방박사와 예수님의 가족들에게만 헤롯 군대로부터의 위험을 벗어나도록 언질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비숫한 연배에 출생된 베들레헴의 다른 아이들에게는 크리스마스가 저주스러운 순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마저 하나님의 선한 예언 성취임을 그들은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시온의 딸의 더러움을 씻어주는데는 오직 ‘심판의 영’과 ‘소멸의 영’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목욕탕에서 씻을 때는 그냥 가만 서 있기만해도 샤워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과 세제가 다 해결해줍니다. 피부층 위에 있는 때층만 씻겨가기에 피부가 손상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도의 더러움을 씻어줄 때 주어지는 성령은 아예 그 인간 자체를 날마다 죽이십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자기 것’이 없게 하십니다. 즉 성도는 ‘자기 것’이 없는 상황에서 시온의 딸이 되는 겁니다. 시온성을 수립하는 것도 결코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51:16-18에 보면,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온성에 들어갈 사람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예언대로 채택된 자들에게만 ‘남은 자’라는 입장에서 가입되게 됩니다. 즉 인간의 힘으로 그 시온성에 들어가거나 성립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성 안에 들어간 사람들의 한결같은 고백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것’ 가지고 자기 인생을 개척하려고 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날마다 자기의 것이 무너지도록 적용받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감사할 것은 그것조차 하나님의 예언성취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차츰 소멸해가고 있음을 분명한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랑에 대한 실망
2005년 12월 14일 본문 말씀: 이사야 5:1-2
5: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이스라엘을 포도원으로 비유한 곳은 이곳 이사야가 처음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과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포도나무를 중심으로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은 농부요, 자신은 포도나무요, 그리고 성도는 그 포도나무에서 맺힌 열매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과 비교해서 하나님께서는 뭔가 지가 백성에서 실망을 갖고 계심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후회하심이라든지, 자신의 뜻을 철회하신다든지, 하나님께서 실망하신다는 표현을 대하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오류없는 일 하심에 착오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일관성이 있으면 불안스러워서 하나님의 일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기 마련일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 본문 같은 경우, 분명히 포도원을 가꾸신 주체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결과로 나온 것이 기껏 들포도라면 그 책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지셔야지 그것을 인간보다 닦달내면 불합리하다고 보는 겁니다. 이 모든 안목은 어디까지나 ‘사랑’에 대해서 크게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리 생각해둔 사랑에 부합될 때만 ‘사랑’이라고 O.K 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 사랑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따로 생각해두신 그 사랑으로서 인간들의 사랑을 다 때려 부수는 작업을 실시하십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들은 하나님이 받아들인 그 사랑으로 들포도를 맺힐 수 밖에 없는 그런 속성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 차이는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서 적대감을 유발하게 만듭니다. 즉 어떤 식인가 하면, “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고 해놓고서는 들포도 맺힌 것을 우리 책임으로 돌리는 불합리적인 이야기를 하시는가?”라는 태도로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알려면 이스라엘의 근본부터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을 구출하는데부터 시작됩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들은 사랑으로 이끌어내셨습니다. 하지만 결코 히브리인들이 생각한 그런 사랑으로 이끌어내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차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되 인간들이 생각하는 ‘사랑’으로는 절대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포도나무를 심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의 결과는 좋은 포도나무가 아니라 들포도입니다. 이것은 이미 이스라엘 내부에 잘못된 ‘하나님 사랑관’이 새겨져 있음을 의도적으로 들추어내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의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했을까요? 이스라엘이 처음 생겨날 때, 하나님은 애굽 나라에 있던 히브리인들을 다루기보다는 도리어 애굽나라의 왕과 그 신하들과 애굽인들을 다루었습니다. 즉 의도적으로 하나님은 바로왕을 강퍅케 했습니다. 이 '바로왕의 강퍅‘이 없었으면 도저히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는 그런 구조 안에서 그들은 구원받게 되는 겁니다.
바로왕의 강퍅과 병행해서 히브리인들을 구원하므로서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구상한 사랑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즉 히브리인들이 사랑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쪽에서 실시하는 새로운 구원의 틀에 담기지 아니하면 도저히 구원될 수 없는 그런 처지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아무리해도 자신에게는 결코 구원받을 만한 이유가 없음을 본인들이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그런 마음을 갖고 계십니까? “나는 구원받은 권리나 자격이 전혀 없는 자야”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느냐 말입니다.
제가 한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자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은근히 고대하고 기대하는 바가 많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시절보다 사는 형편이나 여건이나 가정이 더욱 화복하고 축복을 많이 받을 것을 예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날 때, 비로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이해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을 믿고부터, 가정 형편이나 하는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어지지 않고 자꾸만 사건과 사고만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칩시다. 또한 어떤 목회자가 목회를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계획과 비전이 있는데, 이상스럽게 자신이 계획한 시나리오처럼 되어지지 않는다고 칩시다.
과연 이 세상의 어느 인간이 그런 형편에서 하나님을 계속 믿고 싶어하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은 중도에서 하나님 믿는 것을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벌리시는 ‘강퍅의 작전’입니다. 즉 애굽의 바로왕의 경우가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 어느 인간도 자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드릴 위인은 전혀 없는 겁니다.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 참된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란 철저하게 인간의 공로가 그 사랑에 섞이는 법이 없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마태복음 13:27-28에 보면,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절대로 인간의 기존 의견을 수용하는 법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원수가 뿌려놓은 가리지와 자신이 뿌려놓은 알곡을 철저하게 구분짓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알곡입니까? 그 사람은 십자가만이 참된 사랑의 최종적 내용인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로마서 5:8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로마서 11:29에 보면,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십자가 사랑만을 사랑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 인간들이 선입견으로 갖고 있는 모든 사랑의 행태를 다 부숴버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십자가 사랑을 무시하는지 너무나도 잘 아시기에 매사를 우리 뜻으로 안되게 하시는 사랑을 베푸시는 것을 저희들이 은혜인 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님이 하신 일
2005년 12월 21일 본문 말씀: 이사야 5:8-12
5:8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5:9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찌라도 거할 자가 없을 것이며
5:10 열흘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지기에는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5:11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5:12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신약성경은 사이비한 계시책이라고 여깁니다. 여기에 비해서 기독교신자들은 구약 뿐만아니라 신약 성경까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깁니다. 왜 유대인들은 신약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고해서 왜 하나님 말씀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주장하기를, 구약의 모든 성경 말씀은 택한 백성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예수라는 자가 등장해서 “다 이루었다”고 주장해 버리면 하나님 말씀이 우리 앞에 있는 의미가 날라가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모릅니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데 집착하게 되면, 오늘 본문 12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여호와의 행하심’이나 ‘그 분의 손으로 하신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에 더 관심두기 마련입니다. 즉 어느 정도로 하나님 말씀을 지켜내었는가 하는 것에 몰두하게 됩니다.
만약 이런 정신상태로 신약성경까지 대하게 되면 그 사람은 여전히 유대교인에 불과합니다. 즉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고자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내용은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다 이루심’과 우리 자신들의 ‘ 다 이루심’을 늘 비교해보라는 겁니다.
물론 기독교 신자들도 늘 자신을 생각해야합니다. 하지만 보다 의인되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왜 지독한 죄인 일수밖에 없는가를 늘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책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부동산 투기하면 하나님께서 쪽박 차게 만들고, 흔하게 파티에만 참석하려고 애쓰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친히 하신 일에 관심이 없게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구약 말씀을 대하게 되면, 일절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부동산 투기를 하지 아니하면 그것으로 곧장 하나님 말씀을 지켜낸 것같지만, 실은 그 어느 누구도 이 말씀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의 인생들의 삶이란 ‘남을 의식하며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인간 사회에서 살려고 하는 자는 남들이 보는 태도에 의식하지 아니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그 가운데서 어느 정도 공통점이 형성되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된다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통하는 것이 있어야 교류가 되고 교감이 됩니다.
인간 사회에서 산다고 하면서 모든 대화나 모임에 대해 일절 단절하고 그냥 철옹성같이 버티고 살 수는 없습니다. 공감대에 끼지 못하면 결코 그 사회 안에서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부동산 투기는 인간 사회 안에서 보편적인 대세입니다. 돈이 없는 경우를 빼놓고서는 누구나 불로소득이 주는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부동산 투기란 결국 서로들 쉽게 돈버는 것에 대해서 일단 환영한다는 공감대로 인하여 허용되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부동산 투기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있다면 이것인 이미 대세처럼 굳어져 있는 사회 안의 공감대에서 이탈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웃간의 대화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이웃들로부터 적개심을 받고, 본인 또한 이웃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질 것이 뻔합니다.
“돈을 그저 먹을려고 하고 가나한 자의 토지나 재산을 합법을 가장하여 강탈하여 온 천지에 혼자서만 독야청청하려는 자는 도적이다!”라고 식식대며, 이 사회에서 버틸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내가 갖고 있는 부동산이 갑자기 오르게 되면 나는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믿고싶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야지만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동산 투기란 인간에게 타고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눈에 보이는 토지를 할 수만 있다고 다 자기 것으로 만들어 그 속에서 홀로 우뚝 솟아날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인생승리가 없다고 여기는 것은 모든 인간들의 한결같은 바람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고 파티 열면서 자신이 가진 정렬을 불태우고 이웃과 늘 단합된 면을 보이는 것은 안정된 사회 생활의 기초를 위해서 많은 도움이 될 것이 뻔합니다. 문제는 그런 것을 통해 대인관계 유지에 열중하기에 필히 하나님이 하신 일에는 별로 관심을 가질 수 없다는 겁니다.
사회라는 것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죽어진 것이고 그냥 그 안에서 출생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커나가면 그 사회가 이미 만든 환상과 이미지를 생명의 젖으로 빨아먹고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 대해서 자신있게 의인이라고 말할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구약 말씀을 가지고 오늘날 성도에게 그대로 적용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그 어느 인간도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할 수 없음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성도란 마치 작대기가 꽂힌 아이스케이크와 같습니다. 막대기 주변에 뭉쳐져 있는 팥얼음 과자가 다 녹게 되면 결국 남는 것은 지저분한 작대기만 손에 쥐고 있을 뿐입니다. 성도의 인생도 이와같습니다.
아무리 바르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애써도 인생의 세월이 다 바람 따라 날아가 버리고 남는 것은 주님의 용서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용서가 죽을 때만 성도와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성도와 함께 있습니다. 단지 그 용서가 우리들의 분주한 인생살이로 인해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곧 신약의 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 은혜를 증거케 하기 위해 성도로 하여금 때로는 부동산 투기에 매진하기도 하고 주식 투자에 몰입하기도 하고, 늘 파티에 참여하는 것을 인생을 즐거움으로 여기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 ‘고난’입니다. 그 고난 속에는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용서만 파악되기 위해 왜 그것이 죄인가를 알게 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성도에게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로만 죄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주님이 다 이루신 십자가의 효력을 빠트리지 말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개입
2005년 12월 28일 본문 말씀: 이사야 5:13-17
5:13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 무지함을 인하여 사로잡힐 것이요 그 귀한 자는 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며
5:14 음부가 그 욕망을 크게 내어 한량없이 그 입을 벌린즉 그들의 호화로움과 그들의 많은 무리와 그들의 떠드는 것과 그 중에서 연락하는 자가 거기 빠질 것이라
5:17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먹을 것이요 살찐 자의 황무한 밭의 소산은 유리하는 자들이 먹으리라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통보하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과의 거래나 협조를 구해서 이 세상을 운영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식으로 일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인간에서 차고 올라오는 일체의 구원노력을 저지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들의 생각에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쪽에서 그 차이를 메꾸어서 구원이 성사되는 식으로 일하시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차이를 더욱더 분명하게 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십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옥이 있다”고 하시면, 우리 인간들은 오해하기를 “아 하나님께서는 우리보고 정신 차리라고 지옥 이야기를 끄집어내시는 구나”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옥은 분명히 있고, 그 지옥 채우기에 절대로 양보가 없고, 그 지옥을 위하여 모든 수단과 노력을 다 경주하겠다”하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지옥을 환영하든 싫어하든 상관두지 않고 이미 하나님께서 진행시키고자 하는 스케줄은 확립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성경 말씀에 대해서 인간들이 어떻게 해석하든지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에는 변동받지 아니함을 인간들은 그냥 받아들여야 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한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이러이러한 사람은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라는 점을 통보하는 식으로 앞으로 전개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이러한 하나님을 알아본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생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보셨는지 무조건적으로 굴복합니다. 자신의 민족과 자신의 종교까지 포기하면서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기생 라합을 두고서 야보고서 2장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의 전형적인 모델로 간주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로마 군인은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자진해서 주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겠습니다”라고 이것은 곧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전혀 인간들의 의견을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을 일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차원에서 진척시키시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후레쉬를 들고, 부엌에 있는 바퀴벌레 길과 개미 길을 비추어 보는 것과 같습니다. 후레쉬를 비추는 것은 바퀴벌레보고, “애 바퀴벌레야 제발 개미가 되어다오”라는 차원에서 비춰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아, 이것은 개미가 아니고 바퀴벌레이구나”라고 파악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망해야 될 자는 반드시 망한다는 겁니다. 망하는 이유는 마음이 높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어떻게 낮추어졌기에 구원받는 자에 해당됩니까? 신명기 8:2-3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를 유리하도록 하신 것은 마음을 낮추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높은 것이 무엇인가가 알아야 합니다. 그 당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마음이 높은 상황이란 다름이 아니라, 물 없다고 물 달라고 한 것이나 양식 없다고 양식 달라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이 높은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판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신앙좋다고 우겨도 경제 사정이 나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게 불평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느 누구도 마음이 교만하다고 평가받을 것이 뻔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누구도 마음이 낮아진 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또한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친히 마음을 낮추어지지 아니하면 아무도 마음이 낮아지지를 않습니다.
시편 49;12에 보면,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20절에 보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 또한 우리보고 회개를 독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반드시 이런 쪽으로 인도하겠다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 등장하시는 예수님이 하실 일도 바로 ‘마음을 낮추는 일’입니다. 누가복음 1:51-54에 보면,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궁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의 이 찬양은 앞으로 자기 뱃속에 있는 아기 예수님께서 장차 이 지상에서 어떤 일을 하실 분이라는 것을 미리 말해주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인간들이 보기에 이 세상에는 부한 자와 가난한 자가 분류가 된 것 같지만 실은 그 모든 기준이 무시되고 오로지 예수님에 의해 새롭게 배치된다는 겁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마지막 때에 멸망하는 자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원없이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하심과 공평하심을 소개하는 자들이 나온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사람만이 마음이 낮아진 사람입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마음을 낮출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장구치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습니다.
바로 인간들이 스스로 해내지 못하는 그 마음 낮춤을 하나님께서 친히 해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스스로 포기하시고 내리꽂듯이 십자가까지 내려갔습니다. 그곳은 모든 인간들의 실체, 즉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는 지점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주님과 만나도록 주선하시는 분이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예언의 말씀은 장차 오실 메시야 즉 예수님의 의해서 지금도 우리에게 날마다 작용시키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교회 나오면서 딴 생각없이 주님의 낮아주심에만 관심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맹렬한 진노
2006년 1월 4일 본문 말씀: 이사야 5:24-25
5:24 이로 인하여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 마른 풀이 불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5:2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 분토같이 되었으나 그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 손이 오히려 펴졌느니라
성경을 볼 때는, 환희와 감격과 즐거움과 기쁨이 충만하면서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시면서 알려주시는 교과서가 바로 성경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서도 우리는 과연, 환희와 기쁨과 즐거움과 대만족감과 감사를 느끼게 됩니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법과 말씀을 위배하고 멸시했다고 하나님께서 가차없이 자기 백성에게 저주를 퍼부으시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앞두고서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게서 환희와 감격과 기쁨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과의 영속성을 유지하고자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세상과 단절된 그 무엇으로 인해 즐거워하고 기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세상살이하면서 탐을 내었는 것을 꼬깃꼬깃 염두에 두었다가 그것을 달라고 신에게 매달리고 떼를 씁니다. 그리고 신에게 아부하기 위해 온갖 종교적인 마음가짐과 행동을 서슴치 않습니다.
여러분, 집에 수도꼭지를 황금으로 바꾸었다고해서 비로소 물이 나오는 겁니까? 아무리 호사스러운 수도꼭지라 할지라도 상수도국에서 물을 보내지 아니하면 부엌에 물은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인간들이 아무리 자신을 거룩한 모양새로 무장해도 그것으로 인해 하늘의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작 하늘의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점을 알 수 있는 것은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여인과의 만남에서 파악이 됩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물에 물길으려 온 여인에게 접근합니다. 그 여인이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을 보고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제공하겠노라고 제안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인간들이 애타게 부르짖으면서 얻고자 하는 바는 ‘아무리 먹어도 목마를 수밖에 없는 그런 것’들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인간의 이런 면을 다 아시고 인간들이 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라고 부르거나 찾을 때는 반드시, ‘인간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고 다른 것을 줄 용의가 있는 그 분’이라는 이미지로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왜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탐내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세상살이하면서 스스로 ‘결핍’이라는 것을 따로 상정해내기 때문입니다.
즉 “아, 이런 것만 좀 메워주면 금상첨화인데, 아, 이런 것이 좀 더 있었으면 나에게 더 바랄 것이 없겠는데”라고 일방적으로 결정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생각은 다릅니다. 인간에게 있어 결핍과 문제점은 인간들이 파악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 이유가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의 문제점을 세상살이에 힘들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법을 멸시하는 그런 태도로부터 비롯되는 겁니다. 예수님과 만났던 사마리아여인도 예수님으로부터 그런 제안을 처음 받았을 때는, 자기에게 당당히 그런 생수를 받은 자격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생수제공 이야기하시면서 갑자기 화제가 그 여인의 과거 이력을 들추어내자 당황하게 됩니다. 남편 5명이 있었으나 다 헤어지고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는 여섯 번째 남자라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수제공은 결코 그 인간은 그 영원한 물을 받을 자격이 있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냥 그 여인을 사랑하셔서 주시는 겁니다.
이 사랑이 사랑으로서 부각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도에 의해서 가로막히지 않고 장애물이 제거되어야 하는 겁니다. 장애물 제거는 인간의 현 신세와 주제를 제대로 알려주는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만약, 내일 모래 사형집행을 당할 예수믿는 사형수가 본다면 참으로 환희와 감격과 즐거움과 기쁨을 가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분수와 주제를 말씀을 통해서 또 한번 명확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심판의 말씀에 대해서 시큰둥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살아있는 것은 당연한 사실인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인간이 살아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 살아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시편 119:89-91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천지를 말씀으로 만들어놓고서는 그 피조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가득 채워놓으셨습니다. 마치 욕조에 물을 가득 채워놓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만약 인간이 이 말씀과 그 원리에 거스리면 이 자연세계는 가차없이 그 존재를 공격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마음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있습니다. 즉 아예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이나 하나님 말씀’이라면 사죽을 못쓰고 배격하고 싫어하고 거부하고 멸시하려는 속성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어떤 인간이 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제될 자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하신 영생의 물을 주시기 전에 그 여인의 과거를 들추어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차원에서 당연히 저주받아야 될 대상자라는 것을 들추어내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뭐가 모자라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틀어져 있는가 하는 것조차 모릅니다. 자신이 살아있는 것을 당연한 권리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인간을 저주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생수를 얻을 자격이 있음이 드러납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얻어진 것을 시시하게 보지 않는 성도가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것에 눈 돌리다가 주심의 생수에 대해서 환희와 감격을 잃어버린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