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하게 산다고 달라지는 게 뭐 있겠어요. 그런데 이것 보세요. 휠체어에 앉아 있을 수도 있고, 팔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잖아요.”
지난해 11월19일 북한산 사고 이후 두 차례 경추 수술을 받고, 입원 중 고관절 이소성골화증으로 또 한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던 김기섭씨(金起燮·45·경원대 OB)를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 정원에서 만났을 때 뜻밖에 표정이 밝았다.
그는 평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북한산 산행 중 경추 압박골절상이란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사고 이후 몇 달간 꼼짝 못한 채 병상에 누워지낸 그는 현재 재활치료 중으로, 컬럼비아스포츠웨어는 지난 9월13일 대한민국 산악상 수상식에서 1급1호 장애자인 김씨에게 후원금 200만원을 전해주었다.
“후회는 없어요. 그래도 명이 긴가 봐요. 다섯 살 때 산사태에 묻힌 걸 아버지가 구해주셨고, 국민학교 때는 연 날리다 9m 아래로 떨어졌는데 살았으니까요. 이번엔 사고 순간 끝장났구나 싶더군요. 그러면서도 앞으로 어떤 악조건이 닥치더라도 극복하면서 살아야겠다 다짐하게 되었답니다.”
코오롱등산학교 강사로서 여러 해동안 등산교육에 힘써온 김기섭씨는 암릉 개척에 관한 한 국내 최고수로 꼽힌다. 용암산악회에 이어 악우회 회원으로서 중학교 때부터 클라이밍을 해온 그는 82년 경원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해 산악부를 창립하고 산 열정을 불살라왔다. 그는 ‘한편의 시를 위한 길’, ‘별을 따는 소년들’, ‘별길’ 등 설악산에 시(詩)적인 이름을 붙인 암릉을 여럿 개척했고, 북한산 백운대에는 ‘시인 신동엽길’, ‘녹두장군길’ 등 다소 투쟁적인 이름의 암릉을 개척했다. 도봉산 자운봉의 ‘배추흰나비의 추억’도 그가 개척한 길이다.
“인문적 호기심이랄까, 안 가본 길에 대한 호기심 이랄까, 아무튼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는 암릉을 오르노라면 정말 좋아요. 별유천지비인간 대자연 속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 감동도 받고, 남들보다 먼저 경치를 둘러본다는 데 뿌듯함을 느껴요.”
그가 개척한 암릉길은 대부분 인기가 있다. 무엇보다 확보물이 잘 설치되어 있어 사고 위험이 적기 때문이다. 그는 홍천강 강변에 ‘별과 바람과 시가 있는 풍경’이란 이름의 강변 리지도 개척했다.
“개척 후 많이들 찾아 늘 뿌듯하고 지금도 보람을 느껴요. 휠체어 바퀴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만 있다면 영월 서강을 갈까 해요. 사고 직전까지 개척하다 만 강변리지가 있거든요. 정말 환상적인 리지에요. 딱 한 피치 남았어요. 제가 직접 할 수야 있겠나요, 후배들한테 넘겨야죠.”
김기섭씨는 “가난하게 살다 보니 다치지 않고 산에 다니려고 악착같이 등반했고, 그동안 위험한 곳은 하늘이 도와주셨던 것 같다”며, “다치지 않고 오래 다니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산악인들에게 당부했다.
“정말 너무 많은 분들한테 신세를 졌어요. 컬럼비아에도 고맙고요. 산악인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재활치료를 받는다는 게 어려웠을 거예요. 지금 입원해 있는 병원 재활치료실에 올라가면 인수봉 귀바위가 잘 보여요. 왜 안 가고 싶겠어요. 그럴 때마다 열심히 운동하면서 달래고 있어요.”
김기섭씨는 “큰 욕심은 없다. 소줏잔에 담긴 술을 흘리지 않고 입에 털어넣고, 담뱃불을 붙일 수 있을 정도면 일단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변함없는 유머 감각을 보여주었다.<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