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서
화랑은 선도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신궁을 받들어 하늘에 큰제사를 지냈다.
이는 중국 연나라 의 동산이나 노나라의 태산 과 같은 것이다.
옛날 연나라 부인들은 선도를 좋아하여 미인들을 많이 양성하여 그이름을 <국화>라
하였다 이러한 풍습이 동쪽으로 전해져우리나라에도 <원화>가 생겼으며.
그후 지소태후 가 이를 패지하고 화랑을 두어 나라 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법흥대왕 이 위화랑을 사랑하여 그이름을 화랑이라 하였다.
화랑이라는 이름이 이로부터 시작 되었던 것이다.
옛날에 선도들은 신을 받드는 일을 위주로 하여 나라의 사대부들도
차례로 이를 행하였다. 그뒤 선도들은 도의로써 서로 권면 하여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뽑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말미암아 생겼으니 비로소 화랑의 역사가
생겨난 것이다.
마복칠성:위화랑.아시공.수지공.이등공.태종공.비량공.융치공.등이다.
아사공 의 아버지는 선모 이고 어머니는보해이다.수지공의 아버지는 이흔이고.
어머니는 준명이다.
이등공의 아버지는 숙흔이고.어머니는 홍수이다.태종공의 아버지는 아진공 이고
어머니는 보옥공주이다.
비량공의 아버지는비지 이고, 어머니는 묘양이다.융취공의아버지는 덕지이고,
어머니는 가락국의 융융공주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법흥대왕이 마복칠성의 첫째이고 위화랑은 어머니가 .
미천하여 마복칠성에 들어가지 못햇다고 하였다.
그러나 칠성록. 보해기 를 보면 모두 이등공이 빠져 있고. 위화랑이 기재되어 있으니
어느 쪽이 옳은지 알수 없다.
이는 아마도 진덕여왕 때 알천공. 인종공. 술종공.호림공.염장공.유신공. 춘추공.등
처럼 국왕을 호위하여 국가의 대사를 의론 하던 중신이었던 것 같다.
위화랑 1세
위화랑은 염신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벽아부인이고 할머니는 청하부인 이다
어머니 벽아부인이 비처왕 (소지왕)의 총애로위화랑은 마복자가 돼었는데
세상에서 이르는 마복칠성 가운데 들었다.
화랑의 시조요 사문의 아버지이며 청아의 손자이자 벽아의 아들이로다.
살아서는 국선이요 죽어서는 부처 였으니원만한게 항상 계시어 공덕이 빛났도다.
미진부 2세
미진부는 마복질성의 한 사람인 아시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법흥대왕의 딸인 삼엽궁주이며. 꿈에 흰 학이 나는 것을 보고
미진부를 낳았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삼산공 의 달 준정이 원화가 되어 많은 낭도를 두고 있었다.
또한 법흥대왕의 딸 남모공주는백제의보과 공주의소생으로서 뛰어난 용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미진부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지소태후도 미진부를 사랑하였으므로 남모 공주의 편을들어 원화로 삼으려고 하였다.
일찍이 법흥대왕은 옥진궁주를 맞이하기 전에 그 남편이었던 영실공을 용양군 .
으로삼아 높은 자리에두고나서원화를 없애도록 하였다.
이에 준정은 영실공을 잘 섬기면서 남모공주가 원화가 되는것을 저지 하였다.
지소태후는 비록 왕의 뜻에 따라 영실공을 계부로 삼았지만 .사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미진부에게 명하여 준정의 원화를 없애고자 하였다.
그리고 낭도가 부족함을 염려하여 위화랑의 낭도를 끌어들여
숫자를 늘리기 까지하였다.
마침내 이를 질투한 준정이 남모공주를 유인하여 술을 먹인다음 강물에 던져
죽이기에 이르렀다.
남모공주의 낭도들이 이사실을 밝혀냈고,지소태후는 곧 원화제도를 폐지 하였다.
그 뒤,선화를 화랑으로 삼아 그 무리를 풍월이라고부르고,
그우두머리를 풍월주라고 하였다.
위화랑을 풍월주로 삼고 미진부를 그의 보좌로 삼았는데
얼마뒤 미진부가 풍월주가 되었다.
미진부는 남모공주를 잃은 후 다시 혼인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법흥대왕의 후궁 묘도부인과 정을 통하여 마침내 결혼하였다,
미실낭주와 미생랑을 낳았다.
온화한 안색으로 임금을 모시어 극진히 충성 하였으며 용맹으로 나라 위해 .
봉사 하여 그 공력을 다 바쳤노라.
저 묘도부인은 위화랑의 손녀로서 서로 부부가 되어 미실과 미생을 낳았으니.
하늘의 도리는 길고 길어라.
모랑 3세
모랑은 남모공주의 남동생이다.
법흥대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국공 으로서 백제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백제의 보과공주를 만나 은밀히 정을 나누었고.
다시만날것을 언약한 뒤 신라로 돌아 왔다.
얼마뒤 보과공주는 몰래 백제를 도망쳐 나와 법흥대왕을 만나러 왔다.
그리하여 궁중에 들어가 살면서 남모와 모랑을 낳았다.
미진부가 화랑이 되자 모랑을 두번쩨 지위에 두었다.모랑은 지소태후 의총애를 받아
진흥대왕9년(548)에 지소태후의 명에따라 3세 풍월주에 올랐다
풍월주가 된 모랑은 먼저간 누나 남모공주의 혼령을 위로 하였다.
모랑은 위화랑의 딸준화와 혼인하였다. 준화는 바로 이화랑의 누나이다.
모랑이 딸 준모 하나만 낳고 죽으니.마침내 이화랑이 그뒤를 이어서 풍월주가 되었다.
서라벌의 아름다운 화랑이요 풍월주 위화랑의 사위로다.
법흥대왕의 아들로 태어나니 지소태후도 그를 좋아했네.
이화랑4세
이화랑은 위화랑의 아들로 준화낭주와 함께 준실부인의 소생이다.
준실부인은 마복칠성 가운데 한 사람인 수지공의 여동생이자자비왕의 외손녀이다.
얼굴이 아름답고 문장을 잘 지어서 처음에 법흥대왕의 후궁이 되었으나,
자식이 없자 다시 위화랑에게 시집와서이화랑을 낳았다.
이화랑이 숙명공주와 함께 영흥사 에서 지내며 불도에 마음을 두니 지소태후도
이에 귀의 하였고 .정숙태자 또한 무늬 옷을 벗고계율을받았다.
이화랑의 아들 원광법사는 숙명공주의 소생이다. 숙명공주가 그를 잉태할 즈음
이화랑을 너무 사모하여 자체할수 없을 정도 였으며.
장차 화가 미칠곳을 두려워 하여 자살하려 고 한적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금부처가 나타나서 말하기를,"나는 약사불 인데 공주의 배를 빌어
살고자 한다 "라고 하므로. 공주가 곧 그앞에 끓어 앉아 합장을 하고 절을 하니.
부처가 바로 공주를 안고넘어져 마치 뱃속으로 들어 오는 듯하였다.
이때 이화랑도 공주를 더 할수없이 사모하여 자주 궁중에 들어 왔는데.
공주가 하늘을 쳐다보고 누워서 무엇인가를 안고 있다가 잃어버린 듯한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이유를 물었다.
이에 숙명공주가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부처님의 힘이다"
이화랑과 즐거움을나눈뒤 원광 법사를 낳으니 과연 대성여래 였다.
숙명공주가 이화랑의 두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원광과 보리이다.
또 이화랑의 두딸 화명과 옥명을 낳았으며 나중에 이들은 진평대왕의
후궁으로 들어가서자녀를 낳았다.
원광법사의 동생 보리는 정숙태자의 딸 만룡과 혼인하여 각간 체원 을 낳았다.
이화랑의 풍류는 계림의 맑은 이야기로다.훌륭한 가문의 후예로서 공주와 혼인했네.
금부처가 와서 의지하니 약사여래 였도다.화랑의 집안이요.원광법사의 어버이로서
수많은 국공의 친족이 만대에 무궁하리라.
사다함5세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이다.처음에 비량공이 비처왕의 완비 벽화후를 사랑하여
항상 그 뒷간에 같다 법흥대왕은 비량공을사랑하고 있으므로 이를 알고도
금하지 않았다.과연 벽화후와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아 구리지라 불렀다.
구리지는 위화랑의딸 금진낭주와 정을 통하여 토함,색달,사다함을.낳았다.
가야 정벌의 공으로 알천의땅을 물려받았다.
사다함은 부하 무관량이 공적이 많았으나 신분이 미천한 탓에 보답을 받지 못하고
죽자 그이 죽음을 매우 슬퍼한끝에 사다함은 점점 수첫해져 결국 세상을 떠났다 .
(죽어 군인에 가족을 보호한다는 명을 남겼다).
사다함은 본래 미진부의 딸 미실을 좋아 하였고. 미실도 사다함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지소태후의 명령으로 미실이 세종에게 시집 가자 끝까지 장가들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풍랑가와 청조가) 죽은뒤 미실이 그에게 많은 공을 드렸다.
(진정 미실이 사랑한분)
사다함은 세종에게 자리를부탁하고 죽었다 하나 세종은 거절하다가미실이
종형은 나를 사모하다가 죽었습니다 그가남긴 한마디 말을 들어주지 않는 다면
대장부가 아닙니다하자 허락하였다.
그날밤 미실의 꿈에 사다함이 품속으로 들어 오면서 미실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와 더불어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니.너의 배를 빌어 아들을 낳아야겠다"
얼마뒤 미실은 하종을 낳았다.
이일로 미실의 변화 많은 남자와 정을 통함.
비량공이 남긴 기상이요,위화랑의 후손이다.적을 친 공이 컸으나
스스로 볼모지만 택했도다.
저 청조산 가운데 송백처럼 길이길이 푸르리라.
풍랑가
바람이 불되 임앞에 불지말고 물결이 치되 임앞에 치지말고 어서 어서 돌아오라 다시만나 안고 보고 아아.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뿌리치리오.
세종6세
세종은 태종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소태후로 이름이 식도 부인이니
바로 법흥왕의 딸이다
미실은 왕의 총애를 믿고 더욱 방탕한 생활을 하며 설원랑. 미생랑(동생)과도 정을
통하였다.
그러나 대왕은 이를 알아체지 못하고 미실을 원화로 설원랑과미생랑으로 하여금
전권을 주었다.
진흥왕33(572)년에 태자가 보명궁에서 사나운 개에게 물려죽은 일이 벌어졌다.
미실이 의심을 두려워하여 원화자리를 사양햇다.
세종은 홀로 깨끗한 절개를 지키면서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 와서는 재상이
되었으나 담담하고 사사로운뜻이업었다.
태후에게 효도하고 대왕과 왕후와 태자에게 충성 하였으며 .
미실에게도 정조를 지켰으니 화랑중의 화랑이었다.
태후의 사사로운 아들이요.정승의 후예로서 맑고 곧으며 높은 행실은
화랑의 모범이로다.
미실시대의왕
진흥대왕.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
설원랑 7
설원랑은 위화랑의딸 금진 낭주가 사사로이 나은 아들로서 설화랑 이라고도 한다
설원랑은 풍체가 아름답고 옥피리를 잘불었으나 출신이 미천하여 낭도들이
받들지 않았다 미실이 힘으로 설원랑을 7세 풍월주로 미생랑을 보좌로 삼았다.
"저의 떨 하나, 살갗 하나도 총애하시는 미실궁주의 것이 아닌것이 없으니
다시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문노는 국선으로서 화랑의 우두머리가 되었기에 설원랑은 선화라고 불럿고
다시 미실을 다라 영흥사에서 살았 으므로 뒤에 미륵선화 라고 일컬었다.
처음부터 미실을 따른 사람은 설원랑이요. 처음부터 세종을 따른사람도
설원랑 이었으니 참으로 성대하고 지극한일이다.
미실 궁주의 신하요. 미륵 선화의 시초이다 불문에 의지 하여 그훌륭함을 더했노라. 성대한 맑은 이름 길이 청사에 남으리라. 한결같은 충성으로 하늘의 복을 열었다네.
문노 8세
문노는 비조부 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가야국 문화공주이다.
사다함은"나의 스승 문노공은 의로운 사람이다" 라고말하며 가야와 전쟁중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한다 많은 공을 세우고도 어머니가 가야 공주였기 때문에
세상에 드러나지 못함을 세종이 애석하게 여겼다.
진지왕 패위(579) 진평왕등극 으로 그공로를 인정 받아 승진하고 미실에게 총애를
받게 되어 국선 화랑의 지위를 얻었으며 .곧 8세 풍월주에 올랐다.
가야국 외손으로서 의로운 기운이 으듬이었으며
국선 화랑이 되어 우리 국풍을 크게 진작하였도다.
비보랑 9세
비보랑은 비대(법흥왕의아들) 전군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실보공주이니
곧미진부의 여동생이다.
문노의 문하에 들어가 검술을 배워 마침내 최고의 제자가 되었다 힘써 문노를 도와
국선 화랑이 되게 하였으며. 그공으로 문노의 보좌가 되었다가 9세 풍월주가 되었다.
문노가 만든 제도와 법도에 따라서 미천한 사람을 발탁하고 약한자를 구하는데 힘썻다.
세진낭주 .덕명 공주 와결혼.지명법사 를 따라 진나라에가 많은 서적을 가지고옮
법흥왕의 손주요 . 진흥왕의 손주로다.
미생 10세
미실의 동생이다 어머니는 묘도부인 미진부의 아들이다.
미실이 하종의기반을 닥으려 세움(36)세 처 첩이 만아 1백명의 아들을 둠
옥진 궁주의 손자로서 대원 신통이로다.
아들이 백명이요. 무리가 만명이로다.
하종 11세
세종 전군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미실궁주이다.
사도:진흥왕의 후비(태상태후)
사도에서 미실궁주(미진부의딸 미생의 오누이)에게로
전권이전 미실시대
만호태후;진평대왕의 어머니 진골정통의 우두머리.가야 파.정통파 .진골파 .등
세력사움치열.
청렴으로 덕행을 지켜 아름다운 이름 보전하네.
세종공의 아들로 미실낭주가 낳으셨도다.
보리12세
보리공은 이화랑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명 공주이지소태후의딸이다.
꿈에 노란 신기한 사슴을 보고 보리공을 낳음.
형인 원광법사와 더불어 힘써 공부하였으며 한시도 게흘리하지 않았다.
원광 법사가 일찍이 이르기를"나는 불도가 되고 네가 화랑이 되면.
기히 우리 가문과 나라를 편한하게 할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건복8년(591)봄 정월이었다.
만호태후의 딸 만룡 낭주를 아내로 맞이하였다13세 만호태후는 포형 (오라비)
인 숙태자를 사랑하여 만룡낭주를 낳았다.
만명 낭주:만룡 낭주의 배달은 언니 서현과 함께달아나 유신을 낳음
보리 사문은 저 위화랑공의 손자였으며.
덕이 만룡과 맞아 은혜가 바다와 산 같앗다.
용춘 13세
용춘은 금륜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도태후이니 갈문왕 용수의동생이다
진평왕시대 (용춘 진평왕을 아버지라칭함)문노의문하생
용수 ;용춘의형 태종무열왕의 아버지 진평왕 사위 (죽으면서 동생 용춘에게
부인과 자식을 부탁) 문노의 제도와 법도를 다시 세움. 선덕 공주를 받들어모심
승만의용춘형제 시기로 변방으로 물러남. 덕만공주(선덕여왕)가즉위하여
용춘을 남편으로 삼음 .용춘 은 금륜왕이 여색으로 패위함을 알고 색을 싫어함
정치에물러나 천명 공주를 아내로 삼고 태종을 아들로 삼음 (108년 태종 즉위)
갈문왕의덕은 일월과 나란히 밝았도다.
삼한의 업적이 이에 크게이루어 졌도다
호림14세
어머니는 송화공주 아버지는 복승 (확실치않음)
문노의 문하생
선도와 불도는 하나의도이다 화랑또한 부처님을 모를수없다.
유모낭주(하종의딸)와 결혼 미실궁주가 미실낭주를 입뻐하여 .귀한아들을 부탁
이에 호림에 천부관음상 을 만들어 빌도록함.선종을 둠 스스로 무림거사라칭하고
불도에 전념. 칠성우 의 일원
미실 태후의 손자로서 진골의 후예로다
불도와 화랑도의 복을 펼쳐 공이 천추에 드리웠다.
칠성우:진덕여왕때 알천공. 임종공. 술종공. 호림공..염장공.
춘추공.유신공 등 남산의 오지암에모여 국사를 의논
유신15세
서현의 아들. 어머니 만명부인은 만호태후가 사가에서 나은 딸.만명부인의 아버지
숙흘종은 갈문왕 입종의아들 서현의아버지는 무력 무력의 아버지는구형
어머니는 계봉의 딸.계화이다 무력의 할아버지는 겸지인데 겸지가 진골로 장가.
문무왕13년(673) 7월 1일서거 79세.지소부인 태종 대왕의 셋쩨딸아들 5형제를 둠 유신이 죽은뒤 머리를 깍고 칡베 옷을 입고 비구니가 돼었다.
뒷날 흥덕왕은 유신을 봉하여 흥무대왕으로 삼앗다.(유신 편은 따로 기록)
보종 16세
미실궁주가 사사로이 낳은아들. 대낯에 힌 양이 품안에 들어오는꿈을 꾸고 난후
임금을 이끌고침실로 들었으나 임금이 어려서 운우 의 정을 도울 수없었다.
이에다시 미실궁주는 설월랑을 불러 침소를 들게했다.그리하여 보종공을 낳았다.
여색을 멀리함.물고기와 새를 친구 삼아 하늘의 이치를 달관 했도다.
말하지 않아도 감화되고 꾀하지 않아도 아름다워라
적송의 자손으로는 오직 보종공 뿐인가 하노라
염장 17세
염장공은 천주공의 아들이다.그어머니는 지도태후이다 그러므로 용춘공과는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 아우가 된다.
천주공은 진흥대제의 아들이고 어머니 월화궁주는 바로 가야국 이뇌왕의
딸이니 곧우리의 우화공주기 낳았다
이뇌왕:대야국의 9세왕 시조 아진아사왕~9세 아뇌왕~16세 도설지왕~
~이후 망하여 신라에 편입(42~562)
염장과 장보고
흥덕왕이 죽자(836)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왕의 종제 균정과 그 족카제릉이 왕위를 놓고 싸웠다. 염장은 균정의 매제인 예정.김양 등과 함께균정을 받들어 왕으로 모시고자 하였다 이에 제륭은 김명과 이홍등을 거느리고와서 이들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이싸움에서 균정이 죽고 마침내 제륭이 즉위하니이가 희강왕이다.
희강왕2년(837) 8월에 균정의 아들 우징은 군사를 거느리고 청해진으로들어가
복수 의 날을 기다렸다. 우징은 그곳에서 청해진 대사 궁복(장보고)를만나 결탁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김양도 이소식을 듣고 군사를 모집하여 희강왕3년(838)2월에 청해진 으로 들어가
우징과더불어반란을 도모하였다.3월에 우징은 김양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으로 나와 희강왕의 군사와 싸워서 이겼다. 12월에 다시 군사를 일으킨
우징은 염장,효용,정년, 낙금,장건영,이순행 ,등 여섯 장수에게 군사를 나누어주고
서울로 출정 하였다.북을 울리며 진군하니 신라대감 김민주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왓으나,곧 격파되고 말았다.
민애왕2년(839)정월 19일에 염장 등이 군사를 이끌고 대구에 이르니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막악다.이를 맞아 서로 싸우다가 왕의 군사가 패하여 달아나고
왕도 겨우 도망하여 궁으로 들어 갔으나, 얼마뒤 잡혀서 살해 되었다.
이에 우징이 즉위하니 이가 신무왕이다.
그러나 그해(839)에 죽어 다시 신문왕의 태자 경웅이 즉위하니 문성왕이다.
문성왕7년(845)3월에 왕은 청해진 대사 궁복의 딸을 둘쩨 왕비로 맞으려고 하였다.
조정대신들은 궁복이 섬사람이아고 하여 반대하였다.
그러자 이듬해 봄에 궁복은왕이 자기 딸을 왕비로 맞지 않는 것을 원망하고 청해진에 웅거하여 모반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토평하자니 곧 곧 불으이 환난이 있을까 두렵고. 이를 그냥 두자니
곧 그죄를 용서할 수 없어서 근심하고 있었다.
이대 무주에 살던 염장이 이말을 듯고 아뢰었다."조정에서 만약 나의 말을 들어준다면
내가 맨손으로 직접 가서 궁복의목을 베어 오겠 습니다" 왕은 염장이 나라를 배반한
것처럼 꾸며 청해진으로 보냈다. 궁복은 염장을 좋아하여 의심하지 않고 그를 상객
으로 앉힌 다음 더불어 술을 마시며 즐겼다.
염장은 궁복이 술에 취했을때 궁복의 칼을 빼앗아 목을 밴뒤에 그 무리들을 불러모아
설득시키니 무리들은 감히 동요하지 못하고 굴복하였다.
궁복이 죽은후 이창진이 반란을 일의키자 다시 염장이 무진주 별가로써 이를 토평
하였다.
검소한 몸이면서도 부유 했고 우리의 염장공은 충직했도다
.칠성우들과 서로 사귈때에는 제 힘을 죽이고 찬동 하였도다.
삼한통일의 혁혁한 업적이야 실로 염장공에게 힘 입었어라.
춘추18세
춘추공은 무열대왕이다. 얼굴은 힌 옥과 같았고 온화한 말씨로 말을 잘하였으며,
큰 뜻을 지니고 있었다. 말수가 적었고 행동 에는 법도가 있었다.
유신공의 여동생 문희를 화군으로 삼아 장자 법민을 낳으니 그가 바로 문무제 이다.
보희가 꿈에 서악에 올라가서 큰물이 서울에 가득 차는 것을 보고 불길하다고
여기자 문희가 비단 치마와 꿈을 바꾸었다.
춘추공의 정궁부인인 보라궁주는 바로 보종공 의 딸로서 미색이었다
고소타를 낳았는데 너무나 총애한 나머지 문희를 받아들이지 못햇다.
얼마뒤 보라궁주가 해산하고서 죽자 문희가 뒤를 이어서 정궁에 올랐다.
보희를 첩으로 삼아 아들 지원을 낳았다.
이 세상을 구제한 낭주이며 영특하고 걸출한 인군이로다.
한결같이 천하를 바로 잡으니 덕이 사방 변방까지 미쳤도다.
앞으로 나서면 해와같고. 멀리서 우러르면 구름같아라.
흠순 19세
흠순공은 유신의 아우이다.
염장공 이 부제가 돼었다가 유신공의 명령에 따라 춘추공 에게 양보
흠순공은 재위 4년동안 한번도 화랑의 행정을 돌보지 않았다.
화랑의 무리를 이 끌고 밖으로 돌았다.
이에 부제 체원공이 행정을 대신하였다.
"실제로 화랑의 행정을 행하는 자가 낭주가 될수 있다"
보리낭주와 결혼 보리공의 허락
"내가 국가에 공을 세울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리공이 이를듣고 말하기를"아내를 사랑함이 이와 같으이 두 딸을 줄만하다"
하여 낭주의 동생 이단을 다시 흠순공에게 주어 세딸과 두아들을 낳았다.
싸움터에 임하면 초목이 떨고 성문에 들어서면 닭과 개조차도 쩔절 매었다.
흠순공은 여러큰 전투에 나아가 패한적이없어고 군사와 졸병들을 사랑하여
조정에서는 흠순공을 나라의 세가지 보물하나로 여꼈다.
9년 정월에 신라에온 당나라의 중 법안이 당나라 고종의 조서를 전하고 자석을
구하였다.이때 당에 사자를 파견하였는데 흠순도 포함햇다,
양도는 감옥에서 죽이고 흠순은 신라로 돌아갈것을 허락하였다.
이유는 신라의 왕 맘대로 백제의 토지와 유민들을 거두어 들인 까닭에
당나라고종이 화가나서 사신을 잡아두었다.
문무왕11년(671) 7월이 되어서야 흠순은 신라로 돌아왓다.
.문 무제 20년 2월에 보단낭주와 함께 하늘 나라로 갔다 나이가 83세이고
보단 낭주는 두살적었다 자손이 백여명 이었고 조문객이 만여명 이었으니
어찌 흠향하지 않겠는가?
유신공의 아우이며 보리공의 사위로다.
하늘에 드높은 큰공 가상한 작의 징조로다.
오직 흠순공의 공덕이 만세에 이르리라.
체원 20세
체원공은 보리공의 아들이다 흠순공을 좇아 화랑이 되었으며 염장공이
낭주일때 흠순공은 부제로써 체원공을 전방화랑에 삼았다.
체원공은 성품이단아하고 온화하며 자상하였고. 자신을 굽혀 남 밑에 있기도 하였다.
도로써 자신을 단속하였으니 화랑의 무리들이 높이 받들며 말하였다.
"위화랑과 이화랑의 후손이시여"
진골파와 가야파를 화합에 이끌었다
염장공의 아내17명:진파 5명, 원파 4명,가야파 8명,이었다
문무제 13년 (673)에 위화부 금하로써 관청에서 죽음을 맞으니. 그 때 나이 67세 였다.
아버지는 보리사문이고 어머니는 만룡낭주이다. 만룡의 아버지는
정숙태자이고 어머니는 만호태후이다. 정숙의 아바지는 진흥 대제이고 어머니는
숙명공주라고 하였다.
선화의 종손이며 문장이 맑고 께끗하도다.
청렴하고 겸소한 덕을 지녔고 나라를 다스림에 몸바쳤도다.
신선을 묻고자 한다면 공이 아니면 누구인가.
성현을 묻고자 한다면 공이 아니면 누구인가.
선품 21세
선품공은 구륜공의 아들로서 체원공을 좇아서 화랑에 들어갔다.
용모가 매우 잘생겼고 언행도 지극히 아름다웠으며 문장을 좋아하고
선도와불도를에 통달 하였다.
체원공이 누이 보룔을 아내로 삼게 하였고. 그지위를 전하였다.
선덕여왕10년(641)에 사신의 명을 받들어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병을 얻고 돌아와 죽음을 맞으니 나이가 36세 였다
아버지는 구륜이고 어머니는 보화이다 보륜의 아버지는 진흥이고 .
어머니는 사도이다. 보화의 아버지는 진평이고 어머니는 미실이아고 하였다.
보화의 아들이며 진흥대제의 손자로다.
녹봉이 있되 먹지않아.복이 자손에게 미쳤도다.
양도 22세
양도공은 모종공의 아들로 선품공보다한살적었다.
처음에 염장공을 좇아서 화랑이 되었는데 그의 나이 겨우 12세에 상하의 예절을
알 았다 선품공이 낭주가되자 체원공의 명에 따라 부제가 되었으며.
선품공을 섬김에 힘을 다해 받들고 순종 하였다.
미실의 후손이며 진평왕의 손자로다.
나라의 간서이 되었으니 공적이 천지를 덮었도다.
환난에 인하여 몸을 던져 만리 밖에서 혼을 불렀도다.
대인에게 보상할 길 없으니천지와 더불어 보전 하리라.
군관23세
군관공은 동랑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석명공주이니 진지제의 어머니이다.
양도공 보다 세살이 어렸으나.넉넉하고 원융하며 덕이 있어 지소태후를
빼어닮은 모습이 있었다 15세가 되자 재주가 있고. 체력이 남보다 뛰어 났으며.
병서 읽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 기량을 기이하게 여겼다.
*보량의 문 안에는 사람들이 구름 같고.천운의 집위에는 힌구름이 지나간다.
얀도공의 정치가 모두 보량공 에서 나옴을 노래함
석명의 어머니는 보명이니 짐지왕을 섬기던중 현조를 굼구고서 석명을 낳았다.
군관공은 실제로 황종의 증손이며 구진공의 외손이다
보현의 후예이며 금륜의 후손이라. 한결같이 양도공에 의지 하여
살고 죽음에 근원을 같이 했네.
빛나고 빛나는 공적을 세우고 하루아침에 원한을 머금었네.
오호라 하늘이시여! 이무슨 업근 이런가.
천광 24세
천광공은 수품공의 아들이다. 얼굴이 아름다운 꽃과 같고.
교태가 부인과 같았다.말이 간절하고 동작은 단아 하였다.
비록 그러하나 내면에는 의협의 기개가있어서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자를 도와
주었으며.과단하게 자신의 의지를 실행하여 상선 이라도 동요되지않았다.
천광공의 나이 14세에 흠순공 낭주 아래 들어가 화랑이 되었다.
이때 가야파의 낭두 찰인이 나이 60세를 넘어서도 오히려 대노두 에 있었고.
처첩과 자녀들이 백명을 해아렸으며 출입하고 행동함이 완전히 상선과 같았다.
천관공은 본래 찰인을 싫어하여 먼저 파직시키고 진골의 옛낭두 만덕을 대도두로 삼고. 당보는 바로 당두의 아들로서 대원파가 된다.
새로정한 규범
대노의 한계는60세.대도두의 한계는 55세.도두의 한계는 50세.
대두와 상두의 한계는 45세이고 별장은 각각 그자리의 인원에 따라서
세파를 고루 쓰며 치우거나 사사로움에 이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수품 상대등이니 바로 구륜공의 아들이다 구륜공은 반야공주에게
장가들어 수품공을 낳았다 반야의 어머니는 미실궁주요. 구륜의 어머니는 사도 태후이니 모두 아버지가 진흥 대제이다. 수품공이 천주공의 딸 천장낭주에게 장가드니 곧 지도태후의 사생아이다.천주공 도한 잔흥대제의 아들이다
대원파로 부터 나와서 가야파에 들어갔도다.
세 파 화랑을 보호하여 국가를 안정 시켰도다.
오직 공이 깨긋한 덕은 만세에 반듯하고 빛나리라.
춘장 25세
춘장공은 염장공의 셋쩨아들이다.
춘장공의 성품은 너그럽고 인자하며 덕스러 웠다. 윗사람을 받드는 데 정성이
지극하여 자신의 뜻을 앞세워 일을 행한 적이 없었다.
천광공의 명에 따라 찰두를 천거하여 대도두로 삼고,만덕을 대노두로 삼았다
가야파의 세력이 점차 다시 창성하게 되었다.
"바쁜것은 스스로 바쁜 것이요.한가한 것은 스스로 한가한 것이다.
어찌 일찍이 터럭 만큼의 더하고 줄임이 있으리오?''
아버지는 염장공이고.어머니는 하희이니 바로 하종공의 딸이다.
하희의 어머니 은륜공주는 진흥대제의 딸이라고 하였다.
천추공의 후손 가운데 이러한 성인이 있었도다.
마음을 깨끗게 잡고 인자함을 행하 였도다.
내조하는 두 미색으로 복록이 날로 새로웠네.
진공 26세
진공은 사린공의 아들이다 처음에 미실궁주가 진흥대제를 선겨 반야공주를 낳아
천광공이 적손이 되었다. 도 수종 전군을 낳았는데 뒤에 사신으로 이름을
고쳤으니 그아들이 바로 사린공이다 그러므로 진공과 천광공은 재종 (6촌)형제다.
반야공주와 아버지가 같다.
**여색을 좋아하고 탐욕이 있었으며 음탕하고 사특한 행동이 많아서 사람들로부터
덕망이 높지 못하였다.
흠돌 27세
진공이 지위에 있은지 5년 만에 흠돌에게 양보하였다
진공과 한통속이어서 많은이들이 피하였다(화랑의 체신이 바닥을 들어넴).
오기 28세
오기공은 체원공의 아들이고 .김대문의 아버지 이다.
낭주로 있은지 7년 만에 지위 에 나아가니 28세였다.
*화랑의 행정이 이미 어지러울 대로 어지러워 잠깐 사이에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원선 29세
오기공은 낭주지위에 3년을 있은뒤 부제 원선공에게 사양 하였다.
천관30세
원선공는 4년을 지내고 군관공의 큰아들 천관에게 사양 했는데
*천광공의 아내는 흠돌의 딸이다 이에 행정은 다시 흠돌 무리에게 돌아갔다.
흠언 31세
천광공은 8년이 지나서 흠돌의 아들 흠언에게 대행하게 하였다.
신공 32세
*****흠언은 5년을 지낸뒤 진공의 아들 신공에게 대행하게 하였으니 바로 흠돌의
사위이다
"주상께서 병들어 누웠으나 상대등이 문장을 쓰는 능력이 없으니, 어찌 중직을
가벼이 사람에게 주겠는가?" 라고 하며. 기거이 물러나지 않았다.
역모는 이미 은밀하게 진행 되었다 그리하여 임금이 죽자 비밀에 붙이고
발설하지 않 았으며, 사람으로 하여금 은밀히 서울 밖의 군사를 성안으로 불러 들였다.
흠돌의 무리가 군대로서 야명궁 및 군관공의 집을 포위하고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
이에 오기공이 마음으로 그들을 복종시키니 낭두들이 그역모를 오기공 에게
알려 주었다
이때 호위 군사가 적에게 많이 돌아간 것을 들은 자의완후는 크게 걱정 하였다 .
오기공이 수지, 개원 ,단원, 원사 , 용원공 등과 더블어 은밀히 사병들을 불러 모아.
성안으로 들어가서 황후를 호위 하며 적을 모두 깨뜨리고 홑뜨린 뒤,
삼도태감 으로 하여금그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크게 놀란 흠돌 등이 나아가다가
큰 궁에서 포위되었다.
그러자 서불단 진복 공이 서군사를 끌어드려 포위를 뚫고 들어가서 호령하였다.
"서울 밖의 군사가 크게 이르었다, 너희들은 적신에게 미혹된 자들이니
목 베임을 면할 수 없으리라"
이때 흠돌 등이 그무리를 속여 말하였다
"상대등 군관및 각간 진복이 은밀히 임근의 교지를 받들어 인명을 세웠다"
군관이 꼼짝 하지 못하고 포위망도 깨지니 무리들이 의심하고 서로 다투자.
진복은 소리 높여말하였다.
"왕을 모실자는 오른쪽으로.적신을 좇을 자는 왼족으로 모여라"
많은 무리들이 오른쪽으로 나아 갔다. 흠돌 등은 일의 도모가 좋지 않은을 알고
포위망을 풀고 달아나고자 하였다.
이에 오기공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역적의 무리를 크게 무너 드렸으며,
때를 놓치지 않고 서울 밖의 군사가 적군에 나아가서 세 간신을 사로 잡아왔다.
난리가 비로소 평정 되었으나 삼도들 가운데 이일 때문에 죽은자가 많았다.
자의태후가 화랑 제도를 없애라고 명하고. 오기공으로 하여 금낭적에 오른 낭도들을
모두 병부에 속하게 한뒤 직책을 주었다 비록 그러하나 지방의 화랑 행정은
옛 제도에따라 그대로 남아 있었으니 실직이 가장 성행하였다.
오래 가지 않아 그기풍은 점차 서울로 옮겨 갔고. 중신들 모두 옛 풍습을 갑자기
바꿀수 없다고 하자 태후가 이에 허락하여 득도 하는 것을 국선의 화랑의
기풍으로 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