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의 현장을 찾아서 뉴라이트의 식민지근대화론은 친일파를 옹호하는 역사관입니다. 뉴라이트의 역사관대로 하면 일제가 한국을 근대화시키는데 협조한 친일파는 정당화되고, 독립운동가는 일제의 한국근대화를 방해한 세력으로 되는 정말 웃지도 못할 역사의 전도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뉴라이트의 입에서 ‘김구는 테러리스트’라는 망발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신친일파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때 우리 민주화운동세대는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역사관을 준비하고 있는지요. 3.1절이 돌아옵니다. 우리아이들에게 3.1운동의 현장을 보여주고 싶어 준비했습니다.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 코스 : 중앙고보 숙직실(3.1운동 도화선/현 계동 중앙고 내)---한용운 스님 옛집(천도교계.기독교계,불교계 3자 통합의 장소/현 계동43번지)---김사용의 옛집터,3.1운동당시 김성수 거처(천도교계와 기독교계 처음 만남의 장소/현 계동130번지)---손병희 옛집터(민족대표 33인 첫 대면장소/현 가회동170번지)---천도교 중앙총부 옛터(천도교계와 기독교계 3.1운동 일원화 장소/ 현 송현동34번지 덕성여중자리)---이종일 옛집터(독립선언문 배포터/현 경운동88번지 수운회관 앞)--- 명월관 분점 태화관 옛터(33인이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장소/현 인사동194번지 태화빌딩 자리)---승동교회(삼일운동 학생지도부 구성과 역할 배분터/ 현 인사동137번지)---탑골공원(3.1운동 발화지)---YMCA회관(3.1운동 학생지도부 구성 초기 모임)---3.1운동 당시 종로경찰서(현 장안빌딩 자리)---경성지방법원 옛터! (3.1운동 독립운동가 재판장소)---대한문 앞(3.1운동 시위장소)---정동 미대사관저 앞(3.1운동 시위장소)---유관순 우물터(현 이화여고 내) ** 준비물 : 운동화(꼭 착용), 생수 한통, 간편한 복장, 김밥 ** 출발시간 : 2009년 3월 1일(일요일) 오전 10시(3시간 소요 예정) ** 출발장소 : 3호선 안국역 3번출구 앞 ** 참가비 : 1천원(자료복사비) ** 연락처 : 홍기원(010-5095-7258)--참가하실 분은 꼭 저에게 연락주세요. ** 대상 : 초등학생 이상이면 누구나 가능. 3.1운동 현장 장소 해설(3.1운동 준비과정에 대한 자료는 주로 <서울, 공간으로 본 역사/ 장규식 지음>을 참조했습니다. 1. 중앙고보 숙직실(중앙고 내) : 3.1운동 도화선 3.1운동의 거사준비는 1919년 1월 하순 일본 도쿄 유학생 송계백이 계동 중앙고보 숙직실로 교사 현상윤을 방문해, 교장 송진우와 함께 한자리에서 도쿄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리고 <2.8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후 현상윤과 송진우, 보성학교 출신 송계백에게서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보성고보 교장 최린과 신문관의 최남선은 재동 68번지 최린의 집과 중앙고등보통학교 숙직실 등지에서 모임을 거듭하며 거사를 모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민족자결 원칙에 입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1월 말부터 2월초에 걸쳐 여기에 참여할 민족대표를 교섭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종교계를 중심으로 거사가 모색되었는데 천도교 대표는 최린으로 되었고, 기독교계는 평안북도 정주에서 오산학교를 경영하고 있던 이승훈 장로가 유력한 후보로 떠! 철駭. 2월 7일 최남선이 편지를 보냈다. **송계백 :1896~1920.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과에서 공부했다.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와 상하이·미국에서의 한국독립 요구를 보도한 〈저팬 애드버타이저〉의 기사에 크게 자극받은 재일 유학생들은 12월 29일과 30일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주최한 웅변대회와 망년회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1919년 1월 6일에는 도쿄[東京]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어 구체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할 것을 결의했다. 이때 최팔용(崔八鏞)·백관수(白寬洙)·김도연(金度演)·서춘(徐椿)·이종근(李琮根) 등과 함께 임시실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1월 중순 국내로 잠입하여 중앙고보로 보성중학교 1년 선배이자 중앙고보 교사였던 현상윤을 찾아 갔다. 그리고 비단 수건 위에 잔 글씨로 써 사각! 모 안에 감추어 들여온 2.8독립선언서의 초안을 꺼내 보이면서, 동경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렸다. 송계백이 가져온 독립선언서 초안을 보고, 또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듣고 크게 감동한 현상윤은 이를 중앙학교 교장인 송진우와 친구인 최남선에게 보였다. 그리고 현상윤은 다시 송계백과 함께 은사인 최린을 찾아가 보여 주고, 그를 통해 손병희에게도 전달하였다. 이를 본 손병희는 “젊은 학생들이 저렇게 운동을 한다고 하니 우리 선배들로서도 좌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지금까지의 독립운동 추진 계획을 가속화하고, 나아가 다른 종교계와 접촉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독립운동을 공동으로 추진할 것을 협의한 후 1월 29일 정노식(鄭魯湜)으로부터 받은 보조금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가 거사준비를 했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유학생학우회 총회를 명목으로 4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식이 진행되었다. 유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독립실행방법을 토의하려 했으나 일본경찰의 무력개입으로 이광수를 제외한 임시실행위원 전원을 포함하여 27명이 검거되었다. 6월 26일 제2심에서 7개월 15일의 금고형을 선고 받고 동경감옥에서 복역하다가 옥사했다. 2. 계동 43번지(3.1운동 당시 만해 한용운 거처)-천도교계, 기독교계, 불교계 3자통합처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합작교섭을 마무리지은 최린은 계동 43번지 유심사(唯心社)로 만해 한용운 스님을 찾아가 불교계의 민족대표 참여를 내락받았다. 천도교계와 기독교계, 불교계 지도자들로 이루어진 민족대표의 골격이 비로소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계동43번지 한용운 옛집은 지금 아무런 문화재도 아니다. 이 집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생각한다면 정부의 조치도 이해할 수 없고, 불교계의 조치도 이해할 수 없다. 이 조그마한 옛집의 장소성을 한용운 스님이 직접쓴 글에서 한번 느껴보자. 전가의 오동(前家의 梧桐) 한용운 나의 우거(寓居)는 계동 막바지의 여두소옥(如斗小屋)이라, 지면이나 건물로 말하면 심히 협소하여 매우 갑갑할 듯하다. 그러나 그렇게 몹시 갑갑하지 아니한 이유는 지형이 초고(稍高)하여 비교적 일광을 많이 받고, 공기가 청신하여 청풍이 시래(時來)하며, 주위에 수목이 있어서 그 양음적취(凉陰積翠)가 족히 고염(苦炎)의 번민을 소각(銷却)하는 까닭이라. 그러므로 협착(狹窄)한 소옥에서 성하(盛夏)를 지냈으되 그다지 염열(炎熱)의 고를 감각치 못하였도다. 그러나 사람은 외계로부터 오는 염열의 고를 느낌보다 내심으로부터 생기는 번민의 고를 심히 감각치 아니할 뿐아니라 내심의 번민도 또한 돈식(頓息)하였느니 이것은 곧 전가 오동의 은혜가 많도다. 전가에 그 후장(後墻)을 의지하여 한 그루의 오동이 있으니, 그 높이가 옥척(屋脊)을 넘어 내 우거의 정청(政廳)에서 그 오동의 상반신을 정면으로 보게 되었도다. 달 밝은 밤에는 소영(疎影)이 종횡하여 분외(分外)의 청취를 첨(添)하고, 급우(急雨)의 시에는 우성(雨聲)이 냉랭하여 만곡(萬斛)의 양미(凉味)를 수송하며, 조하모연(朝霞暮煙)과 주음야영(晝陰夜影)에 각각 기취를 다하여 언제라도 상대하는 나로 하여금 부지불각의 가운데 스스로 내심의 번민을 잊게 하도다. 그러하면 이 오동은 어떠한 마력이 있어서 사람의 정신을 마비함인가, 그렇지 아니하면 어떠한 성능(聖能)이 있어! 사람의 번뇌를 해탈함인가. 부(否)라, 오동은 마력도 없고 성능도 없고 다만 자연일 뿐이거늘 다만 보는 사람이 선미(善美) 감(感)하여 오동화할 따름이라. 인생과 자연이 어찌 양계가 있으리오, 오동 즉 나요, 나 즉 오동이나 아여오동(我如梧桐)이 비일비이(非一非二)니라. 오동 소유가(所有家)로 말하면 그 오동이 자가의 사람은 흔히 볼 수도 없는 후면 일우(一隅)에 있어서 소유권을 제한 외에는 하등의 필요가 없는지라 반지일엽(半枝一葉)의 소유권도 없는 인거(隣居)의 내가 그 오동을 자유로 정(情)을 다하여 수용(受容)하니 이는 타인의 소유를 횡령함이 아닌가. 그러나 법률상으로는 아무 제재(制裁)가 없으니 이는 그 오동을 정신적으로는 여하히 수용할지라도 그 오동의 형질에만 손감(損減)이 없으면 법률상의 문제는 되지 아니함이니 법률의 효력은 형질에 그칠 따름임을 알것이로다. 그 주인은 이 오동의 형질을 어떠한 방식으로 실용(實用)할지라도 몇 원의 가치에 지나지 못할지라. 그러나 나는 정신상으로 그 오동의 자연을 응용하여 만념(萬念)의 번민을 위자(慰藉)하니 그 가치를 논하면 어찌 몇 원의 금전에 그치리요. 전가의 오동은 법률적으! , 형질적으로 그 주인에게 공헌하는 가치는 몇 원의 금전에 불과하나,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인가의 나에게 혜파(惠波)를 미침은 실로 금전을 초월한지라. 가령 양공(良工)이 있어서 이 오동을 베어 오현(五絃)이나 칠현(七絃)의 금(琴)을 만들고, 백아(伯牙)를 천재(千載)의 위에 일으켜서 그 기량(技倆)을 다하여 나의 방촌(方寸)의 일을 탄(彈)할지라도 내심의 번뇌를 소각(銷却)함에는 이 자연의 오동에 일보를 양(讓)하리라. 백낙천(白樂天)은 달밤에 오동의 값(價)을 첨송(添送)하였다. 하나 나는 이 글을 쓰노라. 이것도 오동의 값이 될는지. 3. 계동 130번지 김사용의 집(3.1운동 당시 김성수 거처) : 천도교계와 기독교계 처음 만난 장소. 2월 11일 이승훈과 송진우의 회동으로 천도교과 기독교 일원화 모색. 이후 양쪽의 매파 역할을 했던 송진우가 운동 일선에서 물러나 교착상태에 빠짐. ** 계동 132번지 : 1923년부터 김성수 부자 거처. 현재 김성수 기념관 있음. 4. 가회동170번지(3.1운동 당시 손병희 집)-33인이 처음 서로 얼굴을 마주한 곳. 2월 28일 저녁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3인이 서로 얼굴을 알고 독립선언식의 절차를 협의하기 위해 회합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공개적인 장소에서의 독립선언식이 가져올 만일의 사태를 우려하는 의견이 제기되어, 그 결과 당초 예정했던 탑골공원에서 평소 송병희가 자주 찾던 요리점인 인사동의 명월관지점 태화관으로 독립선언서 장소를 급작스럽게 변경하게 된다. 5. 송현동 34번지 현 덕성여중 자리(당시 천도교 중앙총부와 보성전문학교 자리)-천도교와 기독교 운동 일원화 성사 자리. 1919년 2월 21일 최남선이 이승훈의 숙소로 찾아와 이승훈과 최린의 회담이 전격적으로 성사됨으로써 기독교 측과 천도교 특의 합작교섭은 다시 급물쌀을 탔다. 이승훈과 함태영은 2월 24일 최린과 함께 송현동 34번지 현 덕성여중 자리에 있던 천도교 중앙총부 손병희를 방문하여 양측의 독립운동 일원화 방침을 최종확정하였다. 6. 수송동 44번지 현 조계사 자리(보성사 터)-삼일운동 선언문 인쇄 장소.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출판사 보성사(현 조계사 서편 경내)에서 독립선언서 2만매가 인쇄됨 7. 경운동88번지 현 수운회관 앞(보성사 사장 이종일 집터)-삼일운동 선언문 배포터. 보성사 사장인던 이종일은 2월 27일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2만매를 자신의 집으로 운반해 와 2월 28일 전국 각지로 배포함으로써 거족적인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8. 인사동137번지 승동교회-삼일운동 학생지도부 구성과 역할 배분터. 승동교회 건축물은 1904년 준공하였고, 1957년에서 증개축하였다. 승동교회는 3.1운동의 현장이 그대로 보전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를 더하고 있다. 승동교회는 대갓집 소실로 있던 여인네들과 백정. 장인이 많이 다닌다고 해서 ‘첩장(妾匠)교회’로 불렸던, 피마골 사람들의 이른바 ‘민중교회’였다. 승동교회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백정 출신의 초대 장로 박성춘이다. 그는 1898년 10월 독립협회 관민공동회의 연사로 나서, 양반사족만이 아니라 사농공상 모두를 합하여 나라의 기둥으로 삼을 때 나라의 힘이 더욱 공고해 질 수 있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여 세인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승동교회는 3.1운동 당시 학생단 거사의 거점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당시 이 교회에 다니던 연희전문의 김원벽을 비롯한 시내 전문하교 학생대표들은 1919년 2월 20일 여기서 첫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을 이끌어 갈 학생 지도부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3.1운동 전야인 2월 28일 다시 모여 학생 동원을 최종검검하고 독립선언서 배포 등의 역할을 분담함으로써 이어지는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9. 인사동194번지 현 태화빌딩 자리(3.1운동 당시 명월관 분점 태화관 자리)-33인이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장소.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33인 가운데 29인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장소다. 이 곳은 본래 반정으로 왕위에 즉위하기 전 인조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이후 안동김씨 김흥근의 저택, 헌종의 후궁 김씨의 순화궁으로 그 주인이 바뀌었다. 그리고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이후 1907년 친일파 이완용의 소유가 되었다. 이완용은 이곳에서 5년간 살다가 요정 명월관에 집을 빌려주고 떠났다. 그때부터 명월관 지점이 되었다. 태화관은 명월관 지점으로 3.1운동을 맞았고, 이후 1938년 남감리교 세계 선교부가 이완용의 소유 대지와 건물을 모두 매입했다. 선교부는 3.1운동의 장소성이 있는 건물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태화기독교사회관이라는 “조선절충식”2층 건물을 1939.7에 준공하였다. 3.1운동의 장소성으로 역사성이 깊은 태화기독교사회관 건물은 1979년 8월 재개발 ! 바람에 헐려버렸다. 10. 탑골공원-3.1운동 발화지. 탑골공원은 본래 원각사가 있던 곳으로, 대한제국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조성되어 3.1운동의 발화지가 되었다. “우리 민족운동사에서 가장 뜻깊은 날인 1919년 3월 1일을 드디어 맞이하게 되었다. 이날 새벽 이미 독립선언식을 예고하는 비라가 집집마다 뿌려졌고, 시내 주요한 곳에는 벽보가 나붙었으며, 국민을 격려하는 ≪조선독립신문≫ 창간호가 ‘독립선언서’와 함께 배달되었다. 오후 2시 정각 서울 인사동(仁寺洞) 명월관(明月館) 지점인 태화관(泰樺館)에서 손병희(孫秉熙) 등 29인은 33인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를 선포하였다. 원래 학생들과 33일이 같은 자리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자 하였으나, 원로격인 33인은 파고다공원에서 함께 독립을 선언하게 되면 일제 당국의 방해로 오히려 시위에 혼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태화관에서 별도로 선언서를 발포하였다고 한다. 독립선언식은 극히 간소하게 거행되었으니, 불교측 민족대표의 한 분인 한용운(韓龍雲)이 일어나 한국 및 한국인이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그의 선창으로 일동이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이승에서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축배를 올리며 비장한 분위기에 감싸여 오직 일념 조국의 앞날에 영광있기를 마음 속 깊이 빌었다. 다음 태화관 주인 안순환(安淳煥)으로 하여금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 일동이 독립 축하연을 여기서 베풀고 있다고 통고케 하였다. 이와 동시에 파고다공원에서도 거의 같은 시각에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이에 앞서 학생대표 강기덕(康基德)·김원벽(金元劈)·한위건(韓偉健) 3인은 태화관에 가서 민족대표 33인을 모셔 오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민족대표가 예정을 변경하여 여기에 나타나지 않으므로 기다리던 끝에 군중 속에서 정재용(鄭在鎔)[경신(儆新)학교 졸업생]이 자진하여 8각정 단상으로 올라가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꿈속에도 그리던 태극기의 모습을 다시 보는 감격과 천지를 진동하는 만세의 광경을 한 목격자는 대략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단의 정면에는 10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태극기가 그 아름답고 씩씩한 자세를 돌연히 나타내어 서울 중앙의 창공에서 포근한 봄바람을 맞아 유유하게 휘날렸다. 이때에 ‘단의 정면에는 10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태극기가 그 아름답고 씩씩한 자세를 돌연히 나타내어 서울 중앙의 창공에서 포근한 봄바람을 맞아 유유하게 휘날렸다. 이때에 군중의 머리 속은 형용할 수 없는 감격과 흥분으로 가득 찼다. 끓는 피의 붉은 물결은 전신에 가득찼고, 충천의 기백은 대지를 삼킬 듯 토할 듯, 바로 이 때다. 단상에 뛰어 오른 해주 사람 정재용은 1조각의 접은 종이를 손에 들고 감격에 넘치는 흥분한 어조로 1줄 1줄 읽어 내려갔다. “선언서,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꿈속같이 ! 고요한 장내에는 흥분에 사로잡힌 흐느낌만이 점차로 높아갔다. 읽는 이의 음성도 때로는 말귀가 명백히 들리지 못하였다. 어디선가 ‘대한독립만세!’가 우뢰같이 터져 나왔다. 장내는 천만의 병마를 몰아 달리는 듯하였다. 선명하게 인쇄한 독립선언서와 수기(手旗)는 각처에서 쏟아져 나왔다. 마치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하늘 꽃이 비오듯이. 학생들의 검은 모자는 잘 받은 풋보올처럼 공중으로 올라갔다. 미친 듯 취한 듯 장내의 군중은 어쩔 줄을 몰랐다. 처음에는 학생만으로 모이었던 군중이 어느 사이에 서울 시민·지방 농민, 발을 옮길 수 없으리 만큼 모였다.’ 이리하여 3~4천 명의 학생들을 포함하는 수많은 군중들은 자기들끼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가행진으로 들어갔다. 한편 태화관에 있던 민족대표 29명은 이날 오후 4시경에 헌병과 경찰 80여 명에 의해 자동차에 실려 남산 중턱 왜성대(倭城臺)에 있는 경무총감부로 호송되어 갔다.“ <독립운동사 중에서> **김원벽 : 1894(고종 31)~1928. 3·1운동 때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 목사의 아들로 경신학교(儆新學校)를 거쳐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다가 그뒤 연희전문학교로 전학했다. 당시 기독교청년회의 간부로서 지도력을 발휘하여 학생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컸다. 1919년 2월 22일 연희전문학교 3학년 재학중 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의 권유로 3.1운동에 참여했다. 2월 25일 정동교회에서 학생대표들에게 3월 1일의 시위 일정을 전달하고, 28일 이갑성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 1,500부를 배부하여 살포하게 했다. 3월 1일 강기덕(康基德)·한위건(韓偉健) 등과 함께 학생들 중심의 만세운동을 지도했다. 이어 3월 5일 서울역 광장에서 강기덕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시위군중을 지휘했다.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 한때 연희전문학교! 에 재직했고, 신생활사(新生活社)·시대일보사 등에서 일하다가 요절(夭折)했다. ** 강기덕(康基德, 1886년 5월 4일 ~ ?) 함경남도 원산 출생이다. 1919년 3.1운동에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당시 그는 보성전문학교 재학 중이었으며, 박희도, 이갑성을 통해 민족대표 33인과 연결된 뒤 학생 단체들과 모의하여 탑골공원 시위를 조직했다. 3·1 운동 거사 당일, 민족대표들이 당초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를 낭독하기로 한 약속을 갑자기 바꾸어 태화관에 모여 있자 학생 대표로 태화관에 찾아가서 항의했다. 이들이 체포된 뒤에도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과 함께 중등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후속 시위를 주동하다가 3월 5일 서울역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아 복역했다. 이후에도 1927년 함남기자연맹이 기자대회를 주최하려다가 경찰과 충돌하여 시위가 발생한 함남기자대회 사건에 연루되었고, 1930년대에는 신간회 회원으로서 독립 운동을 계속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입북한 것이 확인되었다. 1956년 6월까지 교화소 분소에서 구금되어 있다가 1956년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가 결성될 때 가담했으나, 이후 함경북도 방면으로 이주하였다는 설 외에는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다. 한위건 : 1896 함남 홍원~1937. 가명은 이영식(李永植)·이광우(李光宇)·이철부(李鐵夫).필명은 이철악(李鐵岳)·광우(光宇)·김건(金健). 1917년 정주의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1월 초순부터 김원벽(金元璧)·강기덕(康基德)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모의했다.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한 운동에 합류하여, 3월 1일 시위에 중학생들을 동원한 그는 일제의 검거를 피해 4월 초순 신백우(申伯雨)와 함께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성립되자 내무위원에 선출되었고, 5월에는 함경도 출신 의원으로 임시의정원에 참여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와 결별한 후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주간신문인 〈신대한 新大韓〉을 발간했다. 1920년 귀국했다가 곧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21년 이동휘(李東輝)의 주도로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결성되자 유진희(兪鎭熙)·장덕수(張德秀)·최팔용(崔八鏞) 등과 함께 내지간부로 선출되었다.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과에 입학한 그는 최승만(崔承萬) 등과 함께 도쿄[東京] 조선기독교청년회를 주도하는 한편, 도쿄 조선유학생학우회의 총무 겸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23년 학우회 강연단의 일원으로 귀국했다가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서울에서 재경성일본유학생대회를 개최해 도쿄 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東京地方罹災朝鮮人救濟會]를 결성했다. 그해 10월에는 도쿄로 가서 조선인희생자조사회를 조직해 학살사건을 조사하는 한편, 〈학살〉이라는 팜플렛을 집필했다. 1924년 귀국해 그해 10월 〈시대일보〉 이사로 일했고, 1925년 3월 〈동아일보〉로 옮긴 후 정치부장이 되었다. 9월에는 홍명희(洪命熹)·안재홍(安在鴻)·백남운(白! 南雲) 등과 함께 조선사정조사연구회(朝鮮事情調査硏究會)를 결성했다. 1926년 정우회(正友會)에 가입했고, 같은 해 12월 결성된 제3차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을 역임했다. 그뒤 민족협동전선체인 신간회(新幹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창립대회에서 간사로 선출되었다. 1928년 2월에 개최된 조선공산당 제3차 당대회에서 검사위원장에 선출되었으나 그해 7월 조선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9년 양명(粱明)과 함께 계급투쟁사를 조직해 마르크스-레닌(ML)파의 당재건운동을 지도했다. 이 시기 〈계급투쟁〉에 이철악이라는 필명으로 〈조선혁명의 특질과 노동계급 전위의 당면 임무〉 등의 글을 발표했으며, 고경흠(高景欽)의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와도 관련을 가졌다. 1930년 1월에는 광주항일학생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개최된 조선인대회에 안창호(安昌浩)·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참여했다. 1930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면서 화북지구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1931년에는 북평반제대동맹(北平反帝大同盟)에 가입하고 이름을 이철부로 고쳤다. 1933년 왕명(王明)의 좌경노선에 반대해 진정한 당의 볼셰비키화를 주장한 '철부노선'(鐵夫路線)을 제기했다. 이후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조직관계를 단절당했다가 1936년 왕명 노선이 비판받게 되자 당으로 복귀했다. 1936년 허! @ 성위[河北省委] 서기 겸 톈진 시위[天津市委] 서기로 유소기(劉少奇)·팽진(彭眞) 등과 함께 활동했다. 이후 〈화북봉화 華北烽火〉·〈톈진 여성〉·〈민중항일구국보〉 등 반공개 간행물의 출판을 주도하다가 1937년 7월 병사했다. **정재용[鄭在鎔, 1886.11.6~1976.12.31] 1886년 11월 6일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났으며, 경신중학교(儆新中學校)를 졸업하였다.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뒤,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손병희(孫秉熙) 등의 민족대표와 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 등의 종교계 대표, 김원벽(金元璧)·강기덕 (康基德) 등의 학생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것을 알고 약 5,000명의 학생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날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 장소를 인사동(仁寺洞) 태화관(泰華館)으로 옮기고 나타나지 않아 군중들이 혼란에 빠지자, 팔각정 단상으로 올라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에 격앙된 수천 명의 학생과 군중들은 만세를 외치며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일로 같은 해 8월 체포되어 평양(平壤) 감옥에서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하였다. 출옥한 뒤에는 독립운동단체인 의용단(義勇團)에 참가하여 서광신(徐光信)·이기춘(李起春) 등과 함께 항일운동에 진력하였다. 11. 3.1운동의 전개 “삼월일일 오후 2시 반에 학생 삼사천명은 경성 종로통에 모여 군중이 부화하자 여러 대로 나뉘어 일단은 덕수궁 대한문 앞에 이르러 한국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일시 대한문 안으로 침입하였다가 다시 대한문 앞 너른 마당에서 독립연설을 하였고, 일단은 경성우편국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시 남대문정거장 앞에서 의주통으로 나아가 불란서영사관에 이르고, 일단은 창덕궁문 앞으로 가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일단은 조선보병대 앞으로 가서 그 영문 안으로 들어가려하다가 못하고 또 대한문 앞의 단체에서 나뉘인 일단은 미국총영사관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다른 단체 약 삼천명은 총독부로 향하려 함으로써 본정통에서 이것을 막어 운동은 일시 표면으로는 진정되었고 군중 중에서 괴수로 인정할 만한 자 일백삼십명을 체포하였으며, 처음의 소요가 진정된 후 일일 오후 8시 경 마포전차종점 부근에 약 일천명이 모였고, 또 11시 쯤에 야소교 부속 연희전문학교 부근에 학생 약 이백명이 집합하였으나 얼마 안있어 헤어졌고 2일 영시20분에 종로네거리에서부터 약 사백명이 만세를 높이 부르면서 종로경찰서 앞으로 지나가매 경찰서에서는 이것을 제지하고 괴수로 인정할 만한자 이십명을 체포하였는데 나머지 군중은 모두 헤어졌더라. 그러한데 이 군중의 다수는 노동자요 학생도 더러 섞여 있었고, 삼일의 경성은 전일 매우 고요하여 훈련원장제장의 장식은 성대 무사히 마치었고, 삼월 사일에는 각관공사립학교에 결석 생도가 많고 혹은 한명도 출석하지 않은 학교가 있었는데 그 원인은 불량학생들이 이번 시위운동에 참가치 아니하면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거나 또는 부형이 위험을 염려하여 출입을 금하고 혹은 삼월일일 소요 ! 커 고향으로 돌아간 자가 많은 까닭이더라.“<1919년 3월 7일 자 매일신문 보도> ** 경성우편국 : 현재 한국은행 앞 중앙우체국 자리. ** 남대문정거장 : 현재 서울역 자리. ** 불란서영사관 : 현재 정동 창덕여중고 자리. ** 조선보병대 : 현재 경복궁 앞 정부청사 자리. ** 미국총영사관 : 현재 정동 미국대사관저 자리. ** 총독부 : 현재 남산 예장동 리라초등학교 자리. ** 본정통 : 현재 중앙우체국 정면 오른쪽 길이 본정통 입구 자리. ** 마포전차종점 : 현재 마포구 마포동 148번지 불교방송국 앞이 마포전차종점 자리. ** 연희전문학교 : 현재 신촌 연세대학교 자리. ** (삼일운동 당시)종로경찰서 : 서울YMCA건물 옆 장안빌딩 자리. ** 훈련원장제장 : 현재 을지로5가 훈련원공원 자리. *** YMCA회관 1919년 1월 27일 중앙YMCA회우부 주최의 대관원(종로구 관수동 144, 중국음식점)모임을 계기도 학생단지도부 태동. YMCA회관은 1908년 12월 준공. 1950년 전쟁으로 소실. 현YMCA회관은 1960년부터 1967년에 걸쳐 준공된 건물이다. *** 3.1운동당시 종로경찰서 1900년 준공된 한미전기주식회사가 1915년 일본인 경성전기회사로 넘어간 이후 한미전기주식사옥을 1915년부터 1929년 8월까지 사용. 이 건물이 종로경찰서로 쓰일 때 김상옥 열사가 1923년 1월 12일 폭탄을 투척했다. 이 건물은 6.25로 소실되었다. 그 자리에 장안빌딩이 들어섰다. *** 구 경성지방법원 자리(종로구 공평동163번지 현 제일은행본점 자리) 1920년 7월 정동에 본격적인 법원이 세워지기 전에 법원자리. 통감부가 1908년에 건물 지음. 이 건물은 1929년 9월부터 종로경찰서가 이전해와 사용했다. 해방이후에도 1957년까지 계속 종로경찰서로 사용했다. 하지만 신신백화점이 현 제일은행본점 자리에 지어지면서 헐렸다. 6.25때도 살아남은 중요한 역사유적이 파괴되었다. |
첫댓글 잘 다녀오셨나요? 저는 지금에사야 봤는데..
최정순님의 열정!! 경이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