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죽산안씨세효천장후(書竹山安氏世孝薦狀後)> - 기우만(奇宇萬,1846~1916)
1931년 간행된 기우만(奇宇萬,1846~1916) 선생의『송사집(松沙集)』22권에「죽산안씨세효천장(竹山安氏世孝薦狀)」의 발문이 남아있다.
전의이씨(全義李氏,1822~1873)의 묘지명(墓誌銘)
안규용(安圭容,1860~1910)의 행장
이재공파 / 송학종중 / 오치문중의 죽산안씨 21세 서헌(瑞軒) 안규용(安圭容,1860~1910) 어른의 본생 어머니 전의이씨(全義李氏,1822~1873) 부인과 그녀의 장남 안규채(安圭采,1857~1888) 공의 효행을 천거하는 글로 짐작된다.
안창환(安暢煥,1827~1873) 어른은 전의이씨(全義李氏)와 슬하에 장남 안규채(安圭采)와 차남 안규용(安圭容)과 2녀을 두었다. 안규용은 숙부 안국환(安國煥,1844~1873)의 계자가 된다.
세효천장(世孝薦狀)이란 대를 이은 효행을 천거하는 문서를 뜻한다. 즉, 효행 천장(孝行薦狀)을 뜻함
서죽산안씨세효천장후(書竹山安氏世孝薦狀後) a_345_540c
安君圭容從吾遊數十年。吾見其爲先之誠。不計夷險。能人所不能者。非止數事。其爲人好仁而惡不仁。吾謂無家庭擩染。焉有是哉。及讀其世孝薦狀。始信其有自來矣。蓋其先夫人李氏自在父家。柔順恭敬。安詳寡默。父母惜其不爲男子子。及其歸竹山安氏。爲圭容大人暢煥嘉耦。敬執婦道。事舅姑如事父母。和悅以樂其志。溫凊以安其處。甘旨以養其軆。其有不安節。色憂心沮。不離寢處。嘗老姑疾革。祝天願代。血指以延數日縷。及終天年。自初終至克襄。哀毁過度。二祥至喪餘。誠敬備至。處娣姒以恩。敎子女以嚴。御婢僕以寬。求古賢夫人。蔑或遜焉。蓋其天稟有過人者。而亦見其君子刑于攸及。及其生圭采。穎慧夙就。幼如成人。及入小學。凡遇古人至行。欽賞而屢復焉。其善事二親。允爲是母是子。見者無不以王延董生稱之。親癠迎醫合藥。靡誠不殫。血指延晷。喪盡其哀。祭盡其誠。撫養幼弟。敎以義方。雖其資質殊異。而其受敎於李夫人者。不可誣也。多士矜賞。鄕道有薦狀。益見公議之可徵。聽卑之天。庶或其表厥宅里。以樹風聲。而圭容謂見今賊臣執國命。不忠之輩。安能知孝子。雖得據例褒典。亦足羞也。以待天定則可矣。圭容此言。不愧爲乃母之子乃兄之弟。嘉歎而書其後。
(번역문 - 안재중)
안규용(安圭容,1860~1910) 군과 내가 종유(從遊)한지도 수 십 년이 되었는데, 그 동안 조상을 위한 그의 정성을 보아왔다. 순조로웠던 경우도 있었고 험난했던 경우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보통사람이라면 할 수 없었을 일이지만, 중단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했다. 그는 사람 됨됨이가 어진 것을 좋아하고 어질지 않은 것을 싫어했다. 제대로 된 가정교육이 몸에 젖지 않고서 가능한 일이겠는가. 대를 이은 효행을 천거하는 효행 천장(孝行薦狀)을 읽고 보니,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기록을 볼 수 있어 비로소 확실해졌다. (그의) 생모인 전의이씨(全義李氏,1822~1873)는 성격이 유순하고 공손하며, 편안하고 세심하며 말수가 적어 친정 부모님께서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길 정도였다. 성장한 후 죽산안씨 집안으로 시집을 와 안규용(安圭容)의 생부 안창환(安暢煥,1827~1873) 공과 혼인하여 공경하고 받드는 부도(婦道, 며느리가 지켜야 하는 도리)를 익혀 시부모 모시기를 친정 부모와 같이 하여, 두 분 모두 평화롭고 편안하시도록 마음을 쓰고,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하도록 모셨으며, 항상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했다. 명절에 수고로움이 있었어도 얼굴색이 변하거나 도리를 어기지 않았다. 두 분이 잠자리에 드시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으며, 일찍이 늙은 시어머니의 병이 깊어지자, 대신 할 수 있도록 하늘에 빌었다. 손가락에 피를 내어 몇 일간의 연명(延命)을 구했다. 천수(天壽, 타고난 수명)를 다하고 운명하시는 날까지 지극하게 봉양했고, 몸이 심하게 야윌 만큼 슬퍼하였으며, 소상(小祥)과 대상(大祥)에 이를 때까지 상복을 입는 등 정성을 다해 공경했고 준비물을 갖추는데 힘을 다했다. 손윗 동서와 손아랫 동서들에겐 은혜롭게 처신했고, 자녀들은 엄하게 교육했다. 집안의 노비들은 관대하게 통솔했다. 예로부터 일컫는 현부인(賢夫人)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타고난 기품(氣稟)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그녀의 아들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장남 안규채(安圭采,1857~1888)는 어려서부터 남보다 뛰어나고 슬기로워 일찍 깨우쳤는데, 어린 나이에도 어른스럽게 행동을 했다. 마침내 소학(小學)을 공부한 후에는, 무릇 옛 사람의 착한 행실을 직접 보는 듯하여, 여러 차례 칭찬을 받았고, 양친을 잘 섬겨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할만 했다. 어버이가 병이 들자 좋은 의사(醫師)를 찾아 합당한 약(藥)을 써서 병구완했고, 손가락에 피를 내어 연명(延命)을 구했다. 상(喪)을 당했을 때는 극진히 슬퍼했고, 제사(祭祀)는 정성을 다했다. 홀로 남은 어린 동생을 사랑으로 잘 돌보고 길렀으며, 의방지훈(義方之訓,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교훈)으로 교육시켰다. 아들(안규채)의 자질(資質)이 아무리 남달랐다고 해도 어머니(이씨부인)로부터 받은 가르침인 것임을 속일 수가 있겠는가. 호남 유림의 효행 천장(薦狀, 천거하는 문서)에 더하여 여럿이서 의논하여 증명하니, 하늘이 낮은 곳에서 하는 소리도 듣게 될 것이다. 안규용(安圭容) 군이 설명하기를 “나라의 운명을 쥐고 있는 불충하는 적신(賊臣)의 무리들이 어찌 효자(孝子)를 알아보겠습니까. 법전(法典)의 규정(規定)에 따른 근거를 얻는다 해도 이는 수치(羞恥)입니다. 하늘이 정해 준 것을 기다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다. 안규용 군은 이같이 말했지만, 그런 (훌륭한)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것과 그런 (훌륭한) 형님의 동생이라는 것을 매우 칭찬하며, 문서의 뒤에 이 글을 짓는다.
(아마추어 번역문입니다. 잘못된 곳이 발견되시더라도 양해 바랍니다.)
첫댓글 대단히 감사합니다. 죽산안씨 저불문중(인와공문중)으로 저의 집안 어르신의 효천장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