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여사가 그 재떨이에 맞았던 모양이었다. 그런 얘기를 하는 가련한 여인의 어두운 얼굴을 보니 '얼마나 다쳤느냐'는 질문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박정희를 싸고도는 측근들의 부정부패와 도덕적 타락상에 대해서도 잘 알 뿐 아니라 그 때문에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한번은 내가 청와대로 육여사를 방문하고 돌아가려 할 때 여사가 내게 말했다.
-"2층 비서실장 방에 들러 이 실장에게 인사하시지요. 그이한테 잘 못보이면 안되잖아요."
"안 합니다. 언젠가는 이후락이 때문에 이 나라가 망할 겁니다."
육여사는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나의 말을 부정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이번에 HR(이후락)이 나더러 [경향신문]사장으로 오라고 해서 한국에 나가게 됐습니다."
"어째서 이후락이가 [경향신문]사장을 임명합니까?"
-"모르셨소? [경향신문]은 실질적으로 PP(박정희)건데 지금은 이후락이가 대신 핸들하고 있 는거요."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최치환은 자기 말대로 서울로 가 경향신문 사장에 취임했다.
71년 10월 나는 서울을 방문했는데, 이환의(당시 MBC 사장)로부터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그는 [경향신문] 정치 부장을 지낸 사람이라 만났더니 "MBC 특파원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신문기자지 방송기자가 아닌데 마이크 잡고 잘 할 수 있을까요?"
-"문 선배는 잘 해낼 겁니다."
"그나저나 MBC는 누구 겁니까? 그것도 정부 겁니까?"
-"절대 아닙니다. 우리 MBC는 주식 이 모두 개인 주주들에게 분산되어 있어요."
한 의원이 칼 앨버트 하원의장실을 방문하기 전날 그의 비서실장 에머진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박 대통령의 사위 한병기라는 사람이 앨버트 의장 면담 신청을 해 와서 조사중입니다. 그가 진짜 박 대통령의 사위입니까 ?"
이런 경우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인가. 그에게 "한병기는 박정희가 숨겨 놓은 딸의 남 편" 이라고 구구히 설명해야 할 것인가. 나는 간단하게 답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사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 인명 카드에는 결혼한 딸이 없는데 어떻게 된일입니까?"
입장이 곤란해진 나는 다음과 같이 둘러댔다.
"복잡한 사정이 좀 있는데, 어쨌든 박 대 통령의 사위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김동조 주미대사의 부인 송두만 씨에게 물어보세요."
이런 곡절을 거쳐 한병기 의원은 황호을 공사와 함께 앨버트 하원의장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동화통신 한창섭 기자가 그 자리에 나타나 "나는 박대통령의 사위인 한병기 의원의 친척" 이 라면서 한 의원과 함께 들어 가겠다고 주장해 함께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에머진 여사는 "두 사람이 같은 미스터 한이라 친척이라고 하는데 진짜 친척입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하여간 앨 버트 하원의장 방에서 한 의원은 5분 정도 인사 겸 면담을 가지고 박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 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는데 앨버트 의장은 "만약 그런 심각한 사태가 사실이라면 내가 박 대통령 입장 에 있었어도 비상사태를 선포했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말을 가지고 한창섭 기자는 "미 하원의장 앨버트가 한병기 의원과 만난 자리에서 박 대 통령의 국가 비상사태 선포를 적극 지지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내가 보내지도 않은 엉터리 기사를 왜 내 이름으로 내보냅니까? 계속 그런 식으로 하실 거면 나는 언제든지 그만둘테니 다른 유능한 기자를 보내세요."
인사 방문 자리에서 사담으로, 그것도 단서를 붙여 한 발언을 정치적 입장이 분명한 말로 둔갑시켜 보도하는 자가 어떻게 기자 신분으로 활동하고 있느냐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 야당 대 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김대중 의원이 워싱턴을 방문했다. 우리 특파원들을 그의 처남 이성호 씨 집에 초청받아 김대중 씨와 환담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김대중 씨의 특별보좌관 이었던 유기홍 박사 가 우리에게 물었다.
-"신문을 보니 앨버트 의장이 비상사태를 지지했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 자리에는 한창섭도 참석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쏘아 붙였다.
"미스터 한, 그런 허위날조 기사를 보내서 특파원들뿐 아니라 앨버트 의장까지 망신시키지 마시오. 그거 국민을 속이는 짓 아니오?"
"...."
"그리고 당신이 언제부터 한병기의 친척이야?"
-"같은 한가니까.."
"앨버트 의장실에서 그게 사실이냐고 조회해 왔는데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되겠어? 제발 이런 일 좀 없었으면 좋겠어."
얼마 후 나는 MBC 박근숙 보도국장으로부터 사신을 한 통 받았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김대중 씨 같은 사람' 앞에서는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해서도 안 된 다는 말인가.
해가 바뀐 72년 봄, 대사관 파우치(외교행낭) 편으로 이번에는 이환의 사장의 사신이 날아왔다. "문 선배, 제발 사람 좀 잘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는 지금도 내가 간직하고 있다.
사실 한창섭 기자에게 내가 싫은 소리를 한 것은 앨버트 사건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한 기자가 미국에 초기에 나는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즈음 통신사 간의 극심한 경쟁 때문인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앨버트 의장 발언 기사 같은 허위날조 기사를 쓰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71년 4월 박정희와 김대중 후보가 맞붙은 7대 대통령 선거 전날, 워싱턴발 한창섭 기자의 기사가 미 국무성을 놀라게 했다.
"폴 스카트란 미국의 저명한 칼럼니스트가 쓴 보도에 의하면, 닉슨 행정부는 이번 대통령 선 거에서 박 대통령의 당선을 확신하고 있다."
한국 대통령 선거날 아침에 미 국무성에 들렀더니 국무성 관리들이 번갈아 나에게 찾아와서 물었다.
-"폴 스카트라는 미국기자를 아는가?"
"들어보지 못했다."
-"어떤 기자인지 찾게 되면 좀 알려달라."
나는 폴 스카트가 누군지 궁금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니 조그마한 지방지에 칼럼을 쓰 고 있는 노인이었다. 나는 그에게 전화로 물었다.
"한창섭 기자 기사를 보고 전화드립니다. 당신은 어떤 정보에 의해서 닉슨 행정부가 박 대통령의 당선을 확신하고 있다는 칼럼을 쓰셨습니까?"
한창섭의 폴 스카트 인용 기사가 나간 며칠 후 최규하 외무장관이 워싱턴에 왔다. 그는 국 무성 관리와 만난 후 특파원들을 앰프레스라는 중국집에 초대했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최규하 장관, 김동조 대사, 황호을 공사, 권오 기 동아일보 특파원, 조세형 특파원 등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뒤늦게 한창섭 기자가 나타나 우리 테이블에 끼어 앉았다. 우리 옆자리에는 이상호 중앙정보부 공사, 최응태, 신동원, 김동희 참사관 등과 다른 기자들이 앉았다.
나는 한창섭을 보자 다짜고짜 몰아 붙였다.
"미스터 한은 언제부터 공화당 대변인이 되었어요? 대통령 선거 전날 어떻게 그 따위 허위 기사를 보도할 수가 있어요?"
동석한 기자들 중 몇몇도 이구동성으로 한창섭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러나 한창섭은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최규하 장관이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문 여사, 한 번쯤 봐주시 지 그래요."
김동조 대사도 거들었다.
-"문 여사가 화가 나니 대단하네요? 자, 최 장관도 모셨으니 우리 밥이 나 먹읍시다."
순간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이상호 중앙정보부 공사와 눈이 마주쳤다. 못마땅한 안색으로 나를 째려 보고 있었다. 나도 질세라 쳐다보는데 이상호 공사 옆자이에 앉아 있던 김동희 참사관이 눈짓을 하면서 "참으세요" 했다.
그 후 한창섭 기자는 동화통신이 자진 폐간하자 김용식 외무장관의 주선으로 합동 통신 뉴욕 특파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76년 코리아 게이트가 한창일 때 한창섭은 박스 기사로 '문명자 는 친북' 이라고 써 갈겼다. 나에게 공개망신을 당한 보복을 그렇게 한것이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다 시 하기로 한다.
제 3장 - 육영수와 함께 확인한 박정희의 평창동 주색잡기 안가
당시 나는 서울에 와 있었다. 바로 나흘 전에 있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개회식에서 박정희 가 개회사를 읽던 중 대회장에 높이 솟아 있던 태극기 깃대가 부러져 "꽝"하는 소리와 함께 태극기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사건이 있었다. 그 얼마 전에는 육여사가 다니던 절에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나 절이 온통 불타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이 박정희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 아닐가 해서 유신정권은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취임식이 끝난 후 나는 육여사에게 말했다.
"두 분은 드디어 덴노헤이까(천황폐하), 고 구헤이까(황후폐하)가 되셨군요."
그것은 물론 죽을 때까지 계속 대통령을 하게 된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빗대어 한 말이었다. 그러나 육여사는 나의 진의를 못 알아듣고 단지 휘황한 휘장을 두른 자기 부부의 모습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 후, 나는 서울 정동에 있는 MBC 사옥에 갔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엘리베이터가 서지 않는 층이 있었다. 나는 함께 탔던 한 기자 에게 물었다.
"왜 그 층에선 안 섭니까?"
-"내려서 말씀 드리죠."
편집국이 있는 층에 내려서 그는 조용히 말했다.
-"거기는 5.16 장학재단 사무실이 있는 층입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가 서지 않습니다."
"5.16 장학 재단이 왜 MBC 사옥에 들어와 있습니까? 그리고 엘리베이터는 왜 서지 않구요?"
-"사실 이 MBC는 박통 겁니다. 그리고 그 사무실은 박통 은퇴 후의 사무실로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그 즈음 나는 육여사에게 박정희가 이후락의 주선으로 주색잡기를 즐기는 안가를 제보한 일 이 있다.
내가 그 안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신진자동차 사장 김창원의 부인 OOO씨(늘 미시즈 김이 라고 부르다 보니 그녀의 이름을 안타깝게도 기억하지 못한다) 덕분이었다. 60년대 말부터 신진은 이후 락이 밀어주는 몇 개 기업 중의 하나로서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그 여세를 몰아 신진자동차는 69년 4 월 [경향신문]의 경영권까지 장악했는데, 그때 나는 [경향신문]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한구석으로 나를 데려간 이 공사 부인이 나에게 물었다.
-"문 기자님. 저여자 어떻게 알아요?"
"왜요? 우리 회사 사장 부인인데."
-"이상하네,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술장사하던 여자가 틀림없는데요."
나는 그 날 저녁 김창원의 부인에게 '자갈치시장'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전혀 스스럼 없이 대답 하는 것이었다.
-"맞아요. 그 때 나 술장사 했어요."
나는 이 시원시원한 여성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지난날에 대해 거침없이 얘기해 주었다.
듣고 보니 기가 막힌 로맨스였다. 그러나 그토록 열렬한 구혼 끝에 결혼했지만 결혼 후 김창원은 사 업이 번창하면서 외도가 심해져 그녀의 속을 무척 썩이고 있었다. 김창원의 집은 세검정에 있었다. 72년 서울에 갔을 때 김창원 부인의 점심 초대로 나는 그 집에 갔다. 들어가 보니 집 규모가 더 어마어마했다. 정문 쪽에 사랑채 격인 영빈관 같은 건물이 있고 정원 건너 안쪽에 가족들이 거처하는 안채가 있었는데, 이 두 건물은 정원 밑의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집에 사는 사람 들은 지하통로로 왕래하므로 밖에서는 도무지 이 집 사람들의 동정을 알 수가 없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김창원 부인은 점심 식사를 하며 여러가지 얘기를 털어놓았다.
-"이후락이는 정말 나쁜 놈이에요."
"아니 이후락이가 봐줘서 신진이 그만큼 큰 것 아닙 니까? 김 사장은 나이도 아래인 이후락이를 '형님' '형님' 하면서 깍듯이 모신다던데..."
김창원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창문을 열고 나를 불렀다.
-"저기 담장이 둘러쳐진 저 집이 뭐하는 집인 줄 아세요?"
"뭔데요?"
-"저 담벼락 안에 이후락이가 주말이면 기생. 탤런트들을 불러놓고 대통령을 모시고 노는 안가가 있답니다. 저 집은 대문부터 안방까지 자동장치로만 열리게 되어 있는데, 문 손잡이나 수도꼭지까지 금으로 돼 있 답니다. 이후락이가 자기가 봐주는 기업주들하고 노상 즐기는 데도 저기고..."
"저 집을 대체 언제 지었답니까?"
-"이후락이 비서실장 때 지었답니다."
"대체 어떤 여자들이 드나드는데요?"
-"죽은 정인숙이도 왔었고, 영화배우 Y도 드나들고 스튜디어스도 있고, 심지어 육여사 단골 미용사까지 불러다 즐긴답니다."
나는 집에 돌아와 육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육여사님,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러나 청와대는 안 되니 다른 데로 나오시지요"
"그러니 저하고 세검정에 가 보십시다."
그래서 나는 육여사와 같이 세검정으로 갔다. 문제의 안가가 있는 언덕배기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육여사가 내리자 그 앞 구멍가게 주인여자가 놀라서 뛰어나왔다. 육여사가 내게 물었다.
-"그 집이 어디예요?"
"저 담벼락 보이시죠? 그 안이 안가랍니다. 이후락이가 온통 금으 로 도배를 해놓고 재벌들하고 대통령 모시고 밤마다 여자들하고 노는데 랍니다."
그 때 그 담장을 바라보던 육여사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쩌면 이럴 수가' 하 는 비애에 찬 표정이었다. 나도 못된 일을 많이 한 셈이다.
-"그 날은 아침부터 보슬비가 내리고... 날씨가 이상했어요. 그 양반이 그렇게 죽으려고 그랬는지."
따지고 보면 박정희. 이후락으로 인해 부귀영화를 누린 여인이었지만 그녀의 가정을 파괴한 것도 그 들이었으니, 그들을 그토록 싫어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73년 1월 초 하와이에서는 한국인 이민 70주년 기념 행사가 있었다. MBC 본사에서는 갑자기 미국으 로 돌아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 이 행사를 취재하라고 했다. 육여사 대신 당시 대학생이던 딸 근혜가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하와이에 도착해서 보니 KBS측에서는 최 방송과장을 취재 단 장으로 해서 카메라 스탭들이 대거 와 있었다. TBC에서도 도쿄 특파원이 카메라 스탭들을 데리고 먼저 도착해서 하와이 총영사관을 중심으로 사진찍기에 바쁜 상황이었다.
CBS 카메라 스텝들을 데리고 근혜 양이 비행기 트랩에서 내리는 장면을 찍기 위해 도착 지점 가까이 로 들어가려는데 공항 보안관이 사진을 못 찍게 되어 있다고 제지했다.
"그게 누구 지시입니까?"
-"한국 총영사관측의 요청입니다."
"우리 사진 기자가 사진을 못 찍겠다고 하니 두 분은 제발 근혜 옆에서 좀 떨어져 있으세요."
그 리고 근혜 양에게 말했다.
"근혜야, 저쪽에 있는 분들은 새벽부터 나와 몇 시간 동안 너를 기다린 교포들이다. 가서 인사해라."
근혜 양은 한복 차림의 교포들에게 다가가서 일일이 깍듯이 인사하며 악수를 나눴다. 그제서야 교포들은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근혜가 유숙할 호텔은 카하라 힐튼 호텔이었다. 그 날 오후 3시에 주미대사관 이재현 공보관장이 주선한 미국 신문.TV 기자들과의 회견이 있었다. CBS, NBC, ABC TV 카메라들이 동원되었다. 회견이 시작될 무렵 근혜를 따라온 청와대 의전실 비서가 갑자기 카메라맨들에게 자동 녹음을 하지 말라고 했다. 카메라맨들이 가만 있을 리가 없었다.
"왜 녹음을 못 하게 하는가. 무성이라면 기자회견 하나마나다. 사전에 얘기라도 해 주었으면 TV 카 메라는 동원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이재현 공보관장이 어쩔 줄 몰라하면서 논리도 잘 닿지 않는 이유를 들어 이러쿵저러쿵 설명하자 무 거운 TV 카메라를 메고 와서 설치해 놓았던 카메라맨들은 화를 벌컥 내며 '갓 뎀' 하면서 카메라에 붙 어 있던 마이크 선을 떼어 버리고 몇 사람은 방을 나가 버렸다.
갑작스럽게 녹음을 못 하게 한 이유 를 나중에 듣고 보니 어이가 없었다. 근혜의 영어 실력이 드러날까봐 그랬다는 것이다. 그 날 근혜는 기자회견에서 유창하지는 못 해도 재치있게 답변했다. 과잉 충성파들이 문제였던 것이다.
-"근혜야, 고단하지?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 많이 했다."
근혜가 답했다.
-"아니예요. 장관님께서 더 피곤 하시겠어요."
민 장관은 "나중에 만나자"면서 방을 나갔다.
나는 도착 기사를 보내러 호텔로 돌아왔다. 국제전화로 기사를 불러 준 후 나는 MBC 보도국 기자에게 물었다.
"한국 정부를 대표해서는 민 장관이 참석했고 근혜는 육여사를 대신해서 여기 와 있는데, 근혜의 공 식 호칭은 뭐라고 해야 하나요?"
보도국측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문 특파원, 별다른 정답은 없습니다만, 앞으로 기사 보낼 때 근혜양의 호칭은 반드시 '대통령 영 애 근혜 양'으로 해 주십시오."
"아니, 박근혜 양 하면 됐지, 한국에서 근혜가 대통령 딸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대통령 영애 근혜 양'은 너무 길어서 내가 말하다가 잊어버릴 수도 있잖아요?"
-"당신이 없는 동안 큰 일이 하나 생겼어."
"무슨 큰일인데?"
-"당신도 알다시피 민 장관이 아까 기자들 앞에서 근혜에게 해라를 했잖아. 그게 문제가 되었단 말 이야."
"아니, 그게 무슨 큰일이야? 어느 미친놈이 그걸 가지고 말썽을 부려?"
-"민장관은 그게 각하 귀에 들어갈까 봐 지금 고민중이란 말이야."
나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옆에서 조성옥 씨까지 "정말 큰일났다" 고 걱정했다. 그래서 나 는 물었다.
"아니 그런 걸 가지고 트집을 잡는 얼빠진 사람이 대체 누구요?"
모두들 선뜻 이름을 대려 하지 않았다. 나는 어림짐작으로 말했다.
"아, 근혜를 수행해 온 이 뭐라더라, 그 자가 범인이구나?"
그제서야 모두들 그렇다고 했다.
한심한 일이었다. 당시 박근혜는 서강대 학생이었고 민관식은 문교부 장관이었으니, 스승과 제자 사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이 학생에게 해라 했기로서니 그게 무슨 문제 될 일이란 말인가.
나 는 마시던 커피를 그냥 두고 근혜의 방으로 올라갔다. 근혜는 그 날 밤 열릴 리셉션에 간다고 한창 머 리를 세팅하고 있었다. 근혜는 깜짝 놀라면서 가운 차림이라 죄송하다고 했다. 나는 다짜고짜 근혜에게 물었다.
"근혜야, 나도 너보고 존대말 할까? 존대말이 듣고 싶니?"
근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문 기자님, 무슨 말씀이세요? 존대말이라니요?"
나는 밖에서 벌어진 일들이 과잉 충성분자들의 장난임을 직감했다. 나는 '반말'을 둘러싼 해프닝을 근혜에게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일로 말썽이 일어나는 것은 정말 문제다. 서울에 가면 네가 먼저 어머니 아버지께 있었던 사 실 그대로 말씀드려라."
근혜는 울상이 되어 말하는 것이다.
-"문 기자님, 정말 왜들 이러지요? 주위 사람들이 너무들 해요. 제가 부모님께 그대로 말씀 올리겠 어요."
그 날 저녁 리셉션에서 근혜는 나에게 말했다.
-"문 기자님, 제가 어머니께 전화해서 있는 그대로 말씀 드렸어요."
그 때만 해도 근혜는 순진 한 대학생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후 그녀는 어머니가 하던 일을 도맡아 공식 석상에 나서서 활동했다. 그러다 보니 무슨 총재 무슨 총재 해서 직함도 많아졌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녀는 오랜 칩거 생활 을 청산하고 야당 부총재로 활동하고 있다. 그 모습을 텔레비젼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문득 과거의 '순 진한 대학생 박근혜' 가 그리워 진다. 장기 집권이 배출한 아첨꾼들은 20년 세월 동안 그녀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으리라.
나는 물었다.
"남편은 무슨 일을 합니까?"
-"재일교포 사업가에요."
나는 그 때 남자아이가 누군가와 매우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바로 정일 권이었다.
정인숙이 귀국 후 70년 3월 17일 한강변에서 시체로 발견되면서 박정희와의 관련 여부로 전국이 떠들썩 했을 때, 나도 워 싱턴에서 사건의 진상을 취재하고 있었는데, 마침 워싱턴 한국대사관 입구에서 노진환과 마주쳤다.
"이것 봐, 미스터 노, 당신 여권 좀 봅시다."
내 말은 정인숙이 죽었을 때 노진환이 미 국에 있었는지 한국에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여권에 찍힌 출입국 도장을 좀 보자는 뜻이었다. 노진환은 황급히 주머니에 서 여권을 꺼내 펼쳐서 보여 주며 변명했다.
-"이것 보세요. 정인숙이가 죽었을 때 나는 미국에 있었어요. 나는 그 사건과 타이밍이 안 맞아요."
아마 다른 사람 같았으면 여권을 꺼내 보이는 짓 같은 것은 않았을 것이다. 노진환은 그처럼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성격이었다.
71년 3월 4일 프리덤 볼트 오퍼레이션(한.미 공수기동훈련) 취재차 귀국할 때 나는 이 신문을 가지 고 서울에 갔다. 프리덤 볼트 오퍼레이션은 팀 스피리트의 전신이라고 할 한.미 합동 군사 훈련이다.
워싱턴의 한국 특파원들은 탱크도 싣고 다니는 미 공군 수송기 C-150 편으로 서울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노스 캐롤 라이나의 한 공군기지에 모였다. 한국 특파원들은 공짜 비행기 타고 서울 간다고 좋아서 보따리를 한 짐 씩 들고 왔다. 그런데 미군들이 우리 특파원들에게 한꺼번에 예방주사를 대여섯 대씩이나 놓는 바람 에 모두들 녹다운 되고 말았다.
오산공항을 거쳐 숙소인 조선호텔에 도착 했을 때 정일권의 비서인 김종하(전[신아일보]기자)가 나 를 찾아왔다.
-"총리께서 문 기자님이 오신 것을 신문에서 보시고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십니다."
정일권이 이처럼 자기 인맥을 관리한 저변에는 '언젠가는 나도' 하는, 대통령 자리에 대한 야망이 깔려 있었다. 나는 그가 사석에서 "한 사람의 졸병이 권력을 잡는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아마 그는 죽을 때까지 그 꿈을 버리지 않았던 것같다.
이처럼 한국에 오면 정일권으로부터 종종 초 대를 받았었지만, 71년 당시만큼은 나를 만나자는 이유가 정인숙 사건 때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워 싱턴 포스트] 기사의 취재원이 나인 것을 짐작한 것 같았다. 나는 나대로 정일권을 만나서 진상을 추궁 해 볼 생각으로 약속 장소로 갔다.
잠시 후 정일권이 측근 한 사람과 함께 나타났다. 그런데 정일권의 태도가 걸작이었다.
-"문 기자, 나는 정인숙과 딱 한 번 잤는데 그 아이가 내 아들일리가 없소. 나는 이미 불임 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몸이오."
나는 들고 간 [워싱턴 포스트]를 그녀에게 보여 주며 물었다.
"이 사건 아세요?"
그런데 70년 후반 정일권의 이 현숙한 부인은 세상을 뜨고 만다. 얼마 후 정일권이 재혼을 했는데 새로 장가든 부인과의 사이에 3남내를 두었다. "불임수술 했다는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았는가" 하고 따져보고 싶었는데 정 일권 스스로 제 발이 저렸는지 "불임수술을 풀었다" 고 변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인숙의 아들 정성일은 지난 90년 학국을 방문했다. 그는 정일권에게 자기를 아들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정일 권은 비서를 시켜 4천만원을 주고는 "돌아가라"고 했다고 한다. 정성일은 결국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확 인 소송까지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일권은 말년에 암에걸려 94년 타계했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것은 5공 시절 서울 하이야트 호텔에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 그는 "전두환 만큼은 나쁜 놈"이라고 했다.
제 1장 71년 이희호 . 패트리셔 닉슨 백아관 회동 비화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이 문제부터 물어봤다.
"김 의원을 포함한 야당 의원들이 여당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설이 있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예, 사실입니다. 그 자금은 관례화되어 있는 것이고 야당측이 분배받을 권리가 있는 성격의 자금이 기 때문에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받았습니다."
김대중과의 첫 만남이 유쾌하지 않았던 이유는 또 있었다.
그가 데리고 온 엄영달이란 인물 때문이었다.
엄영달은 4.19 당시 일본 도쿄의 주일 한국대표부 2등 서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조국에서 전해진 4.19혁명의 열기 속에 도쿄에서도 학생, 주재원 교포 할 것 없이 군중들이 한국대표부로 쳐들어 갔다. 당시 와세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여원]의 도쿄 지국장을 맡고 있던 나도 그 속에 끼여 있었다. 우리는 일제히 "유태 하(주일 대표부 공사)나와라" 하고 소리쳤다. 유태하 공사는 철저한 이승만 충성파로 알려져 평판이 대 단히 나빴다.
그 때 엄영달이 필자의 눈에 띄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미스터 엄, 유태하 어디 갔지?"
그러자 엄영달의 대답이 기막혔다.
"아, 그 XX?"
어제까지 직속상관으로 모시던 사람에게 대뜸 육두문자를 쓰고 있었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그에게 쏘았다.
"우리는 유태하에게 욕설을 할 수 있지만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어. 의리도 없는 놈!"
엄영달을 만난 것은 그 때 이후 처음이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미스터 엄은 어떻게 해서 김 후보를 따라왔어요?"
-"김대중 후보가 통역을 필요로 하시기에..."
"그 사람을 잘 알지도 못하는 데다 또 나는 학국 신문의 특파원 자격인데 특정 정치인을 어떻게 돕 습니까?"
유기흥 박사는 밤 10시가 넘도록 계속 자기 주장을 역설하다 돌아갔다. 그런데 별 말이 없던 남편이 나에게 말했다.
남편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지난 유감을 털버리고 김대중 의원을 돕기로 했다.
선거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김대중 후보 부부를 미국 정.관계의 유력 인사들과 만나게 하는 것이 절실 히 필요했다.
"사라, 한국의 독재자 박정희가 이번 선거에서 승리하면 영구집권을 꾀할거야 야당이 당선 돼야 한국이 민주화 될 수 있어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사라는 기꺼이 자신이 초청한 인사를 변두리 쪽으로 보내고 자기 테이블에 김대중 씨 부부 를 앉혀 주었다. 나는 중간쪽에 배정받은 내 좌석을 정일형 의원에게 양보하고 뒤로 가서 앉기로 했다.
콩그레셔널 디너는 ' 블랙 타이 디너'였다. 즉 남자는 턱시도, 여자는 롱드레스로 최고의 정장을 해야 하는 자리였다. 이희호 여사는 한복을 입으면 되지만 김대중 씨에게 턱시도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1월 28일 아침 나는 김대중 씨 부부를 예복 대여점으 로 데려가 턱시도를 빌려 입힌 후 쉐라톤 파크 호텔로 향했다.
"미시즈 닉슨,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야당 대통령 후보를 만나 주십시오. 그녀는 미국 의 스칼렛 칼리지를 졸업했고 오랫동안 YMCA 총무로 일한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나는 페트리셔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 한국하고 인연이 있지요?"
-"예에스, 헬렌 김(김활란)의 초청으로 이화여대를 방문했던 일이 있어요."
그녀는 반색을 하며 이화여대 방문 당시의 좋은 기억들을 열심히 얘기했다. 패트리셔는 그늘진 듯한 표정과 바싹 마른 체구 로 인해 까다로워 보이는 인상을 풍겼지만 직접 이야기해 보니 매우 차분하고 인간미가 있는 여성이었 다. 12세 이후로 어려운 환경에서 고생을 많이 하며 자랐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손 좀 봅시다. 우리 동양에서는 손금으로 사람의 운명을 점칩니다."
그리고 그녀의 생년일시를 물어 사주를 짚어보니 태어난 해와 날, 시에 천권(天權)이 셋이나 들어 있었다. 나는 해피 록펠러가 듣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페트리셔에게 말했다.
"미시즈 닉슨, 당신 손금과 사주를 보니 당신이 차기 퍼스트 레이디가 될것으로 믿습니다."
"그게 당신의 운명입니다."
-"그래도 해피 록펠러 앞에서 그녀의 기를 죽여 준 것이 고마웠어요."
드디어 디데이닌 71년 2월 3일. 내 손을 잡고 백악관 정문에서 기자실까지 걸어가는 이희호 여사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문마다 총을 든 경찰이 지키고 있는 삼엄한 분위기였다. 실제로 백악관 경호팀은 다람쥐 소리 정도만 나도 발사할 태세였다.
드디어 이희호 여사와 패트리셔 닉슨은 백악관 집무실에 서 손을 맞잡았다. 패트리셔 닉슨은 이희호 여사의 손을 감싸쥐고 진심으로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후에 패트리셔는 나에게 "쉬이 이즈 원더풀" (She is wonderful)이라고 했다.
나는 김대중 후보 일행이 워싱턴을 떠나는 날, 공항에서 이희호. 패트리셔 회동 사진을 전달하며 " 닉슨측 입장도 있으니 공개하지 말고 반독재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데 사용했으면 좋겠다" 고 부탁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사진이 며칠 후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당황한 민주공화 당측은 주한 미 대사관에 격렬히 항의했다. 주한 미대사관측은 미 국무성에 이희호 여사가 백악관을 방 문했었는지를 문의했다. 당시 국무성 한국과장은 도널드 레이너드. 그는 백악관의 방문객 명부를 확인 하고 주한 미 대사관에 통보했다.
-"문 기자님, 이 사실에 대해 아십니까?"
"아니오 미국 대사관에 물어 봤어요?"
-"미 국무성에서는 이런 사실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 사실이 없다면 없는 거겠지요."
중앙정보부 요원은 '틀림없이 문명자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라는 심증을 가지고 나를 떠보기 위해 온 듯했다. 그러나 내가 너무나 태연자약하게 모르겠다고 하니까 의아해 하면서 돌아갔다.
그런데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얼마 후 육영수 여사의 비서 나은실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 마가렛트예요."
나은실은 플로리다에 유학했었는데 미국 이름이 마가렛트였다.
-"우리 사모님께서 문 기자님을 꼭 점심 초대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잠깐만 기다리세 요."
나은실은 내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육여사를 바꾸었다.
-"문 기자님,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얼굴 좀 보고 싶어요. 문 기자님 좋아하는 조개된장국 아욱 넣고 끓여 놓을 테니 점심 잡 수러 오세요."
"고맙습니다만 지금은 정신이 없습니다. 취재중에는 나가기 힘드니 미국 사람들 가고 나서 찾아 뵙지요."
나는 프리덤 볼트 오퍼레이션이 끝나고 나서 출국하기 전날 청와대로 갔다. 나은실이 나와 맞으며 부탁했다.
-"쥬리, 우리 사모님께 세상 돌아가는 얘기, 쥬리가 아는 것 전부 좀 말씀 드려 줘."
"네가 하지 그래?"
-"나는 그런 용기도 없고.."
"알았어."
육여사는 약속대로 아욱된장국을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성품처럼 맛깔스러운 점심 식사 였다. 나는 지은 죄(?)가 있는지라 되도록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는데 그 때마다 육 여사는 여러 가지 음식을 내오게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대만에서 가져왔다는 수박까지 잘 먹고 난 후 드디어 육 여사가 은근히 물어왔다.
-"이희호 여사가 닉슨 부인하고 만난게 사실인가요?"
"나는 모르지요. 그거야 이희호 씨에게 물 어보세요."
-"김동조 대사가 '이 일은 문명자 기자가 주선한 걸로 안다'고 보고해 왔어요."
"그런 보고라면 나도 합니다."
나는 화제를 짐짓 딴 데로 돌리느라 정인숙 얘기를 꺼냈다.
"제가 미국에서 죽은 정인숙을 만나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러세요?"
"한미부인회라고 미국 남자들하고 결혼한 한국 여성들 모임에 초청돼서 왔더군요. 모자를 푹 눌러쓴 사내아이를 데리고 왔길래 아이 아버지는 뭐 하냐고 물었더니 재일동포 사업가라고 합디다."
-"네에 , 그래요."
"[워싱턴 포스트] 기사에는 그 아이 아버지가 정일권 총리라고 나왔던데요?"
얘기중에 육여사는 못내 다시 궁금한지 또다시 닉슨 부인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문 기자님, 이희호 여사와 닉슨 부인이 만난 게 진짜 사실인가요?"
"글쎄 저야 알 수 없지요. 그러나 이번에 워싱턴에 돌아가면 그런 일이 있었나 없었나 알아봐서 다음에 오면 알려 드릴께요."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귀국했을 때 육여사는 나를 다 시 청와대로 불렀다. 물론 이희호.닉슨 부인 회동의 진상을 알고 싶어서였다. 나는 말했다.
"제가 가서 알아봤더니 만났다고 합니다."
-"국무성에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하던데요? 합성사진 아니예요?"
"우리나라에서도 외무부에서 영부인께 '이런 일 있었습니까. 저런 일 있었습니까' 하고 물을 수 있나요? 로저스 국무장 관도 못합니다."
-"김동조 대사 말대로 문 기자님께서 혹시 주선하신 것 아닙니까?"
"육여사님, 생전에 내가 거짓말한 것, 진실로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편히 잠드세요."
그리하여 이희호 여사와 패트리셔 닉슨의 면담이 대체 어떻게 가능했었는가 하는 문제의 진상은 그 부부와 나만이 아는 일로 땅에 묻혔다.
제 2장 김대중 납치 보도, 주미 중앙정보부 이상호 공사와의 악연
"김대중 취재가자" 하니 "나도 살아야겠다"던 주미 특파원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김대중은 일본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다. 유신이 선포되던 72년 10월 17일 마 침 그는 치료차 일본에 가 있었다. 다음 날 그는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사실상 정치 망명을 선언한다.
11월 13일 김대 중 씨는 도쿄를 떠나 미국으로 왔다. 해외에서 유신 반대 투쟁을 벌이고 박 정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 기에는 일본보다 미국이 적격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MBC 박근숙 보도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문 특파원, 거기 김대중 씨가 있죠?"
"네 어제 왔어요."
-"김대중 씨하고 점심 같이 먹었어요?"
"김대중 씨가 저녁에 왔는데 무슨 점심을 같이 먹어요?"
-"여기서 그렇게 보고가 됐는데..."
"누가 말도 안 되는 보고를 했군요."
-"앞으로 김대중이나 김형욱 같은 사람들은 좀 만나지 말도록 하세요."
"아니 기자더라 이 사람 만나지 마라, 저 사람 만나지 마라 하면 취재를 어떻게 합니까?"
다음 날 MBC 이환의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다짜고짜로 "문 선배, 나 좀 살려 줘" 했다.
"왜 그래요?"
-"중정(중앙정보부) 때문에 살 수가 있어야지."
"난 언제든지 특파원 안 해도 되니까 당신이 알아서 해."
이환의 사장은 나를 MBC에 끌 어다 놓은 후 "왜 문명자를 자르지 않는가"라는 중앙정보부의 등쌀에 상당히 고생했다고 한다.
한민통 결성식에서 앞으로의 활동 방향을 놓고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미국 내에는 이른 바 '선 통일 후 민주화'를 주장하는 일단의 통일운동 그룹이 존재했다.
한민통 결성식을 시작하기 전 돌연 임창영 박사가 미리 준비한 성명서를 좌중에 나누어 주었다. 충 격적인 내용이었다.
"나는 이북 정부의 초청으로 곧 평양을 방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미 국무성이 아직 허가를 안 내주고 검토중에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비록 개인 자격의 방북이라지만, 그가 한민통의 일 원이므로 김대중을 비롯한 반유신운동 전체가 북한의 사주를 받는 집단인 양 조작할 수 있는 빌미를 중 앙정보부에 줄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나는 임 박사에게 물었다.
"박사님이 북한을 방문하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갈라진 우리 국토가 통일되고 민족이 하나 되기 위해서는 이북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서방세계로도 진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북은 서방외교 문 제에서는 초년병입니다. 나는 유엔 대사를 지냈으므로통일을 위해서 이북에 서방외교를 강화할 것을 조 언하고 방법을 가르쳐 주고자 합니다."
김대중 씨는 "중앙정보부가 박사님의 방북을 민주화운동을 음해하는 데 악용할 것이니 방문을 중단 해 달라"고 누누이 부탁했다.
임창영 박사는 "외세 지배하의 한반도에서 통일 없이는 민주화도 없다 "는 소신을 가진 통일 운동가였다.
김대중 의장의 부탁 때문이었는지 혹은 미 국무성의 불허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방북을 3 년간 연기했다. 임 박사는 평생을 통일운동가로서 활동하다 96년 별세했다.
-"이런 편지가 왔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본 도쿄 신주쿠의 소인이 찍힌 그 편지 내용은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김 선생, 김 선생을 납치해서 암살하려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절대 조심하셔야 합니다."
편지에는 김대중 납치 계획에 대해 아주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말했다.
"이 정도록 구체적으로 쓴 것을 보니 이것은 틀림없이 중앙정보부 내의 양심세력이 보낸 것 같습니다.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에 오기 전 일본에서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나를 계속 미행했습니다."
7월 10일 김대중 씨는 일본으로 출발했다. 박정희가 얼마나 독한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가던 길을 멈출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해마다 여름이면 한국 외무장관은 유엔 외교차 남미를 돌곤 했다. 그 해에 김용식 외무장관은 멕시 코를 방문했다. 필자는 아이들에게 진 빚을 갚으려고 외무장관 수행 취재 때 아이들을 맡겨 놓고 취재 를 마친 후 그들 부부와 함께 아카풀코에 들러 여름 휴가를 보내고 올 생각이었다.
계획대로 취재를 마치고 이창희 대사 부부와 함께 아카풀코 해변의 한 호텔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새벽, 들떠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들과 함께 해변에 나가려던 참이었다. 워싱턴의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남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여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하시오."
"아니 대체 무슨 일이에요?"
충격 때문에 나는 잠시 휘청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지만 설마 했는데 남의 나라 수도 한복 판에서 대낮에 야당 지도자를 납치해 가다니. 이게 내 조국이 하는 짓인가.
발리 해변으로 나가자며 내 손을 잡아끄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정말 급한 일이 생겼어 워싱턴으로 돌아가야 해. 미 안하다."
울상을 지으며 비명을 지르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나는 이창희 대사 부부에게 갔다.
"대사님. 본사에서 즉시 워싱턴으로 돌아 오라는 연락이 왔네요. 무슨 비상사태가 터졌나 봐요."
급히 짐을 챙겨 들고 아이들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휴가철 세계적인 휴양지에 미국행 비행기 표 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급한 김에 공항 카운터 직원을 붙들고 사정했다.
"여보세요. 나는 MBC 특 파원인데 본사에 급한 일이 있어 빨리 워싱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비상용으로 남겨 놓은 표 좀 풀어 주세요."
그러자 공항 카운터에 앉은 여성의 표정이 달라졌다.
-"NBC 리포터라구요?"
그러더니 그녀는 없다던 표를 선선히 끊어 주었다. MBC를 미국 NBC로 잘못 들었던 것이다. 내가 거짓말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잘못들은 것을 어찌하랴. 어 쨌든 그녀 덕분에 바로 워싱턴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국무성 기자회견 때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질문했나?"
-"중동 문제 때문에 유태계 기 자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질문을 퍼붓는 통에 물어 볼 시간이 없었다."
"다른 코리안 기자들은 질문 안하던가?"
-"아니, 그런 질문 없었다."
나는 분통이 터졌다. 당시 워싱턴에는 10명이나 되는 한국 특파원이 주재하고 있었다. 그런 데도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질문하는 기자가 없었다니.
이 날 12시 정례 기자회견 때 바로 국무성 대변인에게 질문했다.
"한국 중앙정보부가 일본 도쿄에서 한국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납치해 가서 현재까지도 그의 소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이 사건에 대한 미국의 입 장은 무엇인가?"
대변인은 바로 답했다.
-"한국의 야당 지도자 김대중 씨가 일본에서 실종된 것은 사실인 데 우리는 현재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중이다."
나중에 들으니 국무성에서는 기자회견 때 쥬리 문이나 스펜서 데이비스가 반드시 질문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미리 답을 준비했다고 한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한 시간쯤 지난 후 주미 한국대사관 이상옥 정무참사 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문 기자님, 오늘 국무성 기자회견에서 하신 질문 내용은 무엇이며 대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내가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김대중 씨를 납치해 갔다"고 질문했다는 얘기를 벌써 전 해 듣고 그가 전화로 문의해 온 것이다. 나는 기가 막혔다.
"기자가 기자회견에서 질문한 내용까지 대사관에서 조사합니까? 정 알고 싶으시면 국무성에 오늘 기 자회견 질의 응답에 관한 풀 텍스트 나와 있을테니 그것을 베끼세요."
-"복사는 안 됩니까?"
"네 안돼요."
전화를 끊고 났더니 연신 전화벨이 울려댔다. 일본 각 신문사와 통신사 기자들의 질문 전화였다. 71 년 김대중 씨가 워싱턴에 왔을 때 내가 그를 도왔던 사실을 알고 있던 그들은, 그의 행방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답답하기는 나도 마찬 가지였다. 한국 중앙정보부가 그를 납치해 암살하려는 것이 분명한데 어디로 끌고 갔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왜 그래? 언니"
-"얘 아까부터 저 남자가 담배를 피우면서 너를 째려보고 있어."
힐끗 돌아보니 주미 한국 대사관 중앙정보부 공사 이상호(가명 양두원)였다. 나는 언니에게 말했다.
"문 선배, 김포에 도착하면 이후락 이가 바로 잡아넣는답니다."
나는 '뉴스 시간에 한번 때려야지' 하는 생각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73년 10월 뉴욕 에서 유엔총회가 열렸다.
총회 기간에 유엔플라자 호텔에서 한미 양국 장관들이 참석하는 회의가 있 었다. 한국측에서는 남덕우 씨를 비솟해 몇몇 장관들이 참석했고, 그 날의 연설자는 주한 미대사를 역 임한 포토 국무차관이었다. 그 날 아침 국무성으로부터 연설문을 미리 입수해 읽어보니 '김대중 납치사 건'이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한일간의 불행한 사태가 조속히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고마운 포터!
회의 시간에 맞춰 유엔 플라자 호텔로 갔다. 나는 마이크를 잡았다.
"여기는 유엔 본부 입니다. 오늘 회의에서 포터 국무차관은 한국의 경제성장에 경의를 표하면서.. 한편 포터 차관은 한일 양국간의 불행한 사태가 조속 히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라고 밝혔습니다. 워싱턴에서 문명자였습니다."
이 문제 관련 기사 녹음을 마친 후 서울 보도국 기자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지금 야단 났어요. 문 특파원이 보낸 어제 기사 때문에 연일 중역회의가 열리고 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서울에서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졌단다. 김대중 납치 사건을 보도하는 필자의 육성이 나가기 시작하 자 중앙정보부가 전파 방해를 해서 한때 방송이 지지직 거렸으며 당시 뉴스를 담당했던 기자와 기사들 이 중정에 끌려가 호되게 당했다는 것이다. 내가 유엔 기사를 보낸 후 통화한 보도국 기자는 전화 도청 이 두려워서 그런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던 73년 11월 7일 새벽 3시경 난데없이 도쿄에서 콜렉트 콜 (수신자 요금부담 전화)이 걸려왔다. MBC의 가까운 후배 기자였다.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이후락의 교활한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 놈이 나를 잡아넣는단 말인가.
그 날 밤 내내 생각했다. 서울로 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여기 남을 것인가. 당시 나는 영 주권도 없었다. 특파원 신분으로 체류비자를 1년 단위로 연장하고 있었다. 영주권을 받기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이 자 때문에 내가 성을 갈게 생겼다. 도무지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후락이 불러"
이후락이 들어오자 박정희는 그를 몹시 질책했다고 한다.
"문 기자는 청와대에 와서도 담배에다 침 발라 빨부리에 꽂아 피우면서 영어 일본말 뒤섞어 서 자기 할말 다 하고 가는 사람이다. 일을 어떻게 처리했기에 이 지경이 됐나?"
-"미스터 프레지던트, 다음 순서는 한국입니다"
그러자 닉슨이 갑자기 두리번거리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쥬리 문이 어디 있지?"
패트리셔 닉슨도 덩달아 찾았다.
"쥬리 문? 어디 있어요?"
필자는 그 때 현장에 없었다. 신임장을 제정하고 대사관에 돌아온 함병 춘 대사가 물었다.
-"쥬리 문이 누구요?"
동아일보 이웅희 기자가 답했다.
"쥬리 문이 문명자씨 아닙니까?"
그러자 함 대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이쿠, 나 대사 하기 글러먹었구나."
닉슨이 한국대사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자리에서 망명 기자 쥬리 문을 찾았던 이유가 대체 무엇이겠는가. 그 후에도 여러 번 닉슨 부부는 나를 한국 정부로부 터 방어해 주었다.
"트리셔 닉슨의 집에 있는 동양의 아름다운 실크 스크린은 코리언 리포터 쥬리 문이 몇 년에 걸쳐 수를 놓아 선물한 것이다."
덕분에 자수 바늘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내가 병풍을 수놓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74년 8월 9일 마침내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고 말았다. 사실 민주당 선거본부의 문서를 도둑질한 워터게 이트 사건은 과잉충성파들이 저지른 악수였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런 짓까지 하지 않더라도 닉슨은 무난히 재선되었을 것이다.
그 광경을 보고 나는 헬드만에게 말했다.
"헤이 빌, 너는 한국말로 하자면 의리란 게 없어."
-"의리가 뭐냐?"
결국, 포드 행정부는 "북한이 오판하는 일이 없도록 일본 방문 후에 한국을 방문한다. 그러나 미국 은 박 정권의 독재정치와 인권침해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한국 방문 사유를 발표했다. 망명 후 나는 '유에스 아시안 뉴스 서비스' 소속 백악관 출입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포드의 방한이 확정된 후 나는 이 기회에 서울에 갈 것을 결심하고 백악관 기자단에 포드 수행을 신청했다. 정치 망명 당시 " 박정희를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독설을 퍼부었던 내가 한국에 간다고 하니 주위에서 놀라는 것은 당 연했다. 동료 미국 기자들은 무모한 행동이라며 극구 만류했으나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백악관측은 나의 수행신청을 이의없이 환영해 주었으나 FBI는 크게 우려했다. 나의 신변안전을 담당하던 수사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쥬리, 당신은 박정희 정부의 지명수배 1호(Wanted No. 1)야, 극히 조심해야 돼."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아이들을 떼어놓을 때였다. 줄리아와 리처드는 내가 서울에 간다는 사실을 알자 울며 매달렸다.
-"마미, 마미, 박정희가 마미를 죽일 거야. 가지 마! 가지 마!"
"헤이 줄리아, 리처드, 엄마가 한국 가서 고무신 사다 줄게."
-"노오우!"
아이들은 여전히 안 된다고 소리치면서도 역시 아이들이라 고무신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한 표정이다 . 그렇게 아이들을 달래고 있는데 한민통 사무총장을 맡고 있던 이건팔 씨가 찾아왔다.
"문 여사님, 진짜로 가실랍니까? 일이라도 당하시면 어떡하실라구요?"
나는 다짜고짜 말했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요. 기도나 해주세요."
-"쥬리, 이번에는 한국에서 말썽이야."
나는 한국대사관의 유종화 영사과장에게 전화를 해 따졌 다.
"일본 비자도 나왔는데 한국 비자를 안 내주는 이유가 뭐요?"
옥신각신 끝에 그는 "30분만 시간을 달라"고 하더니 30분 후에 전화해서 "대사관으로 오라"고 했다. 한국 대사관으로서는 일본행만 막으면 내가 한국에 못 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일본 쪽에서 뚫리고 보니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한국대사관에 미 국무성이 발행한 나의 무국적 망명객 여권을 내밀었다. 유 과장은 거기에다 1 개월 여행비자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는 말했다.
"무국적 망명객의 여권에 비자 도장 찍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길 빕니다."
11월 22일 포드 일행과 함께 드디어 서울로 향했다. 김포 상공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 동안 김포 상공에서 고국 산천을 내려다 본 것이 이미 수십 차례였지만 망명객이 되어 무국 적 여권을 들고 조국을 찾은 감상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백악관 기자단에서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주의를 주었다.
-"쥬리, 김포에 도착하면 옆에 있는 백악관 기자들이나 경호원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 도록 한국 사람에게 항상 영어로 말하도록 하시오."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공군 1번기)에 앞서 기자들의 전세기가 1착으로 김포공항에 내렸다. 비행기에서 내려 기자석으로 걸어가는데 인상이 험악한 젊은 남자가 다가오더니 자신은 공항장이라면서 말을 걸었다. 분위기로 봐서 중앙정보부원 같았다.
-"1개월 비자를 발급 받으셨던데 서울에 잔류하 실 계획입니까. 아니면 포드 대통령과 함께 떠나실 계획입니까?"
-"00 신문사 000기잡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문 선배께서 와 주신 것만으로도 우리는 용기 백 뱁니다."
처음 보는 젊은 후배기자들은 눈을 부라리는 중정요원들의 감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내 손 을 잡고 흔들었다.
숙소인 조선호텔에 가보니 백악관 선발대가 잡아놓은 내 방이 하필이면 엘리베이 터 바로 옆방이었다. 방에 들어서자 바로 전화벨이 울렸다.
"이희호 여사는 계십니까?"
-"외국 손님이 있어 바쁩니다."
"워싱턴의 문이라면 압니다."
그러자 없다던 김대중 씨가 직접 나왔다.
-"왠일이요? 어디서 거는 거요?"
"서울입니다. 포드 대통령 수행차 왔는데 조선호텔에 있습니다. 찾아 뵈려는데 몇 시가 좋을까요?"
-"6시부터 기다리겠습니다."
말하기가 무섭게 전화가 끊어졌다. 곧바로 다이얼을 돌렸다.
"전화 끊으셨어요?"
-"아니, 이 러는 게 보통 있는 일이라구."
"그럼 상세한 것은 만나서 말씀 듣지요."
김대중 씨 집 10미터 앞까지 걸어갔을 때 경찰이 개미떼처럼 담장에 붙어 있슴을 알 수 있었다. 제 임슨이 말했다.
-"쥬리, 전에 왔을 때하고 상황이 다르다. 꼭 영어만 해라."
"이거 놔!"
나는 사실 가죽잠바 요원들을 실제로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온몸이 떨렸다. 여자를 거칠게 다루는 데 격분한 제임슨 기자가 그들을 밀쳐 내며 소리쳤다.
-"너희들 뭐야? 비켜! 우리는 가야 한다."
상관인 듯한 사내가 소리쳤다.
"야! 세 명이서 반짝 들고 가!"
그 말에 나는 머리끝까지 피가 솟구치는 것 같았다. 가방에서 녹 음기를 꺼내 켜들고 소리쳤다.
"뭐, 반짝 들고 가? 이놈들아? 어디 들어 봐? 들어 봐?"
나는 들고 있던 가방을 휘둘러 젊은 남 자들의 배를 차례로 호되게 때렸다.
상관인 듯한 사내가 다시 소리쳤다.
-"자동차에 집어 넣어!"
"실어!"
그 말에 나머지 젊은 남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나는 안간힘을 써서 그들을 밀쳐 내며 악을 썼다 .
"찔러! 이 새끼들아! 내 조국에서 피 흘리고 죽는 게 소원이야! 찔러 이 새끼야!"
샘 제임슨이 놀라서 소리쳤다.
-"헤이 쥬리, 레츠 고우 홈!"
"왜들 이러십니까? 주인께서 기다리시니 손님을 모시고 들어가야겠소."
-"안됩니다."
"지금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국가의 장래를 얼마나 해롭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멀리 미국에서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의 권리 를 무슨 근거로 박탈하겠다는 겁니까?"
-"상부의 지시입니다. 저희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또다시 40여 분간 육박전에 말싸움을 벌였 지만 검은 잠바들이 결사적으로 막는 바람에 우리는 김대중 씨 집 안으로 한발짝도 들어갈 수 없었다. 김대중 씨 역시 집 안에서 두 명의 정보부원에게 제지당해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결국 나는 이희호 여사에게 말했다.
"이 여사님,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가겠습니다."
이희호 여사도 곧 눈물이 쏟아질 듯한 표정이 었다.
-"여기까지 오셨다가 들어가시지도 못하고... 안에서 기다리시는데..."
이 여사를 뒤로 하고 돌아서는 우리의 뒤통수에다 대고 검은 잠바들이 내뱉었다.
-"굉장히 힘도 쎄구먼."
-"저는 조선일보에 있습니다. 오직 우리 신문만 문 기자님이 오셨다는 것을 보도했습니다. 비행기에서 보십시오."
내가 미국 기자단 자리에 서 있는데 하비브 국무차관보와 함께 있다가 나를 발견한 정일권 국회의장이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그는 61년 주미대사 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다.
-"하우 아 유, 쥬 리 문! 오랜만이오."
그는 내 뺨에다 청하지도 않은 입맞춤을 한 후 말했다.
-"왜 온다는 것을 미리 알리지 않았소, 알았으면 특별초청장을 냈을텐데..., 어제 저녁이라도 같이 하려고 김종하 비서실장([신아일보] 기자출신)을 보냈더니 아무리 찾아도 안 계시더라고 하더구먼."
나는 쏘아 붙였다.
"김대중 씨 집에 갔었지요."
-"아 그래요."
그런 경우 결코 "거긴 왜 갔어요?" 하고 따져 묻지 않는 것이 정일권이란 인물의 특성이다.
"거기서 당신네 깡패놈들에게 기막힌 해러스먼트(귀찮게 달라붙기)를 당했구요."
-"테러 블! 그럴 리가 있나. 그러지 말고 문 기자, 귀국해서 함께 일합시다."
"내 주변에 오지 마세요. 출세에 지장 있으니까."
그 때 박준규 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 이 노진환 유정회 의원과 함께 헤헤 웃으며 다가왔다. 그와 나는 같은 대구 출신으로 서로 말을 놓고 지내던 사이였다.
-"유(you)는 무국적이라면서?"
"너희들 때문에 그렇다."
-"이것 봐. 그만큼 하고 싶 은 얘기 다 하고 쓰고 싶은 글 다 썼으면서도 아직도 분이 안 풀렸어? 이제 그만 돌아와서 손잡고 일하자."
그 때 노진환이 나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하려 했다. 나는 들고 있던 둘둘 만 [조선일보]로 그의 배를 마구 찌르면서 소리쳤다.
"나가!"
그리고 박준규에게 빈정거렸다.
"그래 저 노진환이는 워싱턴 교민회장 하면서 정인숙이 를 안팎으로 돌봐준 공로로 유정회 배지 하나 얻은 모양인데, 그래 당신은 공화당 정책위 의장이라면서 저런 협잡군 배지 하나 못 떼나? 그러면서 나더러 손잡고 일하자고?"
그러던 차에 박정희가 나타났다. 그는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키신저 국무장관 "다나카 정도야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후일담 하나. 76년 나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 포스 원에서 키신저 국무장관과 수행기자단이 비공식 회견을 가졌을 때의 일이다. 당시는 록히드 스캔들에 돌연 휘말린 일 본 다나카 수상의 운명에 외신 기자들의 관심이 집중되던 시기였다.
기자들은 키신저를 물 고 늘어졌다.
"다나카는 오래 갈 것 같은가?"
키신저는 아주 오만한 자세로 답했다.
-"다나카 정도야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순간 나는 무척 당황했다. 키신저의 말은 계속됐다.
-"그는 매우 건방지다. 미국을 뒤따라오면서 일.중 관계를 개선하는 정도는 괜찮지만 미국 을 앞질러 일.중 관계를 개선했다."
나는 순간 키신저에게 물었다.
"헨리, 록히드 스캔들도 당신이 벌인 것 아니야?"
나는 아직도 그 때 그의 답변하던 표정과 억양을 잊을 수가 없다.
-"오브 코오스(그거야 물론이 지)."
"조.일 수교 문제는 잘 되어 갈 것 같습니까?"
-"그 문제는 정치생명을 걸고 내가 해결 할 것입니다. 나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김 주석을 만나 보니 인상이 어떻습디까?"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우선 김 주석에게 당시 간첩선으로 나포돼 북조선에 억류되어 있던 후지산마루 호 선장과 선원들의 송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 다. 그들 선원 가족들의 정상에 대해서도 많이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김 주석이 말했습니다. '가네마루 선생, 걱정마시오. 법도 인간이 만든 겁니다. 선생의 요청을 받아들여 고려하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가 북조선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후지산마루 선장과 선 원들이 일본으로 귀환 조치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제 4장 박정희의 김대중 납치 무마 공작비 3억엔 추적기
조중훈, 다나카에 3억 엔 제공해 김대중 납치사건 무마
그런데 사건 발생 후 일본 정부의 태도가 상당히 야릇했다. 처음에는 '김대중측의 자작극', '북괴의 공작' 등 엉뚱한 소리를 하다가 한국 정부의 주권 침해 행위를 어물쩡 넘어가려 한다는 언론의 거센 비 판에 부닥치자 일본 정부는 "진상을 조사한다" , "주범을 잡는다"하며 강경 노선으로 돌아섰다.
그 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 정부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작아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가 돈으로 다나카의 입을 막았다"는 루머가 분분한 실정이었다.
그러던 차에 73년 10월 대한항공 서울-뉴욕 간 항로 개설 교섭차 뉴욕에 온 조중훈 사장이 한 미국 주재 한국관리에게 떠벌린 무용담이 몇 다리 건너 필자의 귀에 들어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내가 PP(박정희)의 부탁으로 오사노를 통해 다나카 수상을 만나 김대중 사건을 해결했다."
여기서 오사노란 일본 국제흥업 사주 오사노 겐지를 가리키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전일본항공(ANA) 의 대주주이기도 했다. 조중훈은 자신이 사건을 그렇게 무마했으므로 PP의 앞날이 승승장구할 것이며 그런 공을 세운 자신의 앞날은 또 얼마나 양양할 것인가 하고 기염을 토했던 것이다.
그 후 필자는 또 다른 한국의 재계인사로부터 이와 비슷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기업인들 간에도 김대중 납치 사 건과 관련한 조중훈의 행적은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단한 정보였으나 철저한 확인 이 필요했다. 상대는 일본 수상과 대한항공 사주가 아닌가. 법정에서까지 완벽하게 상대를 이길 수 있 을 증거 확보가 필요했다.
73년 11월 김종필 국무총리는 일본을 방문해 다나카에게 45도 각 도로 머리를 숙였다. 김대중 사건을 둘러싼 한일 간의 마찰을 정치적으로 마무리하는 행사였다.
한 목격자에게서 8월 16일 조중훈씨와 오사노가 가와사키에 갔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나 는 가와사키의 마담에게 물었다.
"오사노 사장이 작년(73년) 8월경에 여기 오셨었지요?"
그녀는 정계 거물들을 상대하는 아카사카의 마담답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능숙하게 잡아뗐다.
"48년(서기 1973년) 장부는 창고 깊숙이 박혀 있어 찾아보기가 힘들고.. 그러니 작년 8~9 월 경에 누가 왔다 갔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오사노 상은 종전 직후 한 번 왔다 갔을 뿐, 그 후에는 기억이 없는데요."
종전 직후에 한 번 왔다 갔다니! 해도 너무한 여성이었다. 나는 작전을 바꾸었다. 일본 기자들을 통 해 가와사키의 한 종업원 여성과 사귀었다. 그녀와 인간적으로 친해진 후 그녀를 통해 오사노와 조중훈이 73년 8월 16일 가와사키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돈'이었다. 액수도 정확히 알 수 없는 거액의 뭉칫돈 이 조중훈으로부터 다나카에게로 흘러갔음이 분명했고 나는 그 흐름을 찾아야 했다. 일본 정치인들의 생리로 볼 때 그 돈이 현금일 것만 은 분명했다. 거대한 현금 뭉치의 흐름을 확인하기 위해서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돈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는 곳, 즉 한국과 거래관계에 있는 모든 회사들을 이 잡듯이 뒤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필자에게는 사립탐 정을 고용해 조사를 시킬 만한 돈도 없었다. 이 때 나의 취재를 도와 준 사람들은 정의감에 불 타 진실을 한번 캐보자고 나선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이 근 4년에 걸쳐 조사한 결과, 나는 비로서 검 은 뭉칫돈의 출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의외로 그 곳은 외환은행 도쿄지점이었다. 돈의 흐름을 감추기 위해 외환은행에서 돈을 빼 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예단 때문에 조사를 제일 뒤로 미루었던 곳이 바로 정답이었다. 뭉칫돈의 총액은 무려 3억 엔! 이 돈은 도쿄 지점에서 최고액권 지폐로 인출됐는데 예상과 는 달리 한꺼번에 3억 엔이 아니라 1억 엔씩 세 번에 걸쳐 인출됐다는 새로운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 첫 번째 인출일은 8월 16일. 이 날은 김대중 사건 이후 조중훈이 오사노와 처음 대면한 날이었다. 두 번째 인출은 이후부터 9월 중순 사이의 어떤 시점이었고, 세 번째 인출은 9월 21일이었다.
다음 문제는 장소였다. 조중훈과 다나카는 어디에서 만난것일까. 조중훈이 미국에서 떠벌렸다는 얘 기중에 그 해답이 있었다. 그것은 '하코네'였다. 필자는 다시 하코네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하코네는 일본의 유명한 별장지다. 나는 하코네에 오사노 겐지 소유의 별장이 있는지를 조사했다. 일본 재계의 유력자인 오사노 겐지는 하코네 에 자신의 호텔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코네 코라 호텔이었다. 나는 다시 오사노가 하코네 코라에 온 날짜를 탐문했다. 그 결과 73년 9월 21일 조중훈과 오사노, 그리고 다나카 수상까지 모두가 하코네 코라 호텔에 숙박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오사노가 조중훈과 다나카 수상을 대면시킨 장소는 바로 하코네 코라였던 것이다.
이렇게 3억 엔을 들여 다나카 매수공작에 성공한 후 조중훈과 대한항공은 그의 말대로 승승 장구했다. 경쟁사 하나 없는 독점재벌로 족벌 경영의 극을 치닫다가 결국 거듭되는 항공기 추락 사고로 조중훈씨 부자가 경영일선에 서 물러나게 된 오늘의 현실을 보니 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런 걸 가리켜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하 는 것인가.
하여간 이것이 바로 김종필이 다나카에게 머리를 숙이고 김대중 사건을 정치적으로 마무리하기 전까 지 물밑에서 오고갔던 한일 간의 검은 뒷거래의 진상이다.
발표해도 될 만큼 물증과 증인들이 확보 됐다고 판단한 77년 초 나는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 기사는 당시 발행부수가 1맥만 부에 달하던 일 본 최고의 시사주간지 [주간포스트]에 실렸다.
[다나카, 오사노 겐지, 조중훈의 하코네 회담에 의혹 있다] (77년 3월 11일자)와
[김대 중 사건 무마 공작자금 3억과 밀약 내용을 폭로한다] (3월 18일자)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기사가 실린 [주간 포스트]는 5백만 부가 팔렸는데 한국 내에서도 비밀리에 돌려 읽혀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3억 엔 기사가 나가자 마자 일본 정계가 시끄러워졌다. 다나카는 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 겠다고 했다. 나는 답했다.
"좋소, 법정에서 만납시다."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사회당 소속의 안타구 의원은 하토야마 외상에게 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과 필자를 증인으로 채택할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워싱턴 주재 일본대사관측은 나에게 일본 국회에 증인 으로 출석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나는 답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 무마비 3억 엔 사건에 대해서는 일본 경찰이 모두 알고 있는데 사건을 취재한 기자가 일본 국회에까지 진상을 증언해야 할 이유가 무엇 인가?"
게다가 내 기사가 나간 후 김대중 납치 사건 발생 당시 미국무성 한국 과정이었던 도널드 레 이너드 씨는 일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일 간의 3억 엔 수수설에 대해 "주한 미대사관의 정보보고에 의해 우리(미국)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답변함으로써 나의 기사를 확인해 주었다.
금발 가발 쓰고 LA에 숨어든 김대중 납치 행동대원 김기완
나는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그것을 주도했던 중앙정보부 행동대원들 중 일부가 미국에 숨어 들어와 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들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내가 사건 당시 주일대사 관 공사로서 납치 사건에 가담했던 김기완의 소재에 대한 정보를 접한 것은 김형욱으로부터였다.
그는 김대중 납치 사건 발생 후 또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사건전모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나"라고 예의 큰소리를 쳤다. 나는 물었다.
"김부장이 미국에 앉아 어떻게 그렇게 진상을 잘 아세요?"
-"이번에 활동한 김기완(가명 김재군)이가 미국에 와 있거든. 걔를 주일 공사로 내보낸 게 바로 나요. 김기완이는 사건 후에 LA에 와 있는데 걔한테 사건 내 막을 완벽하게 들었지."
"김대중이 납치 잘 했다고 한밑천 챙겨서 미국 보내 준 모양이구먼? 그 친구 비벌리힐스 저택에서 사는 것 아니요?"
-"그렇지 않소 논공행상이 제대로 안 돼서 상당히 궁한 처지요. 그 놈들(이후락 중앙정보부를 지칭함) 하는 일이 그렇지."
"천상 김 부장이 김기완이를 먹여 살려야겠구먼?"
-"내가 다 방법을 일러 주었지. 사건 내막을 폭로하겠다고 쎄게 나가라고 했소."
나중에 조사해 보니 김기완이 중앙정보부를 협박해 뜯어낸 돈이 2백만 달러가 넘었다.
나는 LA 근방에 살고 있는 게 분명한 김기완을 찾아나서기로 했다. 여러 갈래로 수소문해 봤지만 그를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철저히 신분을 위장하고 어딘가에 숨어 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미국이란 숨기로 작정하면 깜쪽같이 숨어 버릴 수도 있는 광대한 곳이다.
나는 LA의 등기소부터 탐문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가 미국땅에 와서 숨어 살기로 했다면 분명히 집 을 샀을 것이고, 그 기록은 등기소에 남아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피곤과 허기, 그리고 실망 속에서 우리 두사람은 별수없이 LA비행장으로 갔다. 나는 속으로 수없이 '김기완' '김기완'을 되뇌었다.
'오늘은 그냥 가지만 나는 반드시 그자를 찾아 내고야 말 것이다.'
나는 노랑머리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이기는 하지만 그는 서양인이 아니었다.
"히스키상, 저건 가발이에요!"
-"맞습니다. 동양 남자입니다."
"문 기자님, 지금은 제 아들이 아직 어립니다. 아들이 성인이 되면 반드시 제 스스로 진실 을 밝히고 용서를 빌겠습니다. 제발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1970년대 미국의 수도 워싱턴은 세계 각국의 망명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 자신부터가 그 중 한사 람이었다.
나는 73년 11월 8일 정치 망명을 선언한 후 76년 말까지 무국적 상태의 난민으로 지냈다. 61년 미국에 특파원으로 부임한 후 나는 영주권을 취득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때가 되면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미국에서 일할 때도 반드시 한국인으로서 입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악관 기자회견에 임할 때도 항상 나의 머리를 가장 강박했던 생각은 '결코 미국 기자들에게 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너 잽스냐?"
나는 그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창밖만 내다보았다. 그러자 운전사놈이 혼자서 중얼중얼 "칭쿤가 보다"하는 것이었다. 목적지에 다 왔을 때 나는 물었다.
망명 이후 나의 신변안전을 담당하던 FBI측은 76년 말 국적 문제 때문에 다시 한번 나를 물 고늘어졌다.
-"쥬리, 당신이 무국적인 한 우리가 더 이상 당신의 신변을 보호해 줄 수가 없다. 부디 시민권을 받기 바란다."
"당신, 그렇게 기쁘냐?"
사실 시민권을 얻고 난 후 기뻐서 우는 사람도 많이 있으니 판 사가 그렇게 물은 것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기쁨의 눈물이겠는가.
니노이는 씩 웃으면서 답했다.
-"레이디에게는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호기심 많은 나는 그 후 기어이 그 뜻을 알아냈는데 영어로 하면 '뻐킹 가이' 정도 되는 욕이었다. 이 지면에 옮겨놓을 만한 말은 못 된다.
그리고 다소 이해하기 힘든 얘기자만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는 니노이 아키노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멜다가 미국을 방문할때면 여러모로 니노이를 도와 주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마르코스 정권의 악랄함은 우리의 상식을 여지 없이 짓밟았다.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 비행기 가 착륙한 후 니노이가 트랩을 내려와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수발의 총탄이 날아왔고, 그는 그만 쓰러 지고 말았다고 한다.
니노이와 동행해 역사의 증인이 된 사람들 중에는 와카바야시라는 일본인 반마 르코스 운동가도 있었다. 그는 85년 김대중 씨가 미국에서 귀국할 때도 도쿄에서 그 비행기에 올라 일 행에 합류했다. 그러나 그는 김포에 도착한 후 공항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고 도쿄로 돌아가야 했 다.
86년 2월 필리핀 시민혁명으로 마침내 마르코스 정권이 무너진 후 니노이 아키노를 대신해 코리 아 키노가 필리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필리핀 시민혁명의 현장을 취재하던 나는 코리 아키노와 함께 제 1착으로 마르코스 부부가 탈출 직전까지 살았던 필리핀의 대통령 관저 말라카낭 궁에 들어갔다.
관 저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값나가는 물건들을 급히 챙겨 탈출하느라고 그랬는지 호화로운 말라카낭 궁 안 여기저기에 급히 뜯어낸 포장지, 상자 등등의 쓰레기들이 산더미 같이 널려 있었다.
한 방에는 알맹이를 미처 꺼내지 못한 보석상자들도 한켠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또 이멜다의 욕실 옆 화장대에는 온갖 종류의 향수들이 진열돼 있었는데 세계 최고급 향수 중 하나인 짐바투 향수가 축구 공만한 용기에 세통이나 담겨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방은 아예 향수 진열만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듯한 '향수방' 이었다.
이멜다의 코트들이 진열돼 있는 방에서는 놀라다 못해 욕설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밍크코트 중에서도 최고급품에 '세이블' 이라는 것이 있다. 나는 72년 닉슨의 소련 방문을 수행했을 때 세이블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구경했다.
그 후 나는 코리 아키노의 농장에 초대받아 갔다. 거기서 나는 또 한 번 까무러칠 뻔했다. 자동차로 달려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코리의 농장. 코리 아키노 집안은 그 곳에서 명실상부한 왕족이었고, 그 집안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농민들은 중세의 농노나 다를 바 없었다. 그 곳에는 16홀의 골프 장까지 갖춰져 있었다.
니노이 아키노 역시 지주 집안 출신이었지만 코리에 비하면구멍 가게에 지나 지 않는다고 한다. 니노이는 처가의 막강한 재력에 힘입어 정치적으로 성장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었다. 마르코스와 이멜다가 필리핀 민중의 생존권을 탄압한 독재자라면 시민혁명을 통해 집권하는 아키노는 민주주의의 수호자여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검고 주름진 얼굴에 바짝 마른 팔다리, 신발조차 없는 아키노 농장 노동자들에게 코리 아키노 집안은 필리핀 민중의 고혈을 빠는 또 하나의 적이었다. 아키노 집안의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발이 땅에 닿을 사이도 없는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아키노 농장 방문을 마치고 마닐라로 돌아왔다.
일년 내내 연기가 난다고 해서 스모키 마운틴이라는 그 곳에는 세계 각국의 빈민굴에 빠짐없이 모습 을 보이게 마련인 미국인 신부조차 없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흔치 않은 일본인 신부 한 사람이 그 곳에서 같이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만나보지는 못했다.
이처럼 가난에 찌든 필리핀의 딸들을 일본 야쿠자들이 일본땅에 데려가 매춘부로 팔아먹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후에도 세계 각국의 여 러 빈민굴을 취재했지만 아직도 그 이상의 참상은 보지 못했다.
필리핀을 떠나기 전 나는 니노이의 동생 부츠 아키노에게 말했다.
제 1장. 박정희의 비자금 조달선 외자기업 (프레이져위원회 조사보고서)
유신체제하에서 아무도 그 비밀에 칼을 대지 못하고 있던 77년에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 기구소위원회(세칭 프레이져위원회)는 '코리아게이트' (박동선이 벌이 미 의회 의원 뇌물 로비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활동에 나선다.
프레이저위원회를 비롯한 미국 상.하원 윤리위원회의 조사활동에 의해 박정희의 비자금 전모는 낱낱이 드러났다. 한국 현대상에서 미국이란 나라가 차지하는 지위는 별 개로 하더라도, 적어도 70년대 후반 미 의회의 코리아게이트 조사위원회들은 한국 국민을 위한 중앙정 보부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할 만하다.
나는 미 의회의 2년에 걸친 코리아게이트 조사 과정 내내 그것을 취재했다. 전두환. 노태우 일당이 주무른 4천 억원에 달하는 정치자금에 이미 혼이 빠진 한국 국민들에게는 박정희의 '몇 억 불' 규모의 정치자금쯤이야 푼돈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청렴했다"고 외치는 90년대의 박정희 신화 제조자들 앞에 나는 그 때의 취재수첩을 펼쳐 보이고자 한다.
그런데 5월 16일 열린 이 청문회에서 석유재벌 걸프는 "우리가 전 세계의 외국 정부에 제공 한 5백만 달러에 달하는 정치자금 중 80%가 한국의 공화당 정권에 지불 되었다" 는 충격적인 증언을 했 다.
김성곤. 이후락. 김형욱 3인이 나눠 맡은 정치자금 조달체계
67년 선거 직후, 3선개헌 문제를 놓고 김종필과 박 정권의 다른 중간 보스들 간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김종필과 김성곤은 3선개헌을 반대했고, 김형욱과 이후락은 강력하게 지지했다. 이들의 찬반입장은 각 자의 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당시 김종필은 박정희 퇴임이후 대통령직을 계승할 사람은 자기라는 개 인적 야심에 차 있었다. 그러니 박정희의 3선 기도에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김성곤은 자신의 기업활 동과 축재를 방해하는 김형욱과 이후락을 밀어내기 위해 3선개헌에 반대했다.
도대체 왜 박정희는 이 같은 비밀구좌가 필요했던 것일까.
이동훈은 "박 대통령은 여당 인사들뿐 아니라 야당 인사들에게도 돈을 주었다"고 했다. 코리아케이트에 대한 미국 행정부 보고서에 는 "한국의 한 유력 기업가에 따르면 70년 당시, 거의 모든 야당 의원들이 박정희의 돈을 받고 있었다" 고 기록되어 있어 이동훈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그는 또한 "70년대 초반 박 대통령은 군부의 불보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주요 군 지휘관들에게도 상당한 자금과 혜택을 주었다"고 했다.
71년 선거에서 박정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외국 기업은 미국 기업만이 아니었다.
대통령 선 거가 있었던 71년 4월 지하철 전동차를 한국에 판매했던 4개 일본인 무역회사 즉 미츠비시 , 니쇼이와 이, 미츠이, 마루베니사가 미국의 한 은행구좌에 1백 20 만 불을 이체한 사실이 일본 국회 청문회가 결 과 밝혀졌다. "프레이저 소위원회가 이 자금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 77년에는 은행측의 5년 기록 보유 규칙에 따라 은행 거래 기록이 폐기되었기 때문에 소위원회는 이 자금이 결국 어디로 갔는지를 명백하 게 밝힐 수는 없었다.
코리아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박동선의 집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미국쌀 수입에서 떨어지는 커미션이 미국의회에 대한 로비자금의 출처였슴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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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 투자 기업 원조
(a) 만일 하원 의원의 선거구에 있는 기업이 한국 투자에 대한 이해관계를 암시하면 우리는 그 기업을 지원한다.
a)그들 지역의 생산품을 구매함으로써, 우리는 선거인뿐만 아니라 선출된 관리들의 영향력도 우리에 게 유리하게끔 이용할 수 있다.
b)그들의 생산품 구매와 다른 거래로부터 발생하는 커미션을 우리의 활동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일거양득이다.
박동선의 집에서 발견된 이 문서들의 작성자가 누구인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중앙정보 부 의전국장 스티브 김(한국명 김상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70년 12월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후 중정이 벌인 부정거래행위는 박동선의 활동을 능가했다. 73년 3월 국내 유수의 한 기 업인은 "이후락은 여전히 대통령 집무실을 통해 이권을 따내고자 기업인들의 활동을 부추기는 동시에 감독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당시에 이후락은 비서실장 시절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장악 하고 있었다.
60년대 초 미국이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이 실현성이 없다는 이유로 지원을 거부했을 때 아이젠버그가 필요한 자금을 대주었기 때문에 박정희는 그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프레이저위원회가 조사한 두 미국 기업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 사례를 살펴보자
첫 번째 사례는 69년 삼선개헌 국민투표 때 발생한 것이고, 두 번째 사례는 71년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것이다.
칼텍스가 스위스 은행 이후락 관리 구좌에 정치자금 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