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4일 (11시간30분 종주) 수고 하셨습니다.
인천대간 접수 하셨습니다.
사진에 시간표를 확인하시고 감회에 젖어 봅시다.
산봉우리 길바닥 사진만 올렸습니다. 자세한것은 한남정맥 사진관에서...
계산역 연무정
부평은 옛 후삼한 이전인 직산이 월지국(月支國) 지배하에 있던 우휴모탁국(優休牟琢國)이었다고 전한다.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수백년간 삼국의 격전지로 백성들이 안주할 수 없었던 곳이다. 부평에 읍호가 처음 생긴 것은 고구려 장수왕 58년(470) 주부토군(主夫吐郡)이며 신라가 통일후 경덕왕 16년(757) 12월 당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장체(長堤)로 개칭했는데 그 읍소재지는 모두 확실하지가 않다.
고려 태조 23년(940) 3월 지방제도의 개혁으로 수주(樹州)로 승격되어 계양구 목상동에 있다가 오류동으로 수주청사가 이전되어서 지금도 오리울에는 많은 유적지가 있다.
이 수주가 의종 4년(1150) 안남도 호부로 개칭되고 15년만인 의종 19년(1165) 계양산 랑맥인 중구봉아래(桂山 1洞) 온수골(溫水洞)로 이전된 것이 계산동을 [읍내]로 불리우게 된 시초이다.
그후 읍호가 계양도호부로 개칭되어 93년 또 길주목 2년, 충선왕2년(1310) 부평부로 하여서 부평이란 이름이 처음 생겨 685년간 오늘에 이어져 오고 있다.
조선조 태종13년(1413) 부평도호부로 승격되고 그후 청사가 온수골에서 지금의 부평국민학교 자리에 신축 이전했던 것이다. 이 도호부 산하에 연무청(鍊武聽)을 특설하고 무예를 권장했으며 또한 대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향시의 과장(科場)이기도 했다.
이 연무청 산하에 연무(鍊武), 백호(白虎) 두 사정을 두어 항시 궁도 연마에 힘써왔다 한다.
연무정은 도호부청사 동편에 있어 양반자제들이 모였고 백호정은 부평향교 밑에 있어 서류자제들이 모였다고 전한다.
계양산성의 원형이 보존되고 있는 지역
지금의 연무정이 있기까지 근원적인 궁도 숭상의 후광을 받아 조선조 말기까지 번창하여 1930년대 까지도 매년 편사가 이어져 내려와 몇 단위의 단체시함을 년례적으로 했으니 그때로서는 대행사요 큰 축제였다.
사법은 엄격하여 ㅡ이관을 정제치 않고서는 사정에 출입할 수 없으며 백두(無宮職)로써는 사두(射頭)나 편장이 될 수 없으며 상인(常人)으로써는 감히 집궁할 엄두도 못냈다.
그후 일본 통치하에 일정의 혹치(酷治)가 극심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탄압이 계속되니 사정이 자연퇴락하여 한량들은 사기가 떨어져 폐정에 이르러 부락 단위의 취미나 오락으로 전락됐다.
1945년 을유 해방을 맞아 궁도가 재기되어 이고장에 뜻있는 한량들이 활터를 만들어 마을마다 활쏘는 곳이 생겨 그 중에서도 작전동 안석홍씨 궁방을 중심으로 합일정, 부평을 중심으로 연무정이 가장 큰 활쏘는 터로 사원들이 많이 모였다. 그러나 이 고장에 통일된 사정을 이룩하여 기강과 질서를 바로잡고 옛부터 이어져온 선현의 유업을 계승발전시키고 연무정을 복원하고자 조기준씨는 그 당시 수사원인 이경선, 김달현, 안영규, 박병오, 송연산, 송수명, 임재준, 신복남, 이만석씨등과 합의하고 이에 호응을 얻어 안석홍, 김득수, 박남수, 최명복, 한규배, 김영순, 임병화씨 등과 협모하고 전사원 70여명이 회동하여 합의 하에 통일 사정을 이룩하고 경인고속도록변인 작정동 수도국산 북쪽 기슭에 사정부지를 조성하고 옛이름을 되찾아 "연무정"이라 하였다. 때는 1953년 이른 봄이였다.
그후 뜻을 같이한 이창재, 김홍수의 협조를 얻어 정각 건립위원회를 결성하고 1960년 4월4일 이병철씨의 시공으로 새로운 정각을 세워 동년 5월 16일에 낙성식을 갖고 연무정이 대한궁도협회 산하단체로써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곳에 연무정을 복원한지 15년 그리고 정각을 세운지 8년 되는 1968년(무신) 경인고속도로의 개설로 망동산으로 이건하였다. 이곳 역시 도시계획으로 인하여 이건한지 10년만인 무오년에 이르러 이곳에 더이상 부지할 수 없게 되므로 고향골인 지래굴 산골 깊숙히 자리잡아 1978년 사정을 또 이전하였으나 천만 뜻밖에도 이곳에 인천교육대학이 이전되어 학교부지에 편입되니 또 10년만인 1988년 무진년 계양산 옛성터 아래 현재 이곳에 또 "무"자가 들은해(무신, 무오, 무진)만 골라 세번째로 이전하게 되니 이제는 새로운 건축법에 따라 철근콘크리트 2층 양옥으로 서좌 동관하여 새로 세워 장엄하고 풍치 좋은 경관을 곁들여 체력향상의 연마장으로 정신수양의 수도장으로 전국에서도 손꼽을 수 있는 우수 사정을 이룩하였다.
연무정
이제 우리는 선현들이 남기신 뜻을 후세에 계승발전 시키는 대업을 이룩하였으니 부끄러움 없이 복원비를 올린다.
연무정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옛사원들과 현사원들의 세번이라는 이전중에 물심양면으로 피나는 노력과 협동 동참 없이는 오늘의 연무정이 복원되지 못하였으리라 봅니다.
현재의 정각이 신축할시 사원증에서도 안석홍, 김광수, 송형순, 송형식, 이시경, 문창원님으 솔선수범과 임남호 총무의 희생봉사 정신은 타사원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또한 기록을 위해 애쓰신 조기준 고문님께 감사의 뜻을 전하며 재건당시 사원이 아닌 위치에서 이익진씨의 많은 도움은 용기와 힘이 되었다.
협조하신 독지사원님들은 이세상이 다할때까지 기리며 연무정 유래에 적어둔다.
계양산
계양산(桂陽山)은 인천광역시 계양구에 있는 높이 394m의 산이다. 《동국여지승람》은 진산 또는 안남산이라고도 했다. 계양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계수나무와 회양목이 많이 서식했기 때문이다.[1] 1988년 인천시 시공원 제1호로 지정되었다.
인천시에서 가장 높은 산인 이 산의 동쪽 능선에 있는 계양산성(桂陽山城)은 삼국 시대 때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일명 고산성(古山城)으로 불린다. 축조 형식은 지형 분류상 산정식(山頂式), 방법상(內托式)으로 안쪽은 불규칙한 할석(割石)으로 쌓았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관방성곽조(關防成廓條)〉에 의하면 둘레가 1937보(步)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대부분의 성곽이 훼손된 상태이다.
집수정 바닥에서 《논어》〈공야장〉의 주요 내용이 기록된 목간이 출토 되었는데, 5각형의 각 면에 《논어》의 구절이 먹으로 쓰여져 있다. 한성백제 시기의 유물로 한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목간으로 추정된다.
장맹이고개
인천시 계산동을 잇는 도로다. 도로로 내려서기전 衆心城址 안내판이 있다(인천 서구 공촌동 소재 비지정 문화재임. 정명현 즉 장맹이고개 중심으로 동서 능선을 따라 축조된 산성이였으나 지금은 완전히 없어지고 잔해만 있음. 1866.8(고종3년) 병인양요, 1891 신미양요, 1875 윤요호 사건으로 위협을 느낀 조정이 왕의 칙령으로 1883년 부평부사 박희방이 민중을 동원하여 축조함. 성문은 경명문, 문위에 누각 공해루가 있었음).
도로를 건너 좌측 절개지 철책 옆길을 따라 능선으로 올라서다가 절개지 정상부분 철책구멍을 통과해야 한다. 여기서 계속 오르막이다. 첫 번WO 봉 좌측으로 트래버스하다가 2번째 봉에서 다시 길을 가로막고 있는 무너진 철망을 지나 계속 오르니 또 철조망 문이 나오고 바로 이어서 돌탑이 있는 봉우리다. 돌탑은 약 6m정도이고 그 꼭대기에 깃대가 있다. 돌탑을 쌓은 돌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사연도 많이 적어 놓았다. 이것을 귀엽게 봐 주어야 하나? 아니면 자연사랑하는 마음을 질책해야 하나?
여기서 우측으로 철조망을 따라 조금 진행하면 삼각점과 깃대가 있다. 그런데 깃대가 특이하다. 사각뿔 모양의 구조물에 풍향계 모양을 한 구조물을 얹은 형태다. 우측으로 내려가면 안부이고 이어 송전탑이 나오는 오르막으로 오르면 262m봉이다.
중구봉
계양산에서 큰 활기가 서쪽으로 뻗쳐와 형성된 철마산의 원래 이름은 천마산(天馬山)이었다.
이 곳에 천마가 살았다는 전설, 그리고 이 산의 남쪽 아래에 아기장수가 태어났었다는 전설이 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 산 속에는 양어깨에 날개가 달린 천마가 살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사람들에게 가깝게 보인 적은 없었다. 이따금 말 울음 소리가 들리고, 동이 터 오는 새벽 하늘에 날개를 힘차게 저으며 날아가는 말을 멀리서 본 사람은 더러 있었다.
사람들은 구태여 찾아 올라가 천마를 보려 하지 않았다. 호기심 많고 극성스런 청년들이 온 산을 헤매었으나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근처에 영웅이 태어나고, 그 말을 타고 출정할 것이라는 신령스러운 전설 때문이었다. 조선 중기, 남쪽 아랫마을에 합천이씨(陜川李氏)가 몇 가구를 이루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농사를 지으며 천마산에서 버섯이나 나물을 캐며 살았다. 이 집안에 젊은 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건강하고 착했으며 아내도 부지런하고 얌전하여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부부였으나 결혼 십 년이 지나도록 아기가 없었다. 어느 날 밤, 아내가 호랑이가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남편과 잠자리를 같이하고 꾼 꿈인데다 몽롱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듯한 알 수 없는 기운이 몸에 느껴졌다. 그녀는 아침에 눈을 뜨자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새벽에 길몽을 꿨어요. 아기를 가지려나 봐요.”
꿈 내용을 들은 남편은 희색이 만면했다.
“태몽이면 얼마나 좋겠소?”
부부는 마을의 노인들에게 여쭈었다. 모두들 아들을 얻을 좋은 태몽이 라고 했다.
이씨아내는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지냈고 부인의 배는 점점 불러왔다. 이씨는 아내와 장차 태어날 아기를위하여 열심히 일했고 아내도 길쌈을 그치지 않았다.
어느날 새벽, 마을 사람들은 천마산 깊은 골짜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었다.
그것은 조용히 새벽공기를 흔들며 들려오고 있었다.
사람을 불안하게하거나 위압하는 소리가 아니라 천상에서 울리는 음악처럼 아름답고 품격이 높게 느껴지는, 그리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상서스러운 소리였다.
그날 낮, 이씨의 아내가 아기를 낳았다.
산파역을 맡은 할머니가 말했다.
“ 고추예요.튼실한고추를달고나왔다구요.”
아기엄마와 아버지는 삼신할머니에게 감사했다.
“ 삼신할머니, 이렇게 튼튼한 아들을 점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기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총명해 보였으며 어깨도 넓었다. 아기의 큰아버지 큰어머니등 일가친척들도 달려와 늦게 아들을 얻은 부부를 축하했다.
아기의 몸을 씻고 배내옷을 입히던 산파할머니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 여기를 좀 봐요. 아기등에 북두칠성이 있어요.”
사람들은 그냥 좋은 징조로만 여기고 미소를 교환했다.
아기는 범상하지 않았다. 열흘만에 걸었으며 한달만에 뛰어 다녔다.
그리고 백일이되자 맷돌을 번쩍번쩍 들어 올렸다. 몸도 민첩해서 방바닥에서 벽을 타고 달려올라가 천장을 타고 뛰다가 반대편 벽을 타고 뛰어 내려 왔다.
초가지붕위로 휙휙 날아 올랐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천마산 꼭대기로 달려 올라 갔다.
마을 사람들은 경탄 하였다.
“아아, 우리 마을에 아기장수가 태어났구나!”
아기장수가 태어났다는 소식은 관아에 까지 전해졌다. 고을 사또는 몸소 가마를 타고 마을로 와서 아기를보고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아기장수가 나오면 역적이 되어나라를 해친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그는 아기장수가 콩을 한줌 뿌리면 그것이 병사가되고 팥을 한줌 뿌리면 그것이 모두 군마가 되어 막강한군대를 일으킬 수 있다는 속설을 믿고 있었다.
그는아기의친척중가장나이가든어른에게말하였다.
“ 아기를 광에 가두어라. 내가 조정에 보고를 하면 조치가 내려질 것이다.
만약 명령대로하지 않으면 너희일가가 능지처참 당할 것이다.”
사또가 돌아간 뒤 아기장수의 부모는 아기를 광에 가두고 눈물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때,소문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아기장수를 죽이기 위해 서울에서 관군이 달려 온다는 것이었다.
아기장수와 함께 일가를 모두 죽일 것이라는 말도 들렸다.
아기장수의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말 했다.
“ 아기야,나를 용서해라. 네가 관군에게 잡혀 죽고 일가가 몰살 당하느니 너의 목숨을 내가 끊는게 낫다.”
아기장수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 하였다.
“저를 묻을때 콩다섯섬과 팥다섯섬을 같이 묻어 주세요.”
아버지는 아기장수를 다듬잇 돌로 눌러죽이고 땅에 묻으며 콩과팥을 함께 묻었다.
이튿날 관군이 도착 했다.
“어서 아기를 내 놓아라.”
아기장수의 집안어른들은 관군장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 죽였습니다요. 나라의 역적이 될 것이라고하여 아비가 돌로 눌러 죽이고 묻었습니다요.”
장수는 고개를 끄덕 였다.
“ 나라의 후환을 없애고 우리관군의 수고를 덜어주었으니 잘 한일이 도다. 무덤으로 나를 안내하라.”
관군이 무덤에 이르렀을때 놀라운 일이 벌어 졌다. 아기장수가 살아있고, 아기와함께 묻은 콩은군사가
되고 팥은 군마가 되어 막 아기장수를 호위하여 일어 나려는 것 이었다.
관군장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서 진압하라. 어서 저 역적들을 죽여라!”
아기장수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왜 나를 역적이라하십니까. 머지않아 조국에 쳐들어 올 적군을 맞아 싸우다 죽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관군은 칼을 내리쳐 아기장수를 죽였다.
그 때 였다. 천마산골짜기에서 천마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흔들며 들려왔다.
관군과 마을 사람들은 분명히 보았다. 천마가 힘차게 날개를 휘저으며 달려와 아기장수의 무덤위를 선회하는 것을. 천마는 한나절 동안 그렇게 하늘을 날며 슬피울다가 땅으로 떨어져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기장수의 무덤옆에 천마를 묻어 주었다.
몇해 뒤, 왜군이 쳐들어 왔다. 조선의 군대는 왜군을 당하지 못해 수 많은 목숨과 조선의 강토가 그들의 발굽에 유린되었다. 사람들은 탄식 하였다.
아기장수가 살아 있었으면 천마를 타고 날아다니며 왜적으로 부터나라를 지켰을 것 이라고.
아나지고개
원적산
부평삼거리
만월산
만월산의 유래
원통산→주안산→만월산으로 바뀌었다.
남동구 간석동에 있는 만월산(187.1m)는 옛 인천부 주안면(朱雁面)에 소재한 주안산(朱雁山)이다.
왜 주안산이라 했는가?
이 산의 흙과 돌이 모두 붉은 빛이라 주(朱)자와 산의 형국이 기러기가 나는 것 같다하여 안(雁)자를 붙이어 주안산이라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1861년에 간행된 고산자의「대동여지도」에는 한문 표기에「雁을 岸」 으로 바뀌어「朱岸山」으로 되어 있다.
이 주안산을 주산으로 한 지봉이 서해바닷가를 휘돌아 해안에 접하고 있었으니 朱岸山이라 함도 그리 잘못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元積山을 元寂山으로 옛 지도에 표기되었듯이 우리가 불러 온 모든 이름은 우리의 낱말에서 비롯되어 온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니 한자를 논할 필요성은 없다고 본다.
이 만월산은 한일합방 후 인천지방의 지지조사에 의하면 「인천부 주안면 원통산(元通山, 上十井里 東尾)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1986년에 발간된「한국지명 총람」에 「원통산-선유산, 간석동과 만수동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87m, 신선이 놀았다고 함」이라 기록되어 있다.
옛부터 부평사람들은 주안산으로 부르지 않고 이산을「원통산」 으로 불러 왔으며「원통이 고개」는 원통산에 있는 고개로 지금의 시립묘지 입구인 십정동에서 약사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원테이 고개"라고 불러왔는데, 지금은 그 서쪽에 큰 도로가 뚫리어 이를 "원테이고개"로 모두 부르고 진짜 "원테이고개"는 이름도 빼앗기고 약사사의 벚꽃 상춘객이나 다니는 한적한 소로길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원통산을 선유이라 하여 신선이 놀았다고 하나 산 전체를 살펴보아도 그러한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이 곳의 옛 仁川郡 주안면(朱雁面)은 1914년 3월 1일에 시행한 부·군·읍·면 폐합 때 仁川郡 多所面과 합병하여 머리글자를 따서 多朱面이 되어 새로 생긴 부천군에 예속되었다. 1\
1899년 9월18일 경인철도가 개통되자 주안역 (朱安驛)이 지금의 간석역 자리에 있었다. 그 이름 주안면, 주안산의 주(朱)자와 바로 밑에 임진외란때 고전장인 안대평(安垈坪)의 안(安)자를 따서 「주안」이라 이름지었고 이 역이 그 후 주안염전이 활발해 지자 충훈리로 이전하여 주안역 그대로 불러왔다.
경인전철이 복선화되고 옛 주안면 근방이 도시화되어 옛 주안역 자리에 간석역이 다시 생겼다.
이 주안산이 원통산, 선유산 등으로 불러왔는데 이 산 중턱에 위치한 약사사(藥師寺)의 창건 내력을 살펴보면, 「東方滿月世界 藥師如來 淨瑠璃國」이라는 불국(佛國)을 건설하여 일체 중생의 질병을 치료할 것을 서원하고 1932년 금강산「유점사」에서 수행하던 한보월(韓普月 : 현주지 陵海스님의 부친)스님과 은사이신 晦明스님께서 득도하여 중생교화처를 찾던 중 우연히 꿈에 현몽하셨던 산 모습과 똑같은 곳을 발견하고 본래 산이름인 주안산, 원통산을 「滿月山」이라 고치고 약사암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 약사사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면 큰 바위밑에 옛 절터가 있는데 이 곳은 고려말기에 창건한 사찰로 사세번창하여 늘 백명의 스님들이 수행하여 백인사(百人寺) 라 불러왔으며 이를 주안사(朱雁寺)로 개칭했는데 조선조 성종때 억불숭유정책에 희생의 비운을 맞아 승려는 뿔뿔이 흩어지고 절은 페허가 되어 사라졌다고 전하고 있다.
이 백인사 위의 바위를 「부적바위」라 불러오고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일본 중이 주안산의 정기를 죽이려고 이 바위에 부적을 붙였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이 부적바위 밑에 주안사 옛 절터가 있고 주안산 서쪽기슭에 향기나는「돌우물」이 있어 이물은 약수로 안질, 종기에 특효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서 이 소문이 조정에 알려져 세종 26년(1444)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물맛, 향기, 약효등을 세밀하게 조사했었다고 전한다.
옛 주안사 절터에도 샘물이 있고 지금 약사사 앞의 돌우물은 샘물이 끊어져 페천이 된 것이 있고 간석초등학교 북쪽에 있는 샘물은 옛날 용이 올라간 곳이라 용천(龍泉)이라 불러와서 수많은 사람들이 물을 길어다 먹고 있다.
어느 것이 옛 돌우물인지 좀 더 연구를 거듭하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이 "주안산"을 부평사람들만이 "원통산"으로 불러 온 것이 아니라 옛고지도를 살펴본 즉, 거의 모두가 "원통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선 영조 36년(1760)에 발간된「여지도서」그 후의「광여도」,「지승」,「해동지도」,「경기지」 ,「기전읍지」와 근세인 「부평부지도」(1872), 「부평군읍지」(1899)에 모두 원통산(元通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김정호가 간행한 「대동여지도」(1861)와 철종 때 간행된 「청구도」(靑丘:옛날 중국에서 부른 우리나라의 별칭)에만 주안산(朱岸山)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원래의 산 이름은 원통산(元通山)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부평농장길(만월산터널) 입구
도롱뇽계곡 (만월산)
만수3동, 도롱뇽 지킴이로 나선다.
인천시 남동구 만수3동이 관내 만월산의 도롱뇽 지킴이를 자처하고 나섰다.
만수3동 주민센터는 22일 만월산에서 ‘만월산 도롱뇽 보호를 위한 지킴이’ 발대식을 각 자생단체장 및 단체 회원 80여명이 모인 가운데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한종학·안희태·김정학 구의원이 참석, 자연보호에 대한 관심과 의지를 밝혔다.
만월산 도롱뇽 지킴이 협의회는 동 주민자치위원회를 비롯한 7개 자생단체 회원 154명으로 구성됐으며 작년에 조성된 ‘도롱뇽 서식지 생태학습장’의 도롱뇽 보호에 앞장서게 된다.
장수동 수현부락 외곽순환고속도로 옆길
거마산
인천대공원은 인천 유일의 자연녹지 대단위 공원으로서 연차적 조성사업계획에 의거 공사를 완료 있으며 도시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쾌적한 휴식처를 제공하는 생명의 숲이기도 하다.
仁川(rénchuān) 大公园是仁川
관모산 일대에 걸쳐 있으며 소래산 줄기의 상아산과 거마산을 끼고 있다. 관모산은 산의 모습이 관과 같아서, 거마산은 말이 서 있는 형상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주위가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도심 속에서 농촌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밖에 10㎞ 정도의 산책로가 나 있으며, 산책로 중간에는 인공암벽도 설치되어 있고 꽃과 나무 그리고 분수대가 많이 설치되어 여름에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시민들이 공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생태도우미라는 모임을 만들어 식물교실과 자연학습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미 인천시내의 많은 학교들이 자연현장실습을 하거나 학교 졸업 앨범 등을 인천 대공원 자연을 벗 삼아 찍고 있다.
또한 이곳은 4월초~중순 사이에는 ‘인천대공원 벚꽃축제’라는 축제가 열리는데 인기 가수를 초청하고 많은 행사를 열어 수많은 가족과 연인이 찾아와 즐길수있는 쉼터가 되기도 한다.
와우고개
하우 고개
하우고개라 부르게 된데에는 산의 형태인 와우에서 유래된 것이란 설과 의성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그리고 산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에서 유래되었다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처음의 경우는 이산이 臥牛山이기 때문에 이산을 넘는 고개도 한자로 표기하였다. 이를 우리말로 풀이해 와우고개라 하였다가 와우가 하우로 변해 하우고개로 불리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두번째 경우는 옛날에는 시흥시 뱀내장에서 계양 황어장으로 닷새장을 오가는 장사꾼들이 주로 이 고개를 이용했다고 한다. 이 무렵에는 행인들을 터는 도둑떼가 득실거렸다고 하는데 장사꾼들은 그들이 무섭지만 이 고개 외에는 이용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이 고개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돌뱅이들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산 밑 주막에 모여 떼 지어 고개를 넘었으며, 언제 어디서 도둑떼들의 기습이 있을지 몰라 사람과 소는 가파른 길을 바쁘게 걷다 보니 모두가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찼다. 강행군을 하여 고개마루에 올라서면 안도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절로 나오게 된다. 이 때 나오는 '하우 하우'하는 숨소리의 음을 따 하우고개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세번째 경우는 조선지지 자료에 이 고개를 화오고개으로 표기하고 있는데에서 이 산에 오동나무가 자라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 아닌가 하나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여우 고개
여우고개는 한자로 여우고개라 한 것으로 보아 산의 형세가 소가 누어 있는 모양이므로 소와 같다하여 如牛고개라 했다는 설과 여우는 여위다 하여 변화된 것으로 보아 여윈고개 즉 좁고 작은 고개라는 뜻도 있는 것 같다. 이 고개는 狐峴(호현)이라 한다. 이는 이곳에 나무가 많고 후미진곳이어서 여우가 많이 출현 하였다 하여 붙여진 것으로 본다. 소사 지역의 촌로들 중에서도 여우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고, 도로가 형성되기 전 이곳의 지형으로 보아 신빙성 있는 설이라고 할 수 있다.
성주산
성주산 (일명 와우산)
부천시 남단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부천의 주산이다. 성주산(聖柱山)이라고 표 기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부터 이며 그 이전에는 와우산 또는 댓골산이라고 불렸 다. 특히 하우고개가 있는 부분은 1918년 발행된 <<조선지지자료>>에는 화오현산이 라 고 표기되어 있다. 성주산은 부천시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시흥시 대야등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1917년에 측량한 지도에는 聖主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해발 200미터이다. 성주 산 이라고 한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일제 때 도서관 심곡분관 자리에 1938년 일왕 에게 참배를 강요하던 소사면 신사가 세워졌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일본인들에 의해 붙여진 산 이름이 아닌 가 한다. 성수산은 일명 와우산(臥牛山)이라 한다. 이 산의 형세는, 현재는 시 청사나 멀리 고증건물에서 관찰해야 볼 수 있지만 도 시 화가 되기 이전인 1960년대 까지만 하여도 벌막 쪽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소가 앉 아 있는 형세를 한 눈에 보아 알 수가 있었다. 즉 지금의 상수도 탱크가 있는 고 언저리의 돌출부인 성무정(활터) 쪽 언덕, 즉 서 울신학대학이 있는 뒷편의 돌출부는 마치 소가 앞다리를 굽히고 있는 형상임을 엿볼 수 있고 주봉인 산정상이 소의 엉덩이 부분이 된 형태이며, 여기서 약간 동 쪽에하우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가 잘라 곳은 소의 허리부분에 해당된다 이곳에는 성주산약수 터가 있다. 한편 부천풀장을 찌르듯 돌출된 능선이 바로 소가 엎드려 있을 때 다리를 굽힌 현 상이다. 서쪽으로 길게 뻗쳐 있는 능선 줄기는 소의 꼬리로 보아 소가 누워있는 형 태 이다. 한편 깊은구지 쪽의 성주산은 댓골산으로 불렀다. 이곳의 서쪽에 1960년대까지 암 자가 있었는데 산동네로 불리고 있다.
소래산
만의골 하산길(외곽고속도로)
은행나무아래에서 축하연(팡파레)이 개최 되었습니다.
종주 코스 계산역-연무정-계양산정상-중구봉-철마산-천마산-철마산-원적산-호봉산-만월산-거머산-성주산-소래산-만의골 은행나무 (14개 봉우리 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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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만식이랑 동수가 젤 어리게 보인다야
ㅋㅋㅋ 그래서인지 조위에산악회 회장이 나보고 자주나오란다...ㅎㅎ 근데 만식이말대로 우리스타일은 아니라서 간혹가다나 가봐야징...ㅎㅎ
저기 사람잡는 산악회야 정운인가 청운이 아니구 사람 정기 쪽쪽 빠는.토욜에 장타쳣음 관악산 아예 얼굴도 못 디밀엇어.ㅎㅎ
난 처음에 만식이 이름이 만득이 인줄알았는데...^^
넌 만득이로 부른날 봣으니 글치 잘기억해 만식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