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 [일]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2001 - 인기 댄스그룹 H.O.T. 사실상 해체 인기 댄스그룹 H.O.T. 가 멤버 가운데 세 명이 그룹을 탈퇴, 사실상 해체됐다. H.O.T. 멤버인 토니안(안승호) 이재원 장우혁은 2001년 5월 13일 기자회견을 열고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이 끝나 5월 11일 `예전미디어`와 전속계약을 맺었다"면서 "팬들과 함께 영원히 H.O.T. 로 활동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이로써 H.O.T. 멤버는 강타 문희준 2명만 남게 됐으며, H.O.T. 는 1996년 9월 데뷔 이후 4년8개월 만에 사실상 해체됐다. H.O.T. 의 해체는 그동안 재계약을 둘러싼 잡음이 커지고 강타와 문희준이 솔로 데뷔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소문만이 무성했으나 이날의 발표로 해체가 사실임이 확인됐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10대 여학생 300여명이 서울 청담동에 있는 SM엔터테인먼트 사옥 앞에 몰려가 도로를 점거한 채 `H.O.T 해체 반대`를 외치며 3시간 동안 항의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조선
1981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피격
1973년 제5차 5개년경제계획 시행 중 석유·중화학공업에 치우친 나머지 보수 시아파의 반(反)팔레비투쟁이 격화되기 시작해 결국 1979년 1월, 팔레비는 이집트로 망명하고, 반정부 이슬람혁명을 주도한 호메이니가 이슬람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naver
1975 - 긴급조치9호 선포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긴급조치9호` 일명 긴급조치9호를 1975년 5월 13일 선포했다. 이는 앞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겪을 시련을 의미했다.
1940 - 처칠 영국 총리 취임 1940년 5월 13일 윈스턴 처칠이 네빌 체임벌린의 후임으로 영국 총리에 취임했다. 젊은 시절에 언론인·군인 등의 경력을 가졌던 처칠은 1900년 10월 올덤에서 보수당 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다시 자유당으로 소속을 옮긴 그는 자유당 내각에서 식민차관, 애스퀴스 내각에서 통상장관·내무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1924년 다시 보수당에 입당한 처칠은 1939년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해군장관에 임명되었다. 1940년 5월 13일 신임 총리에 오른 처칠은 의회 연설에서 "나에게는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 이외에는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의 상징이 된 'V' 사인으로 사기를 진작시키고, 여러 중요한 회담을 성사시키는 등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활동은 그를 뛰어난 전쟁지도자로 만들었다. /브리태니커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의 네덜란드 침입 등으로 인해 체임벌린은 사임하게 되었다. 체임벌린의 후임으로 총리직에 오른 처칠은 참다운 거국 내각을 실현하기 위해 이전의 적대 관계를 뛰어넘어 노동당도 연립정부에 참여시켰다. 1940년 5월 13일 신임 총리로서 의회에서 행한 최초의 연설에서 그는 "나에게는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 이외에는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했으며, 전원일치의 신임투표를 얻었다. 엠파스 백과 100.empas.com /Google
미국의 항공기 제작기술자 시코르스키(Sikorsky, lgor, 1889~1972)는 대형 비행기와 헬리콥터의 개발에서 실용화에 이르기까지 큰 공적을 남겼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는 헬리콥터와 비행기의 설계 ·제작에 종사하였으나, 러시아혁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꿈이었던 여객수송용 대형기의 설계 및 제작을 시작하였다. 그의 작품 중에는 S-40, S-42, S-44 등 세계기록을 수립한 클리퍼 시리즈가 있다. 그는 또한 헬리콥터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1939년 VS-300을 비롯한 헬리콥터 실용화에 주력하였다. 오늘날 헬리콥터에 사용되고 있는 주된 기구는 1931년에 취득한 특허와 그가 이룩한 초기 기체의 개발연구 속에 거의 다 포함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계속 신형 헬리콥터를 개발함으로써, 실용적인 교통기관으로서의 헬리콥터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naver
오슬로 근교 프뢴에서 출생하였다. 크리스티아니아대학교(현 오슬로대학교)에서 동물학을 공부하였다. 1882년 그린란드를 탐험하고 돌아와서는 베르겐의 자연사박물관에 근무하였다. 1888년 그린란드를 횡단, 고트호프에서 월동하는 동안 에스키모의 생활을 연구하여 《그린란드의 최초의 횡단》(1890)과 《에스키모의 생활》을 썼다. 1893∼1896년 프람호(號)로 북극탐험에 나섰으며, 북위 83°59'까지 표류하다 F.H.요한센과 함께 배에서 내려 개썰매와 카약을 이용하여 북위 86°14'지점에 도달하였다. 이 지점은 당시까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북방이었다. 이 탐험기록을 《극북(極北)》(1897), 《노르웨이의 북극탐험》(1900∼1906) 등에 남겼는데 북극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1897년 모교의 동물학 교수, 1906∼1908년 노르웨이의 영국 주재 초대대사 및 해양학(海洋學) 교수를 역임하였다. 1910∼1914년 북대서양·북극해 및 시베리아의 탐험에도 참가하였다. 1918년에는 국제연맹의 노르웨이 대표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포로의 본국송환·난민구제에 힘썼으며, 1921∼1923년 러시아적십자 기근구제사업의 총관리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평화사업에 공헌한 업적으로 192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고, 1927년에는 국제연맹군축위원회의 노르웨이 대표가 되었다. 그 밖의 주요 저서에 《북극해의 해양학》(1902) 《시베리아를 지나서》(1922), 《아르메니아와 근동(近東)》(1928) 등이 있다. /naver
미국 최초의 항공우표는 미국의 첫 공식적인 항공우편비행 2일전인 1918년 5월 13일 발매되었다. (미국 최초의 항공우편비행은 5월 9일 시카고-뉴욕간 항공우편서비스 개시로 커티스 제니 우편기가 시카고-뉴욕간 미국 최초의 항공우편 수송을 했다는데... ^.@)
뒤집힌 제니[Inverted Jenny] 일반인들에겐 'Inverted Jenny'는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구식 쌍엽기가 인쇄된 오래된 우표에 불과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Curtiss JN-4(일명 Jenny)라 불리는 비행기가 뒤집혀 인쇄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명 J.L.Barrow. 앨라배마 렉싱턴 출생. 4세 때에 농업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족과 함께 디트로이트로 이주하여 18세부터 권투를 시작하였다. 1934년 프로 권투선수가 되고 1937년 6월 22일 시카고에서 J.브러도크를 8회전에서 KO로 이겨 헤비급 세계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이후 불패의 기록을 세우면서 1949년 3월 1일에 은퇴를 발표할 때까지 12년 동안 타이틀방어 25회(23KO)라는 세계최고기록을 세웠고, ‘갈색의 폭격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1950년 36세로서 또다시 링으로 복귀하여 9월 27일 뉴욕에서 29세의 찰즈에게 도전하여 15회전까지 싸웠으나 판정으로 패했다. 1951년 은퇴하고 1954년에 복싱 홀 오브 페임(The Boxing Hall of Fame)으로 선출되었다. /naver
1913년 5월 13일, 흥사단(興士團)이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의 주도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됐다. 정치운동을 초월하고 민족부흥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창립 취지였다. 일제하에서 인격수양과 실력양성을 강조하다 보니 ‘싸움을 회피하는 준비론’이라는 비판론도 제기됐지만 흥사단은 언제나 있어야 할 곳을 묵묵히 지켰다. 3·1운동 후에는 상하이에 원동위원부를 조직,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고, 서울과 평양에는 수양동맹회(1922년)와 동우구락부(1923년)를 결성, 국내에서 합법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두 단체는 이후 수양동우회(1925년)로 통합됐다가 다시 동우회(1929년)로 개칭됐으나 1937년에 불어닥친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200여명의 회원이 검거·투옥돼 강제해산되는 비운을 겪었다. 광복 후에는 본부를 국내로 이전했고 1969년에는 사단법인으로 등록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
런던 출생. 할아버지 조지는 화가 겸 소설가로, 아버지 제럴드는 배우 겸 연출가로 유명하다. 여류작가 맨스필드, 웨브 등의 영향을 받아 19세 때부터 시와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영국 공포소설의 전통에 심리주의적 기법을 가미한 작품으로, 《자메이카관(館)》 《레베카 Rebecca》(1938)는 출판 당시 베스트셀러의 세평이 높았다. 그 후 두 작품이 모두 영화화되어 그녀의 명성을 한층 높였다. 그 밖에 역사소설도 많이 썼고, 전기작가로서도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그녀의 아버지의 전기 《제럴드, 하나의 초상》(1934) 외에, 1810년부터 50∼60년에 걸친 뒤 모리에가(家) 3대의 역사를 그린 《뒤 모리에 일가(一家)》(1937)가 있다. /naver
마리 퀴리(Curie, Marie, 1867~1934)는 1895년 앙리 베크렐이 우라늄에서 새로운 현상(그녀는 나중에 이 현상을 '방사능'이라고 불렀다)을 발견하자, 이에 자극을 받아 방사능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1974~77년 대통령을 지냈다. 아삼 출신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난 아메드는 인도에서 교육을 받은 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1927년에 졸업했다. 인도로 돌아온 그는 아삼 주 의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1935). 1938년에 그는 아삼 주 재무장관으로서 급진적인 과세 조치를 시행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국민회의파는 영국군과 대립했고, 아메드는 1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 그는 석방되자마자 다시 3년 6개월 동안 투옥되었다가 1945년 4월에 석방되었다. 1946년에는 아삼 주 법무장관에 임명되어 6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인도연방 의회에서 한 차례 임기를 마친 뒤 아삼 주의 정치계로 돌아왔지만, 1966년 1월에 인디라 간디 총리는 그를 그녀의 초대 내각 각료로 임명했다. 그는 간디 내각에서 관개·동력장관, 교육장관, 산업개발장관, 농업장관 등 다양한 장관직을 맡았다. 아메드는 1974년에 인도 제5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성품이 조용하고 말투가 부드러운 인물이었다. /브리태니커
생애의 대부분을 교사와 이탈리아 주재 브라질 대사관의 문정관으로서 보냈으나, 1930년 이후 브라질 모더니즘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초기의 시는 반어적인 해학과 구어적 어휘가 특징인데, 브라질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창조적이고 무질서한 힘들을 조명해준다. 후기 작품에서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점차 커지며, 1934년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한 뒤, 조르제 데 리마와 공동으로 〈순간과 영원 Tempo e Eternidade〉(1935) 같은 형이상학적인 시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중 몇 편에는 우화적인 요소가 함축되어 있다. 이후에 나온 많은 시는 세속과 종교적 초월의 세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증법적 긴장을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 20년 동안 출판한 시에서는 전통적인 스페인 운문에서 나타나는 고도의 명징성과 '무미건조함'을 나타내려고 노력했는데, 이것은 후에 주앙 카브랄 데 멜로 네토에게 영향을 미쳤다. 또한 구체주의 기법을 실험하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1882 - 프랑스의 화가 브라크(Braque, Georges, 1882~1963) 출생 파리 근교 아르장트유 출생. 피카소와 함께 큐비즘(입체파)을 창시하고 발전시킨 작가로서, 20세기 미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건축장식에 종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으며 1900년 파리로 나와 아카데미 쥘리앙에 들어간 후 포비슴(야수파)의 감화를 받았다. 그러나 1907년부터는 세잔의 구축적(構築的)인 작풍에 열중하여 이를 연구하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피카소와 알게 되어, 협력하여 큐비즘을 창시, 이 획기적인 사고(思考)를 분석적 큐비즘의 단계에서 종합적 큐비즘으로 전개하였다. 또 1912년경에는 P.클레와 그림물감에 모래를 섞는 등 새로운 기법을 개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징집되어 부상하였으나, 소집이 해제된 1917년부터 다시 왕성한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피카소가 카멜레온처럼 자주 변모하는 데 비해 그는 자신의 본래 개성에 따라 차분히 큐비즘의 가능성을 탐구하였다. 초기에는 풍경을 주로 그렸고, 중기 이후는 정물·실내·인물 등을 주제로 삼았는데, 그 구성의 밑바탕에는 항상 이성(理性)과 감각의 미묘한 조화를 최대로 중시하는 프랑스인적인 전통이 풍긴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채감은 만년에 이를수록 더욱 우아한 세련미를 더하였다. 주요작품에 《앙베르항구》 《레스타크의 짐들》 《기타를 든 남자》 등 다수가 있다. /naver
1857년 5월 13일 인도 알모라에서 출생하였다. 1875년 런던의 세인트 바솔로뮤병원 의학교를 졸업, 인도 군의단(軍醫團)에 입단하였다. 1892년 말라리아 연구를 시작하여 1894년 모기가 말라리아 전파에 관계가 있다는 C.A.라브랑, P.맨슨의 학설의 연구를 시작, 1897년 인체와 모기 체내에서의 말라리아 원충의 생활사를 연구, 말라리아의 전파경로를 밝혀냈다. 1899년 군의관직을 사임, 서아프리카로 건너가, 말라리아를 전파하는 모기가 아노펠레스(말라리아 모기)라는 것을 규명하는 데 성공하였다. 1902년 리버풀 열대병 의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말라리아에 관한 일련의 연구업적을 인정받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1912년 리버풀을 떠나 런던으로 가서 킹스 대학병원 고문의가 되었다. 1923년 왕립열대병학교 병원원장, 1926년 로스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그 밖에 수학·시·소설·속기술 등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저서로는 《말라리아 예방법 The prevention of Malaria》(1910)이 있다. /naver
런던 출생. 12세 때 왕실예배당의 성가대원이 되고, 14세 때 장학금을 받아 왕립음악원에 입학, 그 후 독일 라이프치히음악원에 유학하여 작곡 ·대위법 ·지휘 ·피아노 등을 배웠다. 1861년 귀국하여 런던에서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작곡가로 일하다가 65년 왕실음악원의 작곡과 교수가 되고, 그 이듬해에 《그로브음악사전》으로 유명한 G.그로브와 빈에 가서 《로자문데》를 비롯한 슈베르트의 자필 악보를 발견하였다. 1871년부터는 극작가 W.S.길버트와 짝을 이루어 이른바 ‘길버트-설리번오페라’인 《마법사 The Sorcerer》(1877) 《군함 피나포어 H.M.S.Pinafore》(78) 《펜잔스의 해적 The Pirates of Penzance》(79) 《미카도 The Mikado》(85) 《곤돌라의 사공 The Gondoliers》(89) 등 19편의 희가곡을 발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 밖에도 관현악곡 ·기악곡 ·종교악곡 등을 작곡하는 한편, 교수 및 지휘자로도 활약하였다. /naver
풍부한 서정과 잔잔한 묘사로 애독되는 소설 《별》과 이 소설이 실린 단편집 《방앗간 소식 Lettres de mon moulin》(1866)으로 문명(文名)을 확립하였다. 소설로는 《프티 쇼즈 Le Petit Chose》(1868) 《쾌활한 타르타랭 Tartarin de Tarascon》(1872) 《월요이야기 Les Contes du lundi》(1873) 《젊은 프로몽과 형 리슬레르 Fromont jeune et Risler aîné》(1874) 《자크 Jack》(1876) 《나바브 Le Nabab》(1877) 《뉘마 루메스탕 Numa Roumestan》(1881) 《전도사 L’平vangé -liste》(1883) 《사포 Sapho》(1884) 《알프스의 타르타랭 Tartarin sur les Alpes》(1885) 《불후(不朽)의 사람》(1888) 《타라스콩 항구 Port-Tarascon》(1890) 등이 있고, 수상집에는 《파리의 30년 Trente ans de Paris》(1888) 《한 문학자의 추억 Souvenirs d’un homme de lettres》(1889) 등이 있다. 희곡으로는 《아를의 여인 L’Arlésienne》(1872)이 있는데, 비제가 작곡함으로써 유명해졌다. 그는 친교를 맺은 문인들과 더불어 자연주의의 일파에 속했으나, 선천적으로 민감한 감수성, 섬세한 시인 기질 때문에 시정(詩情)이 넘치는 유연한 문체로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고향 프로방스 지방에 대한 애착심을 주제로 하여 인상주의적인 매력 있는 작풍을 세웠다. /naver
프랑스의 동물학자인 퀴비에가 1832년 5월 13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퀴비에는 본래 슈투트가르트 카롤리레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으나, 바다동물을 연구하여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자연과학쪽으로 연구방향을 돌렸다. 퀴비에는 비교해부학과 고생물학을 확립한 사람이다. 비교해부학은 여러 동물의 형태나 구조를 서로 비교 연구하는 학문이고, 고생물학은 화석을 통해 고생물의 구조, 생리, 생태 등의 역사적 변천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탈리아 출생. 1827년 스폴레토의 대주교가 되었고, 추기경을 거쳐 교황이 되었다. 자유주의적인 경향을 가진 교황으로서, 그의 즉위가 때마침 왕성한 국가통일운동의 시기에 있었기 때문에 널리 환영을 받았다. 특히 V.지오베르티 등 온건파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제국의 연합에 의하여 통일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제1차 이탈리아-오스트리아전쟁이 시작되자 ‘보편적(가톨릭)’인 교회의 장(長)으로서의 교황의 입장과 이탈리아 민족주의가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로마에서도 공화파의 세력이 확대되고 폭도들에 의해 교황 별장이 점령되자, 교황은 로마를 떠났다(1848년 11월∼1850년 4월). 그 후로 교황은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등의 지원을 얻어 내외(內外)의 자유주의적 세력과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의해 1859년 교황령 로마냐, 움브리아 등을 잃고, 1861년의 국가통일 이후로는 교황이 보유하던 로마와 라치오도 1870년부터 이탈리아 왕국에 통합되어 세속권을 빼앗기고, 교황은 바티칸궁에 칩거(蟄居)하며 계속 이탈리아 왕국과의 타협을 거부하였다. 교리(敎理)에 있어서는 <성모무원죄회태(聖母無原罪懷胎)> <교황 무류성(無謬性)>을 선언하였다. /naver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1773년 메지에르공병학교를 졸업하고 수비대 장교로 복무, 1783년 대위로 승진하였다. 1789년 상관에 대한 무고죄(誣告罪)로 육군감옥에 2개월간 투옥되었고, 그 해 혁명이 일어난 후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1792년 국민공회(國民公會)의 의원으로 당선, 에스파냐의 공격에 대비하여 방어체계를 구축할 목적으로 베욘에 파견되었다. 1793년 산악당(山岳黨) 의원으로서 국왕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동하고, 3월 이후 북방군에 파견되어 프랑스군의 패세를 만회하는데 공을 세웠다. 8월 공안위원회의 군사담당관으로 선임되어 국민공회에 보고서를 제출, 그에 따라 총원징집법(總員徵集法)이 가결됨으로써 50만 명의 신병이 징집되고, 연내로 11개 군단과 63만 명의 군대가 편성되는 한편 군수생산이 촉진되었다. 또한 공안위원회 우파로서 로베스피에르의 독재에 저항하였고, 1795∼97년 총재정부의 총재의 한 사람이 되었으나, 1797년 쿠데타로 스위스로 망명하였다. 1800년 귀국하여 나폴레옹에 의하여 육군장관이 되었고, 1815년 내무장관이 되어 그 해의 워털루패전 후에도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정복고 후에 추방되어 독일의 마그데부르크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생애를 마쳤다. /naver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의 대공,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1740~80 재위)이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1745~65 재위)의 황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1765~90 재위)의 모후이다. 합스부르크 왕가 카를 6세의 맏딸로, 카를 6세는 외아들이 사망하자 딸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는 이른바 국사조칙이라는 법령을 내렸고, 대부분의 열강이 이를 승인했다. 그러나 카를 6세가 죽자 상속권을 둘러싸고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을 넘겨 주었으나, 영국과 손을 잡고 국사조칙에 대한 각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프리드리히와 함께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공격한 군주들 가운데 하나인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베르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선출되기도 했지만,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 프란츠 스테판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녀가 모든 국정을 담당했으며, 군사력 증강에 주력했다. 슐레지엔 수복을 목표로 프로이센과 7년전쟁을 일으켰지만, 프랑스와의 동맹으로 영국이 등을 돌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브리태니커
"진실로 사랑하고 자신의 의무를 알고 있다면 그 무엇도 어려울 것이 없다. 바로 그로 인해 행복과 만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마리아 테레지아
리스본 출생. 1733년 왕립역사학회 회원이 되었고, 1738∼1749년 외교관으로서 런던과 빈에서 근무하였다. 1750년 국왕 주세 1세 즉위와 함께 외무장관이 되었고,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때 신속한 사회정책적 처리로 신임을 얻어 이듬해 총리가 되었다. 계몽주의 독재자로서 영국의 경제적 지배에 대항하기 위해 산업의 자본주의적 발전에 노력하였고, 귀족에 대한 탄압 및 예수회 등에 대한 추방으로 1759∼1764년 교회를 왕의 직할로 하였다. 교육도 계몽주의의 새로운 교육법으로 바꾸고 노예제도 및 신구 그리스도교도의 차별도 폐지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식민지 교역확대에 힘썼고, 제조업자 보호육성, 포도주 수출증강 등 국내산업 진흥정책을 추진하였다. 주세 1세가 죽은 뒤 1777년 실각하였으나, 노예제 폐지와 자유무역 실시 등의 업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yahoo |
첫댓글 귀한자료 고맙습니다. 우리 우취인들은 꼭알아야할 상식같네요.
와...이렇게 좋은자료 올려주시니 우취인들이 모두들 참조할 내용이네요. 우표사랑님은 우리회의 보배....
우표로보는역사,참좋은내용들 입니다. 언제나 좋은우표상식올려주시는 우표사랑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학창시절의 우표 참 그리웠지요. 우표로 보는 역사 새로움을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