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천안문 사건의 도화선 | |
▲ 베이징대 학생들은 '민주살롱(Democracy Salon)'이라는 동아리를 조직하고 중국민주의 앞날에 대해 열렬한 토론을 벌리곤 했다. 6.4민주운동의 주역 왕단(王丹)이 이날 모임에서 발언하고 있다.(1989. 4.15)
천안문광장 인민영웅기념비 앞(1989년 4월 17일)
100여명 대학생이 부상입었다. 이는 학생운동에 불을 지폈다.(1989년 4월 20일)
▲ 장례식이 끝난 후, 세 명의 학생 대표가 인민대회당 앞 계단에 45분동안 꿇고 앉아 당시 안에 있었던 리펑에게 탄원서를 받아 줄 것을 요구했지만 리펑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이 후 학생들은 휴학을 선포했다.(1989년 4월 23일)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4.23~27)
▲ 관영 '인민일보'는 '반드시 기치 선명하게 동란을 반대해야 한다'는 사론을 발표하여 학생운동이 계획있는 음모이며 반당, 반사회주의 동란이라고 평가했다. 4.26사론은 학생운동을 더 자극했다.
정부의 허위대화와 단식투쟁 (4.29~5.13)
그러나 이것은 허위 대화였다.(1989년 4월 30일)
한편 대학생들은 머리에 "인권을 돌려달라, 말할 권리를 돌려달라"라는 띠를 두르고 자전거를 이용하여 베이징 시내를 돌아다니며 탄원에 나선 베이징 기자들을 성원하고 있었다.(1989년 5월 13일)
대학생들은 모두 정부가 쉽게 타협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옷과 이불을 가져오지 않았다
단식투쟁 이틀째 (89.5.14)
단식투쟁 삼일째 (89.5.15)
각계 성원
-학생 가장으로부터
단식투쟁 4, 5일째 (89.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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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식 투쟁 4일 째, 의대학생들이 쓰러진 동학을 구하고 있다
▲ 베이징대 생물학과 대학원생 펑룽(彭嶸),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그는 6.4후 감옥에 들어갔다.
▲ 한편, 자오쯔양 총서기는 이날 베이징을 방문한 고르바쵸프와의 회담을 마지막으로 TV에서 사라졌다(1989년 5월 17일)
▲ 단식 투쟁 5일째,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여학생 차이링(柴玲)이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 불교계 스님들도 학생들을 성원하러 왔다. "금강이 눈을 부릅뜨고 있다, 영웅은 두려움이 없다"
▲ 상하이 푸단대, 과학기술원 학생들, '법을 무시하는 장쩌민, 사직하라!'
▲ 상하이 시민 성원단, 이 팀의 조직자는 6월에 체포되었다
▲ 이날 학생들을 성원하는 인파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
▲ 천안문 광장의 설문조사 결과 대부분 사람들이 학생운동은 애국 민주운동이라 했다<북경청년보>
▲ 완리(萬里) 위원장, '학생운동은 애국 운동' <경제일보>
▲ 자오쯔양, "학생들의 애국 열정을 긍정한다. 당과 정부는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며 단식 투쟁을 중단하고 건강을 회복하기 바란다"
▲ 고르바쵸프의 중국 방문 취재차 온 외신기자들이 학생운동을 뜻밖에 목격하게 되어
앞다투어 취재에 유리한 장소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다(1989년 5월 18일)
단식투쟁 6일째 (89.5.18)
▲ 단식 투쟁 6일째, 이날 비가 내렸다
▲ 아직 활기를 잃지 않은 대학생
▲ 베이징병원 구호대
▲ 이날에도 성원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베이징 노동자들
▲ 베이징 경찰학교의 성원
▲ 법관들, "중국은 민주가 필요하다, 중국은 법치가 필요하다!"
▲ 중학생들, "형님, 누나들이 굶고 있으니 동생들은 괴롭습니다"
▲ 상하이, "자유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버릴 수 있다!", "학생들을 구하라!"
▲ "물 한 컵에 마음을 담아 봅니다"
▲ 상하이 화동화공대 교사, "학생들을 지지한다, 부패한 관리들을 타도하자!"
▲ 상하이, "<도보(導報)>는 영원히 학생들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 나중에 장쩌민에 의해 폐간되었다
▲ 상하이 해방일보, "우리는 황제가 필요없다"
▲ 이날 단식하고 있는 대학생들을 찾은 자오쯔양이 한 여대생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단식투쟁 7일째,
중국 당국 계엄령 선포 (89.5.19)
▲ 단식 투쟁 7일째, 천안문광장에 있는 학생들의 집이 된 공공버스
▲ 그러나 직접 단식에 나선 학생들만 버스 안에 있을 수 있었고 나머지 학생들은 계속 밖에서 잠을 잤다
▲ "쓰레기장 같은 바닥에서 잠자기 괴로운 학생들은 버스 지붕 위에 올라가 잤지만 거기는 더 춥고 위험했습니다"
▲ 베이징 항공대 박사들
▲ 19일 아침, 밤새 추위에 몸이 굳은 학생들이 햇빛으로 몸을 녹이고 있다
▲ 1989년 5월 19일, 중국 청년들은 민주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다
▲ 상하이 시정부 앞에 자유여신상을 세워놓고 단식하고 있는 상하이 대학생들
▲ 상하이 사범대 교수와 강사
▲ 네이멍구자치구에서 온 성원단
▲ 베이징 제약연구소, "민심을 잃으면 강산을 잃는다"
▲ 이날 새벽4시, 자오쯔양 총서기가 갑자기 천안문 광장으로 찾아왔다. 그는 학생들 앞에서 확성기를 들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너무 늦게...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아무 상관없지만... 여러분 같은 젊은이들이 큰일인데...여러분들의 요구는 언젠간 받아들여질 겁니다”라고 발언해 학생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당시 그는 이미 당내부에서 배척된 상태였으며 이후 사람들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뒤에는 당시 자오쯔양을 보좌했던 원자바오(溫家寶)가 보인다.)
▲ 저녁 10시, 리펑(李鵬)이 다음날부터 계엄에 들어간다고 선포하고 양상쿤(楊尚昆)은 군대를 지휘했다
(1989년 5월 20일)
계엄군을 저지하라 (89.5.20~21)
▲ 계엄령이 발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대학생들이 목숨으로 천안문광장을 수호할 것을 결심하고 있다
▲ 베이징 국제관계대 학생, "결사대 -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들어 가겠는가"
▲ 계엄령이 발포되었지만 계엄부대는 막아나선 시민과 학생들 때문에 북경시내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정부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시민여러분, 군대 차량이 절대 여기를 통과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 군대 차량 진입을 막고 있는 시민과 학생들(1989년 5월 21일)
▲ 계엄군이 막아 나선 시민들때분에 교외에 머물러 있다
▲ 200여대의 계엄군 차량이 베이징 시내에서 20km 떨어진 펑타이(豊臺)에 머물러 있다
▲ 베이징 시민들이 계엄군의 진입을 막고 있다
▲ 베이징 교외에서 공공버스가 계엄부대의 진입을 막고 있다
▲ 대학생들이 계엄군에게 민주화 운동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 일본 각지에서 모인 3천여 중국 유학생들이 계엄을 반대하고 있다.
"새로운 나치", "폭정을 반대한다, 민주만세"
▲ 미국에 있는 중국 유학생들이 뉴욕에서 계엄반대 시위를 펼치고 있다.
▲ 이날 저녁 계엄군의 헬기가 천안문 광장 상공을 맴돌고 있다(1989년 5월 22일)
리펑 물러나라 (89.5.22~5.23)
▲ 학생들이 계엄령에 대항하여 시위를 벌였다 "덩샤오핑 물러나라! 리펑 물러나라!"
▲ 공안이 한 시민을 구타하고 있다
▲ 시민들이 공안을 에워싸고 질책하고 있다
▲ "오늘 저녁 낙하산 부대가 출동한다고 합니다"
▲ 영국 유학생 "학생운동을 성원하고 계엄령을 반대한다!"
▲ 독일 유학생 "학생 민주운동을 성원한다", "독재를 종식하라!"
▲ 모스크바 유학생들의 성원
▲ 美 샌프란시스코 "중국의 운명이 개변될 시기가 왔다, 민주와 법치, 그리고 다원화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 "자오쯔양을 지지한다", "인민의 힘 만세!"
▲ 필리핀 마닐라 "학생들의 마음은 하나로 이어졌다"
▲ 한 편 시민들은 계속 계엄부대 군인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1989년 5월 23일)
▲ "리펑이 물러나지 않는 한 우리는 매일 올것이다", "리펑을 타도하자" - 베이징 칭화대 학생들
▲ 5월 하순, 천안문 광장에는 학생들의 텐트가 늘었다
▲ 이날 오후 폭우가 내렸지만 학생들은 천안문 광장을 계속 지키고 있었다
▲ 베이징으로 달려온 안후위(安徽)성 대학생들
▲ "베이징은 총칼 아래서 살고 싶지 않다"
▲ 고령의 농대교수가 학생들을 찾아와 성원해 주었다
▲ 퇴역 장애자 군인이 지팡이에 "학생들을 지지하고 부패를 반대한다"를 표어를 써 붙였다
▲ 제38군 군관이 "절대 학생들에게 총을 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군관은 체포되었다)
▲ 후난성에서 온 세 명 영웅이 천안문 마오쩌둥 초상화에 페인트를 뿌려 천으로 가리고 있다.
각각 신문사 미술 편집장, 초등학교 교사, 버스회사 직원이었던 그들은 지금까지 감금되어 있다.
▲ 마오쩌둥 초상화는 그날밤 새것으로 다시 교체되었다
계엄령 5, 6일째(89.5.24~5.25)
▲ 천막 텐트를 지키고 있는 여대생들
▲ 학생운동 후기에는 청결이 큰 문제가 되었다. 학생들이 이불을 정리하고 있다
▲ 인민기념비 아래에 있는 '학생운동의 목소리' 라디오 방송국
▲ "리펑 물러나라"
▲ 시민들의 시위대
▲ 상하이 동제대 "리펑, 또 하나의 나치"
▲ 쓰촨성 청두 시민들의 성원
▲ 베이징 학생들이 군인들에게 여전히 민주가 무엇인지 열심히 설명해 주고 있다(1989년 5월 26~27일)
영원한 자유의 여신상 (89.5.26~6.3)
▲ 5월 26일 저녁, 학생들은 지쳐가고 있는 동학들을 위해 음악회를 열었다.
몇 십만의 베이징 시민들이 이날 음악회에 몰려들었다.
▲ 학생운동 지도자이자 베이징 체육대 학생 장졘(張健)이 너무 지쳐서 음악회에서 자고 있다. 6월 4일 새벽, 총탄 3개를 맞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장젠은 12년 동안 힘든 은둔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프랑스로 망명했다. 아직까지 그의 몸에는 탄알 하나가 남아있다.
▲ 학생지도자 장졘(張健)
▲ 학생지도자가 다음 행동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 6.4학생 운동의 주역인 왕단(王丹, 21)은 베이징대 역사학부 1학년 학생이었다.
그는 6.4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베이징대에 '민주살롱'이란 동아리 회장으로
활약한 바 있으며 일찍부터 민주에 눈을 떴다.
▲ 학생운동 지도자 차이링(23), 베이징대를 졸업한 베이징 사범대 대학원생.
1990년 4월 프랑스로 망명후 미국 프린스턴대와 하버드대에서 국제관계학과
MBA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지금은 보스턴의 한 인터넷회사 사장으로 있다.
▲ 5월 28일, 학생들은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행사를 가지고 전세계 중국인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계엄령을 취소하고 리펑을 해직하라"
▲ 5월 28일, 베이징 중앙미술대 학생들이 자유의 여신상 만들기 작업에 들어갔다.
파리에서 뉴욕으로 간 자유의 여신상이 베이징에서는 순조롭게 세워질 수 있을지...
▲ 5월 29일 저녁 6시, 중앙미술대 캠퍼스에서 초벌 완성된 대형 여신상은 3부분으로 나뉘어져 천안문 광장으로 운반되어 왔다.학생들의 밤샘 작업을 거쳐 30일 새벽, 마침내 자유의 여신상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떠오르는 아침해가 중국의 희망을 말해주는 것 같다...
▲ 이날 아침 자유의 여신상이 완성되었고 학생들은 경축행사를 가졌다.
'낙성선언'에서 "석고로 만든 자유의 여신상은 영원히 보존할 수 없지만
얼마 후 암흑이 가고 광명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마오 초상을 마주보며 세운 자유의 여신상은 6.4 학생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 5월 31일, 거센 바람과 함께 폭우가 내려 사람들은 석고로 만들어진 자유의 여신상이 손상될까
마음을 졸였다. 그러나 자유의 여신상은 기적적으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 중국의 어린이날인 6월 1일, 어린이들은 자유의 여신상을 찾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했다.
피의 일요일 (1) (89.6.4 새벽)
▲ 6월 4일 새벽, 계엄군의 진압이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이날 유혈진압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적어도 정부가 학생들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 6월 4일 새벽 2시 25분, 천안문 광장에 진입한 계엄부대가 처음 한 착수한 일은
'자유의 여신상'을 넘어뜨리는 것이었다. (이 과정은 CCTV에 방송되었다.)
▲ 6월 4일 새벽 4시, 인민대회당 안에 매복해 있던 군인들이 뛰쳐나와 인민영웅기념비 아래에서 노숙하고 있던 학생들을 향해 총을 쏘고 있다. 한 군인의 총에서 나오는 불빛을 볼 수 있다.
▲ 갑작스러운 총격에 머리를 맞은 대학생
▲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수술대 위에서 사망한 학생
▲ 한 여학생이 총에 맞았다
▲ "길 좀 비켜주세요!"
▲ 사망한 학생들
▲ 사망한 학생
▲ 병원에 사망한 대학생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져 있다
▲ 베이징 푸싱(復興)병원에 놓여 있는 학생과 시민들의 시체
▲ 사망자
▲ 사망자
▲ 6.4 유혈진압에서는 국제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덤덤탄(Dumdum bullets: 관통하지 않고 몸 속에 박히는 탄환)이 사용되었다. 최근 중국의 양심 의사라고 불리는 장옌융이 이에 관한 증거를 확보.
▲ 저우더핑(周德平), 칭화대 무선전자학 대학원생, 머리에 총탄을 맞고 퉁런(同仁)병원에서 사망
▲ 6월 4일 새벽 5시, 특수부대가 인민영웅기념비 아래에 있는 학생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있다
▲ 군인들이 한 학생을 구타하고 있다
▲ 6월 4일 새벽 5시, 학생들이 눈물을 머금고 천안문 광장을 떠나고 있다
▲ 시민들과의 충돌로 불에 탄 탱크 (1989년 6월 4일 낮)
피의 일요일 (2) (89.6.4 낮)
▲ 6월 4일 아침, 계엄군이 창안(長安)거리와 천안문 광장을 점령했다
유혈진압 그 이후.. (89.6.5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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