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 야고보 신부님 인터뷰 질문과 답변
1. 신부님께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후손이십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추앙받으시는 분의 가문이기에 대대로 이어오는 신앙의 전통이 예사롭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신부님 형제 가운데서 4형제가 사제품을 받으신 것만 봐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신앙과 관련한 가문의 특별한 전통과 분위기를 먼저 소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특별한 전통이라 할 것까진 없고 열심한 다른 집안과 마찬가지로 제가 기억하는 저희 집안의 분위기는 캄캄한 새벽에 불도 켜놓지 않은 상태로 기도하시던 할머니의 모습과 늦은 밤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무릎을 꿇고 바치는 부모님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잠에 골아 떨어져 있는 저희 형제들을 깨워놓고 몇 시간씩 이어지는 기도를 바치곤 했는데 졸다가 기도소리가 끊어지면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자유로이 기도를 바치게 했는데 형제들은 그게 싫어 골을 내다 더 야단맞기도 했습니다.
수시로 돌아오는 조상님들의 기일이나 명절에는 연도까지 바쳤는데 “연도하자”는 아버지의 말씀이 귀에 익숙하게 들릴 정도였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모두 성직자의 길을 가게 된 것 같습니다.
2. 순교 성인의 후손으로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시복시성 운동에 대해 남다른 감회와 열성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시복시성 운동에 대한 신부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저희 집안에는 가깝게 10분의 순교자가 계시고 그 중 세분이 성인이신데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 당고모 김데레사입니다.
그리고 이번 124분의 시복 대상자 가운데에는 김 안드레아 신부님의 증조할아버지 김진후 비오와 작은 할아버지 김한현(김종한) 안드레아가 포함되셨는데 이는 저희 집안과 저 개인에게 있어서 무한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인들께서 시성 되신 후에도 순교성인의 후손이란 사실을 드러내놓고 얘기하지 못했습니다. 그 까닭은 성인의 후손답게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그분들께 누를 끼치게 될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시복 시성을 추진하고 계시는 한국 교회의 어른들을 보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노력하시는 그분들의 노력이 풍요로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열심히 기도드립니다.
3. 이제 다음달(11월) 24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면 ‘신앙의 해’도 끝납니다. 지난 1년 동안 ‘신앙의 해’를 어떻게 살아오셨는지요?
최근 몇 년 사이에 저는 저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계기가 있었습니다.
지난 23년의 사제생활을 돌아보며 과연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제로 살아왔는가?’ 그리고 ‘신앙인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한 것이 ‘창조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아름답다 하셨는데 지금의 내 모습이 아름답게 비쳐지고 있는지 질문을 해보니 세상에서 얻은 여러 가지 것들로 꾸며놓은 제 모습은 이미 변질되어 버린 지 오래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몇 년 동안 버리는 연습을 해왔습니다.
아직도 부족하지만 참 신앙인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성모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더 많이 갖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4. 국정원의 대선 개입과 관련한 사제들의 시국선언이 교구마다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3직 가운데 ‘예언직’에 해당하는 직무라고 합니다. 현 시국과 관련한 사제들의 결연한 행동에 대한 신부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또 교회는 이런 시국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사제들은 예수님이 사신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은 과거나 현재나 약한 자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제들이 그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고통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신 분이란 사실을 알려주고 자신의 이익이나 영달을 위해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행위가 얼마나 잘못인지 스스로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줘야 합니다. 이 몫은 바로 우리 교회와 사제들의 것이라고 봅니다.
5. 프란치스코 교황 즉위 이후 가톨릭교회는 물론 타종교를 비롯한 전 세계의 지대한 관심과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목 방침을 통해 본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신부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그 어느 시대 시기보다도 풍요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빈곤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진 것은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놓을 줄 모르고 쥐고만 있으려 학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한 시기에 전임 교황님께서는 자신의 자리를 내놓으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최고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신자들의 눈으로 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자리를 내놓으신 베네딕또 16세 교황님의 모습에서 비움을 봤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낮춤과 비움의 일부라고 봅니다.
이어서 선출되신 교황님께서는 프란치스꼬란 이름을 택하셨는데 그분의 평소의 삶은 가난을 실천하는 삶을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시대에 함께 숨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비우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하나씩 내려놓는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잘 되지 않습니다. 그동안 몸에 배일대로 배었고 습관이 되다시피 했으니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죽는 순간에는 주님을 닮은 구석이 조금은 보이겠지요.
6. 신부님께서는 ‘트로트 가수 신부님’으로 유명하시고 음반도 내셨습니다. 신부님의 사목 모토와 트로트를 사목 활동에 어떻게 활용하고 계시며 그 보람은 어떤 것인지요?
대중가요 특히 트로트 중에는 좋은 노랫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 노래들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도구로 사용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신자들의 반응이 괜찮습니다. 그리고 복지기관 등으로 봉사활동을 가보면 많이 좋아 하십니다. 제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기쁨과 평화를 느끼는 분들이 있다면 주님께서 제게 주신 특별한 선물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7. 신부님께서는 언제 사제가 되겠다고 결심하셨습니까? 아울러 신부님의 생년월일과 부모님 및 형제자매들에 대해서도 소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1959년 7월 1일에 충남 온양에서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 김종원 사도요한과 어머니 이상기 데레사의 4남 4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누나 김인숙 엘리사벳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있고 제 밑에 여동생 김미숙 석문가롤로는 성가소비녀회 수녀입니다. 그리고 넷째인 김현태 이냐시오는 대만 신주(신죽(新竹)교구 사제로, 다섯째 김지숙 안나는 동정녀로, 여섯째 김순천 아녜스는 결혼하였고 일곱째 김용태 마태오는 대전교구 사제로 여덟째 김성환 미카엘은 대만 신주교구 사제로 있습니다.
----------------------------
선배님, 질문으로 써주신 것에 대해 조금씩 쓰다 보니 자꾸 어색해져서 그냥 쭉 써봤습니다. 필요하신 대로 잘라서 써주세요.
말솜씨 뿐 아니라 글재주가 워낙 없다보니 마냥 숙제로만 생각이 되어져서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희 집안은 8대째 내려오는 천주교 집안입니다.
1780년대 한국(조선)에 천주교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저의 7대조 할아버지와 자식들은 신자가 되셨는데 그 후로 그 자손들은 모두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엔 나라에서 하느님을 믿는 것을 법으로 금했고 발각이 되면 국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문을 하고 끝까지 배교하지 않는 사람은 칼로 목을 치거나 사지를 찢어 죽이고 돌 판에 던져 죽이는 형벌을 내렸습니다.
그러한 박해는 100년이 넘도록 이어졌고 그 동안 수만 명의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하게 됩니다.
저희 집안에도 신앙을 받아들였던 7대조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그 아들들과 손자 손녀 증손자까지 30년 동안에 10여명이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세분이 성인이 되셨고 두 분(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 안드레아)은 시복을 앞두고 있습니다.
한 가문에서 그것도 4대에 걸쳐 세 분의 성인과 두 분의 복자가 계시는 집안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는 지난 1984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오르신 103위 성인이 계시는데 그 가운데에는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그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 6촌 고모 김 테레사가 있습니다.
여기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저에게는 4대조 할아버지(종(從)고조부)가 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물론이고 그 동생이 자손이 없었던 관계로 직계 후손은 없지만 저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작은아버지의 후손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5살이 되던 해에 파리 외방전교회 모방 신부님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땅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24세에 한국인 첫 사제로 서품 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중요한 임무는 목자가 없는 한국 교회에 교구장 주교님과 선교사를 모셔오는 일이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비롯하여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과 11명의 교우들은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을 붙인 작은 어선에 타고 한국(조선)을 향해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항해 도중 거센 풍파를 만나 난파될 위기에 처했을 때 성모님께서 나타나셔서 안전하게 보호해주심으로서 무사히 한국(조선)의 섬 제주도에 안착하게 됩니다.
그 뒤 육지로 무사히 들어온 신부님 일행은 또 다른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해 해안으로 갔다가 붙잡혀 사제로 서품된 지 13개월만인 25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를 하게 됩니다.
선조들이 어렵게 지켜온 신앙은 저희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 저희 형제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공소 회장을 맡아 열심히 사셨고 2대 독자인 아버지는 사제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할머니의 반대와 독자라서 신부가 될 수 없다는 규정으로 인해 신부의 꿈을 접고 결혼을 하여 4남 4녀를 낳았습니다.
아들 4명은 모두 사제가 되었는데 두 명은 한국에서 두 명은 대만에서 사목을 하고 있고 딸들 가운데 1명은 수녀로 1명은 동정녀로 남은 두 명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 집안도 대가 완전히 끊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는 불행이지만 우리 신앙인의 눈으로 봤을 땐 참으로 영광스런 일이라고 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태중에 아이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아들이면 사제로 딸이면 수녀로 만들겠노라고 허락해주시라고 기도하셨답니다.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엄한 초등학교 선생님, 매일 기도만 하는 사람. 어머니는 가정을 돌보는 주부, 거지가 오면 밥을 나눠 먹이고 재워주고 떠나는 거지를 보면서 눈물짓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부모님은 자식들이 학교 가는 날과 성당 가는 날이 겹치는 때에는 학교를 빠지고 성당에 가는 것을 당연시 여겼고 성당에 가지 않으면 밥을 굶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희 형제들은 어릴 적부터 과자가 생기면 어머니 치마를 목에 두르고 미사 드리는 놀이를 하며 지냈습니다.
물론 신부의 몫은 항상 내 차례였고 동생들은 신자 역할만 해야 했죠. 왜냐하면 제가 형이고 오빠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처럼 만15살이 되던 해(1974년)에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아버지께서는 “너는 신부가 돼야 하니까 소신학교에 가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나보다” 하고 생각한 저는 아버지의 뜻에 따랐고 소신학교(성신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저는 그 때까지도 신부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꼭 신부가 돼야겠다는 어떤 소신도 없었습니다.
그냥 태중에 있을 때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온 소리이기에 막연하게 ‘난 신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 이었던 것이죠.
단 한차례 신부가 되고 싶다고 스스로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복사를 앞세우고 입당하시는
젊은 프랑스 신부님을 볼 때였습니다.
때때로 바뀌는 제의색깔이 너무나 멋있었습니다.
“나도 신부가 되면 멋진 옷을 입을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 유일한 것입니다.
그러한 저에게도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꿈 많은 사춘기가 시작된 것이죠.
미용사, 버스 조수, 레코드가게 주인, 술집주인, 은행원, 만화가, 성악가, 대중가요 가수, 영화배우 등등....... 수시로 바뀌는 것들이었지만 남들처럼 평범한 꿈을 꾸기도 했죠.
꿈을 너무 많이 꾸다보니 신부의 길은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소신학교 1학년을 마치고 논산대건고등학교로 전학을 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연극배우가 되겠다고 극단에 입단을 하였고 용돈을 벌기위해 술집에서 웨이터 보조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술집 종업원 일은 하루 만에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군에 입대를 해서 3년간 복무를 하고 제대를 한 뒤에 대신학교에 입학을 준비했습니다.
그 때 저는 남동생과 함께 시험을 봤는데 동생의 성적은 좋았지만 제대한지 20일밖에 안 된 저는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부가 되겠다는 생각을 전혀 해보지 않은 동생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형제가 함께 지원을 하면 성적이 좋지 않은 나도 합격시켜주지 않겠느냐고 말이죠.
며칠을 계속해서 졸라대자 동생은 원서접수 마지막 날에 신학교에 지원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시험결과는 동생은 합격, 저는 불합격이었습니다.
실망했지만 1년을 준비해서 다음 해에 저도 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1984년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하여 103위 순교자가 시성되신 해였습니다.
신학교 생활은 참으로 순탄했습니다.
친구들보다 7년을 늦게 입학했기 때문에 공부하기가 어려웠지만 동생이 미리 준비해 놓은 자료가 있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 이후로 145년 만에 집안의 두 번째 사제로 서품된 저는, 신자들이 좋아하는 사제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사제직에 대한 보람이나 기쁨이 없어지고 반복되어지는 일상에 몸을 맡기고 나태한 삶을 살아가는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생각을 해보니 예수님을 닮은 사제, 즉 겸손하고 가난하고 희생하고 비우는 삶이 아닌, 나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원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 기도하고 묵상하고 조배하며 성사에 정성을 다하기보다는, 사람을 만나고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TV나 오락을 즐기는 시간을 더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신자들에게는 묵주기도를 하라고 가르치면서 정작 나 자신은 묵주가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린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삶을 살고 있는 저에게 3년 전의 시련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해진 기도는 물론이고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려고 노력하게 됐고 재물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고통이 은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시기였죠.
사제생활의 고비를 맞게 될 무렵 저는 대중가요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나만의 노래가 만들어졌고 음반으로 출시하게 되었는데 데뷔를 하자마자 유명한 가수가 됐습니다.
그 이유는 신부가 가요를 불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릴 적 좋아했던 대중가요를 부르는 가수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음반을 냈는데 신자들과 동료 신부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도전하는 자세가 아름답다고 열심히 해보라는 격려와, 사제가 성가가 아닌 가요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는 부정적인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택한 장르인 트로트는 시대의 삶이나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내용들로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즐겨 부르게 되는 노래인데 흥겨운 잔치나 축제는 물론이고 슬플 때도 많이 부릅니다.
저는 가요를 하면서 비신자들이 많이 모이는 마을 축제에도 나가게 됐고 불교신자들이 모인 곳에 초대되어 노래를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가장 많이 초대하는 곳은 성령기도회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유명한 가요를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갖고 저의 부족한 삶을 나누다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열심히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노래를 통해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부족한 삶을 살아 온 제가 사제로 살아가면서 사제직의 고귀함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기에 그것을 나누고자 이렇게 용기를 내봤습니다.
제가 신품을 받은 때가 불과 23년 전인데 세상은 그동안 너무나 많이, 그리고 빨리 변했습니다.
편리하게 바뀌긴 했지만 인간 중심에서 편리하고 좋은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던 이 세상, 하느님을 닮은 우리 인간의 모습들이 겸손과 비움으로 보존되어야 하는데도 자꾸 채우고 높아지려는 교만으로 인해 점점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급변하는 세상과 사람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걱정을 합니다.
곧 세상에 종말이 올 것만 같다고.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우리들의 조상이신 성인 성녀들, 특히 우리 할아버지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같은 사람이 단 한사람만 있어도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라고.......
그리고 그 한 사람이 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을 해봅니다.
순교 성인들은 참으로 소중한 하느님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두렵지만 성령과 성모님께 의지하며 예수님을 생각하며 자신을 비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순교 성인들께서는 당신들과 같이 우리들도 목숨을 내놓기를 원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순교는 당신들이 하신 것으로 족하다고.
그분들께서 사랑하시는 우리는 다만 조그마한 희생, 나눔, 자신을 낮추려는 삶을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저도 성인의 후손으로서 성인의 이름에 누가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