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 경기 역사 신규교사가 되어 합격수기를 남길 수 있게 되었어요.
월등한 성적도, 잘난 수기도 아니지만 공부하시는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이렇게 글을 적습니다.
*먼저 이 수기는 제가 전공과목을 수강한 학원(임용**)에도 동일하게 제출하는 수기이며 본 게시판 성격에 맞게 형식과 표현만 다소 다르게 하여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또한 아모르아이티칭에 전공역사 선생님이 계시지 않으므로 해당학원의 강사명을 그대로 사용하였음을 밝힙니다. 또한 이는 임용** 유선문의 결과 본 수기의 저작권이 수기작성자인 제게 있음을 이미 확인하였기 때문에 게시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교육학 수기
1. 들어가며
안녕하세요. 저는 재수의 탈을 쓴 초수생 합격자입니다. 저의 수기가 많은 분들께 힘이 되는 수기였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보통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시고 더 오래 공부하신 분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그저 겸허한 마음으로 이 수기를 작성합니다. 그리고 ‘어떤 공부방법이 좋다, 어떤 학습전략이 좋다’ 하는 것보다, ‘제가 해봤는데 이런건 하지 마셨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함께 담아 이 수기를 작성합니다. 혹 저의 수기에 마음상하시거나 불편하신 분들께는 미리 심심한 양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교육학을 처음 시작한 것은 2015년 9월의 일입니다. 감사하게도 학과에서 장학금 사업을 시작하게 되어 학과 내 몇 안 되는 임용준비생들과 함께 인강을 듣고 스터디를 했습니다. 비(非)사대답게 가까운 학번 내에 임용에 합격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임용시험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들었던 인강은 아모르아이티칭의 김현 선생님 강의(당해년도 3~4월 이론심화)였습니다. 9월에야 교육학 이론강의를 처음 듣게 된 저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9~11월 3개월 여간 그 강의를 2번 돌려보게 되었고 단권화도 했습니다. 돌아보면 그 때 교육학이라도 단권화를 해둔 것이 참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2015년 12월 5일, 처음으로 임용시험에 응시하게 되었습니다.
2. 이제부터가 진짜
2016학년도 임용시험에는 당연히 낙방했습니다. 교육학은 13점이었죠. 두어달 공부한 것 치고 나쁘지 않은 점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진짜 진지하게 시험에 임해야 할 때였죠. 2016년 한 해도 같은 선생님의 강의 1년치를 끊어서 들었습니다. 1~4월은 인강으로, 5~11월은 직강으로 들었습니다. 인강이든 직강이든, 사실 교육학은 저에게 그다지 매력적인 과목이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교육학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임용준비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 이상 하게 되는 생각일 겁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일단 저는 앉아서 인강을 듣고, 앉아서 직강을 들었습니다. 임용시험이 어떤 시험인지조차 파악이 안 되었던 저였기 때문에 방법이라고는 정말로 앉아있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교육학을 외워가고 있었죠.
1) 1~4월 : 익숙해지기
반복적인 이론암기의 시간이었습니다. 지난해 9월부터 같은 인강을 들어왔고 단권화까지 시켰건만 머리에 남아있는 건 없었습니다. 그래서 1~4월, 이 4개월간은 계속적으로 이론을 암기하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니, 암기한다기보다는 그 이론들에 익숙해지는데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참 더딘 과정이었죠. 제가 택한 선생님은 그다지 특출난 교수법으로 가르치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오랜 반복과 암기, 인출을 강조하시는 분이었죠. 그것이 그 분의 철학이었고, 수험생 입장인 저로서는 그 방법이 참 잘 맞았죠. 물론 순간순간은 지루함과 나태함이 밀려들어올 때도 많았습니다.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듣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정작 글로 쓰려고 하면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 크나큰 문제였습니다.
인강으로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전혀 강제성이 느껴지지 않아서 과제로 주어지는 것들도 거의 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정말 수동적인 학습자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3~4월 강의에서 스캔본 첨삭을 1회 해주는데 그거 하나만 겨우 작성해서 보냈습니다. 그마저도 내용을 전혀 알 길이 없어서 거의 책을 보고 썼는데요. 그 때의 자괴감이란…. 그렇지만 어쨌든 꾸준히 인강을 들었고 적어도 제 뇌를 교육학 개념에 낯설지 않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던 것 같습니다.(인출은 거의 안 되었지만 말이죠.)
2) 5~6월 : 기출문제 확인하기&백지 스터디
김현쌤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5~6월은 기출분석반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직강으로 들었죠. 그런데 이 과정도 기출‘분석’은 선생님이 할 뿐, 저는 그 수많은 기출문제들을 ‘확인’하는데 그쳤을 뿐입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도움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기출문제들을 보면서, ‘이론에서 뜬구름잡듯이 표현되었던 것들이 이렇게 문제화되어 출제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기출문제는 이때만 보고 이후에 더 자세히 보지는 않았습니다. 어쨌든 기출 중 대다수는 객관식이었고, 우리가 맞닥뜨려야 하는 문제는 논술형이었으니까요.
객관식 기출의 효용가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개념, 이론이 시험에 나올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는 잣대죠. 여기서 제 신념은 나름대로 확고했습니다. 객관식에 한 번이라도 나왔다면 앞으로 출제될 가능성이 있는 개념, 이론이고, 그렇지 않다면 나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논술형 기출의 효용가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개념, 이론이 최근 출제되었고 그와 관련한 개념, 이론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판단하는 이정표 같은 역할이죠. 정리하자면 객관식 기출은 그 기출문제의 주제 자체를 보았고, 논술형 기출은 그 주제의 주변부를 봤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씀드리건대, 5~6월 이후에 기출을 하나하나 뜯어본 적은 결코 없습니다. 저는 학원수업, 커리큘럼에 끌려가는 수험생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치만큼의 주도성도 없는, 매번 동공지진을 일으키는 초수생이었습니다. 그랬던 저에게 딱 한 치만큼의 주도적인 공부시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백지스터디입니다.
학원에서 만난 한 쌤과 함께 백지스터디를 했습니다. 매주 하루, 교육학 수업을 마친 뒤 교육학의 한 과(ex. 교육사 및 교육철학, 교육심리, 생활지도 및 상담, 교육행정 등)의 내용을 생각나는대로 A4 용지에 쓰고 돌려보는 스터디였습니다. 매주 한 번 이상 좌절의 시간이 다가왔고 스스로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횟수도 늘어났습니다. 그렇지만 일단 계속했습니다. 책을 덮어놓고 무언가 써본다는 것은 굉장한 스릴로 다가왔거든요. 그리고 이게 묘하게 ‘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같이 주었습니다. 같이 했던 쌤과의 스터디 인연은 5~6월로 끝이 났지만 이후 저는 또 다른 쌤과 연결하여 백지스터디를 지속했습니다.
3) 7~8월 : 마인드맵&백지 스터디
백지에 쓰는 게 아무래도 제 맘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7~8월에 새로 연결된 쌤과 같은 방식의 백지스터디를 지속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학원 커리큘럼 상 마인드맵 강의가 있었습니다. 이전에 산개되었던 이론들을 마인드맵 형태로 구조화시키는 강의였죠. 이때 교재의 구조화된 내용을 따라가는 데에 백지 스터디가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백지스터디를 하면서 어떤 분과에 어떤 이론들이 있는지를 어느 정도 파악했기 때문이었죠. 각 분과마다의 이론들을 정교화하고 조직화시키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이때는 왠지 지금 당장 시험을 봐도 교육학만큼은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즈음하여 뭔가 교육학 이론들에 의미가 생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 이 이론이 이래서 여기 있는 거구나!’
하는 느낌들이 자주 들었습니다. 심지어 존재 자체가 의문스러웠던 교육행정조차도 매우 흥미롭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아, 조직론이 있고 그 다음에 학교조직론을 따로 이야기하는 거구나! 이게 실제 학교라는 조직에 적용될 수 있는 동기이론이고 풍토이론이겠구나!’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배움의 기쁨은 적정량 이상의 암기 이후에야 오는 것임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4) 9~11월 : 모의고사&베껴쓰기
어느 학원이나 그렇겠지만 9월부터는 모의고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김현 선생님은 월, 화 양일 간 하루에 2회분의 모의고사를 제공했죠. 아침부터 토가 나올 정도로 글을 쓰고, 또 글을 쓰고 해설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아침부터 2회분 모의고사를 풀고 나면 그 날은 글씨 한 자도 쓰기 싫을 정도였죠. 이때는 스터디도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때 제가 좀 해이해졌던 게 분명합니다. 모든 책을 덮고 백지에 쓰던 것을 버리고, 마인드맵 교재에 있는 것을 보면서 백지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름대로 자동화 전략을 쓰려고 했던 걸까요? 한 이론을 깊이 있게 아는 것보다 수많은 이론들을 머릿속에 잡아넣는데 힘썼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차라리 혼자서라도 백지 쓰기를 지속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머릿속에서 인출하는 습관을, 시험을 두어달 남겨두고 버렸다니, 미친 짓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참 많이 베껴 썼습니다. 저 스스로도 책 덮고 인출하는 것만 못하다는 걸 분명히 알았음에도 베껴 썼기 때문에, 백지 쓰기보다 더 많은 횟수를 썼습니다. 참으로 지난하고 고단한 과정이었습니다. 7~8월에 느껴졌던 배움의 기쁨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지루한 볼펜질(!)만 남았습니다. 몸과 머리가 힘들어질수록 마음은 조급해지고 불안해졌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 상태 그대로 시험장에 갔습니다.
3. 시험을 마치고
2017학년도 중등임용시험 교육학의 묘미는 뒷통수가 아니었는지요. 저는 그날 생전 처음 보는 개념 앞에 그대로 고꾸라졌습니다. 시험 당일, 대단히 난해한 이 교육학 문제를 눈앞에 두고 제법 오랜 시간을 씨름했습니다. 그래도 ‘내가 어려우면 남들도 어렵다’는 생각으로 뭐든 적어나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11점이라는 결코 높지 않은 점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시험 직후 ‘과락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월등히 높은 점수였기에 너무나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복기랍시고 적어놓은 글이 있지만 그마저도 시험 당일 바로 적은 것이 아니라 이틀 뒤에 적은 것이라 너무 많은 미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고백하기 민망한 말이지만 어떤 키워드로 11점을 받을 수 있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무언가 써왔던 버릇이라도 있었기에 부족한 제 능력으로 11점이나마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전공역사 수기
0. 들어가기 전에 알아주세요.
재수의 탈을 쓴 초수생은, 전공역사는 정말로 2016년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전공은 진짜 초수였던 겁니다. 바로 임용**에서 말이죠. 처음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저렴한 학원비에 끌렸습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되었죠. 아, 그리고 저는 수험생활 중 임용시험이 도대체 무슨 시험인지 모르겠는 시기를 반 년 가까이 보냈음을 미리 말씀드리며 수기를 시작합니다.
1. 들어가며
제가 김종권 선생님의 1년 프리패스 과정을 시작하게 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렴한 수강비는 물론이거니와 결코 많지 않은 수강생 수로 인한 쾌적한 학습환경은 말할 것도 없었죠. 그러나 무엇보다 강사가 누가 됐든지 간에 저를 1년 동안 맘 잡고 강의실 책상 앞에 앉혀놓을 만한 구실이 필요했습니다. 그 조건에 최적으로 부합되는 곳이 바로 임용단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2. 진짜로 공부해야 해
1) 1~2월 : 응?
1년 과정을 결제해놓고도 마음이 다른데 가있었습니다. 바로 사립학교 정교사 지원이었죠. 참 여러 군데 원서를 넣고 시험을 보러 다니고, 원서비를 날리고, 마음도 상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 힘들고 어려워 보이는 임용판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겁도 없이 (기간제도 아닌)정교사 자리를 계속해서 지원했죠. 그런데 무경력의 졸업예정자를 어느 학교가 받아들이려고 했을까요. 수업실연, 면접은 근처에도 못가보고 모두 낙방했습니다.
적은 수의 수강생 덕분에 조성된 쾌적한 학습 환경은 쉬는 시간의 숨 막히는 적막함으로 이어졌습니다. 원래 사람을 좋아하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던 저에게 이 임용판은 마치 거친 야생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원래 임용판이 다 이렇구나. 앞으로 1년동안 밥 혼자 먹게 생겼구나!
가뜩이나 비사대 교직이수 출신이 학원에서 무슨 객기라도 부리랴, 조용히 강의 듣고 합격해서 이 바닥을 뜨자!‘
이런 허무맹랑한 생각으로 거의 2개월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웃기는 생각입니다. 어디든 다 사람 사는 동네이고 대화를 트면 다 친해질 수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어쨌든 수험생활 첫 2개월을 홀로 보냈습니다. 사립학교 지원하랴, 학원가서는 엄청난 학습량에 허덕이랴, 혼자라는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2개월이 지나가버렸습니다.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하는 생각과 함께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2월 말경 있었던 합격자 간담회에는 당시 매우 우수한 성적의 합격자들이 왔습니다. 저는 잔뜩 주눅이 들었습니다. 결코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은 학습량, 화려한 서브노트, 어마어마한 양의 다독. 이는 모두 그들의 업적이었고 저는 그때 이미, 저들을 따라가기에는 늦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도 수험생으로서 무언가 해야만 했고 다음 3~4월 강의로 들어서기 직전 일주일의 휴식기 동안『한국인을 위한 중국사』를 일독했지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글씨만 읽었던 것입니다.
2) 3~4월 : 강독&하루살이
다음 2개월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1~2월에 있었던 이론 강의에 이어, 3~4월 강의에는 사료집이 추가되어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3~4월에 두드러지게 달라진 점은 3가지입니다. 첫째는 직강 수강생 수가 제법 늘어난 것이고, 둘째는 이제 정말로 임용시험에 전심으로 임할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물론 사립학교 시험에 다 떨어졌기 때문이었죠. 셋째 변화는 매 금요일마다 강독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舊한국사특강』부터 시작된 강독은 이후로『한국사 길잡이』,『동양사개론』,『서양사총론』, 역사교육론 제(諸) 도서 등 여러 책들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사료집 수업은 저에게 상당히 버거웠습니다. 그에 반면에 함께 책을 읽어나가고 주요 부분에 밑줄을 긋는 강독 수업은 ‘내가 뭔가 알아가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수업이었습니다.
이 때 스터디를 병행했는데요. 바로 금요일 강독이 끝난 후 스터디원 각자 오늘 읽은 내용을 2시간 정도 자습하고 1시간은 모여서 파트를 나누어 각자 맡은 파트를 설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바를 오늘 끝내고 집에 가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우리 스터디의 이름은 ‘하루살이’였습니다. 하루살이 스터디 방식은 사전에 따로 준비해야 하는 방식의 스터디가 아니었기 때문에, 스터디로 인한 부담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스터디가 생김으로써 3~4월부터는 같이 밥을 먹는 쌤들이 생겨 기뻤습니다. 쉬는 시간에도 강의실에 이전보다 훨씬 생기가 도는 느낌이었습니다.
4월 초중순 즈음 제가 임용단기 홈페이지에 작성한 수강후기에는 당시 저의 심적 변화가 드러나 있습니다. 그 때 저는 김종권 선생님의 강의를 택한 이유로 선생님의 철학, 학교에 가고 싶게 만드는 강의, 떠먹여주지 않고 이정표를 제시하는 수업, 좋은 사람들이 모인 강의실을 꼽았습니다.
3) 5~6월 : 착석과 합숙
교육학도 전공도 5~6월은 기출분석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분석’은 선생님의 몫이고, 저는 단지 기출문제들을 확인하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지금 봐도 그렇지만 당시 저에게 기출문제들은 너무나 어려운 문제들의 집합체였습니다. 쉬운 문제도 많았지만 조금만 어려운 문제가 나와도 ‘사람들은 대체 이걸 어떻게 풀었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제 주변에는 기출문제와 그 모범답안을 줄줄이 꿰고 있는 쌤들, 더 나아가 그 주변부 내용들까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어마무시한 쌤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점점 더 초라해져만 갔습니다. 4월 초중순 그럴듯한 수강후기를 올렸던 게 무색할 정도로 버거운 학습량이었습니다.
이때는 별다른 방식의 스터디를 하기보다는 이른바 ‘상호감시체제’를 통해 또래 쌤들과 자습실에서 자습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상호감시란, 서로가 서로의 감시자가 되어 앉아서 공부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었죠. 허공에 칼질을 하듯 무력함을 자주 느끼는 시기였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앉아있었습니다. 꾸준히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아주 느릿느릿하게, 같은 문장을 수십 번째 읽고 있는 난독의 좌절도 숱하게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앉아있었습니다. 그렇게 꾸준히 착석(着席)하며 시간을 보내고 때는 어느덧 6월 중순 즈음, 책의 내용들이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장을 읽어나갔고 페이지를 넘겼으며 절을 넘기고 장을 넘겼습니다. 여전히 느렸지만 그래도 찬찬히 내용들을 읽어나갔습니다. 이 시기 즈음의 일주일이면 전공도서 몇 권을 다 읽었다는 합격자 사례가 제 숨통을 조여 오는 듯했지만 저는 저 나름대로의 속도로 읽어나갔습니다. 사실 책의 모든 부분을 다 읽지도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꾸준히 앉아있었고, 꾸준히 읽어나갔습니다. 6월 말 휴식기에는 몇몇 쌤들과 김종권 선생님 댁에서 2박 3일간의 합숙을 하며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4) 7~8월 : 파리목숨&빈칸넣기
정말 수험생으로서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대로라면 100% 불합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상호감시체제에 있던 쌤들과 함께 새로운 스터디를 꾸렸습니다. 초수생들끼리 모여서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파리목숨’이라는 이름의 스터디를 시작했죠. 이번엔 교과서를 읽기로 했습니다. 비상 고등 한국사와 천재교육 고등 세계사를 일주일에 한 챕터씩 읽고 와서는 해당 챕터의 내용을 백지에 쓰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방식이 너무나 비효율적이라 중간에 방식을 바꿨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교과서 한 챕터의 내용을 1시간 사이에 모조리 생각해내고 쓴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하여 각자 파트를 정해서 문제를 만들어오는 방식으로 바꾸었고, 답은 철저히 해당 교과서 안에서 찾기로 했습니다. 한국사와 세계사를 그렇게 마치고, 애증의 동아시아사는 마더텅 출판사의 평가원, 수능 기출문제집을 사다가 파트별로 담당하여 분석하고 교과내용을 소개했습니다. 초수생들끼리만 모인 스터디에서 그래도 뭔가 해나가고 있다는 성취감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7~8월 강의는 빈칸넣기 수업이었습니다. 이 수업은 처음 해보는 사람들한테는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싶을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사 임용준비생에게 강력하게 추천하는 학습방식입니다. 빈칸넣기는 전공서와 교과서의 문장 중간주간에 빈칸을 뚫어놓고 이를 채우는 방식의 학습방식입니다. 이 수업을 들으면서 책들을 더 자세히 읽게 되는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5) 9~11월 : 카톡스터디&모의고사
7~8월 강의가 끝나고 파리목숨 스터디도 종료되면서 저는 전공도 교육학도 스터디가 없는 상황에 봉착할 뻔했습니다. 교육학이야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홀로 쓰는 것을 지속했습니다만 전공에는 무언가 다른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존 스터디원들이 각자 공부하겠다는 홀로서기 선언을 하는 바람에 저는 새로이 스터디를 구성했고 이 스터디는 이름하여 카톡스터디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이 스터디야말로 제가 수험생활 중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카톡스터디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습니다. 소수(저희는 4명)의 스터디원이 매 평일마다 정해진 시간(저희는 22~23시)에 카톡방에서 돌아가며 문제를 내고 서로 맞추는 스터디였습니다. 보통 하루에 적게는 13문제에서 많게는 17문제 정도까지 나왔고, 이것이 후에는 500문항을 거뜬히 넘는 문제은행이 되었습니다. 문제 주제는 역교론, 한국사, 동양사, 세계사, 기타사와 더불어 교육과정에 이르기까지 전공이라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출제했습니다. 문항에는 다음과 같은 예시가 있습니다.
[역교론] 역사교육 내용 선정 원리는 학문적 측면, 학습자적 측면, 사회적 측면이다. 이중에서 학습자적 측면은 중요하지만 반영되기가 어려운데 그 이유는? (역교 내용) 역사교육의 내용은 국가, 사회적 요구나 학문적 요구에 따라 선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학생들의 역사의식 발달 단계에 관한 연구가 일천한 것도 한 원인(녹색책 88쪽) [한국사] 조선 시대 사전(私田)은 공신전 이외에는 세전이 불가하였으나 수신전이나 휼양전을 통해 세전 과정이 법제적으로 공인되었다. 사실상 분급, 회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한 법 2가지와 각 내용은? (한국 근세) 진고체수법(陳告遞受法) : 타인이 신고하면 그에게 분급 직전법 : 수신전과 휼양전을 몰수, 현직관리에게만 분급 [동양사] 진나라 통일 후 건설한 치도(馳道), 오척도(五尺道), 직도(直道) 등의 역할 또는 그 쓰임 (중국 고대) 신속한 군대 이동으로 지방 반란 효과적 진압, 각국이 건설한 방어기지, 성채 파괴하여 할거 기반 없앰, 이후 교통, 상업 발달에 기여 [서양사] 레닌 4월 테제의 주요내용 (천재 세계사 292쪽) (서양 현대) 즉각 정전할 것, 토지를 국유화할 것, 노동자 대표로 구성된 소비에트에게 전권 부여할 것 등(서총 1017쪽)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토지 균분, 전쟁 중지“ [기타사] 무스타파 케말이 터키 공화국 수립 후 실시한 개혁정책 (기타 현대) 술탄 제도 폐지(정교 분리), 서구 문물 적극 수용(서양 달력 공식 수용), 여성 지위 향상(일부다처제 금지), 근대적 교육제도 시행, 터키 문자 제정, 튀르크 민족 단결 강화하는 원칙 발표 등 *위 문제들은 카톡스터디에서 제가 출제한 문제 중에서만 추렸음을 밝힙니다. |
2개월 반 동안 이 스터디를 하면서 저희는 557문항을 만들어냈고 모의고사 수업과 스터디를 병행하며 문제에 대응하는 자신감을 키워갔습니다. 어쩔 때는 문제 내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영 허무맹랑한 문제도 여럿 냈습니다. 가령 저같은 경우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규정한 공정무역의 의미’같은 문제도 만들 정도였습니다.
9~11월, 아무래도 문득문득 슬그머니 두려움이 올라왔습니다. 두려움은 마음을 괴롭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지레 겁먹게 하며 주저앉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전부터 습관을 들여놓은 ‘일단 앉아있는 것’이 이때 힘을 발휘했던 것 같습니다. 두려움을 맞이하는 것도 앉아서 했고, 마음이 불안한 것도 앉아서 했습니다. 정작 앉아있는 그 때에는 불안하고 고단했지만, 이렇게 합격이라는 결과가 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앉아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3. 시험을 마치고
2016년 12월 3일 토요일, 생애 두 번째 임용시험을 마치고 한 주는 마치 목표를 잃은 사람처럼 보냈습니다.
‘난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시험은 똑바로 본건가?’
라는 생각을 중심으로 짐짓 맘 편한 척 쉬기도 했습니다. 저의 가채점 결과는 교육학 가채점 불가, 전공은 54점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커트라인을 알 수 없으나 교육학이 20점 만점을 받지 않는 이상 1차에 합격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었고 아무래도 망한 것 같으니 2차는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에 잠겨 B모 카페의 익명게시판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어느 글의 “댓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교사는 가르치는 직업이에요. 이때 아니면 가르치는 거 못 배워요. 2차 준비하세요.”
라는 짧은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정신을 차리고 2차 준비를 할 채비를 했습니다. 지금껏 책 펴놓고 볼펜질(!)이나 할 줄 알았지 2차 준비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저는 2차 시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고 경기도에 지원해놓고도 나눔, 토의 등에 대한 정보도 일천했습니다. 1차 시험의 대강을 파악하는 데만도 거의 반년이 걸렸는데 이와는 완전히 다른 형식의 2차 시험을 또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스터디를 꾸려 꿋꿋이 해나갔습니다. 1차 시험이 끝난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2차 시험 수기
1. 1차 시험 직후(12/3~1/2)
1차 시험 마치고 1주일은 드릴 말씀이 없을 정도로 한량처럼 시간을 보내다가, 그 후에는 같이 학원에서 공부하던 분들을 포함하여 2차 스터디를 구성했습니다. 1주일에 2번(월, 금) 모여서 함께 수업실연과 면접을 준비했고, 따로이 학원에서는 1주일에 1번은 수업실연(수), 1번은 집단토의(토)를 했습니다. 1차 발표 직전날(1/2 월)에는 모이지 않았습니다.
2. 1차 합격 후(1/3~1/16)
얼떨떨한 기분이었습니다. ‘불합격이겠지’라는 마음으로 로그인하여 얼떨결에 합격을 확인한 손은 부들부들 떨려왔고 얼굴가죽이 일그러지며 눈물이 나려고 했습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들어 1차 합격 화면을 찍었고 바로 가족과 김종권 선생님께 소식을 전했습니다. 떨어지더라도 과락만은 면하길 바랐던 교육학은 11점, 나름대로의 칼채점으로 54점에 그칠 줄 알았던 전공은 61.67점이라는 예상외의 고득점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도합이 72.67점, 커트라인인 71.33점에서 1.34점 높은 점수였습니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도 잠시, 정신을 차려야 했습니다. 자기성장소개서를 써야했고 서류를 제출해야 했으며 스터디도 꾸려야 했습니다. 매우 바쁜 일정이었습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모인 6명의 1차 합격자들이 스터디를 결성했고 강남의 Y모 스터디룸을 매일같이 예약하여 스터디를 진행했습니다. 3인 2개조로 나뉘어 매일같이 수업을 2번씩 하고 수업나눔과 면접도 준비했습니다. 학원에서도 1차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한 마지막 수업실연 및 나눔, 집단토의 연습이 3일간 있었습니다. 2주간의 스터디 기간 동안 매일 오전 9시까지 스터디룸 또는 학원에 도착했고, 이 기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여기며 스터디에 임했습니다.
3. 2차 시험 직후(1/18~2/2)
참으로 잔인한 시간입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마음이 요동치고 피가 마르는 느낌입니다. 시험이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만일 이 시험을 다시 준비하게 된다면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마음을 덜컥 내려앉게 만듭니다. 그래도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존재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기타 팁
1. 슬럼프 극복? 현자타임 극복!
현자타임이란 단어 많이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첫댓글 축하합니다.~ 정성스러운 수기 감사합니다. 행복한 선생님이 되시길 기원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