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신라(新羅) 추화군(推火郡). 밀성군(密城郡)의 시대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 하나의 소국(小國)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 구야국(狗倻國)은 이미 금관가야(金官伽倻)로서 가야연맹(伽倻聯盟)으로 발전하였고 사로국(斯盧國)은 진한(辰韓)을 이끌어 이미 신라왕국(新羅王國)의 기초를 굳혀가고 있었다
신라가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낙동강 유역으로 손을 뻗치면서 강을 사이에 두고 가야(伽倻)와 대립하게 되었는데 미리미동국은 어느듯 신라의 세력권으로 흡수되는 동시에 신라의 대가야 정벌의 전진(前進) 기지(基地)가 되고 말았다.
미리미동국이 언제 신라의 영토가 되었는지 그 기록을 찾을 수 없지만 바로 북쪽의 접경지역인 이서국(伊西國 = 경북 청도)이 진작 신라에게 병탄(倂呑)된 것으로 보아 유추(類推)할 수 있을 것 같다
삼국삼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유리왕(儒理王) 19년에 벌이서국(伐伊西國) 멸지(滅之) 라고 하여 AD 42년에 신라가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망시켰다고 되어 있다 물론 이 기록은 검토의 여지가 있다 뒤에 유리왕 14년에 이서고국(伊西古國) 래공금성(來功金城 同上)이라 하여 297년에 이서국이 금성[신라의 왕성(王城)]을 공격해 왔는데 신라는 군사를 동원해서도 이기지 못했고 신병(神兵)의 도움으로 겨우 격파(擊破)할 정도였다
이서고국이라는 고국(古國)의 뜻은 아마 이미 423년경에 멸망된 이서국의 후예들이 2세기반을 지난 그때에 없어진 나라의 이름을 다시 내세워 쳐들어 왔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어쨌던 신라의 동남쪽 진출에 있어 이서국 지방세력의 반발과 저향이 강력했던 것 같고 이러한 파동은 미리미동국 측에 영향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밀양시 상동면에 있는 마전암(馬轉岩)의 고사(故事)는 이것을 말해 준다 밀주구지[密州舊誌)에 마전암(馬轉岩) 세전고자(世傳古者) 이서[(伊西 : 고지국명(古之國名), 금청도등지(今淸道等地)] 위신라소패(爲新羅所敗) 병마다전어암하(兵馬多轉於巖下) 고명지(故名之) 라고 하여 마전암은 이서국의 병마가 신라에게 패배(敗北)하여 모두 바위에 아래로 굴러 떨어진 곳이라는 것이다 마전암은 청도와 밀양의 경계 지점에 있는 밀양땅의 고적(古蹟)이다
이 치열한 전투에 관한 고적을 보더라도 당시 미리미동국이 얼마나 위협(威脅)을 받았는지 짐작될 수 있지만, 거기에 관한 어떠한 자료도 남긴 것이 없다
신라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서국 지방을 평정하고 미리미동국을 손아귀에 넣어 낙동강의 동안(東岸)을 자유로이 사용해야만 했다 이서국은 신라가 가야와 쟁패하기 위하여 사활을 건 문제였다 이서국과는 달리 미리미동국이 별로 저항(抵抗)의 흔적을 남긴 것이 없다는 것은 이미 그 대세에 순응(順應)했던 탓으로 보이기도 한다
신라의 행정구역으로 추화군(推火郡)이란 이름이 주어진 것은 연대를 확실히 알수 없지만 신라 영토가 되면서 진작 군현(郡縣)으로 확정되었거나 아니면 지증왕(智證王) 때에 되었을 것이다
지증왕 6월 춘이월(春二月)에 왕친정국내주군현(王親定國內州郡縣 : 三國史記 新羅本紀 第四) 이라 한 것을 보면 추화군도 지증왕 6년(505)에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앞서 지증왕은 즉위 3년만에 각 지방에 영을 내려 농사를 권장하고 우경법(牛耕法)을 시행토록 했다고 한다 (同上)
미리미동국시대에 청동기. 철기문화에 선편(先鞭)을 잡지는 못했지만 밀양은 낙동강 충적평야(沖積平野)에 땅이 비옥한 남부 농업지대로서 농업생산에 알맞은 기후 풍토이어서 신라의 농업정책에 가장 역점을 두게 될 대상이었으며 따라서 신라의 한 주군(州郡)으로서 신라 국운의 상승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라에 있어서 추화군의 중요성은 그 전략적(戰略的) 가치에 있었다 특히 낙동강의 연안일대가 그러하였다 지금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를 중심으로 한 하남읍 곳곳에 신라의 옛 자취와 옛이야기들이 얽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라 국운(國運)은 제22대 지증왕(500~513)에 이르러 일단 비약(飛躍)의 단계에 올랐다 낙동강 연안에 전략기지를 본격적으로 설치 운영한 것이 바로 이 지증왕이다 지증왕은 장군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이곳에 군대를 주둔(駐屯)시켜 강 건너 가야연맹(伽倻聯盟)의 동태를 살피면서 기회를 노리게 하는 한편 왕 자신이 이곳에 종종 임어(臨御)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왕이 임어(臨御)한 곳이 이궁(離宮)이 마련되고 유행(遊幸)과 연침(燕寢)에 필요한 부대시설이 뒤따랐던 것 같다 지금 수산의 이궁대(離宮臺). 세루정(洗陋亭)과 도연산록(道淵山麓)에는 어정(御井) 등의 유적이 그때의 것이라고 한다 [밀주지 상서면(上西面 : 초동면) 이궁대 및 부남면(府南面 : 하남읍) 어정조(御井條)]
지증왕은 국호를 신라(新羅)로 확정하고 의복법(衣服法)을 반포(頒布)했으며 순장(殉葬)을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종래 왕이 죽으면 남녀 각 5인으로 순장을 시켰는데 이때 영영 폐지하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삼년 춘삼월조)
지증왕은 이 역사적 사실을 중시하였다 위의 세루정(洗陋亭)은 이것을 기념한 것이라고 한다 오랜 누습(陋習)을 일세(一洗)했다는 뜻이다 [밀주지 부남면(府南面 : 하남읍) 세루정조]
신라의 이 전략기지는 금관가야(金官伽倻 : 김해)만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 가야연맹의 주국(主國)이라 할 대가야[大伽倻 : 고령(高靈)]를 동시에 목표로 삼았다 이미 불사국[不斯國 : 창녕(昌寧)]을 취하여 비자화군(比自火郡)으로 만든 신라는 낙동강의 수로(水路)를 이용하여 [서침대가야(西侵大伽倻) 남벌가락(南伐駕洛) : 밀주지 이궁대조 기록]이라고 한 바와 같이 서쪽으로 대가야를 침략하고 남쪽으로 가락 즉 금관가야를 칠 수 있었다
지증왕대의 뒤를 이은 법흥왕은 율령(律令)을 창제(剏制)하여 고대국가의 체제를 강화하고 선왕(先王)의 유지(遺志)를 더욱 떨치게 되었다 그의 9년에 가야국왕이 사신(使臣)을 보내 신라에 청혼한 바가 있고 동 11년에 왕이 남경(南京)을 순시하여 영토를 개척할 때에 가야국왕이 래외(來會)했다고 한다 (前揭 신라본기 법흥왕 9년 11년조)
이 가야국왕이 금관가야의 왕인지 대가야의 왕인지 알 수 없지만 남경을 순시했을 때 래외(來會)한 왕은 아무래도 금관가야의 왕이 아닌가 한다 지리적으로 보아 남경은 금관가야 쪽이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흥왕이 가야왕과 회합한 곳은 전략기지이며 이궁이 있는 수산지방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신라의 국위(國威)는 벌써 가야왕을 자진 래외케 한 것이었다.
법흥왕은 15년에 불교의 포교(布敎)를 공인하고 살생(殺生)을 금지하여(同上) 정신적으로 백성들을 수람(收攬)하는 한편 농사를 장려하여 국력을 일층 충실케 하였다 18년 봄에 해당 관서(官署)에 명하여 제방을 수리케 한 것(동상)은 이런 정책의 일단이다 이 시기의 신라 영토내 제방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낙동강 유역의 수산제(守山堤)이다 전략기지의 바로 곁에 있는 이 제방을 수리에서 빠뜨릴 리 없을 것이며 그것은 농사의 증산만이 아닌 다른 뜻도 있었을 것이다
제방을 수리케 한 그 해 여름에 왕은 다시 신라사상 처음으로 상대등(上大等 : 총리대신)이라는 관제를 두어 국사(國事)를 총지(聰智)케 하였다 (同上) 국사를 총지케 한 것은 모두 위임했다는 뜻이다 아마도 왕은 일반행정은 상대등에게 맡기고 자신은 직접 군무와 영토개척에 전념했던 것 같다 좁은 반도의 산하(山河)를 두고 고구려 백제와 이미 각축전을 벌이게 된 신라는 가야연맹의 거취(去就)가 판세를 결정할 만큼 중대한 국면에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신라의 전략기지를 바탕으로 한 정력적(精力的) 공작(工作)은 먼저 눈앞에 있는 금관가야를 합병하게 되었다
법흥왕 19년에 금관국주구해(金官國主仇亥) 여비(與妃) 급삼자(及三子) 장왈노종(長曰奴宗) 중왈무덕(仲曰武德) 계왈무력(季曰武力) 이국탕보물래항(以國帑寶物來降) 동상(同上) 이라고 한 바와 같이 금관가야의 왕의 일족이 국탕보물(國帑寶物)을 싣고 래항(來抗) 즉 와서 항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래항의 장소가 어디였을까 삼국사기에는 전혀 밝혀놓지 않았다
그러나 지방지인 밀주지에는 분명한 기록이 있다 앞서 언급한 이궁대의 기사(紀事)에세전신라지증왕(世傳新羅智證王) 욕병강우(欲并江右) 명이사부(命異斯夫 : 當時 軍主一原注) 진우차(陣于此) 서침대가야(西侵大伽倻) 남벌가락(南伐駕洛) 체기자법흥왕시(逮其子法興王時) 가락왕구형[駕洛王仇衡 : 수로왕구세손일원주(首露王九世孫一原注) 래항어차[來降於此 전게(傳揭) 上西面 이궁대조]라고 하여
구해[仇亥 : 구형(仇衡)]가 래항(來降)한 곳은 바로 신라의 전략기지에 자리한 이궁대에서 였다는 것이다 기록에는 없지만 지금도 수산의 고로(故老)들은 당시 구해왕이 국탕보물(國帑寶物)을 싣고 강을 건너 온 지점을 가리키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신라는 구해왕에게 예우를 극진히 하여 상등(上等)의 위(位를) 주고 본국(本國 : 김해)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前揭 法興王 本紀) 이러한 신라를 조치를 후대(厚待)로 알고 감사할 수밖에 없었던 구해왕은 이 이궁의 초대 연회에서 신라의 노래와 춤을 즐겼다
위의 밀주지 기사(紀事)에 의하면 수산의 주변에서는 다음과 같은 시 한 연(聯)이 전해 온다고 한다 가락산천수대색(駕洛山川愁黛色) 구형하인무영산(仇衡何忍舞靈山) 나라가 없어진 가락(駕洛 : 金官)은 근심어린 안개 속에 잠겨 있는데 구해는 어찌 차마 영산에 춤추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이 기사(紀事)의 원주(原註)에 영산은 신라 음악의 한 곡명(曲名)이라 하였다. 망국의 왕 구해는 고국산천의 수용(愁容)을 불문에 붙이고 신라의 음악에 도취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는 아마 후일 금관가야의 유민(遺民)으로 신라 이궁의 옛터를 지나던 길손 가운데 왕사(往事)를 슬퍼하며 읊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영산은 어떠한 곡(曲)인지 신라의 기록에서 찾을 수 없지만 수산의 주변에서는 오래도록 전존(傳存)된 것이었던 듯하다
1628년(인조 6년)에 밀양부사로 부임한 정두원이 이궁대에 와서 지은 시가 있다 성남성북야화개 춘초처처만고대(城南城北野花開 春草萋萋萬古臺) 초적부지망국한 암비유향월중래(樵笛不知亡國恨 暗飛遺響月中來)
밀주지 전게조(前揭條) 황성(荒城) 이쪽저쪽에 야화(野花)가 피었고 이궁(離宮)이 있던 대상(臺上)에는 춘초(春草)만 가득한데 달 아래 초동(樵童)의 피리는 유향(遺響)을 바람에 실어 보내온다는 것이다 이 유향(遺響)은 곧 영산(靈山)의 흘러온 옛 가락을 뜻하는 것이다
신라는 금관가야를 합병한 것으로 고삐를 늦추지 않고 계속 가야연맹의 전 영역을 차지하려 하였다 법흥왕의 다음인 진흥왕이 그의 12년에 낭성(娘城)에 행차하여 이미 우륵(于勒)과 그 제자들로부터 대가야의 악곡을 헌상(獻上)받은 바 있고 123년에 드디어 이사부(異斯夫). 사다함(斯多含) 등 유명한 장수(將帥)들을 보내 토벌한 끝에 대가야를 완전 정복하였다(前揭 신라본기)
금관가야와 대가야를 점령함으로서 신라는 가야연맹의 땅을 거의 장악하게 되었으며 삼국의 쟁패장(爭覇場)에서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를 직접 상대해야 하며 따라서 전략기지는 낙동강으로부터 한강유역으로 옮아가야 했다 전략기지의 이동은 낙동강 연안(沿岸) 특히 수산쪽의 현실적 비중을 크게 즐어들게 하였다 가야와의 관계로 얽힌 옛자취 옛이야기만이 역사의 현장을 더듬게 할 뿐이다 지방지에는 여러 고적이 아직도 그대로 실려 있다 풍류현(風流峴). 정남정(定南亭). 파서막(破西幕) 등이 그것이다
풍류현 : 세전나왕 유행이궁시 봉선수사어차 인이진락 고명 風流峴 : 世傳羅王 遊幸離宮時 封禪修祀於此 因以秦樂 故名
정남정 : 세전나왕 수구형항 인이작정 명명운 定南亭 : 世傳羅王 受仇衡降 因以作亭 命名云
파서막 : 세전나왕 파가야 우명명운 (밀주지 부남면 제조) 破西幕 : 世傳羅王 破駕倻 又命名云 (密州誌 府南面 諸條)
모두 지금의 하남읍에 있는 것으로 풍류현은 신라왕이 이궁에 왔을 때 봉선(封禪)하고 제사를 지낸 뒤에 풍악을 잡히던 곳이고 정남정은 남쪽 금관가야를 합병한 기념으로 지은 정자이고 파서막은 대가야를 쳐부수고 난 뒤에 붙인 이름이라는 것이다 파서막은 여지승람에 파서방부곡(破西防部曲) 이라 하여 매우 시사적(示唆的)이다
앞서 소개한 정두원(鄭斗源)은 역시 수산에서 항교방초(降郊芳草)라는 시를 남겼다 강교(江郊)는 금관가야가 항복한 이궁의 교외(郊外)를 두고 한 말이다
강우항왕관성명 동경패주빙웅성 江右降王欵姓名 東京覇主聘雄聲
여금지유평원초 의구춘풍자재생 如今只有平原草 依舊春風自在生 [밀주지(密州誌) 전게조(前揭條)]
강우(江右 : 낙동강 西岸)의 항왕(降王 : 구해)이 성명을 바치고 동경(경주)의 패왕(법흥왕)는 영웅의 성세(聲勢)를 떨쳤는데 지금엔 오직 평원의 방초만 년년이 춘풍에 자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전략적 감소를 감안하면서 추화군을 역시 여러 주군(州郡) 중에서 상당한 비중을 두었던 것 같다
757년 경덕왕(景德王) 16년에 전국을 9주(州)로 나누고 군현의 명칭을 고칠 때에 추화군을 밀성군(密城郡)이라 하고 양주(良州 : 본거지 양산)의 관내에 소속시키면서 무릇 다섯 개의 속현(屬縣)을 거느리게 하였다
밀성군이 거느리게 된 다섯 개의 속현은 아래와 같다
상약현(尙藥縣) : 본래 서화현(西火縣)을 상약(尙藥)으로 고친 것, 지금의 창녕군 영산면 일원으로 현재 창녕의 부곡면 등이 모두 이에 딸린 것임
밀진현(密津縣) : 지금 그 위치가 미상임. 영산 남쪽 멸포(蔑浦) 일원이란 설이 있음 (주)레나(도재국) : 밀양의 향토사학자 손흥수선생의 창녕군 길곡면 하내마을 일대를 답사한 결과, 현재의 "낙동강 창녕함안보 북단"의 "창녕군 길곡면 일원"으로 밝혀졌음
오악현(烏岳縣) : 본래 구도성(仇刀城) (주)레나(도재국) : 지금의 밀양시 상동면 신곡리 일부가 당시 오악현에 해당함
형산현(荊山縣) : 본래 경산(驚山)
소산현(蘇山縣) : 본래 솔이산(率伊山)
(烏岳 이하 3縣은 모두 지금의 경북 청도땅임)
밀성군(密城郡 : 지금의 경남 밀양시)의 고유 경역(境域) 외에 이 다섯 개의 속현(屬縣)을 영유(領有)케 한 것은 이 고을이 진작부터 강좌웅부(江左雄府 : 낙동강 左岸의 雄府)로 발전할 소지(素地)를 가지게 된 것이라 하겠다
3. 고려(高麗) 밀주(密州) ~ 귀화부곡시대(歸化部曲時代)
고려초(高麗初)에는 중앙정부의 권력이 취약(脆弱)하고 지방에 대한 통치체제가 확립되지 못해서 대체로 신라시대의 주군(州郡)을 그대로 두게 되었다 밀양(密陽)도 신라(新羅)의 밀성군(密城郡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가 983년 성종(成宗) 2년에 비로소 전국(全國)에 12목(牧)을 설치하였고 이어서 14년에는 다시 전국을 4도호부(都護府) 10도(道)로 구분했는데 지금의 경상도(慶尙道) 지방은 영동도(嶺東道) 영남도(嶺南道) 산남도(山南道)의 3도(道)로 나누었고 밀성군(密城郡)은 경주(慶州)와 함께 영동도에 속하게 되었다 뿐 아니라 밀성군을 밀주(密州)로 고쳐 일단 격(格)을 높이고 군수(郡守)를 자사(刺史)로 개칭(改稱)하였다 그리고 주위의 여러 군현(郡縣)을 관할(管轄) 下에 두었는데 무릇 속군(屬郡)이 2개 속현(屬縣)이 4개나 되었다
속군(屬郡) : 창녕군(昌寧郡), 청도군(淸道郡) 속현(屬縣) : 현풍현(玄風縣), 계성현(桂城縣), 영산현(靈山縣), 풍각현(豊角縣)
위의 6개의 군현(郡縣) 중에서 청도군은 신라 때의 속현인 오악(烏岳), 형산(荊山), 소산(蘇山)이 합쳐진 것이고 영산현(靈山縣)은 마찬가지로 종래의 속현인 상약(尙藥) 그것이다
그러나 창녕군과 현풍, 계성, 풍각 3현은 모두 새로 귀속(歸屬)된 것들이다 밀주(密州) 자체가 큰 고을인데다가 이 2군(郡) 4현(縣)을 관할(管轄)하는 밀주자사(密州刺史)의 권위(權威)는 실로 대단하였다 . 뒤에 현종(顯宗) 때에 밀주자사는 다시 지밀성군사(知密城軍事)로 개칭(改稱)되었지만 그 권위는 여전하였다
당시의 전결 결수와 공부 관계가 어떠했는지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고려사(高麗史) 주현군(州縣郡)에 의하여 밀성도내(密城道內)의 병종(兵種)과 군액(軍額)을 살 필수 있다 밀성도(密城道)라는 도(道)는 방면(方面)이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밀성방면 내에 있는 군대(軍隊)라는 것이다
밀성도내(密城道內) 병종(兵種) 군액(軍額) 보승(保勝) 245人 정용(精勇) 427人 일품(一品) 532人 (高麗史 卷83, 兵志 3, 州縣郡條)
이 군액(軍額)은 인근 고을에 비해 훨씬 많은 숫자이다 즉 울주도내(蔚州道內), 양주도내(梁州道內) 금주도내(金州道內) 등은 모두 군액이 밀성도내의 반(半)도 안된다 이것 또한 이 고을의 존재 비중(比重)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고려(高麗) 전기(前期)에 있어서 수도(首都) 개성(開城)을 포함한 중부 이북은 거란(契丹), 여진(女眞) 등 북방민족(北方民族)의 구략(寇掠)과 압박(壓迫) 때문에 전쟁(戰爭)과 방비(防備)에 따른 출혈(出血)이 심하였고 뒤이어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등 무신(武臣)의 정변(政變)으로 소란과 희생이 연속되었다. 이에 비하여 남쪽 지방은 그런 피해가 적었으므로 비교적 안정된 분위기 속에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밀양(密陽)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물론 천재지변(天災地變)이 가끔 일어나기는 하였다 예를 들면 1035년 정종(靖宗) 元年과 1061년 文宗 15년 兩次에 걸쳐 大水로 인해 [낙동강의 창일(漲溢)인 듯] 守山을 비롯한 속군(屬郡)인 창녕(昌寧) 땅의 주민들이 큰 손실(損失)을 입었고[高麗史(고려사) 권(卷) 80 식호(食貨) 3] 1025년 현종(顯宗) 16년에는 또 청주(淸州) 안동(安東) 등지와 함께 밀양에 지진(地震)을 당한 것이 조정(朝廷)에 보고된 바 있었다 [동상(同上) 권(卷) 5 현종세가(顯宗世家)]
그러나 이러한 자연재해는 외침(外侵) 내란(內亂)에 의한 출혈(出血)과 희생(犧牲)에 비하면 별 것이 아니었다. 무신정변(武臣政變 1170)에 죽지 않고 개성(開城)을 탈출한 방랑시인(放浪詩人) 임춘(林椿)은 이곳에 와서 오래 머물면서 여러 시편(詩篇)을 통하여 이 고장의 자연(自然) 풍광(風光)과 인재(人材) 문물(文物) 등 당시의 정황(情況)을 잘 표현해 놓았다 여기 먼저 그의 오언시(五言詩) 한 수(首)를 옮겨본다
유밀주서사(遊密州書事) 산군다가려(山郡多佳麗) 명고관일방(名高冠一方) 지령인자걸(地靈人自傑) 야옥세빈양(野沃歲頻穰) 로공주거회(路控舟車會) 풍존예의향(風存禮義鄕) 다유여촉군(多儒如蜀郡) 절경갑여항(絶景甲餘杭) 송국황팽택(松菊荒彭澤) 연파동악양(煙波動岳陽) (중략) 사서총균록(四序叢筠綠) 천문세류황(千門細柳黃) 배반요해륙(杯盤饒海陸) 현관묘궁상(絃管妙宮商) 우승첨시여(遇勝添詩與) 여한니주상(餘閒泥酒觴) 춘행부저난(春行鳬渚暖) 모연봉루량(慕宴鳳樓凉) 몽각서창월(夢覺西窓月) 의응연침향(衣凝燕寢香) 상심병악사(賞心並樂士) 승흥방청광(乘興放淸狂) 구피산천주(久被山川住) 번차도로장(翻嗟道路長) 잔하망등각(殘霞望滕閣) 야우청숙상(夜雨聽潚湘) 편촉정안발(鞭促征鞍發) 심수거안망(心隨去雁忙) 험무왕발필(嫌無王勃筆) 하?기남창(霞?記南昌)
밀주(密州)에 놀면서 보고 듣고 한 일을 적는다 라는 이 시(詩)는 첫머리에 이 산군(山郡)은 가려(佳麗)한 곳이 많아 명성(名聲)이 일방(一方)의 으뜸이라 말한 뒤에 지기는 신령(神靈)스러워 인재(人材)가 걸출(傑出)하고 전야(田野)는 비옥(肥沃)하여 해마다 풍년(豊年)인데 교통(交通)은 열려 주거(舟車)가 집합하는 요충(要衝)이고 풍속(風俗)은 순후(淳厚)하여 예의(禮儀)의 고장이라는 것 선비가 많기로 촉군[蜀郡, (주) 레나:지금의 중국 사천성 일대)]과 같고 경치는 뛰어나 항주[杭州, (주)레나:지금의 중국 절강성 성도(省都)]를 능가한다고 까지 칭찬하였다
그는 이어서 사시절의 취죽(翠竹)과 천문(千門)의 세류(細柳) 그리고 이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해륙진미(海陸珍味)의 배반(盃盤)과 궁상묘곡(宮商妙曲)의 관현(管絃)을 즐기는 것을 묘사(描寫)하였다
당시 중앙(中央) 무신(武臣)들의 피비린내나는 정권(政權)싸움을 생각하면 임춘의 시(詩) 속에 나타나는 이 고장의 모습은 마치 태평성대(太平聖代)와 같은 느낌이다 임춘은 제영남사[題嶺南寺] 영남사죽루[嶺南寺竹樓, (주)레나:영남사는 지금의 무봉사] 등의 시(詩)도 있는데 고시체(古詩體)로서 그 중에
전략(前略) 수범도화출동중(水泛桃花出동중 ) 거인완시진여속(居人宛是秦餘俗) 청산영이우삼가(靑山影裏雨三家) 수류음중천만옥(垂柳陰中千萬屋) 일모교원우마귀(日暮郊原牛馬歸) 춘심주저?예욕(春深洲渚?鷖浴) 라는 구절(句節)들이 있다
물 위에 뜬 도화(桃花)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연상케 하는데 수양버들 속에 천백(千百)의 가옥(家屋)이라든지 해저문 교외(郊外)에 한가롭게 돌아오는 우마(牛馬)들은 그 번화(繁華)스럽고 편화(平和)스러움을 한결 더 잘 보여준다
임춘은 이러한 자연풍광(自然風光)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이 고장의 인재(人材) 문물(文物)에 관해서도 탄이(歎羡)를 마지않았다 당시의 향교(鄕校)의 제생(諸生)들이 그를 초청하여 회음(會飮)을 한바 있었는데 그는 또 시(詩)로써 사의(謝意)를 표하였다
작입궁장배성진 의관고회향단춘 (中略) 昨入宮墻拜聖眞 衣冠高會香壇春
애애승당다길사 도도만좌진가빈 藹藹升堂多吉士 陶陶滿座盡嘉賓
노유구탄사문상 시희명도예의신 老儒久歎斯文喪 始喜名都禮義新
궁장(宮墻) 즉 사당(祠堂)에 들러 선성(先聖)의 진상(眞像) 앞에 절하고 향단(香壇)의 봄 의곤(衣冠)의 높은 집회(集會)에 나아가니 당상(堂上)에는 수많은 착한 선비들이 오르내리고 좌중(座中)에는 모두 세련된 빈객(賓客)이 흥겹게 수작들 한다
이 늙은 몸 항상 사문[斯文 문장(文章). 학문(學問)]이 상실(喪失)된 것을 탄식했더니 여기 이 명도(名都)에 와서 비로소 예의(禮義)가 새로워지고 있음을 기뻐하게 되었다 라고 한 것이다
창과 칼로써 모든 것을 결정하는 무신정권하에서 이 고장의 사람들의 문아(文雅)와 예절에 접한 임춘은 충심으로 감열(感悅)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처음에 유밀서사(遊密書事)에서 선비가 많기로 촉군(蜀郡)과 같다느니 풍속(風俗)은 순후(淳厚)하야 예의(禮義)의 고장이라 는 등의 찬사를 발하더니
이번엔 향교(鄕校)에 대한 시(詩)에서 다시 수많은 선비라느니 예의가 새로워지느니 하는 말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임춘은 마지막으로 기밀주태수(奇密州太守) 라는 시에서 필마단장(匹馬單裝)으로 다시 여도(旅途)에 오르는 자신의 쓸쓸한 행색을 말하는 한편 아름다운 밀주(密州)에 대한 무한한 아쉬움을 표시하기고 하였다
임춘(林椿)의 시는 종래 한시의 특유한 수식성(修飾性) 때문에 약간의 지나친 표현이 있을지 모르지만 1170년대 당시의 우리 고장의 상황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라 하겠다
이러한 상황과 반대로 수도 개성(開城)을 비롯한 전국 각 지방의 정세(政勢)는 날로 동요(動搖)와 불안(不安)으로 흘러갔다
무신정권이 등장한 뒤에 상하의 신분질서(身分秩序)가 크게 문란해져 비록 미천(微賤)한 자라도 기회(機會)를 잘 잡으면 정부 요직(要位)에 오를 수 있었다
한 때 정권을 잡았던 이의민(李義旼)은 연일 사비(寺婢)의 소생(所生)이었으며 그 이전에도 노비 출신으로 공경대부(公卿大夫)가 된 자가 많았다 이러한 흐름 속에 노비(奴婢) 천민(賤民)들의 반란(反亂)이 각처에서 일어났는데 그중에도 1198년 만적(萬積)의 란은 노예해방(奴隸解放)의 격렬한 외침이었다 수도에 있어서의 만적의 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지방에 있어서의 민중의 소요는 일파이파(一波二波) 그칠 줄 몰랐다
특히 동남방면(東南方面)의 있어서의 군도(群盜)의 봉기(蜂起)와 창궐(猖獗)은 국가의 행정력을 거의 마비시키다시피 하였다
강원도의 명주(溟州) 삼척(三陟)과 경상도의 경주(慶州) 의성(義城)이 한때 적(賊)에게 점령(占領)당했는가 하면 진주(晉州)에는 이민간(吏民間)의 폭동(暴動)으로 살육(殺戮)이 자행(藉行)되었고
청도에는 운문산(雲門山)을 근거지로 한 김사미(金沙彌)의 일당(一黨)이 1198년에 이어 1202년에 재차(再次) 반기(叛旗)를 들고 나왔다
이 시기에 우리 고장 밀양은 어떠했는가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신종(神宗) 3년 즉 1200년 5월에 밀성(密城)의 관노(官奴) 50여명은 관(官)의 은기(銀器)를 훔쳐 운문산으로 가서 적군(賊軍)에게 합류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리 없었을 것이고 쌓이고 쌓인 사회의 모순(矛盾)이 전국적 풍조(風潮)의 파급(波及)에 의해 촉발(觸發된) 것이다 표면적 안정과는 달리 내부로부터 위기(危機)는 아주 오래 된 것이다
드디어 임춘의 시속에 도원경(桃源境)으로 그려졌던 아름다운 밀주(密州)가 시대의 격류(激流) 속에 말려 든 것이다 역사적(歷史的) 필연(必然)이다
이 무렵 중앙에서는 최충헌(崔忠獻)이 모든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대권(大權)을 한 손에 잡아 그 나름의 정국(政局)을 주도하면서 지방의 반란을 철저히 진압하였다 이리하여 1176년경으로부터 1205년경에 이르기까지 무려 30년동안 연달아 일어났던 각처의 반란(叛亂)이 일단 종식되었다
운문산 적군(賊軍)에게 합류했던 밀성관노(密城官奴) 일당(一黨)도 물론 평정당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내우(內憂)가 겨우 종식되자 또 외환(外患)이 시작되었다 몽고의 외환(外患)이라 할 몽고의 대구(大寇)가 쳐들어온 것이다 12341년 고종(高宗) 18년으로부터 시작된 몽고의 병화(兵禍)는 저노후(戰後) 또한 30년 가까운 장기전에 걸친 것으로 국토의 대부분을 황폐(荒廢)시킬 정도의 큰 상처를 입혔다
최충헌의 자리를 승계하여 고려정부의 실권자가 된 최우(崔瑀)는 몽고의 항복 요구를 거절하고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거기에서 전국의 성보(城堡)를 지키는 장병들에게 대몽고(對蒙古) 항전(抗爭)을 지령(指令)하였다
강화도(江華島)를 보루(堡壘)로 하여 몽고(蒙古)에 대한 장기(長期) 항전(抗戰)을 수행한 고려 국민은 당시 구아대륙(歐亞大陸)을 마음대로 짓밟았던 몽고 기병(騎兵) 앞에 러시아민족과 더불어 최대의 희생(犧牲)을 감수하면서 그 저지와 대결에 용감하였다
특히 주목할 것은 각 지방의 장병과 민중들의 영웅적 전투(戰鬪)였다 박서(犀는) 구주[龜州:평북 구성(龜城)]에서 김경손[金慶孫은 정주(靜州 평북 의주(義州)와 北東]에서 송문주(宋文胄)는 죽주(竹州 경기도 竹山)에서 모두 몽고군의 철통같은 포위 속에 조금도 굴함이 없었고 밤낮을 가리지 않는 치열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몽고군을 각개 격파(擊破)하였다
그런데 중앙 최고의 위치에서 그것을 종합하고 집중적으로 파악해야 할 무신정권은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점차 역량의 한계를 노정(露呈)하면서 오직 후방에서 소비적인 생활과 권력 유지만을 일삼아오다가 필경 내부 분열에 의하여 최씨정권은 도괴(倒壞)되고 고려왕실 및 타협주의(妥協主義) 관료들의 책동으로 몽고에 대한 강화(講和)와 개성으로의 환도(還都)가 결정되었다
몽고에 대한 일방적인 굴종(屈從)으로 고려 국민의 27.8년간의 장기 항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고려왕실과 반동적(反動的) 관료(官僚)들의 처사는 국민에 대한 엄청난 배신이며 국민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리하여 지금껏 전쟁의 주력부대였던 삼별초군(三別抄軍)의 장교들이 장군 배중손(裵仲孫)의 지휘아래 분연히 궐기(蹶起)하였다
우선 개성 환도를 거부하고 왕족 승화후(承化候) 온(溫)을 새 왕으로 옹립(擁立)하여 정부를 조직한 뒤에 관리 군인 및 그 자녀 노비 기타 공사 재화(財貨)를 천여척의 배에 싣고 남하하여 진도(珍島)에 본거(本據)를 정하고 남해 거제 제주 등 30여도를 지배하여 일부 해상왕국(海上王國)을 건설하였다. 그들은 전국민을 향하여 몽고에 대한 최후까지의 항전을 호소하였다. 이때 전라도 경상도 지방의 백성들은 일제히 호응하여 일어났다. 그동안 몽고의 병화(兵禍)에 대한 민족적 적개심이 격렬한 데다 삼별초군의 행동이 대의명분에 합치했기 때문이다
이 위세에 놀란 지방 수령들은 바람에 쓰러지듯 동조하였고 개중에는 진도로 찾아가 새 왕을 알현(謁見)하기도 하였다 반대로 그렇지 않은 수령(守令)들은 아주 고립되거나 백성들의 손에 죽음을 당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대하여 밀양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하였는가
고려사와 여러 문적(文籍)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하고 있다 당시의 군인인 방보(方甫) 계년(桂年) 박평(朴平) 박경순(朴慶純) 박경기(朴慶祺) 등이 고을사람들을 숙취하여 삼별초군에 호응하려 하는데 군(郡)의 부사[副使 : 부군수(副郡守)]인 이이(李頤)가 말을 듣지 않아 드디어 그를 죽이고 개국병마사(開國兵馬使)라 칭하여 여러 군현에 첩문(牒文)을 발송하는 한편, 다시 그 당(黨)을 보내 비협조적인 청도감무(淸道監務) 임종[林宗:혹은 최양수(崔良粹)]를 죽였다
마침 본군(本郡) 출신인 조천(趙阡)이 일선[一善=선산(善山) (주)레나:지금의 경북 구미) 현령(縣令)으로 가 있었는데 방보(方甫) 등은 조천에게 연락하여 그를 귀향시킴과 동시에 함께 거사(擧事)하게 되었다 조천은 현직 지방관으로 관인(官人) 신분의 소유자인만큼 지방사회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이 컸으므로 우두머리로 삼은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안렴사(按廉使 : 지금의 도지사) 이숙진(李叔眞)은 겁이 나서 금주(김해)로 도망주해 버렸다
방보 등의 행동이 불법이고 반역(叛逆)이라고 생각한 금주방어사(金州防禦使:지금의 김해시장)김훤은 경주판관(慶州判官) 엄수안(嚴守安)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이숙진을 앞세워 밀양으로 진격하려 하였다. 이숙진은 아직도 겁에 질려 결단을 짓지 못하고 술승(術僧)을 불러 길흉(吉凶)을 점치고 있었는데 김훤(金晅)이 칼을 들어 술승을 내려치니 이숙진은 그제서야 도리없이 좇았다
안렴사를 앞세운 관군의 대부대가 밀양으로 쳐들어가니, 조천은 정세가 불리해진 것을 알고 군인 손일(孫逸)과 모의(謀議)하여 방보 등을 목베어 투항하고 말았다 이것이 1271년의 일이었다
방보 등이 개국병마사(開國兵馬使)라고 칭한 것은 개국 즉 나라를 개혁한다는 대단한 의도를 담은 것인데 불행히도 계획이 미숙하고 조치가 서투른데다가 동지로 포섭했던 조천 손일 등이 반복무상한 태도로 나와 완전히 패망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이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그 후의 밀양에 대한 고려 정부의 보복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어 주민들은 모두 전전긍긍하였다, 읍내 사람들이 힘을 모아 정부 요로(要路)에 많은 뇌물(賂物)을 바치고 선처를 부탁하였다. 정부 내의 대간(大諫)들은 진작 밀양에 대한 응징을 주장하였다, 반역을 꾀한 인간은 물론이고 반역자들의 거주 지방에 대해서도 응징하는 것이 전통적 원칙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뇌물을 받은 용사자(用事者)들은 5년여를 미루어 왔다 결국 전통적 원칙에 입각한 대간들의 계속된 주장에 거부할 명분이 없는 정부는 1276년 충렬왕 2년 에 드디어 밀양 전체를 반역향(叛逆鄕)으로 규정, 밀성군을 일반 주군(州郡)의 서열에서 완전히 격하시켜 귀화부곡으로 만들어 계림부(鷄林府:경주)에 예속(隸屬)하게 하였다
이것은 우리 밀양으로서 전무후무한 큰 변고(變故)였다 부곡이라는 것은 원래 신라 때 주군을 편성하면서 인구와 전정(田丁)이 한 개의 현(州郡制에 있어서 최소의 행정단위)으로 만들기에 부족한 지방은 향 또는 부곡으로 만들어 군(郡)이나 현(縣)의 임내[任內:관하(管下)])에 두었던 것이다
부곡에는 중앙에서 파견돼온 관원이 없고 오직 부곡의 이(吏)가 있어(部曲長이라 칭함) 부곡의 행정을 맡아 있어면서 상급기관인 군현의 리(吏)에게 통제를 받아야 했다 지방행정 말단의 1단위이긴 하지만 독립성이 전혀 없고 군현에 예속된 존재일 뿐이었다 밀양 자체가 수많은 향(鄕)과 부곡(部曲)을 경내에 가지고 있는 터에 이제 고을 전체가 송두리째 部曲으로 전전락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제 지군사(知郡事:郡守)도 부사(副郡守)도 없어지고 오직 귀화부곡(歸化部曲)의 리(吏) 즉 부곡장이 계림부(鷄林府=경주)의 통제 아래 조세(租稅) 역력(力役) 등에 관한 사무를 보게 이르렀다
부곡은 여러 종류가 있어 일반 양민이 사는 부곡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부곡 중에는 포로(捕虜) 역적(逆賊) 특수천민(特殊賤民)들의 부곡이 끼어 있어서 대체로 부곡은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귀화부곡의 경우 귀화라는 이름이 보여주듯이 화외(化外)의 백성으로 다시 왕화(王化)에 돌아오게 하려는 엄혹(嚴酷)한 처벌이었던만큼 주민들의 고통이 심하였다
부곡인이 되어 불명예스러운 것은 차치하고 계림부(鷄林府)쪽으로부터 예속인시(隸屬人視)에 따른 부당한 징수(徵收)와 주구(誅求)에 견딜 수 없었다 특히 이 고장 토착세력으로 역대 호장(戶長) 부호장(副戶長) 등 행정실무를 관장해오던 읍내사람들이 종래 콧대높은 대관향리(大官鄕吏=큰 고을의 아전)의 긍지를 일조에 잃어버리고 한갓 부곡리(部曲吏)로서 경주 향리(鄕吏)들에게 하대(下待)를 받는 것은 실로 참기 어려운 사정이었다. 밀양고장의 토착세력들을 대표하는 씨족집단 중에서 박씨족은 고려 중기에 이미 중앙으로 진출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박의신(朴義臣)은 인종조(1123~1146)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를 거쳐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귀화부곡 시기에 역시 이 고장 박씨족 출신으로 박의(朴義)라는 사람이 당시의 임금인 충렬왕에게 사랑을 받아 왕의 측근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왕이 사냥을 다닐 때 응견(鷹犬)을 잘 다루는 것으로 행신(倖臣)이 되어 여러 차례의 승진 끝에 어느 듯 장군이 되었다. 그는 왕의 주변의 요속(僚屬)들에게 뇌물을 주고 왕에게 밀양 문제를 아뢰게 하였다. 밀성은 대군(大郡)으로 국가에 공부(貢賦)를 바치는 것이 대단히 많은데 부곡으로 격하(格下)시켜 진무(鎭撫)하는 수령(守令)조차 없게 되었으니 백성이 유산(流散)될까 염려된다 라고 한 것이다
왕은 이를 받아들여 우선 특별히 소복별감(蘇復別監)이라는 관리를 두어 백성들을 보살피게 하였다 이 소복별감이 어떤 기능을 했는지 전혀 설명이 없지만 어쨌든 귀화부곡의 주민들의 편익을 도모하기위한 것임은 곧 이해가 된다
박의는 부자이지만 인색하기로 소문난 위인이니까 료속(僚屬)들에게 준 뇌물은 박의 자신의 것이 아니고 역시 읍내 사람들이 염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소복별감을 둔지 얼마 뒤에 귀화부곡에서 간신히 밀성현으로 승격되었고 1285년 충렬왕 11년에 비로소 밀성군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한번 입은 오명(汚名)은 쉽게 가셔지지 않았다. 특히 정부 지배층의 입장에서 늘 백안(白眼)으로 보아 왔다 고려를 거쳐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그러하였다
조선초의 공사(公私) 기록은 대체로 고려 이래의 것을 이어받은 것이지만 1425년 관에서 편찬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의 첫머리에 도내 ,각 고을의 토지 수천(水泉) 풍기(風氣) 민속(民俗)에 관한 일람표(一覽表)를 게재해 놓았는데, 밀양에 대해서는
밀양 : 토지비 수천심 풍기난 속상 역농호학 연 호투쟁 密陽 : 土地肥 水泉深 風氣暖 俗尙 力農好學 然 好鬪爭
이리하여 자연조건은 모두 좋게 쓰고 풍속도 농사에 힘쓰고 학문을 숭상한다 고 하여 역시 좋게 말해 놓고는 끝에 가서 호투쟁(好鬪爭) 이라 하여 투쟁을 좋아한다고 사족(蛇足)을 달아 두었다. 이것은 삼별초에 호응한 방보 등의 사건 때문이다
이로부터 밀양의 인사들은 이것을 큰 수치(羞恥)로 알아 오명을 씻기 위한 노력을 기울려야 했다 후술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향교의 제생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 사실을 간절히 언급하기도 하였다
전조지말 건강해유 주지군불영 前朝之末 乾綱解紐 州之群不逞
여방보계년지도 주오제민 이응진도지적 如方甫桂年之徒 註誤齊民 以應珍島之賊
소취미기 자저탕복 세수이차폄절기속 嘯聚未幾 自底蕩覆 世遂以此貶絶其俗
후지록관풍지지지자 함왈기민호투쟁 後之錄觀風誌地志者 咸曰其民好鬪爭
지금위산천인물지수욕언 至今爲山川人物之羞辱焉
밀주지 부내면 향교조 密州誌 府內面 鄕校條
방보(方甫) 등의 잘못된 선동으로 지방이 탕패(蕩敗)를 당하고 후세의 관풍록(觀風錄)이나 지리지(地理誌)에 모두 우리 고을 백성들은 투쟁을 좋아 한다 라고 기록하여 지금까지 산천 인물의 수치(羞恥)와 모욕(侮辱)이 되고 있다고 한 것이다. 김종직(金宗直) 선생은 이어서
오호 제노 문헌지방야 (嗚乎 齊魯 文獻之邦也) 공맹지유교존언 이경역세운(孔孟之遺敎存焉 而更歷世運) 간부대도 로기지이위란자(奸夫大盜 擄其地而爲亂者) 다의 연이중국지인 불이시병구기지 (多矣 然而中國之人 不以是倂詬其地) 약칭예의지속 즉필이이방위수(若稱禮義之俗 則必以二邦爲首) 내지하오주 이일방계지란(奈之何吾州 以一方桂之亂) 이백재지하 상몽기오멸야(而百載之下 尙蒙其汚衊耶) 가견록관풍지지리자지불관홍기량이불허인이천선지속야 (可見錄觀風誌地理者之不寬弘其量而不許人以遷善之俗也) [同上]
라고 하여 공자(公子) 맹자(孟子)의 고장인 제노(齊魯)에서도 간부(奸夫)와 대도(大盜)가 나온 적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중국인(中國人)들이 그 고장을 욕하지 않고 예의지속((禮義之俗)을 말할 때는 반드시 제노(齊魯)를 제일로 쳐주고 있는데 거기 비하면 우리나라 관풍록(觀風錄)이나 지리지(地理誌)를 엮은 사람들은 너무도 도량(度量)이 좁다는 것이다. 호투쟁(好鬪爭) 3字가 그처럼 밀양의 체면을 손상시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관점의 문제다 삼별초군(三別抄軍)의 행위를 의거로 인정하고, 그들의 최후 왕쇄지(王碎地)인 제주(濟州)에 항몽순의비(항蒙殉義碑)를 세우게 된 오늘의 사관(史觀)으로 볼 때에 삼별초군(三別抄軍)에 호응한 방보(方甫) 등의 행동도 또한 의거(義擧)에 해당하는 것이며 아름다운 밀주(密州)를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격하(格下)시킨 고려정부(高麗政府)의 보복(報復) 처사(處事)가 비열한 짓일 뿐이다 ------------------------------------------
병구지(兵區址)에 면면이 살아있는 밀양인의 민족자존(民族自尊)을 영구히 보존하자
당시 몽고에 예속된 고려조정과 폭압적인 무신정권이 의(義)로운 고려백성을 고려사에 도둑의 무리로 기록한 것은 당시 꼭두각시 조정과 지배층이 폭정과 학정으로 외세(外勢)인 몽고에 복종하며, 백성을 굶주리게 하여 민족과 강토를 피로 유린하고 민족자존을 잃게 하였고 결국 고려백성이 도둑질을 안 하면 먹고살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반증하며민족자존의 굶주리는 정의에 찬 어진 백성을 도둑의 무리로 비하시킨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밀양과 중앙정부는 지구 역사상 유일무이한(唯一無二)한 폭압적인 초강대국인 몽고(蒙古)에 맞서민족의 자존을 위해 장렬히 맞서 싸운 밀양의 의(義)로운 사람들에 대한 오욕(汚辱)의 역사를 정의(正義)로운 역사로 새로이 기록하고, 밀양인을 의(義)로운 민족자존의 독립운동가로 복권(復權)시키고밀양시 부북면 전사포리 병구지(兵區址)에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를 세워야 한다
4. 조선(朝鮮)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시대 (Ⅰ)
고려왕조(高麗王朝)가 끝나기 직전 1390년대 공양왕(恭讓王)은 그의 증조모(曾祖母) 박씨(朴氏)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밀성군(密城郡)을 밀양부(密陽府)로 승격(昇格)시켰는데 조선조(朝鮮朝) 건국(建國)과 더불어 밀성군(密城郡)으로 환원(還元)되었다가 태조(太祖 3년에 본군(本郡) 출신(出身) 김인보(金仁甫)가 중국(中國)에서 명(明)나라의 사신(使臣)이 되어 귀국(歸國)하매 그의 청(請)에 의하여 다시 밀양부(密陽府)로 고쳐주었다.
이때의 밀양부(密陽府)는 7년 만인 태종(太宗) 원년(元年)에 또 밀성군(密城郡)으로 되돌려졌다 이와 같이 특정인을 위한 읍호(邑號)의 승강(陞降)은 시효가 끝나면 원위치(原位置)에 돌아가야 하는 것으로 정말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1403년 태종(太宗) 3년에 사간원(司諫院)에서 상소(上疏)하여 부(府).주(州).군(郡).현(縣) 지호(之號)를 재 조정할 것을 건의하면서 밀성군(密城郡)에 대하여 우부 지광인주, 실경상지거읍, 당승위부(태종실로 권8, 3년 윤3월 임술조) 右府 地廣人 (주), 實慶尙之巨邑, 當陞爲府(太宗實錄 卷8, 3년 閏3월 壬戌條)라고 하였다 즉 불합리한 읍호의 陞降은 시정해야 하는데 밀성군은 지역이 넓고 인구가 조밀하여 경상도의 거읍(巨邑)이므로, 마땅히 부로 승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1415년 태종 15년에 비로소 주민의 호수를 기준으로 하여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가 된 것이다
밀양의 속군(屬郡). 속현(屬縣)도 그동안 많은 변천을 겪었다 밀주시대(密州時代)에 속군2, 속현 4였던 것이 고려 중기로부터 조선 초에 이르는 사이에 청도. 창녕 두 속군과 현풍(玄風), 영산(靈山) 두 속현이 독립해 나가고 계성(桂城)은 영산으로 소속되어 버렸다 그중에서 남은 것은 풍각현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조선 초의 모든 기록에 밀양도호부 임내(任內)에 두 개의 속현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풍각현(豊角縣)이고 하나는 수산현(守山縣)이다
<풍각현> 신라의 상화촌(上火村)인데 고려때 풍각으로 이름을 고쳐 청도로부터 래속(來屬)한 것
<수산현> 본래 천산부곡(穿山部曲)인데 고려 때 수산으로 이름을 고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수산은 위의 2항에서 서술한대로 원래 신라의 대가야(對伽倻)의 전략기지(戰略基地)의 전초지(前哨地)라 할 수 있는 곳인데 언제 천산부곡(穿山部曲)이 되고 또 언제 수산현이란 이름으로 밀양의 속현이 되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조선조 초에 경상도 지방은 경주도(慶州道), 안동도(安東道), 상주도(尙州道), 진주도(晉州道)의 네 개의 방면(方面)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네 개의 방면에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를 포함하여 도호부는 모두 7개뿐이다 그중에서도 경주도에는 밀양도호부가 유일한 것이었다 주민 천호(千戶) 이상의 고을을 도호부로 한다고 했거니와 당시 밀양의 호구(戶口)는 과연 얼마나 되었던가 한 번 살펴 본다 앞에서 이미 인용한 1425년 세종 7년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에 나오는 숫자이다
본부(本府) : 1,612호, 남자 5,522명, 여자 5,564명 풍각현 : 294호, 남자 907명, 여자 1,074명 수산현 : 93호, 남자 356명, 여자 322명
본부와 두 속현을 합하면 호수는 1,999호이고, 인구는 남자가 6,785명, 여자가 6,960명이다 당시의 이 주민은 농업 인구가 대부분인데 그러면 그 당시 농경지의 면적은 얼마나 되었을까 1454년 작성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밀양의 간전(墾田)이 1만 2백 85결(結)인데 그 중에 수전(水田)이 3분의 1이 조금 안되었다고 한다 간전(墾田)이란 개간(開墾)된 전토(田土)로서 관청의 토지대장에 정식으로 등록되어 매년 국가에 대한 조세(租稅)를 부담하는 것이다 실은 토지대장에 등록되지 않은 전답이 상당히 있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이 등록된 전결(田結, 1결은 대략 지금의 8,000평)만도 당시의 울산, 김해 등 이웃 고을에 비해 훨씬 많은 것이다 다만 수전(水田)이 3분의 1 조금 안된다고 한 것을 보면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아직 수전보다 한전(旱田 = 밭)이 대종을 이루고 있었던 것 같다. 이에 따라 국가에 대한 공부(貢賦)도 한전(旱田) 쪽의 비중이 컸다 공부는 전세(田稅)와 전결(田結), 공물(貢物)을 말하는데 농지 과세에 있어 수전(水田)에는 미(米를 = 쌀) 바치게 하고 한전(旱田)에는 두(豆 = 콩)을 바치게 하되 거기 첨부하여 목면(木綿). 마포(麻布). 유밀(油蜜) 등 범백응용지수(凡百應用之需)를 함께 하는 것이다 당시 밀양의 주민들이 바치는 공부(貢賦)의 품목(品目)들은 아래와 같았다
<공부 貢賦> 면유(綿유), 목면(木綿), 저포(紵布), 정오승포(正五升布), 상면자(常綿子), 점면자(粘綿子), 점경미(粘更米), 점백미(粘白米), 간중미(間中米), 상중미(常中米), 조미(造米), 전미(田米), 진맥(眞麥), 태(太), 진유(眞油), 청밀(淸蜜), 촉밀(燭蜜) (경상도지리지 慶尙道地理志 밀양도호부 密陽都護府 공부조 貢賦條)
이 품목들 중 미곡(米穀) 외의 것은 죄다 한전(旱田)에 부과된 소위 의례복정공부(依例卜定貢賦)이다 이 과다한 품목을 공부라는 이름으로 내게 하는 것 외에 별도로 또 토산공물(土産貢物)이라는 것이 있었다 공부가 농지에 대한 과세임에 반해 토산공물은 지방특산물을 민간에 부과시키는 것이다 원래 이 토산공물은 전세(田稅)에 비해 10분의 6이 되는 것으로 조선조 정부 재정상 가장 큰 재원이 되어 있었다 밀양의 경우를 보자
<토산공물 土産貢物> 석이(石耳), 황율(黃栗), 금칠(金漆), 매칠(每漆), 저모(猪毛), 작설차(雀舌茶), 록포(鹿脯), 은구어(銀口魚), 목기(木器), 지지(紙地), 검인(芡仁), 조탕(蓧蕩), 자기(磁器), 도기(陶器), 철(鐵), 만어사동산반석(萬魚寺洞産磐石), 약재(藥材), 파고지(破古紙), 오미자(五味子), 백편두(白篇豆), 저실(楮實), 호로(胡虜), 생지황(生地黃), 당귀(當歸), 황기(黃耆,) 맥문동(麥門冬,) 백복령(白茯笭,) 밀휴조휴(蚤休), 속수자(續隋子) 세종실록지리지 世宗實錄地理志 토산공물조 土産貢物條) 등등이다
이중 만어사동산 반석(萬魚寺洞産 磐石)은 세종(世宗) 때 한 번 채진(採進)케 했다가 음율(音律)이 맞지 않아 진작 폐지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토산들은주민들이 해마다 국가에 공(貢)으로 바쳐야 했다. 이러한 공물은 방납제(防納制)에 의하여 백성들의 부담이 일층 무거워지기도 했지만 미(米), 태(太 두 豆) 등 현곡(現穀)고을 서울로 운송하는 것 또한 큰 문제였다 조선조 정부는 경상도 각 고을의 조세를 모두 김해(金海) 불암창(佛岩倉), 창원(昌原) 마산창(馬山倉), 사천(泗川) 통양창(通洋倉) 3곳으로 수납(輸納)시켜 서해안으로 조전(漕轉), 경창(京倉)에 받아들이게 했다가, 1403년 태종 3년 5월에 경상도 조선(漕船) 34척(隻)이 침몰(沈沒)되어 미(米 = 쌀) 만여석(萬餘石)과 승원(乘員) 천여명(千餘名)이 수중(水中)에 매장(埋葬)된 일대 참사(慘事)를 겪고 나서 그 다음 곧 육상운수(陸上運輸)로 방법을 바꾸었다 이리하여 거제현(巨濟縣)을 제외한 나머지 군현(郡縣)에서는 대개 낙동강으로 상주(尙州)까지 운반, 령(嶺)을 넘어 충주(忠州) 경원창(慶原倉)에 임시로 쌓아두었다가 한강(漢江) 상류에서 배에 실어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낙동강과 거리가 먼 곳에서는 육로로 충주까지 운반하였다 밀양의 경우는 물론 낙동강(洛東江)을 이용하였다
<밀양조세 密陽租稅> 어부동이창 재선 지낙동강 수로시1이일 과령 지경원창 육로사일정 (경상도지리지 도내 조세봉상조) 於府東耳倉 載船 至洛東江 水路十二日 過嶺 至慶原倉 陸路四日程 (慶尙道地理志 道內 租稅捧上條)
즉, 밀양의 조세(租稅)는 읍(邑)의 동쪽 이창(耳倉 = 귀창 : 응천강 凝川江의 하류, 이창원 耳倉院이 있었다)에서 배에 실어 낙동강으로, 그리고 낙동강을 거슬러 상주까지 올라가는데 수로(水路)가 12일이고, 령(嶺)을 넘어 충주 경원창까지 가는데 4일정이라는 것이다 낙동강의 선운(船運)도 보통의 일이 아니지만 령을 넘을 때부터 순전히 우마(牛馬)에 의존하여 곤돈(困頓) 병폐(病斃)가 더욱 안타깝게 여겨졌다 공부의 부담 외에 또 하나의 부담은 병역(兵役)이었다 밀양에 배정된 군액(軍額)은 다음과 같았다.
<군정 軍丁> 시위군(侍衛軍) : 120명 진 군(鎭 軍) : 233명 선 군(船 軍) : 542명 세종실록지리지 世宗實錄地理志 밀양도호부 密陽都護府 군정조 軍丁條
시위군(侍衛軍)은 서울 왕성(王城)을 숙위(宿衛)하는 것이고 진군(鎭軍)은 병마첨절제사를(兵馬僉節制使) 지휘관으로 하는 도내 5진(울산진 蔚山鎭, 영일진 迎日鎭, 동래진 東萊鎭, 영해진 寧海鎭, 사천진 泗川鎭)에 부방(赴防)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군(船軍)은 좌도수군(左道水軍) 도안무처치사도(都安撫處置使, 동래 부산포 富山浦)의 밑에 있는 개운포(開雲浦), 두모포(豆毛浦), 해운포(海雲浦), 다대포(多大浦) 등 각포(各浦) 만호(萬戶)에 가서 복무(服務)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반 농민이었다 교대로 번상(番上)하면서 모든 자장(資裝)을 자기가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그 부담은 한결 더 했다 그 중에도 선군(船軍)은 조운(漕運). 조선(漕船) 번염(燔鹽) 등 온갖 잡역(雜役)을 담당하였다 특히 수산 국둔전(國屯田)에 동원되어 제초(除草). 경작(耕作)을 도맡아 하는 것은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는 가외(加外)의 일이었다. 수산(守山) 국둔전은 앞에 여러 번 언급된 수산제(守山堤) 그것으로 원래 낙동강의 침수(浸水)로 천연(天然)의 큰 호택(湖澤)이 되어 있었는데 1463년 세조 9년에 정부에서 그 둑을 따서 물을 빼내버리고 농지로 만들었으나 해마다 강물의 피해로 수확이 적었다 4년 후에 경상도체찰사(慶尙道體察使) 조석문(曺錫文)의 건의(建議)로 양동역전(良洞驛前)에서부터 제방(堤防)을 개축(改築)하기 위한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였는데 이 때 밀양, 대구, 양산, 창원, 청도, 창녕, 영산 등 무려 9읍(邑)의 수령(守令)들이 각기 자기 고을의 군정(軍丁)들을 인솔(引率)하고 와서 작업에 열을 올렸다 첫째 긴 제방으로 강물의 범람(汎濫). 침입(侵入)을 막고 둘째 수갑(水閘)의 시설로써 내수(內水)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공사가 끝난 뒤에 제방 앞뒤에 양류(楊柳)와 산죽(山竹)을 열식(列植)하여 경관(景觀)을 조성하고 여러 관계 인사들이 모여 수산회계(守山會契)를 만들어 기념하였다 김종직(金宗直) 선생은 그 계축(契軸)에 시(詩)를 남기기도 했다.
이렇게 국둔전(國屯田) -- 국농소(國農所 = 국영농장)를 만든 결과, 토지옥요 갑우경상일도(세종실록 권184, 16년 10월 을유조) 土地沃饒 甲于慶尙一道 (세종실록 世宗實錄 권 卷184, 16년 10월 乙酉條)라 하여 세수(歲收 8천여석으로 군수(軍須)에 큰 도움을 주었다 뒤에 그 일부를 봉선사(奉先寺)에 시납(施納)하고 또 관리의 소홀로 매년 수확이 좋지 않았으나 정부에서 계속 대책이 논의되었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경영방식이었다 정부는 처음부터 본부(밀양도호부)의 선군(船軍)을 전원 (5백여명) 투입하여 경작은 물론 그 수확까지 그들에게 책임지우다시피 하였다 그리고 소유 농우(農牛)는 인근 제읍(諸邑)에서 분양(分養)하도록 하였다 선군에게 아무 보수도 주지 않고 병역대신 일을 시키는 것은 완전히 요역(徭役) 노동제였다 이에 따른 선군의 태업(怠業)과 불용심(不用心)이 문제지만 조신(朝臣)들은 남방의 국방이 허술한데 선군을 국둔전에 두지 말고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고 누차 강조하였다 이리하여 조석문은 본부(밀양)에 살고 있는 중앙각사(中央各司)의 노속(奴屬) 70명에게 번상(番上)을 면제시키는 대신에 둔전(屯田)에 일하게 하고 농우는 둔전 소출의 곡식으로 본부에서 기르게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선군은 계속 동원되어 말썽을 빚는 가운데 점차 지방 농민에게 소작을 주어 관(官)에서 수확의 반을 받는 식으로 되어 나갔다 정부의 관심이 줄어들고 관리들의 노력도 풀어지면서 제방과 수문이 제대로 치수(治水)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뒤에는 완전히 허물어져 드디어 강물의 침탄(侵呑)에 의한 큰 호택(湖澤)으로 변해지게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우리나라 역사상 몽고(蒙古)의 대구(大寇)와 함께 엄청난 파괴(破壞)를 가져 왔지만 적(敵)의 상륙지점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밀양은 동래, 부산에 이어 두 번째로 난을 당한 지방이었다
평화로운 고장 울창한 율림(栗林)으로 둘러싸인 응천강안(凝川江岸) 아침저녁 취연(炊煙)이 자욱한 밀양성(密陽城), 향교(鄕校)의 글읽는 소리와 어옹(漁翁), 목수(牧竪 : 더벅머리 竪)의 노래가 한가로이 들리고 있을 즈음 뜻밖에도 왜적(倭賊)의 대부대(大部隊)가 아무 예고도 없이 부산에 기어올라 물밀듯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이것이 1592년 선조(宣祖) 25년 4월 중순(中旬)이었다 동래성(東萊城). 부산성(釜山城)의 함락(陷落)과 함께 적의 15만 대군은 삼로로 나누어 하나는 밀양으로 하나는 언양(彦陽)으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김해(金海)로 향하였다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과 부산첨사(釜山僉使) 정발(鄭撥)이 일보(一步)도 후퇴하지 않고 장렬(壯烈)하게 전사(戰死)하여 해이(解弛)해진 당시의 민심(民心)을 크게 고동(鼓動시켰지만 좌병사(左兵使 울산병영 蔚山兵營), 좌수사(左水使)를 위시한 언양. 울산. 김해 등 수령(守令)들의 대개가 도망쳐버리고 그중에는 적(敵)에게 항복하는 자까지 있었다 이 때 밀양부사는 젊은 무인(武人) 박진(朴晉)이었다 이 박진은 다음날 영남일대에서 적의 소탕에 활약하던 임란 중의 명인(名人)으로 백번 패(敗)하면서도 다시 일어나 싸우던 불굴의 용사였다 그가 처음 부사(府使)로 부임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연소(年少)한 것을 보고서 중책(重責)을 감당해낼까 염려하였다 그는 우리 고장 주민의 일치한 협력을 얻어 조수(潮水)처럼 밀려오는 적의 대부대를 차알(遮遏)하기로 하였다 이보다 먼저 박진은 부산의 위급함을 듣고 부하 3백명을 거느리고 달려갔는데 그때는 동래성의 저항이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여 황량(荒凉)한 낙일(落日)에 우리 군기(軍旗))성(城) 위에 쓰러지고 이양(異樣)의 복장(服裝)을 한 적(敵)들이 동래 천지에 미만(彌漫)할 때 이었다 이 광경을 바라 본 박진은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에게 소산(蘇山)을 빼앗기면 영남이 우리의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이각(李珏)을 후면에서 지원케 하고 자기는 앞을 가로막아 진을 치기로 하였다 이 초초(草草)한 진(陣)으로 영남을 지키기 위한 제일방어선(第一防禦線)을 삼아보려는 대담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적이 육박(肉薄)해오자 이각은 진작 달아나고 박진은 패하여 자기 임지(任地)인 밀양으로 분환(奔還)하였다 그는 삼랑진 작원관에서 제이방어선(第二防禦線)을 구축하였다 작원관(鵲院關)은 낙동강을 굽어보고 김해도요저(金海都要渚)를 대안(對岸)으로 하여 돌벼랑 사닥다리에 지나는 사람이 발을 모아 겨우 통과하는 천험(天險)의 요새(要塞)로서 밀양의 관구(關口)일 뿐 아니라 실로 영남의 요충이(要衝)이었다 박 진은 3백명의 병졸과 약간의 우도(右道 = 慶尙右道) 원병(援兵)에다가 지방민의 지지를 얻어 여기에서 적을 맞았다 이 때의 전황(戰況)은 왕조실록(王朝實錄)에 대강(大綱) 수록(收錄)되어 있다.
적입밀양경 부사박진 수작원강잔 도협 진 발통전거사 적연일불득진 敵入密陽境 府使朴晉 守鵲院江殘 道狹 晉 發筒箭拒射 敵連日不得進
이라 하여 작원관(鵲院關)을 틀어막은 박진은 통전(筒箭)을 발사하여 적에 항거(抗拒)함으로서 동래로부터 무인지경과 같이 들어오던 적이 여기에 연일 전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급변하였다·
적 방함양산군 요출기후 수병망지개궤 주환부성 분병고창곡이둔 (동상) 敵 傍陷梁山郡 遶出其後 守兵望之皆潰 駐還府城 焚兵庫倉穀而遁 (同上)
적(敵은) 양산을 함락(陷落) 시킨후 양산쪽에서 배후(背後)로 덮치려 하니 작원관 수병(守兵)들은 붕궤해버리고 박진은 밀양성(密陽城)으로 달려와서 무기고와 곡창(穀倉)에 불을 지르고 후퇴했다는 것이다 작원관에서 밀양성으로 후퇴할 때에 박진은 대로(大路)를 취하지 못하고 응천강 하류인 광탄(廣灘)으로 건너 오는데 우도(右道) 병사들은 수심(水潯)을 모르고 다투어 앞서려 하다가 태반이 익사(溺死)하였고 말양성에 도착 한 뒤에 다시 흩어진 병사들을 규합하여 전강(前江 = 밀양강)을 파수(把守)해 보려고 했으나 이미 호대(浩大)한 적세(敵勢)가 코앞에 닿아 손쓸 틈이 없었다 당시 지방의 명사(名士)로서 백성들의 선두에 서서 적을 막기 위해 활약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김태허(金太虛), 손기양(孫起陽)과 같은 분들이 두더러진 존재였다 김태허는 박진의 초청에 응하여 적의 포위를 뚫고 박진에게 출로를 열러주었으며 손기양, 이경승(李慶承)은 박진의 작원 방어에 측면적 원조를 하기 위해 석동촌(石洞村, 현 산내면 원서리 석골계곡)에 유둔(留屯)하는 한편 향리(鄕吏) 자제(子弟)들을 호소하여 경내(境內)를 사수할 것을 다짐하였다 결국 밀양은 적의 수중으로 넘어간 동시에 김태허는 울산(蔚山)으로 가고 손기양, 이경승은 곽재우(郭再祐)에게 합류하여 모두 항왜구국운동(抗倭救國運動)에 진력하였다
삼경(三京 = 서울, 개성 開成, 평양 平壤)을 위시한 우리 국토의 대부분을 유린한 적은 의병(義兵)의 저항이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고 수군(水軍)이 통제권을 확보했으며 우방 중국(明)이 군대와 물자로써 전폭적으로 돕게 되는 바람에 마침내 세(勢) 부족을 느껴 꽁무니를 빼기 시작하였다 만 1년 만인 1593년 여름에 평안도(平安道), 함경도(咸京道)로부터 물러나 경상도에서도 부산, 울산 등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철퇴하였다 밀양도 철퇴한 것이 이해 6월 20일 21일 경 이었다 (선조실록 宣祖實錄 39, 26년 6월 무술조 戊戌條) 이에 앞서 박진은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로서 각처에서 적과 싸워 많은 공을 세웠고 이 때 독포사(督捕使)의 직책으로 밀양에 주류(駐留)하고 있던 적을 불과 2백명의 병사로 공략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것은 우리 고장의 물심 양면의 희생적 협조 위에 이루어진 것 이었다 정부에서는 이 밀양의 첩보(捷報)를 크게 기뻐하여 이 사실을 중국군에도 통보하고 우리나라 병사들의 사기의 진작의 한 계기로 만들려고 꽤하였다 (동상 6월 기축조 己丑條 )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밀양은 계속 적이 충척(充斥)한 전방(前方)의 한 거점(據點)이 되어 있었으나 주민들의 긴장된 에너르기는 난(亂)의 극복과 향토 재건에 더욱 그 저력을 보여주었다
5. 조선(朝鮮)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시대 (Ⅱ)
1593년 8월 그러니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이듬해 가을, 왜적(倭賊)이 부산(釜山) 등 연해지대(沿海地帶)로 철퇴한 시기에 비변사(備邊司)는 국왕(國王)에게 다음과 같은 건의를 했다
울산(蔚山). 경주(慶州). 대구(大邱). 김해(金海). 진주(晉州) 등처(等處) 개작황처(皆作墟), 지유훼첨기운(只有毁堞基云) 수선지거(修繕之擧) 수편치사좌우감사처(隨便措置事左右監司處) 하유위당(下諭爲當) 즉, 울산(蔚山). 경주(慶州) 등 각처의 성(城)이 모두 폐허(廢墟)가 되어 오직 훼첩(毁堞) 퇴기(頹基)가 있을 뿐이므로 좌.우도(左.右道) 감사(監司)에게 명하여 성을 다시 쌓게 하라는 것이다. 밀양(密陽)도 대구(大邱). 김해(金海) 등지와 같이 성(城)이 완전히 허물어져 있었던 것이다
밀양성(密陽城)은 1451년 문종(文宗) 원년(元年)에 도체찰사(都體察使) 정분(鄭苯)의 보고에 의하여 개축(改築)이 논의되었는데 그것이 완성된 것은 1479년 성종(成宗) 10년 10월이었다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의하면 성(城)의 고(高)가 9척(尺)이나되고 주위가 6,670척(尺)이었다 이 성의 축조(築造)에 동원된 인부는 밀양의 주민들만이 아니고 도내 제읍(諸邑)에서 널리 동원되었다 이리하여 정부는 그 노고의 대가로 도내 제읍(諸邑)의 종래 공철취련채금(貢鐵吹鍊採金) 염초자취(焰硝煑取) 등 잡역(雜役)을 전례에 따라 견감(蠲減)해 주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밀양성(密陽城)이 임진왜란(壬辰倭亂)을 통해 폐허(廢墟)가 된 후에 중앙(中央)의 정치(政治)가 당쟁(黨爭)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지방에 대한 배려가 소홀해짐으로써 그후 복구공사가 충분치 못한 채 그대로 내려왔다. 1664년 현종(顯宗) 5년에 경상감사(慶尙監司) 이상진(李尙眞)이 축성요해(築城要害)를 논하면서 自東萊之大邱 無一城池 賊若下陸 勢當如入無人之境 此所以壬丁之酷被兵禍也 자동해지대구 무일성지 적약하륙 세당여입무인지경 차소이임정지혹피병화야 (현종실록 顯宗實錄 9, 5년 7월 정유조 丁酉條) (주)레나 : 壬丁 :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라고 하여 동래로부터 대구에 이르는 사이에 성지(城池)가 하나도 없어 적이 부산에 상륙하면 무인지경(無人之境)에 들어올 것이니, 이것이 임진왜란(壬辰倭亂)의 병화(兵禍)를 혹독(酷毒)하게 입은 이유라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而距東萊直路百二十里 卽密陽府也 府城所在 實是上遊要衝 而地形險絶 控帶江流 基防守之勢 可比山城 (同上) 이거동래직로백이십리 즉밀양부야 부성소재 실시상유요충 이지형험절 공대ㅐ강류 기방수지세 가비산성 (동상)
이라하여 밀양성(密陽城)은 상유(上遊 : 東萊.釜山의 위쪽)의 요충지(要衝地)로서 지형(地形)이 험절(險絶)하고 강(江)물을 끼고 있어 그 방(防守)수의 형세(形勢)가 산성(山城)에 비길 만하다는 것이다. 그는 또 雖其城內 井泉不足 而南門之左 卽其江岸 於其壁勢止處 ?且築之 作一隱水門 引而儲之 則水當滔滔而不絶矣 수기성내 정천불족 이남문지좌 즉기강안 어기벽세지처 ?차축지 작일은수문 인이저지 즉수당도도이불절의 라 하여
성중(城中)에 수원(水原)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남문(南門) 왼쪽이 바로 강안(江岸)이니 성벽(城壁)이 강안(江岸)에 임(臨)한 곳에다가 파서 못을 만들고 숨은 수문(水門)을 하나 내어 강물을 끌어들이면 물은 도도(滔滔)히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밀양성(密陽城)의 새로운 축조(築造)에 구체적인 안(案)까지 하면서
形勢如此 而棄不設備 可勝惜哉(同上) 형세여차 이기불설비 가승석재(동상) 라고 하여
애석하기 그지없음을 말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그렁저렁 미루면서 아무런 실천도 하지 못했다
이와 같이 정부(政府)는 무성의했지만 반대로 우리 고장 주민의 건설적(建設的) 의욕(意慾)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1778년 읍내(邑內) 부노(父老)들이 조씨전(趙氏錢)을 기금(基金)으로 하여 성(城)을 수축(修築)하고 남문(南門)의 문루(門樓)를 3간(間)으로 확장하는 동시에 높이를 일층(一層) 더 높게 하여 면목을 일신하였다 공해문(控海門)이라는 편액(扁額)을 남문루(南門樓)에 단 것도 이때였다 조씨전(趙氏錢)이란 1759년에서 1761년까지 부사(府使)로 와있던 조재선(趙載選)이 자기의 월봉(月俸)을 아껴 모아 석빙고(石氷庫)를 조성할 몫으로 남겨 둔데다가 그 조카인 조모(趙某)가 성(城)을 수축(修築)할 비용으로 역시 일정한 돈을 희사(喜捨)한 것이 있었는데 서문(西門) 밖에 만든 석빙고(石氷庫)가 사의(士宜)에 맞지 않아 기능을 못하게 되고, 성전(城錢)은 이포(이포)를 조장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당시의 부사(府使) 윤광유(尹光裕)를 설득하여 성전(城錢)으로 인부(人夫)의 노임(勞賃)을 주고 석빙고의 돌을 날라 홍멱?문(虹覓?門)을 만든 것이다
우리 고장 주민(住民)의 건설적 의욕은 밀양성(密陽城)만이 아니었다 영남(嶺南)의 명물(名物)인 영남루(嶺南樓)가 또한 임진왜란에 불타버렸는데 역대(歷代) 부사(府使)들을 부추겨서 종래의 웅장(雄壯)한 모습을 되찾게 하고 찬란한 단청(丹靑)을 가하여 강산(江山)의 수려(秀麗)함과 상응(相應)하게 하였다
이러한 물질 문화뿐만 아니라 우리 고장의 정신적 전통으로서의 예의(禮義). 법도(法度). 미풍양속(美風良俗)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도 임진왜란(壬辰倭亂) 뒤에 진작 일어났다. 특히 향촌사회(鄕村社會)의 질서를 바로잡고 윤리기강(倫理紀綱)을 재정립하여는 노력이 지방 사림(士林)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중에서 향안(鄕案)과 향약(鄕約)은 주목할 일이다
향안(鄕案)은 향중(鄕中)에서 지벌(地閥)과 인망(人望)이 있는 인사(人士)를 록명(錄名)하는 책자이다. 밀양의 향안은 조선조초(朝鮮朝初)로부터 있어 왔다 송은(松隱) 박익(朴翊),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등으로부터 시작하여 월연(月淵) 이태(李迨)를 끝으로, 이 고장의 탁월(卓越)한 명현(名賢)들이 국초이래(國初以來) 24선생(先生) 이란 이름으로 구(舊) 향안에 실려 있는 것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壬辰倭亂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향중(鄕中)의 모든 문헌(文獻)이 회신(灰燼)으로 돌아가고 향안(鄕案)의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난이 끝나 피란길에서 돌아온 인사들은 무엇보다 향안을 중수(重修)할 것을 긴급한 일로 생각하였다 향안은 우리 고장의 선조(先祖) 선배(先輩)들의 체취(體臭)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계(家系)와 신분(身分)을 중시하는 사대부(士大夫)들의 긍지(矜持)이기도 했다 1624년 인조(仁祖) 2년 여름에 향안을 중수(重修)한 인사(人士)들은 다음과 같다
손기양(孫基陽). 전억기(全抑己). 이귀생(李貴生). 손제눌(孫諟訥). 김홍서(金弘緖). 안기(安玑). 류진량(柳震樑). 김익(金瀷) 박양춘(朴陽春). 장섬(蔣暹)
이상 여러분들이 모여 앉아 국초(國初) 이래 24선생(先生) 외에 1544년 중종(中宗) 39년(가정 嘉靖 갑진 甲辰) 이래(以來)의 향안(鄕案)들 ----- 찰방 察訪 하수천 河受千, 유학 幼學 박홍미 朴弘美, 송계 松溪 신계성 申季誠 등 170여명을 추록(追錄)하면서
吾鄕之有錄 古矣 而壬辰兵禍 一路魚肉 (中略) 오향지유록 고의 이임진병화 일로어육 (중략) 先輩遺躅 蕩然無復存 俛抑之間 誠使人悲之也 (中略) 선배유탁 탕연무복존 면억지간 성사인비지야 (중략) 中古以前 遠莫可徵 只得嘉靖甲辰入參之員 書其姓諱 注其來歷 (中略) 중고이전 원막가징 지득가정갑진입삼지원 서기성휘 주기래력 (중략) 耳聞所及 不能該盡 (中略) 이문소급 불능해진 (중략) 繼今以往 苟有能與我同志者 吾儕今日之擧 未必爲復古美規之頭緖云爾 (密陽鄕案) 계금이왕 구유능여아동지자 오제금일지거 미필위복고미규지두서운이 (밀양향안)
라고 하여, 란후(亂後) 생존자들의 이문소급(耳聞所及)을 바탕으로 다시 기록했다는 것과 미비한 것이지만 오늘 이후 우리 후인들이 계속해서 이 향안을 이어나간다면 오늘 우리들이 한 일이 복고(復古)의 미규(美規)를 남기는 단서(端緖가 될 것이란 것이다 이때 향안(鄕案)의 정규(定規)를 마련하여 기신참록자(起身參錄者, 처음으로 입록入錄하는 者)는 관직(官職). 성명(姓名). 생년(生年)과 아울러 본관모읍(本貫某邑. 부모[父某 관모(官某)도 아울러 적어야 함]을 기록하고 연대참록자[連帶參錄者, 부(父).조(祖)의 대(代)로부터 입록(入錄)한 자(者)]는 관직(官職). 성명(姓名). 생년(生年)에다가 모(某)의 자제(子弟)라고만 쓰게 하였다. 실(實)은 이보다 앞서 1601년 이미 병사(兵使) 김태허(金太虛), 훈정(訓正) 박몽룡(朴夢龍), 부사(府使) 손기양(孫起陽) 등 16명이 이미 록명(錄名)한 바가 있고 뒤를 이어 대대로 내려오면서 무릇 30여회에 걸쳐 신규(新規)로 참가 록명(錄名)하게 되었다 신규 참가자는 향회(鄕會)에서 추천자(推薦者)가 있고 여러 향원(鄕員)들의 가부(可否)를 물어 입록(入錄)하게 되는 데 어떤 때는 가(可)가 많아도 부(否)가 2만 나오면 탈락이 될 정도로 규정(規定)이 엄격했다 향안(鄕案)과 별도로 동안(洞案)이 있는데 이것 또한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에 자기의 동리(洞里) 중심으로 고사(故事)를 찾아 서로 록명(錄名)하는 것이다 폐허가 된 마을을 재건하는 과정에 있음직한 일이다 구령동안[龜齡洞案, 현(現) 초동면(初同面)의 대구령(大龜齡) 소구령(小龜齡) 일원(一圓)] 적항동안(赤項洞案, 현(現) 부북면(府北面) 청운리(靑雲里) 일원(一圓)] 등이 그것이다. 적항동안(赤項洞案)은 1609년 단1회 황근(黃謹).하곤(河鯤) 등 30여 명의 좌목(座目)만 남아 있지만 구령동안(龜齡洞案)은 란(亂) 이전의 선배(先輩)의 이름을 추록(追錄)하고 이후 계속하여 대대로 무릇 25회에 이르는 신규(新規) 입참자(入參者)의 록명(錄名)이 남아 있다 동헌(洞憲)이 따로 마련된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향약(향약)은 덕업상권(德業相勸)과 과실상규(過失相規)를 목적으로 15세기 이후 고을마다 있어오다시피 했지만 특히 밀양(密陽)의 향약(鄕約)은 유명하다 김종직(金宗直) 선생이 일찍부터 향사당(鄕射堂)을 중심으로 고을의 풍습(風習)을 순화(淳化)시키기 위한 운동을 벌여오면서 여러 가지 좋은 전통(傳統)을 형성시켰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향약(鄕約)이 시행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 복고(復古)와 재건(再建)이 활발한 가운데 향약이 또한 수거(修擧)되었다 여기 우선 1648년 인조(仁祖) 26년의 무자향약입의(戊子鄕約立義)와 1836년 헌종(憲宗) 2년 병신향약입의(丙申鄕約立義)의 구체적 기록으로 들어 본다. 두차례 다 도약정(都約正).부약정(副約正)과 함께 각면(各面)의 약정(約正)의 명단이 그대로 나온다
무자향약입의(戊子鄕約立義) (1648년) 각면(各面) 약정(約正) 부내면(府內面) 유학(幼學) 손창조(孫昌祖) 부북면(府北面) 유학(幼學) 박 돈(朴 墩) 상동면(上東面) 유학(幼學) 김사철(金士喆) 중동면(中東面) 유학(幼學) 손 작(孫 綽) 하동면(下東面) 유학(幼學) 손 현(孫 憲) 부남면(府南面) 유학(幼學) 조 성(曺 渻) 상서면(上西面) 유학(幼學) 박문영(朴文英) 하서면(下西面) 유학(幼學) 안광익(安光翼) 각남면(角南面) □□ □□□ 각북면(角北面) □□ □□□ 고며면(古㫆面) 유학(幼學) 박 유(朴 瑠)
병신향약입의(丙申鄕約立義) (1836년) 각면(各面) 약정(約正) 부내면(府內面) 유학(幼學) 손지수(孫之秀) 부북면(府北面) 유학(幼學) 하준도(河準圖) 상동면(上東面) 유학(幼學) 박주석(朴疇錫) 천화면(穿火面) 유학(幼學) 손종영(孫鍾永) 단장면(丹場面) 유학(幼學) 이정섭(李廷燮) 하동면(下東面) 유학(幼學) 이채준(李采峻) 상남면(上南面) 유학(幼學) 이유양(李儒亮) 하남면(下南面) 유학(幼學) 김지곤(金志坤) 상서면(上西面) 유학(幼學) 박세준(朴世載) 이동면(二同面) 유학(幼學) 신정수(申廷秀) 하서면(下西面) 유학(幼學) 이진견(李珍堅) 고며면(古㫆面) 유학(幼學) 안효식(安孝植) 밀양학약급향약(密陽學約及鄕約)
도약정(都約正)은 물론 각면(各面)의 약정(約正)도 모두 당시 면내(面內)의 대표적 인사(人士)들이며 밀양의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동향(同鄕)의 관념(觀念) 위에 향촌질서(鄕村秩序)의 확립에 노력했던 것이다 여기 주목할 만한 것은 두 차례 기록에서 면(面)의 수와 명칭이 조금씩 달라진 것이다 무자향약(戊子鄕約)에 각남(角南). 각북(角北) 양면(兩面) 약정(約正)의 이름도 없이 실려 있다가 병신향약(丙申鄕約)에서는 완전히 빠져버렸다 각남(角南).각북(角北)은 종래 속현(屬縣)이었던 풍각현(豊角縣)이 17세기 전반(前半)에 각남(角南). 각북(角北)으로 분화(分化)하여 밀양(密陽)의 직속(直屬) 2면(面)이 되어 있었는데 얼마 안가서 그것이 밀양(密陽)으로부터 대구(大邱)에 이속(移屬)되었기 때문이다 또 고며면(古㫆面)은 청도땅(淸道)에 있는 것으로 조선조(朝鮮祖) 초(初)로부터 나타나는 밀양(密陽)의 비입지(飛入地)이다 청도(淸道)땅 서쪽에 이시례리(伊士禮里). 사물니리(四勿泥里).지촌리(知村里) 등 몇 개의 고도(孤島)처럼 밀양땅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고며면(古㫆面)은 밀양경내(密陽境內)의 면(面)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뒤에 상북면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부북면과 구별하면서 더욱 유대를 강화하였다 1883년 고종(高宗) 20년에 밀양(密陽)에 온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민폐(民弊)를 줄이기 위해서 모록(冒錄)된 전결(田結) 및 각종 조사에서 얻어진 돈 3,600량(兩)을 밀양(密陽) 12면(面)에 300량(兩)씩 나누어 주고 그것으로 각면별(各面別) 보민계(補民契)를 조직시켜 그 기금으로 운영케 했는데 여기에 물론 상북면(上北面)이 다른 면(面)들과 같이 300량(兩)의 배당을 받았다 여기 다시 각면(各面)의 임원명단(任員名單)을 옮겨둔다
밀양보민계(密陽補民契) 각면(各面) 계원질(契員秩) (1883년)
부내면(府內面) 계장(契長) 이종호(李鍾昊) 장전유사(掌錢有司) 손장현(孫章鉉) 장부유사(掌簿有司) 안우진(安禹鎭) 집주(執籌) 이종섭(李宗燮) 의원(議員) 2인 손진장(孫振璋). 이상영(李尙瑛) 소임(所任) 2인 본면풍헌급동두민겸(本面風憲及洞頭民兼)
부북면(府北面) 계장(契長) 안구(安龜) 장전유사(掌錢有司) 장한룡(蔣漢龍) 장부유사(掌簿有司) 황수(黃穗) 집주(執籌) 이장헌(李璋憲) 의원(議員) 2인 박래영(朴來永). 손종탁(孫宗卓) 소임(所任) 2인 上同
천화면(穿火面) 계장(契長) 손헌교(孫憲敎) 장전유사(掌錢有司) 손석헌(孫晳憲) 장부유사(掌簿有司) 이장명(李章明) 집주(執籌) 안성진(安聖鎭) 의원(議員) 2인 손덕윤(孫德潤). 이사근(李士根) 소임(所任) 2인 上同
단장면(穿火面) 계장(契長) 안중원(安中遠) 장전유사(掌錢有司) 손개원(孫介遠) 장부유사(掌簿有司) 손세헌(孫世憲) 집주(執籌) 손치선(孫致善) 의원(議員) 2인 박인정(朴寅正). 이성칠(李成七) 소임(所任) 2인 上同
하동면(穿火面) 계장(契長) 장수곤(蔣秀坤) 장전유사(掌錢有司) 이승도(李承道) 장부유사(掌簿有司) 곽규영(郭奎榮) 집주(執籌) 배문하(裵文厦) 의원(議員) 2인 장지곤(蔣之坤). 박수겸(朴秀謙) 소임(所任) 2인 上同
상남면(穿火面) 계장(契長) 민영순(閔泳純) 장전유사(掌錢有司) 신만균(申晩均) 장부유사(掌簿有司) 이배영(李培榮) 집주(執籌) 조석노(曺錫魯) 의원(議員) 2인 안명원(安明遠). 박영줄(朴永茁) 소임(所任) 2인 上同
하남면(穿火面) 계장(契長) 김용수(金鏞壽) 장전유사(掌錢有司)서필리(徐必履) 장부유사(掌簿有司) 민영필(閔泳弼) 집주(執籌) 김석규(金碩圭) 의원(議員) 2인 박덕현(朴德鉉). 이경장(李慶章) 소임(所任) 2인 上同
상서.초동면(穿火面) 계장(契長) 박윤경(朴潤慶) 장전유사(掌錢有司) 안언장(安彦章) 장부유사(掌簿有司) 박상빈(朴祥賓) 의원(議員) 2인 안언삼(安彦三). 박근욱(朴瑾郁) 소임(所任) 2인 上同
상서.이동면(穿火面) 계장(契長) 조희각(曺希珏) 장전유사(掌錢有司) 신종수(申宗壽) 장부유사(掌簿有司) 조희율(曺希律) 집주(執籌) 박수병(朴秀秉) 의원(議員) 2인 신우홍(申宇洪). 이기진(李璣鎭) 소임(所任) 2인 上同
하서면(穿火面) 계장(契長) 이회윤(李澮潤) 장전유사(掌錢有司) 박상기(朴祥紀) 장부유사(掌簿有司) 박상윤(朴祥允) 집주(執籌) 권의석(權宜錫) 의원(議員) 2인 류승림(柳承林). 이돈일(李敦一) 소임(所任) 2인 上同
상북면(穿火面) 계장(契長) 박용석(朴龍錫) 장전유사(掌錢有司) 안황원(安璜遠) 장부유사(掌簿有司) 양화중(梁華重) 집주(執籌) 김중현(金重賢) 의원(議員) 2인 박군범(朴君範). 양상칠(梁尙七) 소임(所任) 2인 上同 (密陽補民契節目, 奎章閣所藏)
다소 번거롭게 되었지만 조선조(朝鮮祖) 말엽(末葉)의 밀양(密陽)의 행정구역(行政區域)의 명칭(名稱)과 그 변화(變化)를 일별(一瞥)할 수 있게 되었다 고며면(古㫆面) --상북면(上北面)은 근대적(近代的) 지방제도의 개편(改編)이 실시되는 가운데 1906년 광무(光武) 10년에 소재지인 청도군(淸道郡)에 흡수(吸收)되고 말았다
[부기(附記)] 밀양(密陽)의 역사(歷史)의 전개(展開)는 조선말기(朝鮮末期)로 일단 끝내려 한다 근대 이후의 여러 가지 동향(動向)은 행정(行政). 경제(經濟). 종교(宗敎). 문화(文化) 등 제편(諸篇)의 기록 속에 대체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일(抗日) 독립(獨立) 투쟁(鬪爭) 관계도 인물편(人物篇)에서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게 되어 있으므로 역시 할애(割愛)하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