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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천요
용천시는 절강성의 서남부에 위치하며 복건성 및 강서성과 인접해있다. 용천계龍泉溪는 구강甌江의 상류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수운이 매우 편리하며 배를 이용하여 곧바로 온주항溫州港에 닿을 수가 있다.
용천청자는 용천이 송대에 처주부處州府에 속하였으므로 문헌에서 ‘처기處器’라고도 하였으며 남방청자계열에 속한다. 3-4세기 무렵, 절강성 동부의 영파寧波와 소흥 지구에 소흥과 상우上虞를 중심으로 초기 월요청자계가 형성되었으며, 오대와 북송초기에 여요余姚를 중심으로 다시 비색자를 제작하는 월요청자계가 형성되었다.
월요 이외에 이 시기에 청자를 제작한 요지로는 무주요婺州窯(절강성 중부의 금화金華 지구에 위치)와 구요甌窯(절강성 온주溫州일대에 위치하며 주로 청자를 제작)가 있었다. 오대와 북송시기 용천요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유사한 기물을 제작하였다. 남송이후 용천요는 남송 궁정과 관가의 수요에 맞추어 석회감유石灰鹻釉(장석으로 일부 석회석을 대체하여 산화칼슘의 함량이 8%이하이며, 고온에서 점도가 커서 쉽게 흘러내리지 않아 유층이 비교적 두터워지고 유면의 광택이 부드러우며 눈을 찌르는 감각이 없는, 남송과 원명시기 용천청자의 유약)를 이용하여 관요와 유사한 기물을 생산하였으며, 남송중기이후에 마침내 용천요 특유의 매자청과 분청을 탄생시켰다. 남송말기, 용천요는 크게 발전하여 방대한 용천요계를 형성하였다.
절강성 문물관리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용천 경내에서 발견된 청자요지는 대요大窯, 금촌金村, 계구溪口, 오동구梧桐口, 소백안小白岸, 도태道泰, 산두요山頭窯, 송계松溪, 안복구安福口, 안인구安仁口, 필가산筆架山, 항호項戶, 안복安福, 완권산碗圈山, 마요馬坳, 대방大方, 잠각岑脚, 주장周墻, 대기大棋, 하촌下村, 황금갱黃金坑, 무계武溪 등의 23곳이고, 대요와 금촌 지역에 요지가 가장 많으며 품질도 가장 우수하였다. 발굴결과 명대에 여전히 160여 곳의 요지가 있었으며, 청대에서 여전히 70여 곳의 요지가 있었다.
<용천청자의 발전과정>
1. 용천요의 최초 제작시기
최근 연구의 심화로 용천요의 창조연대에 관한 논쟁이 활발해졌다. 삼국시기에 시작되었다는 설은 송양松陽과 여수麗水 등지의 요지에서 발견된 도자기를 근거로 들지만, 수량이 매우 적고 품질이 열악하며, 오대와 북송시기 용천자기와 공예 및 문화적인 특징 등과 어떠한 전승관계가 없으므로 용천요에 포함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계속 견지하고 있다. 또 한동안 학계에서 대부분 용천요가 북송초기에 시작되었다고 인정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민국시기 진만리陳萬里가 여러 차례 용천지역의 요지를 조사한 뒤에 얻은 결론이다. 요지를 조사하여 조형, 태토, 유약, 장식, 소성기법 등의 연구결과를 시대판단의 근거로 삼았다. 이러한 연구방법은 중국 고대자기의 연구의 선구가 되었지만, 그 당시의 사회상황, 발굴자료, 과학기술, 자금 등의 제한으로 연구가 종합적이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일부 오류가 있었다.
중공수립이후 이러한 관점이 지속되다가 최근에는 용천요가 오대말기에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비교적 과학적으로 인정된다. 송宋 장작莊綽의 <계륵편鷄肋編>에 “처주 용천현에서......또 청자가 산출되며 비색이라 한다. 전씨가 바치던 것은 대개 여기서 가져온 것이다(處州龍泉縣……又出靑瓷器,謂之秘色. 錢氏所貢, 蓋取於此)”라 기록되어 있다. 전씨는 바로 오대시기 강남일대에 존재했던 오월국吳越國(907-978)의 전씨 왕조를 가리킨다. 일부에서 장작이 북송초기의 월요자기를 용천요로 오인하였다고 주장하며, 용천요의 오대설을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에 용천과 가까운 경원慶元 한편의 조령曹領 및 경원과 가까운 송계松溪일대의 오대시기 몇몇무덤에서 용천자기가 출토되었는데, 북송시기의 용천자기와 유사하였다.
2. 용천요의 발전과정
용천청자는 중국 도자사에서 제작기간이 가장 길고 영향력이 가장 광대한 요계窯係로 요지는 지금의 절강성 서남부의 산간지역이다. 용천 지경의 도자업은 삼국시기에 시작되어 북송시기에 흥성하였으며 남송에서 원대에 절정에 달하였다가 명대 중만기이후에 쇠퇴하기 시작하여 청대초기에 폐쇄되었으며, 1600여년의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제품은 주로 유색의 아름다움이 특징이다. 왕왕 여러 차례 시유하여 유층이 비교적 두텁고 유리광택과 유리질감이 매우 강하다. 용천요의 백태청자는 태질이 세밀하고 치밀하며 청색이 은은한 백색이다. 유층은 부드럽고 빙렬이 없으며 굽의 노태처에 자홍색이 나타난 주사저라 속칭한다. 분청과 매자청은 유질이 영롱한 청옥과 같고 색조는 비취처럼 아름다워 고대에 가장 아름다운 청색유자기이다. 섭영정葉英挺(처주시청자박물관장處州市靑瓷博物館館長)은 용천청자의 발전과정을 오대-북송초기, 북송후기-남송, 원명청의 3단계로 구분하였다.
중공 수립이후, 1957년 7월 주은래총리가 중국 오대명요의 부활을 제창하여 우선 용천요와 하남의 여요를 부활시키는 시도가 진행되었다. 1958년 용천자창에서 용천요의 복제를 시작한 이후로 수많은 기관과 전문가들이 참여하였다. 1959년 절강성용천청자회복위원회가 성립되고 전문 연구와 제작 소조가 조직되어 발굴과 연구를 하였으며 태토와 유약을 검사하여 225개의 배합방법으로 시험하여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1960년 중공 수립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용천자창龍泉瓷廠에서 북경 인민대회당의 연회용자기의 생산임무를 부여받아, 반년의 시간을 들여 마침내 300여 년간 실전되었던 용천청자를 부활시켰다.
1980년에 들어와 더욱 발전하여 각 박물관과 정부 기관에 현대 청자제품이 소장되게 되었다. 1980년대부터 일부 용천의 대형 도자공장에서 방고 공예품을 대량으로 제작하여 판매하였다. 1985년 용천자창을 개혁하여 독립적인 경영체제로 전환되었으며, 개혁개방의 심화와 더불어 국유 도자기업의 폐단이 심화되었다. 1990년대부터 용천청자업은 국영, 집체, 사영기업이 병존하는 국면이 조성되어 일부 국영기업은 도산되고 용천진과 팔도진八都鎭일대에 개인업자들이 생겨났다.
현대의 용천요는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새롭게 자동색유紫銅色釉, 고온흑유高温黑釉, 호반색유虎斑色釉, 다엽말유茶叶末釉, 오금유烏金釉, 천청유天靑釉 등을 창조하였다. 다양한 장식기법을 사용하여 현대 용천청자는 청화영롱자의 특징을 흡수하고 각화투조刻花透彫와 부조기법을 이용하여 영롱공작등玲瓏孔雀燈, 쌍룡희주병雙龍戱珠甁, 영롱찬구玲瓏餐具 등의 청자영롱 제품을 제작하였다. 전통 가요를 계승한 기초위에서 빙렬의 발생규칙을 파악하여 유면에 용, 봉, 게, 새우 등의 빙렬을 만들어내었다(象形氷裂). 시유하기 전에 기물의 배체 위에 홍, 황, 남색 등의 각종 색채의 도형으로 장식하여 독특한 풍격의 청자유하채자기를 만들었다. 흑태와 백태의 색차色差를 이용하거나 교태絞胎를 나선상의 도형으로 만들어 완과 반류의 기물에 현대적인 감각을 융합시켰다(哥弟窯結合). 또한 흑태로 기형의 바탕을 만들고 백태로 동식물의 형상으로 장식하여 몽롱한 효과의 흑백태가 결합된 문양을 만들어 기물의 가치를 높였다(靑白結合). 이밖에 청자개광靑瓷開光, 청자누공靑瓷鏤空, 청자점채靑瓷點彩, 청자박태靑瓷薄胎 등과 같이 새로운 풍격을 창조하였다.
<‘Celadon’이라는 단어의 유래>
유럽인은 청자를 ‘셀라돈Celadon’이라 한다. 이 단어는 16세기 말기 프랑스의 작가 뒤르페(Honoré d'Urfé 1567∼1625)가 쓴 전원소설 <아스트레(L'Astrée)>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이 소설은 후에 희곡으로 각색되어 무대에서 상연되었으며, 남자주인공 셀라돈은 아름다운 청색의 의복을 입고 공연을 하였는데, 그가 출현하면 관중들이 열광하였다. 마침 이 시기에 중국의 용천청자가 프랑스로 수입되어 사람들을 매혹시켰으며, 파리인들은 이 청자의 빛깔을 형용하기 위하여 청자를 셀라돈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이후 청자를 정식으로 셀라돈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용천청자는 명대중기에 유럽으로 전해져 가격이 황금처럼 높았으며, 일반인은 구경도 어려웠다. 작센(Sachsen)의 아우구스트2세(1670-1733)는 용천청자를 구입하여 특별히 이를 소장하기 위한 궁전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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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 : 8.5cm
높이 : 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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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의 관지(款識)에는 년호관(年號款), 간지기년관(干支紀年款),
당명관(堂名款), 인명관(人名款), 길언관(吉言款), 찬송관(贊頌款)이 있습니다.
이 도자기향로 밑부부의 약심진장(若深珍藏)은 찬송관입니다.
"약심진장"의 관지는 청(淸)나라 때 강희(康熙)와 광서(光緖) 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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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 : 12cm
높이 : 8.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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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 : 14.5cm
높이 : 1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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