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유산 인생 투어(3, 성북동)
◇ 최순우(崔淳雨) 옛집 : 성북구 성북로 15길 9(국가 등록문화재 제268호)
기념관이 된 전 국립박물관장 최순우 옛집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 선생(1916∼1984) 옛집'은 대지 120평에 안채와 사랑채 등을 갖춘 1930년대 한옥으로, 건물 형태와 현판, 정원 등이 조선 말기 선비의 멋과 운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집은 1976년에 최순우 선생이 사들이어 작고할 때까지 살았는데 그가 타계한 후에는 외동딸이 거주해 왔다. 최근 이곳에 다세대 주택 건립이 추진되면서 헐릴 위기에 처하게 되자 2002년 12월, 문화유산 보전 운동 시민단체인 ‘한국내셔널 트러스트’가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건물을 매입함으로써 최순우 선생 옛집은 ‘시민 문화재 1호’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 집은 혜곡 최순우 기념관으로 시민들을 위한 전시,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곳에 들어서면 마치 고요한 산사(山寺)에 들어선 기분이 든다. 이 집은 그의 대표적 저서인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했던 곳으로 지금까지 그 모습 그대로 옛집의 은은함을 유지하고 있다.
이 집은 오색단청과 화려한 익공(翼拱)을 뽐내지는 않지만 수수한 조선 산수화를 보듯 옛집의 여유로움이 깊이 배어있다. 안채에 조심스레 발을 디뎌 보면 당시 살았던 선생의 마음을 조금은 엿볼 수 있다. 고개 흘끗 들어 창문을 바라보면 고운 가을 햇살을 한 바구니 담아서 뿌려 주고 있는 예쁜 미닫이창이 있고, 수묵화의 여백 미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작은 옛 장롱 하나에 온 마음을 담아 둘 수 있는 작은 마루가 기다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곳을 넓게 살펴보면 ‘ㄱ’ 자형 안채와 ‘ㄴ’자형 바깥채로 건물이 앉혀진 이른바 튼 ‘ㅁ’ 자 형으로 집 안쪽의 중심부에 작은 뜰이 있고, 안채 바깥쪽으로 작은 장독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금 넓은 뒤뜰이 자리 잡고 있다.
뒤뜰에는 작은 석조물들이 바닥의 얇은 돌들을 따라 조심스레 펼쳐져 있다. 1년여의 보수공사로 새 단장을 한 이 집은 낡은 문을 떼어낸 자리에 새 문이 달리고, 기형적이었던 처마도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마당을 뒤덮었던 보도블록 대신 돌과 흙을 깔아 조선 말기 선비 집의 운치를 고스란히 되살렸다.
집은 사람을 닮는다고 했던가? 최순우 옛집에는 말 그대로 아름다움이 서려 있다. 달빛이 소리 없이 스며들었을 미닫이창, 추녀 끝에 매달린 소방울, 바람 소리 그윽이 머금었을 산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딴 세상에 온 것처럼 마음이 고즈넉해진다.
안채에는 최순우 선생의 자필 원고와 안경, 라디오, 파이프 등의 유품이 상설 전시되어 조금이나마 그의 흔적을 느낄 수 있고, 지인들이 기증한 석상과 고가구 또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 기금 마련을 위해 윤광조, 김익영 씨 등 도예가들이 내놓은 백자(白瓷)들도 감상할 수 있다.
◇ 길상사(吉祥寺) : 성북구 성북2동 323번지(서울미래유산)
- 김영한 여사가 고급 요정인 대원각을 조계종에 기증하여 길상사로 바꾼 사찰
성북동길 끝자락의 명당 터에 있는 길상사는 특별한 사연이 있는 절이다. 길상사의 건물들은 원래 1960년대~1980년대 말까지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최고급 요정 중의 하나였던 대원각의 건물들이다.
1987년에 대원각의 주인인 김영한[법명 : 길상화(吉祥花)] 여사가 승려이자 수필작가인 법정(法頂 : 1932년~2010년) 스님에게 요정 건물의 기증 의사를 밝혔다. 이로부터 10년 후인 1997년에 대원각의 7,000여 평의 대지와 40여 동의 건물 등 약 1,000억 원대의 부동산 일체가 조계종으로 등기 이전되면서 길상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 사찰에는 김영한 여사의 유해가 화장장으로 장례를 한 유해가 뿌려져 있다. 현재 이 사찰은 송광사의 서울 분원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으며, 법정 스님이 회주(會主)였다.
1997년에 법정 스님은 길상사 개원 법회를 봉행하였고, 1998년 1월 1일에 길상사 시민선방 '길상선원'을 개원하였으며, 그해 5월에 설법전에 '열린 시민선방'을 개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극락전, 범종각, 일주문, 적묵당, 지장전, 설법전, 종무소, 관세음보살석상, 길상화 불자 공덕비 등이 배치되어 있다. 사찰의 대웅전격인 극락전에는 아미타부처를 봉안하고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시민운동으로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 도량[道場]으로 해마다 5월이면 봉축 법회와 함께 장애인, 결식아동, 해외아동, 탈북자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개최한다..
길상사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국의 사찰을 돌아볼 수 있는 공간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불도 체험, 수련회 등의 프로그램과 고사리손의 미술대회 및 대중가수의 콘서트까지 개최하는 등 도심 속 문화공간의 역할도 하고 있다.
또,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 도량으로서 건강한 사회를 위한 사회참여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 성북구 성북동 97번지 1호(서울 보화각 : 국가 등록문화재)
- 일본인들로부터 문화재를 지킨 간송 전형필 선생이 세운 사립 미술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은 대지 4,000여 평으로 마치 깊은 산 속과 같이 수목이 울창하고 조용한 데다가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석탑과 불상이 곳곳에 세워져 있어 마치 속세를 떠나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간송미술관은 1938년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미술관으로 개관한 이래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립미술관 중의 한 곳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간송 컬렉션은 석조, 금속, 도예, 회화, 고서 등 6세기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친 한국의 고미술품과 서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간송미술관은 문화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지킨다는 '문화보국'의 건립이념으로도 유명하다.
이 미술관의 명칭인 간송(澗松)은 고 전형필(全鎣弼) 선생의 아호를 딴 것이다. 북단장(北壇莊)이라고도 불렀던 이 일대는 일본 강점기에 간송 전형필 선생이 토지를 사들이어 일부는 성북초등학교를 세우도록 나눠 주고, 그 일부에 1938년 미술관을 지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일본 강점기에 일본인들에게 우리 문화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가 소유하였던 동대문 밖의 많은 농토를 처분하면서 귀중한 문화재를 계속 수집하였다.
간송미술관의 대표 소장품에는 국보 12점, 보물 10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 등 수많은 중요 문화재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중에는 한글의 창제 원리가 학술적으로 규명되어 한글의 과학성과 독창성을 입증하여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과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 혜원 신윤복의 혜원전신첩(국보 제135호),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보물 제1949호) 등 우리나라 문화사, 미술사를 대표하는 기준작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간송미술관 내 보화각(葆華閣)에는 간송 전형필 선생이 평생 수집한 국보 및 보물급 등의 수많은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이 미술관은 한국민족미술연구소로서 발족한 이후인 1971년 10월부터 매년 5월과 10월에 소장 문화재 일부를 전시하여 2014년까지 일반에 공개하였다.
현재는 동대문 DDP에서 간송문화전 시리즈로 전시를 진행하고 있고, 간송미술관은 보수공사로 인해 휴관 중이다.
◇ 수연산방[壽硯山房 - 상허 이태준 고택(尙虛 李泰俊古宅)] : 성북구 성북동 248번지 (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
- 《왕자 호동》을 집필한 월북작가 이태준 문학의 산실(産室)
상허 이태준 고택은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월북작가 이태준이 1933년에 지어 '수연산방'이란 당호를 짓고, 1933년부터 1946년까지 거주하면서 상허 이태준이 14년간 살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집필하던 집이다.
이태준은 이 집에서 단편으로 《달밤》․《돌다리》, 중편으로 《코스모스 피는 정원》, 장편으로 《황진이》․《왕자 호동》등을 집필하였다.
이태준은 1904년에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15세에 서울에 올라와 휘문고등 보통학교를 고학으로 졸업하였다. 이어서 일본 동경의 상지대학을 중퇴한 뒤 귀국하여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일하였다. 1935년에 신문사를 그만두고 문학작품 집필에 전념하다가, 1946년 북한으로 들어간 후 활동하다가 숙청당하였다.
이 집은 앞에 내(川)를 두고 뒤로 동산을 둔 터에 서남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냇가에 놓인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 막돌로 쌓은 화장담에 세운 일각대문으로 출입한다. 집터 안에는 북동쪽에 몸채 하나만 배치되고, 행랑채 등의 별채는 없다.
1900년대에 지어진 건평 23.2평의 이 건물은 서남향한 ‘공자’(工字) 형의 집으로 평면의 간살이는 보통 ‘ㄱ자’형 집과 비슷한데 다만 부엌이 뒤쪽으로 붙어 있어 앞쪽에 누마루를 설치한 것이 다르다. 즉 중앙 2칸을 대청으로 하고 대청의 남쪽에는 한 칸 크기의 안방을 만들고, 안방 앞에는 작은 한 칸 크기의 누마루가 놓였으며, 뒤에는 반 칸 크기의 부엌이 있다.
대청의 북쪽에는 한 칸 크기의 건넌방이 배치되고 대청과 건넌방 앞에는 툇마루가 길게 놓였으며, 건넌방 뒤에는 한 칸 크기의 뒷방이 있다. 정면 4칸, 측면 4칸의 이 집은 별장형 주택의 작은 집이면서도 모든 것이 알차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한옥은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되는데 규모는 작지만, 사랑채와 안채를 집약시킨 집으로 1900년대의 개량 한옥이 갖는 요소들을 잘 지니고 있다.
특히 감나무·사철나무를 주류로 한 이 집의 정원은 일반 민가의 정원 멋을 듬뿍 느끼게 한다. 뒤쪽을 약간 덧달아서 개축한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1999년에 생외손녀(甥外孫女) 조상명이 1933년 이태준이 지은 당호인 ‘수연산방’을 내걸고 찻집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