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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6/08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가봉공화국 봉고 대통령 방한, 1975년 - 전두환 대통령 가봉 방문, 1982년
2009 - 가봉 대통령 오마르 봉고(Omar Bongo) 사망
오마르 봉고 [Omar Bongo ondimba, El Hadj, 1935.12.30~2009.6.8]
가봉 대통령 사망 공식 확인- BBC
오마르 봉고 가봉 대통령이 8일(현지시간) 스페인 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공식 확인됐다고 BBC가 보도했다.
장 에예게 은동 가봉 총리는 이날 봉고 대통령이 사망한 곳으로 알려진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퀴론병원에서 "봉고 대통령이 마침내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앞서 가봉 정부는 프랑스와 스페인 언론이 전날 봉고 대통령이 사망했다고 보도하자 이를 공식 부인한 바 있다.
봉고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병원 입원 사실이 언론에 공개됐지만 정부는 단순한 건강 검진을 위한 것이었다며 건강 이상설을 부인해 왔다.
봉고 대통령은 1967년 이후 41년간 최장기간 가봉을 통치해 왔으며 1975년, 1984년, 1999년, 2007년 등 4차례에 걸쳐 방한한 적 있는 한국와 인연이 깊은 대통령이기도 하다.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09060901093689671&nvr=y
2003 - 고대 이집트 '美의 화신' 네페르티티 왕비 미라 발견
[이집트 ‘美의 화신’] 네페르티티 왕비 미라 발견
고대 이집트 제18왕조의 왕 아크나톤(재위 BC 1379~1362)의 왕비 네페르티티의 미라가 영국 연구팀에 의해 확인됐다고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가 8일 보도했다.
영국 요크대 고고학 연구팀은 ‘왕가의 계곡’의 무덤지대에서 1898년 프랑스팀이 발굴한 3구의 미라 중 하나가 네페르티티의 미라임을 확신하고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연구팀은 이 미라의 가발조각과 귀의 구멍 등을 단서로 12년간 연구한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연구팀은 또 이 미라에서 파라오나 왕비에게만 볼 수 있는 부러진 팔을 발견했다.
연구팀의 조안 플레처(Fletcher) 교수는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던 18왕조의 왕족 여성의 미라”라며 “네페르티티임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이 미라는 발굴 당시 심하게 훼손된 상태여서 ‘젊은 여인’이라 불리며 별 관심을 끌지 못했고, 1907년 이집트 박물관의 한 방에 방치되기 전 딱 한번 사진으로 촬영된 바 있다.
플레처 교수는 이 미라의 사진이 독일 베를린의 달렘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네페르티티의 흉상(사진)과 닮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연구를 시작했다. 아크나톤 통치시 수도였던 아마르나에서 1914년 발견된 네페르티티의 석회석 채색 흉상은 긴 목과 올라붙은 광대뼈, 가냘픈 코를 가진 미인의 모습을 실증하고 있다.
‘미인이 왔다’는 뜻의 네페르티티 왕비는 이집트 귀족 출신으로 다신교를 버리고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숭배한 파라오 아크나톤의 부인이 됐다. 당시 아톤의 제례를 주관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연극 기자 yk -kim@chosun.com /조선닷컴 2003.06.09 19:25
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60970343
- 속리산 법주사와 팔상전
2000 - 불교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탄성스님 입적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진공당 탄성(眞空堂 呑性) 대선사가 8일 오후 5시 주석처인 충북괴산 공림사 감인선원 선심당에서 입적했다. 세수 71세, 법납 47세.
탄성스님의 영결다비식은 12일 오전 11시 법주사에서 원로회의장으로 봉행됐다.
탄성스님은 종단이 어려울 때마다 수습의 책임을 맡았으며, 소임을 마친 후에는 곧장 수행처인 공림사로 돌아가 수행과 후학지도에 전념하는 참수행자상을 보여줘 종도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다.
80년 10.27 법난 후에는 수습대책위원장, 94년 조계종 개혁회의 총무원장, 98년 조계종사태 때는 당시 총무원측과 정화개혁회의측의 중재에 나섰으며, 중재가 결렬되자 승려대회장을 맡아 현 종단 출범에 기여했다. 97년 원로의원으로 추대됐으며, 지난해 4월부터는 원로회의 의장직을 맡아왔다.
탄성스님은 1930년 충남 보은에서 태어나 44년 금오스님을 은사로 득도해 이듬해 3월에 사미계를 받았다. 55년 고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고 61년 수덕사에서 하안거 이후 17안거를 성만했다. 평소 “법문을 듣고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불교와의 인연이 될지언정 도를 깨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실천과 참선수행을 강조했다.
정성운 기자 /현대불교 /불기 2544년 6월 14일 274호
http://www.buddhapia.com/mem/hyundae/auto/newspaper/274/f-4.htm
1998 - 독일의 수학자, 고고학자 마리아 라이헤(Reiche, Maria) 사망
라이헤 [Reiche, Maria, 1903.5.15~1998.6.8]
Maria Reiche, German-born Peruvian mathematician and archaeologist (b. May 15, 1903, Dresden, Ger.--d. June 8, 1998, Lima, Peru), was the self-appointed keeper of the Nazca Lines, a series of Peruvian ground drawings more than 1,000 years old. For five decades the "Lady of the Lines," as she was known, studied and protected the 60 km (35 mi) of desert near Nazca in southern Peru that served as the blackboard for etchings of animals and geometric patterns. Scratched into the ground and preserved by a lack of wind and rain, the figures are hundreds of feet in length and only fully recognizable ... (100 of 233 words)
http://www.britannica.com/EBchecked/topic/496356/Maria-Reiche
마리아 라이헤를 추모함
마리아 라이헤
1903년 독일 출생
1998년 95세의 나이로 사망
세줄의 짧은 약력으로 그녀의 삶을 요약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제 저녁 처음으로 나는 그녀에 대해 알게 되었다. 무심코 서점에서 사 든 한 권의 책을 통해 그녀의 삶을 알게 되었고, 참으로 오랫만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리아 라이헤는 95년 이라는 긴 삶 중 3분의 2 이상을 페루에 있는 나스카 대평원을 지키고 연구하는데 바쳤으며, 바로 그곳에서 삶을 마쳤다. 그녀는 1930년대 말부터 나스카 대평원의 연구에 몰두했으며, 그것이 그녀의 평생의 업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그녀는 나스카에서 26년간 거의 극빈층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도, 나스카 대평원의 그 거대한 문양과 상징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측량하고 도면에 옮기며 그러한 문양과 상징의 연구 작업을 했으며, 나스카 대평원의 아름다움과 소중함, 그리고 그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에 감동한 페루 정부는 1979년부터 나스카에 있는 국립 호텔을 평생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을 그녀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그녀는 수많은 훈장과 포상을 페루정부로부터 받게 된다.
내게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그녀가 1955년 페루 정부의 나스카 대평원 관개계획을 무산시킨 이야기였다. 당시 페루 정부는 안데스 산맥 동쪽의 아마존 강의 물을 끌어와 나스카 대평원에 관개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 계획을 실행 직전에 무산시켰다. 만약, 그 당시에 그러한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인류의 가장 소중한 문화유산 중의 하나인 나스카 대평원은 저 역사 속으로 수장되고 말았을 것이다. 한 인간의 노력과 열정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가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마리아 라이헤가 확실히 나스카 대평원에 미쳤다고 볼 수 있는 이야기가 또 있다. 그녀는 나스카 대평원의 그 수많은 문양과 상징을 가장 잘 촬영하기 위해, 헬기 아랫 부분의 착륙대에 널판지를 놓고서 그 곳에 올라서서 몸을 헬기에 묶은 채 수직 방향으로 나스카 대평원을 촬영했다고 한다. 그러한 그녀를 찍은 사진을 보면서 참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즉, 그녀의 몸이 완전히 헬기 밖에 있었던 셈인데, 그 당시의 나이가 이미 50이 넘었을 때였다고 한다. 사실 사진측량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연직방향에서 찍은 사진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잘 안다. 그녀는 정밀기기가 제공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러한 연직사진을 찍기 위해 그러한 모험을 했던 것이다.
현재 페루의 나스카 대평원은 차량은 물론 사람의 출입조차도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지난 98년엔가 한국의 한 광고회사가 그곳에서 광고를 촬영하며 나스카 대평원을 손상시킨 일이 있었다. 나도 그 기사를 신문을 통해 읽은 기억이 난다. 그 당시가 라이헤여사가 살아 있을 당시였다면, 그녀의 반응은 어떠했을까하는 두려움이 몰려온다. 나스카 대평원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연구자들은 예민한 곳을 지날 때는 널빤지를 깔고서 움직일 정도라는데 말이다.
오랫만에 참 감동적으로 책을 읽었고, 그래서인지 창 밖의 푸른 하늘만큼이나 기분이 좋은 하루다.
2001년 7월 16일
하늘맑은 세상 2007/10/09 02:36
http://endofcap.tistory.com/17
1997 - 10th Conference of the Parties to CITES
UN, Zimbabwe, Harare, 8-20 Jun 1997
http://www.unpi.com/projects_un_conference_stamp_listing_1999.asp
1992 - 정주영, 공산당 발언 정가 파문
국민당의 정주영대표가 한 토론회에서 공산당 결성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힌 것과 관련해 정치권에 파문이 일었다. 민자당은 정대표의 발언 내용을 전해 듣고 공산당의 결성을 막을 필요가 없다는 말로 해석, 분별없는 언동이라고 공박했고, 민주당도 적절하지 않은 발언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정대표와 국민당측은 발언 내용이 잘못 전달됐다며 타당이 이를 문제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고 나왔다. 정 대표는 이날 오전 서울롯데호텔에서 개최된 시사저널지와 가진 토론회에서 토론참가자들이 「공산당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묻자 “누구를 해치지 않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백완종 동아닷컴 기자 100pd@donga.com /동아닷컴TV 2010-06-08 19:04:34
http://etv.donga.com/view.php?code=&idxno=201006080033597&category=002013&page=1
1990 - 제14회 월드컵 이탈리아서 개막
1990년 FIFA 월드컵(FIFA World Cup Italy '90)은 제 2회 대회였던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에 56년 만에 다시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제14회 FIFA 월드컵 대회이며, 1990년 6월 8일부터 7월 8일까지 열렸다. 밀라노 등 12개 도시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북중미의 코스타리카, 아시아의 아랍에미리트, 유럽의 아일랜드가 처음 출전했다.
예선 /위키백과
- Frederik Willem de Klerk - Nelson Mandela
1990 - 남아프리카공화국 비상사태 해제
4년 동안 실시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비상사태가 1990년 오늘 해제됐다.
흑인분파 사이의 정쟁으로 천여 명이 목숨을 잃은 나탈주의 크와줄루 홈랜드만 제외됐다.
클레르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이날 의회연설에서 ANC, 즉 아프리카민족회의와의 합의에 따라 48명의 정치범도 석방한다고 밝혔다.
석 달 전 27년 동안의 복역생활에서 풀려난 넬슨 만델라는 비상사태의 해제가 '민중의 승리'라고 환영했다.
전임 남아공 대통령인 보타는 4년 전인 1986년 6월 흑ㆍ백인간, 그리고 흑인 상호간의 정치적 분규를 빚은 반(反)아파르트헤이트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비상사태를 선포했었다.
드 클레르크는 이번 비상사태 해제 결정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종식을 위한 협상의 주요 걸림돌이 제거됐다고 자평했다. /YTN
1986 - 쿠르트 발트하임 오스트리아 대통령에 당선
1986년 6월 8일 오스트리아의 외교관인 쿠르트 발트하임이 오스트리아 대통령 결선에서 승리해 대통령이 되었다. 발트하임은 제4대 국제연합(UN) 사무총장으로 취임해 1972~81년 2차례에 걸쳐서 사무총장직을 역임한 외교관이었다. 사무총장 역임 당시 발트하임은 방글라데시·니카라과·과테말라 등지에서 구조작업을 효과적으로 펼쳤으며,
1982 - 미국의 프로 야구선수 사첼 페이지(Paige, Satchel) 사망
페이지 (Paige, Leroy Robert "Satchel", 1906.7.7~1982.6.8]
본명은 Leroy Robert Paige.
미국의 프로 야구선수.
여러 해 동안 흑인 리그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전설적인 명성을 얻었다. 흑인선수는 메이저 리그에서 활동할 수 없다는 불문율이 완화된 후인 1948년에 메이저 리그에도 진출했다. 191.9㎝의 키와 빈약한 체구 때문에 '키다리' 투수로 알려져 있던 그는 상당한 강속구와 느린 변화구를 잘 구사했다. 익살꾼이기도 했던 페이지는 말년에 그의 진짜 나이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을 때도 오히려 이를 즐기는 편이었다. 그의 생년월일은 1899년 12월 18일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다. 1948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팀의 구단주인 빌 비크와 입단계약을 맺었을 당시 그는 확실히 전성기를 지난 상태였지만 인디언스가 아메리칸 리그와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빌 비크가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팀을 인수하자 페이지는 그 팀으로 이적했고, 1951~53년 가장 우수한 구원투수로 활약했다.
메이저 리그 생활을 하기 전에 페이지는 남부 흑인 연합과 흑인 내셔널 리그의 여러 팀에서 투수로 활약했다. 그는 붉은 색의 가짜 수염을 달고 수염쟁이 팀인 하우스 오브 데이비드 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진정한 의미의 '철인'이었던 그는 겨울철에도 카리브 해, 중앙 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선수로 활동하며 공을 놓지 않았다. 그는 계약조건이 맞는 팀이면 어느 팀이든 가리지 않고 계약을 맺었으며, 1년에 약 4만 8,000㎞ 이상이나 돌아다녔던 떠돌이 선수이기도 했다.
1935년에는 29일간 매일 쉬지 않고 공을 던진 적도 있다. 인종차별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페이지는 1948년 시즌 이전의 시범경기에서 메이저 리그 최고의 선수들을 상대한 적이 있었다. 야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오른손 타자로 꼽혔던 로저스 혼즈비를 1경기에서 무려 5번이나 3진 아웃시킨 기록도 갖고 있다. 1934년 할리우드에서는 그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30승을 올렸던 디지 딘과 맞서서 13회까지 가는 접전을 벌인 끝에 1:0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1971년에 야구 명예의 전당에 등록되었다. /브리태니커
1973 - 포항제철 제선공장 준공식 및 용광로(고로) 화입식
포항종합제철의 제선공장 준공식 및 용광로 화입식이 오전 10시, 이낙선 상공부장관, 박태준 포항종합제철 사장 등 관계 인사들의 참석 아래 열렸다. 이날 용광로에 점화함으로서 포항종합제철은 제선, 제강, 압연 등 일관공정 체제를 갖춰 명실공히 종합제철의 면모를 갖추고 기동하게 되었다. 포항종합제철은 1970년 착공 이후 4년 만에 준공된 것이며, 외자 1억 6800만 달러, 내자 542억원 등 모두 1215억원의 건설자금이 투입됐다. 이날 기념식에서 이낙선 상공장관은 치사를 통해 “국내 철강 수급의 자립도를 높여 국제 수지개선에 도움이 될 것” 이라고 말했다.
백완종 동아닷컴 기자 100pd@donga.com /동아닷컴TV 2010-06-08 19:04:34
http://etv.donga.com/view.php?code=&idxno=201006080033597&category=002013&page=1
[포항제철(POSCO) 연혁]
1968-11-12 박정희 대통령 포철현장 방문(13차례 방문 중 첫번째)
1969-01-15 제철연수원 현판식
1970-04-01 1기 설비 착공식
1970-06-23 중후판공장 설비공급 계약체결
1970-09-19 열연공장 설비공급 계약체결
1972-10-03 첫 열연제춤 출하, 박태준 사장 첫 제품에 "피와 땀의 결정" 휘호
1972-11-19 제품 해외수출 시작, 후판제품 7,400톤을 미국과 대만에 수출
1973-06-08 제선공장 준공식 및 용광로(고로) 화입식
1973-06-09 용광로(1고로) 쇳물 출선 시작
1973-07-03 1기 설비 종합준공식
1973-12-01 2기 설비 종합착공식
1974-10-21 직업훈련원 개소 및 1기생 입소식
1975-11-29 1억불 수출의 탑 수상
1978-12-08 3기 설비 종합준공식
1979-02-01 4기 설비 종합착공식
1979-09-27 4본주 입주식
1981-02-18 4기 설비 종합준공식(조강 연산 850만톤 규모)
1981-09-01 4기 2차 설비 착공식
1983-05-25 4기 2차 설비 종합준공식
- Martin Luther King Jr.
1968 -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2세 암살범 체포
1968년 6월 8일 영국 런던의 히스로 공항에서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2세 암살 용의자인 제임스 얼 레이가 체포되었다. 레이는 주유소와 상점을 터는 좀도둑으로 일리노이에서 1번, 미주리에서 2번 복역했으며, 로스앤젤레스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적이 있었다. 1967년 4월 23일 미주리 주립교도소를 탈옥한 뒤, 1968년 4월 4일 테네시 멤피스에서 킹이 묵고 있던 모텔 옆 민박집 창문을 통해 모텔 방에 있는 킹을 쏘았다. 체포된 뒤 자신의 유죄를 시인해 99년형을 선고받았던 레이는 1977년 테네시에 있는 브러시마운틴 교도소에서 탈옥해 다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레이는 복역 중 1998년 4월 23일 사망했다. /브리태니커
1958 - 제6회 월드컵 스웨덴서 개막
제6회 월드컵축구대회(The 6th FIFA World Cup)는 1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958년 6월 8일부터 29일까지 22일간 개최되었다. 제5회대회의 스위스에 이어 역시 중립국인 스웨덴이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지역예선에는 역대 최대인 53개국이 참가하였고, 개최국인 스웨덴와 전 대회 우승국인 서독(지금의 독일)을 포함하여 16개국이 본선에 올랐다. 경기는 스톡홀름·말뫼·헬싱보리·할름스타드 등 12개도시에서 열렸으며, 4개국씩 4개조로 나누어 조별 리그전을 벌이고 각조에서 1·2위를 차지한 8개팀이 토너먼트 방식으로 우승을 가렸다. 우승은 브라질이 차지하였고, 스웨덴이 준우승, 프랑스가 3위를 차지하였다. 35개경기가 치러진 이 대회의 총관중은 86만 8000명, 평균관중은 2만 4800명, 총득점은 126점, 경기당 평균득점은 3.60점이다.
제2회대회(1934) 이후 출전을 거부하다가 24년만에 참가한 아르헨티나, 제16회 올림픽경기대회(1956)에서 우승한 소련 등 축구강국들이 고루 출전하였으며, 축구왕 펠레가 17세 나이로 월드컵축구대회에 데뷔하였다. 브라질은 월드컵축구대회 사상 유럽대륙에서 우승한 유일한 타대륙 국가가 되었으며, 이 대회 우승을 계기로 축구황금기를 이어나갔다. 이 대회부터 월드컵축구대회는 텔레비전을 통하여 전 세계에 본격적으로 중계되기 시작하였다. /naver
1955 - 영국의 컴퓨터 공학자 버너스 리(Berners-Lee, Tim) 출생
버너스 리 [Berners-Lee, Tim, 1955.6.8~]
월드와이드웹(WWW)의 창시자. 월드와이드웹의 아버지로 불린다.
1955년 6월 8일 런던의 과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대학교 퀸스칼리지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플레시 텔레커뮤니케이션을 비롯한 여러 업체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운영체계 연구원 등으로 일하였다. 1980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 몸담아, 같은 해 최초의 월드와이드웹(WWW) 아이디어인 하이퍼텍스트 방식의 '엔콰이어(Enquire)' 시스템을 제안하였다.
1989년에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여러 나라의 과학자들 사이에 정보 공유를 쉽게 하기 위해 글로벌 하이퍼텍스트 공간 개념을 제시하였는데, 이 개념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월드와이드웹이다. 이듬해 자신이 만든 웹 브라우저의 이름을 월드와이드웹으로 정하고, 기술은 여러 사람이 나누어 써야 한다는 믿음 아래 1991년 월드와이드웹 아이디어를 공개하였다.
버너스리의 아이디어 공개를 통해 전 세계 인터넷 시대의 문이 열렸고, 이후 월드와이드웹은 인터넷 주소 체계인 URL 등으로 발전하였다. 1994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 월드와이드웹컨소시엄(W3C)과 컴퓨터과학 및 인공지능연구소(CSAIL)를 세우고, 2005년 현재까지 W3C 소장으로 있으면서 인터넷 발전을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 밖에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영국왕립학회·영국컴퓨터학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위빙 더 웹 Weaving the Web》(1999),《스피닝 더 시맨틱 Spinning the Semantic》(2005)이 있다.
2004년 대영제국 기사 작위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나이트 커맨더' 작위를 받았고, 같은 해 핀란드 정부가 제정한 제1회 밀레니엄기술상(상금 14억원)을 받았다. 2005년 1월에는 '2004년 위대한 영국인'에 선정되었다. /naver
1953 - 남북 포로교환협정 조인
1953년 오늘 UN과 북한이 포로송환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남북 포로교환 협정이 조인된다.
북한 측이 모든 공산포로를 무조건 송환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주장한 데 반해, UN 측은 희망자만 송환시킨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이 때문에 협정 조인이 이뤄지기까지 여러 차례 결렬 위기를 맞았다.
UN과 북한 측은 5개 중립국으로 송환위원회를 구성해 송환거부 포로들에 대해 한 달 동안의 설득기간을 갖고 이후에도 뜻을 바꾸지 않은 포로들은 민간인으로서 석방한다는 데 합의함으로써 협정조인을 성사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협정에 반발해 휴전성립이 되기도 전인 같은 달 18일부터 남한에 수용 중이던 북한과 남한 출신의 반공포로 2만7천여 명을 석방해버린다. /YTN
1949 -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 출판
[어제의 오늘]1949년 조지 오웰 ‘1984년’ 출간
ㆍ권력자의 정보왜곡·통제 상황 경고
1949년 오늘,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유명한 장편소설 <1984년>이 런던의 출판사 세커 앤드 와버그에서 발간됐다.
출간 당시 미래의 세계를 담은 소설은 극단적 전체주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나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 모습을 차용한 가상의 3개국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가 그 무대다. 독재자이자 정치적 상징으로 그려지는 ‘빅 브러더’가 텔레스크린 등 갖가지 정보화 도구들을 통해 국민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사회를 통제한다.
소설은 디스토피아의 전형을 보여주며, 정보기술이 권력자의 지배도구로 이용될 때의 참혹한 상황을 경고한다. 각 부문에 큰 영향을 끼친 책은 제목을 둘러싸고도 화제를 모았다. 원래 제목은 ‘유럽의 마지막 인간’이었으나 출판사가 마케팅 차원에서 제목 변경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목은 오웰이 원고를 탈고한 1948년에서 뒤 두자릿수를 바꿨다거나, 1884년 영국에서 설립된 페이비언사회주의협회의 창립 100주년을 기념했다거나, 첫째 부인의 시에서 따왔다거나, 아예 아무런 뜻이 없이 그저 미래를 나타내는 기호라는 주장 등이다.
<1984년>은 독재권력에 의해 인간성이 얼마만큼 파괴되고, 권력자의 정보 왜곡과 통제가 얼마나 정교한지 등을 잘 보여준다. 또 정보기술 발달에 대한 맹신을 경고하면서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읽히고 있다. 이에 따라 <1984년>은 달력상 한 해가 아니라 ‘늘 현재’라는 분석이 많다.
최근 이명박 정부의 일방적·독선적인 국정기조의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광범위하게 민주주의의 후퇴가 목격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단체, 각계 원로인사, 대학 교수, 대학생 등의 시국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3일 중앙대 교수들은 시국선언문에서 “국민을 섬기는 정부가 되겠다던 현 정권이 국민을 전방위적으로 감시하고 억압하는 21세기형 ‘빅 브러더’로 변신한 지는 이미 오래”라며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이 어느 새 경찰국가로 전락해버렸다”고 비판했다.
사회 전반을 통제·감시하는 지배권력이나 사회체계를 말하는 ‘빅 브러더’. 바로 <1984년>에서 비롯된 용어다. 한국에서 지금 ‘빅 브러더’란 말이 공공연히 거론되는 것을 보면 <1984년>은 정말 ‘지나간 한 해’가 아니라 ‘늘 현재’라는 생각이 든다.
도재기기자 jaekee@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6-07 17: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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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 독도 부근서 미군기가 어선 10여 척 오폭, 사상자 20여명
어부 150명 '억울한 죽음' 독도 폭격사건
미군정기인 1948년 6월 8일. 우리 어민들은 힘없는 백성의 서러움을 너무나 큰 비극으로 겪어야 했다. 미 공군기가 독도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들에게 폭탄을 퍼부어 150여 명이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역사는 그것을 '독도 오폭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수로 폭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실수였는지 의도적인 폭격이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독도의 악몽에 대해 보도한 언론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선 동해상에 있는 독도 부근 해상에 있는 우리나라 어선을 미국 극동항공대의 중폭격기군이 이만 삼천 척 상공에서 폭격하야 11척의 어선을 침몰시키고, 14명의 조선인 어부를 살해한 일로 인하여 전국 동포는 불안으로 민심이 들끓었다.’(신천지 1948년 6월 30일)
“미국 극동함대 사령부가 독도 폭격이 고공폭격 연습대에 의한 것이라고 공식 인정했다. 이 성명서는 11척의 조선 어선을 총·폭격하여 14명의 조선인을 살해하고 기타를 부상시켰다고 전해진 이 사건을 불행한 유감스런 사고라고 말한다.”(동아일보 1948년 6월14일, 17일)
폭격에서 천우신조로 살아남은 어민들은 옷가지를 찢어 상처를 동여매고, 총알이 지나간 뱃전은 헝겊으로 구멍을 막아 울릉도로 도망쳐왔다고 한다. 당시 생존자 고(故) 김도암 씨는 “태극기를 흔들어 목메어 소리쳤지만 야속한 비행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총을 쏘아댔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피해자의 숫자 등 폭격의 실상이 상당 부분 숨겨져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95년 ‘푸른 울릉·독도가꾸기 모임’과 한국외국어대 ‘독도연구회’가 생존자와 유가족의 증언을 기록한 결과 폭격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어민은 무려 15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진상규명 조차 제대로 안돼 50여 년 간 유족들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이 사건은 폭격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장학상 씨(당시 36세·1996년 사망) 등이 사건 직후 천신만고 끝에 울릉도로 돌아와 세상에 알려졌다.
장씨 등 생존자 2명은 “울릉도 방향에서 날아온 12대의 폭격기가 2개조로 나눠 600m 상공에서 선회하며 융단폭격, 조업현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30여 척의 동력선에 척당 5~8명이 타고 있었으니까 150여 명 정도가 숨졌다고 보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미군정은 사건발생 8일이 지나도록 폭격사실 등을 부인했다. 그러다 미 공군 극동사령부를 통해 미 제5공군 소속 B29폭격기가 어선들을 바위로 오인해 연습폭격을 했다고 발표했을 뿐 진상을 공개하지 않았다. ...
[국정브리핑 2005-11-10] 2005/11/11 /독도박물관
http://dokdomu.dokdomuseum.go.kr/board/gongi4
/view.php?tbname=gongi4&number=1023&page=1
1921 -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수하르토(Suharto) 출생
수하르토 [Suharto(Soeharto), 1921.6.8~2008.1.27]
중부 자바의 욕야카르타에서 태어났다. 하급 중학교 및 이슬람 학교를 마친 후에 인도네시아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1943년 일본군 보호 아래 인도네시아 육군장교가 되어, 1945∼1950년 욕야카르타에서 대대장·연대장을 지내고, 1953년 중부 자바의 연대장, 1960년 준장으로 진급, 1960~1965년 육군참모차장을 지냈다. 1965년 9월 30일 쿠데타 때 당시 국방장관 나수리온과 협력하여 반란군을 격파하고 육군사령관이 되어 치안회복을 실현하였다.
1966년 3월 대통령 수카르노에게서 치안 대권을 위양받고, 7월에는 총리·국방치안장관·육군장관·육군총사령관을 겸임하였으며, 1967∼1968년 대통령권한대행을 거쳐, 1968년 3월 국민협의회에서 제2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73년 3월 대통령에 재선되었으며, 1978년 3월에는 3선(選)저지운동을 탄압하고 3선(選) 대통령이 되었다. 1979년 11월 학생들의 반정부운동이 일어나고, 1980년 4월 전국에서 반(反)중국인 폭동이 발생한 데 이어, 5월 퇴역장성과 정치가 50명이 대통령비판성명을 발표하는 등 한때 정정(政情)이 불안했다. 하지만 1982년 5월의 총선에서도 수하르토를 정점으로 하는 골카르(Golkar) 조직이 압승함으로써 4선 대통령이 되었다. 그 뒤에도 두 번의 재선을 했지만 1998년 대규모 반정부시위로 몰락하고 말았다.
외교면에서 수하르토 정권은 수카르노 시대의 반제국주의 ·비동맹노선에서 180도 선회하여 미국 등 서방 여러 나라와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를 ‘신체제’라고 일컫는다. /naver
1916 - 영국의 분자생물학자 크릭(Crick, Francis H. C.) 출생
크릭 [Crick, Francis Harry Compton, 1916.6.8~2004.7.28]
런던대학교를 졸업한 후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1949년부터 캐번디시연구소에서 X선을 사용, 나선상단백질 분자구조를 연구하던 중 미국의 생물학자 웟슨과 킹스 칼리지의 윌킨스의 협력을 얻어 1953년 DNA의 2중나선 구조를 발표하였다. 이 연구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확인됨으로써, 1962년 웟슨, 윌킨스와 함께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는 이 밖에도 대장균의 인공돌연변이에 의한 DNA의 뉴클레오티드 배열 순서의 변화를 해석하고, 유전정보의 단위가 3개로 조합되어 있음을 예언하였다. 또, 콜라겐 단백질의 구조, DNA에서 단백질 합성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에서도 큰 업적을 올렸다. /naver
1903 - 벨기에 태생 미국의 소설가 유르스나르(Yourcenar, Marguerite) 출생
유르스나르 [Yourcenar, Marguerite, 1903.6.8~1987.12.17]
본명 마거리트 드 크레이엥쿠르(Marguerite de Crayencour).
벨기에 출생. 프랑스어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어린 시절을 아버지와 함께 유럽 및 중동의 각지를 전전하며 보내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미국에 정주하였다. 처녀작 《알렉시스 또는 헛된 전투 Alexis ou le Traite du vain combat》(1929)에 이어 《최후의 일격 Le Coup de Grace》(1939),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 Memoires d’Hadrien》(1951)으로 일약 문명을 얻었다.
그의 작품은 가치체계가 붕괴되는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역사소설의 체제 속에 인간의 전체성을 파헤친 것으로 《흑(黑)의 과정 L’œuvre au Noir》(1968, 페미나상 수상)이 그 하나이다. 회상록 《Souvenirs pieux》(1974), 《Archives du Nord》(1977) 외에 H.제임스와 A.V.울프의 작품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여성작가 최초로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1980)이 되었다. /naver
1876 - 프랑스의 소설가 상드(Sand, George) 사망
상드 [Sand, George, 1804.7.1~1876.6.8]
본명 오로르 뒤팽(Aurore Dupin).
파리 출생.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부 프랑스의 베리주(州) 노앙에서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16세 때 지방의 귀족인 뒤드방 남작과 결혼하였으나 행복한 결혼생활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두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와 파리로 옮겼다(1831). 그 후 친구의 권유로 신문소설 《앵디아나 Indiana》(1832)를 써서 일약 유명해지면서부터 남장차림의 여인으로 문인들 사이에 끼어 문필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녀의 분방한 생활은 남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특히 시인 뮈세와 음악가 쇼팽과의 모성적인 연애사건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상드의 창작 활동은 크게 4기(期)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제1기에는 체험을 바탕으로 한 처녀작 《앵디아나》나 《렐리아 Lelia》(1833)와 같은 루소풍(風)의 연애소설을 썼고, 제2기에는 《콩쉬엘로 Consuelo》(1842)를 대표작으로 하는 일련의 인도주의적 사회소설을 썼다.
제3기는 어린 시절에 살던 추억 많은 노앙에 머물면서, 이 지방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소박하고 선량한 농민의 생활을 그린 전원소설의 시기로서 《마(魔)의 늪 La Mare au Diable》(1846) 《기아(棄兒) 프랑수아 Fran ois le Champi》(1848) 《사랑의 요정 La Petite Fadette》(1849) 《피리 부는 사람들의 무리 Les Maitres Sonneurs》(1853) 등의걸작을 발표하였다. 제4기는 만년임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필력에 쇠퇴함이 없이 회상록 《내 생애의 역사 Histoire de Ma Vie》(1854∼1855)를 쓴 뒤, 원숙한 필치로 파리 상류사회의 연애를 다룬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녀의 일생은 모성애와 우애와 연애로 일관된 분망한 생애로서 그야말로 낭만파의 대표적 작가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한편, 선각적(先覺的)인 여성해방운동의 투사로서도 재평가되고 있다. /naver
- Frank Lloyd Wright - 'Fallingwater' Mill Run, PA
- 'Robie House in Chicago - 'Guggenheim Museum'
1867 - 미국의 건축가 라이트(Wright, Frank Lloyd) 출생
라이트 [Wright, Frank Lloyd, 1867.6.8~1959.4.9]
[어제의 오늘]1867년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출생
ㆍ‘유기적 건축론’으로 돌풍
네모난 건물로 들어가 네모난 방에서 네모난 그림을 보는 게, 미술관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다. 이 틀을 깨고 작품을 담는 공간 역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든 것이 뉴욕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거대한 달팽이’라 불리는 이 건물은 직선과 원형이라는 기존 건축구조에서 벗어나 달팽이관처럼 나선형으로 지어졌다. 계단이 없는 대신 관람객들은 나선형 경사로를 천천히 오르내리며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 이 기념비적 미술관의 설계자이자 ‘20세기 근대건축의 아버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1867년 6월8일 미국 위스콘신주에서 태어났다.
나무 블록 쌓기를 좋아하던 어린 소년은 스무 살에 건축가의 꿈을 안고 시카고로 떠났다. 루이스 설리번의 건축 사무소에서 실무를 배우면서, 그는 자연과 건축물의 합일을 추구하는 자신만의 건축관을 정립해 나간다. 라이트는 “집은 언덕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언덕 속으로 스며들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기체가 균형을 이루듯 자연과 건축물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유기적 건축론’은 동양적 건축관과도 맞닿아 있다.
라이트의 유기적 건축론은 작은 폭포 위에 지은 에드거 카우프만의 여름별장 ‘낙수장(Fallingwater House)’에서 만개했다. 1936년 그의 나이 69세 때 지은 집이다. 펜실베이니아 숲속의 이 집은 시냇가의 작은 폭포 위에 지어졌으며, 마치 폭포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듯 자연의 본래 모습을 해치지 않고 어우러져 건축미를 완성했다. 이 시기에 라이트는 존슨 왁스 빌딩과 구겐하임 미술관 등 대표작들을 설계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혁신적 건축물뿐 아니라 파란만장하고 기이한 삶도 숱한 화제를 불렀다. 그는 자신의 나이와 학력을 속였고, 스스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가’라고 말해 오만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세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을 했으며, 고향에 지은 자택 ‘탤리에신’에 하인이 불을 질러 두 번째 부인과 두 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59년 92세를 일기로 눈을 감은 그의 시신은 사후 26년 만에 마지막 아내의 유언으로 무덤에서 꺼내져 화장됐다.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6-07 17:33:1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6071733195&code=100100&s_code=ap005
1845 -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잭슨(Jackson, Andrew) 사망
잭슨 [Jackson, Andrew, 1767.3.15~1845.6.8] 전쟁영웅으로 칭송받아 온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1845년 6월 8일 사망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왁스호에서 출생해 변호사 생활을 거쳐 1798년 테네시주 최고재판소 판사로 활동했다. 182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J.애덤스에게 패하여 낙선했으나, 1828년 재도전해 당선됐다. 서부 출신 최초의 대통령으로 재임 중 구습을 타파하는 청신한 정책을 취해 서부의 농민, 동부와 북부의 노동자, 남부의 농업경영자 등으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1832년 재선됐다. 그는 직선적이고 야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관세문제나 미합중국은행 재인가 문제 등에서는 강경한 태도를 취했지만, 여론을 중시하는 대중 중심의 정치를 펴 인기가 높았다. 또한 선거권의 확대, 대통령 선거제도의 개선, 전국당대회제의 채택, 교육의 보급 등으로 일반 대중의 정치참여 기회를 증대시킨 대통령으로 평가받았다. 그가 확립한 새로운 개념의 민주주의는 `잭슨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20세기 초반까지 국민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다. /조선
- 'My First Sermon' - 'Orphan' - 'The Princes in the Tower'
- 'Boyhood of Raleigh' - 'Jesus in the Home of His Parents'
- 'Mother Feeding Child' - 'Lillie Langtry'
1829 - 영국의 화가 밀레이(Millais, John Everett) 출생
밀레이 [Millais, John Everett, 1829.6.8~1896.8.13]
노르망가계(家系) 출신. 조숙하여 11세 때 왕립미술학원에 입학하고 재학 중 많은 아카데미상을 획득했다. 1848년 친구 로세티, 헌트 등과 라파엘 전파(前派)를 형성하여, 라파엘로 이후의 대가(大家) 양식의 모방에서 탈피, 회화예술에 자연주의와 정신적 내용의 부활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의 주요작품에는 《목수작업장의 그리스도》(1850) 《오필리아》(1852) 《눈먼 소녀》(1856) 등이 있다. 그러나 정밀한 세부묘사와 화려한 색채에 의한 문학적 ·종교적 주제의 작품은 통속적 ·감상적 표현으로 기울었다. 후에 이 파를 떠나, 능란한 묘사력을 살려 초상화와 일반적 주제로 세상의 명성을 얻어 아카데미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naver
- 1956.7.20 발행 (에러)
- 1956.10.8 발행 (재발행)
1810 - 독일의 작곡가 슈만(Schumann, Robert) 출생
슈만 [Schumann, Robert, 1810.6.8~1856.7.29]
[역사속의 인물] '음악의 시인' 로베르트 슈만
‘음악의 시인’ 로베르트 슈만=불우한 환경과 아픔, 그리고 사랑과 짧은 생애.
1810년 오늘 독일 작센의 츠비카우에서 태어난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은 ‘음악의 시인’이다. 정상급 피아노 교육자인 프리드리히 비크를 스승으로 모시고 피아노를 배웠지만, 22세에 오른손 넷째 손가락을 다친 뒤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고 작곡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삶은 사랑과 아픔으로 점철됐다. 18세 때 피아노 스승의 딸 클라라를 처음 만나 24세에 사랑에 빠졌으나 결혼은 스승의 반대에 부닥쳤다. 비크는 아홉 살의 나이 차, 슈만 가족의 정신병력(아버지와 누나), 피아니스트로서의 실패 등 슈만을 둘러싼 환경 등으로 딸과의 혼인을 허락할 수 없었다. 슈만은 법정에 제소한 끝에 30세에 클라라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하이네의 시에 붙인 연가곡집 ‘시인의 사랑’, 프랑스 여류시인 샤미소의 시에 곡을 담은 ‘여인의 사랑과 생애’ 등은 클라라에 대한 사랑을 노래로 담은 작품들이다. 서정성을 담아 낭만주의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곡을 주로 만들었다. 40세부터 환청, 환각에 시달렸고, 라인강에 투신자살을 시도했다. 정신병원에서 2년간 투병하다 46세로 짧은 삶을 마감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매일신문 2009년 06월 08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5492&yy=2009
"작곡을 하기 위해서는 아직 누구에게도 떠오르지 않은 멜로디 하나만 기억해 내면 된다. "
- 로베르트 슈만
1809 - 미국의 작가, 혁명이론가 토머스 페인(Paine, Thomas) 사망
페인 [Paine, Thomas, 1737.1.29~1809.6.8]
18세기 미국의 작가. 국제적 혁명이론가.
영국 잉글랜드 노퍽 출생.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 때 활약하였다. 영국 퀘이커교도인 코르셋 제조업자 가정에서 태어나 13세까지는 학교에 다녔으나 가난 때문에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정치와 사회제도의 모순을 체득하였다. 런던에서 만난 B.프랭클린의 소개로 1774년 10월 필라델피아로 이주, 1776년 1월 《상식 Common Sense》을 출판하여 독립이 가져오는 이익을 펼쳐 큰 영향을 끼쳤다.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N.그린의 부관으로 종군하는 한편, 《위기 The Crisis》(1776∼1783)를 간행, “싸움이 격렬할수록 승리는 빛난다”라고 하여 민중의 사기를 고무하였다.
1787년 프랑스로 건너가 혁명을 목격하였고, 1791년 《인간의 권리 Rights of Men》 제1부를 쓰고 이듬해 런던에서 제2부를 썼으나, 반란 선동이란 죄명을 쓰게 되어 프랑스로 피신하여 의원에 선출되었다. 이신론적(理神論的) 입장에서 쓴 《이성의 시대 The Age of Reason》 제1부(1794) ·제2부(1796)가 무신론(無神論)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1802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그곳에서도 지난날의 독립전쟁의 영웅으로서가 아니라 ‘추악한 무신론자’로서 비난을 받았다. 빈곤과 고독 속에서 파란 많은 생애를 마쳤다. /naver
1625 - 이탈리아 출생 프랑스의 천문학자 카시니(Cassini, Jean Dominique) 출생
카시니 [Cassini, Jean Dominique, 1625.6.8~1712.9.14]
니스 출생. 제노바에서 성직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던 중에 G.갈릴레이의 제자인 카발리엘리(1598~1647)에게서 천문학을 배우고, 1650년 볼로냐대학의 천문학 교수가 되었다. 1665년 목성으로부터 대적점의 변화를 관찰, 목성의 자전주기(自轉周期)가 9시간 56분임을 밝혔고, 1666년 비슷한 방법으로 화성의 자전주기가 24시간 40분임을 확인하였다. 또한 갈릴레이가 발견한 목성의 4개 위성(衛星)에 대한 운행표를 계산했는데, 이것은 해상에서의 경도(經度) 결정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러한 업적에 의해 1669년 프랑스 국왕의 초청으로 파리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1671년 파리천문대 초대 대장으로 취임했다. 1673년 프랑스에 귀화하여, 이후 4대(代)가 이곳에서 천문학 개척에 헌신하였다. 1671∼1684년 토성(土星) 근처에서 4위성을 발견했고, 1672년 화성(火星) 접근시에는 J.리셰르와 함께 기아나의 카이엔과 파리 사이에서 화성의 지심시차(地心視差)를 측정하여, 이 값을 바탕으로 1천문단위의 거리를 1억 4000만 km로 정하였다. 현재의 값에 비해 15분의 1의 오차 범위 내에 드는 정밀한 것이었다.
1675년에는 토성의 고리에서 이른바 카시니간극(間隙)을 발견하였다. 또한 황도광(黃道光)을 최초로 관측하였고, 달의 자전축이 황도면에 수직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달의 칭동(秤動)을 볼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행성의 공전궤도에 대해 케플러의 타원에 대응하는 카시니의 난형(卵形)을 주장하였다. 저서 《천문학 논문집》(1666) 《천문변량(天文變量)의 요소》(1693) 등이 있다. /naver
632 -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Muhammad/Mahomet) 사망
무함마드(마호메트) [Mahomet/Muhammad, 570?.4.22~632.6.8]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632년 6월 8일 메디나에서 사망했다. 부친이 일찍 죽어 조부와 숙부 밑에서 자랐다. 청년시절 대상을 따라 시리아 등지를 왕래하며 만난 유력한 상인의 미망인인 하디자와 결혼, 3남 4녀를 낳았다.
40세가 되던 610년 경, 세속적인 생활을 중단하고 메카 교외의 히라산에 있는 한 동굴에서 명상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처음으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알라신의 계시를 받았다. 그 내용은 `코란` 제9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계속 알라의 계시를 받게 되자 그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할 것을 결심, 부인 하디자를 최초의 신도로 받아들였다. 신도는 점차 증가했으나, 이제까지의 다신교를 부정하고 유일신 알라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는 그의 주장이 당시 메카 지배층의 이익과 배치되어 613년경부터는 집권세력으로부터 견제와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615년에는 신도 일부가 박해를 피해 아비시니아로 피신, 그곳에서 그리스도교도에게 환영을 받았으나 마호메트 자신은 전부터 정해 둔 메디나로의 이주를 준비했다. 마침내 622년 9월 24일 신도 70여명과 함께 메카를 탈출, 메디나로 이주했다. 이를 헤지라(聖遷)라고 하며 이 해가 이슬람력의 기원이 된다.
당시 메디나의 내분을 틈타 마호메트는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해 사태를 수습하고, 메카에 대항할 수 있는 군대를 양성했다. 메카세력과의 오랜 전쟁 끝에 마침내 630년 10월 메카를 점령한 마호메트는 이후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각 부족을 속속 이슬람교로 개종해 교단을 완성해 나갔다. 그 후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어, 632년 6월 8일 애처 아이샤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조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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