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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은퇴를 감지한 건 7월 27일 대전구장에서였다. 그날 대전구장엔 전날 은퇴를 선언한 삼성 양준혁이 와 있었다. 공교롭게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 연수 중인 송진우 역시 휴가 차 귀국한 길에 대전구장을 들른 참이었다. 두 레전드는 대전구장 기자실에서 반갑게 재회했다. 그때였다. 누군가 이런 덕담을 내놓았다.
“구대성만 있으면 완전히 성구회 정기모임인데.”
2009년 1월 송진우, 양준혁, 전준호(SK 코치)가 일본 명구회를 참고해 만든 성구회는 투타에서 기념비적인 기록을 남긴 선수들만 가입하는 친목단체다. 타자는 통산 2천 안타 이상, 투수는 200승 또는 300세이브 이상을 거둬야 가입할 수 있다.
개인통산 210승과 2천91안타를 기록하고서 유니폼을 벗은 송진우와 전준호는 당연히 성구회 구성원이었다.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2천 안타를 돌파한 양준혁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구대성은 어떨까.
1993년 빙그레(한화의 전신)에 입단하고 569경기에 등판한 구대성의 통산 성적은 67승 71패 214세이브다. 일본에서의 4년간 통산 성적 24승 34패 10세이브를 합쳐도 200승, 300세이브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실제로 구대성은 성구회 회원이 아니다.
![]() 7월 27일 대전구장 기자실에서 만난 송진우(사진 왼쪽부터)와 양준혁이 반갑게 재회하고 있다. 지난해와 올해 각각 은퇴를 선언한 두 레전드에 이어 구대성마저 은퇴를 결심하며 1990년대 야구팬들의 공허함은 깊어지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그런데도 구대성을 성구회 회원으로 착각한 것은 그의 역대 활약상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뜻이리라. 정작 구대성을 본 건 한화 감독실이었다.
당시 한화 한대화 감독은 책상에 앉아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아, 이거. 선수단 구성표여.”
한 감독 앞에는 A4 용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그 용지 안에 전체 한화 선수들이 1·2군, 재활군, 전력 외 선수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정말 1군에 쓸 선수가 마땅치 않아. 보라고. 2군에서 올릴 선수가 누가 있나. 그래도 어쩌겠어. 인내심을 갖고 2, 3년을 내다봐야지. 내 임무는 ‘제2의 류현진’을 배출하는 게 아니라 지금 있는 류현진이라도 잘 관리하는 게 아닌가 싶어. ‘감독 오래하고 싶다’는 욕심보단 팀을 잘 재건해서 ‘감독 제대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그게 여간 힘들 일이 아니네.”
언제나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는 한 감독이지만, 그날만은 외로운 사내처럼 느껴졌다. 한 감독의 한숨이 용지 위를 지나갈 때 ‘전력 외 선수’ 명단에 눈이 갔다. ‘전력 외 선수’는 말 그대로 재활 중이지 않으면서도 당장 1군에 쓰기에 부족한 선수들을 뜻했다. 그곳에 낯익은 투수의 이름을 발견했다. 구대성이었다.
“지난 시즌 71경기나 등판했다고. 올 시즌도 기대를 많이 했는데, 무릎이 ‘영’ 좋지 않은가 봐. 본인도 생각이 많은 것 같은데….”
한 감독은 그러나 ‘은퇴’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구대성이 제 컨디션을 찾아 다시 마운드에 오르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한화 모 관계자는 “구대성이 현역 지속 여부를 놓고 장고에 들어갔다”며 “원체 시원시원한 선수이기 때문에 조만간 자신의 거취와 관련해 중대발표를 할 것 같다”고 귀띔했다.
그로부터 18일 후인 8월 15일 한화는 보도자료를 통해 구대성의 은퇴 소식을 공식 발표했다. ‘대성불패’ 구대성 역시 가장 강한 상대는 세월인 모양이었다.
![]() 구대성의 마지막은 행복했다. 구단과 불협화음을 빚지도 않았으며 코칭스태프와의 소모전도 없었고, 은퇴를 다른 이의 탓으로 돌리지도 않았다. 구단을 통해 은퇴발표를 하고, 정식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밝힌데다 은퇴식에선 온 힘을 다해 그를 성원해준 팬과 구단에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은퇴의 교본'으로 불러도 좋을 만큼 그의 은퇴는 깔끔하고 품위있게 치러졌다(사진=한화) |
‘대성불패’ 구대성, 은퇴를 선언하다.
정든 그라운드를 떠나는 심정이 어떤지 궁금하다.
담담하다. 섭섭한 면도 있고. 그래도 지금까지 잘해온 것 같다. 음, 크게 아쉬운 건 없다.
은퇴를 결심한 주된 배경이라면 역시….
일단 체력이 많이 떨어졌고, 여기저기 아픈 데가 좀 많았다. 특히나 무릎수술의 여파가 컸다. (무릎을 가리키며) 여기가 계속 아프면서 ‘아,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신의 등번호 15번이 영구결번되는가 싶었는데, 내년시즌부터 까마득한 후배 유창식(광주일고)이 단다.
15번은 어렸을 때 달았던 등번호다. 그래서 친근함이 느껴진다고 할까. 다른 무엇보다 더 정이 가는 게 사실이다.
15번에 특별한 의미라도 있나.
전혀 그렇지 않다. 왜 살다 보면 의미는 없는 데 좋아하는 번호는 있잖은가. 대개 투수는 1, 11, 21번을 선호한다. 난 그저 15번을 등에 달고 많은 경기에 등판했기 때문에 이 번호를 좋아했던 것뿐이다. 사실 2006년 귀국했을 때 후배 류현진이 나 대신 15번을 달고 있었다. 후배니까 흔쾌히 쓰도록 했고, 내년부터 어느 선수가 달지 모르겠지만, 그 선수도 별 부담없이 썼으면 좋겠다.
위기관리능력을 시험하려고 고의사구 3개를 내줬던 남자
야구공을 처음 잡았던 게 언제였나.
어렸을 때 왜 주먹으로 고무공을 치고 노는 ‘찜푸’라고 있지 않았나. 형들 따라다니면서 ‘찜푸’ 좀 했다. 그러다 친형이 야구를 하기 시작하면서 덩달아 야구에 흥미를 느꼈다. 초교 3학년 때인가 캐치볼 같은 걸 가볍게 했는데 굉장히 재밌었다. 그러다 대전 신흥초교 4학년 때부터 정식 야구선수가 됐다.
그즈음 프로야구가 막 출범했다. ‘훌륭한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부푼 꿈을 꿨을 듯싶은데.
그땐 어렸으니까 프로야구 선수 하면 ‘아, 멋있다.’ 정도였지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나중에 크면 꼭 프로에 가야지.’ 하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대전고 1학년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그땐 프로야구가 있었어도 고교야구의 인기도 만만치 않았다. 속으로 ‘나도 잘해서 관중 많은 곳에서 야구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는데 마침 고 1때 청룡기대회에서 팀이 결승에 올라 소원을 풀었다. 지금은 동대문야구장이 없어졌지만, 정말 관중이 ‘꽉’ 찬 곳에서 처음 경기를 하니 무척 신이 났던 기억이 난다.
대전고 재학시절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고교 최강이었던 신일고와의 연습경기에서 1회 내리 3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냈다. 그것도 고의사구로.
(고개를 끄덕이며) 아, 그거. 당시 경기가 끝나고 감독님과 주변 분들이 자꾸 물으시더라. 그래서 “일부러 3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내고 나서 과연 내가 이 상황을 완벽하게 막을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해보고 싶었다”고 말씀드렸다.
신일고면 당시 최강팀인데.
잘하긴 했는데…그땐 대전고도 강팀이었다. 사실 강하고, 약한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시 난 어린 마음에 나 자신을 테스트하고 싶었을 뿐이다.
자신은 있었나.
자신? 난 지금까지 야구를 하면서 ‘내 공이 최고고, 내 공은 타자들이 절대 못 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결국, 3명의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내고 다음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잡았다.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뭐, 연습경기였으니까 그런 일이 가능했겠지. 분명한 건 그런 테스트를 통해 내 공에 대한 자신감이 더 확실해졌다는 거다.
![]() 한양대 시절의 구대성(사진 왼쪽)과 정민태. 나이는 구대성이 한살 위지만, 학년은 정민태가 1년 빠르다. 그래서 공석에서 구대성은 정민태를 "민태형"이라고 불렀다. 정민태는 한양대 시절 구타를 근절했던 이다(사진=대한야구협회) |
대학 졸업하고서 프로에 가도 빙그레에서 처음 제시한 돈 정도는 받겠다 싶었다. 어쨌거나 여러모로 대학 진학이 훨씬 낫다는 판단 아래 한양대에 입학했다.
한양대에 입학하자마자 아마추어 최고의 왼손 투수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많이 던져 팔을 좀 다치긴 했어도 대학 때 구위가 가장 좋았다. 한양대 역시 당시 대학 최강팀이라, 다른 대학팀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김동수(넥센) 배터리 코치님이 포수, 정민태(넥센) 투수코치님이 에이스였으니까.
대학시절 ‘우민태, 좌대성’으로 불렸다. 두 투수가 1991년 한양대를 봄·가을 대학야구연맹전 우승으로 이끈 건 지금도 전설이다.
그때는 나가서 던지기만 하면 거의 이겼다. 원체 팀 타격도 좋았고. 그런 별명이 붙는다고 이상할 게 없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대학 시절 명성과 함께 혹사 역시 당신 뒤를 쫓아다니긴 마찬가지였다.
혹사라, 잘 모르겠다. 주변에선 내가 팔을 너무 많이 써 다쳤다고 하시는데…. 사실 한화에 입단하자마자 어깨를 다쳤다. 그때 최대한 편하게 생각했다. 온 힘을 다해 재활에 매달리다 보면 완쾌도 할 수 있고, 하다 하다 했는데 완쾌가 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까닭인지 나 스스로는 ‘혹사 논란’에 별 관심이 없었다.
혹사를 이겨낸 사나이, 투수 4관왕을 거머쥐다
![]() 지난해까지 구대성은 71경기에 출전하는 철완을 과시했다. 여느 선수였으면, 1년 정도 현역생활 연장을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그러나 구대성은 '프랜차이즈 스타'를 현역생활 연장을 위한 도구로 삼지 않았다. 반대로 '프랜차이즈 스타'답게 후배들의 길을 터주고자 은퇴를 결심했다(사진=한화) |
1993년 빙그레에 입단했다. 그러나 대학 때 혹사당한 어깨를 프로 입단하고 바로 다치면서 데뷔 첫 시즌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데뷔 이듬해인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등판하기 시작했다. 데뷔 시즌이었던 1993년은 2승에 그쳤지만, 1994년엔 7승8패 평균자책 2.60을 기록했다.
1996년 다승(18), 구원(24), 평균자책(1.88), 승률(8할5푼7리) 4관왕에 오르며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가 됐다.
나 자신이 마운드에 올라 투구하는 걸 무엇보다 좋아했고, 코칭스태프도 날 항상 믿었기 때문에 많은 경기에 등판할 수 있었다. 덕분에 상도 많이 탔고.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 가장 많았던 해였지 싶다.
프로 입단 4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하늘로 날아갈 듯한 기분’은 그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어땠나. 정말 하늘을 날 듯이 기뻤나.
아, 그때야 뭐 당연히 좋았지(웃음). 지금도 뭐라고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다. 다만, 아쉬운 게 있었다면.
아쉬움?
(고개를 끄덕이며) 탈삼진이었다. 내가 프로 데뷔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한 시즌 탈삼진 200개 이상을 기록한 투수가 없었다. 그런데 1996년에만 유독 한 시즌 탈삼진 200개 이상 투수가 2명이나 나왔다. 롯데 주형광(221개)과 태평양 정민태(203개) 선배였을 거다. 그때 내가 이닝에 비하면 삼진을 참 많이 잡았다(주 : 9이닝당 탈삼진수 11.85)…탈삼진왕이 되지 못한 게 지금도 아쉽다.
그해 당신은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139이닝을 소화했다. 반면 탈삼진왕 주형광(현 롯데 투수코치)은 30경기 가운데 29경기에 선발로 등판해 216⅔이닝을 던졌다. 이닝 차이가 크다 보니 탈삼진왕 경쟁에서도 멀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사실 시즌 중반만 해도 ‘구원투수라도 탈삼진왕에 오를 수 있겠다.’ 싶었다. 주형광과 탈삼진 160개까지는 거의 동시에 기록했다. 그런데 시즌 하반기로 갈수록 세이브 상황에만 나가다 보니까 탈삼진 차이가 크게 벌어지더라. 참, 그때 만약 탈삼진왕만 됐으면 투수 전관왕을 이뤘을 텐데(웃음).
하지만, 선발과 중간 거기다 마무리까지 맡으면서 또다시 ‘혹사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당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혹사당한다’는. 하지만, 혹사에 정답은 없는 것 같다. 꼭 많이 던진다고 ‘혹사당했다’고 단정하기도 그렇다. 나보다 더 많이 던지고 혹사당했는데도 더 좋은 성적과 더 오래 야구를 한 선배들도 있다. 사실 나도 많이 던진 투수로 알려졌지만, 40살 넘을 때까지 현역에서 뛰었다. 적게 투구해 50살까지 현역생활한다면야 ‘보호’를 해줘야겠지만(웃음).
고된 재활과 잔부상을 이겨내고 거둔 성과라, 더 의미가 깊었을 듯싶다.
선수마다 다르겠지만 난 부상을 겁내는 성격이 아니다. 나 스스로 완전히 완쾌됐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일단 공을 던져보고 다 나았다 싶으면 내 몸을 모두 써서 온 힘을 다해 투구하는 스타일이다. ‘또 아프면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은 일절 해본 적이 없다. 어쩌면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팔이 괜찮았던 것 같다. 후배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겁을 낼 시간에 야구를 좀 더 열심히 하라’는 것이다. 정말 큰 도움이 될 거다.
정말 재활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살면서 재활이 가장 힘든 것 같다. 선수들이 가장 하기 싫은 것도 재활이고. 하지만, 그걸 딛고 일어나야지 훌륭한 선수가 되는 거니까. 어쩌면 재활만 잘 끝내면 완전히 나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선수에게도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당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자신감이 느껴진다. 마운드에 있을 때 주로 어떤 생각을 하나.
머리에 잡생각을 집어넣지 않으려 했다. 마운드에 올라 타자를 볼 때면 ‘칠 테면 쳐봐!’ 하는 생각만 하지 ‘이 타자한테 잘못 던지다 맞으면 어떻게 하지’ ‘홈런 맞지 않으려면 뭘 던질까’하는 따위의 자신 없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선발과 구원으로 각각 마운드에 오를 때 마음가짐이 다를 듯싶다.
구원으로 등판할 때는 내가 잘 막아야 팀이 이기는 거니까 ‘무조건 잘 막자’하는 생각 정도만 하고 마운드에 오른다. 가능한 거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다만, 관중석 소리는 많이 듣는 편이다.
관중석 소리?
관중석에서 나는 작은 소리, 이를테면 “맛있는 거 먹을래?” 하는 소리 같은 게 들릴 때도 있다.
집중력이 떨어질 만도 한데.
(손사래를 치며) 오히려 난 그런 소릴 들으며 즐기면서 투구했다. 승부야 타자와 투수인 나와의 싸움이라, ‘이거 던질까, 저거 던질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난 관중석의 작은 소음을 듣고 그걸 즐기면서 던지는 게 훨씬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됐다.
가장 기억에 남는 관중석 소리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음, 보자. 대전고 재학시절 어느 비구니께서 내 경기를 자주 보러 오셨다. 관전하시면서 위기 때마다 “자신 있게 던져라”하는 응원소릴 많이 내주셨다. 한양대 갔을 때도 응원을 참 많이 해주셨는데. 그때 그분 생각이 많이 난다.
![]() 한화팬들은 구대성의 은퇴를 무척 아쉬워했다. '대성불패'라는 기를 흔들며 그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사진=한화) |
그렇다면 세이브에 실패했을 때 관중석에서 나오는 비난의 목소리도 즐기는 편인가.
아니. 그런 소린 아예 듣지 않는다(웃음). 이유가 있다. 난 패한 경기는 복기하지 않는다. 아예 진 경기는 접어둔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그저 내 컨디션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맞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반대로 상당히 잘 던진 경기는 한 번 정도는 복기한다. 그러니까 ‘내가 그 상황에서 왜 그걸 던져서 맞았지’란 부정적인 생각보단 ‘내가 이 상황에서 이렇게 던졌기 때문에 맞지 않았다’는 긍정적인 생각에 더 열중하는 편이다.
관중의 야유에 귀를 닫고, 복기를 거부한다손 쳐도 결국 라커룸에서 동료 선수와 만나게 된다. 거의 모든 마무리 투수들이 그럴 때면 ‘정말 죽을 맛’이라고 하더라.
맞다. 정말 죽음이다. 마무리 투수는 팀 승리를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블론세이브를 기록하면 동료에게 무척 미안하다. 생각해보라. 동료 선수들이 얼마나 이기겠다고 발버둥을 쳤겠는가. 그걸 불 질렀으면 미안할 수밖에. 그런 날은 경기 끝나고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좀 그렇다(웃음).
기억에 남는 가장 미안한 경기라도 있나.
‘딱’ 한 경기 있다. 1999년 모 감독님이 한화에서 투수코치를 하셨을 때다. 하루는 마운드에 올라오시더니 다짜고짜 “야, 니가 투수야?” 하시지 뭔가.
?
그때껏 야구를 하면서 그런 소릴 처음 들었다. 물론 ‘열심히 던지라’고 하신 말씀이지만, 그땐 내 나름대로 그 말에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그 자리에서 반항이라도 했나.
반항은 무슨. 그 경기에서 일부러 홈런 맞고 졌다.
뭐?
코치님 말씀을 ‘딱’ 듣자마자 머리가 굉장히 복잡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만.
어떤 경기였는지 기억나나.
쌍방울전(주 : 현대전)이었을 거다. 박경완한테 홈런 맞고 졌던 기억이 난다.
야구연감을 죄다 뒤졌다. 당신이 1999년 7월 17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현대와의 경기에 9회 등판해 앞선 두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하고, 이어 박경완에게 3점 홈런을 맞고 패전투수가 됐다는 걸 찾았다. 그해 박경완에게 유일하게 맞은 홈런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홈런이 박경완의 개인통산 100호째 홈런이었다.
그랬나? 나는 몰랐다.
그 경기 뒤로 모 투수코치가 당신을 어떻게 대하던가.
경기가 끝난 다음 코치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해를 풀었다. 그렇게 홈런 맞고 진 다음부터는 마운드에 올라오셔도 “열심히 던지고 있어”라고만 하시고 내려가셨다.
한화의 한국시리즈 첫 우승과 일본프로야구 도전
![]()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을 때의 한화. 이후 한화는 한번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앞으로 한화에 '송진우-정민철-구대성'에 버금가는 황금 투수진이 배출될 수 있을까(사진=삼성) |
1999년 4세이브 포인트를 따내며 ‘만년 준우승팀’ 한화를 첫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중·고·대학교에 다니며 우승을 다 맛봤다. 프로 우승도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한화의 우승을 두고 ‘4전 5기’니 뭐니 하면서 언론에서 대서특필하고, 코치와 감독님도 “빙그레 때 준우승만 했는데 이제야 우승한다”면서 감격해 우시는 걸 보니까 ‘참, 이런 게 우승이구나’ 싶었다.
1999년 8월 29일 잠실야구장에 2만 8천624명의 관중이 몰렸다. 한국시리즈 5차전을 보려는 팬들로 경기 전부터 장사진을 이뤘다. 당시 한화가 3승1패로 롯데에 앞서 있었다. 그러나 이날 8회까지 롯데에 2대 3으로 지면서 시리즈 전적이 3승2패가 되는가 했다. 하지만, 9회 초 한화가 2점을 내며 4대3으로 극적인 역전에 성공했다. 9회 말 한화의 마무리 투수로 당신이 등판했는데. 9회 말 2사 2루. 자칫 동점을 허용할 수 있는 위기에서 롯데 1번 타자 박현승과 만났다.
대전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그 선수(박현승)한테 2루타를 맞으며 졌다. 공교롭게 5차전에서 다시 만났는데, 그땐 무조건 바깥쪽으로 승부를 겨룬다는 작전이 세워져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그 선수 앞 타자가 1루 주자를 2루로 보내려고 희생번트를 대지 뭔가. 2사 2루가 됐지만, 속으로 희생번트를 대줘 정말 고마웠다.
고맙다니?
희생번트를 잡으면 일단 아웃카운트 하나를 늘릴 수 있다. 아웃이 많은 게 투수가 수 싸움을 하기엔 훨씬 더 편하다. 결국, 박현승과의 대결 때 바깥쪽 속구만 던지다가 2루수 땅볼로 잡고 한국시리즈를 끝낼 수 있었다.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포함해 당신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을 택하라면, 어떤 순간들을 꼽겠나.
먼저, 1989년 푸에르토리코에서 열린 대륙간컵대회에 한양대생 신분으로 출전했을 때가 기억난다.
그 대회에서 우수투수상과 평균자책상을 받지 않았나.
그것도 그거지만, 그 대회 일본전에서 아마 나 혼자 10회까지 던졌을 거다. 일본은 노모 히데오가 4회부터 나와서 10회까지 던지며 탈삼진을 엄청나게 많이 잡았고. 노모가 그 정도로 잘 던지는 투수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나중에 노모의 투구폼에서 영향을 받아 투구폼을 바꿨다. 노모의 투구폼대로 발을 뒤로 돌리면서 던지니까 힘을 더 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 경기에서 일본에 이겼나.
아니 졌다. 2대 3으로.
![]() 기적처럼 동메달을 따냈던 2000년 시드니올림픽(사진=대한야구협회) |
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메달 결정전도 당신 야구인생에선 빼놓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살면서 그때 생각을 많이 한다. 주위 선수들한테도 시드니올림픽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는 편이고. 지금이니까 말하지만, 미국과의 준결승을 앞두고 왼팔에 담이 걸려 투구할 때 팔이 들리지 않는 건 기본이고,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당시 대표팀 코칭스태프에 그 같은 사실을 알렸나.
당시 김응룡 대표팀 감독님께 “도저히 등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하고 보고드렸다. 김 감독님도 “일단 쉬어라”라고 하셨다. 아, 그런데 당시 대표팀 투수코치님이시던 김인식 두산 감독님은 나더러 “왼팔을 꼭 풀어서 미국전 때 무조건 던지라”라고 하시는 거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도저히 안 됩니다. 숨쉬기도 어려울 정도입니다.”하고 말씀드려도 “(팔을) 풀어봐라, 풀어봐라”하고 막무가내였다(웃음). 결국, 내가 “캐치볼은 해보겠는데 그래도 팔이 좋지 않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하고 중재안을 냈다.
캐치볼을 해봤더니 팔이 풀렸는가.
천만에.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뭐라던가.
야단을 치시더라. “왜 안되냐. 그걸 못 참느냐”면서(웃음). 사실 당시 김 감독이 두산에 계셔서 내 성향을 잘 알지 못하셨다. 난 정말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웬만한 건 그냥 참고 던지는 스타일이다. 내 입에서 “도저히 안 됩니다”란 하소연이 나올 정도면 그땐 정말 좋지 않은 상황이었던 거다.
믿을 구석은 김응룡 대표팀 감독밖에 없었는데.
미국과의 준결승전에서 지고 나서 도핑테스트 때문에 숙소에 좀 늦게 도착했다. 새벽 4시께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숙소에 도착하니까 대표팀 트레이너하고 김응룡 대표팀 감독이 기다리고 계셨다.
지친 당신을 위로해주려고?
무슨. 김 감독님이 트레이너를 바라보면서 “얘, 내일까지 팔 돌아오게 만들어놔”하고 명령을 내리셨다.
이런.
그때부터 새벽 6시까지 트레이너가 내 팔을 주무르다가 피를 뽑고, 다시 주무르다가 침이 달린 파스를 붙이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담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참, 침 달린 파스는 그때 처음 써봤네. 하여튼 그 침 달린 파스를 붙이고 잤다가 일어났더니 신기하게 팔이 조금 올라가지 뭔가. 그래도 일본전 선발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밖에 나갔던 트레이너가 들어오더니 날 보면서 갑자기 ‘씩’ 웃지 뭔가.
왜 웃었을까.
“대성아, 네가 내일 일본전 선발이란다”하면서 웃었다.
그 웃음이 당신에겐 담벼락에 박힌 병 조각처럼 가슴을 찔렀을지 싶다.
왜 아닌가. 속으로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러다 “집에 전화 한 통화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서 한국으로 전활 걸어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내와 대화를 하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아내에게 “일단 던질 수 있을 때까진 온 힘을 다해 마운드에 서 있겠다”고 약속했다.
일본과의 동메달 결정전에 등판했을 때, 아내와의 약속한 것처럼 온 힘을 다해 투구했다.
처음엔 ‘영’ 팔이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공을 계속 던지다 보니까 숨 쉬는 것도 괜찮고, 팔도 잘 돌아가기 시작했다. 4회 때까지 70% 힘으로 던졌다면 그 이후로는 70, 80%의 힘으로 던졌다. 그런데 그렇게 힘 빼고 던진 공이 일본 타자들을 공략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 오릭스 시절의 구대성. 2002년 후반기부터 탈장과 왼쪽 어깨 탈골 그리고 허벅지 수술 등으로 시달려야 했다. |
그 경기 이후로 명실 공히 ‘일본킬러’란 별명을 달고 살았다.
난 ‘일본킬러’란 별명이 좋았다. 별명이란 게 아무한테나 붙여지는 건 아니지 않나. 잘하고 있을 때나 붙여지지. 음, 돌아보면 희한하게도 일본전 때는 한가운데로 공을 던져도 잘 맞질 않은 것 같다(웃음)
‘일본’이란 역사적 특수성이 당신의 호투를 이끌어낸 배경은 아니었을까.
일본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은 늘 강했다. 한·일전은 뭐든 시청률도 상당히 높지 않나. 물론 일본과의 역사적 앙금도 남아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의 경기 때보다 열심히 한 건 사실이다.
과거 당신은 “일본전은 1점 차로 이기는 게 가장 좋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무슨 뜻인가.
두 나라 경기 가운데 점수 차가 많이 났던 승부도 있다. 그러나 한국이 점수를 많이 내 일본을 이긴 경기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후배들한테 항상 하는 소리가 있다. “일본을 상대로 3실점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길 확률이 높다”는 거다. 실제로 3실점 이하였을 때 한국이 거의 이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1점 차 정도면 우리가 지고 있어도 언제든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 점수고. 뭐랄까. 굳이 한·일전이 아니더라도 1점차 승부는 굉장히 짜릿하고 흥분되는 경기이지 싶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그해 정규리그에선 6승7패 21세이브 평균자책 2.77을 기록하며 한화 마운드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해 시즌이 끝나고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로 전격 진출했다. 사실 선수신분조회요청이 들어온 건 미 메이저리그가 먼저였다. 일본프로야구에서도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스 등 명문팀이 당신을 주목했는데. 최종 행선지는 오릭스 블루웨이브(현 오릭스 버펄로스)였다.
저마다 끌리는 팀이 있잖은가. 내겐 오릭스가 그랬다. ‘이 팀의 뭔가가 날 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가 끌려도 프로선수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역시 돈이다. 오릭스가 끌리는 팀이긴 했겠지만, 몸값은 다른 팀보다 낮았다.
물론 프로는 돈하고 관계가 깊다. 그러나 어느 때는 돈보다는 자신의 명예가 더 소중할 때도 있다. 그리고 경기 출전을 보장받는 곳을 우선할 때도 있는 것이고.
등판 기회의 보장이라면 역시 오릭스가 유리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조용히 고갤 끄덕이며) 맞다.
직접 경험해보니 일본프로야구는 어떻던가.
난 좋았다. 한국과 이웃하면서도 여러모로 느낌이 좀 달랐다. 아침까지는 한국과 거의 비슷한데 구장에 도착했을 때부터는 선수들의 자세가 한국선수들과는 180도 달라진다. 뭐랄까. 일본 선수들은 자신 있게 뭐든지 집중하면서 온 힘을 다한다고나 할까. 확실히 한국프로야구선수들보다는 준비자세나 정신력이 한 수 위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일본 킬러’라는 별명이 일본에선 되레 독이 됐을 수도 있는데.
독? 전혀! 오히려 일본전 때 잘한 기억 때문인지 더 유명했고, 팬들이 내게 거는 기대도 더 컸다.
대성불패, 또 다른 모험을 찾아 미국으로 떠나다
![]() 구대성은 미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짧은 시간을 머물렀지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투수로 꼽히고 있다. |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일본에서 4년 동안 뛰며 통산 성적 24승34패 10세이브 평균자책 3.86을 기록했다. 이제 한국으로 복귀하나 싶었는데, 2005년 1월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 유니폼을 입었다.
어렸을 때부터 미국에서 꼭 한번 야구를 하고 싶었다. 그러다 2004년 오릭스 스프링캠프에 뉴욕 양키스 스카우트가 찾아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번 미국에서 선수생활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뭐라고 대답했나.
나도 “하자!”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양키스는 내 영입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첨예하게 대립한 상태였다. 결국, 양키스행은 좌절되고, 메츠와 계약했다.
당시 당신의 나이 36살이었다. 도전하기엔 다소 늦은 나이일 수 있었다.
‘아직은 할 수 있다’란 생각으로 미국까지 왔는데 막상 도착하니까 ‘아, 내가 너무 늦게 왔구나’하는 생각이 든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나. 엎질러진 물 아닌가(웃음).
2005년 4월 5일 신시내티 레즈전에서 첫 홀드를 기록했다.
변화구 위주로 던진 게 통했다. 메이저리그는 잘 치는 타자들을 제외하곤 예상 외로 변화구에 약한 타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경기에서 3구 삼진으로 잡은 켄 그리피 주니어(시애틀)는 메이저리그의 잘 치는 타자 가운데도 톱타자였다.
그땐 켄 그리피 주니어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냥 던지다 보니까 삼진으로 잡은 거지 뭐(웃음).
‘구대성’하면 2005년 5월 22일 뉴욕 양키스와의 인터리그 전을 빼놓을 수 없다. 그날 당신은 ‘광속구’ 투수 랜디 존슨으로부터 2루타를 친 뒤 다음 타자의 보내기 번트 때 홈까지 파고드는 적극적인 주루를 펼쳤다.
간혹 “어떻게 랜디 존슨 공을 쳤느냐”고 물으시는데 내가 뭐 공을 보고 쳤겠는가.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하고 휘둘렀는데 운 좋게 맞아서 안타가 된 거지. 주루도 비슷하다. 그때 난 인상 깊은 플레이를 한 게 아니라 미친 짓을 한 거다. 포수가 번트 타구를 잡으려고 홈을 비웠기에 치고 들어간 건데, 타이밍은 아웃이었지만, 홈경기라 심판이 세이프 판정을 내렸다. 다시 말하지만, 투수가 홈플레이트에서 그렇게 슬라이딩하면 안 된다. 정말 큰일 난다.
![]() 2005년 5월2일 인터리그 뉴욕 양키스와 뉴욕 메츠의 경기에서 구대성이 힙겹게 홈을 밟는 장면 |
당시 득점에 성공해 더그아웃으로 들어갔을 때 동료가 환호성을 치고 난리가 아니었다. 몇몇 선수와는 하이파이브 대신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이는 동양식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당시 메츠 선수들의 인간성이 정말 좋았다. 아시아인을 차별한다고 들었지만, 정작 난 차별받는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그 선수들은 나와 친해지려고 이야기도 많이 걸고, ‘메이저리그에선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식의 조언을 자주 들려줬다. 특히나 ‘ET'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라커룸에 권투장갑이 있어 그걸로 흑인선수들과 권투도 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마르티네스의 별명이 ‘외계인’이라 ‘ET'라고 부른 건가.
아니다. 그 친구 손가락 끝이 타원형이 아니라 이렇게 넓적하고 동그랗다. 웃옷을 벗으면 배가 엄청나게 나오기도 해서 ‘ET'라고 불렀다.
양키스전에서 보인 ‘투혼의 주루’가 결국엔 메이저리그를 떠나는 빌미로 작용했다.
슬라이딩하고 나서 어깨를 보니까 멍이 들어 있었다. 그 이후로 이상하게 내림세가 시작됐다. 하지만, 어깨 타박상 때문에 메이저리그에서 떠났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저 내가 부족했기 때문에 내림세를 탄 게 아닐까 싶다.
유년시절부터 꿈꿔왔던 메이저리그였다. 단, 1년만 머물고 떠난다는 게 몹시 아쉬웠을 법도 하다.
분명히 아쉬움은 있었다. 과거 날 스카우트하려던 메이저리그 단장이 “1년 더 도전해보지 않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1년 더 도전하지 그랬나.
마음 한편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던 모양이다. 솔직히 내 공으론 미국보단 한국에서 야구를 하는 게 낫다 싶기도 했고. 그런데 재미난 게 뭐냐면. 2006년 한국으로 돌아와서 공을 던지는데 구속이 미국에 있을 때보다 ‘확’ 뛰었지 뭔가. 스피드건이 미국이랑 한국이랑 다른 건지(웃음). 속으로 ‘미국에 있을 때 이 구속이 나왔으면 1년 더 도전했을 텐데’하고 말았다.
상투적인 질문 하나 하겠다. 한·미·일 3개 나라 야구를 모두 경험했다. 한국야구와 미·일야구는 어떤 차이가 있던가.
일본을 힘보다는 기술의 야구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힘은 한국보다 일본선수들이 훨씬 좋은 것 같다. 그러니까 힘과 기술 모두 좋은 편이다. 미국은 그런 일본보다 힘이 더 세고, 정확성도 더 높다고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내 마운드의 중심은 가족"
![]() 구대성은 마운드에 입을 맞췄고, 마운드는 그에게 자유를 줬다(사진=한화) |
당신이 전성기를 달리던 1990년대엔 수준급 왼손투수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2010년엔 리그를 지배하는 투수 대부분이 왼손투수다.
한국야구 수준이 높아졌다는 의미다. 수준급 왼손투수들이 더 많이 나올수록 메이저리그와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하는 우리 선수들이 더 늘어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세계야구 수준도 비슷해지지 않겠는가. 팬들도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그만큼 수준 높은 경기를 보실 수 있으므로 절대 나쁘지 않은 현상이라고 본다.
국내 최고의 왼손투수로 불리는 류현진은 어떤가. 대선배로서 볼 때마다 흐뭇한 감정을 느낄 듯한데.
(고개를 끄덕이다가) 보면 흐뭇하긴 한데 ‘애’는 아닌 것 같다. 나이는 어리지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거 보면 ‘애’는 확실히 아니다. 야구할 때 공 던지는 거 보면 진짜 한 50살 된 어른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확실히 (류)현진이는 장난칠 때와 진지할 때를 구별할 줄 아는 선수다.
당신이 류현진에게 서클체인지업을 전수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내가 가르치긴 했지만, 현진이는 내가 가르치지 않았어도 분명히 어떤 선배를 쫓아다니며 새로운 구종을 배우려고 달려들었을 선수다. 사실 내가 잘 가르쳤다기보다 현진이가 배우고자 하는 의욕이 있고, 제대로 습득하겠다는 목표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금방 배울 수 있었던 던 것 같다. 현진이는 정말 머리가 좋고, 뭐든 습득력이 빠른 친구다.
류현진이 다가와 어떤 식으로 가르쳐달라고 했나.
나와 캐치볼을 할 때마다 계속 “체인지업을 어떻게 던지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현진이가 이야기하는 거 잘 들어보면 지가 우상으로 모시는 선배는 (송)진우 형이었다. 그게 생각나서 내가 “넌 왜 나한테 가르쳐달라고 하니. 네가 존경하는 진우 형한테 가서 배우지”하면서 좀 타박을 줬다. 그러다 하도 쫓아다니기에 결국 귀찮아서 체인지업 그립과 구사법을 알려줬다.
당신도 체인지업을 송진우에게 배우지 않았나.
1999년 시드니올림픽 본선 출전권을 놓고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일본, 타이완과 붙었다. 그때 난 속구만으로 일본 타선을 꽁꽁 틀어막았다. 왜냐? 그즈음 한창 진우 형한테 체인지업을 배우고 있긴 했는데, 완벽하게 던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주구장창 속구만 던졌던 기억이 난다.
설령 당신이 체인지업을 습득했다고 해도 당시 투구패턴이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진 않다. 항상 정면승부를 했을지 싶은데.
나는 고의사구를 제외하곤 무슨 일이 있어도 타자와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정면승부해서 잡는 거. 그게 투수라고 생각했다. 안타가 두려워 피해간다면 내가 아는 한 그건 투수가 아니라 야수다.
모든 이가 당신처럼 배짱이 천성적으로 타고난 건 아니다.
잘못 안 거다. 난 배짱이 별로 없다. 그저 공 던질 때만 씩씩할 뿐이다. 다른 분야에선 배짱이 없다고 생각한다.
![]() 구대성의 투구폼은 노모 영향이 컸다. 그러나 이제 노모나 구대성이나 모두 '추억의 선수'가 됐다. |
가족 사랑이 끔찍하다고 들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메달을 땄을 때도 수상소감을 뒤로하고 “집에 전화를 걸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안다.
아, 그땐 정말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9회까지 던지면서 2리터짜리 생수 3통을 계속 마셨는데 화장실 한번 다녀오지 못했다. 생각해보라. 거기다 긴장은 긴장대로 했지. ‘집에 가서 푹 자고 싶다’란 의미로 이야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휴대전화가 있으면서 번호를 다른 이에게 가르쳐주지 않는 것도 특유의 가족사랑 때문이라고 하던데.
난 예전부터 동료 선수끼리 휴대전화로 '막' 통화하고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휴대전화는 가족들끼리 주고 받는 게 가장 좋은 것 같다.
당신에게 가족은 무엇인가.
난 ‘가족은 항상 같이 다녀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특히나 외국에 갈 땐 나 혼자 가는 것보단 가족과 동행하는 편이 서로 의지가 되고 좋다. 안 좋은 일이 있을 땐 서로 감싸주고 기쁜 일이 있을 땐 같이 기뻐해 주는 것도 가족밖엔 없다. 내겐 가족이 가장 큰 힘이 된다. 경기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이들을 보면 ‘내일은 더 잘해야겠다’는 책임감도 들고. 더 힘이 났던 것 같다.
지금까지 어떤 마음으로 현역생활을 이어왔나.
그저 ‘열심히 하자’는 생각만으로 살아왔다. 부상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난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때까지 열심히 하면 된다고 믿어왔다. 개인적으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당신 같은 대투수도 롤모델이 있었을지 싶다. 당신의 롤모델은 누구였나.
한국만 놓고 보면 박철순 선배님, 전 세계 야구를 보면 놀란 라이언이었다.
두 이는 공교롭게도 오른손 투수다. 당신과는 인연이 별로 없는데, 어째서 두 선수를 롤모델로 삼은 건가.
두분 모두 던질 때 보면 폼이 정말 멋있지 않았나(웃음).
![]() 구대성의 등번호를 이어받는 유창식. 그는 과연 구대성의 재림이 될 수 있을까(사진=한화) |
이제는 당신이 누군가의 롤모델이 됐다. 당신을 롤모델로 삼는 유소년 야구선수나, 아직 자신의 기량을 만개하지 못한 2군 선수들에게 조언 한마디 해달라.
‘재밌게 야구하라’고 말하고 싶다. ‘야구가 지겹다’고 느끼는 선수는 지도자가 시키는 것만 한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알도록 하라’는 것도 그렇다. 하나라도 제대로 아는 게 중요하다. 그러려면 하나를 알더라도 재밌게 해야 한다. 중학생 야구부원이든 성인 야구선수든 꼭 즐거운 마음으로 야구를 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지막이다. 이제 당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팬들과 작별인사를 고할 때다.
지금까지 많이 응원해주시고, 역시 많은 경기를 봐주시고, 저와 희로애락을 함께 해주신 팬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있었기에 제가 지금까지 야구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오니까 그 선수들의 팬이 돼주시고, 계속 야구를 사랑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마지막이다. 별명이 많다. 그 가운데 가장 선호하는 별명이 있다면 그게 무엇인지 물어봐 달라는 팬이 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역시 ‘대성불패’다. 뜻보다는 그 별명이 가장 먼저 붙여진 별명이었기 때문이다. 그 별명이 붙던 그 당시 초심을 살면서 절대 잊지 않도록 하겠다.
이름 : 구대성(具臺晟)
생년월일 : 1969년 8월 2일
체격 : 183cm / 85kg
이력 : 대전고-빙그레-오릭스-뉴욕 메츠-한화
프로입단 : 1993년
통산성적 : 개인통산 569경기 등판, 67승 71패 214세이브 평균자책 2.85
수상이력 : 1996년 다승, 구원, 평균자책, 승률 1위. 1996년 정규시즌 MVP. 2000년 평균자책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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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이제 대성불패가 최고임을 인정하시는군요^^
정민철이 최고죠 ㅋㅋ 아 왜이러심~~
@정민철의후예(92정민철) 헉! 아직도!
@빽차 빽차님이 올려주신 정민철 전성기때의 구위를 자세히 보시면 답이 나오는거같습니다 ㅎㅎ
@정민철의후예(92정민철) 전 구위를 판단할 수준이 안되서요 ㅡㅡㅋ 암튼 후예님의 정민철 사랑은 대단하십니다~~
이거보고 더 확실해졌어요. 쿠옹은 섹시한 남자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