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타락 ,구속
1. 세계관이란무엇인가?
인간은...세계관의 인도를 받지 않고는
살수 없는 존재다.
세계관을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
첫째로, ‘사물들’이란 말은 의도적으로 선택한 애매한 단어로서 우리 신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지칭
둘째로, 세계관은 개인의 신념의 문제다. 신념은 ‘지적 주장’ 즉 일종의 지식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감정이나 의견과는 구별된다. 세계관은 한 개인의 확신과 관련된 것이다.
셋째로, 세계관이 사물들에 관한 근본적 신념과 관계가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하여 가지는 근본적 신념들은 하나의 를이나 유형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 즉 그것들은 일정한 방식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은, 자기의 세계관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하나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세계관을 갖는 것은 성인으로서의 삶의 한부분이다.
세계관의 역할
우리 삶을 인도하는 기능
인간의 행동 양식에서 주도적이고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신념이 삶의 결정적인 요인
세계관과 성경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을 분별하려면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성경에 비추어 우리의 세계관을 점검하고 수정하
는 일이야말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의 한 부분이다.
성경적 세계관에 대해 주장한 내용의 핵심이란, 성경과 그 가르침을 소위 ‘종교적인’ 영
역으로 제한시키지 말고 바로 지금의 문화 전체와 연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관과 신학 및 철학의 관계
세계관은 그것이 성경적이든 비성경적이든 간에 지혜나 상식의 문제다.
개혁주의 세계관의 특징
2. 창조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만드셨다.즉 그분의 관심 밖에 있는 영역은 이 세상에 없다.
창조의 법
창조 세계 전체에 대한 그분의 보편적인 법에 속한다.
창조의 범위
하나님의 규례는 사회 구조와 예술의 세계, 사업과 상업 영역에까지 미친다.
창조를 통한 계시
우리는 창조의 법을 창조된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의 총체라고 규정했다. 이 주권적 행위에는 창조 세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가 포함되어 있는데 전통적으로는 이것을 ‘일반 계시’라고 부른다. 창조의 법은 계시적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작품을 통해 밝히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곡해하여 듣는다. 그러나 사람의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창조 세계를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의 일부는 사람에게 도달한다.
정의와 신실성, 청지기직과 경외에 대한 창조 규범을 하나님이 분명한 언어로 주신 적이 없더라도, 사람들은 규범적인 행동 기준에 대한 직관적인 감각을 갖고 있다. 창조 규범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음을 표현하는 한 단어가 양심이다.
이 잠언들은 주로 일상 생활에 필요한 실용적인 지혜를 다루는데, 이는 가정 생활, 농사, 상업, 경영 등의 영역에서 창조 질서를 존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성에서 나온 지혜다. 잠언의 지혜는 창조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낳은 열매다.
우리의 분별 능력을 회복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 능력을 과소평가한다.
성경에서 명시적으로 인도하는 것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에게는 ‘영적 지혜와 총명’이 필요하다.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이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분야에 종사하든 상관없이 그리스도인들(경영인, 농부, 학자, 정치가, 교육가, 주부, 법률가)이 자신의 사적인 생활뿐 아니라 공적인 활에서도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유명한 권고를 기억해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성경의 빛 속에서만 창조 세계의 규범성을 가장 잘 분별할 수 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창조의 발전
이제부터는 땅의 발전이 본질상 사회적이고 문화적이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앞으로
해야 할 임무는 문명의 발전이다.
‘창조 명령’은 성경 계시의 전 역사에서 근본적인 중요성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 :28)
창조 세계란 한 번 만들어진 다음에 고스란히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 세계가 원초적 과거에서 종말론적인 미래로 발전하는 것을 가장 적절하게 상징하는 것은 성경이 동산에서 시작하여 도시 즉 ‘민국의 영광과 존귀’로 가득한 도성으로 끝난다는 사실일
것이다.
선한 창조
자기들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책임을 자기 자신의 반역에 돌리기보다 창조 세계의 어떤 측면에 (따라서 함축적으로는 창조주에게) 돌리려는 태도가 아담의 후손들에게 깊이 뿌리박힌 악한 성향이다.
인본주의는 법을 자유의 부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법을 자유의 조건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법’이란 먼저 창조의 법 즉 세계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지히I가 정한 질서를 의미하지만, ‘실정법’ 즉 창조의 규범들이 국가, 교회, 가족, 결혼, 예술, 산업의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실정된 법도 포함한다.
3. 타락
이 세상은 선하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확실히 잘못되었다.
우리는 앞에서 세계관을 설명하면서 창조, 타락, 구속이 개혁주의 세계관의 핵심임을 강조하였다
타락의 범위
죄의 영향은 창조 세계 전체에 미친다. 창조된 사물 그 어느 것도 원칙상 타락의 파괴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든사람은 위에 언급된 모든영역에서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구별해야 한다고 직관적으로 느낀다.
구조와 방향
구조는 창조의 질서 즉 어떤 사물의 불변적 창조 구조 혹은 그것으로 하여금 그 실체가 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한때 완전히 선한 창조가 존재했던 적이 있었고, 장차 그런 날이 다시 올 것이다. 그래서 창조 세계의 회복은 불가능하지 않다.
창조의 법은 죄와 그것이 낳은 악을 억제함으로써 우리의 보금자리인 지구의 완전한 파멸을 방지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향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창조 구조를 통하여 우리에게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시는 분이다.
왜곡된창조 세계로서의 ‘세상’
그리스도 밖에서 죄의 지배를 받는, 구속받지 못한 삶의 총체’를 가리킨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은 죄로 오염된 세계의 총체 선한 창조와 대립되는 그 무엇
성경은 창조의 변질과 왜곡을 지칭하기 위해 여러 가지 단어를 사용한다. ‘세상’ 외에도 성경은 ‘허망함’, ‘부패’, ‘속박’과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
창조 세계의 모든 영역이 구속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울부짖게 되었다.
4.구속
하나님 나라는, 본래 존재하는 것에 새로운 생동감을 불어넣는 ‘회복’ 이다.
우리는 창조의 개념이 그리스도인이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라는 점과 인류의 타락이 그처럼 폭넓은 창조 세계의 모든 구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 모든 과정은,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구속이 창조 세계의 모든 영역을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우주적이라는 점을 주장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회복으로서 의 구원
하나님의 땅을 관리하는 관리자로 재임용된 것이다. 본래의 선한 창조가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구속의 유일무이한 초점은 회복이다.
구속의 범위는 타락의 범위만큼 넓고 모든 창조 세계를 포괄한다.
개혁주의 세계관의 독특한 특징은 죄와 구속 모두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아담에 속한 인류는 우주를 타락시키지만, 그리스도께 속한 인류는 그것을 새롭게 만든다.
창조 세계를 구분하는 어떤 비가시적 경계선도 구속, 구원, 성화, 새롭게 됨, 하나님 나라와 같은 성경적 개념의 적용범위를 제한하지 못한다.
모든 곳에서 창조는 하나님의 표준이 존귀하게 여겨지기를 요구한다.
하나님의 나라
구원이 창조의 회복이라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더욱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먼저 나라라는 단어의 의미를 분명히 하자. 보통 ‘나라’로 번역되는 헬라어 ‘바실레이아’의 일차적 의미는 ‘왕권’ 즉 ‘주권’, ‘통치’, ‘지배’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사역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창조 세계의 회복을 의미함을 분명하게 입증한다.
그리스도의 병 고침의 사역 즉 회복의 사역은, 타락한 창조 세계에 그 나라가 침투했음을 나타낸다.
성경적 신앙은 역사적으로 진보적이며, 결코 반동적이지 않다.
그것은 인류 역사를 동산에서 도시로 가는 움직임으로 보며, 근본적으로 그런 움직임을 긍정한다.
다른 견해들과의 비교
그 나라의 범위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세계관을 보여 주는 지표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나라의 범위를 제한하려는 뿌리 깊은 성향이 있는데, 이것은 세상을 성스러운 영역과 속된 영 역으로 나누려는 끈질긴 속성과 비슷하다.
이러한 제한적 속성을 보여 주는 가장 일반적인 예는 경건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경건주의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개인적 경건의 영역, 즉 영혼의 내면생활로 국한한다.
누가복음 17:21 을 “보라,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라고 번역하기보다 “너희 안에라고 번역하기를 선호한다. 인간사가 두 영역으로 나뉘어 있음을 암시하는, ‘교회와 세상’ 이라는 잘못된 관용구를 만들어 냈다.
이에 반하여, 세대주의자들은 그 나라를 종말론적 미래로 국한한다. 그들에게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천년 왕국이 속히 임하옵시며” 라는 뜻이다.
성경은 매우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파악한다. 하나님과 사탄 모두 어떤 중립적인 지대나 분쟁 초월 영역을 남겨 두지 않고 창조 세계 전체에 대해 자기 권한을 주장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도표는, 대립이 두 영역 사이가 아니라 두 통치 사이에 있는 표 3과 같다.
창조 세계를 선한 것과 나쁜 것으로 범주화하려는 유혹은 마땅히 제지되어야 한다.
구속은 죄를 무효화하고 모든 곳에 미친 죄의 영향력을 점진적으로 제거하려는 노력을 통해 창조 세계의 선함을 회복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창조로 돌아가는데, 이는 오직 속죄만이 죄와 악을 그 뿌리에서부터 효과적으로 다룰수 있기 때문이다. 마가는 대위임령을 “모든 창조 세계에 복음을 파하라”(막 16:15, 역자 번역)고 적고 있는데, 이는 죄로부터의 자유함이 모든 곳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세계관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요약할 수 있다.
첫째,창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둘째, 타락은 창조 세계에 한 구석도 빠짐 없이 철저히 영향을 끼친다.
셋째,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은 타락만큼이나 그 범위가 넓다. 창조의 지평은 동시에 죄의 지평이며 또한 구원의 지평이다. 타락 혹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창조세계 전체를 포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타락의 철저한 성격과 구속의 우주적 범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적당히 타협하는 것과 같다.
5. 구조와 방향의 구분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이, 우리의 예리한 분별과 실천을 통한 갱신을 간절히 기다린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물들은 피조물이며, 죄의 저주 아래 있으며, 구속을 갈망하고 있음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구조란 창조된 사물의 ‘본질’즉 하나님의 창조의 법에 의해 창조된 사물을 말한다. 그와
방향이란 범죄로 인해 그 구조적인 규례로부터 일탈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 그 구조적 규례에 다시 순응하는 것을 말한다.
개혁의 의미
첫째, 개혁은 성별이 아니라 성화를 의미한다. . 성화시킨다는 말은 ‘죄로부터 해방시킴, 도덕적 부패로부터 깨끗케 함, 정화시킴’을 의미한다.
성별은 외적인 갱신을 의미하고 성화는 내적인 갱신을 의미한다. 개혁이라는 말은 내적인 재생으로서의 성화를 가리키는 단어다.
모든 분야에서 역사적 개혁, 즉 창조된 실재들을 죄와 죄의 모든 영향력으로부터 성화시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창조 때에 형성된 것이 역사적으로 죄에 의해 왜곡이 되었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다.
창조 때에 형성된것이 역사적으로 죄에 의해 왜곡되었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다.
첫째로, 개혁은 폭력(신체적, 심리적인 힘)을 가함으로써 개인에게 해를 끼친다는 일상적인
의미에서나, 사회 구조를 비틀고 뒤집어 엎는 역사적인 의미에서 나)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둘째로, 개혁은 (이 점이 매우 중요한데) 주어진 어떤 사회 질서도 절대적으로 부패했다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사회 질서도 전적으로 정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셋째로 그
개혁은 어떤 과학적인 혹은 유사 과학적인 사색에 의해 도달한 이상적 사회의 청사진이나 개념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개혁은 주어진 역사적 상황을 개혁의 출발점으로 삼으며,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살전 5:21)는 사도의 명령을 따르고자 한다.
구조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혁명에 동조할 수 없으며, 방향에 초점을 맞출 때 무사안일의 보수주의를 반대하게 된다.
개혁주의적 비전에 의해 고무된 사회 참여 프로그램은 절대로 영에서 출발하지 않으며 백지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언제나 당면한 역사적 상황의 어떤(선한) 요소들을 구출하려고 노력한다.
성별은 사물의 내면을 건드리지 않고 혁명은 사물을 제거하는 데 비해, 개혁은 그것을 갱신하고 성화시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삶의 모든 부분을 깨끗케 하고 개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