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
사탄은 우리를 유혹할 때 하느님의 명령보다 개인의 경험에 근거해 결정하라고 유혹한다. 사탄은 믿음의 유산과 성경의 유산에서 우리를 단절시키려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단번에 바보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에제키엘이나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가 했던 일이 무엇인가?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일이었다. 그들은 백성에게 열심히 믿음의 고리를 잇는 작업을 했다.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인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전달하는 일인가? 아니다. 그것은 조상 적부터 믿었던 믿음을 전파하는 일이다. 잃어 버렸던 본질을 뿌리와 연결시키면 살아날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근본을 지킬 줄 아는 거룩한 믿음의 종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쓰러지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마지막 시대, 변화무쌍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세상은 날마다 변한다. 그러나 이렇게 변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우리가 붙들어야 할 근본이 있다. 바로 변하지 않는 복음이다. 변하지 않는 것을 붙들 때에 우리는 쓰러지지 않는다.
20일
자기훈련
「감성지능」이란 책을 쓴 대니얼 골먼은 이렇게 말했다.
“감정이란 전염성이 있다. 만일 누군가가 화를 풀지 못한 채 회의장에 들어왔다면, 그 사람의 감정이 회의장에 있는 사람에게 급속하게 전파된다.”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이 방에 들어오면 방안의 모든 사람을 웃게 만들 것이다. 자기훈련이 되지 않아 자신을 잘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만나는 데도 문제가 있다. 자기훈련이 잘된 사람은 흥분상태에 있는 사람을 통제시킨다. 그러나 자기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은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
사람에게는 육신의 생각과 영혼의 생각이 함께 존재한다. 육신의 생각은 죽음이요, 영혼의 생각은 생명이다. 그러므로 나를 훈련시키는 연습을 통해 균형과 조화를 찾아야 한다.
21일
자녀는 선물
부모가 된다는 것은 나그네에게 좋은 주인이 되어주는 것과 같다. 우리는 자녀들이 우리와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자녀들이 우리와 얼마나 다른지를 발견하면서 끊임없이 놀란다. 우리는 자녀들을 창조하지 않았으며, 우리가 그들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다. 그들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 우리 자신을 책망할 필요가 없다. 물론 그들의 성공 역시 우리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수 없다. 자녀들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들은 환대를 요구하고 얼마 동안 좋은 친구로 지내다가 다시 여행을 떠나는 나그네와 같다. 그들은 엄청난 기쁨과 엄청난 슬픔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그들이 선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녀가 그의 삶을 위해 우리 곁을 떠날 때에 슬픔과 기쁨이 엇갈린다. 왜냐하면 이때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실제로 ‘우리의 것’이 아니라 참된 선물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맡겨졌었다는 것을 깊이 느끼기 때문이다. 특히 이 세상에서 자녀들에게 자유를 허용하기는 너무도 어렵다. 우리는 모든 위험에서 그들을 보호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그들은 하느님께 속해 있다.
22일
용서
헤밍웨이의 소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스페인인 아버지가 집을 나간 아들과 화해하기로 다짐한다. 아버지는 뒤늦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신문에 광고를 낸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파코는 스페인에서 아주 흔한 이름이다. 아버지가 약속 장소에 나가자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무려 800명이나 나와서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원하고 용서를 기다리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용서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축복은 하느님의 용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하느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90%는 순종이며, 사람에 대한 사랑의 90%는 용서다.
23일
저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
칼 마르크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게으른 철학자들은 단지 세상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해석하기만 한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문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공산주의와 그리스도교 세계관은 일치점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세상을 해석의 차원이 아닌 변화의 차원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변화가 중요하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복음의 힘으로 변화되기 가장 힘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오래 묵은 신자들이다. 이들 영혼의 각질은 너무나 두꺼워서 말씀이 쉽게 도달되지 않는다. 성경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교회 좀 오래 다녔다고 하는 사람들만이 범할 수 있는 무서운 죄가 있다. 기존 신자들만이 범할 수 있는 죄, 그것은 바로 의인의식이다.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을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고 남에게만 적용하는 죄다.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죄와 무관하다고 여긴다. 그것은 죄인들을 향한 말씀이지, 자신을 향한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회개가 없다 보니 믿음 자체가 덤덤한 신앙생활, 용서의 은총이 임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나 말씀은 나를 향한 말씀과 나를 변화시키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
무엇이 축복인가? 말씀을 들을 때 회개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 축복이다.
24일
좋은 교회
조그만 시골의 이발사인 존은 다른 주에다 더 큰 이발소를 차리게 되었다. 존의 식구가 이사하기 전 교회에서는 송별회를 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축복하였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존은 다시 돌아와 그의 이발소를 열었다. 아마도 큰 곤경에 처했던 것 같았다. 존은 다시 가위질을 하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 큰 도시에 글쎄 교회도 주일학교도 없지 뭡니까? 사람들은 돈벌이와 도박, 술 먹는 데 너무 바빠서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더라고요. 주일이 되어서 아이들을 보낼 주일학교가 없으니 어쩝니까? 난 그래서 돌아온 것이랍니다.”
좋은 교회에서 온가족이 함께 자기의 은사에 따라 하느님을 섬기며 사는 것은 그리 흔한 복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자녀교육이나 직장에 따라 이사를 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자기와 자기 가족의 신앙을 생각하여 이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25일
하느님의 주유소
자동차뿐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도 최상의 연료를 찾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세상의 주유소에서 연료를 채울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주유소에서 연료를 채울 것인가를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고 옥탄가의 영적 연료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그만둘 것인가의 선택에 따라 우리가 그리스도에까지 다다를 수 있느냐의 여부가 결정된다. 많은 사람들은 연료 탱크가 비어서 엔진이 꺼질 것처럼 보인다. 이런 사람들은 과거의 영적 경험이 고갈되어 유독 가스만 내뿜고 서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최근의 영적인 유행이나 최근의 프로그램이라는 값싼 대체물로 채우고 있다.
그렇다면 고 옥탄가의 영적 연료는 무엇인가?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 하느님의 말씀으로 채워지는 것,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채워지는 것, 하느님의 의로 채워지는 것, 하느님의 평화로 채워지는 것,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지는 것, 하느님의 능력으로 채워지는 것, 끊임없는 기도로 채워지는 것 등이다.
하느님의 주유소를 끊임없이 방문해야 한다. 연료 측정 눈금이 3/4, 1/2, 1/4 또는 E(Empty, 연료부족) 선상에 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위험하다. 오직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과 관련된 것들로 채워져 있을 때, 하느님 아닌 죄악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매일 하느님의 주유소에 차를 대고,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가득 채워 주세요!”라고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