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石嶺 (청석령에서)
三 韓 使 轍 幾 經 過 (삼한사철기경과) 사신들 행차 이곳을 지나기 얼마였던가
靑 石 嵯 峨 尙 不 磨 (청석차아상불마) 우뚝 솟은 청석령은 여전히 험악하여라
陰 雨 寒 風 何 日 盡 (음우한풍하일진) 차가운 비바람은 어느 날에 그치려는가
百 年 凄 咽 孝 宗 歌 (백년처열효종가) 백년전 효종의 구슬픈 노래에 목메이네
<어 휘>
三 韓 : 우리나라의 별칭
使 轍 : 사신의 행적, 사신이 다녀가다
靑 石 : 청석령의 줄임 말
嵯 峨 : 산이 우뚝 솟은 모양
陰 雨 : 구름이 끼어 비가 내림
凄 咽 : 쓸쓸히 목이 메임, 咽은 인/연/열 등으로 읽혀지는 데 여기서는 목이 메인다는 뜻을 취하여 ‘열’로
표기함.
孝宗歌 : 조선 17대 효종(孝宗) 임금이 봉림대군의 신분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 가며, 이 청석령을
지나면서 부른 고시조를 일컬음.
<효종가>
청석령(靑石嶺) 지나거다 초하구(草河口) 어디메뇨
호풍(胡風)도 차도 찰사 궂은 비는 무삼일고
뉘라서 내 행색(行色) 그려다가 님 계신데 드릴꼬
<지은 이>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자는 伯規(백규), 호는 樊巖(번암), 본관은 平康 (평강)이고, 시호는 文肅(문숙)
이다. 숙종 46년 (1720년) 4월 6일에 태어 나, 18세에 吳弼運(오필운)의 딸 同福吳氏와 혼인을 하고, 24세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합격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29세 11월, 특명으로 翰林召試(한림소시)에
나아가 수석하여 검열, 대교가 되었다.
31세에 성균관 전적, 병조 좌랑, 지평, 이조 좌랑, 정언, 부교리가 되었으며, 이듬 해 1월, 부인(夫人) 吳氏의
喪(상)을 당하였고, 7월에 三陟(삼척)으로 귀양가다. 34세 1월, 호서(湖西) 암행어사 (暗行御史)가 되고, 4월에
부수찬이 되었으며, 이듬 해 봄에, 북도평사(北道評事)가 되었다가 교리(校理)로 소환되어 書筵(서연)과 경연
(經筵)에 입시, 가을에는 수찬, 동학교수, 집의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39세 3월, 대사간, 이후에 좌승지, 한성 우윤, 도승지, 승문원 제조가 되고, 가을에는 도승지로 廢世子(폐세자)
의 하교가 담긴 備忘記(비망기)를 환납하였다. 41세 1월에 대사헌, 10월에는 다시 도승지, 12월에 京畿(경기)
관찰사(觀察使) 등을 거쳤다. 43세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이해 윤 5월에 폐세자(廢世子)의 명이 내렸음을 듣고
궐 아래로 나아가 부당함을 호소하였으며, 45세에 형조 참판, 대사헌, 승문원 제조가 되고, 이듬 해는 부친상을
당하였다.
51세에 약방 제조, 병조 판서, 예조 판서 등이 되고, 약방 직숙(直宿)의 공로로 崇政階(숭정계)에 올라 판의금,
호조 판서가 되었다. 공의 나이 58세에, 정조께서 등극하여 두터운 왕의 신임을 받으며 여러 고위직을 역임하
면서 임금을 보좌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여러 해 동안을 벼슬에 대한 사직 상소를 올리며 출사(出仕)와 사직을
되풀이 하다. 공의 나이 69세 2월, 御筆(어필)로 우의정(右議政)에 제수되고, 筵席(연석)에 올라 건황극(建皇極)
등 6事를 진달하였으며, 亂廛(난전)의 금지를 청하고, 中宗代 세 훈신(勳臣)을 黜享(출향)할 것을 獻議(헌의)하고, 서학(西學)을 불교(佛敎)의 별파(別派)라 비판하였다.
70세 耆社(기사)에 들었고, 9월에 좌의정이 되어, 이조 전랑(吏曹 銓郞)의 通淸權(통청권)을 혁파하도록 청해
윤허를 받았으며, 수원(水原)의 현륭원(顯隆園) 공사에 총리사(摠理使)가 되기도 하였다. 70세가 지나면서도
삼정승(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두루 역임하고, 71세부터 3년간은 혼자서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시행하였다. 79세 1월, 홍변(虹變)으로 인해 상차(上箚)하여 면직을 청하였고, 6월에 노병(老病)을
이유로 사직하였으며, 이듬 해 80세로 별세하였다.
공은 李滉(이황), 鄭逑(정구), 許穆(허목), 李瀷(이익)을 이은 南人(남인) 淸流(청류)의 영수로, 노소론(老少論)
간의 당쟁의 와중에서 蕩平(탕평)을 표방한 英祖와 正祖의 신임을 받았다. 특히 思悼世子(사도세자)의 보호에
앞장 선 것이 인정되어 正祖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신해통공(辛亥通共), 이조 전랑 통청권(通淸權) 혁파,
수원성역(水原城役) 등의 개혁 정책을 실행하였다.
공은 오랜 관직생활에서 다수의 詩와 疏箚(소차), 酬應文字(수응문자)들을 남겼고, 詩의 경우 丹丘錄(단구록),
望美錄(망미록), 載筆錄(대필록) 등 9개의 시록(詩錄)과 그 외의 詩들을 모아 自編(자편)해 놓았다.
正祖가 1791년에 저자의 詩文稿(시문고)를 乙覽(을람)하고 시를 짓기까지 했던 것을 보면 명덕산(明德山)과
鷺梁(노량) 등지에서 은거하던 60대 후반에, 그때까지의 시문들을 자편(自編)하는 작업을 하였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후 80세에 별세할 때까지의 시문도 그때 그때 정리, 편차하여 남긴 것으로 보인다. 공은 일생 동안에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두 임금을 섬기면서, 왕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역사에 훌륭한 족적을 많이
남기면서 후세에 까지 존경받는 어른이 되셨다.
위에 소개한 선생의 시는 칠언 절구 형식으로, 시인께서 청나라에 사신으로 오가는 길에 '청석령'이라는 험한
고개를 지나면서 지은 시이다. 이 청석령은 당시 조선에서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의 여정에 길목으로서, 예로
부터 많은 일화를 남긴 곳이기도 하다. 특히, 병자호란 직후에 왕자의 신분으로 청에게 인질로 끌려가던 봉림
대군(鳳林大君/ 후일의 효종)의 고시조가 유명하다.
시인도 비바람 몰아치는 궂은 날씨에 이 고개를 지나며, 이미 백여년 전에 있었던 옛날의 일을 회상해 보면서,
쓸쓸한 심정으로 이 시를 남겼다. 이시는 시인의 나이 59세(정조 2년)에 청나라로 사은사겸진주정사 (謝恩兼
陳奏正使)라는 긴 직함으로, 사신의 업무를 봉행(奉行)하던 시기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