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장 비장한 결심
곡철은 천천히 술잔을 들었다.
"서문형, 서문형은 수하가 많고 첩자가 많으니 근래 무쌍파의 동정을 알고 게시리라 믿고 있는데 내게 얘기해 줄 수 있겠소?"
서문조우는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곡대협은 대초원에 있는 일부의 무쌍파가 이쪽으로 원군을 보냈는지, 아니면 아직 소식조차도 듣지 못했는지 그걸 물어 보시는 모양이구료? 글쎄....... 난 잘 모르겠구료. 강형은 아시오?"
강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모르겠소. 여기서 대초원까지 가려면 적어도 이십 일이 걸리오. 그러니 설사 대초원 쪽에서 소식을 알고 달려온다고 해도 약 사십 일이 걸린다는 결론이 나오는 거요."
이어 그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비석산 싸움이 있은지 한 달이 지났으니 무쌍파에서 아무리 빨리 와도 앞으로 보름은 걸려야 올 수 있을거요."
곡철은 심각한 음성으로 침중하게 물었다.
"만약 대초원의 무쌍파가 준마만 골라 타고 철야로 달려 온다면 어떻겠소?"
강인은 입술을 꼭 깨물고 한동안 무거운 침묵을 지킨 다음 입을 열었다.
"만약 그렇다면 틀림없이 며칠 사이에 도착하게 될거요. 그런데 그들이 언제 소식을 들었는지가 의문이오."
서문조우는 술잔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
"곡대협, 대초원 무쌍파의 인마가 꼭 보복하러 올 것 같소?"
곡철은 거침없이 단정을 내렸다.
"꼭 올거요."
서문조우는 초조한 듯 연신 손바닥을 비볐다.
"그렇다면 또다시 혈전(血戰)이 벌어지겠구려. 흑수당의 사람들은 모두 성질이 난폭하고 잔인해서 절대로 도망하거나 피하지는 않을 거요. 그들은 분명히 무쌍파를 맞아 싸울텐데 그렇게 된다면 필시 홍의방이 협조할 것이고 또한 검은 수염도 구경만 하고 있을 리가 만무하니 대하진은 치열한 격전장으로 변하고 말거요."
곡철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오. 만약 천하 모든 사람들이 욕심이 없고 나쁜 감정을 버릴 수 있다면 천하는 이미 오래 전부터 태평세월을 누렸을 거요."
서문조우는 땅이 꺼질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곡대협, 대협도 비석산의 싸움에 참가했었소?"
곡철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참가 정도가 아니라 중상까지 입었었소."
순간, 강인의 얼굴에는 노기가 충전했다.
"흑수당 어느 놈이 곡대협에게 중상을 입혔소?"
곡철은 히죽 웃었다.
"흑수당의 열 명 무뢰한 중에서 일곱 명과 진여진이오."
그러자 서문조우의 얼굴에도 노기가 떠올랐다.
"그 노귀가......."
번개손 강인이 다그치듯 물었다.
"듣자하니 진여진은 이미 비명에 사라졌다고 하는데 어찌된 일이오?"
곡철은 서서히 술잔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소."
서문조우가 다급히 물었다.
"곡대협이 죽어 버렸소?"
곡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와 겨루던 흑수당의 무뢰한 일곱 명중 여섯 명은 죽고 한 명은 부상 당했소."
서문조우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의혹이 뒤범벅되었다.
"곡대협, 당신 혼자서 그들을 모두 처치했단 말이오?"
곡철은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빙그래 웃었다.
"운이 좋았소."
강인은 긴장된 표정으로 곡철을 응시했다.
"혼혈당의 유보(兪保)까지도 해치웠소?"
곡철은 그때 일을 생각하듯 히죽이 쓴 웃음을 지었다.
"그 작자는 상대하기가 무척 어려운 인물이었소. 내가 그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요행이었소."
그러자 서문조우는 느닷없이 손뼉을 탁 치며 수선을 떨었다.
"용하오! 사람들이 말하기를 황룡의 무공은 바다같이 깊고 또 마음은 늑대와 같이 포악스러워 일단 싸움을 하게 되면 깨끗하기가 마치 칼날과 같다고 하오. 나는 그 소문을 반신반의 해 왔는데 오늘 들어보니 과연 소문대로구료! 그런데 곡형, 솔직히 말해서 너무 악독한 것이 내 마음에 걸리오."
곡철은 고개를 흔들며 다짐하듯 입을 열었다.
"적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자신을 혹사 시키는 거나 다름이 없소. 더구나 마음이 포악스러워 악행만을 자행하는 그들에게 죽음의 징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먼 훗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손에 죽음을 당하게 될지 모르오."
"그렇다면 만약 무쌍파와 흑수당에 다시 전화(戰火)가 불붙기 시작한다면 곡형은 무쌍파를 계속 돕겠구료?"
곡철은 무게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강인은 갑자기 눈에서 광채를 발하더니 나직하면서도 힘있는 어조로 말을 꺼냈다.
"곡형, 소생은 별로 쓸모가 없는 실력을 지녔지만 꼭 도와드리고 싶으니 곡형께서 승낙해 주시오."
곡철은 강인의 이 뜻밖의 말에 약간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강형의 성의는 정말 고맙소. 그러나 이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고 매우 번거로운 일이오. 이런 번거로운 일에 강형이 말려들어 무슨 사고라도 생긴다면 소생의 마음은 불안에 잠기게 되오."
강인은 빙그레 웃어 보였지만 그 웃음 속에는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었다.
"소생은 이미 마음에 결정을 내렸소. 만약 곡형께서 소생의 평범하고 견식이 엷은 무공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이 몸은 곡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소."
곡철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기다가 이윽고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강형! 당신은 무엇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소생을 도우려 하오? 비록 당신과 나는 만나자마자 지기(知己)와 같은 느낌을 서로 느꼈다고는 하지만 별로 깊은 교제는 없었는데 강형께선 너무나 도량이 넓군요."
강인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람이 서로 사귄다는 것은 쉽고도 매우 어려운 것이오. 흔히들 말하기를 친구는 많아도 진정한 친구는 없다고들 하오. 곡형과 나는 비록 새로 사귄 친구이지만 친분은 백 년 이상 사귄 친구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오. 곡형, 당신이야말로 의(義)와 인(仁)을 중요시하고 정녕 구하기 힘든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부디 보잘 것 없는 내 성의를 뿌리치지 마시오."
곡철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강형, 너무나 지나친 과찬이오."
이때, 서문조우가 느닷없이 버럭 큰소리를 질렀다.
"여보시오! 당신들 둘 만이 친구의 우정을 안단 말이오? 사람을 옆에다 놓고 너무들 하지 않소? 강형만이 곡대협을 도와 줄 수 있고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단 말이오?"
곡철은 빙그레 웃으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시오? 우리가 서문형을 그렇게 생각할 리가 있겠소?"
서문조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마치 웅변이라도 하듯 거창하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벌써 곡대협을 도우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소. 다만 내가 곡형을 도운다면 어떻게 결과를 마무리 할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오. 그런데 강형이 먼저 입을 열었으니 나는 두려워 발뺌을 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오. 더 말할 것 없이 나는 목숨을 걸고 곡형을 도울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하는 바이오."
곡철은 굳이 사양의 뜻을 표했다.
"서문형께서 그럴 필요가 무엇이 있겠소?"
서문조우는 다부지게 입을 열었다.
"오직 의(義) 하나 뿐이오. 친구를 위하는 길이라면 양쪽 갈비뼈에다 칼을 꽂을 수 있다는 말을 강호상의 사람이라면 모두 알 게 아니오?"
강인은 술잔을 높이 쳐들었다.
"그렇게 결정하기로 하고 세 마음을 하나로 뭉친다는 뜻에서 축배를 듭시다."
서문조우는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는 제법 근엄하게 말문을 열었다.
"왜 그러오? 곡대협께서 아직도 머뭇거리는 것을 보니 혹시 나와 강형이 그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게시는 것이 아니오?"
곡철은 손을 내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어찌 감히 그런 마음을 품을 수가 있겠소? 다만......."
서문조우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젖히더니 큰 소리로 곡철의 말을 가로챘다.
"으하하하...... 잔소리 그만 집어치우고 술잔을 기울이시오. 그 술잔을 비우지 않으면 우리 두 사람의 도움을 원치 않는 것으로 여기겠소."
곡철은 벌떡 일어나더니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이 모양을 본 강인은 쾌활하게 웃어젖혔다.
"하하... 좋았어! 그래야 친구지. 곡형이 소생과 서문어른 두 사람 사이의 원한관계를 와해시켜 주었는데 우리 두 사람의 도움이 뭐가 그리 대수롭겠소?"
서문조우는 호탕하게 웃으며 곡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하하하하...... 우리 세 사람은 서로 우애를 표시했소. 이제 사나이의 의(義)를 어떻게 존중해 나가느냐 만이 남았을 뿐이오."
세 사람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양의 낙조(落照)가 서쪽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고 멀고 가까운 산봉우리들은 세 사람의 우애를 다짐하듯 서서히 저녁 노을 속에 잠겨갔다.
* * *
대하진(大河鎭)으로 향하는 길목___
길이라기보다 허허 벌판이었다. 도로라고 정할만 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황량한 벌판만이 광활하게 펼쳐 있을 뿐이었다.
옛적에 지나간 마차바퀴의 자국조차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질서 없이 제멋대로 자란 잡초만이 수북이 쌓인 눈에 덮여있다.
곡철과 서문조우, 그리고 강인 세 사람이 나누어 탄 두 필의 준마는 쉬지 않고 달렸다.
희미해져 가는 노을에는 아랑곳없이 세 사람은 담소를 나누며 깊은 우정을 새겨놓고 있다. 두 필의 말은 쉬지 않고 질풍처럼 앞으로 달렸다.
한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전방에 띄엄띄엄 늘어서 있는 집들이 양쪽 길가에 늘어져 있고 길은 중간에 쭉 뻗어져 있었다.
서문조우는 달리는 속도를 늦추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이 작은 촌락이 바로 대하진의 전초기지요. 이 촌락에서부터 약 삼십 리 정도 되는 곳까지 가게 되면 대하진이 보이오. 아마 밤에 숨어드는 것이 비교적 안전할 거요."
곡철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그렇다면 잠시 이 촌락에서 쉬었다 가도록 합시다."
강인은 전방을 유심히 살피면서 말을 꺼냈다.
"소생의 생각으론 이 촌락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이곳은 대하진과 너무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만약 우리들이 이 촌락으로 들어간다면 분명 우리 소식이 누설될 염려가 있소."
서문조우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강형의 말이 맞소. 우린 저쪽 숲속으로 가서 잠시 쉬었다 가는 것이 좋겠소. 좀 고생이 되겠지만 우선 가지고 온 마른 음식으로 허기를 채울 수밖에 없소. 곡대협의 생각은 어떻소?"
곡철과 강인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필의 말은 길 왼쪽의 벌판으로 머리를 돌렸다. 말발굽이 흰눈에 덮힌 지면을 밝을 때마다 뽀드득 뽀드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숲 속으로 들어가자 서문조우는 말에서 뛰어내려 사방을 살폈다.
곡철도 말에서 뛰어내리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서문형,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했소?"
서문조우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의 준마인 백운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자, 우선 먼저 배부터 채우고 봅시다."
그는 안장에 걸려 있는 가죽 포대에서 두 개의 큰 봉지를 꺼내 그 속에 들어 있는 네 조각의 빵과 두 마리의 통닭, 그리고 소금물에 담근 찐 오리알과 익은 돼지 뒷다리를 꺼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포대에서 술병을 꺼내면서 히죽 웃었다.
"어떻소? 빠진 것이 하나도 없지요?"
곡철은 눈을 멋쩍게 껌벅거렸다.
"방랑생활을 하면서 역시 서문형과 같이 빈틈이 없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허기와 굶주림에 허덕이다가 백골이 되고 말테니까 말이오."
서문조우는 호쾌하게 웃어댔다.
"하하하..... 자, 백골이 되기 싫으면 어서들 듭시다."
세 사람은 숲 밖에서 스며드는 낙조의 미약한 광선을 받으며 유쾌하게 야외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난 후 서문조우는 구덩이를 파서 먹다남은 찌거기를 모두 묻어 버렸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모두 뒷짐을 진 채 조용히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다. 세 사람 모두 사색에 잠긴 듯 했다.
숲 속은 점차 어둠이 깔려오기 시작했다. 이때 서문조우가 곡철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곡형! 이제는 갈 때가 됐소."
곡철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말은 타지 맙시다. 두 분의 생각은 어떻소?"
강인이 서슴없이 대답에 응했다.
"그럽시다. 말을 타고 가면 괜히 시끄러워지기만 하나 말이오."
서문조우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더니 백운아의 오른쪽 귀를 잡아당겨 은밀히 무엇인가 중얼거렸다. 강인도 각저에게 다가 가서 살며시 이마와 머리를 두들겨 주고는 자기의 뺨을 고삐에 대고 부볐다. 두 사람은 자기들의 애마를 마치 친형제 대하듯 했다.
서문조우는 돌아서기가 무섭게 몸을 솟구쳐 올리며 외쳤다.
"갑시다!"
이어 허공으로 치솟아 올라 질풍과 같이 달려가더니 이내 발밑이 땅에 달 듯 말듯하게 내려서서는 두 그루의 나무사이를 쏜살같이 빠져 나갔다.
이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인은 빙그레 웃더니 신형을 비스듬히 솟구쳐 서문조우의 뒤를 따라 번개같이 질주해 나갔다. 뒤따라 곡철도 가볍게 숲을 벗어나니 세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민첩하고 날렵하게 똑같이 날아갔다.
세 사람의 경공 신법은 절묘하기 때문에 잠간 사이에 힘들이지 않고 대하진의 휘황찬란하게 등불이 밝혀져 있는 곳에 다다랐다.
서문조우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입을 열었다.
"대하진의 등불은 마치 보석과 같이 휘황찬란하구료."
강인은 잠시 주위를 살펴보더니,
"지금은 한창 저녁 식사를 할 때인 모양이오"
곡철은 빙그레 웃었다.
"검은수염이 지금 한창 풍류회를 개최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서문조우는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만약 그렇다면 우리 세 사람은 불청객이 되어 한턱 단단히 얻어먹읍시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그들은 어느덧 대하진에 도착했다. 대하진은 약 이천 여채의 집이 있었는데, 네 개의 큰길이 십자형(十字形)으로 나 있었다.
거리에는 행인이 많았다. 그리고 점포에서 새어 나오는 휘황찬란한 불빛은 왁자지껄하는 행인들의 말소리와 함께 대하진의 번영을 나타내고 있었다.
마치 낙양성(洛陽城)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세 사람은 하나의 골목길로 들어섰다. 골목 안은 청석(靑石)이 가지런히 깔려 있었는데 길은 몹시 깨끗하고도 길었다.
곡철은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서문형, 이곳은 이상하리 만큼 번창되었군요."
서문조우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홍의방은 스스로 도박장과 사창(私娼)을 경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생산되고 있는 사금(砂金)에 손을 대고 있소. 그리고 표국의 장사 거리도 가차 없이 가로채어 모두 자기들이 하고 있으니 이곳이 번영하지 않을 리가 있겠소?"
곡철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아니, 그럼 관가(官家)는 무엇하고 있단 말이오?"
서문조우의 음성에는 분개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
"이곳의 관료들은 모두 홍의방에 입회(入會)했소. 이 진(鎭)에서 공무(公務)를 보는 사람은 관가가 아니라 홍의방의 초웅이오."
강인도 분개한 듯 퉁명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맞았소. 이곳에서 벌어지는 악행은 무슨 악행이든 간에 거의 홍의방이 주동이오. 그러니 이곳에 파견된 괸리들이 어찌 감히 그들을 간섭할 수가 있겠소?"
"바로 그것이오.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그놈들의 행위에 벌써부터 분노를 느껴왔소. 그러나 그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 간섭을 하려해도 마땅한 핑계가 없었소. 양하(兩河) 일대의 북쪽은 청송산장이 횡행하고, 남쪽은 홍의방과 흑수당이 장악하고 있으니 생각하면 할수록 분통만 터지오."
청송산장이란 말이 나오자 돌연 곡철의 눈에서 시퍼런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입술을 꼭 깨물고 입밖으로 튀어 나오려는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이 모양을 바라보고 있던 강인이 이를 악물었다.
"청송산장 놈들은 머리를 아주 잘 썼소. 그들은 흑수당과 홍의방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세력을 이쪽으로 확장시키지 않고 있소. 또한 그들은 매년 명절 때마다 흑수당과 홍의방에 선물을 보내어 함께 명절을 경축하며 상호 불가침을 유지하고 있소. 그러나 소생의 추리로는 만약 흑수당이 근래에 커다란 타격만 받지 않았다면 그들이 원하는 상호 불가침의 평화적 국면은 오래 계속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오. 왜냐하면 흑수당은 황제가 되고도 신선이 되려는 욕심꾸러기의 무리들이기 때문이오."
"이젠 거리로 나갑시다. 오늘밤 저놈들에게 신선이 된 맛이 어떤가 보여줘야겠소."
번개손 강인이 맞장구를 쳤다.
"물론이오. 하지만 곡형께선 흑수당이나 홍의방과 대면을 한 적이 있으니 그들에게 발각될 우려가 있지 않겠소?"
곡철은 그의 말에 결심한 듯 힘있게 말했다.
"주의하겠소. 그러나 그토록 공교롭게 되지는 않을 거요."
세 사람은 아주 태연하게 중심가를 향해 걸어 나갔다. 길가에는 가끔가다가 인상이 험악한 홍의방의 장한과 태도가 오만한 흑수당의 무리들이 지나치곤 했다.
번화가에 왕래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생김새가 험악하고 거동이 포악스러운 강호인물들이었다.
거리에는 장사꾼들의 외침소리와 행인들의 대화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렸다. 이 거리에는 강호상의 특유한 야만과 광분이 춤을 추고 있었다.
서문조우는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이건 뭐 아주 흑도 장사치들의 총 집결지가 되어 버렸군. 아주 정정당당하게 장사한다는 식으로.... 빌어먹을!"
"조심하시오!"
강인은 다급히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 당겼다.
그때 두 명의 홍의장한이 한 노점에서 그들을 유심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한 가닥의 의혹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서문조우는 그들을 힐끗 쳐다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돌연 더욱 큰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흥! 강가야! 너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구나. 이렇게 조그만 곳에서 뭐가 그렇게 두려운 것이 있다는 거냐? 대하진은 원래부터 못된 녀석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 아니냐?"
곡철은 빙그레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서문형, 옳은 말씀이오. 홍의방은 고작해야 문지기에 지나지 않소."
그러자 강인도 그들의 뜻을 금시 알아차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말은 그렇지만 우리는 좀 조심해야 할거요. 우리는 이번에 일천 근이 넘는 사금을 호송해야 하는 것을 부탁해야 하니 좀 예의를 지킵시다."
서문조우는 가래침을 거칠게 내 뱉었다.
"뭐? 예의는 그래 뭐 말라비틀어진 게 예의야?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원칙인 데 이 거리에는 두 개 달린 사람이라도 있냐?"
이때 눈앞에서 붉은 그림자나 번쩍이는 듯 하더니 쉰 음성이 거칠게 터져 나왔다.
"네놈들은 어디서 굴러먹다 온 녀석들이냐? 이곳은 네놈들이 날뛸 곳이 못된다."
서문조우는 횃불 같은 사나운 눈을 부라리며 버럭 큰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은 뭐냐? 너희들이 감히 이 어르신네에게 시비를 거는 거냐? 너희들 같은 졸개들과는 얘기하고 싶지도 않으니 덤비려면 서슴없이 한꺼번에 덤벼라. 눈알을 뽑아 버리고 난 뒤에 너희들의 우두머리를 찾아가서 따지겠다."
강인도 곁에서 소매를 걷어 올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마침 잘됐다. 그러지 않아도 너희들의 두목을 만나려 하던 참이었다."
두 홍의장한은 동시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중에서 깡마르고 키가 작은 사람이 한차례 생각을 굴린 듯 만면에 웃음을 띠웠다.
"잠깐만 참으십시오. 세 분께선 어느 방의 고수들이신지요? 몇 마디 물어 보려고 한 것이니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서문조우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하하하하......... 뭐 오해라고? 야, 이 졸개들아 이 어르신네가 화를 내면 백노삼(白老三)도 양보를 해야 한다. 그런데 너희들 같은 두 놈 졸개까지도 나를 괄시 하다니? 이 어르신네는 기어코 옥호산장에 가서 따져봐야겠다. 그에게 아직도 옛정이 남아 있는지를 알아 봐야겠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옆에 있던 강인이 맞장구를 쳤다.
"형님! 그만 두십시오. 차라리 여의부에 가서 검은 수염 노인장을 만나 뵙고 그분에게 방법을 강구해 달라고 합시다. 정말 기분 나빠 못 참겠습니다."
곡철은 한쪽에 비켜서서 싱글벙글 웃고만 있었다.
안색이 크게 변한 두 홍의장한은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하고 있었다. 깡마르고 키가 작은 장한이 조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 두 친구들 할 말이 있으면 화내지 마시고 우리 좋은 말로 합시다. 같은 집안 식구들인데......."
서문조우는 부리부리한 눈을 무섭게 부릅떴다.
"뭐 친구? 너희들은 죽을려고 환장을 했구나? 이 어르신네가 강호에서 한창 이름을 날릴 때 너희들은 어머니 품속에서 재롱을 부렸을 거다. 그런데 감히 어르신네 보고 뭐 친구? 백노삼은 너희들 같은 바보들만 데리고 있으니 참 한심스럽구나."
이번에는 키가 큰 홍의장한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선...... 선배님. 소인들이 눈이 멀어 선배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서문조우는 매섭게 눈을 치켜뜬 채 분노에 찬 음성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어르신네는 네놈들이 겉으로는 굴복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정말 이놈들이 죽으려고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강가야,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빨리 여의부로 가서 양노제(梁老弟)를 데시고 와라. 만약 양노제가 없으면 두 형님을 모셔 오도록 하고. 홍의방의 졸개가 감히 우리들의 발등을 찍는다고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직접 옥호산장으로 가서 백유명(白維明)을 찾든지 아니면 초웅이라도 만나 봐야겠다."
두 홍의방의 친구는 상황이 점점 심각해져 감을 느꼈다.
상대방이 입에 올린 인물은 비단 자기편의 인물인 뿐만 아니라 또한 모두 쟁쟁하고 우두머리격인 인물들뿐이었다. 그것을 보면 상대방은 일부러 자기들의 기를 죽이려고 허풍을 떠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노삼이라고 부르는 백유명은 홍의방의 셋째 방주인 탁월좌인(托月左刃) 백유명이었고, 초웅은 그들의 대방주가 아닌가?
서문조우의 말하는 투를 보아 모르는 인물을 슬쩍 주워대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만약 상대방이 그 사람들을 찾아가 고자질을 한다면 자기들의 머리통은 남아있지 못할 것은 뻔한 사실인 것이다.
키가 큰 장한이 막 애걸을 하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옆에 있던 키가 작은 장한이 먼저 나섰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몹시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노... 노 선배님께선 소.... 소인들의 과실을 마음에 새겨 두지 마십시오. 한번만.... 용서를 해주십시오. 우리들은 모두 늙으신 어... 어머님을 모시고 있고 아들 딸이 수두룩합니다. 선배님께서 하신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끝장이 난 것입니다. 노인장께서 부처님 같은 자비를 베푸시와 좋은 일을 한 셈 치시고 하... 한 번만 용..."
서문조우는 싸늘하게 고개를 젖힌 채 거들떠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이때는 이미 주위에 구경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몰려와 있었다.
그 속에는 흑수당의 무리들도 끼어 있었고 홍의방의 인물도 있었다.
흑수당의 무리들은 자기들과 상관없는 일인지라 간섭하기 귀찮아 구경만 하고 있었고, 홍의방 측도 서문조우 등 두 사람의 신분을 알지 못해 끼어들었다간 자기의 머리에 화가 미칠까 보아 잠자코 있었다.
서문조우가 한참동안 요란스럽게 떠들어대도 간섭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강인은 청삼자락을 펄럭거리며 앞으로 반걸음 나아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형님,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작은 일을 가지고 그들을 죽게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과한 일이라고 생각하오. 더군다나 이 두 친구는 잘못을 알고 사죄를 하고 있으니 없었던 일이라 생각하고 그만 두십시오."
두 명의 장한은 이 말에 힘을 얻어 황급히 울상을 하며 동정을 구하는 표정을 지었다.
"노선배님, 저분 말씀대로 우리를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서문조우는 두 눈을 까뒤집고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투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대하진은 내 집과 같은 곳이다. 어느 때에 와도 홍의방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었고 언제나 두가나 양노제에게 술신세를 지어 왔었다. 그런데 불과 반 년 동안 오지 않았는데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하찮은 너희들에게 발등을 찍혔으니 될 말이냐?"
강인은 눈을 껌벅거려 암시를 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어 서문조우를 구슬리는 척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이 동생이 한 턱 내기로 하고 그 술좌석에 이 두 친구를 참석시켜 형님의 분통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서문조우는 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게 될 말이냐? 내가 화를 낸 것은 너 때문도 아니고 더구나 우리는 수십 년이나 함께 살아 온 사인데 어찌 너의 돈을 쓸 수야 있겠느냐? 안된다. 절대 안돼........."
두 명의 장한은 그 말을 듣자 용기를 얻어 황급히 허리를 굽히며 애걸을 했다.
"이 분 선배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노선배님께서는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소인들이 선배님들은 존경하는 뜻에서 조그만 술상을 준비할 터이니 노선배님께서 넓으신 아량으로 거절하시지 말아 주십시오."
서문조우는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며 거절했다.
"안돼! 그게 될 말이냐? 내가 어떻게 너희들의 신세를 질 수 있겠느냐?"
작은 키의 장한이 급히 아부하는 표정으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선배님께선 어째서 신세를 진다고 하시는 겁니까? 이건 다만 소인들이 선배님을 존경하는 뜻의 작은 성의일 뿐입니다. 선배님께서는 소인들의 성의를 무시하지 마시고 꼭 승낙하여 주십시오."
강인은 또다시 타이르는 척 슬그머니 말을 던졌다.
"형님, 가보십시다. 남들한테 우리들의 도량이 좁다는 말을 듣기 전에 어서 행동을 취합시다."
서문조우는 고의로 잠시 동안 가만히 서있더니 마지 못하는 척 걸음을 옮기면서 긴 탄식을 늘어놓았다.
"좋다! 너희들 말대로 하겠다. 강가야, 너는 아직도 마음이 자비로와 틀렸다. 내가 언제 이런 괄시를 받은 적이 있었냐? 이젠 너까지도 나를 타이르는 듯 이렇게 나오니....."
키가 작은 장한은 뛸 듯이 기뻐하며 허리를 굽혀 엉금엉금 기다시피 서문조우 옆으로 와서 연방 굽실거리며 길을 안내했다.
키 큰 장한은 강인의 옆으로 와서 그를 모시는 하인처럼 뒤를 따랐다.
그리하여 네 사람은 천천히 중심가로 향해 걸어 나갔다.
강인은 암암리에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저 멀리서 곡철이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자 한가닥 우쭐대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늘어놓았다.
"내 형님의 성질은 많이 좋아 지셨다. 옛날 같았으면 조금도 참지 않았을 것이다. 거리 한복판에서 욕설을 퍼부으며 모욕을 주었으니 그의 불같은 성질로 어떻게 가만히 있겠냐?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저 형님의 불같은 성질은 아무도 가라앉히지 못했을 거다."
홍의장한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님, 소인은 아직도 선배님의 대명(大名)을 여쭙지 못했습니다."
강인은 가볍게 코웃음을 던졌다.
"흥! 상관없다. 넌 돌아가서 백노삼에게 강가를 모르냐고 물어 보아라."
홍의대장한은 또 한 차례 허리를 굽실 거렸다.
"예! 알겁니다. 알고말고요."
강인은 아래턱을 쓰다듬으며 점잖게 말했다.
"저분 형님은 복성으로 서문이시다. 저분과 너희들의 세 방주하고는 비단 친분만 두터울 뿐만 아니라 서로 극진히 위하는 막역한 친구이시다. 여의부와의 관계는 한층 더 깊다. 검은 수염께서는 저분을 먼발치에서 보기만 하여도 허둥지둥 마중을 하러 나오고 조금도 거리낌 없이 농을 던지는 친구지간이지."
홍의장한으 또 다시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몹시도 정중하게 말을 받았다.
"선배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소인은 이제서야 생각이 납니다. 소인은 얼마 전에 서문노선배님을 한 번 뵙던 것도 같습니다. 어디서였더라.... 그렇지! 여의부에서 검은 수염 영감님의 환갑날........"
강인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중간에 그의 말을 막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어떤가? 내가 너를 속이지는 않았지? 너희들은 아까 그 얘기를 꺼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 아니냐?"
홍의장한은 더욱 존경심을 표면에 나타내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예........ 그랬어야 했습니다. 소인은 그 날 양선배님이 친히 서문선배님에게 술을 따라 드렸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읍죠. 서문선배님께선 양선배님에게 농담 몇 마디를 던졌었고 나중에 두 선배님께서 서문선배님을 대청으로 모셔서는 엽차를 권했었지요. 그때 서문선배님께선 두 선배님의 옆에서 걸어 갔었읍죠......."
강인은 속으로 불쌍한 녀석이라 생각하면서 한껏 치켜세웠다.
"음! 조금도 빗나가는 게 없는걸. 역시 넌 기억력이 굉장히 좋구나."
홍의장한은 예상치도 않은 칭찬을 받자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헤 벌렸다.
"헤헤헤........ 선배님께서는 너무 과... 분한 칭찬을 하십니다."
강인은 빙그레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듣자니 흑수당의 형제들이 장(莊)에 왔다고 하던데 너희들은 요사이 아마 굉장히 바쁘겠구나."
홍의장한은 몹시도 공경하게 대답에 응했다.
"과히 바쁘진 않습니다. 장안의 동남 양쪽의 건물은 이미 모두 비워있고 중의청(中義廳)도 그들의 혈혼당 인마들이 기거하게 했습니다. 흑수당 둘째 두령과 셋째 두령의 인마들은 모두 장외(莊外)의 여수청사에 이동시켰습니다. 여수청사는 모두 세 줄로 늘어서 있는데 굉장히 넓고 장과는 약 이 리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그곳은 경치가 매우 아름답습죠."
강인은 그의 말을 머리 속에 기억해 두고 다시 묻는다.
"듣자하니 흑수당이 단숨에 무쌍파를 격파시켰다는데 그들은 요사이 밤낮 축하연을 베풀고 있겠지?"
홍의장한은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나서 음성을 낮추어 얼굴에 한 가닥 충성하는 빛을 보이며 나직이 속삭였다.
"선배님들께서 물으시는 것이라 대답하겠습니다만,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절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흑수당의 친우들이 무쌍파를 격파시킨 것은 사실입니다마는 격파시킨 것은 고작 무쌍파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대초원 쪽에 아직도 많은 고수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만약에 정말로 그들이 온다면 일이 어떻게 변해갈지 의문입니다."
이어 그는 땅이 꺼져라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흑수당도 이번엔 정말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부하들 육칠백 명이나 사상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열 명의 두령 중에 여섯 명이나 죽었습니다. 우리 측 원군까지도 몇 백 명이 참살되었읍죠......."
강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렇다면 그들은 정말 비참하게 됐군......."
"네! 정말 비참한 광경입니다. 이곳으로 이동해 온 흑수당 형제들은 약 천여 명쯤 되는데, 그 중에 삼사백 명이나 부상을 입고 말았읍죠. 머리를 싸맨 사람도 있고 다리를 끊긴 사람도 있고.... 신음을 하며 아우성을 치는 광경이란 말로만 듣던 지옥 같습니다.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입니다. 게다가 무쌍파의 대거침공을 방비하기 위해 종일토록 초소배치에 분주합니다. 우리 홍의방도 그 회오리속에 빠져 들었으니 아무리 발뺌을 하려고 해도 안 될 일이고 이젠 하는 수 없이 운명에 맞기고 있는 처지입니다. 엊그저께 들은 소식에 의하면 대초원 쪽의 인마가 이미 육순하(六順河)를 건너서 이곳을 노리고 몰려오고 있는 중이라는 겁니다........."
강인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암암리에 중얼거렸다.
"육순하...... 육순하......."
홍의장한은 그의 태도가 의하해져 멍청히 바라보며 말했다.
"육순하는 이곳에서 동쪽으로 삼백여 리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강선배님께서는 들어 보신 적이 없습니까? 육순하는 너비가 수십 장이나 되지요."
강인은 속으로 뜨끔하였으나 겉으로는 태연하게 웃었다.
"알고 있다. 기왕에 그렇다면 흑수당과 백노삼, 그들은 응당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을 구해야지 아직도 이곳에 남아 뭘하고 있지?"
홍의장한이 황급히 대답했다.
"이미 사람을 보내 도움을 청했습니다. 다만 제가 모르는 것은 어떤 인물들을 부르려는지........"
강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막중한 일을 어떻게 너희들 같은 졸개에게 알려줄 수 있겠냐? 만약에 너희들이 조심하지 못하여 비밀이 누설되는 날엔 일이 심각하게 될테니까......."
홍의장한은 강인이 자기를 졸개라고 하며 무시하자 화가 나는지 눈을 크게 부릅뜨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소인은 비록 직책은 낮지만 정보를 입수하는 데는 귀신같습니다. 일급비밀은 잘 알아낼 수 없지만 웬만한 것은 거의 알고 있습니다."
강인은 빙긋 웃으며 홍의장한의 입에서 또 다른 말이 나오도록 슬쩍 말을 건네 보았다.
"그렇지 못한 것 같은데?"
그러자 과연 홍의장한은 몸을 좀 더 강인에게 밀착시키며 속삭였다.
"소인은 허풍을 떠는 게 아닙니다. 아마 선배님이 아시는 것보다 소인이 알고 있는 비밀이 더 많을 겁니다. 선배님께서는 여의부에서 자발적으로 도움을 줄 것이고, 청송산장에서도 원군을 보내는 줄로만 알고 계실 뿐, 칠하회(七河會)와 대도교(大刀敎)도 협력을 하겠다고 승낙한 것은 전혀 모르고 계실 겁니다. 더군다나 백화곡(百花谷)의 쇄련사절(鎖鍊四絶)도 함께 이곳으로 온답니다. 이것까지는 대수롭지 않은 일들입니다. 제일 중요한 비밀은 바로 이것이지요........"
이렇게 말끝을 흐려 놓고 홍의장한은 주위를 다시 한 번 두리번거리더니 더욱 음성을 낮추고 다음 말을 계속했다.
"바로 장홍파(長紅派)도 사람을 보내 주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 정말 볼 만하게 됐읍지요......"
이 말에 강인은 기절초풍할 지경으로 놀라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방파들은 모두 든든한 기반을 닦고 있으며 명성이 쟁쟁한 것들이었다.
더욱이 장홍파는 그 중에서 으뜸이라 할 정도로 쟁쟁하고 상대하기 힘든 방파였다.
장홍파는 극히 괴상하고도 기이한 방파로, 왕옥산(王屋山)의 기홍령(騎興嶺)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장문인 이하 일곱 사람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조직이었다.
그들은 모두 홍(紅)자를 돌림으로 이름을 지었다. 그들은 항상 강호 명리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세상과 인연을 끊은 반면에 무림의 어느 문파와도 왕래가 극히 적었다. 그들 일곱 명의 고인들은 어느 무림인물을 막론하고 기홍령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 일곱 사람은 제각기 다른 괴벽한 성질을 지녔다.
소문에 듣자하니 그들의 무공은 모두 선경(仙境)에 다다를 정도로 최상의 경지에 이르렀다 했다.
그런데 흑수당과 홍의방이 어떻게 그들을 강호에 불렀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강인의 등골을 더욱 오싹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장홍파의 일곱 괴물과 구대문파(九大門派)중 하나인 화산파(華山派)와의 친분 관계였다.
장홍파의 장문인은 바로 화산파의 장문인과 친형제 지간이니 만약 그와 원수지간이 된다면 화산파가 간섭을 하게 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만약에 일이 그렇게까지 변해버린다면 문제는 매우 심각해 질 것이니 사전에 미리 방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홍의장한은 강인이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사색에 잠겨있자 몹시 궁금하고 답답해서 그를 주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선배님, 어디 몸이라도 불편하신 것이 아니신지요?"
그러자 강인은 짐짓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엄살을 부렸다.
"굉장히 불편하군. 원래 몸이 시원치가 않았는데 자네의 말을 듣고 나니 더욱........"
홍의장한은 어리둥절해져서 그를 부축하려 했다.
"선.......... 선배님, 소인의 언사 중 선배님에게 무례를 범한 게 있나 보군요?"
강인은 조용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나는 갑자기 다른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너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니 과히 걱정하지 말아라. 그런데 저기 서문형님과 너의 동료가 술집으로 들어가고 있지 않느냐? 적성주루(摘星酒樓)가 맞느냐?"
홍의장한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앞쪽 한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이층 건물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네, 네! 맞습니다. 바로 저 집입니다. 선배님, 저 집은 안주를 아주 기가 막히게 잘 만듭니다. 잠시 후에 선배님께서 잡수어 보시고 평가하십시오."
강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는 속으로 지금 배불리 먹어 두리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오늘밤엔 다시 음식을 먹을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참 후 적성주루 이층에서는 무겁고 무질서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네 사람이 내려왔다.
그들은 내려오자마자 인사말을 주고받은 후 곧 헤어졌다.
서문조우와 강인은 얼큰하게 취한 기분으로 휘청거리며 떠나가는 두 홍의장한을 바라 본 후 의미심장한 미소를 교환했다.
얼마후 강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곡형이 오랫동안 초조하게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요."
서문조우는 강인과 함께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거리에는 행인들이 드문드문 눈에 띌 뿐 많은 점포들은 이미 문을 닫아버렸다.
두 사람이 몇 걸음을 떼어 놓았을 때 어느 좁은 골목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곡철이었다.
강인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잰 걸음으로 다가갔다.
"곡형, 많이 기다렸소?"
곡철은 포천의 예를 취하며 얼른 대답했다.
"아니, 괜찮소. 두 분께서는 아마 많은 자료를 얻어 왔으리라 생각하는데요."
강인이 히죽 웃고는 음성을 낮추며 입을 열었다.
"그렇소. 그 두 망나니는 세상모르고 날뛰며 우리에게 많은 비밀을 털어 놓았소."
서문조우가 황급을 주위를 살펴본 후 조용히 말했다.
"상황이 시급하게 됐소. 대초원의 무쌍파가 과연 출동을 하였나 보오. 벌써 육순하를 건너왔다 하오. 그들이 길을 재촉하는 속도로 보아 아마 이틀 후이면 이쪽과 맞부딪치게 될 것 같소."
곡철은 묵직하게 신음소리를 냈다.
"음.. 나는 방금 시간을 이용해서 옥호산장에 다녀왔소. 그곳은 이곳과 약 삼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고 담은 청석(靑石)으로 쌓았더군요. 나는 담 위로 올라서 안을 한참 동안 살펴보았소. 장 안에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것 같았고 횃불이 번쩍거리는 것이 보였소. 객청에는 불이 꺼져 있었고 밖에는 초소가 즐비하게 설치되어 있으며 순찰병은 쉴새 없이 장내를 맴돌고 있어 극도로 긴장된 상태인 것 같았소."
강인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소생은 조금 전 무쌍파가 비석산에서 함락당할 때 있었던 많은 사람들의 종적을 알아보려고 했소만 결국 실패했소이다. 그 두 망나니들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았소."
잠시 후 세 사람은 이윽고 캄캄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길을 재촉하면서 강인은 탐지해 낸 비밀을 간단하게 곡철에게 들려주었다.
곡철은 멍하니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대초원 무쌍파의 화살촉은 대하진을 겨냥하고 있고 또한 많은 사람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이곳에 모여들고 있어 이틀 후면 입장의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터지겠군요. 그렇게 되면 천고의 향락은 한낱 꿈으로 변해 버리게 될 것이고 그 꿈에서 헤어나면 백골(白骨)은 재로 변해 있을 것이며 또한 모든 것이 연기로 화해버릴 것이겠군요........"
서문조우와 장인은 멍하니 곡철을 바라보며 말을 듣더니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다.
서문조우가 몹시 씁쓸한 말투로 한마디 꺼냈다.
"옳은 말씀이오. 곡대협, 당신의 말은 항상 옳군요."
곡철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세 사람은 침중한 얼굴로 묵묵히 골목을 걸어갔다.
한참 후 서문조우가 침묵을 깨뜨렸다.
"곡대협, 오늘밤 우리들은 여의부를 탐색할거요? 아니면 옥호산장을 먼저 탐색할거요?"
곡철은 나직이, 그러나 힘 있게 대답했다.
"옥호산장으로 먼저 가는 게 좋겠소."
"그럼 복면을 해야겠군?"
"물론입니다."
서문조우는 품속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입과 코를 완전히 가렸다. 그러자 강인도 뒤따라 청색 손수건을 꺼내 복면을 했다.
곡철은 노란색 손수건을 꺼내 복면을 하니 세 사람의 얼굴은 누가 누군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으로 웃음을 교환했다.
"자! 갑시다."
서문조우의 입에서 이 말이 떨어지자 세 사람은 마치 흘러가는 달과 같이 유유히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대하진의 맨 마지막 집을 벗어나자 서문조우와 강인은 먼 발치께에 숲으로 반 쯤 가려져 있는 옥호산장을 볼 수 있었다.
옥호산장의 집들은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하나의 거대한 성(城)을 방불케 했다. 높이 치솟은 담벽이 그 집들을 둘러싸고 있고 등불은 마치 유령의 눈과도 같이 반짝거렸다.
세 사람의 행동은 더욱 빨라졌다. 마치 밤하늘의 가로지르는 유성과 같았고 심지어 그들이 날아간 흔적조차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이윽고 세 사람의 신형은 옆으로 빙그르 돌았다가 앞으로 움직여 쉽게 한곳의 매복을 피해 내었다.
세 명의 홍의방 장한이 한 구덩이에 반쯤 엎드려 있었는데, 추호의 기척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마치 허수아비가 엎드려 있는 듯 가만히 있었다.
그들은 행동에 더욱 조심하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눈앞에 옥호산장의 육중한 대문이 보였다. 그것은 아주 튼튼해 보이는 철로 만든 대문이었다.
대문 위에는 대리석으로 조각해서 만든 기둥이 웅장하게 가로놓여 있었다. 기둥 위에는 옥(玉)으로 조각하여 만든, 눈을 부라리고 혓바닥을 내민 거대한 호랑이가 지키고 서 있었다.
이 거대한 조각품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사를 연발하게 하는 것이었다.
대문 앞에는 두 개의 바람막이 초롱불이 덩그렇게 걸려있고, 이십 명의 홍삼장한들이 목석처럼 좌우에 서 있었다.
그들은 각각 두 자루의 도끼를 차고 있었다. 도끼날에서는 싸늘한 광채가 번뜩이고 있었다.
순찰하는 행렬이 쉴 새 없이 왕래하는 등 제법 물샐 틈 없은 경비였다.
곡철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정문으로 날아듭시다."
강인은 약간 어리둥절해 하며 다그쳐 물었다.
"정문이라니요?"
"문은 삼 장 높이고 거기다가 가로놓인 기둥까지 합친다 해도 사 장도 안 되니 내가 나뭇가지로 소리를 내서 저들의 정신을 분산 시킬테니 그 틈을 타서 제일 빠른 신법으로 몸을 날리시오. 신법이 재빨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서문조우와 강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급히 단전(丹田)의 진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곡철은 두 개의 마른 나뭇 가지를 꺽어서 한차례 휘이 잡았다가 교묘하게 퉁겨 내었다.
쉬잉!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나뭇가지가 괴이스러운 파공음을 내며 앞으로 날아갔다.
막 대문에 다다른 순간, 두 개의 나뭇가지는 느닷없이 좌우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소리는 더욱 요란해 졌다. 쥐 죽은 듯한 밤에 울리는 소리인지라 더욱 크고 시끄럽게 들렸다.
곡철의 이 수법은 사비쌍연(射飛雙燕)이라는 초상승의 암기수법이었다.
대문을 지키던 스물네 명의 홍삼장한은 일제히 용수철에 퉁기듯 몸을 일으키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같은 시간에 곡척과 서문조우, 강인 세 사람은 흔적조차 없는 신법으로 허공을 가로 질러 옥호산장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