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命)이라면… 하겠소!
땀이라니…….
설향의 고운 이마가 땀에 덮이다니…….
그녀는 왜 이리 몸을 떠는 것일까?
문이란 문은 모두 닫혔다. 찬 바람이 들어올 공간은 전혀 없다.
이 곳은 완전히 밀폐된 장소였다.
백무엽이 안으로 들어서는 찰나, 겹겹이 기관(機關)이 발동되고 혈도 마운은 호법이 되어 일대를 완전 차단했다.
바람이라도 허락 없이는 안으로 들어설 수 없는 상태였다.
"그… 그것은… 나를……!"
설향은 또 말을 더듬었다. 그녀가 사내 앞에서 몸을 떨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문주를 어찌하란 말이오?"
백무엽의 물음 소리는 아주 차가웠다.
얼음으로 깎아 만든 인간이랄까?
백무엽에게서 인간의 온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눈이 열기(熱氣)를 발하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설향은 지금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 여인(女人)이기에…….
돈과 남자와 분위기에 약하다는 평범한 여인.
설향은 인문주도 아니고, 그냥 한 명의 여인일 뿐이었다.
"나를……!"
그녀는 악쓰듯 말하고 있었다.
"나를 취(取)해요."
취하라니?
그것이 바로 설향이 제일좌의 자격으로 백무엽을 부른 진정한 뜻이란 말인가?
묘한 정적이 일대를 휘감았다.
한데,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백무엽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설향을 바라볼 뿐이다.
설향의 눈길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내 몸 안에는 한(恨)이 있어요. 그것은 내가 가까이 하고 싶지도 않은 원수들에게 술을 따라 주며 생긴 한입니다. 그 한은… 하나의 내공으로 잠재되었습니다. 그 힘을 가져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바로… 채음보양(採陰補陽)과 비슷한 인혼연화술(引魂練花術)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아실 것입니다!"
설향은 존경스럽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감히 눈도 뜨지 못하고 몸을 파르르 떨면서…….
그녀는 문주가 아니라, 일개 여인일 뿐이었다.
"그 방법은 아시지요?"
그녀가 슬쩍 물었다.
"아오."
"그,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설향은 몸을 떨면서 말할 때였다.
"한 가지 물을 것이 있소! 그것은 지금 하는 말이 어떤 입장에서 하는 말이냐 하는 것이오. 그냥 하는 말인지, 아니면 문주로서의 명령(命令)인지 알고 싶소!"
"으으… 음!"
설향의 얼굴빛이 희어졌다. 그녀는 치욕을 느끼는 듯 인상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훗훗… 명령이라면… 하겠소. 이제껏… 어김없이 충견(忠犬) 노릇을 했듯이!"
백무엽은 피식 웃었다.
흰 이를 조금 드러내 보이며 웃는 웃음, 그 웃음이 설향의 살을 새까맣게 만들었다.
강간범 앞에 선 듯 설향은 피부에 소름을 돋우기 시작했다.
"명… 명이라면 하겠다고?"
"물론이오."
"으으, 명이 아니라면?"
"글쎄!"
"으으, 으으……!"
설향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그리고 그녀의 고운 뺨 위로 맑디맑은 액체가 연잎 위의 이슬방울처럼 굴러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울다니……!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울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백무엽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묘한 기분을 맛봤다.
울렁인다고 할까? 짜릿하다고나 할까?
'지금 같아서는… 명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하고 싶다!'
백무엽은 설향이 아주 작은 여자라는 것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가슴 속에 둘을 안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체구의 여자(女子).
설향이 왜소하게 보이기는 정말 처음이었다.
눈(雪).
그것이 내리는 소리는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던가?
사르륵 눈이 내리고, 여인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밀실(密室), 설향은 새빨간 눈알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너를 좋아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너를 증오하고 있다. 빠드득-!"
그녀는 치를 떨고 있었다.
사랑이 깊으면 따라서 한(恨)도 깊어진다던가?
명령이라면 하겠다는 말은 설향의 가슴을 난도질해 버렸다.
"네놈이 돌(石)이라면… 이제부터 진짜 돌로 취급해 주겠다. 네게… 가장 잔혹한 일만 골라서 명하겠다!"
설향은 나무 침상 위에서 옷을 벗고 있었다.
톡-!
옷고름이 끊어지며 젖가리개가 드러났다.
젖가리개 역시 벗어지며 봉곳한 앞가슴이 솟아오른다.
흰 기름으로 뭉쳐 만든 듯한 육구(肉球), 그것을 본 사람은 많으나 그것을 만져 본 사람은 없다.
설향은 기녀 생활을 하면서도 몸의 청백함을 지켰다.
미혼술(迷魂術)이 고강하고, 임기응변이 지극히 뛰어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런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설향의 손은 허리에 닿았다. 그녀는 하의마저 벗을 채비를 하며 입을 열었다.
"정사(情事)마저 네게는 고통이 될 것이다! 물론 내게는… 시시한 순간이 되겠지!"
"……!"
백무엽은 설향이 옷을 훌훌 벗는 것을 보고 있었다. 화림에서 생활하며 그는 여인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가 늘 보는 것은 기녀들이 몸을 씻고, 남자와 뒹구는 광경이었다.
-계집이란 더러운 족속! 계집을 만든 것은 하늘의 실수이다. 계집은 모든 일에 방해가 될 뿐이다!
백무엽은 늘 그러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망막에 가득 들어서고 있는 설향의 벌거벗은 몸뚱이는 전혀 달랐다.
'이것은 단순한 비곗덩어리가 아니다.'
백무엽의 숨결이 약간 거칠어졌다.
울며 옷을 벗고 있는 설향.
백무엽에게 지독한 수모를 받았다고 느끼는 듯, 이를 악물면서 하의를 내리고 있는 설향의 모습은 백무엽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스르륵-!
대리석같이 미끄러운 다리의 선 때문도 아니다. 울울한 비지의 숲 때문도 아니고, 몸에서 풍겨 나오는 달콤한 체취 때문도 아니다. 흐느끼는 표정 때문도 아니고, 흔들리고 있는 젖가슴의 율동 때문도 아니다.
그냥 가슴이 묘하게 저려 왔다.
'나의 마음이 이렇게 동요되다니…….'
백무엽은 급히 한 가지 구결을 외웠다.
청명부동공(淸溟不動功)!
그 구결은 불가의 비전무공이다. 그것을 읊으면 심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한데, 사르르 옷을 벗는 설향의 모습은 자꾸만 동요의 깊이를 더하게 했다.
그것은 욕정(欲情)이 아니었다. 동물적인 욕정이었다면 차라리 참기 쉬웠을 것이다.
지금 백무엽이 느끼고 있는 인간의 정서는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었다.
거절 직후에 사랑을 느끼다니……!
그것은 백무엽 자신도 상상하기 힘든 마음의 변화였다.
하여간, 설향은 나신(裸身)이 되어 반듯이 누웠다.
그녀는 옷을 벗는 가운데 마음이 안정되었는지, 이제는 눈에서 더 이상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차가운 눈빛을 허공에 던졌다.
살아 있는 눈빛이 아니라, 죽어 있는 눈빛을…….
창 밖에 퍼부어지는 눈빛과 같은 차가운 빛깔을…….
"무화령, 내게서 동물적인 욕정(欲情)을 느끼면 만사 실패다! 너와 나는 주와입마(走火入魔)에 들고 만다!"
매우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그녀는 다시 인문제일좌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마도 백무엽 앞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인문에서 애정을 갖는다는 것은 숙명(宿命)에 대한 거역이기에. 설향도, 백무엽도 지금은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듯했다.
"나는 정사(情事)라는 수법을 통해서… 네게 진기를 전수할 것이다. 너는 그것을 익히며 인법오결(忍法五訣)을 연성(練成)할 것이다!"
"알겠소!"
백무엽의 대답은 전과 다름없이 무뚝뚝했다.
"이제… 너의 옷을 벗어라!"
"명대로 하겠소!"
백무엽은 천천히 상의를 벗었다.
먼저 허리띠를 풀고, 그 다음 그는 구깃구깃한 겉옷을 벗어 등 뒤에 내려놓았다.
그의 가슴은 말할 수 없이 탄탄했다. 옷을 걸치고 있을 때에는 조금 연약해 보이나, 옷을 벗으면 말할 수 없이 균형 잡힌 체구가 나타난다.
그리고 한 송이 화(花).
그것은 백무엽이 잃어버린 과거의 단 하나의 표식이었다.
꽃은 살아 흔들리고 있었다. 백무엽의 가슴 근육이 꿈틀거림에 따라 가슴 위에 문신으로 남아 있는 금빛 꽃이 흔들거리는 것이다.
백무엽은 하의마저 벗었다.
남(男)과 여(女), 둘은 태초에 조화옹에 의해 창조된 그 상태로 돌아갔다.
"제일 먼저, 두 손으로 나의 젖가슴을 쥐어라!"
"알겠소."
"바보 자식, 너무 가볍게 쥐었다."
"알, 알겠소!"
"으으, 이번에는 너무 세게 쥐었다. 멍청한 놈! 네 양쪽 엄지 손가락이 나의 유근혈(乳根穴)을 정확히 점할 정도로만 쥐어라!"
"이, 이렇게 하면 되오?"
"됐, 됐다! 으음……."
백무엽은 몸을 반듯이 펴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배가 서로 닿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최후에나 도달하는 경지이다. 처음에는 유근혈에서부터 시작을 해야만 한다.
설향은 몰아지경에 들어가기 위해 부단히 구결을 외워야 했다.
본래 예정대로였다면 벌써 구단(九段)에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일단(一段) 어귀를 헤매고 있을 뿐이었다.
설향은 마음 속을 백지로 만들려고 이를 악물었다.
'이것은… 놀이가 아니고 환락(歡樂)도 아니다. 복수의 한 걸음(一步)일 뿐이다.'
그녀는 애써 창 밖을 생각한다.
거기 눈이 있으리라. 눈은 아주 차가울 것이다.
백무엽은 강(江)을 생각한다.
강은 쉬임없이 흘러갈 것이다. 어쩌면 실을 잃은 연(鳶)이 머나먼 강물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단(二段)은 나의 숨결로 너의 내공을 단련하는 것이다!"
"……!"
"지금 이 상태에서 너의 입만 내게 대라!"
"알겠소!"
"나의 숨결을 일각(刻) 내내 흡입하고, 일각 내내 너의 혼탁한 숨결을 나의 목구멍 안으로 흘려 보내라!"
"으음, 그럼 문주의 희생이 너무 크지 않소?"
"호호… 너는 나의 노예다. 적어도 이 겨울 동안은!"
설향은 애써 차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는 곧 야릇한 신음 소리로 화했다.
백무엽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세게 틀어막았다.
설향의 입술은 아주 차가웠다. 그러나 그 차가운 입술 사이에서 토해지는 숨결은 정말 뜨거웠다.
"하아아아……!"
불이 토해지는 듯, 설향의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는 화무(火霧)가 흘러 나왔다.
그 힘은 백무엽의 몸 안으로 거침없이 흘러들어 백무엽의 진원지기(眞元之氣)를 강하게 연성해 주었다.
"후우……!"
백무엽은 설향의 진기를 일주천(週天) 운기행공한 다음, 혼탁한 기운을 설향의 입 안에 흘려 보내 주었다.
이 수법은 부부지간에만 시전되는 수법이었다.
부부 중에서도 상대방을 향해 몸과 마음을 모두 헌신할 수 있는 한 쌍의 원앙(鴛鴦)만이 서로를 위해 행하는 수법이었다.
원앙, 그러나 뜨거운 피의 원앙은 아니고 얼음으로 깎아 만든 원앙들이었다.
제삼단(第三段).
그 방법은 설향이 팔만사천지(八萬四千指)를 잇따라 쳐내 백무엽의 전신 혈도를 추궁과혈(推宮過穴)하는 것이다.
백무엽은 신선보다도 기분 좋은 상태였다.
그는 반듯이 누워 있고, 설향의 섬섬옥지(纖纖玉指)는 그의 몸을 단련시켰다.
짜릿한 기운이 골수 속으로 들어서며, 곧 청아(淸雅)한 기운으로 처한다.
백무엽은 의식이 잃은 이후 가장 상쾌한 상태를 경험할 수 있었다. 반면, 설향의 긴 머리카락은 땀에 촉촉이 젖었다. 하지만 그녀는 힘든 가운데에도 단 한 번 숨소리를 내지 않았다.
제사단(第四段), 그 단계는 세 가지 영약(靈藥)을 사용하는 단계이다. 세 가지 모두 액체였다.
금강화룡액(金剛火龍液).
피가 엉킨 듯한 검붉은 고약이다. 그것은 백팔 종(種)의 약재로 만들어졌다. 그것이 만들어지기 위해 천야농원(天野農園)의 기화요초(琪花瑤草) 중 삼분지 일이 뽑혔다. 그것을 몸에 바르게 되면 유가비전(瑜佳秘傳)이 완성된다.
강룡사태가 전수해 준 외공(外功)은 이제 완벽해지게 된다.
몸 구석구석에 액체가 끈끈이 발라지면서…….
음양혈지액(陰陽血芝液).
금강화룡액과 같은 핏빛이나 농도가 다르다. 금강화룡액은 끈적끈적한 데에 비해 음양혈지액은 물과 같았다. 그것은 몸에 바르는 찰나, 피부 속으로 스며 들어갔다.
음양혈지액은 백무엽이 이미 먹은 화갈내단(火蝎內丹)과 금선사(金線蛇)의 힘을 완전히 융해시켰다.
세 번째 액체, 철마진액(鐵魔眞液).
청운영웅각에 머무르는 마의화타 석중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영약이다.
모든 마공(魔功)의 힘을 쓰러뜨리는 힘을 피부에 주는 영약이 철마진액이었다.
다시 말해, 호신강기(護身剛氣)가 파괴된다 해도 철마진액 덕에 피부는 찢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신병이기(神兵異器)에 당해 피부가 찢어진다 하더라도 곧 아문다.
가히 불사조(不死鳥)의 신체.
천 년 무림사상 유례가 거의 없는 불사조의 근골이 인문의 거대한 희생 가운데 탄생되고 있는 것이다.
제오단(第五段).
역시 백무엽은 석상(石像)이었다. 그리고 설향은 물(水)이 되고 있었다.
"조금도 움직이면 안 된다! 어떠한 것이든 움직이면… 너를 죽일 테다!"
설향은 아주 차게 쏘아붙였다.
"나를 만지려고 해도 아니 된다. 껴안으려 해도 아니 된다!"
그녀는 사납게 말한 후 물결이 되었다.
바위산을 일순에 휘감아 버리는 바닷물.
날카로운 것과 움푹한 것, 어떠한 것이든 잠겨 버리는 물줄기처럼 설향은 백무엽의 전신을 휘어 감고 있었다.
능풍옥수(凌風玉樹) 같은 백무엽, 그의 볼이 지금은 아주 시뻘개졌다.
육봉이 가슴을 밀착시키고,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와서 부딪치고 있었다. 손만 든다면 모든 것을 만질 수가 있다. 그런데 백무엽은 미동도 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움직이면… 주화입마에 든다.'
백무엽은 불같이 일어나는 욕정을 참아야 했다.
사납게 다가서는 여인의 몸, 열풍처럼 들이닥치는 여인의 숨결, 무저지(無底池)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여인의 늪…….
그 모든 것을 백무엽은 인내로서 참아내야 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모든 수련은 이 순간을 참기 위한 준비작업이었을 것이다.
"하아아아……!"
설향은 숨소리를 일부러 크게 낸다.
그녀는 백무엽의 순양동자진기(純陽童子眞氣)를 지극히 강하게 일으키기 위해 온갖 자세를 다 취했다.
암사슴, 암캐가 되고… 바람이 되고 풀이 된다.
백무엽은 몸이 박살나는 듯한 전율을 맛보았다.
'참아야 한다는 것이 이처럼 괴로울 줄은… 이제 진짜 알았다.'
백무엽은 사지에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는 지금에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여자(女子)란 좋은 것이야, 진짜로!'
제육단(第六段),
제칠단(第七段),
제팔단(第八段).
세 번의 단계는 백무엽이 구결에 따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이렇다 할 것이 아직은 없었다.
정사로 친다면 정말 긴 애무였을 뿐이다.
어찌 생각하면 고금에서 가장 지겨운 정사라고 할 수 있으리라.
"단 한 번이어야 한다. 그것이면 족하다. 더 하면… 죽여 버리겠다."
설향의 볼은 잘 익은 사과 빛깔을 냈다.
그녀의 얼굴 가운데에는 속눈썹의 숲그늘이 졌다.
그녀는 눈을 꼬옥 감고 있었다.
"한 번이면… 완성된다. 너는 고금제일자객(古今第一刺客)의 능력인 인법오결을 골수(骨髓) 안에 얻을 수 있다."
"알… 알겠소, 문주!"
백무엽의 눈빛은 흐릿했다.
그의 마음은 둑과 같았다. 그는 정녕 참지 못할 욕정(欲情)의 물결을 여덟 번에 걸쳐 마음의 둑으로 막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것을 일거에 터뜨려야만 했다.
"그… 그것은, 그것은……."
설향은 괜히 말을 해댔다.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인데, 그녀는 자꾸만 말을 한다.
백무엽은 거대한 산(山)이 되었다.
설향은 대지(大地)일 뿐, 산그림자에 완전히 파묻혀 버린 이름 모를 땅일 뿐이었다.
머리카락은 땀투성이가 되었고, 설향은 두 손을 허공에 번쩍 쳐들었다.
"하아아……!"
지금, 그녀의 손바닥에는 손톱 자국이 새겨지고 있었다.
백무엽은 완전한 몰아의 경지에 이를 수가 있었다.
삼매경(三昧境).
몸이라는 허울에서 벗어나 버리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
그 경지가 여인과의 몸 섞임 가운데 찾아올 줄이야!
백무엽은 구름이 되어 무산(巫山)의 봉우리를 휘감았다.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 하나 하나가 그에게 휘감긴다.
봉우리의 그림자는 그 때마다 흔들리고, 애절하기까지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어, 어서……!"
여인의 얼굴은 아예 울상이었다. 그녀의 손톱 자국이 남은 손바닥은 지금 백무엽의 허리에 닿아 있었다.
일자무학인 사람도 알 수 있는 한 가지 재간, 그것을 하기가 이렇게 힘이 들 줄이야!
일순, 백무엽은 뇌정(雷霆)이 되어 폭사되어 갔다.
그리고 설향의 애절한 표정은 돌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너, 너무하다!"
"으음……."
"나,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너는!"
"……."
"흐으으으… 이, 이러리라고는… 생각 못했었다. 정말이다!"
설향의 몸은 격랑처럼 흐르기 시작한다.
모든 것은 제구단에서 마무리지어져야만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분명 십단(十段)까지 갔다.
그것은 설향도 말하지 않았고, 백무엽도 말하지 않았으나 두 사람 모두가 잊지 못할 진실이었다.
눈은 천진부(天津府)를 은세계로 만들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도 눈이 많은 해였다.
보리 농사를 짓는 성곽 근교의 농부들은 눈이 많이 오면 내년 농사가 대풍일 것이라며 즐거워하는데, 사통팔달(四通八達)한 거리를 메우고 다니는 상인(商人)들은 눈 때문에 차질이 있다며 툴툴거렸다.
기실,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있어 대목의 기회가 바로 이 즈음이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강호계(江湖界)의 사대방파(四大 派)에서 거대한 연회가 베풀어진다는 것을.
운남(雲南) 대리왕부(大理王府),
회남(淮南) 화정신수궁(花精神手宮),
북망산(北邙山) 마라한궁(麻羅漢宮),
백제성(百齊城) 천풍세가(天風世家).
강호계의 신성(神星)으로 떠오른 네 곳의 방파는 신년(新年)을 기해 천하무림계에서 자신들을 소개하는 연회를 베풀 예정이었다.
그 연회의 규모는 가히 천자(天子)의 대관식을 방불케 할 것이다. 구파일방의 수로(首老)들이 대거 참석하고, 수륙제방파(水陸諸 派)의 초절정고수들이 사대방파의 장중한 초청에 따라 연회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사대방파는 백도 최고조직인 정법회(正法會)의 인증을 받았으며, 정법회주(正法會主) 단리음(段里音)은 자신의 사저이자 정법회의 총순찰(總巡察)인 벽안아랑(碧眼啞娘)을 칙사로 보낼 것이라 했다.
운화다루(雲華茶樓) 상층.
백무엽은 늘 앉던 그 자리에 앉았다.
그는 늘 마시던 그 차(茶)를 마셨다.
눈이 오기 전에 잘라낸 다엽(茶葉)으로 만든 용정차(龍井茶)를…
창을 통해 늘 보던 그 광경이 보인다.
천진, 이 곳은 그에게 너무나도 낯익은 장소였다.
어느 거리에 누가 살고, 매일 몇 시경에 누가 나타난다 하는 것은 외우고 싶지 않아도 다 외워진다.
그러나 백무엽에게는 천진부가 고향이 아니었다.
'나는 영원한 유랑자이리라.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나는 영원히 떠돌아다닐 것이다.'
백무엽은 찻잔을 손가락에 걸었다.
차를 들이키려 할 때, 찻물 위에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목덜미가 희고 가는 여인, 눈매의 선이 지극히 고혹스런 여인.
설향(雪香), 그녀의 얼굴이 문득 찻물 위로 떨어져 내렸다.
물론, 그것은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하여간 설향은 백무엽이 잊지 못할 여인이 되었다.
-무화령(無花令),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우리의 적인 마혼십가가 수십 년에 걸쳐 천하무림계에 뿌리를 내린 사대외단(四大外壇)을 섬멸하는 일이다. 실수가 있다면 인문이 멸(滅)하고, 천하가 멸하리라! 이유가 어떻든 성공해야 한다. 사흘 간, 그간 구결로 터득한 무공을 모두 다 익히며 기다리라! 화룡(火龍)이 연(鳶)으로 날아오르면 강가로 오라!
그 말은 설향이 풍만한 둔부를 백무엽 쪽으로 돌리며 옷을 입으며 한 말이었다.
'오늘이 사흘째다.'
백무엽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인문이 사도조직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아아, 인간이 되어 인간을 암살하고 다니는 것은 비극이다.'
창 밖에는 연(鳶)이 떠돌고 있다.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그 연은 인문이 허공에 날린 연이었다.
백무엽은 찻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이어, 그는 주전자를 들고 또 한 잔의 차를 자기 그릇 가득 따라 부었다.
'마혼십가, 그들은 얼마나 무서운 조직이기에 온 천하가 그들에게 질식해야 하는가? 그 우두머리라는 마화삼, 인간이 아니라 신(神)이란 말인가?'
백무엽은 또다시 차를 들이키려 했다.
바로 그 때였다.
"좋아, 좋아! 관상(觀相)이 정말 좋다!"
그의 고막을 때리는 소리가 있었다.
언제부터일까?
창 바로 아래 앉아서 세 자리 건너편 자리에 있는 백무엽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나이는 칠십 가량, 옷차림은 아주 화려한 편이고 평범한 사람은 갖고 있지 않은 두 가지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탁자에 기대어 둔 하나의 혈번(血幡).
<인생(人生)을 예측하는 천통력(天通力)을 금은자(金銀子)로 팔도다!
천하유자(天下遊子)>
혈번에는 그런 글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계피학발의 늙은이는 특이하게 생긴 새(鳥)가 들어 있는 핏빛 조롱을 탁자 위에 놓고 있었다.
다루를 찾는 사람은 보통 자신의 신분을 자랑하기 위해 조롱을 갖고 다닌다.
조롱 안에 귀한 기금이조(奇禽異鳥)를 넣을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신분에 대한 과시다.
해서, 왕후장상은 되지 못하고 공자대부(公子大夫) 정도 되는 사람들은 다루에 올 때 신기한 새가 든 조롱을 갖고 온다.
한데, 노인이 들고 다니는 조롱에는 문(門)이 없었다.
그것은 조롱이라기보다 새 집이었다.
눈에서 진물이 뚝뚝 떨어지는 괴노인 천하유자(天下遊子).
그는 손바닥을 탁자 위에 펴 놓고 있는데, 부리가 아주 붉은 소조(小鳥)가 그의 손바닥 위를 뛰놀고 있었다.
"세상은 노부의 손바닥 안에 있도다. 노부는… 천하지룡(天下之龍)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천지의 신복사(神卜士)이지!"
천하유자는 백무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무엽은 그를 보며 묘한 느낌을 받았다.
'기(氣)가 강한 사람이다. 분명… 몸 안에 막강한 내공을 지니고 있다.'
백무엽에게는 자객의 본능이 있다. 그는 상대의 기운에 대해 동물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본능에 따르면, 천하유자라는 노인은 지극히 강한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죽인 자들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 일개 점쟁이는 아니다.'
백무엽은 담담한 눈빛을 흘렸다. 그는 봉두난발한 머리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마와 얼굴 반쪽은 머리카락으로 인해 가려진 상태였다.
천하유자는 그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천골(天骨)이도다. 적어도 일천 명은 휘하(麾下)에 거느릴 상(相)이다. 하지만… 때를 못 만난 용(龍)이도다!"
천하유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는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복채도 받지 않고 점을 쳐 줄 수는 없지! 크크……!"
천하유자, 그는 싱긋 웃고 있었다.
그는 벌써 한 시진째 백무엽만 보았었다.
탁자 위에는 십자조(十字鳥)라는 기조 한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었으며 청(靑), 홍(紅), 금(金)빛의 종이가 하나의 목갑 안에 가득 담겨 있었다.
청지의 수는 수백 장이고, 홍지는 수십 장이었다. 그리고 금빛 종이는 단 한 장이었다.
"청지란 바로 십인지수(十人之秀), 열 사람을 거느릴 수 있다는 것이고… 홍지란 바로 천인지수(千人之秀), 천 사람을 거느릴 수 있다는 것이야."
천하유자의 목소리는 분명한 관어(官語)였다.
말투로만 본다면 그는 북경(北京) 토박이였다.
신복술사 차림을 하고 있으나, 그에게는 감추어질 수 없는 기도가 있었다.
백무엽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 표정을 할 뿐이었다.
조금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
천하유자는 또 한 번 백무엽의 그러한 표정을 본 다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어떤가? 복채를 내고 점을 보지 않겠는가?"
"글쎄요. 소생은… 운명을 믿지 않는지라!"
백무엽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훗훗… 어찌 운명을 믿지 않는가? 훗훗……!"
천하유자는 어깨를 가볍게 떨며 웃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십자초를 쳐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 녀석아, 저기 냄새 나는 서생은 운수를 믿지 않는다는구나. 훗훗, 그렇다면 어디 네가 저 냄새 나는 서생의 운수를 봐 주겠느냐?"
꾹… 꾹…….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는 십자조.
그 새는 인간의 기운을 알아 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몸은 아주 작으나, 그 힘은 해동청(海東靑)을 능가한다. 한 번 날면 만 리(里)를 쉬지 않고 날며, 수령이 천 세에 이르면 사람의 말귀를 알아듣는다.
꾹……!
십자조는 묘한 울음소리를 내며 위로 날아올랐다.
슷-!
십자조는 울며 백무엽 쪽으로 날아들었다. 어찌나 빨리 나는지 붉은빛이 쏘아진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한순간 십자조는 백무엽의 얼굴 바로 앞으로 다가섰고, 돌연 괴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급히 방향을 꺾었다.
팟-!
십자조는 찰나적으로 천하유자의 탁자 위로 되돌아갔다. 십자조는 돌연 공포를 느끼듯 털을 파르르 떨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군주(君主)의 명에 따라 위사(衛士)를 뽑으러 천하를 떠돈 지 어언 일천사 일. 한데, 이런 일은 처음이다. 천기(天機)를 느끼는 십자조가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니……!"
천하유자의 얼굴은 땀으로 덮였다.
'설마… 고금제일인상(古今第一人相)이란 말인가? 지극히 평범한 낙척서생(落拓書生)에 불과한데?'
천하유자는 몸을 떨다가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이… 휘이이이……!"
곡조가 이상한 휘파람 소리가 흐르더니, 공포에 떨던 십자조는 꾹꾹 대며 목갑 쪽으로 다가섰다.
새는 자신이 느낀 대로 종이를 고른다. 사람보다 영리하다는 신조(神鳥) 십자조는 목갑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천하유자의 눈길은 십자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일순, 십자조는 아주 빠르게 부리로 종이 한 장을 집어 올렸다.
꾹……!
큰 울음소리가 나며 십자조는 종이 한 장을 부리에 끼워 물고, 천하유자의 손바닥 위로 날아올랐다.
"그, 그것은… 금지(金紙)! 천명부(天命符)!"
천하유자는 식은땀을 쭈욱 흘렸다.
'아아, 돌아가신 가사(家師)는 조(鳥)와 운갑(運匣)이라는 것을 내게 전수하시었다. 운갑 안에는 단 한 장의 금빛 종이가 있고, 지난 세월 동안 신조가 금지를 고른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저 청년의 관상이 좋다 해도 홍지의 품격 정도인 줄 알았는데, 금지라니…….'
천하유자는 손끝을 파르르 떨었다.
백무엽이 보기에는 시시한 일인데, 천하유자에게는 지극히 중요한 일인 듯했다.
그는 지극히 경건한 자세로 금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사부, 불초제자… 하나뿐인 천명부(天命符)를 폅니다!"
천명부!
그것은 바로 금지의 진짜 이름이다.
노인은 만 장의 종이를 사부에게서 전수받았다. 그 중 구천 장은 인명부(人命符), 그리고 꼭 한 장이 천명부(天命符)였다.
천하유자가 사부의 유품을 들고 신복지로(神卜之路)에 든 지 어언 백 년.
그 가운데 천명부가 신조에 의해 뽑혀지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구배(九拜)를 드립니다, 사부!"
천하유자는 지극히 정성스럽게 절을 아홉 번 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일어나 천명부라 불리는 금색 종이를 폈다.
그 위, 주사(朱砂)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신조(神鳥)가 이 글을 뽑는 경우는 단 하나!
숙명적(宿命的)으로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의 운명을 지닌 사람을 보았을 때 뿐이다.
신조는 그를 만나기 위해 천지를 떠돌 것이다. 그리고 신복학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그를 만난다는 것은 더없는 행운이다.
만에 하나, 그가 친구(親舊)라면 즉시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그가 적(敵)이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암살(暗殺)하라!
그는 천(天)이다. 그는 정(正)과 마(魔)를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할 천살성좌(天煞星座)이고, 천왕제일존(天王第一尊)이다!
그의 기운은 신조를 죽이리라!>
천하유자는 글을 거기까지 읽고 새를 봤다.
한데, 새는 그렇게 짧은 사이 혼절해 있지 않은가?
'이럴 수가? 십자조가… 십자조가 혼절하다니? 그, 그렇다면 그 사람은 정녕 천의 기운을 몸에 갖고 있었단 말인가?'
정녕 필설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천명부를 뽑은 십자조가 혼절해 있다는 것은!
-친구라면 즉시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적이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암살하라!
천하유자는 힐끔 백무엽 쪽을 봤다. 한데, 그가 앉아 있던 곳은 텅 비어 있었다.
'없어지다니! 으으, 어디로 갔단 말인가?'
대신 중노미 하나가 찻잔을 치우고 있었다.
이사(李四)라 불리는 중노미는 천하유자가 자기를 보자, 웃으며 말을 붙였다.
"노야(老爺), 여기 계시던 분은 마음이 좋으신 분입니다요. 노야의 다대(茶代)를 대신 치르셨습니다!"
"그, 그는 떠났느냐?"
천하유자의 얼굴은 시뻘개졌다. 그는 상당한 내공을 가진 사람인데, 백무엽이 나가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가셨습니다. 노인이 절을 하고 있을 때! 창을 통해 밖을 보시다가는… 화룡연(火龍鳶) 하나가 끊어져 날아가는 것을 보시고 떠나셨습니다!"
"그, 그는 누구냐?"
"백무엽(白武葉)이라는 분입니다!"
"어, 어디 사는 사람이냐?"
"어제까지는 화림의 서기(書記)였습니다만… 헤헤, 이제는 아닙니다. 화림이 폐쇄되었기에 멀리 떠나신다 하셨습니다. 헤헤, 본시 그분은 외지(外地) 사람이시지요. 우리 다루의 단골이셨습니다. 그분은 참 좋은 분입니다. 이 놈에게… 우수리 돈을 아주 많이 주셨지요."
이사는 손을 쳐들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은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은덩어리에는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아마도 이사는 은이 진짜인지 알아 보기 위해 이빨로 은을 세게 깨물었던 것 같았다.
"갔다고? 떠났다고? 아……!"
천하유자는 넋을 잃고 말았다.
'그가 바로 진흙 속의 보물이었단 말인가?'
그는 백무엽의 얼굴을 기억해 보려 했다. 한데, 이상하게도 백무엽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누런 옷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주 흰 피부, 부드러운 목소리… 으음, 그런데 자세한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대체 이럴 수가? 얼굴이 기억나지 않다니…….'
천하유자는 또다시 충격을 느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는 재간으로 이름을 날렸고, 얼굴에 있어서만은 특이한 기억력을 갖고 있다. 한데, 내가 방금 본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다니…….'
그는 몸을 벌벌 떨었다.
"무(無), 그가 내게 남긴 것은 무였다. 그렇다면 그는 백치(白痴)이거나, 이미 완성된 자객(刺客)이거나… 초절세고수다!"
천하유자는 급히 손을 허리에 댔다.
그는 늘 묵통(墨筒)과 세필(細筆)을 허리에 매달고 있었다.
"하여간 군주께 알리자. 그것이 친위감찰이 할 일이니까!"
그는 그것을 풀어 낸 다음, 제 옷자락을 폭이 좁게 찢어냈다. 그는 옷자락을 종이 삼아 그 위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친위대(親衛隊) 감찰(鑑察) 천하유자(天下遊子)가 군주저하(君主底下)께!
명에 따라 천하를 주유하며 친위대에 새로 들 기재(奇才)를 고르러 다니던 중, 한 명의 절세기재(絶世奇才)를 만났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이미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갔습니다. 이 소식을 전하는 이유는 화영친위대(華影親衛隊)를 새로 조직하실 때, 한 자리는 남겨 두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저하(底下), 정혼자(定婚者)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일천 위사(一千衛士)를 삼천 위사(三千衛士)로 확대하시는 군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군주 천천세(君主千千歲)!>
군주(君主)라니?
황궁(皇宮)의 화영군주(華影君主)를 말하는 것인가?
현 천자(天子)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화영군주.
그녀는 여인이면서도 패도적 기질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강호고수들을 모아 친위대를 만들었다.
화영친위대(華影親衛隊).
그 조직은 강호의 어떤 조직보다도 막강하다. 아니, 그들의 힘은 소림사(少林寺)와 개방을 능가한다고 공공연히 이야기된다.
강호방파는 친위조직이 거대해지는 것을 지극히 염려했다.
그리고 황실(皇室)은 강호계 인사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친위대를 강호로 보내지 않겠다고 천하무림계에 약속했다.
-꼭 필요한 일로 강호출입을 할 때에는 변복(變服)을 하고, 죽는 경우라도 자신이 친위대임을 말하지 않는다.
친위대 통령(統領)이라는 십대천장(十大天將)은 강호의 백팔 명숙(百八名宿)에게 그런 내용을 적은 쪽지를 전한 바 있었다.
화영군주(華影君主).
자금성(紫禁城) 밖으로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여인, 그리고 곧 천하제일인의 내자(內子)가 된다고 소문이 나 있기만 한 구중궁궐 속의 여인 화영군주!
아아, 그녀도 서서히 준동하는 것인가?
암중에 수하를 천하에 풀어 휘하세력을 넓히며, 어떠한 바람(風)을 내륙에 일으키려 하는 것인가?
십자조(十字鳥)는 하늘을 향해 떠올랐다.
그리고 중노미 이사(李四)는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천하유자가 차 한 잔 값으로는 너무 많은 금원보(金元寶) 하나를 손에 쥐어 주며 씩 웃었기 때문에!
십자조는 헝겊을 다리에 묶은 채 날아갔고, 열렸던 창문은 바람에 의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자네는… 하나도 아니 본 것이야. 알겠는가? 그러기에 남에게는 할 말도 없는 것이야!"
천하유자는 혈번을 어깨에 멘 채 뒤돌아서 걸어갔고, 중노미 이사는 쎄쎄를 연발하며 절을 해댔다.
"용(龍)은 인력으로 잡을 수 없으리라. 아암, 인력으로 잡을 수 있다면 용이겠는가? 헛헛, 나로서는 한순간이나마 고금에서 제일 좋은 기도(氣度)를 가진 사람을 만났다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다시 떠돌 수밖에! 운이 좋다면 그를 다시 볼 수도 있겠지!"
첫댓글 r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