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제안은 의외였고 뜬금 없었다.
어버이날을 맞아 하루 전인 지난 5월 7일 장모님을 방문하기로 한 후 갑자기 공연을 하자는 것이었다. 석 달 전부터 동작 문화원 시조,소금(小琴)반에서 일주일에 2시간 씩 아내와 함께 교육받고 있는 정가(正歌)를 어머님 앞에서 부르자는 게다. 처음에는 너무 황당하여 농담을 하는 줄로 치부했는데 아내의 얼굴은 진지했고 천연덕스러워 결국 마지못해 동의했다.
아내의 그저 그런 노래 실력과 3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자발적으로 노래를 한 적이 없는 걸
감안할 때 이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이었다.
출가하여 육아 휴직 중인 딸과 함께 가니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다.
아내는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나서 연만하신 당신은 막내딸을 시집 못 보내고 돌아가실까
걱정이 되어 자나 깨나 노심초사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막내딸이 결혼을 하고 그 딸의 딸이 시집을 가서 다시 남매를 낳을 때까지 생존해 계시니 장모님의 걱정은 결국 기우(杞憂)였던 셈이다.
장모님은 올해 아흔 아홉, 백수(白壽)이시다.
거동이 약간 불편하실 뿐 비교적 건강한 편이어서 식사도 잘 하시고 기억력도 좋으셔서 30년 전 내가 해외 근무할 때 세 살부터 2년간 딸을 보살펴 주신 어릴 적 이야기를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외손녀에게 마치 세밀화를 그리듯, 동영상을 보듯 되풀이해서 자세히 말씀하셨다.
아내가 정성들여 준비해간 불고기, 주꾸미, 산나물 등으로 점심을 한 후 마침내 걱정하던 공연시간이 왔다. 전 날 옛 직장 동료와 오랜만에 과음을 하여 목도 잠기고 컨디션이 엉망이어서
공연(?)을 취소하자고 했으나 결국엔 강행하는 쪽으로 내가 지고 말았다.
장모님을 소파에 모시고 복 날 개처럼 힘없이 끌려가 앞에 서자 아내가 돌연 색다른 제안을 했다. 정가를 부르기 전에 어버이 날 노래를 하자는 게다. 이건 전혀 프로그램에 없던 돌발 사고였다. 내가 자신이 없다고 하니 딸과 함께 부르자고 해서 아내와 딸이 장모님 앞에서 듀엣으로
‘어버이 날’ 노래(어머님의 마음)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
처음 제법 호기롭게 큰소리로 시작한 모녀의 ‘어머님 마음’ 노래가 차츰 가늘어지며 우물우물하더니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를 부르고 나서 노래가 중단되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 ~ ~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의 ‘어머님 은혜’ 가사와 헷갈리기도 하고 나 역시 눈만 멀뚱멀뚱할 뿐 가물가물 가사 생각이 안 났다.
그 때 그림처럼 눈을 감고 소파에 얌전히 앉아 노래를 들으시던 장모님이 불쑥 말씀하셨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이잖아!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 장모님을 제외한 나, 모녀, 도우미 아줌마는 놀라움에 멍해졌다가 곧 이어 동시에 웃음보가 뻥 터졌다.
한참을 웃다가 장모님 덕분에 마지막 소절을 무난히 끝내고 나서 나와 아내가
‘어디로 갈거나’ ‘조각배’ 등 원래 프로그램에 있던 국악 가요를 불렀다.
하지만 아내와 내가 부른 청승맞은 노래는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코스에 없던 ‘어머님의 마음’ 노래같은 감미롭고 강력한 전채(前菜) 때문에 꼭 먹어야 할 주요리(主料理)가 아니라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후식(後食)에 불과했다.
장모님은 눈을 감고 막내딸과 외손녀의 ‘어머님의 마음’ 노래를 들으시며 아마도 10년 전 돌아가신 장인어른이나 아주 오래 전에 돌아가신 당신의 어머님을 그리워하시며 마음 속으로 노랠 따라 부르셨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집에 오는 길에 불현듯 들었다.
첫댓글 감동이네! 어르신이 생존해 계신 것 만도 축복인데 기억력까지 총총하시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화목한 집안 분위기가 내 마음을 찡하게 하네...
좋은 글 감사하네!!
참 가정적이고 효녀이며, 현모양처라는 생각이 드는구먼, 딸 결혼식에 늦게 참석한 나의 손을 잡고 사진찍고있는 마누라에게 끌고가서 소개시켜 주었을때 인상에 남았던 자네 마누라 모습이 다시금 떠오르네..
단편 " 어머님 마음 "을 읽고.........
유군도 이제 많이 컷구나! 노인네 마음도 헤아릴줄 알고~~~
Gre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