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모자에 대하여
의상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모자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이런 누락은 모자가 없는 탓이 아니다. 정반대다. 있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 반대로 모자의 중요성만이 그 종류 보다 더 의미가 있다. 사실, 이 주제는 한 장(章)으로 모자란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사물의 경이로움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 중요성이 덜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것처럼, 모자에 대해 중구난방으로 묘사한다고 품위 있게 되는 일도 아닐 것이다. 안타깝게도, 여기서 이 생각 저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편으로는 조선인들에게 있어서도 중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에 있어서도 그 과학적인 가치가 중요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보고서는 꼭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달갑지 않게도, 이 일을 지금 당장 할 수 없다. 그러나 모자에 대한 연구가 끝난 후, 그것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이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사실들조차 반드시 인류의 딱 절반에게 증명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이 주제에 대한 내 자신의 느낌들로 인한 고뇌와 함께, 나는 이 짧은 글에 담아야 하는 것을 축약하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모자의 나라라고 알려진 것 외에 다른 특별함이 없는 나라에 대한헌사는 거의 없다.
유명한 바이스니흐트보의 토이펠스드룩 교수는 의상에 내재된 위대한 과학적 관심을 높이 평가한 최초의 철학자인 듯하다. 의류에 관한 그의 석학 논문에서, 그는 우선 과학자들의 관심을 과학계의 소외된 외곽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는 아직 자세히 연구되지 않았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그런 불행한 개별 표본들을 별 관심 없이 다루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모자는 무시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원래, 누락은 일반적으로 그 물건이 부당하지만 전적으로 억울하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평상시 모자를 착용할 때 보이는 관습적인 무례로 밖에 설명할 수 없을 뿐이다. 그것은 단지 여성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오래 동안 고려할 그리고 다정한 관심을 둘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머리가 짧게 자라는 남성에게는 훨씬 더 필요한 부속품이지만, 남성에게 있어서, 그것은 단지 공공장소에서의 사용에만 영향을 미치고, 날씨의 악화에 비례하여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간주되고, 그에 따라 평가된다. 혼자 있게 되면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는다. 눈에 거슬려서인지, 집에 들어가면 어두운 옷장 안으로 단숨에 사라진다.
예술은 보통 과학보다 앞서고, 아마도 유럽 북부의 회색 하늘이 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아니면, 아마도, 자연은 키 큰 원통 방식에서 창조적 능력의 한계에 도달했고, 자연의 힘은 더 이상 확장될 수 없었다. 오늘 날, 우리가 납작 모자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의 다음 시도에서 위풍당당한 건물이 갑자기 무너졌다. 실망한 자연은 더 이상노력하지 않았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상당히 다르다. 거기서 모자는 정당한 대접을 받는다. 특히 모자의 나라 조선에서는 모자를 중히 여긴다. 실제로 모자 속(屬)의 무한한 가능성을 처음으로 깨닫는 것은 바로 거기서다. 그것은 하나의 계시처럼 내려온다. 그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명백한 규범적 권리를 획득한 관계로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와 친숙한 물건들이 조선에서는, 가장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단지 다른 형태의 모자에 불과하다. 과연, 누가, 순전히 자신만의 추측에 근거해, 본능적으로 전율케 하는 거대한 녹색 알파카 "과(果)” 우산이 섬세한 공상에 의해 보닛이라 알려진 미인의 손길 같은 턱 끈 모자중의 하나와 사촌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과학적인 열정이 가득한들, 우리는 거의 같은 말을 했을까? 조선은 연관성의 증거를 제공하고, 위대한 발전 이론에 또 하나의 결정적인 증거를 추가하는 영광을 누렸다. 우산에 우산대를 붙이고, 턱끈모자에서 연원이 같은 마지막 미미한 흔적인 끈을 없앤 것은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험한 날씨로 인해 우산은 독립 이후에 노력이 스며들었고, 좋은 날씨는 턱끈모자를 별도의 존재로 정착시키는 유혹이었다.
고요한 아침의 공기는 종의 분화에 유리하지 않다. 매년 파리, 런던 또는 뉴욕과 같은 자연 선택은 작동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카시”또는 모자는 매우 다른 형태로 분화되는 것을 막아왔다. 그 모자는 거의 예외 없이 국내 용품으로 남아 있다. 어떤 종도 야외에서 막쓰는 종(種)이 되지 않았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우산 종(種)은 어느 정도 전통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목격된 바와 같이 우연히, 우산은 소유주를 쉽게 바꿈으로써 독자적인 존재를 획득했다. 그것을 많이 사용하는 부류는 여전히 남성이지만, 더 이상 남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다. 조선에서는 그렇다. 그것은 다른 모자와 마찬가지로 머리 윗부분에 착용한다. 이것은 큰 장점 이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더욱 안전하고 평화롭게 만들어준다. 친구의 우산하고 사랑을 나누지 않게 되니, 그런 면에서 몹시 복 받은 나라다. 문제의 물건이 주인의 머리 위에 있지 않을 때, 그의 주머니에 안전하게 넣어져 있기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있다. 물론, 두 사람이 함께 하기에는 공간이 부족하다는 사회적 불편함 때문에 약간의 노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혼자서 보행하는 땅에서는 덜 중요하며, 우산은 결코 이중의 봉사를 요구 받지 않는다. 맑은 날에 모자를 쓰더라도 머리가 닿아 보았자 어느 쪽도 만족스럽게 이해하지 못 할 정도로 여전히 멀리 떨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행스럽게도 단둘이 마주볼 일이 없게 된다.
그래도 우산을 호주머니에 챙길 수 있다는 것은 큰 편리함이 다. 이것은 진한노란색의 기름을 바른 종이의 다각형 원뿔형이며, 모자 위에 묶여 있고, 끈으로 턱 아래에 묶여 있다. 그것은 칭찬받을 만하게 작은 나침반모양으로 접히고, 날씨가 개면 착용자의 소매 속으로 신비롭게 사라진다.
"카시”속(屬)은 분화하지 않는데, 종(種)으로 말하면 더 많은 품종을 개발해냈다. 우리 박물관이 체계적인 모자 수집의 중요성을 깨달을 때가 되면, 조선은 수집가의 천국이 될 것이다. 다양한 종류의 수는 그야말로 엄청나다. 또한 실증되지 않은 변종도 있다. 각각의 모자는 특별한 목적에 맞게 개조되었다. 맑은 날씨를 위한 모자, 비 오는 날을 위한모자, 실내 모자, 야외 모자, 일상모자, 궁중모자, 거대한 모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모자가 있다. 간단히 말해, 위로는 하늘의, 아래로는 머리의 모든 상태에 맞게 특정한 모자를 적절하게 선택한다.
지하 창문에서 보도 위 행인들의 신체 아래 6인치의 모습을 살핌으로써 행인들의 특징을 알아보는 연구가유럽에서 한 번 수행된 적이 있다. 조선에서 상위 6개를 취한다면, 당신 나라의 사람에 대한 결정 기준으로 해도 좋다.
흔히 볼 수 있는 야외용 모자는 갓으로 조선인들에게 인기 있는 것으로 우리 고유의
키 큰 모자와 함께 무의미한 형태의 불합리함에 순위를 매길 가치가 있는 정말 훌륭한 발명품이다. 그것은 작은 원형으로, 잘린 원뿔형 왕관 모양이고, 밑 평상모자 부분의 지름이 5인치 정도이고, 꼭대기에는 좁아져서 4인치, 높이도 그 정도, 그리고 지름이 약 18인치 정도 되는 넓은 원형 테두리를 가지고 있다. 즉, 그것은 특허 낸 파리잡이 통처럼 보인다. 그것은 아주 미세한 대나무와 비단 조각으로 만들어졌다. 대나무는 비단을 엮는 뼈대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너무 섬세한 작업이라 미숙한눈으로는 두 가지 재료 중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감지가 거의 불가능하다. 더 싼 표본에서는 전체가 말 털로 짜여 있다. 단지 잡다한 장식을 넣어 짜인 다른 모자들도 그렇지만, 모양을 중시해서 짜인 모자의 기하학적 형태가 가장아름답다. 안타깝게도, 이런 점들은 숨겨져서 눈에 잘될 수 없었다. 그 모자는 턱밑에 묶는 넓은 검은색 끈으로 고정되었고, 그 자체가 균일한 광택이 나는 검은색이다.
선사 시대에는 갓 쓸 일이 없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오래 전에, 그것이 현재의 위치로 성장했고, 단지 다른 모자를 써야만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조선인도 체면상 그것 없이는 나타날 수 없다. 남자는 모자를 벗는 것보다 옷을 벗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집에 들어서면 신발을 돌아올 때까지 밖에 놓아두지만, 모자는 쓰고 들어간다. 그는 식사를 위해 앉으면서, 더 큰 자유와 함께 먹을 수 있게 겉옷을 벗어 던진다. 하지만 모자는 계속 쓰고 있고, 그래서 그것은 평생 동안 그에게 붙어 있다. 영원한 검은 후광이다.
중요성에 있어서 다음 차례의 정통모자는 - 두 가지 의미에서 단연코 그러하다 - 검은색 두개골 모자인데, 이는 우리 조상들의 나이트 캡 형식이다. 모자 속옷의 한 종류로 설명될 수 있다. 가장 낮은 등급을 제외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위에서 언급한 갓 아래 항상 착용한다. 이것은 질에 따라 비단이나 말 털로 되어 있으며 갓만큼 뻣뻣하지 않다. 피라미드 형태로 한 때 유행했던 젤리 만드는 틀 같다. 계단식으로 뒤 쪽으로 솟아 있어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갓처럼 항상 그 용도로만 쓰인다. 갓보다 더 가까이 머리에 달라붙어, 꿈의 나라로 가는 여정에서 머리의 충실한 참석자로 남아 있다.
지속적이어야 한다. 그것이 가장본질적인 속성이다. 그 덕택에 사람은 사회에서 자신의 지위를 지닌다. 남자는 아내에게 애착을 갖는 것보다 모자에 훨씬 더 단단히 묶여 있다. 그는 아내를 치울지도 모른다. 모자가 없으면, 삶은 공허한 조롱거리가 된다. 모자를 써야 어른이 된다. 모자가 없으면 그는 영원히 소년으로 남는다. 이러한 이유로 갓을 쓰는 관례(冠禮)는 엄숙해진다.
남자는 태어나면서 꼬리를 갖는다. 길게 땋은 검은 머리가 그의 등을 어루만진다. 고대에도 그러했을 것 같고, 죽은 사람들의 선물에 걸맞게 검은 끈으로 끝을 묶었다. 처음에는 여자 애처럼, 그의 외모는 이웃 일본에서 몇 년을 산 사람들조차 그가 소녀라고 믿게 만든다. 현재 단계에서 그는 모자의 기쁨과 명예를 알지 못한다. 단정하게 빗은 굵고 거친 머리칼은 그의 유일한 머리 가리개다.
아마도 닿은 머리라는 매개체를 통해 영혼을 숭배하는 것은 서양의 저급한 취향이다. 어쨌든, 조선 소년은 자신의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 가능한 첫 번째 기회에 그는 머리카락을 잘라버린다. 머리카락은 사라진다. 그 중 일부는, 우리가 듣기에, 다른 누군가의 이름으로 유럽에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예술의 당연한 유행에도 불구하고, 파리의 미녀들 사이에서 세월의 상흔을 보완하기 위해 수출될 경우, 머리카락 자체는 너무 거칠어서 그녀들의 자연적인 머리카락과 충분히 섞이지 않아 아무리 경험이 적은 가발 숭배자라도 속지 않는다. 조선인은 그에게 남아 있는 머리를 산호나 호박 막대기 주위로 사랑스럽게 휘감아 세워 모자등지 안에서 비누와 물로부터 안전하게 감싼다.
이러한 머리 모양의 변화는 조선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7살에 일어나며, 일반적으로 그가 14살이 되기 전에 일어난다. 그에 의해 그는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혹은 더 진정으로 동양의 사상에 순응하기 위해 가부장적으로 남자가 된다. 그것은 로마에서 남자가 14살 때 토가를 입는 것과 비슷하다. 필요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조건부 행위, 즉 혼인이라는 것이 수반된다는 점에서 한 가지 약간의 차이가 있다. 혼인은 서울과 파리에서 일종의 상호성이 있다. 둘 모두, 즉 한 쪽에서는 남자가, 다른 쪽에서는 여자가 자리를 잡는 디딤돌이다. 쾌활한 수도의 소녀에게 쾌락의 열쇠이고, 조선의 소년에게는 삶의 관문이다. 우리는 두 나라 모두에서 계약의 나머지 절반, 즉 각각 남성과 여성에 대한 결과가 그리 중요 하지 않다는 것을 거의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다시, 완전한 결혼을 위한 다양한 단계들은 다른 모자로 특징지어진다. 평상시에는 보통 짚으로 만든 모자를 쓰다가, 준비 단계인 약혼식 때에는 노란색 짚으로 된 모자를 쓰고, 결혼한 다음부터는 검은 비단으로 장식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이제 그의 후광을 얻었다. 그가 귀족 가문이라면, 그리고 시에 능통하다면, 날개를 펴서 왕이 있는 곳으로 날아갈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든 더 이상 시선을 끌지도 않고, 갓을 쓴 풍경이 익숙해져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볼 정도로 갓이 평범하게 보일 때, 관모는 여전히 여러분의 잠재된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것은 다른 모자들과 같은 재질이지만 모양이 다르다. 높은 타원형의 왕관은 반쯤 위로 한 계단 올라가 이마 위에 꼭 맞으며, 양 옆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인간의 귀를 본떴다고 하며, 왕명을 받는 민첩함을 묘사한다. 어느 곳이든 복종의 첫 걸음은 듣는 것이다. 앞쪽에 오목한 면이 있는 주걱 모양을 하고 있다. 그들이 의도한 대로 어느 정도 천사 같은 모습을 조정에게 전한다. 그리고 통치자에의 명령을 수행하는 천사가 되는 것은 온 나라의 야망이다. 등급은 무엇보다도 날개의 차이로 표시된다. 위치가 높을수록 날개가 두꺼워진다. 이 날개는 한 겹이 아닌 두 겹으로 제작된다. 심지어 왕도 같은 방식의 모자를 쓰나, 날개가 옆으로 내밀지 않고 꼿꼿이 세워져 있을 뿐이다. 종주국인 중국 황제는 귀에 들어오기엔 너무 멀다.
순전히 개인적인 야외용 모자, 즉 야외에서 착용할 수 있는 모자의 일부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모든 야외용 모자는 실내용 모자도 되지만, 실내용 모자는 반드시 야외용 모자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교황 모자가 있다. 이것은 가장 엄격하게 평복에만 착용된다. 어떤 사람과 친밀한 사람만이 그것을 볼 수 있다. 거리에서 그것을 쓰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매우 부적절할 것이다. 모양상 교황의 왕관모자와 같다. 해부학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구조적으로 똑같다. 검은 비단으로만 이루어진 뼈대로 그 이상은 아니다. 발굽같이 갈라지고, 작은 탑 모양이고, 뾰족뾰족하고, 그러나 몸체도 없고 무게도 없다. 만약 교회가 물질적 우월주의의 교리를 버리고 오로지 하늘나라에 국한된다면,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모자의 형태에는 어떤 적합성이 있다. 조상숭배만이 유일한종교인 이 땅에서 모든 사람은 부득이 자신이 대제사장이며, 따라서 예절 바르게 제사장 휘장을 달수도 있다.
그리고 요리사 모자가 있다. 요리사가 아니더라도 군인부터 가게 주인까지 거의 모든 계급이 무분별하게 이것을 착용한다. 그것은 때로는 검은 색이고 때로는 흰색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작은 모자, 즉 크기를 평방피트 로 측정할 필요가 없는 모자에 대해 설명했다. 큰 모자는 인상적인 두 가지 종류로 대표되는데, 소몰이꾼 모자와 상주용 모자가 있다. 둘 다 모자 쓴 사람을 주위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숨기는 것이 목적이다. 소몰이꾼의 경우,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보행자들을 밀쳐내고서는 그들을 못 본 것에 대한 핑계를 댈 수도 있다. 상주의 경우, 그가 평상시의 직업에 종사하면서도, 매정한 세계에서 물러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대형 떠돌이 버섯은 처음에 서로 헷갈린다. 경건한 성향을 가진 사람은 그가 상주임을 알고 정중히 길을 내주었다가 소몰이꾼임을 나중에 안다.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 기하학에 대한 자세한 지식은 그 어디에도 필요치 않다.
그것은 모두 육각형과 사각형 사이의 문제다. 두 모자는 모두 짚을 엮어만 들어졌으며, 두 모자는 모두 뒤집어진 거대한 수프 접시 형태다. 처음에 가장 쉬운 차별은 소를 찾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비과학적 이고, 만약 소몰이꾼이 일시적으로 그의 동물과 헤어지게 된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 중요한 차이는 짚을 엮는 방법에 있다. 하나는 밑이 사각형으로 끝이 나도록 짜여 있는데, 이것은 소몰이꾼 모자이고, 다른 하나는 상주 모자로 육각 테두리를 가지고 있다. 상주 모자는 더 세밀하고 무거워, 들고 다니기 더 괴로운 것이다. 짚을 엮을 때, 끊어짐 없이 모자 꼭대기까지 이어진다. 굳이 표현 하자면, 사슬처럼 끝이 없다. 움직이는 베 덩어리를 걸어서 추월할 때, 두 가지 명백한 양립불협화음, 즉 밑쪽의 사각형, 위쪽의 둥근 모양을 연구하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 모서리가 튀어 나오고, 비껴 보면 그저 평평한 듯 보인다. 그러는 동안 모자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고, 아마 그 밑에 한 남자가 있을 것이다.
이 모자의 표면적은 약 6평방피트다.주1 자신의 그림자에서 영원히 인생을 여행한다면, 모자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자기 그림자의 크기를 늘릴 수 없다. 상주들의 경우가 그 최대치다. 그 기간은 겨우 3년이다.
군인의 모자는 색깔을 띠는 거의 유일한 종류다. 심지어 일반 사병들도 검은 부직포의 침울한 선을 없애기 위해 가장 섬세한 규율을 암시하는 붉은 띠를 두르고 있고, 장교들의 모자 장식은 요란하다. 화려한 색상의 깃털과 화사한 끈들이 넓은 챙 위에 퍼져 있으면서 서로 경쟁한다. 실용성이 필요 없는 곳에서는 모든 정력을 장식에 쏟을 수 있다. 군대는 엄밀한 의미에서 전적으로 재택근무다. 이는 행차 날에 왕의 수행원 수를 부풀리기 위한 것이며, 분대 별로 나누어 관리들의 행차에서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옛날에는 철저히 자기 일에만 신경 쓰고, 외국 군대들은 몰라도 되었다. 이제는 외부로부터의 나쁜 소식이 점차 그 순수성을 타락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그 모자는 마치 지름이 2피트와 2.5피트 사이의 반구를 납작하게 만든 것 같다. 표면적 계산 공식인 2πr을 적용하고 모양이 다른 점을 고려하여 약간을 빼면 6평방피트가 된다.
이 모자와 관련된 발견에 대해 여기서 언급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어느 날, 우리가 서울 시내를 헤매던 중에 우연히 군모가게를 발견했다. 우리가 본 가게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우리는 본론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보면 7피트 높이의 일반주택처럼 지어졌고, 뒤쪽은 10피트까지 솟았으며, 기와지붕이 대들보에서 길거리로 급강하했다. 그것은 허세가 아니었다. 매우 좁은 문을 제외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돌로 된 벽만 보인다. 그것은 분명히 화려한 과시보다는 존엄한 사생활을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내가 가게를 갖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곳에는 항상 내가 그 목적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집 앞 가판대에는 검은 부직포 모자가 늘어서 있었고, 옆 땅은 텅텅 비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가장 흔한 눈속임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상공을 힐끗 올려다보니 가게 주인의 기발함이 눈에 들어왔다. 지붕은 높이도 높고 경사도 심해서 뒤로 조금만 물러서면 위쪽 물건이 훨씬 잘보였다. 더 고급스런 지붕들처럼 그것은 두루마리 기와와 기와사이의 평행한줄, 즉 계곡의 중간선을 남기는 식으로 배열되어 있다. 조선의 천재성이 보였다. 주인은 이 기와 계곡을 모자가 더 많이 전시될 수 있는 전시장으로 삼아야겠다는 즐거운 생각에 모자들을 지붕 위에 진정한 군대식으로 줄지어 진열하고서 손님들을 기다렸다.
이것은 남자모자의 몇 가지 표본이다. 여자모자는 별로 없다. 모양상 여성에 부합하도록 우아하게 도안한 등근 테가 있는 모자는 단 두 가지뿐 인데, 조선에서 여성은 이 왕국에서 배제되어 있다. 즉, 현재 불완전한 수집 상태에서 우리의 연구에 보상을 준 둥근 테 모자는 단두 가지뿐이다. 이중 하나만이 현존하고 다른 하나는 안타깝게도 멸종되었다. 후자는 족보 면에서 흥미롭다. 그것은 실제 조상은 아니더라도 술이 많이 달린 양산의 고모할머니다. 아마도,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이 여성 착용품의 교태에서 느끼는 짜릿함은 그 조상을 도안한 의도와 정확히 반대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은폐함으로써 더 황홀하게 드러나는 그 술은 처음에 발명되기를, 추앙자가 충분히 열성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비상시에는 여성 자신이 내다보는 것이다. 모자는 검은 머리카락을 뒤쪽으로 모아올린 쪽진 머리 위에 단단히 얹혀 있다. 이 넓은 챙은2피트 길이의 술들이 촘촘하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매력적인 원 안으로부터 아름다움만이 세상과 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단언컨대 과거에는, 때때로 원하는 물체를 더 잘 보기 위하여 예쁜 손이 드리워진 술을 걷었다가, 성급하고 놀란 눈으로 힐끔 보고, 술은 자신의 의무를 의식한 듯,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이것은 지난 5세기 전에 유행한 것이었고, 뒤 이은 혁명의 와중에 약 5세기 전에 사라졌다. 유럽 여성 모자의 수도보다극동 지역에서 양식이 더 느리게 변화한다. 프랑스 황후 대신, 북경 궁정이 양식을 정한다. 왕조가 한 번 바뀌면, 취향도 가장 변덕스럽게 바뀌고 이에 따라 새로운 양식이 요구된다. 평균적으로 200년에 한 번씩 왕조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결과 새로운 이민족이 기존의 지배 민족을 타도하게 된다. 북경에서 각각의 새로운 양식이 비교적 변방인 조선으로 진출했지만, 옷차림의 국적이 바뀐다는 핑계조차 댈 수 없던 보수적인 조선인들은 마침내 옷 모양을 바꾸는 것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미 익숙해진 터였고, 다소 구식임에도 불구하고 5세기 동안 한 가지 모자 모양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불쌍한 여성들에게 정책의 변화는 오히려 불행했다. 단지 그 순간에, 우연이든 운명의 변덕이든, 그들은 모자 없이 살게 되었다. 모자 모양이 야기하는 실제적인 불편함은 차치하고, 모자를 안 쓰는 것이 불편함으로 인식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한 일시적인 불편은 쭉 지속되어 여성들 사이에서 모자는 영원히 사라졌다. 그들은 모자를 대신해서 고풍의 녹색 장옷을 입었다. 그 옷은 명백히 임시변통이다. 머플러처럼 머리부터 발까지 뒤집어쓰고 손을 사용해 안쪽으로 여미면, 더 이상쓰임새 없는 소매가 몸 양 옆으로 그냥 매달려 있다.
위에서 언급한 다른 한 종류는 현존하는 것으로서 꽤 예쁘다. 모든 여자들이 쓸수 있지만, 극소수만이 쓴다. 사실상 그것은 순전히 전문적이기 때문에 아주 적은 숫자만 충족된다. 그것은 그 자체로 그리고 그것을 착용하는 사람들의 특징으로 볼 때 매력적 인 작은 물건이다. 이것은 종군 여자상인 모자와 꼭 맞먹는 것으로 일본 사회와 마찬가지로 조선인의 별인 기생들이 모두 착용하고 있다. 사랑과 전쟁에서 모든 것이 정당하다면, 우리가 '정당하다’라는 형용사를 "아름답다”라는 뜻으로 읽는 것을 선호한다면, 왜 모자 같은 것이 두 경우 모두 수행천사들의 독특한 표식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서울에는 모두 스무 개 밖에 없기에, 모자의 표본은 드물다.
이러한 것들은 "갓"속의 몇 가지 종류다. 그 주제에 대한 확장해서 논문을 쓴다면, 다른 많은 모자들에 대한 토론이 매우 흥미롭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지만, 시간이 없어서 우리는 매우 가치 있는 일을 시도할 수 없다. 우리는 모든 모자를 망라하여 목록화 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마지못해, 정말로 마지못해, 우리는 내버려 둔다. 그러나 현재 그 주제의 요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지나가는 말로 그것으로부터 한 가지 추론을 우리는 끌어낼 수 있다. 과학의 손아귀에 잡히는 결과가 없었기 때문에, 은둔의 나라의 개방은 온전하지 않았다. 과학이 중요한 사치 규제 문제의 해결에 어떤 빛도 주지 못한다면, "쓰개인가? 아니면 모자인가?”라는 문제를 매우 빈번히 제기한들 헛될 뿐이다.
수도에 갑자기 등장한 혼종이 새로운 모자 종의 진화에 대한 이론의 정립에 아주 필요한 것이라면, 전혀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증거에 잠깐 주목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이 매우 가치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는 예상치 못한 동양과 서양의 대표 모자들 사이의 교배로 인한 것으로 어디서 유래했는지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가 제시되었다. 그것의 모양은 외국인 체류자로부터 유래했고, 그것의 재료는 토종 산물에서 유래했다. 고백하건대, 완전히 싸구려 모자인 우리의 오래된 부직포 모자를 명예롭게 여긴 적이 없고, 더구나 그러한 제휴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는데, 이것이 일어난 일이다.
어느 날, 조선인 친구 중 한 명으로부터 하루 이틀 동안 모자를 빌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의 의심스러울 정도로 꾸밈없는 태도는, 그가 그런 일에 아무 상관없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였다. 물론 우리는 승낙했고, 물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비록 몇 달 전 우리와 관련돼 있던 공사관에서 종교를 빙자한 사기극이 발생해 지금은 종결된 터라, 어떤 면에서는 결과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두에게 기쁨이고 선물의 계절인 조선의 새해가 다가옴에 따라 그 문제는 더욱 불길하게 변했었다. 며칠이 지났고, 암만해도우리는 불쌍한 하인을 아주 잊고 있었고 - 가장 가깝고 소중하지만 힘없는 사람은 기억 속에서 매우 무정한 법이다 – 때는 새해 전날이 되었고, 우리는 서재에 앉아서 요리사가 준비한 저녁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밖에서 갑자기 잦은 발자국 소리와 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순간, 미닫이문이 옆으로 열리면서 산 같이 큰 두 개의 거대한 기름종이 – 알고 보니 모자 상자- 를 멘 짐꾼들을 포함한 행렬이 들어섰고, 짐꾼들은 경건하게 식탁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거대한 기름종이 판지로 만들어진 상자는 형식적 이지만 중요해 보였는데 왕께서 새해 선물로 주신 것이라고 일행 중 한사람이 설명했다. 동시에 요술쟁이 묘기가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암시하는 의식과 함께 우리 모자를 돌려받았다. 상자를 열었을 때, 많은 수행원들의 숨죽인 기대 속에서, 각각의 상자에는 우리가 빌려준 모자가 최고급화되어 들어 있었다.
검은 비단으로 정교하게 짜여 있어, 겉으로 보기에는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상징성도 살아있었다. 특이하게 몸체는 없었다. 검은 비단으로 정교하게 짜여, 본질적으로는 형체가 없어서 그 모자를 쓰면 누구라도 망사를 통해 그 안에 있는 머리를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재질이 조선 비단모자와 꼭 닮았는데, 이 비단모자는 비단을 엮은 것이 맞다. 따라서 그 자체가 그 기원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제공하였다. 갓난아이들에게도 항상 그렇듯이, 양편 모두 자기 쪽 모자에서 상대방 쪽 모자와 놀랄 정도로 닮은 점을 즉시로 알아보았다.
그래서 모자의 기원에 대해 아직 남아있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모자의 이름으로 알 수 있는 몇 가지 증거들을 더 살펴보자. 이를 위해 우리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