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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과 1000년 수령의 느티나무 |
한반도는 서쪽으로 완만하게 기울어진 지형이어서 대부분의 강물이 서쪽으로 흐르고, 육지와 이어진 서해 바닷가도 넓은 개펄을 형성하고 있지만, 유독 전라도 변산반도 일대는 개펄이 없는 암반지대이다. 이렇게 특이한 변산반도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중국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채석강(采石江)과 적벽강(赤壁江) 등의 지명을 갖다 붙였는데, 변산반도는 198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서 피서철은 물론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관광지다.
변산반도에서 내륙 쪽에는 백제 무왕 34년(633년) 혜구(惠丘) 두타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는 천년고찰 내소사(來蘇寺)와 전나무 숲, 봉래구곡과 직소폭포, 옥녀담, 우금산성(遇金山城;전북도기념물 제20호), 개암사, 낙조가 장관인 낙조대 등이 유명한데, 특히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의 능가산(楞伽山) 기슭의 내소사는 아름다우 전나무 숲길과 대웅전 문살의 아름다운 문양을 구경하러 여성 탐방객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 곳이다.
범종각 |
내소사는 사적기가 없어서 정확한 창건 유래를 알 수 없고, 임진왜란 이후인 조선 인조 11년(1633) 청민 선사(靑旻禪師)가 중창한 이후의 기록부터 전해지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백제 무왕 때 혜구 두타 대사가 대소래사(大蘇來寺)와 소소래사를 창건했지만, 언제부턴가 대소래사는 사라지고 소소래사만 남았는데, 그 소소래사가 내소사라는 것이다. 또, 소래사가 내소사로 명칭이 바꿔진 유래에 대해서도 660년 7월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석포리 해안으로 상륙한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이 절에 찾아와서 시주한 이후 ‘소정방이 찾아왔다’고 하여 내소사로 바꿨다고 하지만, 이보다 훨씬 뒤인 조선 성종 17년(1486)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도 소래사라고 적혀 있으므로 이런 주장도 맞지 않는다.
아마도 임진왜란 이후 청민 선사가 절을 중창한 때 내소사로 변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 내소사는 선계사(仙溪寺)· 실상사(實相寺)· 청림사(靑林寺)와 함께 ‘변산반도의 4대 사찰’로 유명했다. 그런데, 다른 사찰들은 6·25 전란에 모두 소실되고, 내소사만 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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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내 연못(드라마 '대장금' 촬영지) |
내소사를 찾아가는 길은 서해안고속도로 줄포나들목을 빠져나가 보안사거리(영전검문소)에서 좌회전하여 곰소를 지나면 내소사주차장인데, 호남고속도로에서는 정읍나들목을 빠져나와 김제·부안 방면으로 국도를 달리다가 고부~ 줄포 ~보안사거리(영전검문소)을 지나면 된다.
대중교통으로는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호남선이나 동서울터미널에서 고속버스로 부안읍에 도착해서 내소사 행 300번 군내버스를 갈아탄 뒤, 종점인 내소사 입구에서 내리면 된다. 부안읍에서 시내버스는 아침 6시부터 오후 8시 30분까지 30분마다 출발하며, 약 50분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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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석탑 |
내소사는 일제강점기에는 백양사의 말사였으나, 지금은 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고창 선운사(禪雲寺)의 말사로 있다. 입장료는 어른 30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500원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주차비는 정액제가 아니라 시간누적제로 받는 것이 조금은 불쾌하다. 또, 매표소와 일주문 일대는 어느 사찰에서나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사찰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음식점과 매점이 일주문 앞까지 파고들어서 조금은 실망스럽다. 사찰 측에서 단속하지 않는다면 경찰에서라도 질서를 잡아주는 것이 내소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줄 것 같다.
전나무 숲길 |
천년고찰 내소사를 더욱 유명하게 하는 것은 일주문에서 대웅전에 이르기까지 약 500여 미터에 이르는 아름드리 전나무 숲길이다. 처음에는 전나무 숲길이 이어지다가 천왕문을 지나 좁은 다리를 건너서부터는 벚나무 길, 그리고 단풍나무 길로 바뀌는데, 전나무 숲과 벚나무 그리고 단풍나무들이 줄을 잇는 등 다양한 나무들로 사시사철 내소사를 찾는 탐방객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내소사의 전나무 숲길을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숲길, 경기도 광릉수목원 숲길과 함께 ‘전국 3대 전나무 숲길’이라고도 하는데, 전나무 숲은 청민 선사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사찰을 중창한 뒤 사방이 너무 황량해서 심은 것이 시초라고 한다. 높이 30m가 넘는 울창한 전나무에서 품어져 나오는 전나무 특유의 피톤치드를 맡으며 숲을 걷는 것만으로도 속세와 다른 부처의 세계에 들어온 느낌을 갖게 해주는데, 여름철에는 전나무 숲에서 야영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나무들을 군데군데 베어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 간벌(間伐) 수준을 벗어나는 것 같다. 또, 다른 한쪽에는 이곳이 TV드라마 대장금의 촬영지였다는 안내판과 함께 스틸 장면까지 붙인 것은 너무 속물스럽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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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탑 |
전나무 숲을 지나는 동안 왼편 개울 건너편에 부도 탑들이 있지만, 천년고찰에 비하면 너무 빈약하다. 마지막 벚나무 길을 지나면 매점을 겸하고 있는 봉래루이고, 봉래루 누각을 지나면 대웅전 마당이다.
대웅전 마당에는 수령 1000년쯤 되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한 가운데에 있는데, 이 느티나무를 ‘할아비 당산나무’라고 한다. 불교사찰에서 전통 민간신앙인 당산나무를 숭상하는 것도 독특하지만, 내소사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날이면 일주문 옆의 ‘할미 당산나무’ 앞에서 마을주민들과 함께 제물을 올리고 독경을 하며 당산제를 지낸다. 또, 해방 전까지는 이곳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그 줄로 당산나무에 옷을 입히기도 했으나, 지금은 가림 줄만 쳐놓고 제를 지낸다.
입구에서 바라본 대웅전 |
임진왜란 후인 인조 2년(1633)에 청민 선사가 중창한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인데, 건축양식이 매우 정교한 것으로 유명하다(보물 제291호).
전해오는 이야기는 호랑이가 대웅전을 짓고 파랑새가 단청을 했다고 하지만, 그런 사실 여부보다는 쇠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를 결구시켜서 지은 건물이 어느 한군데 허술함이 없이 완벽할 뿐만 아니라 대웅전의 정면 3칸의 8짝 문살인 연꽃·국화꽃·모란꽃 문양이 매우 아름답다.
대웅전 문살 |
문살에는 원래 문양에 채색을 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비바람에 씻겨서 색이 바래고 나뭇결만 남은 것이 오히려 더 절집을 오랜 연륜을 지닌 사찰로서 위엄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꽃무늬는 간살 위에 약간 떠 있어서 법당 안에서는 꽃무늬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고, 단정한 마름모꼴 그림자만 비쳐들도록 설계한 정성이 돋보인다. 내소사 대웅전 문살의 꽃살 문양은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고, 꽃잎 한 장 한 장이 바람에 흩날리듯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우리나라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 밖에 대웅전 앞의 3층 석탑(전북도유형문화재 제124호)· 대웅전 왼편의 선방인 설선당, 범종각의 고려동종(보물 제277호) 등이 볼만하다. 특히 높이 1.03m, 직경 67cm, 무게 120kg의 고려동종은 원래 내변산의 청림사의 범종이었으나, 청림사가 폐사되어 흙속에 묻혀 있던 것을 철종 원년(1850) 내소사로 옮겼다. 고려 고종 9년(1222)에 주조된 동종은 종을 매는 고리에 용을 새기고, 몸체에는 삼존불을 조각했다. 종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에는 화려한 덩굴무늬의 띠를 새겼으며, 어깨 부분에도 꽃무늬 장식을 하는 기법이 통일신라시대의 범종의 형식을 따른 고려 후기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당산나무 |
내소사 뒤편 등산로를 따라 약 1㎞쯤 올라가면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서해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청련암이 있다. 청련암은 내소사보다 앞선 백제 성왕 31년(553) 초의선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에는 송진우, 김성수, 여운영 등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체포를 피해서 은둔했다고도 한다. 지금은 템플스테이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내소사는 여름철에도 좋지만,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에 연인과 함께 산책할 것을 권하고 싶은 곳이다.
첫댓글 언니랑 함께 다녀온 기억이 납니다~^^
좋은저녁시간되세요~^^
이곳저곳 국내 여행을 많이 하신 것 같네요.
어머나! 대웅전 문살 .. 꽃무늬 ...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운지요.
감탄스럽습니다. 나무를 깎아만든 문살 ,
조선시대 그시절엔 얼마나 더 아름다웠을지를 생각해봅니다.
회장님 덕택에 사진을 자세히 보며 잘둘러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다음 주에는 지난주말에 다녀온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이 소개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