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천문학 2024년 원고(조은길)
가명
톡 까놓고 말해서 창살 없는 감옥 같은 사람살이에서 연애만큼 재밌는 게 어딨어요 상대와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가슴이 제멋대로 날뛰고 상대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우주만상이 황홀경이다가 텅텅 비어버리기도 하는 그 마법 같은 연애 맛을 본 사람은 공감할 거예요 그렇다고 잘생긴 연예인 하고는 절대 연애하지 않을 거예요. 잘생긴 사람은 반드시 꼴값한다는 어머니의 말씀도 귀에 못이 박여있는 데다 잘생긴 데다 연예계 문 앞에서 이름부터 확 바꾼 연예인은 쳐다도 안 볼 거예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하물며 연기인지 진심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가는 사람에게 하나뿐인 내 마음을 탈탈 털리게요 어림 반푼어치도 없어요 저 봐요 저 물 찬 제비 같은 남자 연기자가 부잣집 외동딸에게 작업 걸고 있어요 저 여자 좋아서 입이 귀에 걸렸지만 조금 있어 봐요 은행나무 밑에서 똥 밟은 꼴 될걸요
톡 까놓고 말해서 이름은 부모님이 자식의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주문 같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부모님도 겨우 사람 흉내만 낸 핏덩이를 받아놓고 윤택할‘윤’기쁠 ‘희’자를 붙여주었겠지요 하지만 기원은 기원일 뿐 윤택하지도 기쁘지도 않은 내 삶이 지긋지긋해서 시를 끄적이기 시작했고 좋은 시란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멀수록 좋다니 옳거니 하고 시단 문 앞에서 이름부터 확 바꿨어요 운이 따르면 인기 연예인처럼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다니 이거 정말 멋진 신세계를 만났지 뭐예요
약 력 : 조은길 199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로 등단
시집 <노을이 흐르는 강:입으로 쓴 서정시> 출간
2019년 한국문화예술위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2020년 제1회 청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