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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묘재 성지(남종삼 생가 터)
주소: 충북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 교구 원주교구
한국의 카타콤바라 할 만한 배론 성지에서 산 하나를 넘어서면 병인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南鐘三, 1817-1866년)이 살던 묘재 순교사적지가 있다. 이곳은 1백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종삼 성인과 그의 부친 남상교(南尙敎, 1784-1866년) 부자의 뜨거운 신앙과 애끊는 육친의 정이 넘쳐 흐른다.
남종삼 성인은 103위 한국 성인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이다. 원래 생부는 남탄교(南坦敎)이나 장성한 뒤 슬하에 아들이 없던 백부 남상교 아우구스티노의 양자로 들어갔다. 남상교는 정약용의 학통을 이은 농학자(農學者)로 충주 목사와 돈녕부(敦寧府) 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 남종삼의 학문과 사상 형성, 그리고 훗날 그가 천주교에 입교한 데에는 부친의 영향이 컸다.
남종삼이 언제 입교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부친이 일찍부터 입교하여 신앙을 지켜 온 사실로 미루어볼 때 양자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 교리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입교한 뒤에도 자신의 관직 때문에 드러나게 교회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교회 활동은 1861년에 입국한 리델(Ridel) 신부에게 조선말을 가르친 것이나, 이전부터 이미 베르뇌(Berneux) · 다블뤼(Daveluy) 주교 등과 교류하면서 교회 일에 참여하고 있었다.
남종삼의 입교 후 가족들도 모두 천주교를 믿게 되었는데, 아버지 남상교는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생활에 더욱 전념하고자 묘재로 이사해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남상교는 이곳에 살면서 1866년 병인박해 때 공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순교할 때까지 아들 남종삼이 찾아오면 가르침을 베풀고 신앙과 조국애를 일깨워 주었다.
높은 학문을 성취한 남종삼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해 지방 장관을 거쳐 철종 때에는 승지 벼슬에 올랐고, 고종 초에는 왕족의 자제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당시 부패한 많은 관리 중에서 돋보이는 청백리로, 의덕과 겸손의 가난한 생활을 통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질시의 대상이 되는 한편 향교 제사 문제로 신앙과 관직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때 당당히 관직을 내려놓았다. 남상교와 남종삼 부자의 묘재 정착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이들과의 교류가 계명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을 초래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들 부자에게는 높은 벼슬, 명예와 권세, 안락한 생활 등 양반으로서 누릴 수 있는 영화와 특권을 스스로 끊어 버린 일대 결단이었다.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즉위하던 1863년 말경, 흥선 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종삼은 좌승지로 발탁되어 다시 임금 앞에서 경서를 논하게 되었다. 그때 두만강을 사이에 둔 러시아가 수시로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통상을 요구했다. 조야는 어찌할 줄 모르던 차에 남종삼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我策)’이라 하여 국내의 프랑스 주교를 통해 한불 수교를 맺고 서양의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물리칠 것을 건의했다.
흥선 대원군은 그의 건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부주교가 모두 황해도와 충청도로 전교 여행을 떠난 뒤라 약속 시각 내에 찾아내지 못하자 흥선 대원군의 초조는 분노로 바뀌었다. 평안도에서 소식을 전해 들은 베르뇌 주교가 급히 서울로 올라왔지만, 그때는 이미 러시아인들이 물러간 후였다. 상황이 급변하자 흥선 대원군은 다시 쇄국정책을 강화하고 정권 유지의 방편으로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남종삼 승지는 일이 그르친 것을 깨닫고 묘재로 내려가 부친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부친 남상교는 그의 말을 듣고 "너는 천주교를 위해 충(忠)을 다하였으나 그로 말미암아 너의 신명(身命)을 잃게 되었으니 앞으로 악형을 당하더라도 성교(聖敎)를 욕되게 하는 언동을 삼가라." 하고 가르쳤다.
부친의 준엄한 가르침을 받은 남종삼은 순교를 각오하고 배론 신학당을 찾아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한양으로 향했다. 이미 한양으로부터 체포령이 떨어져 있던 그는 결국 한양까지 가지 못하고 고양(高陽) 땅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갔다. 의금부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심한 고문과 곤장을 맞으면서도 신앙을 지킨 남종삼은 참수형이 결정되어 홍봉주, 이선이, 최형, 정의배, 전장운, 그리고 베르뇌 · 다블뤼 주교와 함께 병인년 3월 7일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로 끌려가 참수되었다.
유택 인근의 학산 공소와 교육관. 이후 남종삼의 시신은 홍봉주의 시신과 함께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고, 1968년 10월 6일 시복식을 앞두고 1967년 10월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이때 성인의 유해 일부를 가족 묘소인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에 모셔 안장하였다.
한편 남종삼이 순교한 후 그의 가족도 모두 체포되어 부친 남상교는 공주 진영으로, 장자 남명희(南明熙)는 전주 진영으로 끌려가 순교하고, 부인 이조이 필로메나 또한 유배지인 창녕에서 치명하고, 함께 경상도 지역 유배지로 간 막내아들 남규희(南揆熙)와 두 딸 데레사와 막달레나는 노비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3대에 걸쳐 4명이 순교하고, 나머지 가족 또한 유배지에서 고초를 겪었다. 남종삼 요한은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순교자 남상교 아우구스티노와 성 남종삼 요한의 유택이 있는 마을에는 1920년대부터 신자들이 들어와 교우촌을 이루었고, 1938년에 목조 공소 건물을 신축하였다. 유택 앞에 있는 옛 공소 건물은 1955년 9월 신축했고,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학산 공소는 1989년에 신축한 것이다. 또한 순교자의 후손과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1987년 유택을 보수하고 뒷산에 14처를 조성했으며, 1999년 5월 6일 유택 뒤편에 성모상을 세우고 축복식을 거행했다. 2013년 10월 7일에는 공소 바로 옆에 단층 규모의 교육관을 신축해 축복식을 갖고 신자들의 교육과 회합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2014년에는 유택을 해체해 전면 보수하면서 마당에 있던 남종삼 성인 흉상과 유적지 안내비를 유택 밖으로 이전 설치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1월 14일)]
남종삼 요한(9.20) 기본정보
성 남종삼 요한(南鍾三, Joannes)은 1817년(순조 17년) 남탄교(南坦敎)의 아들로 충주(忠州)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에 큰아버지인 남상교 아우구스티노(南尙敎, Augustinus)의 양자로 들어갔다. 남상교는 정약용 요한(丁若鏞, Joannes)의 학통을 이은 농학자(農學者)로 충주 목사와 돈녕부(敦寧府) 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 그는 일찍부터 서학서(西學書)를 접하면서 진리를 깨달아 입교했는데, 관직이 신앙생활에 방해되자 이를 포기하고 산골 마을인 묘재(山尺, 현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로 거처를 옮겨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성 남종삼 요한은 22살 때인 1838년(헌종 4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홍문관 교리(校理), 영해 현감(寧海 顯監) 등을 거쳐 철종 때에 승정원(承政院)의 승지(承旨, 正三品)까지 올랐고, 고종 초에는 학덕을 인정받아 왕실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그가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물론 부친의 영향이 컸겠으나 무엇보다도 학자인 그 자신이 서학서를 가까이하며 학문을 통해 신앙을 크게 꽃피웠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그가 지은 천주가사(天主歌詞)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신앙생활을 충분히 할 수 있고, 만일 신앙생활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 관직에서 물러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직과 신앙생활을 병행하던 성 남종삼 요한은 나라의 공식 예절이 있을 때마다 조상 숭배행위에 참여해야 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면서도 쉽게 관직을 떠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가문의 생계를 꾸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속의 관직 때문에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성사까지 막힌 경우가 있었으나, 방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Thomas) 신부와의 두터운 교분으로 그의 신앙생활은 크게 진보하였다. 그래서 그가 영해 현감으로 있을 때,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는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淸白吏)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방의 관리가 향교(鄕校)의 제사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해서 말썽이 생기자 즉시 사표를 낼 정도로 신앙이 깊었다. 관료 생활과 신앙생활을 병행하고자 했던 그는 철종 때에 다시 승지가 되었고, 고종 초에는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1864년(고종 원년) 이후 자주 러시아 선박이 함경도 국경을 넘나들며 통상을 강요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고종의 부친으로 조선의 실질적인 집권자였던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때 조선의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조선에 잠입해 비밀리에 선교 활동 중이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1865년 말 홍봉주 토마스(洪鳳周, Thomas)와 이유일 안토니오(李惟一, Antonius) 등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에게 건의하였다. 대원군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때 성 남종삼은 홍봉주 등과 뜻을 같이하여 다시금 방아책을 건의하였다. 프랑스 주교들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 등 서구 열강들과 조선이 동맹을 맺으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고, 조선도 문호를 개방하여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천주교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결국 대원군도 그 건의를 받아들여 조선에서 활동 중인 프랑스 선교사들과 만나 논의하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성 남종삼과 동료들은 이 소식을 즉시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과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us) 주교에게 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지방 순회 중인 주교들의 거처 확인과 연락이 어려워 시간이 지체되었다. 1866년 1월 소식을 전해 들은 성 다블뤼 안토니오와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가 급하게 상경했을 때는 이미 러시아인들이 물러가면서 러시아의 침략 위험이 저절로 사라진 때라 대원군의 마음도 바뀐 뒤였다. 게다가 반대파 대신들의 정치적 공세와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가 확산하고 있다는 와전된 소식 등이 전해지면서 대원군의 태도가 돌변하였다. 그는 쇄국정책(鎖國政策)을 강화하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통해 정치적 문제를 풀어가고자 했다. 그래서 1866년 정월(음력)을 기해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사형선고와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선포하면서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시작되었다.
박해가 시작되기 전에 대원군으로부터 낙향을 권유받은 성 남종삼 요한은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를 방문한 다음 관직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고자 묘재에 은거해 있던 부친을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들은 부친으로부터 “네가 충성스러운 신하의 도리는 다했다만 그 때문에 분명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너더러 네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게 하거든 성교(聖敎)에 대해 욕된 표현은 일체 지우는 것을 잊지 말라.”는 준엄한 가르침과 격려를 받고 순교를 각오한 그는 다시 상경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이웃해 있는 배론(舟論)의 신학당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받고 서울로 향했다. 그 무렵 이미 박해가 시작되었고 그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고양군(高陽郡)에서 피신하려 했으나 3월 1일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바로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당시 의금부에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홍봉주 토마스를 비롯해 여러 선교사와 신자들이 투옥되어 있었다. 성 남종삼 요한이 체포된 이후 함께 국문하라는 지시에 따라 다음날부터 국청(鞫廳)이 개설되었다. 성 남종삼은 조정의 대신들로부터 6회에 걸친 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신앙을 지켰을 뿐 아니라 천주교가 정도(正道)라는 호교론을 펴나갔다. 그는 천주교는 하느님을 섬기고 충(忠)과 효(孝)를 다하는 학문이기에 배교란 있을 수 없다며 자신에게 내려진 사학도(邪學徒)의 우두머리요 외세와 내통한 흉악한 계책을 꾸몄다는 죄목에 대해 당당히 자기 뜻을 밝혔다. 결국 그는 모반부도(謀叛不道)의 죄목으로 참수형의 선고를 받고, 1866년 3월 7일(음력 1월 21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동료인 홍봉주 토마스와 함께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순교 후 성 남종삼 요한의 시신은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5월 28일 성 최형(崔炯) 베드로의 유해와 함께 발굴되어 명동 주교관으로 옮겼다가 6월 17일 명동 성당 지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968년 시복식을 계기로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해실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때 성인의 유해 일부를 의령(宜寧) 남씨 가족 묘소인 장흥면 울대리에 모셔 안장하였다. 그가 순교한 후 가족들도 모두 체포되어 순교하거나 유배형을 당했다. 부친 남상교는 공주로 압송된 후 순교하였고, 장자인 남명희(南明熙)는 전주 진영으로 끌려가 전주천의 초록바위에서 순교하였다. 부인 이조이 필로메나(李召史, Philomena) 또한 유배지인 창녕에서 치명하였고, 함께 경상도 지역 유배지로 간 막내아들 남규희와 두 딸은 노비 생활을 하며 고초를 겪었다. 이렇게 성 남종삼 요한의 가문에서 3대에 걸쳐 4명의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7일 목록에서 한국의 서울에서 성 남종삼 요한이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남상교(南尙敎) 아우구스티노(1783-1866년)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성인 남종삼(南鍾三)의 아버지. 충청북도 제천군 백운면 화당리(忠北 堤川郡 白雲面 花堂里) 출신.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충청목사(忠淸牧使), 돈령부사(敦寧府使)를 역임한 그의 입교 시기는 정확히 밝혀지고 있지는 않으나 일찍부터 입교하여 열심히 신앙을 지켜온 것 같다. 그의 아들 남종삼이 이른바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大院君)에 진언한 사실을 말했을 때, “너는 충성스러운 국민의 일을 하였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너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네 사형선고 서명을 요구하면 천주교에 욕된 표현을 일체 지우도록 명심하라”고 하며 천주교 신앙에 대한 굳은 신념을 보였다. 아들이 서소문 네거리에서 순교하자 그는 고향에서 잡혀 공주(公州)감옥에 수감되었다가 84세의 고령으로 아사함으로써 순교하였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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