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인지, 메르치인지 때문에 요즈음 근무하기가 힘이 든다.
이 더운 여름에 마스크를 쓰고 방문객들이나 납품차량 기사님들의 체온을 재고 마스크가 없는 분에게는 마스크를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거의 밖에 서서 근무를 해야 한다.
방문객들을 경비실로 불러 들여 체온을 재는 건방진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아예 밖에서 근무하는 것이 속 편하였다.
그렇게 힘겨운 하루를 보내고 새벽에 경비실과 주변의 청소를 하고 무재해 기록판의 날짜를 조정하고, 수도 계량기를 검침하여 사용량을 체크하고, 일지를 마무리 하는데, 이런 중소기업의 일지에는 김상무도 박상무도 아닌 이상무의 활약이 대단하다.
웬만하면 이상무의 결재가 있어야 한다.
만약 이상무의 결재가 아니고 다른 누군가의 결재가 있다면, 그것은 사고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 경비실의 일지에는 도합 열 여덟 군데의 이상무 결재란이 있다.
일상적인 기록으로 마무리를 한 일지와 조금 떨어 진 제 2공장에서 가지고 온 일지를 들고 사무동의 3층 총무담당자의 책상에 올려 놓고 내려 오는데 참새 한 마리가 열린 창으로 들어 와서 나갈 구멍을 찾지 못해 유리창에 부딛히며 퍼더득 거리고 있었다.
새대가리가 왜 새대가리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연구에 의하면, 새도 어느 정도는 지능이 있다고 하는데 어쨌든 사람의 육안으로 보면 보이는 열린 창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머리가 나쁘다기 보다는 눈이 나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쩌면 앞으로 새대가리라는 말 보다는 새눈깔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봤다.
창틀에 앉아 퍼더득 거리는 녀석을 잡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열린 창문의 틀에 놓아 주었더니 녀석은 얼씨구나 하고 날아 가 버렸다.
유리창에 갇혔던 참새
은퇴한 할아버지와 외손녀
우리 인간도 유리창 안에 갇힌 새와 비슷하지 않을까?
성공이라는 세계가 눈에 훤히 보이지만 유리 같은 장애물이 막혀 다가 갈 수 없고, 열린 창문이 보이는데도 운명에 등 떠밀려 그 창문을 지나쳐 가야하는 마치 참새 같은 인생이라는 생각이 지나친 비약이나 감정의 부풀림일까?
의식의 세계 도의 세계를 넓게 확대하여 보면, 참새나 인간이나 다 자신만의 우주에서 자신만의 이상과 성취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면, 참새를 미물이라 얕보는 자만과 교만함은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창공을 자유롭게 날고 먹고 싶은 먹이를 찾아 가는 참새 보다 못한 것이 우리네 인생이란 것이 아닐까?
참새 보다 낫든 못하든 나는 오늘도 내가 살아 오면서 남긴 얼룩진 발자국을 청소하고 정리하려고 서울 나들이를 떠난다.
유난히도 풍파가 많았던 터라 쪼달리며 살았었고 결국에는 다른 사람의 일로 보험회사의 구상권 행사의 대상이 되어 추심회사의 독촉에 시달리다가 정리를 하여 겨우 벗어 났었는데, 방송 쪽에 일을 하기 위하여 구입한 중고 승합차가 고장이 잦아 버는 돈의 반 이상이 수리비로 지출이 되었는데 5년 전 12월에는 눈이 잘 오지 않던 부산에서 운전을 많이 했던지라 빙판길 운전의 위험성에 대해 경험 해 보지 못하여, 지방에 다녀 오는 길에 눈이 내리는데도 신나게 달리다가 터널을 빠져 나가서 주행차로에 앞서 가던 트럭을 피하려다 추월로에서 반대 방향을 보며 서게 되어 뒤따라 터널을 빠져 나온 승용차와 거의 정면으로 부딛히게 되었다.
비싼 보험료 때문에 자차에 대한 보험을 들지 않아 차 값의 3분의 2가 넘는 수리비를 주고 수리를 해야 한데다 수리기간에 일도 못하고 하다 보니 많은 손해를 보았고, 연쇄적으로 생활비가 모자라고 하여 손 쉬운대로 카드 빚을 쓰게 되었다.
그 뒤로도 일도 많이 줄어 들고 하여 방송 일을 떠나서 주차관리를 하기도 했지만 한 번 카드빚에 빠져 드니 자꾸만 늘어 나지 줄어 들지를 않았다.
그렇게 나도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돌려막기와 연체에 대한 실제사례가 되어 버렸다.
스무스하게 잘도 살아 가며, 돈도 잘 붙는 사람들의 인생과 비교 해 보면, 나는 하느님의 눈 밖에 난 것이 틀림 없는 것 같다.
하느님에게 밉보일 일을 한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럴까? 자주 고개가 갸우뚱거려 진다.
기독교인들의 주장대로 교회에 다니지 않아서?
윤회사상에서 얘기하는 전생의 업보 때문에?
아무래도 후자의 논리가 맞는 것 같다.
가을에 부산으로 내려가서 노숙인 무료급식을 하려면 우선 내 통장에 압류가 들어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고귀한 마음으로 후원을 해 주실 분들의 귀중한 돈을 헛되이 빼앗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된 통장을 내어 밀 수는 없다.
5월에는 재산명시에 관한 소송이 진행중이던 S카드 채권팀에 찾아가서 상담을 하여 이자와 일부 원금을 감면 받고 분납을 하기로 하고 초회 납입금을 그 자리에서 모바일 뱅킹으로 넣어 주었었는데, 아무런 법적조치를 취해 오지 않고 있는 H카드에 자수를 하듯이 찾아가서 사정을 해 볼 요량에서다.
한 때는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던 서울이지만, 이제는 한 번 가려고 하면, 무슨 큰 행사를 기획하듯이 계획을 짜서 큰맘 먹고 가야만 한다.
차를 가져 가면 주차하기가 힘이 들어 애물단지가 되니, 신창역에 주차를 해 놓고 전철을 타고 간다. 영등포나 용산역 까지 가면 집에서 부터 3시간 정도 걸리는데, 또 전철을 내려 목적지까지 가려면 거의 반 나절이 걸린다.
점심시간 전인 11시 근방에 여의도에 있는 H카드 본사에 도착하려면 전철을 타고 가서는 어림도 없고 또 점심시간 후에 가게 되면, 일정이 늦어 져서 아주 오랜만에 아들을 찾아 가 보기로 한 생각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 천안역에 내려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가서 영등포역에 내렸다.
영등포역 오른 쪽 고가도로 앞의 정류소에서 국회 앞으로 가는 버스를 찾아 보니 없고 여의도역 부근으로 가는 버스만 있어 그걸 타고 가서 다시 다른 버스를 갈아타면 될 걸로 생각하고 여의도우체국을 지나 내려 건너편 정류소로 가서 버스행선표를 봤지만, 국회 쪽으로 가는 버스는 없어 할 수 없이 여의도역으로 가서 9호선을 타고 국회 앞으로 갔다.
메르스 때문에 거리나 전철이 한산하다는 뉴스를 봤었는데, 그렇게 한산하지는 않고 예전 보다 2,30퍼센트 줄어 든 것 같았다.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 대우를 받는 의학자들이 많고, 바이러스의 숙주가 낙타라는 것이 밝혀 졌다고 하는데도 예방백신이나 효과가 확실한 치료약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직은 과학이 자연이나 신에게 대적할 만한 힘이 없는 것 같다.
삐적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H카드 사옥에 들어서는데, 로비 구석에서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보안원이 서 있었다,
마치 검찰청 입구에서 자수를 하러 온 범죄자를 뉴스 카메라가 찍고 있는 것 같았다.
메르스에 대한 것임을 알아차리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역시 돈 많은 큰 회사라 천만원이 넘는다는 열화상카메라를 설치하고 출입자의 체온을 측정하고 있었는데, '내가 근무하는 경비실에도 저런 카메라가 있으면, 오전에 땡볕에 서서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텐데'하는 부러운 생각을 해 봤다.
로비의 안내데스크에 근무하는 아가씨에게 방문용건을 얘기하였더니 이곳저곳 전화를 걸어 좀 기다리면 담당자가 내려 올 거라고 해서 긴 의자에 앉아 2년 반 쯤 전에 민원을 넣으러 왔던 때를 회상했다.
그 때는 갑에 가까운 위치에서 카드회사 협력업체의 직원에게 징계를 요구하였었는데, 이제는 내가 을 보다 더 초라한 죄인의 입장으로 찾아 와 있으니 인생은 돌고 돈다는 말이 실감 났다.
한참 후에 나타난, 오래 전에 활동하던 개그맨 누군가와 닮은 듯한 고객센터 직원은 채권팀을 직접 찾아가고 싶다는 나를 만류하면서 자신이 알아 봐서 알려 주겠다며, 나의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고, 아무런 법적조치를 취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나의 말에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와 헤어져 나오니 점심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금방 알아보고 연락을 줄 거라고 믿고 예전에 제작사나 촬영팀을 태우러 다니던 골목들을 어슬렁 거리고 있었으나 연락은 쉬 오지 않았다.
전에는 웬만하면 밖에서 내 돈을 주고 점심을 잘 사 먹지 않았으나, 그렇게 아끼며 살아봐야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부터는 건강을 위해서라도 밥은 제 때에 꼭 먹기로 했다.
오늘 한 끼를 굶으면, 내일 다섯 끼를 먹어도 오늘은 굶은 것이 되기에 아무리 가난해도 굶고 살지는 말자는 주의를 세웠기 때문이다.
붐비는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려 적당한 메뉴가 있는 지하식당을 찾아 들어 갔는데 역시나 붐비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자가 아닌데 혼자서 밥을 먹으려니 괜히 눈치가 보인다.
그래도 그 식당은 주인이 친절한 편이라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막 손님들이 떠난 식탁을 치워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뜨거운 우거지탕을 우거지상을 하며 맛있게 먹었다.
점심을 먹고 기다려도 연락은 없어 먼저 아들을 찾아 보러 대학로로 가 보기로 했다.
만나러 간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찿아 보러 간다는 표현대로 10년 동안 연락이 없던 아들을 찾기로 마음 먹은 것은 내가 쓴 책을 한 권 갖다 주면, 내가 15년 전 부산에서 가족을 떠나 온 이유나 해명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마로니에공원은 별로 눈에 띄지 않고 방송통신대학의 캠퍼스가 크게 자리를 잡았다.
정문을 지나 오른 쪽 골목으로 조금 들어 가니 건너편 게시판에 각종 공연포스터 들이 붙어 있었다.
아들의 이름을 찾는데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몇 가지 포스터의 조명디자이너의 이름을 살펴 보니 한 군데의 포스터에 반가운 아들의 이름이 있었다.
누구에게 묻지도 않고 느낌으로 찾아 들어간 골목에서 극장을 발견했는데 소품이나 무대장치를 들이는 뒷 쪽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다시 골목을 돌아 건물 앞으로 가니 지하5층과 지상 3층의 복합극장이었다.
아들이 참여하는 연극이 상연되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공연 1시간 30분 전 부터 예매"라는 안내판으로 막혀 있었다.
1층의 출입구 안 쪽에 매표소가 있어서 표를 파는 아가씨에게 물어보니 자신들과는 별개라서 잘 모른다며, 저녁 여덟시 부터 공연이 시작되니 아마 네시는 넘어야 나오지 않겠느냐고 했다.
네시라고 해도 두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
하릴없이 소극장들이 늘어 선 골목을 배회하다가 어느 커피숖 앞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있는데 H카드의 직원이 전화를 해 왔다.
그의 말로는 H캐피탈로 넘겼는데 거기서 다시 캠코(한국자산관리공사)에 나에 대한 채권을 매각했다는 것이었다.
캠코는 부동산이나 공매처분 될 자동차나 선박 등 유체동산을 취급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민간회사의 채권을 취급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부동산 공매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캠코에는 내 이름과 똑 같은 부장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이 아직 근무하고 있는지 나이가 많아 퇴직을 했을까? 궁금하다.
H카드 직원이 알려주는 캠코의 대표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내 신분에 대하여 물어 보고 자신들의 회사에서 채권을 매입한 게 맞다며, 담당자의 이름과 직책 전화번호를 문자로 보내 왔는데 전화번호가 051로 부산지역번호가 아닌가?
강남대로의 씨네마극장인지 씨티극장인지 옆에 있던 캠코가 나한테 얘기도 않고 언제 부산으로 이사를 갔단 말인가?
어쨌든 지독한 카드사나 캐피탈사의 손아귀를 떠나 공공기관인 캠코로 넘어 갔다니 조금은 수월해 질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느껴졌다.
전화를 걸었더니 여직원이 받아서 역시 여성인 담당 차장이 자리에 없다며 잠시 후에 전화를 해 달라고 했다.
제일 더울 때인 시간이라 앉을만한 그늘도 없고 숨이 막힐 듯 해서 골목의 사거리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서 함량에 비해 비싼 가격의 팥빙수를 하나 사서 먹고 나서 다시 전화를 하니 이번에는 남자직원이 전화를 받아서 차장님이 봉사활동을 갔다며 오늘은 통화가 안 될 것 같다고 했다.
캠코를 찾는 고객들에게는 봉사를 하지 않고 근무일에 봉사활동을 하러 가다니 진정한 봉사가 무엇인지 알고 봉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대학로 골목길의 모습들
그래도 시간은 많이 남아 있어 골목길 순례를 계속했다. 거의 모든 건물에 있다시피한 소극장들을 보면서 이 많은 소극장들이 다 무리 없이 운영이 되고 있을까? 생각해 보니, 마치 지하철이나 시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나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서 생겨 나와 어떻게 먹고 살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던 것이 생각이 난다.
남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다들 잘 먹고 수월하게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졌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래도 입구의 매표소에 표를 사려고 줄을 서는 젊은이들이 더러 보이는 것을 보면, 젊은이들은 연극에 관심이 많은 것 같고, 놀고 즐기는데만 열중일 거라는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 보았던 젊은이들에 대한 생각을 고쳐 먹어야 할 것 같다.
늦게 까지 기다려서 아들을 만나고 가려던 나의 마음은 차츰 허물어 지기 시작했다.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불쌍한 귀염둥이 깜돌이 때문이다. 다섯시 17분엔가 있는 신창행 누리로호를 못 타면, 밤 9시는 넘어야 신창에 도착하게 될 것인데 그러면 깜돌이에게 너무 미안 할 것 같다. 24시간이 아닌 25시간을 기다린 깜돌이를 잠시 산책을 시키고 또 어두운 방 안에 홀로 남겨 두고 왔다.
책이나 누군가에게 부탁하여 전해 주고 내려 갈려고 네시 쯤에 다시 갔는데, 미화원인 듯한 아저씨가 지하 5층에 아가씨 하나가 출근을 하더라며 가 보라고 했다.
지하 5층에 내려 가서 미로처럼 구부러진 통로를 따라 들어 가며 "계십니까? 누구 없어요?" 하고 불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어 제일 안 쪽으로 들어 가니 어떤 아가씨가 문을 얼고 나오다가 깜작 놀랐다.
그 아가씨는 분장담당이라 아들을 잘 모른다고 했다.
다시 올라가서 미화원 아저씨를 만나 커피값으로 만원을 드리고 책을 좀 전해 달라고 했더니 자기는 곧 퇴근을 해야 한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을 때 아가씨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 가려고 해서 아들의 이름을 대었더니 잘 안다고 했다.
그 아가씨에게 책을 맡기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용산역으로 향하여 가서 예정대로 누리로호를 타고 일찍 돌아 왔는데, 책에 있는 전화번호를 보고 전화를 해 올거라고 기대를 했었지만, 다음 날이 샐 때 까지 끝내 전화는 오지 않았다.
서울예대에 복학을 했을 때 안산으로 찾아가서 같이 점심을 먹고 헤어질 때 여자친구를 사귀는데 못난 아버지가 걸림돌이 된다면, 없다고 대답하라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내 말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가족을 두고 떠나 온데 대한 섭섭함을 아직까지 녹여 버리지 못했을지 또는 그럴만한 어떤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난 예전에는 사람들에게 "우리 아들이 영화감독을 하겠다고 노력 중이다."라고 틈만 나면 자랑을 했었는데, 이제는 그 자랑스런 아들을 마음 속에 묻어 놓고 떠나 보내려고 한다.
아들이 내게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은 나를 아버지로 받아 들이기 싫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의 이땅의 어버이들은 대종상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받고도 남을 만큼 연기를 잘 한다.
자식이 아무리 잘 못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식이 잘 한다고 거짓말을 하며,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자식을 변호한다.
공장 옆의 큰 밭을 홀로 가꾸시는 할머니는 어느 날 저녁 어스름 어둠이 내리는 시간에 같은 마을에 살면서도 할머니를 모시지 않고 따로 사는 손자가 퇴근길에 차를 몰고 지나가며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밭에서 일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자신에게 인사를 했다며, "우리 손자가 참 착하고 인사를 잘 한다.."고 자랑을 하셨는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정말 이땅의 예와 효를 생각하면 한숨만 나온다.
난 아들이 내게 잘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요즈음 같이 눈치들이 빠른 세상에 뻔한 거짓말을 해 봤자 금방 알게 될 것이고, 아들을 비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아들이 하는대로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잘 못 가르친 나에 대해 비난 할 것이고, 아들이 그렇게 행동하는데는 그만큼 내가 잘못 했기 때문이라고 아들을 이해 하고 변호 해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가르친 적은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내 덕이 부족하여 아들이 그렇게 된 것일게다.
깜돌이를 데리고 저수지를 산책하다 보면 겨울에는 깜돌이와 같은 키를 가지고 있던 잡초들이 이제는 내 키 만큼 자라 있다.
아무런 보살핌도 없고 바로 옆의 저수지가 마를 만큼 가물어도 잡초들은 잘도 자란다.
도종환 시인의 시처럼 꽃들이 흔들리며 피어 나듯이 잡초들도 시련을 견디며 더 강인하게 커 나가고 있다.
나 역시 온갖 시련을 격으며 살아 왔고 커 나갈 것이다.
못 생긴 여성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예쁘다고 아첨하는 하얀 거짓말을 하거나, 잘 못하는 사람에게 잘 한다고 칭찬을 해 주어 용기를 북돋워 주는 사람 좋다는 소리는 들을지언정, 억압과 폭력에 고개 숙이는 비굴한 사람은 되지 않으며 잡초처럼 꿋꿋이 살아 갈 것이다.
저수지 둑길의 잡초들
첫댓글 연안인님의 삶의 일상을 감사히
읽어 봅니다. 눈길에서의 사고는
천만다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드님과의 만남은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이해하고 좀 더 행복한 해후가 있으리라 봅니다.
여러가지로 열심히 생활하시니 자비로우신
부처님께서 분명히 좋은 결과를 주실줄로 압니다.
그때까지 용기 잃지 마시고 힘내시길 바래 봅니다.
더운 날씨에 건강유념하시고 늘 평안하세요.
항상 격려와 용기를 주시는 관조님은 아마도
관세음보살님의 화신인가 봅니다. ㅎㅎ
늘 감사합니다.
못 생긴 여성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예쁘다고
아첨하는 하얀 거짓말을 하거나, 잘 못하는 사람에게
잘 한다고 칭찬을 해 주어 용기를 북돋워 주는 사람 좋다는
소리는 들을지언정, 억압과 폭력에 고개 숙이는
비굴한 사람은 되지 않으며 잡초처럼 꿋꿋이 살아 갈 것이다.
좋은 글 감사 합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화이팅 하십시요
감사합니다. 늘 좋은 글들로 보시를 하시는 법성화님은 부처님께서 꼭 가피를 내리실것입니다.
저의 글은 그저 초라한 자의 변설로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뜨거운 태양과의 일전을 각오 해야 할 여름날의 아침입니다.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는 한 주 되시기 바랍니다.
글 많이 생각하며 느끼며 다녀 갑니다.
감사합니다.건강하시고,복 짓는 행복한 나날되세요.
언제나 제 글에 관심을 가져 주시고 덕담을 해 주시는
주목님께 감사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