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호서 세븐 가을여행 계획을 꼼꼼히 파악하여 올리려고, 좀 늦게 올리게 된점 양해바랍니다.
하이호서 세븐 친구들은 11월 10일(토요일) 일정을 피하여 다른 약속을 잡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산행 및 여러 방안을 검토한 결과 50을 넘긴 나이에 산책을 겸한 여행이 무엇보다 뜻깊을거라 생각하여 여주 관광여행을 계획하였습니다. 호서고 7회 친구들의 친목 도모와 우정을 다지는 하루가 될수 있도록 많은 참여 바랍니다.
시간대별 일정
11월 10일(토요일) 잠실호텔앞(석촌호수 쪽) 8시 30분 집결
오전 10시 30분 =>명성생가 관람(관광해설 포함 1시간 소요)
12시00분 => 하늘새 쌀밥한정식(예정) 031-885-2035
13시 30분 => 영능(세종대왕능)
15시 00분 => 신륵사 관람
17시 강천보 및 유스호스텔에서 간단한 운동 및 산책 후 귀경예정
무엇보다 나이에 맞는 안전하고 역사적인 볼거리 먹거리 여행이 될것으로
판단하며 친구들의 적극적인 참여 부탁드리며, 꼭 리플달아주세요...알죠.
알리는 사람 하이호서 세븐 회장 김수본
총무 성상형
참고자료...
여주 (세종대왕능. 신륵사. 명성왕후 생가)
경기도 여주에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능(合葬陵)인 영릉(英陵)과 조선 제17대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녕릉(寧陵)이 불과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주말이면 가족 단위의 관람객이 많이 찾는 곳으로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으로 답산(踏山)하는 곳이다. 조선왕조를 1백년은 더 연장시켰다고 하는 세종대왕의 영능은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로서 왕릉(王陵) 중에서 제일로 치는 명당이다. 회룡고조혈은 수 백리 혹은 수 십리를 행룡한 주룡이 혈을 결지하고자 할 때는 머리를 돌려 자기가 출발한 조종산(祖宗山)을 바라보고 입수하는 혈이다.
세종대왕 능은 본래 서울 강남구 내곡동 대모산 아래에 있는 아버지 태종이 묻힌 헌릉(獻陵) 서쪽에 있었다고한다. 기록이 없어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으나 지금의 정보원 청사가 있는 자리로 추측된다. 우리 나라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자 효자인 세종대왕은 지관의 권유를 받은 신하들이 그곳은 명당이 아니라고 진언했으나 부모님 묘 근처보다 더 좋은 명당이 어디 있겠냐고 고집해 헌릉 서쪽에 모셨다. 풍수가 들의 말대로 세종을 그 자리에 모시고 세종의 큰아들 문종은 병으로 즉위 2년만에 승하했고, 문종의 아들 단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비명에 죽었으며, 세종의 둘째 아들 세조는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얼굴과 몸에 부스럼이 나는 병에 걸려 살이 문드러지는 고통에 시달렸으며, 세조의큰아들 의경세자(후에 덕종으로 추증 됨)는 20세에 이유 모를 가위눌림으로 죽음을 당했으며, 둘째 아들 예종은 19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1년만에 병으로 죽었다. 영릉으로 옮기기까지 19년 동안 왕이 4명 바뀌었고 옮긴 후 1년까지 합하면 무려 5명이 바뀌는 흉사(凶事)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일은 세종대왕 능이 지하에 찬물이 든 냉혈(冷穴)로 시신이 썩지 않고 생시(生屍)로 있기 때문에 일어나므로 이장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세조 때 서거정이 "천장(遷葬)함은 복을 얻기 위한 것인데 지존인 왕이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며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다가 예종이 즉위하자 신하들 사이에서 더 이상 이대로 둘 수 없다는 여론이 돌기 시작했다. 마침내 예종은 천장을 결심하고 전국에서 뛰어난 지사를 선발하여 세종대왕을 모실 명당을 찾으라고 명하였다. 여주와 이천 쪽으로 답사한 지관의 눈에 발견된 영릉 자리는 원래 광주 이씨(廣州 李氏)인 세조 때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의 묘택 이라는 주장과 한산 이씨(韓山 李氏)로 세조 때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대제학과 영중추원사를 거쳐 한성부원군(漢城府院君)에 봉해진 이계전(李季甸)의 묘택 이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예종실록에는 예종 즉위 원년(1468년) 12월 27일 호조판서 노사신, 예조판서 임원준, 한성부윤 서거정 등이여흥(여주)에 가서 이계전의 분묘 자리에 천장할 것을 정하자 임금이 정인지, 정창손, 신숙주, 한명회, 홍윤성 등과 좌의정과 육조참판 및 승지를 불러놓고 상지관(相地官)인 안효례(安孝禮)에게 물어 최종 결정을 하였다고 했다. 이인손의 묘는 이계전 묘의 좌측 청룡 능선에 있었는데 왕릉이 들어서면서 그 일대 십리 이내는모두 파묘 해야 하므로 그 때 옮겼다고 한다. 그러나 광주이씨 문중의 주장은 실록의 기록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예종이 평안도 관찰사로 있는 이인손의 장자 이극배를 조정으로 불러 세종이 편히 쉬게 할 자리를 내달라고 하자 이를 감히 거절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양보했다는 이야기다.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전해오는 전설 하나를 소개한다.
이인손의 슬하에는 이른바 오극자손(五克子孫)이라고 불리는 극배(克培), 극감(克堪), 극증(克增), 극돈(克墩), 극균(克均)의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세상을 뜨자 지관을 초빙하여 영릉 자리에다 장사를 지냈다. 지관은 이 자리를 잡아주면서 아무리 가문이 번창하더라도 제실(祭室)이나 사당(祠堂)등 일체의 건물을짖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지관의 당부대로 이 불문율은 지켜졌고 광주 이씨 집안은 이인손의 큰아들 이극배가 영의정, 둘째 극감이 형조판서, 셋째 극증이 좌참찬, 넷째 극돈은 좌찬성, 다섯째 극균은 좌의정이 되어 세칭 오군(五君)집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그 후로도 정승, 판서, 고관대작들이 줄줄이 나오는데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가문이 이렇게 번성하자 후손들은 선조의 음덕(蔭德) 때문인데 제사를 모실집 하나 없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의견을 모은 다음 묘 아래에다 커다란 제실을 지었다.
한편 세종대왕의 새로운 능 자리를 찾기 위해 선발된 지사들은 한양에서 백리 안에 있는 땅을 모조리 찾아보았으나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임금의 능은 원칙적으로 도성에서 1백 리를 넘지 않아야 하는데 이는 임금이성묘하러 행차하였다가 하루만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여주 이천 쪽으로 새로운 능자리를 찾으러 나온 안효례 일행은 며칠을 돌아다녀도 좋은 자리는 보이지 않고 더운 날씨에 몹시 지쳐 있었다. 일행이 산천이 수려하고 강물이 맑은 여주 북성산에 오르게 되었는데 갑자기 소낙비가 천둥 번개와 함께내리기 시작했다. 인가 하나 없는 산중에서 비를 피할 데는 없었다. 비속에 산 속을 헤집고 다니다 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더욱이 몸에 한기까지 들어 처량하기까지 했는데 그때 산 건너편에 보이는 재실이 눈에 들어왔다. 비를 피하기 위해 달려가다 보니 재실 위에 있는 묘가 빗속에서도 서기가 비추는 것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보면 볼수록 천하의 대 명당이었다. 지관들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한양으로 돌아와 임금에게 여주땅에 천하대명당(天下大明堂)이 있다고 아뢰었다. 곧 어명에 의해서 영릉을 이장할 자리로 결정되었고 그 자리에 있는 묘는 파내게 되었다.
영릉을 조성하기 위해서 땅을 파니 당연히 동방의 성인이 묻히는 곳이라는 뜻의 "당장동방성인(當葬東方聖人)"이라고 쓰여있는 표석이 나왔다고 한다. 이것은 권력의 힘을 빌어 남의 묘를 강제로 이장시키고 차지 한것에 대한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로 추측된다. 또 하나의 전설은 이장을 위해서 묘를 파자유골 밑에 "이 자리에서 연을 날려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고, 연이 떨어진 자리에다 이장하라"라는비기(秘記)가 나와 그대로 실행하자 연은 약 십리쯤 날아가다 떨어졌다고 한다. 그 자리에다 이장을 했음은 물론이고 지금도 그 마을은 연이 날아가다 떨어진 자리라 하여 연하리라 불리고 있다.
세종대왕을 이 자리로 모신 뒤 임금에 오른 의경세자 둘째 아들 자을산군 성종은 25년간이나 재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성군이 되었으며, 조선 왕조는 영릉의 발복으로 백년은 더 연장했다는 것이 풍수가들 사이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다. 반면에 영릉 자리를 빼앗긴 광주 이씨 이인손의 후손들은 새로운 묘 자리가 발복하기 까지 수많은 화를 당했다고 한다. 이인손의 막내아들 이극균은 좌의정에 오른 뒤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나중에는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이극균의 아들인 남양 부사 이세준과 이극감의 아들 이세좌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지고 갔다는 죄명으로 처형 당했으며, 이세좌의 아들 수원, 수형, 수의, 수정 등 4형제는 참수 당했고, 세좌의 동생 이세걸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른바 갑자사화(甲子士禍)로 광주이씨 이인손의 후손들은 30여명이 화를 당했다.
광주 이씨 집안은 쑥대밭이 되다시피 했지만 얼마 후 다시 번창하여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준경(李浚慶)을 비롯하여 선조 때 오성(鰲城) 이항복과 문장과 벼슬에서 쌍벽을 이루었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영의정을 지냈으며, 예조참판 이극기, 이조참판 이중경, 병조판서 이윤우, 판서 이원정, 대사성 이정립 등이 나왔다.
조선왕조의 정권을 100년이나 더 연장시켰다는 세종대왕의 영릉은 과연 얼마만큼의 천하명당인가? 영릉에 들어서면 굳이 풍수지리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마음이 푸근해지면서 편안함을 느낀다. 영릉을 감싸고 있는청룡 백호는 완벽에 가깝도록 혈을 감싸고 있어 보국(保局)을 이루었다. 보국 안의 명당은 잔디로 잘 조성되어 있는데 평탄하고 원만하여 혈의 생기가 조금도 흩어지지 않고 화기(和氣)로 가득 차있다. 능이 있는 혈장(穴場)은 기부포전(肌附鋪氈)하여 단단하면서도 크고 후덕하다.
능 뒤 입수도두에서 보는 주룡은 마치 거대한 용이 꿈틀거리며 여의주를 물고 금방이라도 승천할 듯 기세 왕성하여 감탄을 자아낸다. 능 앞으로 전개되는 경치는 장관을 이룬다. 영릉의 소조산이자 주산이면서 안산인북성산이 아름답게 솟아 있고 가깝고 멀리 있는 모든 산들은 하나도 배신한 것이 없이 영릉을 향해 공손하게 절하는 모습이며, 좌측의 남한강 물은 맑고 푸르게 영릉을 감아 주면서 흐르고 있다. 주위에 둘러싼 산봉우리들은 천태만상의 형상으로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는데 패철을 꺼내 놓고 삼길육수(三吉六秀) 방위를 가릴 필요가 없을 정도다.
주룡을 따라 산길로 걸어 올라가면 풍수지리서에 나와있는 용세론(龍勢論)이 어떠한 곳을 설명하고 있는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곳이다. 한절 한절 변화하는 곳마다 힘을 불끈불끈 느낄 수 있으며, 용에서 능 쪽을 보면 마치 거대한 용이 몸을 빠르게 흔들며 미끄러지듯 기어가 여의주(혈)를 입에 덥석 물고 하늘로 날아가려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주룡의 우측에는 작고 낮은 능선이 가깝게 주룡을 보호해주면서 용을 따라 가는데 백호가 청룡에 비해 다소 멀기 때문에 이를 보완해 주기 위한 것으로 천지조화의 신비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평지나 다름없는 주룡 능선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봉우리가 나오는데 영릉을 뒤에서 보호해주는 현무봉(玄武峰)이다. 초소에 올라가 주변을 살피면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산과 물이 오직 영릉 하나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영릉을 구심점으로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남쪽 북성산에서 중출(中出)로 내려온 주룡은 여주에서 이천까지 가는 42번 국도에서 과협한 다음 북쪽으로올라와 단아한 봉우리를 기봉하고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기복(起伏)과 과협을 하면서 행룡하여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봉우리를 탐랑(貪狼) 목성(木星)으로 기봉한다. 여기서 주룡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내려가다가 용진처(龍盡處)에서 북성산을 바라보고 혈을 결지한다.
이를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이라고 한다.
영릉의 혈명(穴名)을 풍수가에 따라 여러 산봉우리와 산줄기가 마치 꽃 잎 모양으로 혈을 감싸고 있으므로 목단반개형(牧丹半開形)이라 하기도 하고, 용이 마치 여의주를 물고 하늘을 나는 모습이라 하여 비룡승천혈(飛龍昇天穴)이라고 하기도 하며, 혈이 군왕이라면 주변의 산들은 왕을 배알하는 신하들로 마치 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는 모습이라 하여 군신조회형(君臣朝會形)이라고도 한다. 명당 안에서 물이 나가는 수구(水口)는 청룡과 백호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방위는 손사파(巽巳破)이며, 좌향은 계좌정향(癸坐丁向)이고 물은 좌우측모두에서 나오지만 우측 물이 혈의 향과 음양 교배하므로 우수도좌(右水倒左)하여 팔십 팔향법 중에서 최고의 길향(吉向)인 정양향(正養向)으로 좌향을 놓았다.
영릉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출발한 백두대간룡이 남하하다가 속리산에서 분맥한 다음 역으로 북상하여 죽산의 칠현산에서 금북정맥을 서쪽으로 보내고 한남정맥이 되어 칠장산(492.4M)과 용인 구봉산(403.^M), 안성 경수산, 쌍령산(502M)을 거쳐 용인 원삼면 문촌리에서 한남정맥을 기흥 부아산 쪽으로 해서 김포까지 올려 보내고, 한 능선이 다시 분맥하여 동쪽으로 문수산(404.2M), 양지 파크리조트가 있는 어두리고개를 넘어 독지봉, 건지산(411.3M), 봉의산(325M), 대덕산(308.5M)에서 중부고속도로 안성과 이천 경계지점인 사실터고개를 넘어 마국산(445.4M), 노성산(274M)으로 다시 성호 저수지 뒤로하여 장호원의 설성산(290.5M)을 만들고 다시 정수고개를 넘어 연대산(226.6M)과 금당 초등학교 쪽으로 하여 신통산(235M), 여주 가남면 대포산(251M)에서 영동고속도로를 넘어 능서면 오계리로 하여 영릉의 주산인 북성산(北城山,275M)를 만들었다.
북성산에서 낙맥한 주룡은 42번 도로에서 크게 과협한 다음 온갖 변화를 하면서 개장 천심 박환하여 방향을바꾸어 현무봉을 기봉하고 여기서 다시 방향을 크게 틀면서 커다란 용이 요동을 치듯 기세있게 전진하다 주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대혈을 결지하니 바로 영릉이다.
신륵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579~631 재위)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으며, 신륵사라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7 여주목불우조(驪州牧佛宇條)에 의하면 신륵사는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璧寺)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벽사는 고려시대에 경내의 동쪽 언덕에 벽돌로 된 다층전탑이 세워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절이 대찰(大刹)이 된 것은 나옹화상(懶翁和尙:혜근)이 입적할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난 뒤부터이다. 1379년(우왕 5) 각신(覺信)·각주(覺珠) 등이 절의 북쪽에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나옹의 초상화를 모신 선각진당(先覺眞堂)을 세우면서 많은 전각을 신축하고 중수했다. 1382년에는 2층의 대장각(大藏閣) 안에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해 만든 대장경을 봉안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년(예종 1)에 영릉(英陵:세종의 능)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472년(성종 3) 절이 확장되고 다음해에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1702년(숙종 28)에는 위학(偉學)·천심(天心) 등이 중수했다. 1858년(철종 9)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해 중수했다. 현존 당우로는 금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조사당(祖師堂:보물 제180호)·명부전·심검당·적묵당·노전(爐殿)·칠성각·종각·구룡루(九龍樓)·시왕전 등이 있다. 또한 다층석탑(보물 제225호)·다층전탑(보물 제226호)·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보물 제228호)·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보물 제230호)·석등(보물 제231호) 등과 같은 문화재들이 있다.
신륵사 삼층석탑(神勒寺 三層石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이탑은 화강암을 깎아 만든 삼층탑으로 고려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여주 신륵사 경애 강변 암반에 위치해 있다.
탑을 지탱하고 있는 제일 아랫부분인 기단부(基壇部)는 한 장의 넓적한 돌 위에 사각형의 석재를 올려놓고 그 위에 덮개에 해당하는 상대석을 덮었다. 기단부 바로 위에 놓여 있는 탑신에 해당하는 돌의 네 모퉁이에는 기둥모양이 조각되어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힘들다. 그 위에 목조 건축물의 지붕과 같은 형태로 옥개석을 덮었다. 옥개석은 기울기가 비교적 완만한 편이고, 옥개석(屋蓋石) 아랫부분에 새겨진 받침은 삼단내지 사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형태로 삼층의 탑신과 옥개석이 쌓여 있으나, 현재 삼층 탑신석은 결실된 상태이다. 탑의 맨 꼭대기를 장식하는 구조물인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다. 고려 후기 나옹화상을 화장한 장소에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그 시대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탑은 조각이 부드럽고 탑신부의 짜임새가 간결하여 고려후기 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 226호)
이 탑은 우리나라에서 남아 있는 고려 시대의 유일한 전탑으로, 높이는 9.4m이다. 이 탑의 기단부는 화강암을 사용하여 7단의 층단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탑신부는 여러 단의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는데 몸돌에 비해 지붕돌은 매우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다. 탑을 구성하고 있는 벽돌에는 이중의 반원 사이에 연주문(連珠紋)과 당초문(唐草紋)을 조각하였으나 배치가 일정하지 못하여, 신라시대의 전탑이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벽돌을 쌓은데 비해 이 전탑은 벽돌 사이를 띄워 그 사이에 면도(面土)를 발랐다. 상륜부는 전으로 만든 노반 위에 화강암으로 만든 복발, 보개, 보주 등이 얹혀있다. 이 탑의 건립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벽돌의 문양 등으로 보아 고려 시대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탑 북쪽에 있는 수리비 내용에 의해 조선 영조 2년(1726)에 고쳐 지었음을 알수 있다.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 230호)
이 비는 신륵사 대장각을 세운 내력을 새긴 것이다.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보제존자 나옹(懶翁)의 제자들과 함께 발원하여 대장경을 인쇄하고 이를 보관하기 위해 이곳에 2층의 대장각을 지었다. 비문은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인 이숭인(李崇仁)이 짓고, 글씨는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인 권주(權鑄)가 썼다. 뒷면에는 대장경 인쇄와 대장경 건립에 참여한 승려와 신도들의 명단이 적혀있다. 비는 연꽃무늬를 새긴 대리석 위에 비몸을 세우고 양 옆에 기둥을 댄 다음 그 위에 지붕모양의 개석(蓋石)을 올렸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 말기에 나타난 형식으로 조선시대 초기의 비(碑)의 형식에 영향을 주었다.
신륵사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28호)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건립되었고 나옹(懶翁)선사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 후 고려 우왕 2년(1376) 크게 중창된 유서 깊은 절이다. 영릉이 여주로 이장된 예종 1년(1469)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로 삼았고, 성종 3년(1472)부터 대규모 중창이 이루어졌다.
극락보전은 숙종 4년(1678)에 다시 지어진 이 후 정조 21년(1797)에 중수 되었다. 절의 중앙에 있는 법당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전면의 기둥과 만나는 곳에 사용되는 부재인 공포의 쇠서 끝에 연봉이 장식되어 있으나 후면 공포의 쇠서는 연봉이 없는 단순한 형태로 전면의 장엄에 치중하는 수법을 보이고 있다. 내부 중앙에는 불단위에 중생을 위하여 자비를 베푼다는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 225호)
이 탑은 우리나라에 있는 대부분의 석탑이 화강암으로 만들어진데 비하여 특이하게도 흰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높이는 3m에 이른다. 이 탑은 기단에서 몸돌에 이루기까지 각각 하나의 돌로 조립되었다. 4각형의 지대석 위에 2층 기단을 놓았다.. 하단 기단의 하대석에는 연꽃 문양이, 중대석의 각 면에는 파도 문양이, 모서리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상층 가단 각 면에는 용과 구름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탑 몸돌에는 각 층 마다 모서리 기둥(우주:隅柱)이 새겨져 있으며, 각 층의 줄어드는 비율이 완만하다. 지붕돌의 추녀는 수평으로 흐르다가 전각(轉角)에 이르러 반전(反轉)을 보인다. 팔층 지붕돌 위에 작은 탑몸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더 많은 층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가 세워진 시기는 신라시대까지 올라간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존하는 유물이 모두 교려 중엽 이후의 것이고 성종 3년(1472)에 여러 건물이 다시 건립된 것으로 보아 이 석탑도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 조사당(보물 제 180호)
신륵사는 봉미산(鳳尾山) 기슭에 자리잡은 신라시대에 건립된 유서 깊은 고찰이다. 이 절이 크게 번창한 것은 고려말의 고슨 나옹이 이 절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절도 크게 위축되었으나 예종 1년(1469)에 제4대 세종과 비 소헌황후 심씨(昭憲皇后 沈氏)의 능인 영를이 여주로 옮겨진 후 영릉의 원찰(願刹)이 되어 성종 3년(1472)부터 대규모로 다시 지어졌으며 조사당은 이 때 다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륵사의 조사당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중앙에 나옹, 좌우에 지공과 무학의 영정이 있다. 정면 1칸 측면 2칸 규모의 장대석 기단에 다듬은 초석을 놓아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에 사용되는 재료인 공포를 사용한 다포계 건물이다. 지붕가구는 오량으로 구성하였는데 대들보 위에 가로재가 정(井)자형으로 놓이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워 마루도리를 받도록 한 특수한 구조이다.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우물천장을 하였으며 뒷벽쪽으로 불단을 설치하여 지공, 나옹, 무학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신륵사 조사당은 작은 규모이지만 공포의 형태와 가구 수법이 특이하고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외관을 가지고 있는 조선초기의 중요한 건축이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보물 제 228호)
이 석종은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난 고려 말기의 승려 나옹의 사리를 모신 종 모양의 부도이다. 공민왕의 왕사였던 승려 나옹이 고려 우왕 2년(1376)에 격기도 양주 회암사에서 경상남도 말양 영원사로 가던 중 이 절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 제자들이 우왕 5년 절을 크게 다시 짓고 절 뒤의 좋은 자리를 택해 부도를 만련하였다. 부도의 기단위에 돌을 깔고 기단의 앞면과 양쪽면에 2단의 계단을 설치하였는데, 계단에 문양을 새겨 변화를 주고 있다. 그 위에 모셔진 이 석종의 모양은 완만한 타원형을 이루다가 어깨 부근에서 수평이 되었으며 맨 꼭대기에는 보주를 조각하였다. 종 모양의 부도는 통도사, 금산사, 용연사, 봉암사 등에서도 볼 수 있으나 이 부도는 특히 통도사와 금산사와 같이 일종의 계단탑 형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시데에 많이 남들어진 종 모양 부도의 선구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부도 뒤편에 있는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재 229호)의 내용에 의해 시 석종이 만들어진 시기를 고려 우왕 5년(1379)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석종의 크기는 높이 160㎝ 지름 110㎝이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앞 석등(보물 제 231호)
이 석등은 보재존자 나옹(懶翁)의 부도를 밝히기 위해 서 있다. 평면 팔각형의 구도를 지닌 이 석등은 일반적인 석등과 마찬가지로 화강석을 사용하고 잇으나 등불을 앉히는 화사석은 넙석(곱돌)을 사용하고 있다. 높다란 팔각형의 지대석위에 놓인 기단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간주석(竿株石)에는 연주문(連株紋)으로 구획을 나눈 후 그 안에 아(亞)자형의 안상(眼象)을 배치하고 있다. 상대석에도 하대석과 마찬가지로 연꽃을 새겼다. 납석으로 된 화사석은 높게 만들어졌는데, 반룡문(蟠龍文)을 새긴 원형기둥과 화창(火窓), 비천(飛天), 창방(昌榜) 등을 가득 조각하였다. 팔각형의 지붕돌의 추녀 끝은 살짝 들어 올려졌고 지붕돌 위에는 복발(覆鉢)과 보주를 놓아 상륜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 석등은 나옹이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난 뒤 부도를 세웠던 고려 우왕 5년(1379)에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후기 석등의 대표적인 양식을 보여줄뿐 아니라 조선 시대의 무덤앞에 놓이는 장명등(長明燈)의 선구적인 예로 평가되고 있다. 화사석의 높이는 67㎝ 지산 전체의 높이 193㎝이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보문 제 229호)
이 비는 고려 말의 승려 보제존자 나옹의 묘탑과 영정을 모신 진당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비다. 나옹이 말년에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이 절 북쪽 언덕에 종 모양의 부도를 세워 그의 사리를 안치하고 이를 계기로 그의 초상을 모실 진당을 짓는 등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다. 비문은 이색과 서예가인 한구가 짓고 썻는데 단정한 필체가 돋보인다. 딋면에는 건립에 참여한 제자와 시주자의 명단, 중창에 참여한 사람들의 면단이 적혀있다. 비는 2단의 지대석 위에 연꽃 무늬를 새김 비좌를 얻어 비몸을 세웠으며 비몸 양쪽에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지붕모양으로 된 개석을 얹었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 말기에 새로이 유행한 석비형식으로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 230호)도 같은 형식이다.
첫댓글 즐건 여행되시기 바랍니다..홧팅!!!
호칠 총무님도 참석하슈
회장 총무님 수고가 많아요. 미안 하지만 버스배차 시간 조정가능 한지요. 가능 하면 목동인원이 많으면 5호선 오목교 예전에 타던곳 부탁 합니다. 오목교에서 8시에 몇분이 이야기 하네요. ㅎㅎㅎ 하이쎄븐 영원하라
감사 조정합니다. 이상찬 전회장님 참석이지유
네
오목교. 수중회타운. 8시정시출발해서. 잠실로. 오도록했습니다.
유스호스텔에서의. 여흥시간에. 유명가수 2인조악단포함. 초청했습니다.서울이외. 7회친구들. 시간내서. 여주로 한번 오시지요
이태본참석 연락 받았습니다.
김수본, 조혁연, 이재상, 홍명표, 양의찬.. 참석 연락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집안 행사와 겹쳐서 지송합니다
이재상 친구가 유스호스텔에서 서바이벌게임 추가 협찬하였습니다. 후배가수 참가로 기대되는 준비 많은 친구들이 참석하여 즐건하루 보냈 시다.
범위가 너무 널버 시험나올만한곳에 언더라인이라두 쳐줘야지 오치기 다 읽어보냐?
ㅎㅎㅎ만종이말에. 똥그라미
좀. 잘라라
위에서 10줄만보면뎌 중요하지
신도림역을 1차 출발지로 지정 바랍니다. ㅋㅋ
쉐라톤서울 디큐브백화점 앞 홈플러스에서 8시에 만나지요. 주차공간도 좋고 P턴하여 영등포 경유 올림픽대로로 가면 편합니다. 저야 아무데나 거리가 같으나 1호선을 이용하는 친구들을 배려..... 1호선 타는 친구가 없나 ㅋㅋㅋ 임원진에서 결정하슈~~~ ㅎ
그것도좋겠네요.그러면 신도림역은. 동웅친구가
인원점검. 차량관리좀해주세요. 단. 정시출발해야합니다.기사연락처확인후. 조치하세요
나는. 잠실에서. 준비하것습니다.
준비는 잘되고 있습니다. 시간이 약간조정되었고 오목교역 8번출구앞 수중회타운 8시집결버스탑승해주시고 잠실 롯데호텔앞 8시30분 10시 명성생가 견학시작 11시 영능견학 12시 바베큐 겸식사가 준비되었고 오후일정도 재미있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많이 참석해주세요
성원에 감사드리며 참석함니다..
10.23.현재 집계인원 23명이며, 30명 이상 예상하고 있습니다. 많이 참석하여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합시다.